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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예전승
민속극
북청사자놀이는 함경남도 북청군 출신자들이 1950년대 초반에 월남하여 속초에 정착하면서 속초사자놀이가 되었다. 함경도 사람들이 점차 집단화되자 1958년 청호동에 거주하던 김수석 씨가 처음 사자탈을 만들었으며, 1959 년 5월 2일 속초에서 북청동향 친목계를 만들면서 북청사자놀음 공연단 결성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북청도청 계칙 및 계원명단의 계요는 다음과 같다. 계칙은 전체 8장 23조로 되었는데, 제1장 총칙에서는 '북청도청을 만들어 사무실로 쓰고, 계원간의 우의와 친애협동을 목적으로 한다'고 되어 있다. 2장 조직에서는 계원자격으로 당시 속초읍내에 거주하는 북청군민으로 하고 계원수는 36명으로 정했다. 3장은 권리와 의무로서 매월 20일에 월례회의를 갖는다고 하였고, 4장의 역원에서 계장1, 부계장1, 총무1, 재무1, 서기1, 간사1, 의식부2, 연예부2, 장의부2, 고문 약간명인데 중요한 것은 연예부에서 북청사자놀음에 관한 공연계획을 주무로 한 것으로 보인다. 5장에서 정기총회는 매년 3월 20일, 월례회는 매월 20일로 정해 고령자 순위로 자택에서 소집했다. 6장은 부조사업, 7장은 자금 및 운영, 8장은 상벌 그리고 부칙으로 되어 있다. 1959년 당시 계원명단의 나이 주소를 보이면 다 음과 같다.
이정기(李貞基, 63.북청읍 외서리), 오경희(吳景熙, 59.내리), 김남용(金南龍, 54.남리), 김수석(金壽石, 52.죽평리), 이창희(李昌熙, 52.거산면 평리), 이호영(李浩永, 51.북청읍 외서리), 전삼묵(全三默, 49), 방학복(方鶴福, 48.북청읍 서리), 박진한(朴鎭漢, 48.신북청면 신상리), 이재섭(李在燮, 47.신포면 육구), 최순재(崔舜在47.하차서면 상신리), 이필영(李泌泳, 48.북청읍 상동리), 이완섭(李完燮, 46.남리), 박성철(朴成哲, 46.서리), 방석홍(方錫洪, 45.서리), 양계건(梁桂乾, 45.덕성면 동압내 리) , 김하륜(金河侖, 45.신북청면 양가리), 노윤무(魯允武, 45.덕성면 동압내리),박유형(朴庾亨, 43. 상차서면 방촌리), 유홍렬(劉弘烈, 43.덕성면 주의동리), 이종욱(李鍾旭, 43.상차서면 엄동리), 방석재(方錫在, 43.북청읍 서리), 이종준(李鍾俊, 42.상동리), 어중용(魚重龍, 42.날미), 마방섭(馬房燮, 41.가회면 봉의리), 김홍천(金洪川, 40.가회면 봉의리), 이종호(李鍾浩, 40.북청융 서리), 민병국(閔丙國, 39.거산면 하입석리), 최승윤(崔乘潤, 39.건자포), 김효환(金孝煥, 38.신포면 신포리), 김선천(金先川, 38.북청읍 상동리), 이오섭(李奧燮, 38.서리), 오동술(吳東述, 36.죽평리), 신겸(申謙, 36.죽평리), 마유득(馬裕得, 34.가회면 봉중리), 임용천(林龍泉, 33.북청읍 북삼리) 등이다. 참고로 1943년도 통계에 의하면 북청군은 총 38.916호에 총인구는 224.027명이었고, 8.15 당시에는 약 28만명의 인구로 늘었다. 당시 북청군은 3읍 11면 123리였다. 참고로 상세하게 언급하면 다음과 같다. (함경남도지, 1988, 증보판,901쪽 참조)
①북청읍:내리, 남리, 동리 , 죽평리 , 동흥리 , 남흥리, 중평리, 당포리, 북상리, 불리,
장항리 (12개리)
②신북청면:신북청리, 동중리, 동상리, 신상리, 무우대리, 하호리, 양천리, 초리, 보천리 (9개리)
③신창읍:신창리, 만춘리 , 경안대리, 승평리, 토성리, 덕음리, 신풍리, 보청리 , 장호리 , 예원리 (10개리)
④가회면:중리, 나흥리, 마산리, 봉의리, 초리(5개리)
⑤하차서면:상신흥리, 월산리, 덕우대리, 하신흥리, 월근대리, 임자동리(6개리)
⑥상차서면:상돌리, 신태리, 중돌리, 하돌리, 수서리, 엄동리 (6개리)
⑦거산면 :평리, 상입석리, 상세동리, 포항리, 하입석리, 하세동리(6개리)
⑧후창면 :통이리, 오평리, 당우리, 일리, 이리, 동평리, 부동리(7개리)
⑨성대면 :창성일, 수서리, 조양리, 양평리, 보성리, 칠동리, 평리(7개리)
⑩이곡면 :초리, 제초리, 제중리, 제상리, 중리, 인동리, 상리(7개리)
⑪신포읍 :신포리, 문암리, 중흥리, 석정리, 연호리, 도서리, 토성리, 육대동리,
육대서리, 중보주리, 상보주리, 신호리, 노평리 (13개리)
⑫덕성면 :수동리, 서장내리, 동장내리, 만항리, 수서리, 니망지리, 서흥리, 어은리,
주의동리, 죽전리 (10개리)
⑬속후면 :서호리, 창성리, 오매리, 간평리, 남호리, 서원리, 현금리, 강상리, 의호리,
도리, 상창리, 하천리, 나호리, 연주리, 광천리, 용전리(16개리)
⑭양화면 :유호리, 모가대리, 창상리, 후호리, 호만포리, 부창리, 양화리, 남안대리 ,
동리(9 개리 )
위에서 북청동향친목계에서 나타났듯이 함경도 피난민들에 의해 북청사자 놀음이 재현되었는데, 1966년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참가하여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에는 이미 13세때부터 사자춤을 추었고, 19세에 애원성을 잘 불렀던 죽평리 출신 김수석 씨가 속초에 살고 있었으므로 북청군민회에서는 이 분을 중심으로 출연단을 구성하였다. 이것을 계기로 북청사자놀음이 남한에서 공연되었고, 속초에서는 구체적인 전승을 위해 북청도청을 만들었고 당시의 친목계 36명이 참여하였다. 북청도청 기금마련을 위해 1957년 정월대보름날 김수석 씨가 속초에 정착한 다음해 북청사자놀음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자탈과 퉁소, 복식 등을 새로 만들어 사자춤을 추며 , 가가호호를 방문하였다. 당시 친목계원 중에는 김수석, 오동술, 김하륜, 이재섭등이 중심이 되었는데 계원중에서 재주가 있는 사람을 골라 다시 연습에 들어갔다.
약 10일동안 걸립했는데 북청군민과 지역 독지가로부터 거둔 기금과 1958년 속초읍장 전성우 씨로부터 금호동 소재 읍유지를 무상으로 불하받아 도청을 건립하였다. 이와같이 속초에서 북청도청을 중심으로 사자놀음이 재현되자 이북5도청에서도 1960년 서울에 북청사자놀음보존회를 발족, 1964년부터 전수에 들어갔다. 1966년 10월 24일 덕수궁에서 개최된 제7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속초의 김수석, 오동술, 이재섭 등이 참가하여 김수석이 개인상을 받았고, 1967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5호로 지정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1970년 4월에 북청민속예술보존회가 인가되고, 김수석이 인간문화재 제84호로 인정 받게 되었다.
『신북청면지』(1986.156쪽)에는 다음과 같이 당시의 상황을 기술하였다.
사자놀음이 8.15해방과 1.4후퇴 후에 남한에서 북청의 민속으로 일반에게 널리 알려진 것은 1966년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참가하여 장려상을 받게 된 때부터였다. 당시 본면 동중리(東中里) 출신 조서희(趙瑞喜) 씨가 북청군민회장과 초대 북청명예군수를 겸임하면서 북청사자놀음을 무형문화재로 문공부에 등록시킬 것을 결심하고 함경남도지사 서남용(徐南龍) 씨와 의논한 바 서지사의 찬동을 얻었다. 연후에 개최된 함남 명예시장 군수회의에서 북청사자놀음을 함남무형문화재 민속예술로 지정하여 문공부에 등록시키는 모든 업무를 조서희 군수에게 일임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에 따라 조군수는 제반 경비를 부담하고 기능보유자의 인선문제와 경비지출 문제는 북청군민회 총무부장인 본면 출신 조하립 씨에게 일임시켰다 그리하여 서울특별시에서 변영호(邊永鎬) 전중식(全仲植) 김삼용(金三龍) 동성영(董誠英) 동태선(董泰先) 이근화선(李根花善) 전광석(田光石), 경기도에서 윤영춘(尹迎春) 마후섭(馬厚燮), 강원도에서 김수석(金壽石) 오동술(吳東述), 부산직할시에서 마희수(馬羲秀)를 기능보유자로 선정하여 약 일개월간 피나는 연습으로 마침내 1967년 2월 25일 시민회관에서 발표공연을 하여 심사에 합격되어 북청사자놀음이 함남무형문화재로서 제22호로 지정, 문공부에 등록되었다. 총 12명의 기능보유자중 신북청면 출신이 12명 중 5명이나 되는 사실만으로도 본면에서의 사자놀음이 얼마나 성행하였는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속초에서 연회된 1957년 초창기의 북청사자놀음 연희자는 다음과 같다.
사자:김수석(앞채, 애원성), 오동술(뒷채), 양반:이종욱, 꼭쇠:양계건, 사당춤:박씨, 위원:장남우, 승무:긴봉수, 총각:김원사, 곱추:마유득, 도깨비 :김효환, 중국인:이종호, 악사:변무성(퉁소), 박진환(퉁소), 이재섭(퉁소), 김하륜(퉁소), 마방섭(북), 이종준(징) , 신겸(장구), 이외에도 길잡이 놀이패 여러 명이 참가함.
필자가 김수석, 김하륜 옹으로부터 조사한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연희시기 : 정월대보름 전후 2∼3일간
② 연희장소 : 도청마당, 가가호호 방문
③ 등장인물 : 악사, 양반, 꼭쇠 , 애원성 춤 2명 , 거사춤 2명 , 사당춤 2명 , 칼 춤 2명 , 무동춤 4명 , 꼽새춤 2명
④ 가면 : 양반, 꼭쇠, 사자탈(종이탈)
⑤ 악기 : 퉁소 3∼4개, 꽹과리, 장고, 북, 징
⑥ 연희소요시간 : 40∼50분, 사자춤 5∼ 10분
⑦ 연희내용 : 벽사진경
⑧ 연희마당 : 아홉굿거리 열 두마당
· 아홉굿거리-입장곡, 애원성곡, 에구 내딸 봉섬이 , 연풍대, 칼춤, 사자춤 초장,
중장, 말장, 자유곡
·열 두마당-양반 꼭쇠의 해학마당정리, 애원성노래, 사당춤, 무동춤, 꼽새춤, 칼춤, 사자춤 초장, 중장, 말장, 승무, 풍자, 군무
⑨ 사자탈 : 1958년 제작된 사자탈은 사자전면 가로 70m, 세로 62cm이다. 이마에서
눈썹까지 15cm, 눈썹의 길이 20cm, 한쪽눈의 크기 17m, 코길이 22cm, 입의 길이 21cm, 입 높이 3cm이다. 원래는 피나무로 깎고 색을 칠했으나 종이로 만들고, 털은 그물에 색칠을 함.
이상과 같이 탈을 만들고 연희가 진행되었는데, 조사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북청사자놀이가 유명하지요. 내가 알기로는 서울서 사자놀이 하는데, 첫 말이 그렇잖아요. 북청사자놀이, 그런데 내가 북청에 있으면서 내가 살던 고향이가 희안합니다. 북청군 신창읍 토성리라는 곳에서 살았는데, 토성이라는 데가 허허벌판입니다. 산으로 가자면 십키로씩 가야되지요. 벌판에 마을이 있는데, 그 옛날에 오백년된 토성이 있어요. 옛날에는 나라 임금이 오백년 도읍을 같이 했는데, 거기서 바다같이 너른데 성을 쌓았어요. 남대문, 동대문, 북대문 등이 있는데, 일제때 총독부에서 관리를 했어요. 이 성을 엄청나게 크게 쌓고 그 주위에 소나무를 심어 소나무가 들어서서 마을전체가 풀숲입니다. 거기 관장이 있었는데, 오백년 도읍지이므로 사자놀음을 거기서부터 기초가 되서 '북청사자놀음이다' 하지요.우리 고장에서 사자놀이가 처음 발족해서 딴 부락에서도 하고, 참 멋있고 그래서 그걸 본을 받아서 딴 부락에서 하고, 딴 부락에서 하고 그래서 북청사자놀이란 말이 나왔지요.
원 말이 근본은 우리 토성에서 나왔다 그래서 토성에 가면 돌로 만든 숫가락, 젓가락, 밥그릇이 나와요. 처음에 토성리에서 북청사자놀음이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어려서 보았는데, 내가 서른 몇살에 나왔으니, 일제때는 허가 못해서 못했거든요. 일제때는 시시한 그런 거 가지고는 경찰서에서 허가 안내줘요. 그러니까 허가하지 않으면 토성리에 사는 부락 사람이 아주 유명한 사람들이 머리가 특수하다든지, 아니면 인재라 하는 분네들이 어떻게 지령으로서 그 사람들이 승인이 멕이게 되니까 허가를 내줘서 하지요. 그때 보름날로 해가지구 하는데, 사자놀음도 하고, 그때 당시는 운동을 크게 하지요. 그래서 그때 사자놀음하는 걸 이북에서도 많이 구경도 하고, 내가 십오년 이상 구경하구 나온 사람이니까. 사자놀음할 때에는 소나발이라구 그걸 불면 '빵'하는 소리가 나지요. 우리가 들을 때는 소나발 그러든데요. 그리구 피리불구, 요만한 생황도 불구, 아마 중앙에는 우리 토성리 사람들이 사자놀음을 하는데, 지금은 대부분 물려 받아하지마는 원 근본 임원들이 더러 있을 겁니다.
-제보자:조일랑(남.75) , 1990.11.17, 청호동 2통3반
장정룡:사자놀음 중에 무동춤, 사당춤 그런 것들이 많지 않습니까? 그런 것을 과장이라 부르는지, 아니면 첫째마당, 둘째마당 그럽니까?
김수석:그러니까 사당춤, 칼춤, 뭐 꼽새춤 그 다음에 애원성춤, 그 다음에 그기 사자 놀이 마당이지요.
장정룡:다 함께 추는 춤도 있겠죠?
김수석:에, 그건 맨 마지막 장면이거든요. 맨 마지막 사자춤이 끝나고 그때 사자가 놀 때는 다른 사람은 안 들어가거든. 그러구 승무하고, 그러니 세 사람이 들어가 놀거던. 마지막에 이제 끝날 무렵에 한 이 십분 놔두고 다 들어간다이. 인원이 다 들어가서 한마당 사자도 놀고 그 다음에 칼춤하나, 칼춤추는 사람이 칼을 가지고 들어 가는 게 아니라 그러니 몸뚱이만 들어가거든. 그러니까 저기 의상이 다를 게 아니요. 꼭쇠, 양반 뭐 의상이 다를 게 아니요. 그래 그 때는 한마당에 들어가서 전부 어울리게 복잡하게 놀지요. 그러면서 마지막에 나와서, 나올 적에도 막 그리 쉽게서 순서없이 나오는 게 아이라, 이제 마지막에 한바퀴 돌아요. 외줄 서서 말이요. 한 줄로 서서 빙 돌거든요. 그래 이제 돌고서 거기 인제 존위라는 게 있어요.
장정룡:존위요?
김수석:존위라고 자세히는 잘 모르겠는데, 옛날에는 말이요. 옛날에 동네 부락에서 제일 나이 먹은 사람을 존위라고 하거든요. 존위, 그래 그 존위가 맨 마지막에 무슨 잡병 쫓구 있지요. 그래고 있지요.
장정룡:놀이가 끝나고 나서 마을의 어른인 분이 나와서 축문을 한다든지 해서 마을의 평을 기원하는 게 없습니까?
김수석:그러니까 마지막엔 그렇지만 이북에 거기 놀적에 거기 좀 안직 있었어요 이 북에서 할 적에 말이요. 이제 사자가 이북에서 정월대보름날 놀지 안이요? 대보름날 달이 밝아 이제 노는데, 그때는 이제 그 부락에 스무집, 집이 스물이면 다 들어가요. 사자가 집안을 한바퀴 돌고 나온다이. 그 돌고 나오는 뜻은 무슨 뜻이냐 하믄, 사자가 한바 퀴 돌고 나오면 "그 일 년은 집안이 아주 재수있고, 아주 뭐 참 무사히 난다" 그래서 사자가 돌고 나온다이. 돌고 나오면 그 집에서 어떡허는고 허면 이제 쌀을 한 말 정도 주는 집이 있고, 그 때는 술 댓병을 서너되 받아서 주는 집도 있고 말이요. 그래 그 놈의 것을 며칠을 다녀서 그 부락을 다 마치고 나서 결산을 하지. 결산을 하게 되면 "돈이 몇 만원이다" "쌀이 몇 섬이다"하게 되면 말이요. 그 동네에서 제일 가난하게 지내는 사람은 말이요, 쌀도 그때 몇 섬 두어 섬씩 주고 말이요. 또 저기 가게집에 팔아 가지고, 그때는 고학생이 많았어요. 일본가서 공부하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의 뒷바라지를 해주고 말이야. 이랬지 뭐. 그리고 또 원래 북청 알지만, 북청물지게가 유명하재이요. 이북이 교육열이 참 세지요. 이북에 들어가면 말이요. 이북에 하여튼 들어가믄 어떤 여자든 편지 못쓰는 여자가 없고, 편지 못보는 여자가 없다이.
장정룡:그 마을에서 행해질 때는 그 곳에서도 북청마을, 북청도청에서 모여가지고 놀았겠지요. 그러니까 집집마다 다 돌고 와서요, 그때는 사자만 집집마다 들어갈 게 아니예요?
김수석:아, 사자만 돌고 나오지요. 그 다음에‥‥
장정룡:그리고 마당에서 놀겠지요?
김수석:아, 그렇지
장정룡:정월 대보름날, 그러니까 15일날 밤에만 노는 거예요?
김수석:아니. 그 때는 한 이 삼일씩 한다이 .
장정룡:그러니까 전후로 해서 말이죠 계속해서‥‥
김수석:그렇지. 한 이 삼일씩 한다이.
장정룡:그러니까 14일도 하고, 16일도 하고 그러는 거죠. 언제부터 북청사자놀음을 하셨어요. 북청 현지에서는 언제부터 행해졌는지요?
김수석:현재 북청에는 언제 들어왔는 지는 모르지요. 아까 내가 그랬지요. 하여튼 내가 열 두 살때부터 열 두 살에 서당에서 서당마당에서 사자놀음 한다. 그래서 내려가니까, 노는 것 보니까 아무개 아무 사람이 놀드라 그랬지요. 언제부터인가 그건 잘 모르지 .
장정룡:등장인물이 여럿 있잖습니까?
김수석:악사가 신이 들려 악사가 치는 게 말이요. 사자가 저기 뭐야 초장, 중장, 말장 이라 그러지요. 초장이 치는 게 다르고, 중장이 치는 게 다르고, 말장이 치는 게 다르거든. 그러니 악사는 꼭치던 사람이 나와야 되요.
장정룡:아까 퉁소를 부셨는데요, 그게 애원성 춤의 반주악기로 들어가죠.
김수석 :아, 그렇지요.
장정룡:그거 애원성에 맞추는 가락이랑 사자춤에서 맞추는 가락이 틀리겠죠?
김수석:그럼, 다 틀리지요. 칼춤 추는 것도 다 틀리고, 무동춤도 다 틀리고, 다 제가락 쓴다이.
장정룡:연풍대라는 게 뭐죠?
김수석:연풍대는 우리 고향에서 말이요. 하여튼 명절에 말이요. 한 삼백호나 이백호씩 사는데 한 부락에 말이요. 명절이면 하여간 서당이라는데 그저 한글을 배워주는데, 그 서당이 아주 커요. 그러니까 명절이면 오늘이 설날이다 하믄 오늘 저냑에 저녁 먹고서 싹 건너와서 서당에 모이거든. 서당에 모여 가지고 서당 마당이 여간 너르지 않지. 여간 너르지 않다이 . 거기선 맨 처음에 이제 시작을 하지. 사자가 그 마당에서 놀고 이제 그 사자가 끝나게 되믄 전부 그 방안에 들어가서 방안을 싹 매운다이, 방안에 양짝 이리 갈라 앉아 말이여. 한쪽에서 악사들이 징을 치미, 퉁소를 불미, 북을 치면서 이러면서 하나씩 하나씩 술먹이면서 냅다 춤을 추킨다이 .
장정룡:지금 불편하시더라도 그때 추던 사자 앞머리 하시던 동작을 취해 주실 수 있겠어요?
김수석:그러지 무동, 무동있다이, 아니 뒷사자하는 여기, 이 무동한다이, 거길 앞을든단 말이여. 나를 들거든. 뒷사자가 말이여.
장정룡:가장 기본되는 반주는 퉁소가락에서 모든 춤이 이루어지는 겁니까?
김수석:그렇죠. 퉁소 그러니까 북, 꽹과리, 장구, 고게 딱딱 맞아 떨어져야 된다. 고게 맞아야 사자가 그 안에 들어가서 쓰고선 아무 것도 안보는데서 그 안에서 놀아야 되는데, 거 장단이 조금 틀려도 말이여. 사자가 지 멋대로 못논다이.
장정룡:모두 탈을 쓰고 놉니까?
김수석:꼽추가 탈이 있고, 양반이 탈이 있고, 그 다음에 꼭쇠…
장정룡:그 나머지는 그냥 맨 얼굴입니까?
김수석:그 나머지는 그냥 맨 얼굴, 수건 쓰는 것도 있고, 고깔쓰고.
(녹음된 퉁소 음악에 맞추어 앞사자춤을 추다)
장정룡:초장, 중장, 말장의 춤동작이 다 틀립니까?
김수석:다 틀리지요.
장정룡:사자탈을 만들 때, 예를 들면 여자들은 못 만진다는 그런 얘긴 없습니까?
김수석:그런 것들은 없고, 옛날 옛날에 자손이 귀한 집 애들은 이제 사자를 태우거든. 태우면 장수한다 그래요. 그리고 사자털을 이제 주머니에 넣어서 애기 기저귀에다 채우면 명이 길다 그래서 그런건 많지요.
장정룡:사자털의 색깔이 여러 가진데 뭐뭐 쓰입니까?
김수석:빨간 것, 흰 것, 노른 것, 밤색, 검정색 다섯 가진지 여섯가진지 그래요.
(제보자는 계속하여 이북에서 북청 공립보통학교를 나왔고, 혼자 1.4후퇴때 월남했다. 그는 7대 독자로서 이북에서는 14세에 장가를 갔으며, 네 명의 자식이 북한에 남아 있다고 말한다)
장정룡:지금 후계자로 누굴 꼽고 있습니까?
김수석:여기 속초에서는 없지요. 서울엔 지금 애들이 여럿이 있지요.
장정룡:저 , 이런걸 가르쳐 주어야 할텐데. 속초에서도‥‥
김수석:그러게 말이오. 애들만 나오는 게 있으면 말이야 내가 지금 나이를 먹었지만 나가서 가르쳐 줄 수 있는데, 그런데 나올 애들이 없다이. 여기 전문대 애들은 몇 해전에 일주일씩 가르쳐 봤는데 잘해요. 잘하는데 애들은 말이요 졸업하고 다 집으로 가버리니 소용이 없어요. 여기 속초에 있는 애들을 가르쳐야 되는데.
장정룡:그러니까 사자놀이를 이제 속초에서 만들어서 일반인들이 한다면 가르치실 수 있겠습니까?
김수석:여기가 원래 사자놀이 본부인데, 여기서 하여튼 서울 사람들 한데 뺏겼단 말이야 그 다음에 일단은 자본도 있어야 하지만, 자본도 없지. 그러니까 사람들이 어떻게 허자면 돈을 만들어 나서야 되는데,그때는 또 여기서 알기를 우수이(우습게) 알았단 말이야. 그 때는 문화재를 아주 우수이 여겼단 말이야. 그런데 서울사람들은 사단법인을 만들어 놓으니까.
장정룡:앞사자를 할 경우에 춤사위 모양이 "어떤 춤이다. 어떤 춤이다" 하는 명칭이 있습니까?
김수석:명칭은 없어요. 그러니까 이 음악에 맞춰서 움직이는 거지요.
장정룡:사자가 앉아 있기도 하고, 엎어지기도 하던데요?
김수석:앉아서 움직이기도 하고,그 다음에 이래 타지 않소. 그 알에서 서는 것도 있고 앉아서 골을 흔들 때도 있고, 서서 흔들 때도 있고 이렇다이. 두 마리가 나올때도 있구 한 마리가 나올 때도 있지요.
장정룡:두 마리가 나오면 서로 싸우기도 하는 것 같던데요?
김수석:싸우지는 않지만은 서로 놀고 관람자들을 아주 좋게 할려고 말이요.
장정룡:보통 전체 놀이시간은 얼마나 걸립니까?
김수석:놀이시간이요. 오래 못놀지요. 사자는 한 십분 하는 때도 있고, 한 이십분 하는 때도있고, 전체는 한 사십 분, 오십 분. 자연적으로 음악에 따라서 하는 거이 인간문화재라는 거지 . 그러니까 이제 초장, 중장, 말장까지 있재이. 그러니까 삼장이지. 사자는 삼장에서 이제 노는 거지. 그거 애원성춤이다, 꼽새춤이다. 칼춤이다 그러지.
장정룡:재미난 얘기 좀 해주세요. 탈놀음 잘해서 대접을 잘 받으셨다든지?
김수석:아이, 옛날에는 젊었을 때는 대접을 잘 받았었는데, 뭐 실물이냐, 아니냐 확인을 하고 막싸워 가지고 여기 들어와 확인을 다 해보시고 그랬어요.
장정룡:춤마당있죠. 지금 아홉마당으로 나눠지고 있잖습니까?
김수석:그기 두 마당 아홉 거리라 그랬지요.
장정룡:두 마당 아홉 거리가 확실한 가요?
김수석:그렇지. 다른 춤은 안 들어가요. 두 마당 아홉 거리라는 게 두 마당인데, 아홉 가지가 나오는 기지 .
장정룡:크게 마당으로 나눠지는 것은 뭡니까?
김수석:애원성 마당, 사자춤 마당
장정룡:선생님이 만든 사자탈과 지금은 다릅니까? 사자 머리모양이…
김수석:원래 여기서 만든 사자가 서울 올라가서 , 서울서 올라오라 그래서 여기서 만든 사자를 올려 갔거든요. 근데 이 사람들이 여기 사자 그 골을 모방한 게 아니라, 저 사람들이 자기네찌리 망글어 가지고 지금 탈을 망글어 가지고 자기네찌리 골을, 탈을 만 들어 가지고 한단 말이야. 여기 만든 건 아까 전에도 말했지만, 우리 친목회 김하륜이라고, 우리 회장으로 모시고 있는데요, 지금 그 사람이 사자를 보관하고 있거든요. 아주 대가리가 참 보기도 좋아요.
(현재 이 탈은 속초문화원 향토사료관에 보관하고 있다)
장정룡:옛날에 만든 거예요?
김수석:예. 제가 망근 기요. 거기 있습니다
장정룡:사자탈은 피나무로 만들었습니까?
김수석:아니 종이로, 종이를 붙인 거예요.
장정룡:꼭 해주고 싶은 얘기해 주세요?
김수석:내가 지금 애원하는 거는, 내가 하여튼 여생이 많다고 하면 많고, 적다고 하면 적고,하여튼 나는 언제든지 속초에다가 이 사자를 좀 후배를 망글어 놓자하는 이런 기분 마음을가지고 있는데, 하여튼 나오는 학생들만 모조리 해주면 내가 나이를 먹었지만 말이요 아즉까지는 건드러지지 않으니까, 매일 매일 가르칠 수 있다이.
-제보자:김수석 (남.84) ,1991.7.16, 속초시 영랑동 8통5반
필자는 중요무형문화재 제15호 북청사자놀음(사자앞머리) 기능보유자였 던 김수석 씨(1907.7.19)를 1991년 7월 16일 만나서 조사를 하고 다방면에 서 이 탈놀음을 복원시켜보려고 노력하였다. 현재 속초문화원을 중심으로 놀이가 복원되고, 사자탈이 제작되어 속초의 사자놀음으로 정착되어가고 있던 중 1997년 10월 19일 김수석 보유자의 타계 소식을 들었다. 북청읍 죽평리에서 월남하여 속초에 정착하고, 타계하실 때까지 북한에 두고온 처자식 생각에 독신으로 지내신 모습을 다시 생각하며 한 편의 글을 써 보았다.
북청사자 아바이 김수석
장 정 룡
"무스그, 고향?
함경남도 북청읍 죽평리 , 열 댓살 때
앞사자 하다가 서리 피난 나왔지비 ."
1997년 10월 19일
오늘 그는
유난히 기침이 심해
손때 절은 갯배 머리에 등을 대고 말았다
오십년간 오뚝하게 건너던 갯배
지독한 현기증에
초중종장 사자놀이도 끝났다
청호동 아바이 그는
날머리 백사장에 판자로 벽을 붙이고
고향 이바구로 도배하고 살았다
안방 문밖 바로 큰 길가
언제든 맨발로 고향 달려갈
꿈길 가까워지리니
떠나올 때 묻혀온 흙내음
한 몸 뼛가루 바다에 뿌릴 때 섞어주시게
애원성 소리 끝자락
퉁소 구멍속에 흩어지는 아픔을
돈돌라리 , 돈돌라리
다시 돌아와 살아날 때 불러주시게
"나는 북청사자다"
그는 포효도 없이
어디서도 제대로 놀지 못한 채
떠나올 때 처럼 혼자서
우리 곁을 떠났다.
1907년 7월 19일생
중요무형문화재 15호
북청사자놀음 보유자
김수석 기능보유자와 함께 속초의 북청사자놀음을 이끌어온 분이 김하륜 씨다. 이 분의 역할은 퉁소를 부는 것인데, 북청도청을 운영하면서 사자탈을 보관하고 있었다. 조사내용은 다음과 같다.
장정룡:회장 맡으신 지 얼마나 되셨습니까?
김하륜:올해 야튼 뭐 십오년 계속, 뭐 운영하다 보니까 그냥 맞게 되니까.
장정룡:함경도에서 고향은 어디셨습니까?
김하륜:북청읍 신천면이라는 데가 있어요. 일 사 후퇴때 나왔어요.
장정룡:북청동향친목회에 대해 말씀해 주시죠?
김하륜:북청동향친목회는 36명이야. 그때나 이때나 김수석 이 형님이 제일 고령자시고 그래서 그때 어떻게 했는고 하니, 계를 만들어 가지고 하는 거요. 그래 가지고 사자를 "저기 선조로 내려오는 공연문화 살려야 되겠다" 그래서 지금 돈이 없거든. 저 바닷가에 가면 고기 그물이 썩어서 내버리는 것을 골라 가지고 씻어 가지고 바다에 씻어 가지구, 삶아 가지고, 물을 들여 사자를 만든 겁니다. 그때 사자를 만들어 가지고 그 다음에 그때나 이 형님이 사자를 만들고 그래서 사자 노는 걸 연습했지. 그래서 그 활동으로 모인 돈을 가지고 운영했지요. 우리는 정월 대보름날 야튼 음력 설부터 보름날까지 계속 댕겨요. 그래 몇 날을 해가지고 우리 고향의 선조들은 정월 대보름날이라 정초에 사자놀이를 하게 되면, 그 잡신들이 다 쫓겨나고 만수무강하라고 빌고, 다 그래서 집집마다 쌀로 노놔주고, 돈도 노누는 집이 있고, 그때 돈으로 삼백원, 제일 잘사는 사람은 한 천원 내고. 그럼 그걸 함께 모아 재산을 만들었어요.
장정룡:그럼, 그게 몇 년도 입니까?
김하륜:그러니까, 그게 햇수로 삼십 삼년됐지.
장정룡:언제부터 북청사자놀음을 시작하셨습니까?
김하륜:우린 고향서 고향민속이 그러니까. 제일 우리 북청이, 북청군이 3개읍이거든. 북청이 큽네다. 3개읍 17개면이거든. 그럼 각 면면이 달라요. 제일 저 무식한 말로 억세게 사자놀이 하는 데는 이 큰골이라는데. 대골, 북청읍 죽평리. 거기서 제일 잘 놀고, 우리 양가라는데 양가는 신북청에서 북청을 넘는 중간에 있어요. 거기서 제일 싸게 나와요. 그러니까 결국 여기 나와서 그때 그걸 몰랐지 . 하야튼 왜정 그 일본 놈의 새끼들 하튼 개지랄 하는 것도 기어코 시내에서 보름에 밤새도록 놀았단 말이요.
장정룡:왜 못놀게 했습니까? 일본사람들이
김하륜:그러니까, 그 첫째 기초가 그 돈돌라리니까. 그 의미가 어떻게 나는가 하니, 저 삼월 한식날 각 저 다리밑으로 가거든 모래사장, 거기서 처음에는 "달래 캔러 간다" 한식때니까. 그래서 집에서 바가지 꺼내 "달래 캐러 간다" 그기 비밀이지. 그래가지고 어느 다리밑, 어느 강가, 머래장 거까지, 신구다리밑으로 이제 돈돌라리 부르면서 달래캐러 간다 하지, 그 돈돌라리 부르는 의미가 거기서 우리 조선이니까, 돈돌라리로 서로 암호로 연락하는 기야. "이 강산 철산에 해가 떨어진다"그래해요.
장정룡:여기 나오셔서 가담하신 역할이 있으신지요?
김하륜:여기 와 주로 사자놀이 애쓰고, 이 형님(김수석)과 둘이 애쓰고 노력하고 밤 낮 앉으면 퉁소불고, 그래서 전문대학 학생들을 몇해 길러 봤어요. 그래서 문화원장 김종록 씨 할 적에 그 분이 계속하셨으면 어느 정도 발전이 됐을 거요. 내 지금도 퉁손하루에 한 번씩 불어요. 난 아직 문화재는 못됐소.
장정룡:퉁소는 선생님이 만드신 겁니까?
김하륜:이게 다 우리 손으로 만든 거요. 지금도 망글어요. 만들기 힘이 들어요. 이게 질이 세가지고 구녕을 뚫기 힘들어요. 그래도 이거 우리 여기선 무스할까. 서울서 본부에서 만든 거, 우리는 여기서 그렇게 해가지고 한 삼십년 전 일이야. 한 삼년 놀았거든 가서 저 사자 가지고 가서, 그래서 서울가서 한 삼년 대녔어요. 그런데 서울서 가뜩 바쁜 사람들이지만 그 사람들이 우리가 좀 섭섭한 건 가을 시월에 오징어가 날때거든. 바뽈 때 우릴 와서 모셔 올라가야지. 가면 또 여관비 줘야지 돈 농가 줘야지. 그래 귀찮으니까 한 삼년 다니고 등록 난 다음 자기네, 지금 노는 사자야. 틀이 지틀이 맞지 싶어 칠한 거야. 이게 본 사자 거채입니다. 그렇담, 지금 서울 학생들이 지금 말하는 기 영감들이, 옛날 모습이 하나도 없다는 기야. 지금 현재 영감들이, 그래도 우리 사자. 저기 진짜기. 거내 하도 무슥해서 지금도 보관하고 있어요. 그래 그 원형도 변한단 말이요. 몸통이 새빨갛지. 그리고 털이 질구. 털이 암만 질구. 그 다음 음악도 판이 다름니다. 지금.
장정룡:지금 음악을 하실 수 있습니까?
김하륜:내 불긴 부는데 가사는 한가지지. 내용은 한 가진데, 음악은 옴프는 틀려요. 퉁소를 녹음하는데 입장곡부터 입니다. 그 다음에 애원성타령, 이 김하륜하고 그리고 인간문화재 등록 난 할아버지가 변영호라. 지금 퉁소 못불어요. "에∼헤 에∼헤 우수경 칩을 대동강이 풀리고, 정든님 말씀에 요내 가슴 풀린다. 에∼헤 해는 오늘 보면 내일 보는 것, 임자는 오늘 보면 언제나 보는가. 에∼헤 태산에 붙는 불은 만백성이 끄고, 요내 가슴데 붙은 불은 어느 누가 끌까 에∼헤" 이 가사의 의미가 있는 기야. 그리구 사자놀이 "에구 내 딸 봉섬이"란 게 있어요. 그 봉섬이란 아가씨가, 그 아가씨가 예뻣던 모양이지요.
장정룡:이 퉁소소리는 무엇입니까?
김하륜:처음에 입장곡, 그 다음에 애원성 타령 부르고, "에구 내 딸 봉섬아' 불렀거든.그 다음에 이제 불렀던 게 연풍대라는 기요. 이번에는 칼춤 나와요, 칼춤 잘춰요.
장정룡:"에구 내 딸 봉섬아" 그게 사당춤입니까?
김하륜:그게 사당춤이요.
장정룡:연풍대라는 게 따로 있습니까?
김하륜:그 춤 가락을 다르게 하는데, 입장곡이 다르고, 모르는 사람은 다 한가지로 부르는 것 같애도, 입장곡이 다르고, 애원성 음악이 다르고. 연풍대 음악이 다르고, 그 다음이 "에구 내 딸"이요. 아카 칼춤도 했잖소.
장정룡:그 순서가 어떻게 됩니까.
김하륜:처음에는 입장곡하고, 그 다음에 애원성 타령 , 그 다음에 "에구 내 딸 봉섬아" 그때 사당춤 추거든. 그거하면서 꼽새춤 추고, 칼춤은 맨 마지막에 하는 기야. 그 다음에 또 연풍대 할 적에 그때두 추는데, 여기도 춤추는 사람이 서넛있소. 우리 고향사람들이 옛날 할머이들이 이 옛날 머리쓰게 머리 수건을 이렇게 쓰고 옛날 할머이들이 추는깁니다.
장정룡:칼춤이 맨 마지막이 되겠습니까?
김하륜:마지막, 이제 칼춤이 끝났소. 이제 사자놀이를 하는데 초장, 중장, 말장이 있어요.
장정룡:초장, 중장, 말장이 어떻게 다릅니까?
김하륜:달라요. 이게 다 소리가 달라요. 음악이 달라요. 초장이 제일 늘지요. 뜨지요. 중장은 조금 더 빠르구, 그 다음 말장에 가선 아주 빠르다이 . 사자놀이는 아홉곡이야.
장정룡:두 마당 아홉 거리가 아닙니까?
김하륜:두 마당 아홉 거리요? 아니요. 아홉 굿거리 열 두 마당이야. 열두 가지 했거든. 열두 마당. 여태까지 논 게 꼽새춤이고, 아홉 굿거리 열 두 마당, 그거 알아야 돼요. 음악은 아홉가지구, 그 다음에 노는 거란 말이지.
장정룡:그러니까 처음 등장해 가지고 인사하는 것까지 다 들어갑니까?
김하륜:그게 다 들어가서 그것까지 열 두 마당이야. 열 두 가지.
장정룡:춤추는 순서는 늘 똑같이 합니까?
김하륜:다 다르지. 열 두 마당 다르지. 칼춤이 다르고, 꼽새춤이 다르고, 사당춤이 다르고, 그 다음에 한마당 춤이 다르고.
장정룡:그럼 북청사자놀음에 악기는 뭣이 등장됩니까?
김하륜:퉁소는 서이 일때도 있고. 너이 일때도 있고, 북이 있고, 큰 북 둘, 작은 북 두개요. 그리고 장고 하나. 징, 꽹과리 하나.
장정룡:그럼 퉁소가 제일 많군요?
김하륜:그전엔 둘이 불었지만, 부는 사람이 많으면 많이 들어가고, 부는 사람이 적으면, 둘 들어가고, 어떡허든 둘은 들어가야 돼요. 그래야 소리가 맞지. 둘이 들어가야 소리를 맞추거든. 하난 들어가믄 소리가 상당히 약하고.
장정룡:양반은 보니까 정자관 비슷하게 점잖은 탈을 쓰고 있던데요?
김하륜:손에는 담뱃대하고, 부채를 들고, 옷은 도포 관복이지요.
장정룡:탈은 나무탈입니까. 종이탈입니까?
김하륜:아, 종이로 한 거예요.
장정룡:그 다음에 등장하는 인물이 꼭쇠지요. 꼭쇠는 무슨 역할을 합니까?
김하륜:그게 양반의 하인이지요. 양반이 꼭쇠를 잡고,뭐 시킨다든지 붙들어 매놓고는 뭐
라 뭐해라 뭐. 양반은 수염이 근사해요. 수염이 길쭉하게 나오고요. 머리에는 흰색 관을 쓰고요.
장정룡:꼭쇠 옷은 어떻습니까?
김하륜:꼭쇠 옷은 일색으로 하는 게 아이라 여기 저 무당옷 비슷허게 생긴 것도 있고 이 쪽엔 줄을 이렇게 매고, 바지도 한쪽 가다리, 팔을 뻘건거나 검은 거 하고, 팔이때기 절반은 뻘건거 하고, 이렇게 했단 말이여. 얼굴에는 탈을 써야 된다이. 신발은 짚신, 행전치고, 머리에 고깔쓰고.
장정룡:승무도 나오고, 사당춤은 둘이 나오지요?
김하륜:사당춤 둘이 나오고 스님이 나오지요. 사자가 거꾸러졌을 때 스님 나오고, 그 전에 의사가 나왔는데, 안 나오고. 그전에는 어떻게 했는고 허니, "사자가 허기증이 났나 병이 났다. 그 다음에 토끼를 잡아 먹이다. 사슴을 잡아 먹인다" 했는데 그걸 없애 고 지금은 염불합니다.
장정룡:그러면 사자가 되살아 납니까?
김하륜:그렇지요. 그럼 살아나거든.
장정룡:무동춤에 남녀가 둘이 들어오지 않습니까?
김하륜:요즘엔 안나와요. 본래 원숭이도 있었는데, 몇 해 전엔 있었습니다. 요즘엔 그거 없다이. 그게 있으면 아주 희극도 많이 되구, 이런데 요즘은 안해.
장정룡:그 이 장사 설화가 있잖습니까, 범을 잡은 삽사리 마을의 이 장사 이야기 있잖습니까?
김하륜:사자 색깔이 왜 호랑이 색깔과 같냐면 내가 말하면 알아 들을 기요. 사자 색깔이 왜 범색깔이냐? 어느 옛날에 장군이가 이 장사가 부인이 예뻣데. 그러니까 일본아들이 뺏어 갈라구 해서, 그래 산중인가 어디로 도피를 해서 갔데 도망을 해서 갔는데, 그 어떡하다 걸렸단 말야. 그래 그 일본아이들 한데 부인을 뺏끼고서 그 다음에 일본 아들이 굴안에 집어 넣었거든. 굴안에, 그래 원래 장군이니까 굴안에 들어가면 죽을까 하고 방심하고 있었지 그런데 그기 살아 나갔단 말이야. 그래 몇 해 이거 자기 부인을 빼내 와야 하는데, 할 새가 없어. 이웃 노인이가, 그래 이 놈들은 남의 부인을 갖다 훔쳐 놓구선 앞에 사자를 먹이거든.(조사자:호랑이 새끼를 잘못 구연한 듯하다) 사자를 길러,사자새끼는 뭐가 들어오믄 사람을 접근을 못하게 해. 사자의 이 앞다리가 대문안에 놓이는데, 아무 사람이 접근을 못하거든. 그때 이웃 노인이가 이 장사를 보고 "야, 니가 거길 들어갈려믄 사자 형용을 해 들어가야 한다" 거 사자새끼 있거든 사람만 접근을 하자믄 막 소리를 치고, 물을라고 덤벼들거든. 그래 가만 물어서 사자색깔처럼 망근단 말이야. 그래서 우리 사자 색깔을 범처럼 하느냐 그래서 하는기라. 이 장군이 그때 당시 그래가지고 호랑이 색깔을 해 가지고, 호랑이처럼 망글어 , 그래서 사자 색깔이 호랑이, 범색깔이랑 똑같아. 내 알기로는 그렇게 알아.
장정룡:사자놀음에 대한 다른 얘기는 없습니까?
김하륜:내 아까 할 적에 고향서 집에서 선조들이 하던 대로 했거든. 정월 대보름날 집집마다 댕기문서 이 사자놀이하믄 "악도 떼고 복을 받는다" 그래가지고 집집마다 어떤 집은 오란 집도 있어요. 대부분 요청하지요. 사자놀이 나왔다 하믄 "우리집 와라" 요청하지요. 그래서 그거 하믄 쌀내놓고, 또 축원해요 "우리네 가족 건강하고 새해에도 복많이 받게 해달라"고 하고.
장정룡:도청은 어떻게 만들었습니까?
김하륜:도청이라 하는 기 모두 도(都)자 도청이 있고, 서댓방(서당방)이라는 게 있어요. 한 동네 열 집이 살아도 그거는 있어요. 그때 우리는 여기는 배를 곯고 먹을 것 못먹고 그래도, 산을 허물어서 도청을 지었단 말이오. 그래 사자놀이 할 도청을 지으니 여기 사람들이 "야,저 사람들은 먹을 것도 못먹고 도청은 짓는구나" 그래서 여기서는 공회당이라 그러거든. 거 무슨 회관이라 하지, 그래서 그기 있는데, 서댓방, 여기 도청방, 그리고 노인들이 앉는 곳은 칸을 막아요. 미닫이를 해가지고 그때 이 시내에 학교 댕기는 사람들이 서댓방에서 공부를 하거든. 그 한문, 거기 특수한 기 명절날 같은 때 놀거든. 그럼 이 서댓방에서 공부하는 애들이 앞으로 명절을 며칠 남겨두고 미리 휴가를 주면 거 노는 데는 이런 걸 한단말야. 사자놀 이를 하는데 더 억세게 해야 이 동네 뉘 집 처녀나 며느리들이 우리 동네가 잘 못놀고, 남의 동네가면 희야거시 받게 되거든. 그래서 서로 경쟁적으로 아주 잘하거든.그때는 이 아래위에 문을 탁 터요. 거기서 씨름하는 식으로 특수해요. 거기서 서리 승압적으로 "어는 동네가 불리허다" 그래서 그런 의미에서 사자놀이가 더 억센 것 같아요.
장정룡:사자놀이에 여자도 들어가지 않습니까?
김하륜:그럼. 여자도 춤추지 . 승무출 때 들어가고, 사당춤 출 때, 두 사람이 들어가고요. 그 다음은 또 지금은 할머이들이 뭐 서이고 너이고 옛날 머리쓰개를 두르고 그렇게 해서 춤을 춰요. 지금도 사자놀이해도 할머이들이 춤을 춰요.
-제보자:김하륜(남.76), 1991.7.16, 금호동 10통1반
처음에 속초에서 북청사자놀음이 시작된 것은 그 당시에 북청사람들이 주동이 되었거든요. 그 분들이 한 오년되니까 후원자도 없고 병이 들고, 살기도 어렵고 하니까 뿔뿔이 헤어지고 와해되기 시작한 거예요. 서울도 가고, 부산도 가고, 친척 찾아 가고 먹고 살기 위해 단원이 자연 해산된 거예요. 그 당시에는 북청도청이라는 것이 있었어요. 도청이란 것이 강원도 도청하는 길도(道)자가 아니고, 도시라는 도(都)자입니다. 거길 중심으로 사자놀음이 되었거든요. 50년대 후반 56년이나 57년쯤 되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