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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남 하백원은 성리학자이면서 실학자였습니다. 화순군 이서면 야사리에서 태어난 하백원은 무등산 절경중 하나인 규봉의 남쪽마을 에서 출생했다하여 호를 규남 이라 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실학을 연구할 수 있는 가정 분위기에서 성장하였다. 그의 7대조 할아버지 하윤구는 북경에서 자명종, 천리경, 만국전도 등을 얻어온 정두원과 친교가 두터웠고, 그의 할아버지 하영청은 신경준, 홍대용 등의 실학자들과 교유가 깊었다. 그는 뛰어난 창의력으로 이땅에 과학문명의 꽃을 피워낸 과학자요 성리학자이며 실학자 였다. 20세 남짓까지 규남은 충남에 있는 송환기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이들의 학문을 이어받았던 하백원은 성리학에 대해 비판적이었으며, 천문, 지리, 산수, 자승거, 서화 등 다양한 영역에 걸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자승거를 새로이 발명하고 자명종을 개량하여 제작하였다. 자승거는 일종의 양수기로서 당시의 과학기술로 보아 매우 선진적인 수준이었다. 자명종은 홍대용 등이 제작한 것인데 미비점을 보완하여 실용단계까지 도달한 과학적 발명품이었다. 그리고 방적기를 제작하고 고려청자를 연구하기도 하였다. 그는 기하학 지식을 토대로 축척 도법을 사용한 새로운 지도제작법을 이용하여 동국지도 9폭을 제작하였다. 1폭은 우리나라 전도였고, 나머지 8폭은 8도를 각각 나누어 그린 지도였다. 이 지도는 백리를 일척으로 축소한 새로운 축척법을 활용한 것으로 지형, 지세, 산하, 교통로 등이 오늘날의 지도처럼 매우 자세하게 표시되어 있다. 이러한 발명품과 제작품들은 과학적 사고방식에 입각한 창의적인 실학 활동을 반영한 성과물들이었다. 진사시에 합격한 23세부터 53세까지 학문에 전념했는데 이 30여 년간이 본격적인 실학 연구에 몸을 바친 시기이다. 그가 만든 대표작은 시간이 되면 소리를 내던 자명종, 특이한 술잔 계영배, 펌프같이 물의 수압을 이용한 강흡기, 짐을 나르던 나무소, 타이머 같이 조정하던 화취와 약탕로, 소변 통을 밭까지 실어 나르던 거북이, 한곳에 불을 때면 여러 방이 따뜻하고 연기가 나지 않는 개량아궁이, 청기와, 유리, 벽돌 등의 제조, 대동여지도 보다 51년 앞선 동국지도, 세계지도, 천문도 등이 있으며 저서로는 7책 3권이 있다. 51세때 참봉이 되어 처음 벼슬길에 나갔고 53세때 금부도사로 전임되었으며 2년 뒤에 형조좌랑, 61세에 석성현감에 부임했으나 지방 토호들의 모함으로 충청도 보령현으로 유배되었다. 1843년 특사로 풀려나 항리로 돌아온 뒤 이듬해 고향에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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