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회 쿠데타는 필연이었나
金載圭체포직후 하나회 음모 꿈틀/ 박정희 독재 '軍우월주의' 배태
현역육군대령이던 朴興柱피고인을 제외한 金載圭내란목적살인사건 피고인들은 계엄 보통군법회의·고등군법회의·대법원의 3 심절차를 거쳐 처형되었다.
金載圭는 이 일련의 공판과정에서 계 엄사합수부가 주장한 박대통령의 총애를 잃고 지위가 불안해진 나머지 대통령을 시해하고 권력을 찬탈하려 했다는 범행동기를 일관되게 부정했다.
金은 부마사태등을 보고 유신체제의 한계를 느꼈으며 박대통령을 제거하 면 모든 국민으로부터 지지를 받을줄 알았다고 진술했다.
범행동기에 대한 그의 `소신'은 1979년 12월8일 오전 서울 삼각지 육군본부 군사법원 대법 정에서 열린 이사건 보통군법회의 2회공판때부터 일관되게 계속된다.
그러나 사건직후 육본 벙커에서 무장해제되고 너무나 간단하게 `대통령 시해범'으로 구금되어 버린 그의 행적을 놓고 과연, 10.26이 김이 주장하는 민주회복 거사였는지 아니면 엉성한 집권 쿠데타였는지는 의문으로 남는다.
12월8일의 제2회 공판에서 金載圭가 피고인 신분으로 처음 내뱉은 진술 은 모조리 `혁명'타령이었다.
검찰관이 鄭昇和 육참총장을 궁정동에 대기시 킨 이유를 묻자 그는 그날은 제가 혁명하기로 결심했기때문에...라고 답했고 참모총장과 혁명 초부터 접촉하기 위해서... 그날오후 준정식당에 도착 해서 혁명준비에 들어갔습니다.
.. 라는 식이었다.
이에 군재 법무사는 피고인은 자주 혁명 혁명하는데 사실만을 진술하라 고 제지했다.
김은 또 12월15일 7회 공판에서는 이렇게 진술했다.
...저는 10.26혁명이 없었다면 이나라에는 현재까지도 자유민주주의는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최대통령께서 권한대행때 국민앞에 공약했습니다.
국회에서는 이미 긴급조치 9호를 해제되었고요. 이런 일련의 행위가 10.26혁명없이 이루어 질수 있었겠는가를 생각할때 혁명의 목적은 완전히 달성되었고 그렇기때 문에 저는 죽어도 아무여한이 없습니다.
저는 죽어서는 자유민주주의를 회복시키기 위한 투사로서 영웅으로서 평가받을수 있기 때문입니다.
... 앞으로 해야할 혁명과업이 많습니다....
제 지금 기분이 전쟁에서는 승리를 한 장군이 우연한 기회에 적의 포로가 된 기분 입니다.
저는 혁명을 완성시 켜놓고 심판을 받고 있습니다.
金의 朴대통령살해를 민주회복을 위한 거사로 보려는 시각은 1심 선고 직후 제출된 김제형.이돈명.강신옥등 변호인단의 항소이유서에도 강조되고 있다.
항소이유서는 3선개헌과 부마사태등을 접한 金載圭가 박의 제거를 결심하는 과정을 상술하고 범행직후의 엉성한 태도가 집권쿠데타와는 너무 거리가 먼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더욱이 이 항소이유서에는 1심재 판 과정중 재판진행절차를 놓고 변호인단과 검찰과의 사이에 격론이 벌 어질때 재판장 뒤쪽 문으로 수많은 쪽지가 전해진 사실, 그리고 김의 악 화된 건강에도 불구 1심재판이 무리하게 강행된 사실등을 지적하고 있다.
당시 이미 12.12를 통해 실권을 장악한 신군부가 김의 처형을 위해 군법회 의에 실권을 행사한 흔적이다.
10.26에 대한 金載圭의 의견은 80년 1월24일 고등군법회의 최후진술에서 마지막으로 피력된다.
金은 여기서 유신체제의 모순과 억압.부마항쟁의 전투확산가능성을 짧게 적은뒤 민주화의 과정에서 희생은 불가피한 것이고 많은 사람의 희생보다는 한사람을 희생시킬수 밖에 없다고 밝히고 있다.
또 군사법정에 대해서는 피고인 신분답지 않게 군인여러분의 보는 눈은 지극히 국한되어 있다. ...
재판이 잘못되고 민주주의를 천연하면 혼란이 온다.
혼란이 와서 나라가 위태하면 金載圭가 그렇게 만들었다고 할것인가?... 나는 10.26사태에 처음이며 끝이다.
오직 나의 책임인 것이다. 법리의 차원을 떠나서 역사적 관점에서 심판하라 역사에 있어서 가정법은 무의미하다.
그러나 朴대통령과 車지철을 살해 한 金이 이후 냉정을 되찾고 김계원 비서실장과 정승화 육참총장에게 상황을 설명한후 일정기간 그가 주장하는 혁명의 중심에 있었다면
*계엄 선포 *긴급조치해제 *비상내각구성 *대미연락유지(대북경계관련) *계엄해 제 *개헌 *총선 *대선등의 역사전개가 가능하지 않았을까. 서울의봄은 화 창하고 80년 5월 광주는 구악청산과 민주주의 개막으로 환희에 차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金載圭는 10월26일 밤11시30분 육본 벙커2에 도착해있던 김계 원이 노재현 국방장관 정승화 총장에게 대통령 살해범은 金載圭 라고 밀고한후 27일 새벽 0시40분 체포되고 만다.
체포를 명령한 자는 정승화, 체포작전을 수립한 자는 전두환 보안사령관, 행동대장은 헌병감, 행동대원 은 보안사 요원2명이었다.
박대통령에 2발의 권총을 발사한 시각이 26일 밤7시40분, 이른바 거사는 6시간만에헝클어진채 끝나버리고 만다.
金載圭의 거사 성공에 가정법을 적용해보는 일은 그러나 서울의 봄쪽으로만 답이 나오는 건 아니다.
10.26직후 수일간의 혼돈이 어떻게 전개되었 건 간에 20년 박정희 군사독재가 진행되는 동안 남한의 군대, 특히 육군에 뿌리깊게 심어진 군 우월주의적 문화는 `서울의 봄'을 살육의 봄으로 뒤 바꾸어 놓았을 가능성이 높다.
즉 70년대 제3세계권에 만연한 군사쿠데 타가 박이후의 남한이라고 발생하지 않았을 확률은 그리 높지 않다.
그리고 그 주역들은 5.16이후 독버섯처럼 세력을 키워오던 육사출신 하나회 멤버들이었을 가능성이 절대적이다. 과연 그들은 그해 12월에 터무니없는 일을 저지른다.
위에 거론된 넘들 하나같이 개새끼 만도 못한 놈들이며 죽어 마땅할 놈들입니다.국민 위에 군림을 꿈꾸었거나 획책했던 악령의 화신들을 접하게 되니 치가 떨립니다.민주주의의 뜻조차 모르는 수구꼴통 똘마니들이 득실거리는 영남에선 국민위에 군림하기 위해 힘없는 시민에게 총칼을 마구 휘둘러 죽이고 병신 만들고 겁주
첫댓글 꼼꼼이 잘 읽고 있습니다..
약간은 알고 있는내용이지만 몰랐든 부분도 많이 있네요....^^
이 부분이 가장 묘한 부분입니다. 가장 많은 의문이 남는 부분입니다.
위에 거론된 넘들 하나같이 개새끼 만도 못한 놈들이며 죽어 마땅할 놈들입니다.국민 위에 군림을 꿈꾸었거나 획책했던 악령의 화신들을 접하게 되니 치가 떨립니다.민주주의의 뜻조차 모르는 수구꼴통 똘마니들이 득실거리는 영남에선 국민위에 군림하기 위해 힘없는 시민에게 총칼을 마구 휘둘러 죽이고 병신 만들고 겁주
어 힘이센 지도자로 행세 하였던 놈들에 대한 향수를 피력하며 시민의 권리를 스스로 포기하는 무지한 꼬라지를 너무나 자주 목격케 되다보니 이제는 암담함쯤은 아예 뛰어 넘어 내 자신 아무것도 할수없는 허탈감속에 빠져 있음을 확인케 되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