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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남시는 광주군에서 분리된 도시로 알고 있습니다.
하남시에 있는 문화재들에 대하여 자세하게 설명을 부탁해요^^
<답변>
(하남시의 문화재)
1.춘궁리 오층석탑
종 목 보물 제12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기 하남시 춘궁동 466
시 대 고려시대
경기도 광주 춘궁동에 있는 5층 석탑으로 2단의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의 네 모서리와 면의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새겨두었는데, 남쪽 면이 부서져 있어 그 안쪽으로 커다란 기둥돌이 들여다 보인다. 이 탑의 특징은 탑신부에서 드러난다. 첫층 몸돌이 2단인데, 아랫단을 4개의 네모난 돌로 두고, 그 위에 1장의 돌을 얹어놓았다. 이러한 예는 광주서오층석탑(보물 제109호)에서도 볼 수 있는데, 고려시대에 나타난 새로운 양식이다. 지붕돌을 구성하는 돌 역시 1∼3층은 4장, 4층은 2장, 5층은 1장이다. 지붕돌은 밑면에 1층은 5단, 2∼4층은 4단, 5층은 3단의 받침을 두었는데, 이러한 구성은 탑신부가 위로 갈수록 강하게 체감하는 느낌을 갖게 한다. 지붕돌 아래는 수평을 이루어 반듯하며, 경사는 완만하면서도 네 귀퉁이 선이 뚜렷하게 치켜올려져 있어 경쾌하다.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노반(머리장식받침)만이 남아 있다.
구조상 불규칙적인 면이 많지만, 각 부분의 끝맺음마다 규칙성이 느껴지고, 탑신의 비례도 조화로운 우수한 작품이다. 지붕돌 모서리의 치켜올려진 정도나 기단을 2단으로 구성한 점 등 통일신라 후기 석탑양식의 전형을 따른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지붕돌 받침수가 3∼4단으로 줄어든 점이나, 기단의 가운데에 새긴 기둥의 수가 줄어든 것 등으로 미루어 고려 전기인 10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2.춘궁리 삼층석탑
종 목 보물 제13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기 하남시 춘궁동 465
시 대 고려시대
경기도 광주 춘궁동에 있는 3층 석탑으로 2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부의 바닥돌과 아래층 기단의 가운데돌은 한돌로 짜여졌는데, 안타깝게도 대부분이 땅속에 파묻혀 있고, 아래층 기단 맨윗돌 일부가 깨지고 없어졌다. 윗층 기단과 탑신부의 각 층 몸돌에는 기둥 모양이 새겨져 있다. 지붕돌은 아래면이 반듯하고 윗면도 완만한 경사를 보이지만, 지붕돌 네 귀퉁이에서의 치켜올림이 뚜렷해 경쾌한 느낌이다.
이 탑은 1층 탑신과 2·3층 탑신의 크기가 줄어드는 비율이 따라 지붕돌도 작아지고 있어 전체적으로 매우 안정된 느낌을 주고 있다. 탑의 세부적인 양식도 신라 후기 석탑의 전형적인 면모를 잘 간직하고 있어, 만들어진 연대는 고려 중기 아래로 내려가지 않을 것으로 짐작된다. 1966년 보수공사를 실시할 때 탑 안에서 곱돌로 만든 소탑들이 발견되었다.
3.태평2년명 마애약사불좌상
종 목 보물 제981호
지 정 일 1989.04.10
소 재 지 경기 하남시 교산동 55-1 선법사
시 대 고려시대
질병에서 모든 중생을 구제해 준다는 약사불을 형상화한 것으로 바위 남쪽면에 전체 높이 93㎝로 새겨져 있다. ‘태평 2년 정축 7월 29일’이라는 글을 통해 만든 시기가 고려 경종 2년(977)임을 알 수 있다.
부드러운 얼굴을 하고 있고 옷은 왼쪽 어깨에만 걸쳐 입고 있으며 옷주름 표현에서는 가지런함이 엿보인다. 손바닥을 위로 한 왼손에는 약그릇이 놓여져 있으며, 오른손은 손바닥이 정면을 향하고 손가락을 위로 하고 있다.
몸 뒤편에 있는 광배(光背)는 머리광배와 몸광배를 계단식으로 새기고 있으며, 주위에는 불꽃무늬가 둘러져 있다. 대좌(臺座)는 연꽃잎이 아래로 향한 모양의 하대석 위에 4개의 짧은 기둥으로 이루어진 중대석이 있으며, 그 위에 5잎의 활짝 핀 연꽃이 불신을 떠받치고 있다.
비교적 보존 상태가 좋은 이 불상은 만들어진 연대에 대한 확실한 기록이 남아 있어 고려 초기 불상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4.미사리 선사유적
종 목 사적 제269호
지 정 일 1979.10.25
소 재 지 경기 하남시 미사동 557외
시 대 선사시대
광주(현재 하남시)미사리에 있는 선사시대 유적으로, 미사리는 원래 한강에 있는 섬이었으나 조정경기장이 만들어지면서 육지쪽과 연결되었다.
1962년에 발견되었고 1980년에 서울대학교를 중심으로 한 서울시내 4개 대학이 합동 발굴하였다. 현재 지표로부터 7개의 자연층위로 이루어졌는데 삼국시대 전기 층, 청동기시대 층, 신석기시대 층으로 구분된다. 청동기 시대층에서는 여러 점의 무문토기와 돌도끼, 돌끌, 돌그물추, 그리고 당시의 집터가 확인되었다. 신석기시대층은 주거지와 빗살무늬토기, 그물추, 화살촉, 돌도끼를 비롯한 생활도구와 불에 탄 도토리가 채집되었다. 신석기시대 층의 연대는 방사성 탄소측정결과 5253±140년 전으로 나타났다.
미사리 선사유적은 각 시대의 생활도구 및 집터가 발견되어, 중부지역 선사문화 연구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한국 선사문화 연구에도 중요하다.
5.하남 춘궁동동사지
종 목 사적 제352호
지 정 일 1991.08.24
소 재 지 경기 하남시 춘궁동 457-3
시 대 삼국시대
동북으로 남한산성과 이성선성이 보이는 분지에 있는 절터이며, 발굴조사시 금당터와 4곳의 건물터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부처을 모시는 건물인 금당은 당시 매우 큰 건물이었고, 금당안에는 지름 5.1m의 8각대좌 위에 부처를 모셨다.
유물로는 금동불상·기와·도자기·동으로 만든 불기류 등이 나왔고 ‘동사(桐寺)’라는 글씨를 새긴 기와가 나와 이 절의 이름이 동사였음을 알게 해준다. 절터에는 현재 두개의 석탑(보물 제12호, 제13호)이 있다.
후삼국시대에서 고려 전기에 이르는 시기에 지어졌으며, 웅장하고 거대한 규모의 절로서 조선 전기까지 남아 있었으나 그 후에 폐사된 것으로 보인다.
6.이성산성
종 목 사적 제422호
지 정 일 2000.09.16
소 재 지 경기 하남시 춘궁동 산 36번지외
시 대 삼국시대
이성산성은 남한산성이 있는 청량산에서 북쪽방향으로 내려오는 줄기와 만나 길게 맥을 형성하는 금암산의 줄기에 접해 있으며, 남쪽은 평야를 둘러싸고 있는 높은 산들이 있으나 북쪽은 작은 구릉만 있어 한강 주변지역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다. 따라서 이성산성은 배후의 평야지역을 방어하고 강북의 적으로부터 한강유역을 방어하기에 매우 유리한 입지조건을 갖춘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총길이 1,925m인 이성산성과 성내부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조사는 한양대학교박물관의 주관으로 지난 '86년부터 '99년간 7차에 걸쳐 실시되었으며, 삼국시대 건물지(8각, 9각, 장방형 등)와 부대시설(문지, 배수구 등), 목간, 철제마 등 총 3,352점의 유물이 출토되었고, 특히 3차 발굴조사 결과 출토된 목간 전면의 명문기록「무진년정월십이일 붕남한성도사」 중"무진년"은 603년으로 추정되고 있다.
출토된 토기들은 황룡사, 안압지 출토 토기들과 유사하여 통일신라토기로 판명되며, 신라가 5세기 중엽 한강유역을 점령한 후 축조된 것으로 역사상·학술상으로 매우 귀중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7.광주향교
종 목 문화재자료 제13호
지 정 일 1983.09.19
소 재 지 경기 하남시 교산동 227-3
시 대 조선시대
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
광주향교를 처음 지은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조선 숙종 29년(1703)에 옛 광주관아 서쪽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 세웠다고 한다.
가장 뒤쪽에 제사 공간인 대성전과 동무·서무가 있으며 그 앞으로 교육 공간인 명륜당과 동재·서재가 있어, 전학후묘의 전형적인 배치 형태를 갖추고 있다.
대성전은 앞면 3칸·옆면 4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안쪽에는 공자를 비롯한 중국과 우리나라 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명륜당은 앞면 5칸·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명륜당은 학생들이 모여 공부하는 강당이고, 동재·서재는 학생들의 기숙사이다.
다른 건물로는 내삼문·외삼문·수복실 등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책 등을 지원받아 학생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 있다. 경기지역에서 평지에 세운 유일한 향교이며 동재와 서재, 동무와 서무를 모두 갖춘 큰 규모의 향교이다.
8.하남시 상사창동 연자마
종 목 문화재자료 제82호
지 정 일 1991.04.12
소 재 지 경기 하남시 상사창동 346-2
시 대 조선시대
연자마는 연자방아를 가리키는 것으로 연자매·돌매방아라고도 한다. 말이나 소가 방아틀에 연결된 돌을 끌어돌림으로써 곡물껍데기를 제거하거나 밀을 빻았던 전통적인 농기구로, 이러한 일 외에도 연자매계를 통한 계원간의 강력한 협동의 기능을 하기도 하여 단순한 농기구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상사창동연자마는 굴리는 돌인 동그란 숫돌과 받치는 돌인 암돌로 되어있다. 숫돌에는 나무로 만든 사각형 방아틀이 숫돌을 감싸듯 부착되어 있어서, 소나 말이 이 틀을 끌어 돌리면서 방아를 찧도록 되어 있다.
방앗간은 원래 여덟 개의 기둥 위로 볏집으로 짠 지붕을 올린 팔각정자 모양의 건물이었으나 현재는 새로 보수해 놓은 모습이다. 마을에서 공동으로 사용해온 것으로 거의 원형상태로 잘 보존되어 있으며 제작연대는 1930년대로 짐작된다.
9.남한산 법화사지 및 부도
종 목 문화재자료 제86호
지 정 일 1994.07.02
소 재 지 경기 하남시 상사창동 산97
시 대 조선시대
법화사터는 남한산성 북문 근처의 법화골 벌봉 아래에 자리잡고 있다. 청나라 태종의 매부였던 양고리 장군은 ‘법화장군’이라 불리우기도 하였는데, 병자호란 때 조선에 들어왔다가 원두표 장군의 계략에 의해 이곳에서 전사하였다. 훗날 청태종이 그를 기리기 위해 절을 짓고 이름을 ‘법화사’라 하였다 한다.
절터에는 여러 건물터와 불상, 석탑조각, 기와조각 등이 흩어져 있으며, 절터 아래쪽으로 부도가 남아있다. 건물터로는 대웅전터와 산신각터로 추측되는 공터가 있고, 대웅전터 오른쪽으로 머리와 팔 등이 부서진 통일신라 후기의 불상이 있는데 훗날에 옮겨온 것으로 보인다. 건물터 아래로는 자연석으로 쌓아올린 벽이 조금 남아있는데, 절을 처음 지을 때 함께 만들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 돌벽 아래로 약간 떨어진 곳에 3기의 부도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부도란 승려의 무덤을 상징하는 것으로, 시신을 화장한 후 그 유골이나 사리를 모셔두는 곳이다. 앞에서 보아 왼쪽의 것은 6각 받침돌 위로 계란 모양의 탑몸돌을 올려놓았고, 나머지 2기는 6각의 받침돌 위에 종모양의 탑몸돌을 얹어놓았다. 특히 가운데 부도의 탑몸돌에는 ‘평원당선백대사’라는 글귀를 새겨 놓아 모신 사리의 주인공을 밝히고 있다.
비록 터만 남아있긴 하나, 남아 있는 여러 유물과 건물터는 조선 후기 당시의 절터구조와 건축 및 조각미술의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10.밀성군 묘역 및 신도비
종 목 하남시 향토유적 제2호
소 재 지 경기 하남시 초이중앙길 99-1 (초이동 319- 5번지)
시 대 조선시대
밀성군(1430~1479)은 조선조 세종의 다섯째 서자로 이름은 침이다. 자는 문지이고 어머니는 신빈김씨이다. 신도비란 대개 무덤 동남쪽에 남쪽을 향하여 세우는데, 신도라는 말은 사자의 묘로, 즉 신령의 길이라는 뜻이다.
※ 능(陵), 원(園), 묘(墓)의 차이점은?
조선시대의 묘제에 있어 왕실의 묘는 능, 원, 묘로 구분된다. [능]은 왕과 왕비의 무덤을 말하고 [원]은 왕의사친 왕세자와 그 비의 무덤, [묘]는 대군, 공주, 옹주, 후궁, 귀인 등의 무덤으로 위계에 따라 그 명칭을 다르게 정하였다.
11.사충서원 및 묘정비
종 목 하남시 향토유적 제3호
소 재 지 경기 하남시 동수막길 37 (상산곡동 100- 2번지)
시 대 조선시대
신임사화 때 희생된 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 4대신을 제향하기 위해 1725년(영조1년) 과천 노량진(지금의 노량진역)에 설립된 서원이다. 이들은 영조를 옹립하려다 소론의 무고로 모두 사사되었던 사람들인데, 영조는 즉위하자 이들을 배향하기 위해 사충서원을 건립할 것을 명하였다.
그러나, 1727년에 정미환국으로 소론정권이 들어서자 다시 4대신을 죄인으로 만들고 서원도 철폐하였다. 그 후 1740년 4대신이 다시 충신으로 판정되었으나 서원은 곧바로 복설되지 못하다가 1756년에야 복설되면서 사충서원이라 부르게 되었다.
사충서원은 일제강점기였던 1927년 봄 사충서원 자리가 철도용지로 편입되게 되어 당시 고양군 한지면 보광동(현재 용산구 보광동)으로 이건하였지만 한국전쟁 때 파괴되고 1968년 현재의 자리로 이전/중건하였다.
12.구산성지
종 목 하남시 향토유적 제4호
소 재 지 경기 하남시 망월동 387-12번지
시 대 조선시대
거북이 모양을 하고 있다하여 거북 구자와 뫼 산자를 써서 구산이라고 불리는 곳에 103위 성인 중 한 분인 김성우 안토니오 성인과 여덟 분의 순교자가 묻힌 성지가 있다.
구산성지와 구산성당은 조경이 뛰어나 드라마, CF, 영화촬영의 배경으로 자주 등장한다. 아늑한 분위기에서 고난과 영광의 발자취를 체험할 수 있는 곳으로 많은 카톨릭 신자와 관광객이 자주 찾는다.
특히 구산마을은 그들의 후손들이 대대로 순교자 묘소를 원형대로 보존하고, 200여년동안 교회를지키며 신앙생활을 지켜가고 있다.
13.교산동 건물지
종 목 하남시 향토유적 제5호
소 재지 경기 하남시 교산동 78-3번지 일원
시 대 통일신라~조선시대
교산동 건물지는 백제의 하남 위례성과 관련된 건물지로 오랫동안 주목을 받아오던 중 1999년부터 2002년에 걸쳐 기전문화재연구원에서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발굴조사 결과 백제의 하남 위례성과 관련된 유구 및 유물은 확인되지 않았으나 통일신라 ~ 조선시대에 걸쳐 장기간 사용되었던 건물지임을 알 수 있었다.
건물지에서는 통일신라 말기 유물에서 조선시대 유물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한 종류의 유물이 다량으로 출토되었다.
이 중 건물지의 성격과 관련되는 ‘관(官), ’광주객사(廣州客舍)‘ 등의 각종 명문와를 비롯하여 상품 백자 및 제기들이 출토되었다. 검단산의 한 줄기인 객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이 건물지는 북쪽을 제외한 동/서/남쪽에 대형 건물지가 ‘ㄷ’자 형태로 자리 잡고 있으며 그 외곽으로 토루가 둘러싸고 있다. 유적의 성격은 일단 고려시대 광주의 주치와 관련된 관영건축물로 추정된다.
14.운산군 묘역 및 신도비
종 목 하남시 향토유적 제6호
소 재 지 경기하남시 초이동 산4-1
시 대 조선시대
운산군이계(1453, 단종 1~1510, 중종 5)는 밀성군 이침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여흥 민씨이다. 자는 신옹, 시호는 공소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세조의 귀여움을 받았으며, 세조가 직접 사서와 경서를 가르쳤다. 1464년(세조10)에 운산군에 봉해졌으며 이후 흥록대부, 흥록상전 종부시의 도제조에 이르렀다.
1506년(연산군12) 중종반정 때에 병충분의익운정국공신의 호를 받았다. 1509년 (중종4) 6월 종친부 · 종부시 · 사옹원의 제조가 되었다. 첫째 부인 주부 곽득륜의 딸과 재취 김제군수 정자숙의 딸 사이에 3남 3녀를 두었는데, 첫째 아들은 철성군 이갱, 둘째 아들은 고성군 이강, 셋째 아들은 광성부정 이전이다. 큰딸은 파천군 윤탕노에게, 둘째 딸은 참봉 조신충에게, 셋째 딸은 유학 송세영에게 시집갔다.
1518년(중종 13) 4월 28일 남곤이 찬한 신도비가 세워졌다. 신도비는 높이 300㎝, 폭 82㎝, 두께 23㎝이다.
15.광주이씨 시조비 묘역
종 목 하남시 향토유적 제7호
소 재 지 경기 하남시 덕풍동 산24-1
시 대 고려시대
인화이씨는 광주이씨의 시조인 이당의 부인이다. 이당은 고려 말 국자감생원을 지냈고, 조선조에서 자헌대부 이조판서겸 자의금부사의 증직을 받았다. 이씨부인과의 사이에 인령, 원령, 희령, 자령, 천령 등 5형제를 두었는데, 모두 과거에 급제하였다.
특히 둘째 아들 원령은 둔촌 이집으로 봉순대부 판전교시사를 지냈는데, 고려시대 삼은으로 유명한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 도은 이숭인 등과 교류를 하였고, 학문에 있어서 명성이 높았다.
후손 가운데 조선조 문과급제자가 186명에 달하며, 이극배, 이준경, 이덕평 등 상당수가 영의정에 이르렀다.
1504년(연산군10) 갑자사화때에 묘소를 잃어버렸다가, 1754년(영조30)에 14대손 창하가 이곳에 묻혀있던 비석을 발견하여 지금의 묘소를 찾게 되었다.
이 묘역은 600년 이상된 묘소로서, 옛 광주군의 토성인 광주이씨문중의 시조비라는 특징과 하남시 여우산의 전설을 가지고 있는 풍수상의 명당으로 알려져 있다.
16.유홍 신도비
종 목 하남시 향토유적 제8호
소 재 지 경기 하남시 하산곡동 261
시 대 조선시대
유홍(1524 ~ 1594)은 증 영의정 유관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의령 남씨로 증 사복시정 남충세의 딸이다. 1549년(명종4) 사마시에 합격하고, 1553년(명종8)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삼사를 거쳐 충청/전라/경상/함경/평안 등 5도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1589년(선조22)에는 종계변무사로 명나라에 다녀온 후, 광국일등공신으로 기성부원군에 책봉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세자를 시종하고, 도체찰사로 관군과 의병을 지휘하여 왜군과 싸웠다. 왜군이 후퇴하자 먼저 서울로 올라와 관아와 도성을 정리한 공으로 1594년(선조27) 좌의정을 제수 받았다.
슬하에는 대술, 대건, 대진, 대일 등 4남과 2녀를 두었다. 시문에 능했고 장서가 많기로 유명하다. 호는 송당, 본관은 기계, 시호는 충목이며, 영의정으로 추증되었고, 저서로는 송당집이 있다.
1813년(순조13)에 세워진 신도비는 이조판서 장유가 짓고, 자손인 유한지가 썼는데, 예서체는 서예가들에게 높이 평가되어 찬사를 받고 있다.
신도비는 장방형의 대석위에 신석(을 세우고, 비두에 개석을 얹고 있으며, 높이는 167㎝, 폭 60㎝, 두께 54㎝이다.
17.신성군 묘역 및 석물
종 목 하남시 향토유적 제9호
소 재 지 경기 하남시 덕풍1동 산64
시 대 조선시대
선성군 묘역은 조선 제2대 국왕 정종의 넷째 아들인 선성군 이무생과 그의 부인 정씨/김씨/한씨를 비롯하여 그의 후손인 병산군/지산군/풍산부령/이원군/대구도호부사 이준도/동복공 등 선성군파 종문 10여기의 묘가 모셔져 있는 곳이다.
선성군 이무생은 1425년(세종 7) 중직대부 정윤, 1432년(세종 14) 원윤의 작호를 받았으며, 1454년(단종 2) 중의대부 선성군에 봉군되었고, 1872년(고종 9)에 상보국숭록대부 영종정경으로 추증되었다. 시호는 양정이다. 선성군 묘역에는 선성군 신도비를 비롯하여 조선시대 전 시기에 걸쳐 제작된 묘갈/장명등/상석/혼유석/양석/망주석/동자상/고석/향로석/문인석 등 수많은 석물들이 배치되어 있다. 선성군신도비의 비문은 이명상이 짓고, 윤용구가 글씨를 썼으며, 전액은 민병석의 솜씨이다.
또한 이준도의 묘갈은 윤근수가 비문을 짓고 김현성이 글씨를 써 더욱 돋보인다.
이 묘역은 조선시대 왕자 묘의 규모나 규범을 참고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며, 이곳의 석물들은 조선시대 석물의 변천과 형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학술적 가치가 있다.
18.현민 유진오박사 생가터
종 목 하남시 향토유적 제10호
소 재 지 경기 하남시 상산곡동 512-2, -5 (일명 섬말)
시 대 조선시대
현민 유진오박사(1906 ― 1987) 생가는 60년 전에 멸실되어 현재 집터만 남아 있다. 마을 사람들의 전언이나 대지입지 여건상 중부지방의 전형적인 “ㄱ”자형 민가이며 5칸 규모의 동향 초가집으로 추정된다.
북쪽 담은 흙담이고 서쪽과 동남쪽 담은 싸리담으로 되어 있었으며, 안채의 전면과 대칭 형태였던 대문은 싸리문이었다고 한다. 집 동북쪽에 화장실이 담과 맞다 있었고, 우물은 현재 남쪽으로 약 50m 정도 떨어져 있는 마을 공동 우물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19.세양공 박강의 묘역 및 석물
종 목 하남시 향토유적 제11호
소 재 지 경기 하남시 초이동 산5번지
시 대 조선시대
박강은 조선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반남이고 1406년(태종 6) 좌의정을 지냈던 박은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1444년(세종 26)에 대호군에 임명된 후 군기감정, 공조참의를 지냈고, 1450년(문종 즉위년)에는 황해도도절제사, 이듬해에는 황해도도관찰사 겸 병마도절제사가 되었다. 1452년(단종 즉위년)에는 강원도관찰사, 중추원부사가 되었고, 1455년(세조 1)에는 세조가 즉위하는데 협력한 공으로 추충좌익공신 동지중추원사 금천군에 봉해졌으며 청백리에도 선정되었다. 1457년(세조 3)에는 지중추원사가 되었고 1460년(세조 6) 왕을 호종하다 순직하였다.
시호는 세양이다. 인종 때 증손녀인 인성왕후의 추은으로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오위도총부도총관에 추증되었고 그의 부인인 통진현부인 순흥안씨는 정경부인에 추증되었다. 현재 묘역에 조성되어 있는 석물들 중 박강 묘표, 순흥안씨 묘표 및 문인석 4기는 조선시대에 제작된 것으로서 당시 유행하던 석조미술의 시대상을 잘 반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