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韓龍雲 - 지조와 영원불멸의 절개, 또는 ‘임’의 시인
이재창 (시인)
萬海 한용운(1879, 7, 12~1944, 5, 9)은 충남 홍성군 서부면 용호리 태생으로 시인이며 승려, 독립운동가이다. 그의 유년시대에는 대원군의 집정과 외세의 침략 등으로 나라 안팎으로 어수선한 시기였다. 임오군란, 동학란, 갑오경장 , 그리고 한일 합방의 그 불행한 시대적 배경과 사회적 여건은 결국 그를 독립운동가로 성장시킨 간접적인 요인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910년 불교의 유신을 주장하는《조선불교유신론》저술하였으며, 한일합방이 되면서 국권은 물론 한국어마저 사용할 수 없게 되자 국치의 슬픔을 이기지 못한 채 중국으로 가서 만주지방의 곳곳 독립군 훈련장을 순방하며 독립정신과 민족혼을 심어주는 일에 전념했다. 41세때인 3․1운동때는 불교게 대표로 참여 하였다. 그 이듬해 만세사건 주동자로 체포되어 3년 옥살이를 하였다. 출옥후에도 일본경찰의 감시 아래서 강연 등 여러 방법으로 조국독립의 열변을 토하였다. 47세인 1926년 한국 현대시의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평가받는 시집《님의 침묵》을 발간하였다. 여기에 수록된 88편의 시는 대체로 민족의 독립에 대한 신념과 희망을 사랑의 노래로 형상화 하였다. 그리고 신간회 등을 결성해 광주학생의거 등 전국적인 민족운동으로 전개 추진되었다.
그는 1백60여편의 한시와 2백여편의 자유시, 5편의 장편소설과 50여편의 잡문, 그리고 시조시 30여편을 남겼다. 그의 문학의 특징은 불교사상과 독립사상이 예술적으로 결합된데서 드러난다. 자유와 평등사상, 민족사상과 민중사상으로 요약되는 불교적 세계관과 독립사상은 한용운 문학의 뼈대이자 피와 살이라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그의 문학은 불교사상, 독립사상, 문학사상이 삼위일체가 되어있다.《님의 침묵》의 시 전편이이별-갈등-희망-만남이라는 구조의 끈으로 연결된, 이른바 소멸-갈등-생성이라는 변증법적 목표를 지향하는 극복과 생성의 시편들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시 이별은 만남을 위한 대전제로서의 방법적 원리이며 사랑을 완성하는 자율적인 법칙으로 보인다. 님을 이별한 시대는 바로 침묵의 시대, 상실의 시대인 것이며, 따라서 언젠가 맞이하게 되는 만남의 시간은 참된 낙원 회복의 시대, 광복의 시대가 되며 그것을 또한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대실로 비단 짜고 솔잎으로 바늘 삼아
만고청청 수를 놓아 옷을 지어 두었다가
어즈버 해가 차거든 우리님께 드리리라.
-「우리 님」전문
사나이 되었으니 무슨 일을 하여볼까.
밭을 팔아 책을 살까 책을 덮고 칼을 갈까.
아마도 칼차고 글 읽는 것이 대장부인가 하노라.
-「男兒」전문
물이 깊다 해도 재면 밑이 있고
뫼가 높다 해도 헤아리면 위가 있다.
그보다 높고 깊은 것은 님뿐인가 하노라.
-「무제」둘째수
개화기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고 실행에 옮긴 한용운은 당시대 탁월한 민족, 민중, 시민정신을 지닌 시인이었다. 한국 근대 시성으로 불리는 그의 칭호는 20세기 말 지금까지 우리에게 심금을 울려주고 있으며 앞으로도 한국민의 가슴에 남아있을 것이란 생각을 한다.
「님의 침묵」을 비롯한 많은 자유시가 그를 그렇게 평가받게 하지만 30여편이 남아있는 그의 시조시는 학계나 문단에서의 연구 부족으로 이렇다할 주목을 받지 못했다. 남아있는 대부분의 시조가 단형시조인데, 그가 살아왔던 행적의 독립운동과 민족적 울분은 그의 시가 보여주는 사상적 배경이나 시대적 배경에 의한 형상화 작업이 시조에서는 자유시 만큼의 성과를 거두고 있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그 중에서도 위에 인용한 3편의 시조는 그의 <님>에 대한 자유시적 해석이 가능하고 그 연결선상에서 있다고 봐도 무리는 아니다고 생각된다.
「우리 님」과「무제」의 작품에 나타나는 <님>의 의미는 조국 광복을 염원하는 것과 민족정신의 부활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때를 기다리며 온 몸을 던지는 독립투사로서의 그의 애국정신에 암울한 시대의 시대정신이 잘 나타나 있다. 또 지조와 영원 불멸의 절개를 의미하기도 한다. 「男兒」는 사내가 한 번 태어나서 한 번 죽을 바에야 꼭 가야할 조국에 대한 애정과 학문에 대한 애정 사이에서 번민 하지만 결국은 문무를 겸비하여야만 대장부일 수 있고 조국을 되찾을 수 있다는 그의 시의식이 깃든 것으로 보인다. 그의 시조 종장의 끝음보는 하노라, 하리오, 하리라, 없노라 등 고시조에서 봄직한 어투들이 거슬리지만 그 당시의 문단을 주도하던 육당, 자산, 위당 등의 작품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옛시조에서 현대시조로 건너오는 과정의 산물로 봐도 무방할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