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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學의 理想과 現實」
(趙演鉉)
어떠한 시기나 경우를 막론하고 歷史(역사)는 제 마음대로 함부로 움직여지거나 進展(진전)되어 가는 것은 아니다. 英語(영어)가 한 순간에 佛蘭西語(불란서어)가 될 수 없듯이 어떠한 한 民族(민족)이나 社會(사회)가 一朝一夕(일조일석)에 다른 어느 民族(민족)이나 社會(사회)로 변용되거나 변경되어지지는 못하는 것이다. 이는 비단 他民族(타민족)이나 他國家(타국가) 사이에서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自民族(자민족)이나 自國家內(자국가내)에서도 그러한 것이다. 어느 한 民族(민족)이나 國家(국가)가 아무리 심각한 革命(혁명)을 成就(성취)하여도 國家組織(국가조직)이나 制度上(제도상)으로는 전혀 별개의 것일 수는 있으나 그 民族(민족) 자체에 있어서는 근본적이니 변화가 일어날 수는 없는 것이다. 어떠한 民族(민족)이 자기의 國家制度(국가제도)를 전혀 별개의 것으로 革命(혁명)해 버렸다 하더라도 그것으로서 그 民族(민족)이 그 民族(민족) 이외의 것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帝政露西亞(제정로서아)를 혁명한 슬라브 民族(민족)은 蘇聯邦(소련방)에 있어서도 역시 슬라브 民族(민족)임을 면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것은 歷史(역사)가 움직이는 데는 반드시 그 裏面(이면)에 傳統(전통)이 작용되고 있을 뿐 아니라 歷史(역사)는 이 傳統(전통)이라는 것을 떠나서 제 마음대로 함부로 움직여지거나 進展(진전)되어 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歷史(역사)는 傳統(전통)의 制約(제약)을 받는다고 하는 것이 더욱 정확한 表現(표현)이 될는지도 모를 것이다. 그것은 얼마든지 자기 마음대로 어떠한 方向(방향)을 향해서든지 달아날 수 있는 現實(현실)이나 歷史(역사)가 그렇게 함부로 제 마음대로 달아나지 못하는 가장 중요한 原人(원인)이 傳統(전통)의 生理(생리)와 壓力(압력)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말한 傳統(전통)의 生理(생리)라는 것은 쉐링이 <어떤 民族(민족)의 未來(미래)의 方向(방향)은 그 民族(민족)의 神話(신화) 속에 이미 決定(결정)되어 있다>라고 말한 것처럼 어떤 民族(민족)이나 文化(문화)가 일정한 기한을 생활하고 영위해 나오는 사이에 스스로 이미 형성하고 확립해 놓은 그 民族(민족)이나 그 文化(문화)의 본질적인 生命(생명)을 의미하는 것이며, 傳統(전통)의 壓力(압력)이라는 것은 그러한 이미 형성되고 확립된 그 民族(민족)이나 文化(문화)의 본질적인 生命(생명)이나 運命(운명)이 현실적으로 얼마든지 자유로울 수 있는 자기 자신을 제약해 오는 힘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 있어서의 傳統(전통)이라는 것은 現實(현실)이나 歷史(역사)의 기본적인 勢力(세력)이며 文化(문화)의 선험적인 價値(가치)의 요약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흔히 장구한 傳統(전통)을 자랑하는 경우에 있어서도 그것이 단순히 시간상으로 오래되었다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렇게 오랜 時間(시간)동안 유지되어 온 근본적인 價値(가치)와 生命(생명)에 대한 자랑이요 자부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장구한 時間(시간)이 경과되는 사이에 發生(발생)된 무수한 侍輦(시련) 속에서 城(성)하거나 破壞(파괴)되지 않고 오히려 그로 인하여 더욱 강인해지고 더욱 순수해진 근본적인 價値(가치)와 生命(생명)에 대한 尊敬(존경)이요 경이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傳統(전통)의 基礎(기초)가 없이 어떠한 民族(민족)이나 國家(국가)가 비약적으로 고도한 文化的(문화적) 發展(발전)이나 水準(수준)이 확보되어질 수 없는 것은 자명한 이치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英語(영어)가 한 瞬間(순간)에 佛蘭西語(불란서어)가 될 수 없고 制定露西亞(제정로서아)를 혁명하나 슬라브 民族(민족)이 蘇聯邦下(소련방하)에 있어서도 역시 슬라브 民族(민족) 이외의 것이 아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文化的(문화적) 傳統(전통)이 빈곤하고 빈약한 民族(민족)이나 社會(사회)에 있어서 그들이 아무리 높은 文化的(문화적)인 포부와 욕망을 가졌다 하더라도 한 순간에 고도한 文化(문화)가 創造(창조)되어질 수는 없는 것이다. 文化(문화)란 가장 직접적으로 傳統(전통)의 제약을 받는 傳統(전통)의 산물인 것이다. 어떠한 文化的(문화적) 文化(문화)란 가장 직접적으로 傳統(전통)의 제약을 받는 傳統(전통)의 산물인 것이다. 어떠한 文化的(문화적) 創造(창조)도 傳統(전통)의 힘에 의거하지 않는 것이 없으며 傳統(전통)은 자동적으로 創造(창조)의 機能(기능)을 발휘하기도 하는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새로운 것을 創造(창조)하려는 욕망과 노력을 가져도 文化的(문화적) 傳統(전통)이 빈곤하거나 그 傳統的(전통적)인 基礎(기초)가 확립되어 있지 못할 때는 진실로 새로운 文化(문화)조차도 創造(창조)되어지지는 않는 것이다. 뿐아니라 아무리 새로운 文化的(문화적) 創造(창조)라 할지라도 그 속에 傳統(전통)의 힘이 작용되어 있지 않은 여하한 새로운 文化(문화)라는 것도 사실은 存在(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새로운 文化(문화)의 創造(창조)라고 新文化(신문화)의 意義(의의)를 자랑하는 경우에 있어서도 그것은 傳統(전통)과 떠난 전혀 새로운 文化(문화)가 아니라 새로운 現實(현실) 속에 자기의 生命(생명)과 價値(가치)를 새로이 蘇生(소생)시키고 새로이 開化(개화)시켜가는 傳統(전통)의 發展的(발전적)인 決算(결산)이요 표현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떠한 文化的(문화적) 創造(창조)라 할지라도 傳統(전통)의 필연적인 결론과 表現(표현)이 아닌 것은 없는 것이다. 中世中國(중세중국)의 文化的(문화적) 傳統(전통)이 孔子(공자)를 내놓았다면 獨逸(독일)의 近代精神(근대정신)은 칸트와 같은 인물을 필연적으로 만들지 않을 수 없었으며 서양에 基督(기독)이 나고 동양에 釋迦(석가)가 나왔다는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닌 東西洋(동서양)의 文化的(문화적) 傳統(전통)에 의거된 것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일찍이 휴우고를 가질 수 있었기 때문에 랑보와 보오들레에르를 가질 수 있었던 佛蘭西(불란서)의 近代精神(근대정신)이 20세기 文化(문화)의 究竟(구경)을 象徵(상징)하는 발레리와 같은 한 경이적인 인물을 갖게 되었다는 것도 佛蘭西(불란서)의 近代文化(근대문화)의 傳統(전통)을 떠나서는 이해되지도 않는 것이다. 발레리의 모든 著作(저작)이 東洋人(동양인)의 이해를 난해하게 하고 있는 것도 西歐的(서구적)인 近代文化(근대문화)의 傳統(전통)을 생활할 수 없었던 東洋的(동양적)인 성격에 원인되고 있는 것이다. 난해한 것은 발레리 자체가 아니라 絶頂(절정)에 도달한 西歐(서구)의 近代精神(근대정신)이 동양 사람에게는 그렇게 용이한 理解(이해)의 대상이 아니었다는 데 있었던 것이다. 傳統(전통)의 이러한 生梨(생리)를 생각할 때 어느 한 일개인의 天才(천재)만으로서 그 民族(민족)의 文化的(문화적) 創造(창조)가 쉽사리 가능해지는 것도 아니요 설사 그러한 유희한 天才(천재)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 역시 傳統(전통)의 어떠한 決算(결산)의 표현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한 개인의 能力(능력)으로서 얼마든지 모든 것을 비약적으로 發展(발전) 創造(창조)시킬 수 있는 天才(천재)마저 傳統(전통)의 産物(산물)이라면 모든 것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文學(문학)에 있어서 傳統(전통)의 힘이란 실로 결정적인 依倚(의의)를 가진 것이라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오늘 우리 文壇(문단)에서 생산되어 나오는 文學作品(문학작품)의 대부분이 우리의 文學的(문학적) 敎養(교양)이나 안목에 비추어 심한 결점과 불만만이 발견되어지는 것은 그것이 現役作家(현역작가)들의 문학적 역량의 부족이라는 개개인의 才質(재질)과 能力(능력)의 결함이라는 것보다는 그러한 우리 文段(문단)의 문학적 수준이 빈곤하고 빈약한 우리의 文學傳統(문학전통)과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상정해 볼 때 朝鮮文學(조선문학)에 대한 絶望(절망)을 느끼지 않은 사람은 아마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사실 바른대로 말해서 우리가 안심하고 의거할 수 있는 어떠한 文學傳統(문학전통)을 가졌으며 解放(해방)된 오늘의 우리에게 世界文學(세계문학)과 어깨를 겨누어 볼 수 있는 어떠한 文學的(문학적) 傳統(전통)이 작용되고 있는가를 반성해 본다면 우리 文段(문단)의 현재의 文學水準(문학수준)이 이 이상으로 불만스럽다 해도 그러한 현재의 우리 文學(문학)을 비난하거나 공격해 볼 용기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新文學史(신문학사)가 출발되어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40年을 전후한 기간이라는 것은 우리의 文學傳統(문학전통)을 준비하고 형성하기에는 너무나 짧은 時間(시간)이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創造的(창조적)인 能力(능력)을 발휘하기에는 너무나 외부적인 간섭과 制壓(제압)이 많았던 日帝(일제)의 君臨期間(군림기간)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 期間(기간)은 우리의 文學創造(문학창조)가 진실로 가능할 수 있었던 期間(기간)이 되기에는 우리는 너무나 비참한 환경에 놓여져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40年을 전후한 기간 사이에 의외로 우리는 실로 많은 文學作品(문학작품)을 생산해 놓았으나 그 수다한 作品(작품)이 未來(미래)할 우리 文學(문학)의 傳統的(전통적)인 기초가 되기에는 너무나 文學的(문학적)으로 미숙한 것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오늘 뜻있는 한 文學人(문학인)이 그의 文學的(문학적) 敎養(교양)과 그의 天才的(천재적)인 能力(능력)을 아무리 발휘하려 하여도 실질적으로 생산되어지는 그의 作品(작품)이 그의 文學的(문학적) 교양과 안목과 포부를 배신하게 되는 것은 아직도 우리의 文學的(문학적) 敎養(교양)에 만족을 줄 수 있는 作品(작품)을 생산시킬만한 文學傳統(문학전통)이 확립되어 있지 않기 때문인 것이다. 우리는 歐洲(구주)1) 나 혹은 그 외의 모든 선진한 社會(사회)의 고도한 文學的(문학적) 敎養(교양)을 思潮(사조)로서 理論(이론)으로서 자기 자신의 것으로 삼아볼 수도 있었고 고급한 傑作(걸작)을 얼마든지 감상할 수도 있었으나 그것만으로서 우리가 그에 比準(비준)할 수 있는 실질적인 作品(작품)을 생산하지 못하는 것은 그러한 모든 행위가 우리에게 傳統化(전통화)되지 않은 한 幾個人(기개인)의 觀念的(관념적)인 知識(지식)이 아니면 槪念的(개념적)인 理解(이해)에 불과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新文明(신문명)의 모든 思潮(사조)가 西歐(서구)에서 東南亞細亞(동남아세아) 일대를 휩쓸어 올 때 우리들은 西歐(서구)의 近代文化(근대문화)에 대한 傳統(전통)이 없어도 그것에 醉(취)할 수 있었고 그것을 자기의 精神的(정신적)인 衣裝(의장)으로 삼아볼 수도 있었던 것이다. 우리들은 얼마든지 보오들레에르를 흉내 낼 수 있었고 마라루메나 발레리까지도 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우리들은 그러한 西歐(서구)의 文學(문학)의 하나로서 얼마든지 이해하고 감상할 수는 있었으나 그러한 西歐(서구)의 近代文學(근대문학)이 西歐(서구)의 어떠한 傳統的(전통적) 産物(산물)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것은 西歐(서구)의 近代文學(근대문학)의 傳統(전통)을 감각하고 해득할 수 있는 우리 자신의 어떠한 近代文學(근대문학)의 傳統(전통)도 우리가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확립된 자기가 없이 대상의 진정한 의미와 내용을 理解(이해)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文學的(문학적)인 抱負(포부)나 眼目(안목)이나 敎養(교양)에 있어서는 얼마든지 西歐(서구)와 견줄 수 있고 世界文學(세계문학)에 참여할 수도 있었으나 실제의 作品(작품)은 자기가 먼저 실망하고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오늘 우리 文壇(문단)에서 生産(생산)되어 나오는 모든 作品(작품)이 우리의 文學的(문학적) 敎養(교양)에 있어서 조금도 滿足(만족)되어 지지 않는 것은 우리의 文化的(문화적)인 敎養(교양)은 보고 듣는 眼目(안목)이 있어 어느 정도 높은 水準(수준)에까지 도달되어 있다고 볼 수 있으나 우리의 文學傳統(문학전통)은 그러한 敎養(교양)이나 眼目(안목)에 만족을 줄 수 있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傳統(전통)의 推進(추진)이 없이 現實(현실)이나 歷史(역사)가 제 마음대로 함부로 進展(진전)되거나 飛躍(비약)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文學傳統(문학전통)과는 별개로 오늘의 우리 文學(문학)이 우리의 성급한 요구대로 별안간에 위대한 文學(문학)으로서 創造(창조)되어질 수 없는 것이다. 다 같이 女子(여자)의 한 一生(일생)을 作品化(작품화)해 본 플로오베에르의 「보바리夫人(부인)」과 春園(춘원)의 「그 女子의 一生」을 대조해 볼 때 前者에는 한 女性(여성)의 산 운명이 形象化(형상화)되어 있고 後者는 한 女性(여성)과 관련되는 통속적인 사건의 연결만이 취급되어 있는 것도 플로오베에르와 春園(춘원)의 文學的(문학적) 才能(재능)이나 人間的(인간적)인 誠實性(성실성)의 차이보다도 數世紀(수세기)의 傳統(전통)을 가진 佛蘭西(불란서)의 近代小說(근대소설)과 겨우 시작해 본 데 불과한 朝鮮小說(조선소설)과의 文學傳統(문학전통)의 차이에 원인된 것이라고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일찍이 괴에테, 시루겔, 헤루다링 등을 가졌던 民族(민족)이나 셰익스피어를 자랑할 수 있는 文學遺産(문학유산)을 가진 國家(국가)나 도스토예프스키나, 고골리나, 톨스토이를 가진 風士(풍사)나 랑보, 보오들레에르, 발자크 등의 巨匠(거장)을 가진 社會(사회)에 비하여 몇 사람의 文學的(문학적) 練習生(연습생)을 가진 데 불과한 朝鮮文學(조선문학)이 별안간 위대한 作品(작품)을 생산할 수는 도저히 없는 것이다. 오늘의 우리 文學(문학)이 아무리 저급하고 유치하고 졸렬해도 그것은 우리의 빈약하고 빈곤했던 文學傳統(문학전통)의 필연적인 表記(표기) 이외의 것은 아닌 것이다. 이러한 우리의 文學的(문학적) 運命(운명)이 연개인의 비상한 努力(노력)이나 才能(재능)에 의하여 그렇게 쉽사리 急進的(급진적)으로 비약될 수는 없는 것이다. 다행히 우리의 빈약한 文化傳統(문화전통)에 경이적인 創造(창조)를 可能(가능)케 할 수 있는 몇 사람의 새로운 天才(천재)가 輩出(배출)된다고 해도 그것은 돌연히 우발적으로 출현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天才(천재)를 造成(조성)시킬 수 있는 어떤 傳統的(전통적)인 必然性(필연성)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바라볼 때 우리들은 朝鮮文學(조선문학)에 대해서 당분간은 절망적임을 면할 수 없는 것이다. 한 사람의 호우머도 단테도 셰익스피어도 괴에테도 도스토예프스키도 랑보다 발자크도 플로오베에르도 갖지 못한 우리의 文學傳統(문학전통)이 언제 그와 比準(비준)할만한 傳統(전통)을 形成(형성)함으로써 매일매일 그 면모를 변용해 가는 世界文學(세계문학)과 어깨를 겨눌 수 있을 것인가. 이러한 것을 생각할 때 우리의 文學(문학)에의 熱情(열정)은 스스로 약화되고 그 적극성은 상실되어 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文學傳統(문학전통)의 빈곤이 반드시 절망적인 運命(운명)만이 아니라는 것은 傳統(전통)이란 단순히 時間的(시간적)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이 그 民族(민족)의 創造的(창조적)인 能力(능력)에 左右(좌우)되는 것임을 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런 위대한 傳統(전통)을 자랑할 수 있는 民族(민족)이라 할지라도 그 民族(민족)이 創造的(창조적)인 能力(능력)을 喪失(상실)할 때는 그의 위대한 傳統(전통)도 一朝一夕(일조일석)에 무너져 버릴 수 있는 것이며 아무리 傳統(전통)이 빈약하고 빈곤해도 그 民族(민족)의 創造力(창조력)이 왕성할 때는 그의 빈약한 傳統(전통)은 새로이 풍부하게 빛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傳統(전통)이란 自動的(자동적)으로만 발전되어 나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傳統(전통)을 유지하고 있는 그 民族(민족)의 創造力(창조력)과 함께 언제나 그 生命(생명)이 유지되는 거의 한 유물에 지나지 않으며 傳統(전통)의 배경을 갖지 못한 創造力(창조력)이란 또한 단순한 血氣(혈기)에 지나지 못하는 것이다. 傳統(전통)과 創造力(창조력)은 서로 떠날 수 없는 동일한 혈육 관계에 있다고 할 것이다. 이것은 傳統(전통)이라는 것이 어떤 고정된 內容(내용)이나 世界(세계)가 아니라 새로운 현실과 함께 不絶(부절)히 變容(변용)되고 발전될 수 있는 現實(현실)이나 歷史(역사)의 기본적인 生命(생명)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傳統(전통)이란 단순한 과거로부터의 축적된 價値(가치)나 力量(역량)만이 아니라 오히려 未來(미래)로 향해서 理念(이념)하는 산 生命(생명)이요 움직이는 힘인 것이다. 이러한 傳統(전통)에 대한 진정한 覺悟(각오) 아래에서 우리의 文學(문학)을 考察(고찰)하여 볼 때 우리는 빈약하고 빈곤한 우리의 文學傳統(문학전통)에 대해서 절망하기 전에 그러한 빈약하고 빈곤한 우리의 文學傳統(문학전통)을 새로이 풍부하게 開花(개화)시키기 위해서 우리의 民族的(민족적)인 創造力(창조력)을 强化促進(강화촉진)시키지 않을 수 없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露西亞(노서아)2) 의 現代文學(현대문학)이 百年(백년)이라는 짧은 其間(기간) 사이에 도스토예프스키니 톨스토이니 푸시킨이니 꼴키니 고골리와 같은 위대한 文學(문학)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는 것은 분명히 슬라브 民族(민족)의 방대한 創造力(창조력)에 원인된 것이었던 것이다. 近代文學(근대문학)의 傳統(전통)이라고는 조금도 갖지 못했던 슬라브 民族(민족)이 불과 一世紀(일세기)남짓한 사이에 世界文學史上(세계문학사상)에 가장 커다란 文學的(문학적) 業績(업적)을 남겨 놓았다는 것은 이 民族(민족)의 경이적인 創造力(창조력)의 결과가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앞으로 우리가 半世紀(반세기)의 文學的(문학적) 영위 속에서 露西亞(노서아)의 近代文學(근대문학) 水準(수준)을 어느 정도로 넘어설지는 모르나 露西亞(노서아)의 近代文學(근대문학)은 우리의 자신 있는 創造力(창조력)을 시키기에 충분한 것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百年(백년)사이에 푸시킨을 내고 도스트예프스키를 내고 꼴키를 내고 톨스토이를 내놓을 수 있었다면 지나간 우리의 40年을 전후한 新文學(신문학) 創設(창설)의 시기도 그렇게 짧은 것이었다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40年의 기간이 自由(자유)와 創造力(창조력)이 구속되고 제약된 불행한 세월이었다는 것으로서 우리가 간신히 자위할 수 있는 구실을 가질 수 있다면 지금부터 전개되어야 할 우리의 새로운 文學的(문학적) 實踐(실천)은 우리의 創造力(창조력) 여하에 따라 우리 文學(문학)의 決定的(결정적)인 변모를 초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 있어서 우리의 빈곤한 文學(문학)전통에 실망하거나 절망하기 전에 우리의 民族的(민족적)인 創造力(창조력)을 十二分(십이분)으로 발휘하고 행사하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이다. 依據(의거)할 文學傳統(문학전통)을 갖지 못한 우리가 우리의 文學的(문학적)인 創造力(창조력)으로서만 모든 것을 해결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치명적일는지는 모르나 한편 우리의 자랑할 수 있는 영광의 하나가 되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전집』?? 19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