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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쇠하여야 그분이 흥해질 수 있습니다.(요3:22-30)
지금 어떤 예언자가 우리 사회에 나타나서“여러분! 하나님의 심판이 내리니까 저 백두산 정상에 만들어놓은 배 안으로 들어오십시오.”했다면 그 말을 따를 것입니까? 바로 여기에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역자들의 고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사양했고, 요나는 상식에 맞지 않다고 도망을 갔고, 예레미야는 울었고, 엘리야는 차라리 나를 죽여 달라고 호소기도를 했던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매우 이상한 현상이 나타납니다.
상식에 맞지 않는다고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예언자들을 야유하고 핍박하고 왕따를 시키면서도 한쪽으로는 하늘의 소리를 못 들으면 안타깝게 기다립니다.“네 소리는 듣기 싫다. 그만하라.”하면서도“그가 말을 하지 않으면 우리는 못살아.”하는 애증의 관계가 계속되는 것을 성경에서 보게 됩니다.
그 많은 예언자, 그 많은 선지자 가운데 마지막 예언자가 세례 요한입니다. 왜 마지막이라고 하는가? 세례 요한 다음에 예수님이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과 세례 요한은 동시대 사람이 된 것입니다. 모든 예언자들이 예수님이 오실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요한은 오셨다고 말한 사람입니다. 사실 요한도 상식에 맞지 않는 생활을 했다고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요한의 모습에 대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3장 4절 이하에 보면“요한은 약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저 광야 들판에서 혼자 살면서 낙타털을 몸에 걸치고 야생의 메뚜기를 생으로 잡아먹고 사는 야인 생활을 했습니다.
그런 세례 요한이 나타나서 설교를 하니까 수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로 몰려갔습니다. 왜 몰려갔는가? 이유가 있습니다. 말라기 선지자를 끝으로 예언자의 설교가 그 사회에서 끊어진지가 250년입니다. 이때를 중간기 역사라고 합니다. 말라기에서 예수님 오실 때까지 아무 소리도 안 들렸습니다.
예언자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왜 예언자의 소리가 없는가?”“메시야가 오시기 직전이라 그렇다. 이제는 메시야가 오실 것이다.”이때나 저때나 기다리고 있는 그때에 예언자의 소리가 나타났는데 보통 사람과 다른 야인이 한명 나타나서 설교를 하기 시작하니까 사람들이“그가 오셨다.”그리고 세례 요한에게 간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광야의 소리는 영혼의 잠을 자고 있는 암흑기 시대 사람들의 하나의 불빛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몰려가서“아! 당신은 우리가 그렇게 오랫동안 기다리던 메시야지요?”“아닙니다.”“아니, 그러면 뭐하는 사람입니까?”“나는 메시야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서 보내진 광야의 소리일 뿐입니다. 내 뒤에 메시야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치 못합니다.”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쉽게 말하면“나는 주연 배우가 아니라 조연 역할입니다. 옆에서 주연 역할이 돋보이게 돕는 도우미 역할자입니다.”영화를 보면 어떤 때는 불쌍해 보이는 역할도 많습니다. 남에게 계속 얻어터지는 역할도 있습니다. 계속 꾸지람을 들으며 굽실대는 역할도 있습니다. 때로는 마음에도 없는 악역을 맡을 때도 있습니다. 별 역할이 다 있습니다.
이러한 조연 배우들이 잘 해줌으로써 주연 배우가 돋보이는 것입니다. 영화문화가 다 그렇지 않습니까? 세례 요한은 지금 예수님 옆에서 예수님이 가시는 길을 닦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다 기다리고 있는 메시야를“지금 여기 오셨습니다.”하고 예수님과 자기를 비교할 때“나는 예수님과 비교하면 그분의 신발 끈을 감당치 못하겠노라.”
유대 나라 문화는 신발 문화가 양말 없이 발등을 얼기설기 끈으로 묶는 샌들입니다. 그래서 귀한 손님은 그 신발 끈을 다른 사람이 매어주고 풀러주고 먼지 묻은 발을 씻어주는 문화입니다. 세례요한은 “나는 지금 그 역할입니다.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었지만 예수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입니다.”온 나라가 지금 세례 요한에게 시선이 집중되어 있을 때“아니야. 이분은 메시야야. 지나간 세기 동안에 그렇게 하늘의 소리가 안 들렸는데 우리가 메시야를 기다렸는데 메시야다.”
그렇게 사람들이 메시야로 착각하고 세례요한한테 몰려왔는데 그때 예수님이 세례 요한한테 나타났지 않습니까? 그랬을 때 세례 요한이 뭐라고 합니까? 모든 사람들의 자기를 향한 시선을 예수님께로 돌렸습니다.“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이것이 세례 요한의 사명입니다. 여기까지입니다. 그 후로 세례 요한의 역할은 안 나오고 순교 당했습니다.“나는 이것을 위해서 왔다.”
이렇게 되니까 그 동안 세례 요한의 설교를 듣고 따르던 그 많은 군중들이 예수님한테로 갔습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 하나가 와서 세례 요한에게 쓸쓸한 보고를 합니다.
26절“그들이 요한에게 가서 이르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이 곧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세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라고 보고를 합니다.
우리는 생각하기를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가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이해가 되는데 어떻게 해서 내가 쇠하는 것으로 그가 흥하여야 하는지에 대해 의아심을 갖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흥하고 잘 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유익이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내가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 중에 어느 부분을 맡는 것이 그리스도를 위해 도움이 되지 않을까? 보통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가 쇠하여야 그리스도께서 흥하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흥하게 하려면 우리는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1. 우리는 우리의 한계를 알아야 합니다.
세례 요한은 당대 최고의 선지자였고 하나님의 사자였습니다. 인간적으로 그는 큰 인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평가하기를“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라고 할 정도의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스스로 인간임을 알았습니다. 인간이란 무엇입니까? 아담의 후손으로서 죄 가운데 태어나서 죄 속에서 죽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 아담을 통해서 죄와 사망이 이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은 역시 죄인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말하기를 예수님을 제 2 아담이라고 했습니다. 이 제 2 아담을 통해서 생명이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생명이 되신 이 제 2 아담으로 말미암아 사탄이 지배하는 죄의 세계는 깨어지고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사탄의 지배권은 박살이 났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5장 12절에서 한 사람, 한 범죄, 한 행동 등을 13번이나 연속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아담의 범죄는 죄악과 죽음이 들어오는 단 일회적 창구였습니다.
반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일회적 사건으로 우리에게 생명이 들어왔습니다. 이 두 사건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이뤄진 시공의 사건, 즉 역사적인 실제의 사건이었습니다.
이것은 단군신화나 그리스 로마 신화와 같은 한낱 허구에 불과한 신화적 이야기가 아닙니다. 역사적 사건입니다. 이 사건 때문에 우리가 모든 죄에서 벗어나 영생을 얻게 되었습니다. 죽음이 생명으로 바뀌었습니다. 마귀에게 속해 있던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이런 예수 그리스도를 안 사람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27절)고 말하였습니다. 그가 보기에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메시야로서의 권세를 받은 것입니다.
그는 이 사실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28절)라고 제자들에게 말하였습니다. 그는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자신이 가장 작은 자임을 안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자신이‘가장 작은 자’임을 알았습니다. 바울이 회심한 후 몇 해 되지 않은 A.D 59년에 그는 자기 자신을‘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사도라 침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고전15:9)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때로부터 5년이 지난 A.D 64년에 바울은 스스로‘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엡3:8) 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A.D 65년에는 자신을‘죄인 중에 괴수’(딤전1:15) 라고 하였습니다.
짐을 가볍게 실은 배는 물에서 높이 뜨고, 짐을 무겁게 실은 배는 물에서 높이 뜨지 않는 법입니다. 세례 요한과 사도 바울의 고백에서 볼 수 있듯이 은혜가 많을수록 사람들은 겸손해집니다.
태권도의 사범이 태권도의 최고의 품계라고 할 수 있는 검은 띠를 받기 위하여 자기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있는 제자에게 신중한 어조로 질문을 했습니다.“검은 띠를 수여하기 전에 너에게 질문을 하나 해야겠다.”그러자 제자는 “네, 저는 대답을 드릴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물어보십시오.”라고 자신 만만하게 대응을 했습니다.“대단히 중요한 질문이다. 검은 띠를 받게 되는 참 뜻이 뭣이냐?”하고 사범이 질문을 던졌습니다. 자신 만만한 제자는,“네, 검은 띠는 긴긴 여정의 끝을 의미합니다. 제가 그 동안 연마한 모든 노력의 대가로 얻는 적절한 보상입니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사범은 제자가 더 말을 하기를 기다렸으나 그 이상의 대답은 없었습니다. 사범은 제자의 답변이 만족스럽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말했습니다.“너는 아직 검은 띠를 받을 준비가 되어있지 못하다. 1년 후에 다시 오너라.”실망한 제자는 되돌아갔습니다. 1년 동안 자기의 기술을 더욱 연마하고 일년 후에 사범 앞에 다시 무릎을 꿇었습니다.
사범은 이번에도 똑 같은 질문 즉“검은 띠를 받게 되는 참 뜻은 뭣이냐?”라고 물었습니다. 작년보다 철이 약간 더 든 제자가 말을 했습니다.“검은 띠는 우리가 닦은 태권도의 극치이며 최고의 성취를 의미합니다.”사범은 이번에도 아무 말을 하지 않고 몇 분 동안 추가적인 대답을 기다렸습니다. 아무런 대답이 제자의 입에서 나오지 않자 그는“너는 아직도 검은 띠를 받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일년 후에 다시 오너라.”라고 말을 했습니다.
또다시 실망을 한 제자는 조용히 물러나서 일년 동안 인격수양에 노력을 경주했습니다. 일년 후에 그 제자는 또다시 사범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습니다. 이번에도 사범은 전과 똑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검은 띠를 받게 되는 참 뜻은 뭣이냐?”전보다 인격적으로 많이 성숙해진 제자가 겸손한 태도로 말을 했습니다.“검은 띠를 받는 다는 것은 시작을 의미합니다. 제 수련과 열심히 노력하는 행동과 더 높은 표준을 향해서 끊임없이 추구하는 긴 여정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그 대답을 들은 사범은 드디어 제자가 대견스러운 듯 말을 했습니다.“너는 이제 검은 띠를 받을 준비가 되었다. 자! 이제부터 참다운 일을 시작하여라.”제자는 스승이 원했던 것이 바로 겸손이라는 것을 터득한 것입니다.
우리는 세례 요한과 사도 바울처럼 겸손해야 합니다. 우리가 죄악된 인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례 요한과 사도 바울은 인간으로서의 한계와 자신의 한계 아니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한계를 알고 예수 그리스도만을 높였습니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을 바라보는 것이 최고의 영광이요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2.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여러분, 그리스도께서는 무엇하러 이 땅에 오셨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죽음을 위해 오셨습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성공하시고자 하는 것도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이렇게 성경은 역설적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저주받아 죽는 것으로 성공하셔야 되고, 그것으로 흥하셔야 되며 죽으셔야 되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우리는 무엇에 익숙해 있느냐 하면 '내가 누구를 도와줌으로 말미암아 그분의 실패와 멸망을 저지시키는 것이 돕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익숙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상식적인 생각에는 본문에서 세례 요한의 쇠함으로 예수님이 흥하여 진다면, 세례 요한이 쇠하여져서 그리스도께서 쇠하게 되는 것을 막아야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해 세례 요한이 죽음으로써 그리스도는 죽지 않고 그 다음부터 성공을 해야 일이 제대로 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께서는 세례 요한의 죽음을 밑거름 삼아서 죽으십니다. 우리가 생각해 볼 때에 차라리 그럴 바에야 세례 요한을 죽이지나 마시지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자신도 죽습니다.
바로 이 부분에서 우리가 혼동하기 쉬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흥하는 것이란 무엇을 말하는지를 바로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흥하는 것이란 다른 일이 아니고 바로 그가 죽어야 할 필요성과 그 사실을 모두에게 인식시키는 작업이라는 것입니다. 그것 이외에는 이 땅에서의 그리스도의 흥함이란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서 있을 자리를 빼앗으면 그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인류에게 일차적으로 영광과 성공의 주가 아니라, 죽어야 하는 분으로 이해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만일 주님께서 죽지 않고 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그리스도를 쇠하게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부분에 있어서 얼마나 많은 오해를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성도들이 가장 추구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의로운 것, 거룩한 것, 사랑하며 희생하는 것, 봉사하는 것, 등일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만일 이러한 것들 때문에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필요 없게 된다면 그것만큼 하나님 앞에 욕된 일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사랑하며 희생하는 빛과 소금으로서의 삶을 살 것을 요구받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대사들이요, 신령한 일과 절대 진리를 책임진 사람으로 사회에 들어갑니다.
이 때, 성도가 그와 같은 사람임을 어떻게 증명하고 나타냅니까? 그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의 짐을 대신 지고 또 지며, 의롭고 거룩하고 사랑하고 희생하고 봉사하면서 그것을 증명합니다. 여기까지는 별 문제 없이 잘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대목에 가서는 달라질 수도 있다는 것에 주의를 해야 합니다. 즉, 우리가 사랑한 것 때문에 그들이 변화할 것이라고 하는 생각입니다. 실제적으로 우리가 빛과 소금으로서의 사명을 잘 감당하는 것으로 세상 사람들이 감동을 받기도 합니다. 그런데, 왜 이 같은 생각이 문제가 되느냐 하면 내가 사랑하고, 내가 봉사한 것 때문에 그들이 변화되면 십자가가 서 있을 자리가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사실, 어떤 인간도 십자가 이외의 방법으로는 변화되지 않습니다. 또한, 십자가 없이 변화된 변화들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어떤 개인이든 단체이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무가치하게 만드는 것을 봉사라고 하지 않으며, 그리스도를 위하여 일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놀라고 경계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의외로 사랑이자 희생이며, 의 와 거룩일 것입니다. 왜냐면 만일 그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뒤로 젖히고 만들어진 의와 거룩과 사랑은 십자가와 원수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보다 무서운 것이 없을 것입니다.
슈바이처는 기독교에 역사상 가장 큰 피해를 입혔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기독교에 큰 해를 끼친 사람이 있다면 씨이저도 아니고 히틀러도 아닌 슈바이처일 것입니다. 슈바이처가 어떤 사람인 줄 아십니까? 슈바이처는 우리가 아는 대로 흑인들의 아버지요 아프리카의 횃불입니다. 우리 모두는 슈바이처를 존경합니다. 왜냐면 인간적 차원에서 윤리와 휴머니즘으로(인간애)는 슈바이처를 따라갈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일들을 기독교로 수행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그것은 그의 신학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슈바이처가 유명한 의사요, 오르가니스트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가 신학자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슈바이처는 그의 신학에서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기 위하여 오신 분이 아니다. 그는 원래 오셔서 인간들을 계몽하고 지도하여 하늘나라의 비밀들과 진리들로 인간들을 분발시키고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이룩하려고 오셨던 분이셨다. 그러나 아마도 그를 추종하지 않자 마침내 자신이 죽음의 길로 들어감으로 인하여 모든 사람을 분발시키고 촉발시키기 위하여 희생제물이 되신 분이다." 이렇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슈바이처가 자기의 주장대로 예수님을 이해했다면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없이도 의로운 자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대부분의 인간들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을 제대로 깨닫지 못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이해하기를 사회를 정화시키고 도덕성을 회복시키는 소위 사회 구원의 차원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입니다. 이렇게 이해하는 사람들은 기독교를 하나의 인간 수양과 도덕 수양을 도와주는 선량한 기관으로 여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인간 스스로는 기독교가 처음부터 끝까지 주장하는 바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 모두가 다 빛을 보지 못하는 소경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시체요 생명과 진리와 하나님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본질상 진노의 자녀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자력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진리를 알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도무지 스스로는 빠져 나올 수 없었던 저주의 자리에서 있었는데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피값으로 우리를 사셔서 우리를 끌고 나오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되어진 사람을 성도라고 그럽니다. 그리고 이것을 가리켜 복음이라 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서 휴머니즘을 끌어내고 인류애와 박애정신을 이끌어 내어 십자가 없이도 선과 의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을 기독교라고 하지 않습니다. 마16:24절을 보십시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 여기서 성도가 되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십자가 앞에 '자기'라는 단어가 붙어 있습니다. 십자가는 죽음을 말하므로 나의 십자가란 나의 죽음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따르는 성도가 되려면 자기의 죽음을 치루고 나서 따르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뜻은 그리스도를 따르는데 있어서 이 세상의 그 어느 것도 도움이 되는 것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하였던 것입니다.
자기의 죽음을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그리스도가 흥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우리의 것으로 하나님께 도움이 되리라는 혼동을 합니다. 그래서 자녀들에게 이렇게 가르킵니다.
“네가 이류, 삼류 대학을 다니면서 예수를 믿는 것과 일류 대학을 다니면서 예수를 믿는 것 중에 어느 쪽이 하나님 앞에서 더 영광스러우리라고 생각하느냐?. 그러니까 군소리 말고 고 3동안만은 집에 꼭 박혀서 공부나 열심히 해라"그럽니다.
또한, 우리는 돈이나 권세나 명예로 인해 하나님께서 도움을 받으실 줄 생각합니다. 그래서 '성도로서 돈과 권세와 명예를 가지는데 하나님께서 밀어 주셔야만 됩니다' 하면서 억지를 부리고 매달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만일 그런 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익을 보시게 된다고 생각한다면 다 집어던지고 알몸으로 하나님께 나아오십시오.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돈과 권세와 명예로 하나님께 이익을 끼쳐드리겠다고 장담해 왔는지 아십니까?
그래 놓고서 도리어 돈과 명예와 권세를 위해서라면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요구들을 식은 죽먹듯 모르는 척 해 왔다는 것을 아십니까?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런 말에 더 이상 속으시지 않습니다.
단지, 우리에게는 각기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이 있을 따름입니다. '너는 돈을 간수해라', '너는 지위를 맡아라','너는 권세를 맡아라' 이렇게 각자에게 맡겨진 책임이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의 손에 쥐어진 것으로 하나님을 위해서 내 놓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늘 자기의 죽음을 지고 그리스도를 따를 수밖에 없는 존재들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가 흥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다시 말해 나를 따라오려거든 사람의 일을 가지고 오지 마라, 너희가 갖고 있는 것 중에 나에게 쓸모 있는 것은 하나도 없으니 오직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주님, 거기 그냥 계십시오. 제가 다 알아서 할테니까요."하면서 혼자서 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복음입니까? 어느 인간이 어느 심령이 스스로 자기 속에 있는 것을 가지고 기독교를 만들 수 있느냐 말입니다. 이런 자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죽음도 필요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죽어셔야 했던 것이 너무나도 절망적인 일로 보였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쇠할 때 주님이 흥할 수 있습니다.
이제 그리스도로 하여금 흥하게 하십시오. 주님만이 앞에 나타나게 하십시오. 그리고 자기 자신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죽으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에 비로소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꽃필 것이며,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모든 심령들에게 속속히 들어 박혀 복된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잘되고 출세하고 성공하는 것으로 흥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영광스럽게 하고 흥성하게 하는 길은 세례 요한의 깨달음 같이 내가 쇠하여 죽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십자가 아래서 죽어 질 때에 비로소 진정한 순종이 있으며, 참 믿음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 앞에 나의 체면과 나의 이름과 나의 영광과 나의 자랑이 죽어지지 않는 한 주님께서는 우리의 어떠한 성공과 출세에도 관심이 없으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아직도 우리는 너무도 많이 살아 있습니다. 그러기에 더 많이 깨어져야 할 부분이 아직도 있으며, 더 낮아져야 할 부분이 남아 있다는 사실입니다.
겸손히 주님께 엎드려야 합니다. 오직 주님의 십자가만이 나를 통하여 빛나도록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나의 생각, 나의 욕심, 나의 뜻, 나의 명예를 내 몫에 태워진 십자가 아래서 온전히 죽임으로 주님께서 흥하실 수 있도록 살아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