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SDG 개혁신앙연구회) 글쓴이: 봄길
논의를 위한 숨 고르기
봄길 (2011.12.12. 14:30)
마스터스가 {영혼의 의사}에서 중생에 대한 두 가지 대립적인 관점이 있는 듯이 언급했습니다. 논쟁하는 것처럼 연속적 중생관과 순간적 중생관 말입니다. 이것이 마치 양립할 수 없는 두 가지 실체적인 중생관인 것처럼 이야기했습니다.
다행인 것은 ‘이전 논의에서 마스터스 목사가 존 머레이 중생관을 용납할 수 없는 순간적 중생관으로 비난한 것이 잘못된 근거를 가지고 그렇게 대립적 관점처럼 비난한 것 같다.’는 이해에는 어느 정도 일치가 된 듯합니다. 물론 제가 알기로 “마스터스에 대해 머레이의 미망인은 여전히 그의 견해가 오해에서 빚어진 해프닝으로 여기지 못하고 여전히 악의적 주장을 하는 것으로 다툰다.”는 얘기를 들은 바도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마스터스의 전도에 대한 열의와 관심은 전적으로 저 자신 공감을 하는 바입니다. 마스터스의 이 책은 백금산 목사님도 흔쾌히 추천한 것처럼 개혁주의적인 건전한 전도 지침서로서 적절히 사용될 때 충분히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저도 생각하는 바입니다.
문제는 그의 중생관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의 중생관이 성경이 가르치는 하나님의 은혜에 굳게 선 그런 중생에 대한 신앙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는가 하는 데 논의의 여지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오해이든 아니든 간에 마스터스는 위대한 업적을 남긴 존 머레이의 신학에서 중생관을 거의 이단적인 것으로 판단하는 잘못을 범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마스터스가 목회실천적인 면에서 건전한 전도와 구령에 대한 제안을 하는 것과는 별도로 그가 존 머레이의 중생관을 이단적인 것처럼 비판했던 그의 중생관이 성경적이고 개혁주의적인 관점과 제대로 일치하는지에 대해 살펴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일단 존 머레이를 이단시한 그의 중생관에 대해 저는 마스터스로부터 그것을 철회하거나 그의 저술을 수정했다고 하는 얘기를 들은 바가 없습니다. 이런 바탕위에서 확립된 그의 중생관은 여전히 문제를 내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신학과 목회는 역사내적 배경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마스터스 {영혼의 의사}는 제대로 읽기 위해서 이런 바탕을 반드시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될 것은 그것이 철저히 현장에서의 전도와 목회를 위한 실천적인 관점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서구사회와 그 외 세계는 문화적으로 또 세계관적으로 대단히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초대교회 당시에 유대인들과 여타 이방인들의 복음에 대한 상황이 판이한 것과 비슷한 차이라 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구약적 원리에 따라 중생(초기 중생)과 같은 신앙적 상태의 연속 안에 새로운 복음적 원리를 맞이해야하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들은 복음이 무엇인가? 하나님은 누구신가? 하나님의 약속은 무엇인가 등의 문제를 알고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 앎 속에서 그리스도에로 회심하는 것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그들이 중생한다는 것과 회심한다는 것은 같은 출발점에 있는 문제가 됐습니다. 그들은 영적 방황을 끝내야 하고 결단해야 했고 회개하고 그리스도께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그들에게 전도는 그와 같은 변화를 촉구하는 것이어야 했습니다.
이제 이런 얘기는 다음으로 미루고 {영혼의 의사} 내용 가운데 몇 가지 질문을 하겠습니다.
1. 마스터스는 회심을 중생과 동일시합니다.(57~67p) 그것은 5 단계로 이어집니다.ㅡ모든 경우에 단계 이론을 제가 많이 싫어합니다.ㅡ 그 5 단계는
1) 영적 수태
2) 각성과 죄에 대한 확신
3) 회개와 믿음
4) 칭의와 새 출생
5) 구원의 확신.
이것이 연속적 중생입니다.
수태가 이뤄지면 이어지는 나머지 4 단계가 시작이 된다고 합니다. 여기서 보면 실제로 마스터스는 수태를 회심에 포함함으로써 좁은 의미에서의 중생을 독립된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이것은 중요한 특징으로 그가 말하는 연속적 중생관 이해에 키워드가 될 것입니다.
마스터스는 회심의 1단계인 수태에 대해서만 전적으로 인간이 수동적이라고 합니다. 이어지는 남은 4 단계와 이런 특징은 불연속적입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수태가 없이는 이어지는 어떤 중생의 요소도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이 부분은 연속적입니다. 이점에서 중생의 1단계 수태는 여타와 구별됩니다. 제가 보기에 이와 같은 특이점은 좁은 의미에서의 중생(수태)를 회심 안에 묶는 것이(연속적 중생관으로) 부적절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자가모순처럼 보입니다.
마스터스는 “어떤 개혁주의자들은 1단계가 완전한 구원을 가리킨다고 주장하는 점에서 그들의 주장은 이단적이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이것은 이어지는 네 개의 단계와 수태를 구분을 짓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존 머레이가 대표적으로 그렇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개혁주의자들은 초기 중생을 완전하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그것이 좁은 의미에서, 무에서 유가 나오는 창조와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이어지는 여타 단계들과 구분해 그 나름의 완전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왔습니다. 이 점에서 ‘마스터스의 연속적 중생관이 오히려 존 머레이를 포함 대다수의 개혁주의자의 중생관을 벗어난 것이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영적 경륜에서 좁은 의미에서의 중생이 창조와 같다면 이어지는 과정은 창조의 외적 표현이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마스터스의 주장대로면 그러면 나머지 네 개의 단계는 회심의 1단계라는 초기 중생(수태)과 어떻게 연결됩니까? 이 회심이 나머지 4 단계를 이끕니까? 아니면 이어지는 네 개의 단계가 수태의 유효성을 인증하는 것입니까? 혹시 수태는 했는데 사산하거나 기형아가 나올 수도 있습니까? 적절한 설득과 구도가 없으면 말입니다. 자주 헷갈리는 부분이 이 점에 있습니다.
오히려 혹시 초기 중생이 복음의 전도로써 수동적으로 이뤄진 것같이 참된 수태라면(중생) 하나님의 그 능력적이고 신비적인 중생으로부터 당연히 나머지 4 단계가 이어진다고 볼 수는 없습니까? 물론 성령이 말씀을 통해서 거듭난 자를 자발적으로 참으로 그리하게 하신다는 의미로 말입니다.
만일 회심의 남은 과정이 그와 같은 것이라면 그것은 수태 시 전도의 말씀으로 성령이 새 생명을 불어넣는 그런 수동성과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이제 그는 새 생명이 있는 상태라서 자의적존재가 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그 생명이 회심의 5 단계라는 확신에 이르지 못한 것이라면 여전히 능동적인 영적 생명이라 할 수도 없지 않겠습니까?
성령의 은혜로 우리가 자발적인 그 무엇을 하더라도 ‘성화의 함’과 ‘믿음과 회심의 함’은 다르다고 하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성경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지만 믿음과 행함에 대해 그 성격을 달리 하는 특징을 구분해서 말하는 것이 사실이 아니겠습니까? 중생에서 동전의 양면과 같은 믿음과 회심은 오직 하나님의 선물로 그것이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님을 구분하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여기까지 살펴봅니다.
덧글 4 개
봄길 2011/12/12 14:34
주나그네 목사님이 책을 보시고 논의를 해도 늦지 않을 텐데 여기 올리는 것은 나중에 주나그네 목사님과 의논을 함에 편의를 얻기 위함입니다.
보통 개혁주의자들은 “전도는 하지 않고 입만 살았다. 머리만 비대하다.” 하는 말을 듣습니다. 거기에 비하면 마스터스 목사님은 신학적이기보다 목회적으로 대단히 존중받을 가치가 있는 분이라고 여겨집니다. 다만 우리 신앙에 중생에 대한 교리의 문제는 좀 다듬을 필요가 있겠고 그것이 형제들에게 꼭 필요한 유익이 되리라고 생각해서 논의를 열어본 것입니다.
봄길 2011/12/12 15:09
열심히 전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전도는 구원의 확신이 있을 때 또한 가능합니다. 구원의 확신은 우리의 의식과 열의를 훨씬 뛰어넘는 신적 기원으로부터 나온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어리버리한 제자들에게 주님은 요 6장에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하시는데 이것은 원리를 선언적으로만 말씀하심이 아니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6장 마지막에 주님은 제자들에게 그 확신의 근거가 바로 “내가 너희를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말씀하심으로 맺고 있습니다. 참된 확신의 근거가 주님께 있고 우리는 수동적이란 것을 왜 부족한 어떤 상태라고 스스로 생각해야 하겠습니까? 원리가 아니라 실제로 말입니다.
봄길 2011/12/12 15:10
마스터스는 의도하지 않는 것이 분명해 보이지만 그가 하나님의 능력적이고 신비적인 중생ㅡ수태라고 하던, 초기 중생이라고 하던ㅡ을 너무나 간결하고 가볍게 다루고 있는 그런 느낌은 의도와 상관없이 사소한 문제가 아닙니다. 개혁자들은 중생을 그렇게 소위 ‘연속적 중생(회심)’의 자그만 한 방점처럼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와 같은 태도는 많은 독자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확신에서 흔들리는 느낌을 갖게 하고 무언가 사람의 그 무엇에 더 쫓기는 그런 느낌을 주고 있다는 점이 심각한 문제가 될 것입니다.
그날에 2011/12/12 21:02
음미할만한 지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