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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광동은 인조반정의 산실?
어제 성공은 했으나 무리한 강행의 후유증으로 한동안 휴식이 필요하리라는 예상을
깨고 아내는 아침부터 길 떠날 채비를 했다.
기적에 다름아닌 변화다.
4월 11일아침, 버스1번 환승으로 어제 끝낸 장미공원 앞에 도착한 시각은 10시반쯤.
구기터널을 빠져나와 3호선 불광역으로 가는 도로변이다.
10시 46분, 족두리봉으로 향하는 등산객들을 뒤로 하고 둘레길 걷기를 시작했다.
장미공원에서 잠시 주택골목길 파랑선을 따라 올라 불광사 앞 북한산생태공원 상단
지점 부터는 옛성길에 이어 구름정원길(8구간)이다.
"숲 위로 설치된 하늘다리가 있는 이 구간은 물길과 흙길, 그리고 숲길이 조화를 이
루고 있어 걷는 재미에 산을 타는 긴장감이 더해진 곳"
"탁 트인 하늘과 울창한 숲 그리고 도시풍경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구름위를 걷는 듯
한 느낌의 신비롭고 아름다운 길"
구름정원길 홍보의 글 중 일부인데 과연 그런가.
아무리 너그러우려 해도 동의가 되지 않는 길이다.
불광동 지역에 들어서면서 이미 긴 데크계단들을 오르내렸지만 이 구간에서도 시작
부터 그런 길을 더 많히 반복해서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
민원 때문에 산자락 주거지(고층아파트와 빌라) 뒤로 낸 우회로와 안전을 명분으로
대소 바위지대에 깔아놓은 데크계단들에 어떻게 찬가를 부른단 말인가.
'구름정원길'은 불광동과 진관동 지역으로 북한산지역 둘레길에서는 우이령구간을
제외하면 가장 긴 5.2km인데 인조반정의 산실인가.
불광동佛光)은 일대에 바위와 대소 사찰이 많아서 부처의 서광이 서려있다는 뜻을
담은 마을 이름이며 독박골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내력이 있단다.
인조반정 공신이며 현종 때 좌의정에 오른 탄수 원두표((灘叟元斗杓/1593~1664)가
불광동(현 각황사 사지)에 은거할 때 반정(反正)이 일어났다(1623년).
인조는 반정에 가담, 지대한 공을 세운 탄수의 덕을 기리기 위해 그가 기거했던 곳
일대를 '덕바위'라 명명했는데 독바위로 변음되어 독바위골이 되었다는 것.
돌이 많아서, 또는 항아리를 엎어놓은 형국이라 독박골로 부른다는 설도 있다..
한데, 작은 절 불광사(佛光寺)는 다른 내력(유래)을 알리고 있다.
독박골은 나라에 올리는 항아리를 굽던 곳인데 몽고족의 침략때 부처님의 백호광명
(白毫光明)이 항아리에 반사되어 침입자들이 아군의 진지로 오인해 물러갔다는 것.
호국정신이 충만한 마을이라 하여 불광리, 독박골이라 부르게 되었다나.
포토포인트인 하늘전망대에서는 멀리 일산(고양시)과 파주 일대까지 조망된다.
둘레길은 은평쪽 구기터널 상단지역의 계곡을 횡단하는 60m 스카이워크 데크길을
건너 힐스테이트고층아파트 뒷길, 정진사 입구까지 데크계단을 무수히 오르내린 후
마을로 내려선다.
인조반정과 관련해서 여러 설을 담고 있는 연신내로 내려가는 길이다.
고양군 은평면이었던 은평구 불광동 일대의 마을들은 현 종로구 세검정 등과 함께
인조반정 거사 도모와 깊이 관련있는 지역이다.
아내에게 홀로서기는 지난하고 요원한가
주택가 파란 라인(둘레길 유도선)을 따라서 도착한 불광중학교 앞에서 향로봉 쪽을
향해 P턴하듯 크게 꺾고 학교 후문 옆(왼쪽) 북한산자락 야산으로 오른다.
휴게정자와 체력단련시설이 있는 것으로 보아 둘레길 개설 이전부터 마을 주민들의
웰빙 산책로인 듯.
정자를 지나 완만하게 오르는 산길에서 약간 벼켜있는 위치에 아무렇게나 모아놓은
오석비(烏石碑) 3개가 관심을 갖게 했다.
天父爲誠 萬物天地父母 爲周旋(천부위성 만물천지부모 위주선),
地母爲誠 萬物草木 天地母 爲蘇生(지모위성 만물초목 천지모 위소생),
天地陰陽 金梅月(천지음양 김매월).
아리송한 비문으로 보아 묘비가 아니고 민중도교(道敎)계열의 주술문(기원문)인 듯
하며 은평 뉴타운 개발지역 어디에서 옮겨놓은 것 아닌지.
우로 90도 꺾는 위치에서는 안내판을 유심히 보지 않으면 직진하기 십상이겠다.
아파트단지를 피하기 위함일 것이다.
전에는 또 하나의 힐스테이트고층아파트단지와 선림사를 지났는데 아파트주민들의
민원에 굴복해(?) 선림사 뒤로 우회하도록 새 길을 만들었나.
역사는 짭으나(1966년에 터를 잡고 1991년 중창) 급성장세인 선림사는 뉴타운 덕을
크게 보고 있을 것이다.
숭유억불(崇儒抑佛)이 아닌 이 시대에 사찰이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환속(還俗)한
것이 아니라 중생이 스스로 절 가까이 다가왔으니까.(뉴타운 개발로)
선림사에도 서경보(一鵬徐京保/1914~1996)의 남북통일기원시비(詩碑)가 있다.
전국에 757개나 된다는 이 비는 하도 자주, 많이 접하기 때문인지 신선하기는 커녕
식상한데(메뉴 '통한의 휴전선' 13번글 참조) 최근 어느 자료는 더욱 놀라게 한다.
통일기원비 757개, 박사학위 126개, 저서1042권이라고.
조계종의 원로의원을 지냈으면서도 1988년에 스스로 일붕선교종을 창종해 종정이
되었고 세계불교법왕청 설립을 주도해 법왕이 된 분이다.
이미 언급했거니와 우회로와 데크계단들로 인해 둘레길은 2년반 전(2011년 11월)에
비해서 상당히 맛이 갔다.
우회로는 민원 탓으로 돌릴 수 있으나 왜 불필요한 데크를 깔아 맛을 잃게 했을까.
긁어 부스럼이며 사족(畵蛇添足)에 다름 아닐 뿐 아니라 막대한 혈세 낭비다.
선림사를 지나 쉬기를 거듭하는 아내.
기자촌배수지 앞까지의 오름이 만만치 않아서인가 점심때가 되었기 때문인가.
걸을 때는 때(식사시간)와 관계없이 거의 먹지 않는 나와 달리 공복상태에서는 전혀
걷지 못하는 아내인데 아뿔싸, 먹을 것이 없다.
어제처럼 매식할 요량이었는데 마실길 구간(진관사 입구)의 식당까지는 2km 이상
남았으니 어찌한다?
60여년의 나그네 생활에서 나홀로 체질이 되었으며, 그래서 남의 사정에 둔감한 나.
설악산의 악몽이 부실한 식사탓이었다면서도 무비유환의 과오를 거듭 범하는 아내.
이상적 부부(better half)는 상호의존관계라 하지만 반백년 가까이 함께 살아왔으며
산수(傘壽/80세)에 이른 우리에게 함께 사는 날이 얼마나 남았을까.
의도적이 아니라면 한 쪽만 남게 되고, 남겨진 쪽은 홀로 살아야 하건만 나와 달리
아내에게 홀로 서기는 지난하고 요원한가.
기자촌 유감
호의적인 젊은 한쌍의 식빵 몇조각이 아내의 허기를 달래는데 도움이 되었는가.
지루하게 느껴지는 기자촌전망대에 올랐다.
신문기자들의 집단거주지라 해서 기자촌인 큰 마을이 들어서기는 1960년대 말이다.
반c에 근 10년을 더한 세월, 내가 살아온 삼각산자락은 앞쪽인 수유지역이다.
3년쯤 뒷쪽인 불광지역 생활이 있었는데 그 때 기자촌이 만들어지는 중이었다.
박정희 군사정부가 기자들에게 파격적인 호의(?)를 베풀었다.
서대문구와 고양군의 경계인 박석고개 너머 경기도 고양군 신도면 진관외리 진관사
입구의 국유지 5만 5천여평을 시세(평당3천원)의 2/3가격(2천원)으로 제공한 것.
총칼 보다 더 힘이 세다는 펜대를 쥐고 있는 기자들에게 재갈 물렸다는 말이 세간에
회자되기도 했다.
특혜 시비가 심심찮게 일었지만 기자들은 꿀먹은 벙어리였으니까.
4.19민주화운동 세력의 입막음을 위해 삼각산 앞자락 벽지에 4.19묘역을 조성한 것
처럼 진관사소풍코스인 삼각산 뒷자락에 기자촌을 마련한 것 또한 기자들의 펜끝을
무디게 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당시(불광동 거주때), 내가 만난 무주택 신혼기자들은 경위야 어떠했든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뤄서 행복한 듯 했다.
그러나 잠시였을 뿐 생활편의시설, 상하수도, 대중교통 등 불평 불만을 쏟아냈다.
또 하나의 문제점이 드러났다.
공생활(직장)의 위계관계가 사생활(가정)에 까지 연장되는 우리 풍토에서 동일 직장
또는 동종 직종인들의 집단생활의 불편함이다.
비교적 자유분방한 직업인데도 내가 아는 한 신출기자는 이를 극복하지 못해 미구에
내 집 두고 셋방살이로 되돌아갔다.
서울로 편입되고 은평구로 분구되고 특별시의 조건을 갖춰갔으나 상대적 낙후성을
극복하지 못하다가 반c도 못되어 거창한 변혁의 바람을 맞은 기자촌.
기자가족 450여 세대로 시작했으나 기자촌에 남아있는 기자는 몇세대나 될까.
내 연배(당시)의 젊은 기자들은 대부분이 진작에 기자촌을 떠났거나 이승에 없으며
남아있다 해도 은퇴한지 오래였을 것이다.
기자촌 전망대와 기자촌 주민들의 생명줄이었던 배수지의 높고 너른 공간은 삼면이
확 트인 조망의 명당이다.
게다가 뒤로는 비봉능선의 제봉과 의상능선, 원효봉능선까지 한눈에 잡힌다.
뒷말이 많았던 저 아래 기자촌은 곧(1971) 그린벨트로 묶이어 좋다 만 꼴이 되었다.
30수년만에 뉴타운개발지구로 지정되어 공사가 진행중인데 어떤 모습으로 변할까.
아파트의 고층화에 대한 지역주민들의 불만과 반발, 과잉생산(건설)으로 인한 적체
등 여러 이유로 서울시는 진행중인 개발을 재검토하겠다고?
귀추가 주목되며, 그럼에도 은평지구 북한산자락은 뉴타운개발이라는 이름의 고층
아파트들에 광범하게 잠식당하고 있다.
다른 점은 동과 서, 앞과 뒤일 뿐 같은 북한산국립공원지역이건만 강북구가 고도를
비롯해 엄격하게 제한받고 있는데 반해 은평구의 북한산록은 온통 절단나고 있다.
진관내동,외동과 구파발동 등 1백만평이 넘는 그린벨트를 걷어낸 힘있는 손이 지역
출신 국회의원인가 구창장인가.
광해군을 생각하게 한 내시의 무덤
긴 내리막길가에는 낡은 비 하나가 서있다.
상약(尙藥)을 맡은 내시부환관의 묘가 왜 집단지역(내시길)을 벗어나 홀로 있을까.
인조15년(1637) 2월에 묻었다(葬)는데 주목할 것은 숭정연호(崇禎)의 사용이다.
숭정은 명나라 최후의 황제 의종 숭정제(毅宗崇禎帝)의 18년간 연호(1628~1644)다.
그래서 1637년은 인조15년이며 숭정10년이다.
1368년 원(元)을 먹은 주원장(朱元璋)의 새 왕조 명(明)이 1644년, 276년만에 청(淸)
의 전신인 후금(後金/만주의 여진족)에게 먹혔다.
인조반정을 주도한 서인파의 향명배금(向明排金)정책은 정묘, 병자호란을 불러왔다.
삼궤구고두례(三跪九叩頭禮)의 치욕을 겪은 인조의 조정은 공식적으로는 청나라의
연호를 사용했지만 비문이나 비공식 문건에는 여전히 명의 연호를 썼다.
청에 대한 반감으로 명이 패망한 1644년 이후에는 1645년을 숭정후1년으로 하여.
'폐모살제(廢母殺弟)'의 패륜자, 명에 대한 배은자 등 여러 이유로 반정에 의해 쫓겨
났으나 광해군의 실리 중립외교가 지속되었다면 우리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두 호란과 삼전도의 굴욕이 없었을까.
그러면 친명배청(親明排淸)의 '숭정후'라는 연호도 볼 수 없게 되었을까.
광해군에 대한 재조명 여론이 등장했기에 해보는 생각이다.
진관생태다리 옆, 진관사와 은평뉴타운을 연결하는 도로(연서로48길)에 내려서면
구름정원길이 끝나고 9구간 마실길이 시작된다.
반대쪽 도로변에는 이조4대 세종의 25자녀 중 제9왕자인 화의군(令嬪 姜氏의 소생)
이영 묘역(和義君李瓔墓域/서울시기념물제24호)이 있다.
묘소와 사당(忠景祠), 제실(祭室), 신도비(神道碑) 및 홍살문(紅箭門) 등.
세조의 이복아우지만 조카인 단종(端宗)의 복위(復位)운동에 가담했다 하여 탄핵을
받기도 한 왕족이다.
진관사 입구까지 둘레길은 도로를 따른다.
도로 양편으로 지정된 한옥마을은 2년반 전 그대로의 허허벌판이다.
이명박 시장 때로부터 강산도 변한다는 10년이 훌쩍 지났는데도 여전하다.
완성된 고층아파트들도 사람을 채우지 못해 시장이 이곳에 임시시장실을 내고 독려
했으나 별무성과라니 과연 과유불급(過猶不及/論語先進篇)이로고.
북한산둘레길에서 접근성이 가장 불편한 구간들을 다음날 하루에 마치고 싶었다.
그러려면 마실길 식당에서 식사 후 대서문 앞까지는 가야 한다.
그러나 아내의 반응은 어제와 달리 싸늘했다.
아내의 완강한 거부를 비협조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5.2km + 1.5km 정도까지 업(up)한 것만도 경이적인 사건인데.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