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이지 않는 항쟁과 고난>
80년 5.18 이후 신 군부는 유언비어 유포와 사회정화라는 명분 등으로 사회 각층의 민주화 인사를 탄압·격리하면서 집권을 위한 체제를 갖춰나갔고, 항쟁과 고난은 계속된다. 6월 25일 밤에는 익산군 여산면 여산리 여산 천주교회 사제관에 공수 부대원으로 보이는 괴한 4명이 침입해 박창신 주임신부와 신도 임을영(당시 26세)을 쇠파이프와 흉기로 중상을 입히고 달아났다.(당시 천주교 전주교구는 긴급 사제단 회의를 거쳐, 광주를 탈출한 김현장이 작성한 유인물 1만 매를 만들고, 교구내의 성당과 공소를 통해 신도들에게 광주의 참상을 전했다.
박 신부는 5월 21일, 이 내용을 강론하면서 옥외확성기를 통해 주민들에게 알렸다. 여산성당 마전공소에 다니던 여중생 유영희, 현미숙, 김양순은 이 유인물을 주민들에게 배포하다 충남 강경 경찰서에 잡혀갔고, 신근리 공소의 신도회장 이명구도 대전에 있는 충남계엄사로 연행됐다.) 5.18이후 광주항쟁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유인물과 시위가 번지자, 신 군부는 이들을 학교에서 쫓아냈다.
도내에서는 8월 31일 전북대 20여명, 원광대 2명, 군산대 1명이 제적당한다. 신군부의 대대적인 숙정(사회정화)으로 인해 전북대에서는 남정길, 김용성, 이석영, 변홍규 교수 4명이 해임 당했다. 8월 말에는 이리시청 직원 황세연이 친구에게 광주의 참상을 담은 편지를 보낸 것이 발각돼 2명이 구속됐다.(이리시청 직원 반공법 위반 사건) 황세연은 징역 1년을, 그에게 광주 현장을 목격한 이야기를 한 미도백화점(이도백화점의 오기일 수 있음)계장 이길야는 징역 1년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았다.
<카페 80518>
웹사이트 프리챌에는 카페 80518(http://freechal.com/80518/)이 있다. 80년 5월 그 뜨거운 날의 투쟁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여기서 만난다. 카페의 손님들은, 5.18민중항쟁전북동지회로 뭉쳐진 전주, 그리고 전북의 '동지'들이다. 카페 80518은, 그 동안 아무도 관심 두지 않았던 이들의 상처를 스스로 치유하고자, 전국의 비슷한 아픔들이 모여 게시판과 방명록을 가득 채우고 있다. 게시판과 자료실에는 우리가 지나치기 쉬웠던 역사적인 현장증언들도 눈에 띈다.
2천년 5월 김남규 씨는 "80년 5월 당시 계엄군에 의해 피해를 당한 동지 중 전북의대 침묵시위에 참여했던 이황호(당시 의대 75학번, 현 전북대 의대 교수), 그리고 임창규(당시 전산통계학과 80학번)를 찾았다"고 글을 올렸다. 5.17 휴교 조치 중에, "전주역에서 계엄군의 검문에 걸려 역 지하 방공호로 끌려 가 소총과 대검으로 폭행을 당하고 군대에 못 갈 만큼 심한 상처를 받았다"는 임창규는, "살아남은 것도 감사하고, 죽은 사람들이 너무 많기에 20년 동안 이야기도 꺼내지 못했다"고 했다.
이흥복 역시 회원들의 노력으로 찾은 인물이다. 20년을 혼자만으로 고통으로 견뎌 온 그는 2천년에야, 5월 TV프로그램에서 80년 5월의 동지들을 찾는다는 소식을 듣고 만나게 됐다. 그리고 나서 오월병이 사라져간다고 했다. 계엄군에게 잡혀가 온갖 고통을 겪은 그는, 오월만 되면 매스컴을 통해 들려 오는 소식들이 온 몸에 가시처럼 꽂혀 왔다고 했다. 80년 이전이나 이후나 그저 평범할 뿐인 그는, "80년대 중반만 해도 담당 형사가 한밤중에 불러내 공원장, 백년장 같은 전북대 근처 여관으로 불러내 '이광철이 어딨냐'는 추궁에 시달렸다"고 했다.
경찰이 그토록 찾는 이광철의 고향이 그와 같은 익산 여산이고, 집안 친척끼리 연결되는 인맥이었다는 사실을, 그는 모임을 통해서 만난 뒤에야 비로소 알았다. 2천년 2월, 이들 중 40여명은 광주항쟁 제4차 보상신청에 집단적으로 응했다. 하지만 명예회복이나 금전 보상이 아닌 역사에 공식 기록되어야 한다는 전제 아래에서 보상에 응한 것이기에, 장해등급 신청은 거부했다. 그러나 몇몇은 고통을 받았으면서도, 보상 신청에 누락돼 있다.
고영표, 이진상, 이흥복, 송병주, 김완술, 김형근, 이유숙, 김갑석, 홍정숙, 고 최순희(사망), 이런 이름들이 보상명단에서 제외돼 있다. 92년에 사망한 고 최순희는, 80년 이후로도 노동운동(후레아패션, 경성고무 등)에 종사한 투사였다. 공립 교사자격이 있으면서도 임용에서 제외 당하는 피해를 입은 그가 92년 서른 둘의 젊은 나이에 숨진 이후, 가족들의 눈물겨운 노력에도 불구하고 광주민주화운동 해당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안타까운 인물이다.
어떤 이는 스스로 부끄럽다며 회피했다. 또, 누구는 근거자료가 파기되고 없어서 그랬고, 누구는 몰라서 보상신청 시기도 놓쳤으며, 더러는 병원이나 군, 경찰에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서 그랬다. 이십여 년을 고통에 시달려 왔지만, 그저 개인의 지독한 고통일 뿐이었다.
<기타>
이상호(당시 31,고교 교사).징역 1년 선고 . 노동길(전북대 졸) 징역 1년6월. 이우봉(신흥고 3) 징역 8월. 이강희(신흥고 3) 징역 8월. 황세연(이리시청 직원) 징역 1년. 이길야 징역 1년, 집행유예 1년.
*사망자*
이세종(전북대 농 2) 80년 5월 18일 자정께 사망
임균수(원광대 한의 본2) 80년 5월 21일 전남도청 앞 피격 사망
오세현(74년 전주고 졸, 동아제약 광주영업소 근무) 5월 18일 새벽 광주 동아제약 옥상에서 피격 사망
*5.17 이후 사건 일지*
5월 17일 밤 9시 40분에 정부, 비상계엄 전국 확대, 대학 휴교 등 계엄포고 10호 발표,
5월 18일 자정 계엄 확대. 공수부대 대학 진입, 학생 연행, 첫 사망자(전북대 이세종) 발생.
5월 27일 전주신흥고등학교 시위사건 발생
6월 17일 계엄사 지명수배자 3백29명 발표
6월 25일 여산성당 박창신 신부 테러사건
7월 3일 계엄사, 지명수배자 중 2백47명은 자수, 1백44명 훈방, 3백75명은 계속 조사중이라고 발표
8월 2일 계엄사, 광주사태 관련 조사자 1백62명 훈방
8월 31일 전북대 교수 해직. 전북대, 원광대, 군산대 시위관련 학생 제적. 이리시청 직원 반공법위반 구속사건.
9월 4일 전남북 계엄분소, 광주사태 관련 1백75명 군사재판 기소 발표
*연재를 마치며*
이번 기획연재는 '80년 전주'의 지극히 일부분을 정리했을 뿐이다. 취재와 지면의 한계를 핑계로, 기록해야 할 많은 부분이 누락돼 있다. 정리한 기록마저도 그 사건, 그 상황의 전부를 담아내지 못했다. 취재에 협조해 주신 분들의 기억과 시각 또한 각자 자기가 바라 본 것, 자기가 아는 것의 한계 속에서 말해 줄 수 있을 뿐이다. 80년의 그 상황을 어느 누가 모두 알 수 있으랴. 기록을 모으면서 느낀 바로는, 각자의 체험적 증언이 좀 더 모아져야만 하겠다는 것이다.
개인의 체험과 체험이 모여질 때 하나의 커다란 이야기를 구성하게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번 연재의 한계는, 증언자들의 시각 안에 놓여 있음을 말씀드리고 싶다. 이번 연재 중에 이름이 등장한 인물이나 사진이 등장한 것에, 어느 누가 부각되거나 어느 누가 비중 있다거나 하는 식의 의미는 두지 않으려 한다. 다만 이들의 체험담과 이들의 증언이, 1980년 5월이라는 커다란 산을 바로 보는데에 도움이 되기를 기대할 뿐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체험과 참여가 소중하다는 의미에서 받아들여지기를 바란다.
더군다나 원광대생, 군산대생, 전주간호학교생들, 전주공전, 전주대생 시위 등은 담아내지 못했다. 또 당시 전주경찰서, 보안대, 헌병대에서 조사를 받고 피해를 당한 이들, 자식의 징계로 덩달아 직장을 쫓겨났거니 수배자를 숨겨 줬다가 고초를 당한 이들, 사전수배, 역과 버스정류장 등에서 학생이란 이유로 두들겨 맞고 다친 이들에 대한 기록이 빠져 있다.
5.18 이후 23년 동안 숱한 이의 뇌리에 박힌 상처와 피눈물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 5.18 광주민중항쟁을 기억하는 많은 이들도, 우리지방 전주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잘 기억하지 못한다. 몸소 그 현장을 뛰었던 이들마저도 이제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깊은 수렁 속으로 빠져들듯 피할 새 없는 시간의 흐름 속에, 바로 우리들의 벗이, 이웃이 있다. 상처는 바로 우리 삶의 현장에 깊이 아로새겨져 있다. 80년 5월은, 우리 사회의 역사 속에, 모든 국민들에게 기억되어 있어야 한다. 다시는 어느 누구도 국가의 이름을 앞세워 생명을 짓밟지 않는다는 맹세와 실천이 없다면, 이 상처는 결코 치료되지 않을 것이다.
*기사화에 급급하느라 미처 만나지 못한채 정리한 부분이 많습니다. 게시판과 자료실의 글 가운데 많은 부분을 참고하고 인용했습니다. 해당 내용마다 글 올리신 분들이나, 당사자들과 직접 만나 보고 확인 못한 부분이 많은 게 마음에 걸립니다. 죄송스럽습니다. 부실한 기록이나마 5.18민중항쟁전북동지회 회원님들, 많은 분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감히 바랄 뿐입니다.
첫댓글 원본 게시물 꼬리말에 인사말을 남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