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
부처님 심사가 산란하지 않을까
한 '시코쿠헨로1.200km 팸플릿(pamphlet)' 에 소개된 정상인의 일정표에 따르면 1번
료젠지에서 37번 이와모토지까지 18일이 소요된단다.
초기에 적잖은 지연이 있었음에도 나는 18일 만에 이와모토지에서 밤을 보내고 있다.
정상 궤도에 올랐음을 뜻하며 나이(80)를 감안하면 헨로미치에서도 까미노에서 처럼
기억되고 회자될 만한 늙은이가 된 것이다.
앞으로는 일정을 단축하는 일만 남았지만 굳이 그래야 할 이유가 사라진 것 같다.
헨로미치를 마친 후 오사카까지 걸으려던 당초의 계획은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루토~오사카는 도보가 금지된 고속도로라 걸을 길이 없다니까.
여유를 되찾아 마음 편히 보내는 밤이 가고 19일째를 맞는 아침도 상쾌했다.
9월 21일(日) 아침 6시 50분에 이와모토지(岩本寺) 경내로 올라가는 발걸음도.
88영장 중에서 유일하게 5체(體)의 본존(阿弥陀如来, 観世音菩薩,不動明王,薬師如來,
地蔵菩薩)을 모신 이와모토지(高知縣高岡郡四万十町).
나라시대의 텐뾰(天平)연간, 45대 천황인 쇼무의 칙명을 받아 교키보살이 세웠다니까
724 ~749년(재위) 어간에 창건되었을 것이다.
니오경(仁王經)의 칠난즉멸(七難即滅), 칠복즉생(七福即生)의 마음으로 일곱 복사(福
寺)를 지은 것이 기원(起源)이며 이름하여 후쿠엔만지(福圓滿寺).
(불교에서 7난은 경전에 따라 달리 표현되고 있는데 여기 인왕경의 칠난은 해와 달의
운행이 도를 잃고 빛을 잃는 일월 실도난, 금성과 혜성이 변하는 성수 실도난, 큰 불이
이는 재화난, 홍수지는 우수 변이난, 태풍 부는 악풍난, 가뭄이 드는 항양난, 사방으로
부터 적병과 도적이 일어나는 악적난을 이른다.
또한, 七難의 소멸이 곧 七福이라는 것)
고닌연간(810~24). 순석(巡錫) 중이던 코보대사가 이 사찰에 5체의 본존을 각기 분리,
안치하여 5말사를 증건하고 기존 7사를 포함해 주니후쿠지(十二福寺)라 명명했는데
불운을 겪게 되었단다.
텐쇼연간 (1573 -1592 ), 병화로 소실되고 사운(寺運)이 쇠퇴했지만 재건하여 현재의
이와모토지(岩本寺)로 개명했다는 사찰이다.
메이지 초기에 폐불 훼석으로 폐사되었다가 1889년(明治22)에 재흥, 현재에 이르고.
이 사찰에서 제1의 볼거리는 단연 본당 천정일 것이다.
400여명의 화가가 그렸다는 일본화, 서양와, 수채화, 수묵화 기타 575매의 그림으로
꽉채운 천정이 보는 눈을 당황하게 하고 있다.
1978년(昭和53) 본당 신축때 전국에서 공모했다는 그림으로 화조, 풍월, 사람, 만다라
등 그림의 종합전시장에 다름 아닌데 특히 주목되는 그림은 마릴린 먼로(M. Monroe).
20c의 섹스 심벌, 아이콘이라는 미국 여배우에 부처님의 심사가 산란하지 않을까.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라는 속언이 있기는 해도.
또 하나의 볼거리는 강기텐(歡喜天).
쇼덴(聖天)이라고도 불리는 목조 원형의 진기한 당(堂)이다.
코끼리 머리에 사람의 몸을 한 수호신(불교)이며 재보(財宝)와 박애의 신이란다.
한 순간도 선망해 본 적 없는 슈쿠보(宿坊)가 이 아침에는 불교 선민(選民)의 집 처럼
보인 것은 무슨 까닭일까.
골프채를 짚고 있는 코보대사와 비이법권천
이와모토지를 나와 38번 콩고후쿠지 길에 들어선 시각은 아침 7시 15분.
37번 레이조(靈場) 소재지인 시게쿠시(茂串) 마을에서 56번국도(古市町)에 들어섰다.
37번과 38번, 두 사찰 사이는 80~85km로 시코쿠헨로 최장 구간이다.
도중에 탐방할 레이조(靈場)가 없으므로 속도감있게 진행할 수는 있으나 지루함 또한
적잖은 길일 것이다.
킨조노(金上野) 마을을 지나는 이른 아침의 56번국도가 한가롭기를 넘어 쓸쓸한 것은
등교학생마저 없는 일요일이기 때문인가.
미네노우에(峰ノ上/片坂峠下) 직전까지 5km 정도는 해발250 ~ 300m의 고원길이다.
나나코고개부터 20km가 넘는 시코쿠헨로 최장의 고원지대.
헨로미치는 길게 꾸불대는 카타사카 고갯길을 단축하려고 잠시 국도를 벗어난다.
그 지점에는 코보대사가 12지(支) 동물들(?)을 대동하고 서있다.
한데 대사의 석상 바른손이 짚고 있는 것은 쓰에(金剛杖)가 아니고 골프채다.
목에 초록 밧줄을 염주로(?) 걸어놓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골프 클럽이 지팡이를
대신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누가, 왜 그랬을까.
단순한 파적(破寂) 또는 익살일까 의도된 희화화일까.
이 시대에 탁발 또는 만행은 커녕 걸어다니려 하는 승려가 있는가.
차를 이용할 뿐더러 그 차가 시시각각 고급화 되어 가고 있지 않은가.
코보대사 시대에 차량이 없었기 망정이지 차량 홍수시대였다면 시코쿠에 대사의 '歩き
1.200km遍路道' 가 만들어졌겠는가.
당시에 골프가 대중화 되었다면 초원에서 티업(Tee up)하고 라운딩(Rounding)하는
대사를 만날 수도 있지 않았겠는가.
아침의 무료를 달래주기에 충분했다.
해발280m 카타사카고갯길에서 시만토 타운(타카오카군)은 하타군 쿠로시오 타운(幡
多郡黑潮町)으로 바뀐다.
이치노세(市野瀨)마을의 산을 넘는 헨로미치는 꽤 까다롭다.
돌고돌며 마치 에코-브리지를 건너듯 횡단하는 2개의 카타사카터널로 인해 이치노세
헨로미치(市野瀬遍路道)가 보행자에게는 위태롭고 불편한 지형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단애가 된 계곡의 불안한 다리들을 건너서 내려가는 헨로미치.
등산은 산에 오른다는 뜻이지만 하산도 포함되어 있으며 힘들기는 오를때지만 위험은
내려오는 쪽에 있음을 간과하기 일쑤다.
장거리일 때는 하산의 고통이 더욱 심각한데 여기 헨로미치는 까다로운 구간이 워낙
짧아서 다행이다.
단언하건대 코보대사 시절이 더 편했을 것이다.
하산이 완료된 이치노세 마을에서 길게 P턴하듯이 돌아온 56번국도에 다시 합류한다.
이 마을에서 사가역(佐賀驛)까지 15.3km의 헨로미치는 '사가노미치(佐賀の道)' 라는
이름도 가지고 있음을 마을 끝 휴게소에 붙어있는 홍보물이 알려주고 있다.
경찰 싸이카조(組)의 선도를 받으며 국도 한쪽을 독점해 달려오고 있는 차량 행렬.
일본 땅에서 처음 보는 VIP(?)행렬인데 시코쿠섬에서 이 정도의 대접을 받는 부류는
어떤 류의 VIP일까.
선도와 앞뒤의 호위를 받으며 스케줄대로 달리고 있는 저 중요인물(Very Important
Person)은 지금 VIP의 보람을 만끽하며 과연 자유와 행복을 누리고 있을까.
지나가는 차량행렬을 무심코 바라보고 있을 때 문득 한 글귀가 떠올랐다.
근대 일본의 법개념을 나타내는 말이라는 '비이법권천(非理法權天)'.
에도시대, 토쿠가와 막부(徳川幕府)의 이세사다타케(伊勢貞丈/1717~1784)의 말이라
하나 고대 중국의 노자(老子)에게서 나왔다는 말.
비(非/비리)는 이(理/이치)를 이기지 못하고 리는 법(法)을 이기지 못하며 법은 권(權/
당대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권은 천(天/천도:절대 힘)을 이기지 못한다는 뜻이다.
천도라는 초월적 힘을 가진 절대자를 정점으로 하여 권력은 차상개념이고 이성을 무력
하게 만드는 법(명문)은 권력의 시녀일 뿐이다.
이성이 박제된 비리는 최하위 개념이기 때문에 상위를 향해 돌진하려 하는 것 아닌가.
행렬이 요란을 피우며 지나갔기 때문인지 공허할 정도로 한가로워진 56번국도.
사람이 가장 자유로우려면 어느 카테고리(Kategorie)에 들어야 할까.
호위는 커녕 누구의 동행도 없는 나는 지금 자유를 만끽하고 있다.
홀로일 때가 최고로 자유롭다.
최고로 자유롭다는 것은 비할 수 없는 최고의 행복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내게 최고의 행복은 비이법권천, 어느 범주에도 들지 않는 것을 전제로 한다.
솟대가 왜 공원에 서있을까
헨로미치는 코부시노강(拳ノ川)과 거의 평행해서 사가타치바나가와 (佐賀橘川) 마을,
코부시노고개 휴게소와 스쿨버스 대합소 등을 지난다.
10시 55분인데 대합소의 시계는 14시 02분을 지나고 있다.
정지 상태라면 찰라일망정 하루에 2번은 맞지만 움직이고 있으니 이 시계가 맞으려면
여기가 태평양의 미드웨이,사모아 어디쯤이어야 한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떠어질 때가 있다던가.
일본인이라 해서 소홀한 데가 없겠는가.
56번국도와 메이지시대 말에 무게30kg에 길이가150cm로 100인분이 넘는 큰 장어가
잡혔다는 이요키강(伊与木川)과 토사쿠로시오철도 사이를 걷는 헨로미치.
강가를 성토하고 산자락을 절개해서 닦았기 때문에 붕괴와 낙석 위험이 있는 길이다.
일본인도 나무사랑이 지나친가.
과감한 간별, 전지를 하지 않아서 뿌리를 깊게 내리지 못하고 하늘로 치솟은 나무들이
뿌리채 뽑혀 볼썽사나문 몰골인 것은 우리와 다를 것 없으니.
이요키강((伊与木川)의 이치노노교(市野々橋)를 건넜다.
56번국도 따라 이요키역(伊与喜驛)을 지나고 쿠마이터널(熊井)을 통과하여 사가역에
당도함으로서 15.3km사가노미치가 끝났다.
다시 태평양으로 진출은 했지만 복잡한 길들이 헷갈리게 했다.
코보대사가 걸었던 길은 단조로웠을 것이다.
걸으면 곧 길이 되는 시대였지만 도처에 형성된 취락과 생업을 위해 길은 거미줄처럼
복잡해졌을 것이니까.
기수(汽水/뱀장어의 주서식지)지역인 이요키강(佐賀橋)을 다시 건넜다.
(기수란 바닷물과 민물이 섞임으로서 염분이 적은 물을 말하며 뱀장어를 비롯해 재첩,
빙어, 숭어 등 기수생물이 가장 살기 좋은 곳이다.
1등급 장어를 흔히 '풍천장어'라 하는데 風川은 지명이 아니고 기수역(汽水域/河口域/
estuary)을 의미한다)
해안에 형성된 쿠로시오 타운(舊佐賀町)이 해안도시로 제법 짜임새 있어 보인다.
방파제를 사이에 두고 잠자듯 잠잠한 안쪽과 포효하듯 하얀거품을 내뿜는 사가어항을
지나 해안공원(土佐西南大規模公園)에서 모처럼 여유로운 휴식을 취했다.
해안 전망대를 비롯해 어린이 놀이터까지 고루 갖추었으나 방부목과 시멘트를 최소로
사용해 자연을 해치지 않은 공원이 거부감을 주지 않아서 편히 쉴 수 있었을 것이다.
특히 어린이놀이터는 시설은 단조로우나 맘에 드는 이름이다.
'완빠쿠(腕白/개구쟁이)광장'이라는 이름이 시설의 빈약함을 커버하고 있다 할까.
공원에 솟대가 서있다.
솟대' 란 마을 수호신 및 경계의 상징으로 동구(洞口)에 세운 장대를 말한다
장대 끝에는 새 3마리를 만들어 달아매는데 이 공원의 장대와 새가 고급스럽다.
하늘을 날으는 새들이 위급한 재난 소식을 알려 줌으로서 큰 화를 면하게 되었다 해서
높은 장대에 조각한 새를 매달아 기리는 풍습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대동소이한 연유로 솟대 서있는 마을이 많았으나 이즘에는 보기가
드문데 일본도 우리와 유사한 연유로 솟대를 세웠는가.
한데, 마을 어귀가 아니고 왜 공원인가.
공원에 들러 태평양을 관망하거나 쉬다 가는 이들이 있기는 하나 내가 쉬고 있는 동안
헨로상은 한 사람도 없고 일요일인데도 다른 휴일과 달리 관광객도 뜨음했다.
금방 비라도 퍼부을 듯 우중충한 날씨 탓일까.
오전에는 나들이 하기 괜찮은 날씨였는데도.
시코쿠헨로에서 맞은 3번의 일요일 중 나들이객이 가장 저조한 날이다.
해안을 나란히 남하하던 56번국도(中村街道)와 쿠로시오나카무라철도(黑潮中村).
토사만의 히로하마(白浜)해안을 지나 철도는 지름길(직선로)로 달아나고 헨로미치를
대동하는 국도가 태평양 따라 이노미사키(井の岬)를 향해 남하를 계속한다.
2006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지금은 하타군 쿠로시오초(蟠多郡 黑潮町)가 된 오가타초
(大方町)의 해안마을 나다(灘)까지.
오후 들어 수상쩍던 하늘은 마침내 비를 내리기 시작했다.
시장기를 달래고 비 대비도 하기 위해서 나다어항 입구, 노변의 간이음식점(掛川たこ
燒店)에 들어갔다.
낙지를 다져 만든 즉석만두(1접시 250y)가 먹을만 했다.
시장이 반찬이라는데 맛 없는 음식 있을까마는.
오래 되었고 잘 알려진 집인 듯 점내에서 먹는 사람보다 테이크아웃(take-out)고객이
많아서 많이 바쁜 집이다.
오셋타이라며 250y 돈 받기를 사양하는 초로의 주인.
비가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는 오후 5시반, 곧 어두워질 시각에 잠자리를 걱정해 주며
바로 옆 해변의 소공원을 추천했다.
공원 안, 널직한 아즈마야(四阿/정자)가 비를 막아줄 듯 하나 바람막이가 없는 해변인
점이 망설이게 했다.
실은, 그것이 조건이 될 수 없는 상황인데 야숙 리스트가 안내하는 이다(伊田) 마을의
츠야도 칸온지(觀音寺)가 2km쯤 전방에 있음을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일본인의 '오모테나시'만은 부럽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는 시각인데도 지체 없이 빗속으로 뛰어들었다.
앞뒤에서 비춰대는 차량들의 전조등에 시달리면서 터널(이노미사키, 이다)2개를 거푸
통과는 했으나 어둠 속에 숨어버린 츠야도 칸온지.
(외등 하나도 켜있지 않은 칠흑의 사찰 주변을 맴돌았음을 다음날 아침에 알았다)
자력으로는 찾을 수 없다고 판단되어 환하게 불을 켠 민숙 타카하마의 문을 노크했다.
중년 주인남은 길건너 200여m 떨어진 칸온지까지 비오는 밤거리를 마다 않고 앞서서
안내했다.
숙박업소의 공치는 날인 일요일 밤, 텅 빈 자기 업소에서 묵도록 욕심을 부려볼 만도
할텐데.
건물 구조에 익숙한 듯 캄캄한데도 작은 절 법당의 잠긴 문을 용케도 열어주며 필요한
것 없느냐는 그.
자기의 잠정적 고객에게 딴 데로 가도록 길 안내해 주는 벌난 숙박업자에 다름 아니다.
헨로상에 대한 일본인의 오모테나시(お持て成し)가 이런 것인가.
진심으로 고마웠다.
민숙 주인도 찾아내지 못한 전등 스위치를 내가 어찌 찾겠는가.
플래시(flash)로 실내를 밝히고 자리를 펴려다가 문밖 마루로 나갔다.
불도(佛徒)도 아니면서 법당 안에서 편히 자는 것은 예(禮)가 아니라고 생각되어 비가
들이치지 않는 마루에 자리를 편 것.
배낭안에 빵이 있기는 하나 오셋타이(お接待)받은 타코가 저녁식사로 충분한 듯 하여
그냥 누워서 복기하듯 하루를 돌이켜 보았다.
순례 외적인 여러 생각을 하게 했으나 특징 없는 평범한 하루.
그러나 마감만은 특별했다.
이 상황을 한국에 옮겨놓는다면 어떠했을까.
한국의 민박업자는 어떻게 응대했을까.
마을마다 경쟁하듯 새로 지은 회관이 있는 한국.
일본 마을들의 허름한 회관에 비해 허영과 사치 끼가 나는 신축 건물들이다.
이 회관을 까미노의 알베르게처럼 활용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의한 적이 있다.
마을회관이 외지인의 경제적 관광수단으로 활용되면 마을의 이미지 제고 효과는 물론
지역의 관광지 홍보비용은 줄이고 보다 많은 관광객의 유치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외지인이 모여들면 낙수(落穗)효과 또한 절로 따르기 마련이고.
그러나, 조용한 마을에 평지풍파를 일으키는 소리라고 일축당했다.
민박업자들의 집중 포화를 어떻게 막느냐는 것.
회관을 관광객에게 개방하면 민박업이 죽기 때문이라나.
하지만 회관을 이용하는 관광객이 민박업자의 고객이 될 확률은 제로수준이다.
왜냐하면 민박업자의 노력으로 유인한 외지인이 아니고 회관의 개방으로 창출된 신규
고객이기 때문이다.
생각을 조금만 거시적으로 바꾸면 큰 이익을 얻게 되련만 철저한 미시적 사고 때문에
굴러오는 복을 차버리는 격이 되고 있다.
관광객에게 회관을 개방하고 실비 편의점을 운영해 보라.
우리나라는 IT 1등국이다.
현대판 입소문인 IT를 통해서 전광석화처럼 퍼져나가게 되고,그래서 사람이 몰려들게
되면 민박집도 절로 활황을 이루고 낙수효과는 상상을 뛰어넘을 것이련만.
대간과 정맥 종주, '서남동길' 등 벽지를 장기간 걸을 때 궂은 날에는 인근마을 이장을
찾아간 적이 여러 번 있다.
마을회관 이용을 통사정했지만 가는 곳마다 마치 모범답안으로 숙지한 듯 황당하고도
구차한 이유를 내세우며 단호하게 거절했는데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계속 그랬다.
그러나 개인의 이용과 달리 상호 이익관계, 소위 윈-윈 프로그램(win-win program)
이라면 달리 생각하고 해볼 만한 일 아닌가.
비록 구원(仇怨) 관계라 해도 이 시대에 일본인을 본받아야 할 것이 있다면 단연 '오모
테나시'가 아닐까.
('오모테나시'는 2013년 9월에 개최된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 IOC 총회에서,
"손님에 대한 일본인의 환대를 표현하는 단어"로 소개되었으며 2020년의 도쿄 올림픽
유치 성공에 기여한 단어란다)
'손님 환대'는 일본인을 본받기 전에 우리 조상들의 일상생활에 깊이 자리잡고 있었다.
나는 엄격하신 내 조부님에 저항적이었지만 깊이 추종하고 싶은 가도(家道)가 있다.
늘 식구 수보다 많은 밥을 짓도록 며느리(내 어머니)에게 당부하신 점이다.
즉시적인 통신수단을 가진 이 즈음에는 당연히 예고하지만 예전에는 불시에 나타나는
사람이 손님이었다.
그래서 손님 맞을 준비가 항상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
손님이 온 후에 새로 밥을 짓는 것은 시장한 손님에 대한 예(禮)가 아닐 뿐더러 총체적
낭비라는 것이다.
웬만한 부농가에는 사랑채(舍廊)라는 별채가 있었다.
바깥주인이 기거하기도 했지만 손님 접대용도 되었다.
우리의 선인들은 항상 손님 맞을 준비가 되어 있었음을 의미한다.
손님이 돌아간 후에 후회할 만큼 접대에 소홀하지 않고(不接賓客去後悔/朱子十悔訓)
항상 후덕한 분들이었건만 어쩌다 이 꼴이 되었을까.
2차산업(공업)이 농경사회(1차산업)의 미덕을 몰아냈다 하지만 일본은 변함이 없는데
왜 우리는 곤두박질을 쳤는가.
3차(서비스), 4차(정보) 산업에 이르기 까지 우리는 그들의 궤적을 밟았는데도 그들과
달리 타락한 까닭은?.
급격한 변혁의 산물 운운하지만 일본을 보면 그게 아니다.
지구 최초의 원폭패전국인데도 그들은 미풍양속을 버리기는 커녕 더욱 돈독하게 이어
가고 있지 않은가.
1961년, 쿠데타로 군사정부가 들어섰을 때 가장 쾌재를 불렀던 집단이 일본의 관동군
출신 장성들이었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자기네의 부하 장교가 1인자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2인자는 제2의 이완용을 자처하고 나섰다.
일본을 상전처럼 받들고 그들의 원격조종을 받으며 온 나라를 그들의 온갖 공해폐기
업의 하치장으로 만들었다.
장기집권의 덫에 걸려 명예롭지 못한 초대대통령이 되었지만 이승만의 애국 애족심은
군부 쿠데타세력과는 차원이 달랐다.
풍전등화의 형국인 임시수도 부산에서도 흔들림 없는 애국심을 말해주는 일화가 있다.
맥아더사령부가 일본인의 한국전 투입을 검토중이라는 말을 듣고 대노한 이승만.
북을 향하고 있는 대포 머리를 즉시 현해탄 쪽으로 돌리라고 했단다.
이북은 언젠가는 함께 살아가야 할 내 동포지만 일본은 영원한 적이라고 하면서.
그 때로부터 환갑의 세월이 훨씬 더 지난 지금.
비록 시코쿠헨로미치를 걷고는 있지만 이승만 시대와 다를 리 없으면서도 아주 등질
수도 없는 일본.
그러나, 고백하건대 '일본인의 오모테나시' 만은 부럽다.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