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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원선의 간이역이었던 월정역은 남방한계선에 최근접한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철원안보관광의 대표적인 경유지이다. 현재는 객차잔해 일부분만 남아 있는데, “철마는 달리고 싶다”는 강렬한 팻말과 함께 분단된 민족의 한을 여실히 증명하여 주고 있다. 원래 경원선은 한일합방 이후 일제가 주민들을 강제동원하고 당시 러시아(구소련)의 10월 혁명으로 추방된 러시아인을 고용하여, 1914년 8월 강원도내에서 제일 먼저 부설되었는데 서울 ↔ 원산간 221.4km를 연결한 산업 철도로서 철원에서 생산되는 농산물과 원산의 해산물 등을 수송하는 간선철도 역할을 했다. 현재의 월정역사는 철원안보관광개발사업의 일환으로 1988년 복원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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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경원선의 최북단 분단 지점이 되고 있는 월정역은 예전에는 월정리란 큰 마을이 있었는데 이곳을 월정리로 부르게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애화(哀話)가 전설로 내려오고 있다. 아주 먼 옛날 이곳 어느 사골에 이름모를 병으로 고생하는 홀아비와 그를 지성으로 봉양하는 딸아이가 살고 있었는데 그 처녀는 아버지 병환을 낫게 해 달라고 밤마다 달니께 빌었다. 어느날 밤 달님께 빌다가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 백발도사가 나타나서 “ 나는 달의 화신인테 너의 정성이 지극하여 이르노니 집 옆 바위 위에 가보면 물이 고여 있을 것이니 달이 지기전에 너의 손으로 천 모금을 길어 아버님께 드리면 병이 나을것이다”고 일러 주는 것이었다. 처녀는 허둥지둥 꿈에 들은 곳을 찾아가서 물을 길어다 아버지 입에 넣기를 기백번 얼마 남지 않은 달은 서편으로 기우는데 가련하고 효성이 지극한 딸은 온몸을 바위에 부딪혀 찢겨지고 피가 흘렀으나 갸날픈 손으로 드디어 천 번째 물짓기를 마치자 선천의 달도 지고 그 덕분으로 아버지 병환은 나았으나 그 효녀는 영영 회생되지 않았다. 그 후 물이 고였던 자리를 달의 우물이라 불렀고 마을 이름 역시 월정리라 불리웠다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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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정역 맞은편에 위치한 철의 삼각 전망대는 1988년 3억원을 들여 건립한 4층 220평 규모의 철근콘크리트 건물로서 4층 전망대는 동시에 300명을 수용할 수 있다. 휴전선 비무장 지대를 비롯하여 부근의 평강고원과 북한 선전마을을 전망할 수 있으며, 초정밀 망원경 시설과 함께 최첨단 기술로 제작된 지형축소 모형판이 있어 민족분단의 현실을 생생하게 보고 들을 수 있는 곳이다. 3층에는 관광객들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한 휴게시설이 갖추어져 있어 방문객들이 즐겨찾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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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고지 위령비는 백마고지 전투에서 희생된 아군과 중공군 등 17,535명(아군 3,146 중공군 14,389)의 영혼을 진혼하기 위하여 건립한 것인데 당초 1985년 6월 6일 육군 제5사단 장병과 지역주민들이 백마고지 후방에 세운 3.6m 높이의 현무암 비석은 오랜 풍상으로 훼손되고 대규모의 위령제를 봉행하는데는 장소 협소 등의 어려움이 있어 1990년에 철원군에서 위령비일대를 대대적으로 정비하여 새롭게 단장하였다. 홍익대 강건희(姜建熙)교수가 설계한 기념시설은 회고의 장, 기념의 장, 다짐의 장 등 세 부분으로 나누어 처절했던 격전의 현장을 재현하고 높이 22.5m의 기념탑을 세웠다. 『회고의 장』 에는 피아 전사자를 추도하는 위령비와 분향소가, 『기념의 장』 에는 통일의 염원과 전승을 기념하는 전적비와 함께 당시 백마부대장이었던 김종오(金鍾五)장군의 유품을 전시한 기념관도 배치하였다. 『다짐의 장』 에는 전망대와 함께 자유의 종각도 건립하여 오늘날은 국민의 안보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백마의 얼 (85·6 건립한 당초의 위령비) 풀숲에 누워 그날을 본다. 하늘이 울리고 땅이 갈라지듯, 적들이 몰려오는 저 산과 강에서, 우리는 끓는 피로 용솟음 치며, 넘어지려는 조국을 감쌌다.
이 한몸 초개같이 바치려 숨찬 목소리로 다 같이 강물을 헤치고, 산을 부스며 달려 오는 적들을 막았노라.
수많은 적을 따라 소탕하고 조국의 얼로 내달려 떡갈나무 사이로 스며드는 원수의 고함을 눌러 버렸나니 쓰러지며 죽으면서도 다시 일어나 숨결을 돌리고, 숨지려는 조국을 살렸노라.
나의 조국... 영원한 땅이여!!! 만세를 가도록 그 얼은 살았으니 지금도 그때처럼 귀를 기울이고, 저 몰려오는 적을 막고 있노라.
푸르러 푸르러 영원한 젊음 우리는 그품에 안겨 안식하리라. 어머니 조국에 이 혼을 맡기어 후회없이 더 강하게 앞으로 달려 가리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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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고지 전투는 한국전쟁(1950. 6·25 ~ 53. 7. 27)기간인 1952. 10월 철원군 철원읍 대마리 3km 북방에 위치한 무명의 한 작은 고지를 놓고 한국군 보병 제9사단장(사단장 김종호)과 중공 제38군 3개사단이 전력을 기울여 쟁탈전을 벌인 끝에 우리국군의 승리로 매듭지어진 전투를 말한다. 1952. 10. 6일부터 10일동안 해발이 불과 395m 밖에 되지 않는 고지 하나를 빼앗기 위해 아군과 적군 2만 여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으며 전투기간 중 발사한 포탄은 적측 5만5천발, 아군측 22만발, 피아간 12차례의 공방전으로 24회나 주인이 바뀌기도 했다. 혈전사투의 초연이 걷힌 다음 처절하게 변모한 산용(山容)이 흡사 백마가 누워있는 모습과 비슷하다 하여 백마고지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백마고지전투는 한국군의 방수능력(防守能力)을 높이 평가받은 일전으로서 보(步), 전(戰), 포(砲), 공(空)의 협공이 긴밀하게 이루어진 고지공방의 범례(範例)가 되는 결전이기도 하였다. 6·25전사중 치열한 대표적 전장의 하나로서 철의삼각지전투의 상징이라 할 만한 백마고지 전투는 당시 휴전을 앞두고 한치의 땅이라도 더 확보하고자 하는 피아의 공방으로 처절함을 더 했는데 백마고지 확보의 전략적 중요함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① 철원평야를 감제(瞰制) 함으로써 철원 및 김화를 제압 ② 서울로 통하는 UN군의 주 보급로 확보 ③ 휴전회담의 흥정에 유리한 차기작전의 발판 굳히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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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원역은 경원선의 중심역이며 금강산전철의 시발점이다. 경원선은 한일합방 이후 일제가 주민들의 강제 동원과 10월혁명 이후 추방된 러시아인들을 고용하여 부설하고, 1924. 9.16 원산에서 전노선 개통식을 가졌는데 총연장 221.4km 중 철원역에서 서울(용산)까지 97.3km(2시간), 원산까지는 124.1km(3시간)였으며, 철원역에서 내금강까지 운행된 금강산 전철은 116.6km로 4시간 반이 소요되었다. 철원읍 외촌리 철원평야 한가운데 위치했던 철원역의 전체부지는 5만여 평으로서 1930년 무렵에는 역장(서기관급)을 포함하여 80여 명의 역무원이 근무하였다고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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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향의 설움과 아픔을 함께하는 강원도 미수복 군민들이 힘을 모아 한맺힌 소망인 조국통일의 의지를 굳건히 다지고 조상에 대한 흠모와 애틋한 향수를 달래고자 1989년 4월 철원군 철원읍 외촌리 331번지에 이 합동망배단을 세우게 되었다. 사각 단기단 위에 육각형으로 1.1m의 석대와 그위에 높이 3m, 두께 73㎝의 화강암 비신으로 조성되어 있다. 강원도 미수복 군민회에서는 매년 6월에 합동제례를 지내고 통일의 그날이 오기를 기원하고 있다. (강원도 미수복군민회 : 통천, 회양, 이천, 김화, 평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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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남면 마현리에 있는 말고개는 5번국도로 철원군과 화천군의 경계에 있는 높은 고개인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유래가 전한다. 임란왜란 때 왜군 장교가 군졸을 대동하고 말고개[馬峴]를 넘어 화천방면으로 가려 했다. 이 길을 따라 올라가는 노변(路邊) 부근에 있는 천불암 앞을 지나갈 때 말을 끌던 안내인이 “이 곳은 신성한 곳이니 하마(下馬)하여 돌아가야 한다”는 말을 하였으나 왜군장교는 이를 거절하고 강행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타고 가던 말의 말발굽이 땅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왜군 장교는 이에 화가 나서 자기 애마의 머리를 장검으로 내리쳤다. 왜군장교는 쓰러진 말의 피를 천불암에 뿌렸다고 한다. 그 때 안내인의 말을 무시하고 고개를 넘어가던 왜군 장교는 벌을 받아 계곡으로 떨어져 죽었으며, 그 후 왜군들은 수시로 이 말고개를 넘다 계곡으로 떨어져 죽었다고 전하여지고 있다. 현재는 도로확·포장사업으로 굴곡을 많이 직선화하여 쾌적한 기분으로 고개를 넘나들게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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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원읍 사요리(현재 노동당사 좌측)에 있었으나 6·25전란시 완전 파괴되어 지금은 기초 부분만 남아 있다. 1933년에 2층 벽돌 건물에 연면적 460평 규모로 건립되었으며, 60개의 병상을 갖고 있었다. 1937년 말 기준 의사는 일본인 5명, 한국인 5명, 치과의 1명, 약사 1명, 산파 1명 이었다. 철원의원에 입원했던 환자는 연인원 6,630명, 외래환자 수는 연 25,947명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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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국은 일제시대에 구철원 시가지 주민의 상수도 공급을 위해 설치한 저수(貯水)탱크 및 관리소 (管理所)건물이다. 1937년에 발행된 철원읍지(鐵原邑誌)에 의하면 당시의 급수인구(給水人口)는 500가구에 2,500명이었고, 1일 급수가능량은 1,500입방미터로서 강원도내 유수(有數)의 상수도 시설을 자랑했다. 6·25전란 당시 국군이 북진하자 북한 공산당은 패주(敗走)하면서, 노동당사와 내무서 등에 감금했던 인사들을 분류하여, 반공정신이 투철한 애국인사들을 이곳으로 이송 조치하고, 약 300여명에 달하는 반공투사들을 총살하거나 지하 6미터의 저수탱크에 생매장하고 도주한 학살 현장으로 알려져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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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원공립보통학교는 1906년 4월 20일 철원읍 사요리에 위치한 강원도립철원의원 전 부지에 목조교사 1동(2학급 8교실)을 신축하고 4년제로 설립 개교하였다. 1910년 3월 20일 한입합병 당년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하게 되었으며, 1911년 8월 일제가 공포한 조선 교육령에 의해 교육 통제하에 놓였다.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일본의 교육정책이 수정되어 사립학교에 대한 탄압과 폐쇄를 서슴지 않았다. 1922년도 다시 교육개정령이 공포되면서 학제가 보통학교(4·5·6년) 고등보통학교(5년)로 개편되었으며 1922년 3월 4년제의 13회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학군내의 인구 증가에 따라 사요리 338번지의 부지에 목조 교사옥 3동(18학급)과 부속건물을 신축하고 1924년도 이전하였다. 1945년 8월 15일 해방당시 6년 과정의 24학급 2,600여명의 학생을 자랑하는 도내 굴지의 학교였다. 인공치하에서 37, 38, 39회의 졸업생을 배출하였으며 6·25전란으로 학교수업은 중단되고 시설물도 전소되었으며 현재는 지뢰지대로 변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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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원경찰서 건물은 노동당사의 좌측에 연접해 있었는데 1936년 당시에는 34명의 경찰병력을 갖고 있으면서 철원역 파출소에는 4명의 별도 경비원을 배치했었다고 한다. 해방후에는 소련군 주둔 사령부로 사용되었으며, 6·25전란 당시 공산당은 이 건물 지하실에서 수많은 양민과 반공투사들을 고문·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른 곳으로 알려져 있다. 6·25전란으로 건물은 완전 파괴되어 현재는 건물터 일부만 남아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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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원읍 관전리 16번지에 위치했으며, 부지 387평에 연건평 96평의 단층 와가(기와집)였다. 읍사무소 관할은 8개리였으며 면적은 4.73방리였다. 인구는 1936년말 현재 19,693명이었으며, 해방 당시는 37,855명이었다. 읍재정은 1937년도 148,805원. 읍직원은 40여명으로 읍 행정을 집행했던 곳이다. 인공치하에서는 읍인민위원회에서 사용했다. 6·25동란으로 읍사무소는 소실 되었으며 지금은 농경지로 변모했다.
당시 읍직원 현황 ( 총 40명) 읍장 1. 부읍장 1. 서기 13. 기수 3. 기관수 1. 고원 4. 용인 15. 철공1. 수로공부1. (읍장은 좌등실 : 일본인) 구장 : 27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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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의 위치는 현재 비무장지대인 철원군 철원읍 홍원리이며, 성축 년대는 서기 903 ~ 904년경으로 추정된다. 궁예는 효공왕 8년(서기 904년)에 국호를 마진으로 고치고 서기 905년 송악에서 철원으로 도읍을 옮겼는데 천도당시에 도선의 도참설에 “금학산을 진산으로 정하면 300년을 지속할 것이며, 고암산을 진산으로 정하면 30년밖에 유지하지 못한다”는 설이 있었는데 궁예는 이를 무시하고 고암산을 진산으로 정하고 이곳에다 903년부터 궁전을 크게 짓기 시작하고 외성, 내성도 튼튼히 축조하기에 이르렀으며, 10여개의 외곽성도 함께 구축하면서 세력을 확장하였다. 이 도성은 외성과 내성으로 이중 축조된 특이한 성인데, 밑 부분은 석축으로 상단은 토축으로 외성의 둘레는 4,370m. 내성은 577m의 큰 규모이다. 내성에는 궁예만이 사용하였던 어수정과 석등 등 많은 유적이 있었으나 오랜 풍상으로 대부분 파괴되었으며 현재 휴전선 비무장지대내에 유지가 일부 남아 있다고 하나 출입통제 지역으로 확인하기 어렵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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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선열 추모비는 철원읍 화지리(철원고등학교 교정내)에 위치하는데 1967년 4월 철원 애국선열기념사업회에서 건립하였다. 탑신 높이 5m, 기단 높이 2m규모로서 화강암과 대리석을 같이 사용하였다. 철원은 독립만세 운동이 가장 활발하였던 고장의 하나로서 기미년 3.1운동 당시 이 고장에서 일어난 독립운동의 불길은 진실로 죽지 않는 민족혼의 절규였으며 동시에 자손만대에 던진 일대 경종으로서 영세에까지 이어질 자랑이다. 우리 고장이 낳은 애국선열 여러분들이 도피안사에서 애국단을 조직하여 사재를 바쳐 민족운동을 전개하고 때로는 민족혼을 계승시키기 위하여 육영사업 등으로 몸과 마음, 온 정성을 다 기울이며 애국운동으로 찬란한 역사를 창조 하였는 바, 이 지사들의 업적과 얼을 추모하기 위하여 이 고장 유지와 여러인사들의 헌금으로 이 비가 세워지게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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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원군 근남면 마현리(대성산)에 위치하며 1983. 10월 육군 제 8305부대에서 건립하였다. 대성산 지구 전투는 1951년 6월 9일 국군 2사단 2, 3대대가 1041고지에서 활동중인 중공군 제20군 58사단 177연대의 적군 병력을 섬멸하기 위해 선제 공격을 개시하여 1041고지와 신월동 및 865고지를 탈취한 후 6. 14까지 6일간 연이어 계속된 전투에서 적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히고 승양고개 삼천봉 비로봉 일대를 확보하면서 김화지역을 적으로부터 사수한 전투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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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저망대는 철원군 근남연 마현2리 마을 앞산의 최전방에 위치하고 있으며, 서울로부터 108㎞, 춘천으로부터 74㎞ 떨어진 지점으로, 휴전선 155마일 중 정중앙에 자리잡고 있다. 이곳에서는 우리 지역의 대성산, 적근산, 삼천봉이 한눈에 들어오고, 북한지역으로는 6.25전란 당시 격전장이었던 오성산과 북한 금성지역등을 한눈에 관망할수 있다. 특히, 지금은 잡초에 묻혀 있는 금강산 전철길을 선명하게 볼 수 있다. 승리전망대는 우리 군에서 지난 2002. 2. 18 개관하였으며, 관광안내원을 배치하여 관리하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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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크림 고지로 더 잘 알려진 삽슬봉은 예전에 이 산밑에 삽송리(揷松里 또는 森松里)라는 마을이 있어서 이 산을 삽송봉(揷松峰 : 삽슬봉은 삽송봉의 구전변형체)으로 불렀고, 또 그 모양이 흡사 투구 같다해서 투구봉으로도 불렸다. 드넓은 재송평의 한 가운데 솟아 있는 해발 219m의 얕으막한 산이지만, 이 산이 갖는 입지적 이점은 다대(多大)하여 6·25전란때는 피아간에 처절한 쟁탈전과 포격이 극심했고 산이 마치 아이스크림 녹듯 흘러 내렸다 하여 아이스크림 고지란 별명이 붙여졌다 한다. 삽슬봉은 김응하장군의 빈장묘가 있는 여우산(如愚山)과 직선거리로는 불과 2km의 지척에 있는데 김응하장군이 임진왜란때 13세의 어린 몸으로 돌아가신 부모의 장지를 찾던 중 어느 스님의 가르침을 얻기 위해 여우산에서 삽슬봉까지 10리길을 맨발로 쫓아가 졸라서 결국 현재의 위치에 장지를 정했다는 일화도 있다. 또한 삽슬봉은 고려시대에 산정상에 봉수대(烽燧臺)를 만들어 북쪽의 평강의 진촌산 봉수대와 남쪽의 할미산(구수봉) 봉수대를 연결하였다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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