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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도 자 료♥ 스크랩 아리랑 찬송가
시은엄마 추천 0 조회 90 12.02.02 11:0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아리랑 찬송가 미국

아리랑이 미국과 캐나다에서는 찬송가로 불린다.
 

     
우리나라의 민요 아리랑이 미국과 캐나다에서 찬송가로 불려지고 있습니다.

현존하는 인류 최고의 찬송 알이랑이 하느님의 섭리가 역사 하사

이 마지막 때에 천국 백성들의 찬송가로 재탄생 한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주일 예배 시간에 이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할렐루야!

 

 

 

관련기사1: < “아리랑, 미(美) 찬송가집에 수록돼 있죠” > <--여기에 들어가시면 악보를 구할 수 있습니다.

 

관련기사2: < 아리랑의 비밀과 한국인의 정체성 >

 

 

 

알이랑 코리아 제사장 나라

유석근 목사

cafe.daum.net/ALILANG

 

인류 최고(最古)의 찬송가 아리랑[1]


    

    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 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명난다


  행마다 열자씩 4행 40자의 이 분장(分章) 가요. 이 노래를 우리는 ‘아리랑’이라고 부른다. 아리랑…. 이 노래만큼 우리 민족의 애환을 달래 온 노래도 없으리라. 슬플 때도 아리랑, 기쁠 때도 아리랑…. 아리랑은 우리 겨레의 역사와 함께 민족의 한과 기쁨을 노래해 온 단 하나의 노래이다.


  아리랑을 부를 때 한국인은 일체감을 느낀다. 아리랑은 흩어진 겨레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힘이며, 우리 겨레를 강력하게 결속시켜 주는 한민족 공통의 정서이다. 그래서 오늘처럼 남북이 분단되어 올림픽 단일팀이 하나의 국가(國歌)를 부르기 어려울 때는 ‘아리랑’을 국가처럼 합창하여 한 민족임을 확인한다.


  실로 아리랑은 시대와 지역, 신분과 사상을 초월하여 우리 겨레의 피 속에 끈끈하게 흘러 내려오는 하나의 정서이며, 앞으로도 끊임없이 이어나갈 우리의 정신이다.


  한국인은 아리랑을 부를 때 저절로 흥이 난다. 기쁜 자리 슬픈 자리 없이 언제 어디서나 불러서 기쁘고, 들어서 정다운 노래! 무슨 이유로 ‘아리랑’은 한국인의 마음에 그토록 크게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일까? 아득한 옛날부터 남녀노소 상하귀천 없이 입을 모아 불러 온 노래…. 들어도 들어도 싫지 않은 이 노래는 과연 언제부터 무슨 연유에서 불려지기 시작한 것일까? 현재까지 아리랑의 비밀이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두고 오랫동안 연구가 거듭되어 왔으나 시원한 해답은 찾을 수 없었다.


  아리랑은 매우 단순한 노래이다. 그러나 아리랑은 굉장히 큰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특별한 노래이다. 아리랑은 놀랍게도 우리 한민족의 선조들이 홍수 후 셈계의 일신신앙을 가지고 동방으로 이동할 때, 험한 산과 높은 고개, 그리고 고원들을 넘어오면서 부른 ‘찬송가’였다(창 10:21~30).


  아리랑

 

 

  가장 중요한 것은 ‘아리랑’이라는 말의 의미이다. 모든 종류의 아리랑 노래에서 변하지 않고 쓰이고 있는 후렴구가 ‘아리랑’이다. 그만큼 한국인에게 ‘아리랑’이라는 말은 특별한 뜻과 사연이 배어 있다는 증거다. 사실 한국인은 ‘아리랑’이라는 말 자체에 친근감을 느끼며 흥분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아리랑 연구가는 ‘아리랑’은 뜻이 없는 단순한 후렴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단지 흥을 돋우고 음조를 메워나가는 구실을 하는 말이라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아무 뜻도 없는 말이 한국인의 마음을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사로잡아 왔단 말인가? 당치도 않은 소리다. 그가 그렇게 알맹이 없는 결론을 내린 것은 ‘아리랑’이라는 말의 뜻이 무엇인지 알아내기 위해 아무리 궁구를 해보아도 그 의미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만에 하나 그의 주장대로 ‘아리랑’이 단순히 ‘흥을 돋우고 음조를 메워나가는 구실을 하는 아무 뜻이 없는 말’이라고 치자. 그럴 경우에도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왜 하필이면 그것이 ‘아리랑’이라는 말인가? 꼭 그래야만 할 이유가 없다. 차라리 ‘아리랑’은 끝까지 해명이 필요한 어떤 특별한 뜻이 있는 말로 간주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더욱이 ‘아리랑’은 후렴구다. 후렴(refrain)이란 노래 곡조 끝 혹은 앞에 붙여 반복해 부르는 짧은 가사를 말한다. ‘아리랑’이 노래의 후렴구라는 사실은 ‘아리랑’이라는 말이 굉장히 중요한 뜻을 담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왜냐하면 대부분 후렴은 그 노래의 중요 메시지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아리랑’에 담겨 있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아리랑’에는 한국인의 원형과 정체가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아주 귀중한 비밀이 감추어져 있다. ‘아리랑’은 선민 한민족의 키워드(keyword)이다.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아리랑’은 한자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아리랑’이라는 한자가 기록된 책이 어디선가 한 권이라도 발견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전혀 없다. 왜냐하면 아리랑 구전으로만 전해온 순 우리말의 민요이기 때문이다. ‘아리랑’은 원래 ‘알이랑’이다(알이랑→아리랑).


     알이랑 알이랑 알 알이요

     알이랑 고개를 넘어 간다

 

  그런데 오랜 세월동안 글이 없는 가운데 구전으로만 전해지다 보니,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로 부르게 되었고, 결국 가사가 그렇게 굳어지고 만 것이다. 그러니까 원래의 노랫말을 잃어버린 것. 따라서 아리랑이 진정 어떤 노래인지를 알려면 먼저 가사부터 “알이랑 알이랑 알 알이요”로 복원해야 할 것이다.


  ‘알이랑’은 ‘알’과 ‘이랑’으로 구분된다. ‘알’은 ‘하느님’을 의미한다. ‘하느님’이라는 신명(神名)은 처음에 ‘알’이었다. 그런데 ‘알’ 앞에 ‘한’이라는 관형사를 붙이고, ‘알’ 뒤에 ‘님’이라는 존칭명사를 붙여서 ‘한알님’이라고 했다. 그것이 한알님→하날님→하늘님→하느님으로 바뀐 것이다. 그래서 ‘알’은 ‘하느님’이다.


  창조주 하느님을 뜻하는 원시 언어가 ‘알’이었다. 유대인의 ‘엘(EL)’, 아랍인의 ‘알아(알라)’는 바로 이 ‘알’에서 파생된 말이다(‘알라’는 아랍어로 유일신 하느님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인인 아랍 사람들도 이 단어를 사용한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하느님의 이름인 ‘엘로힘’(단수는 Eloah)은 ‘알라(alah)’라는 말에서 유래했다(벌코프 조직신학 239쪽 *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간). 즉 창조주 하느님을 뜻하는 인류 최초의 신명이 우리말 ‘알’이었는데, 노아에 의해 홍수 이후의 세대로 전해졌다.


  ‘이랑’은 “~와 함께”라는 토씨로서(언어학자들은 ‘토씨’는 6천년 이상 간다고 한다) 영어의 ‘With’이다(예, 갑돌이랑=갑돌이와 함께, 갑순이랑=갑순이와 함께). 따라서 ‘알이랑’은 ‘하느님과 함께(With God)’라는 말이다.

                                                                                                            - 계  속

 

알이랑민족회복운동 

유석근 목사

club.cyworld.com/alilang  

인류 최고(最古)의 찬송가 아리랑[2]

 

 

  창조주 유일신의 이름 ‘알’

  

  왜 ‘알’이 유일신 하느님을 뜻하는 말이었을까? ‘알’이 수많은 생명을 낳기 때문이다. 쌀도 볏알(볍씨)에서, 과실도 씨알에서 생기고, 하늘과 땅과 바다의 허다한 생물들이 또한 ‘알’에서 탄생한다. 그래서 ‘알’은 ‘모체(母體)’요, ‘근원(根源)’이요, ‘시작(始作)’과 같은 뜻을 갖는다. 따라서 창조주 하느님도 ‘알’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만물의 모체이시고 근원이시며 시작이시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 한국인은 그 ‘알’이 ‘큰 모체’이시고 ‘큰 근원’이시며 ‘커다란 시원(始原)’이시기에 ‘알’ 앞에 ‘한’이라는 관형사를 붙였다. 또한 그 ‘알’이 인격적 존재이심으로 ‘알’ 뒤에 ‘님’이라는 존칭명사를 붙였다. 그래서 창조주 유일신을 ‘한알님’이라고 부른 것이다. 이 ‘한알님’이 한알님→하날님→하늘님→하느님으로 변한 것이다. 따라서 ‘알’은 하느님을 뜻하는 말이다.

  

  더욱이 ‘하늘’은 둥굴어서 ‘알’인데, ‘하늘’이라는 말도 처음에는 ‘한알’, 즉, ‘큰 알(大卵)’이었다. 한알→하날→하늘로 변한 것이다. 만물을 내신 한알님(하느님)은 한알(하늘)에 계신다. ‘큰 알(大卵)’, ‘큰 모체(母體)’, ‘큰 근원(根源)’ 같은 뜻으로서의 ‘한알’에 ‘하늘’이라는 말의 기원이 있는 것이다.

  

  지난날의 우리 신화 ? 전설에서, 한 시조(始祖)의 탄생이 난생(卵生)으로 이어지던 것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신라를 세운 박혁거세(밝불거뉘)는 망아지가 알을 품고 있다가 뛰쳐나간 그 알에서 태어났다. 그 밖에도 비슷한 이야기는 많다. 짐승이나 사람이 알을 낳는다. 너무도 이상해서 갖다 버린다. 그러면 새와 짐승들이 그 알을 보호하며 노래 부른다. 그렇게 하늘의 뜻에 따라 보호를 받으며 태어난 것이 고주몽(高朱夢)이기도 하고, 금와(金蛙)이기도 하다.


  ‘알’이라는 것은 우리 조상들에게 있어서 사물(事物)의 핵심이었다. 그리고 ‘시작’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커다란 시원(始原)’으로서의 ‘알’이 곧 한알→하날→하늘로 된 것이다. 그러한 하늘이었기에 삼라만상(森羅萬象)은 곧 당신의 것이었다. 당신이 낳으시고, 당신이 기르시고, 또 당신이 주재하시는 것이었다. 홍수 전 사람들이 창조주 유일신을 ‘알’이라고 불렀던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하느님을 뜻하는 성경 원어 ‘엘(EL)’은 바로 이 ‘알’에서 가지 쳐 나온 말이다. ‘엘’은 ‘다스리는 이’, ‘강하신 분’이란 뜻을 가진 신명(神名)으로 셈어(Shemitic)에서 전반적으로 사용된 ‘하느님’ 또는 ‘신성(Divinty)’에 관한 호칭이다. 이 ‘엘’은 바로 ‘알’의 변음이다. 홍수 이전의 사람들은 하느님을 ‘알’이라고 불렀다. 이 ‘알’이라는 단어는 창조주 하느님을 뜻하는 일종의 원형 언어로서 노아에 의해 홍수 이후의 세대로 전승 되었다.


  노아는 홍수 후 방주가 머무른 산의 이름을 ‘하느님의 산’이라는 뜻으로 ‘알뫼’(알산)라고 했다. 여기에서 방주가 안착한 지역인 ‘알뫼니아’(아르메니아)라는 지명이 나왔으며, 그 산은 오늘날까지 ‘알산’, 곧 ‘아르 산’이라고 불리어진다. 창세기에는 방주가 아라랏 산에 정박했다고 기록되어 있다(창 8:4). 아라랏 산은 터키 동부 고원지대에 위치한 산인데, 터키어로 ‘아르 다으’ 즉 ‘아르 산’이라고 불린다. 이 ‘아르’는 원래 ‘알’에서 나온 말이다. 아라랏 산은 터키에서 가장 높은 해발 5137m의 ‘대 아르’와 해발 3985m의 ‘소 아르’로 구성돼 있다. ‘대 아르’는 일 년 내내 흰 눈으로 덮여 있는데, 만년설을 쓰고 있는 이 ‘대 아르’가 창세기의 아라랏산으로 추정되고 있다.

              

  ‘알’이란 단어는 고대에 대단히 소중한 말이어서 인명과 지명에 널리 사용되었는데, 노아로부터 일신신앙을 계승한 ‘셈’은 자신으로부터 일신신앙을 상속한 그의 셋째 아들의 이름을 ‘알밝삿’(아르박삿)이라고 했다. 또한 ‘알밝삿’의 증손자로서 에벨로부터 셈계의 일신신앙 계승한 욕단은 자신의 맏아들의 이름을 ‘알모닷’이라고 지었다. 더 나아가 ‘알아랏’, ‘알뫼니아’, ‘울알’, ‘알타이’, ‘알알해’, ‘알마타’, ‘알류우산열도’, ‘알라스카’와 같은 지명들은 모두 창조주 하느님의 최초 신명(神名)인 ‘알’에 근거를 둔 말이다.


  홍수 후 ‘알’은 주로 셈 계통의 민족들에게 그들의 신(神)을 나타내는 말로 쓰여져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유대인은 ‘엘(EL)’이라는 말로 쓰고 있는데, ‘이스라엘’(하느님과 겨루어 이김)의 ‘엘’을 비롯하여 ‘브니엘’(하느님의 얼굴), ‘엘 엘리온’(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엘 샤다이’(전능하신 하느님), ‘엘 찌드케누’(치료하시는 하느님)라는 말이 있고, 아랍인들은 그들이 믿고 있는 신의 이름을 ‘알’이라고 부르는데 ‘알아’(알라)가 그것이다. 특히 한국인은 아직도 창조주 하느님을 ‘알’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하느님’의 어원이 ‘한알님’이기 때문이다.

 

 

   ‘알’이 고대 하느님의 이름이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좋은 사례로서 ‘메아리’를 들 수 있다. ‘메아리’는 본래 말이 ‘뫼알이’ 이다. 이 말은 ‘뫼의 알’, 즉 ‘산신’을 말한다. 산에 가서 ‘야호~’ 하고 고함을 치면 ‘야호~, 야호~, 야호~’ 라고 맞은편의 산이 있는 숫자만큼 되돌아오는 소리를 우리 조상들은 산신의 소리로 연상했던 것이다. ‘엘(EL)’, ‘얼’, ‘일’과 같은 말들은 바로 이 ‘알’의 변음이다.

  

  하느님인가, 하나님인가?

  

  우리 한국인은 아득한 옛날부터 창조주 유일신을 ‘한알님’, 즉 하느님이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성경에 계시된 유일신 하느님을 표시하는 최고 ? 최적의 단어이다. 왜냐하면 ‘알’이라는 말 자체가 노아에 의해 전해진 창조주 하느님을 뜻하는 지상 최초의 원형 언어일 뿐만 아니라, 그 ‘알’을 수식하는 ‘한’이라는 말 때문이다. 우리말 ‘한’은 그 의미가 매우 다양한데, ‘한알님’(하느님)의 경우 ‘한’은 적어도 다음 세 가지 의미를 지닌다.


  1) ‘하나’(一, one)라는 의미: ‘한 개’, ‘한 명’, ‘한 사람’의 ‘한’은 모두 하나(one)를 뜻한다.


  2) ‘크다’(大, great)라는 의미: 할아버지는 ‘한아버지’에서, 할머니는 ‘한어머니’에서 파생된 말로서, 여기서 ‘한’은 ‘크다’(great)라는 뜻이다. 단군을 ‘한배검’이라고 하는데, ‘한배검’의 ‘한’ 역시 ‘크다’(great)를 의미한다.


  3) ‘가운데’(中, middle)라는 의미: ‘한가운데’, ‘한복판’, ‘한가위’, ‘한겨울’ 등은 ‘가운데’(middle)를 뜻한다.


  따라서 ‘하느님’(한알님→하날님→하늘님→하느님)이라는 말은 ‘한 분(only one)이신 하느님’이라는 뜻이고, ‘크신(great) 하느님’이라는 뜻이며, ‘중심(middle)이신 하느님’이라는 뜻이다. ‘하느님’이라는 우리 토박이말은 이 세 가지 의미를 모두 함축한다. 이 얼마나 뛰어난 신명(神名)인가? 유일신관을 나타내는 말로서 이 이상 더 좋은 말은 세상에 다시없다.


  우리 한민족에게 ‘하느님’은 잡귀신 중의 하나가 아니다. 아주 두드러진 지위를 가진다. ‘하느님’은 성경 창세기에 계시된 유일신 하느님과 동일한 신인 것이다. 우리 조상은 여호와를 ‘하느님’으로 부르며 예배했던 것이다. 분명히 ‘하느님’은 한민족에게는 천지의 주인인 동시에 또한 민족 조상의 하느님이시다(함석헌, 「뜻으로 본 한국역사」, 한길사, 1933년, 105쪽).


  ‘하느님’ 즉 ‘하늘님’은 하늘을 신격화한 명칭이 아니다. 예를 들어 ‘나랏님을 존경하자’라고 했을 때, 나라를 인격화하여 존경하자는 말이 아닌 것과 같은 이치다. ‘나랏님’은 ‘나라를 다스리는 이’를 뜻하는 것으로서 임금을 존경하자는 말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을 공경하자’라는 말은 하늘을 공경하자는 말이 아니라, 하늘에 계시는 ‘하느님 아버지(Heavenly father)’를 공경하자는 뜻이다.


  우리 겨레가 기독교를 쉽게 이해하고 받아들인 까닭은 종래 오천 년 동안 내려오며 우리의 마음속에 살아있던 이 ‘하느님 사상’, 즉 유일신 사상이 있었기 때문임을 아무도 부정하지 못한다. 실로 ‘하느님’은 우리 한민족에게는 잡신과 구별되는 아주 자연스러운 창조주 유일신의 명칭인 것이다. 심지어 무당들까지도 하늘에는 최고의 신이 있음을 인정하고 그 분을 다른 귀신들과 구별했다.

  

  그러나 한글 개역성경은 ‘하느님’ 대신 ‘하나님’으로 표기했는데 그것은 매우 어리석고 애석한 일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문법적으로 옳지 않은 말인데다가, ‘하느님’과는 달리 의미도 빈곤한 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으로서 단지 ‘하나(one)이신 신(神)’이라는 뜻만을 나타낼 뿐이다. 그런데 왜 이런 말을 써야 하는가?


  한글 개역성경이 ‘하느님’ 대신 ‘하나님’을 쓰게 된 것은 여호와는 한 분 뿐이라는 유일신관에 기인하여 ‘하나+님’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가령 무엇인가를 좀더 잘 해보려다가 오히려 일을 더 망친 그런 경우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선 문법적으로 그릇된 말이며, 신학적으로도 큰 문제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라는 수사에다 ‘님’이라는 존칭 명사를 붙인다는 것은 어법에 맞지 않는다. ‘~님’은 남의 이름이나 또는 다른 명사 위에 붙여 높임의 뜻을 나타낸다. 예를 들면, ‘선생님’은 ‘선생을 높인다’는 뜻이다. 그런데 하나, 둘, 셋과 같은 수사는 높일 필요가 없다. 그래서 수사에는 ‘님’이라는 존칭 명사를 붙이지 않는다. ‘하나님’은 문자 그대로 ‘하나를 높인다’는 뜻인데, ‘하나+님’, ‘둘+님’, ‘셋+님’은 어법에 어긋나는 말이다. 반드시 ‘one+님’을 표기하려면,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의 관형사형인 ‘한’을 붙여 ‘한님’이라고 해야 하는 것이 문법적으로 원칙이다. 그래야 어법상 무리가 없다. 그러므로 애국가는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로 표기했으며, 공문서와 교과서에도 ‘하느님’으로 통일하여 표기했다. 문법적으로 옳지 않은 말을 사용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한글 학자 최현배는 ‘하느님’으로 써야 하는 이유로 다음 세 가지 근거를 들었다.


  1) 하늘은 중세어 ‘하날’이 변한 것으로 제2음절의 고어<?>는<―>로 바뀌는 것이 우리말의 일반적인 음운 현상이다.


  2) 하느님은 ‘하늘에 계신 님’을 줄여 부르는 말로 보아야 한다.

  

  3) 기독교의 신이 유일신임을 강조하기 위하여 ‘하나+님’으로 생각한다면 잘못이며, 기독교에서나 한국의 전통 사상에서나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사상을 벗어날 수 없다.


  아주 타당한 지적이다. ‘하나님’은 어법에 맞지 않는 그릇된 말이다. 그것은 분명히 언어의 오용(誤用)이다. ‘하느님’이 문법적으로 올바른 말이다.

  

  더욱이 그리스도인이 섬기는 창조주 하느님은 ‘한 분(only one)이신 하느님’이시오, ‘크신(great) 하느님’이시며, ‘중심(middle)이신 하느님’이신데, ‘하느님’은 이 모든 의미를 다 담고 있다. 매우 성경적인 신명(神名)이 ‘하느님’인 것이다. 왜 이렇게 좋은 말을 버려야 하는가? 


  ‘하느님’은 우리 겨레의 정서에도 잘 영합하는 아주 훌륭한 말이다. 우리는 이 뛰어난 신명(神名)을 다시 찾아야 한다. 1971년에 나온 공동번역 성경은 ‘하느님’으로 표기했다. 한글 개역성경도 ‘하느님’으로 고쳐 써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한글 개역성경이 ‘하나님’을 ‘하느님’으로 고쳐 써야 할 더 중요한 이유는 신학적인 문제에 있다. ‘하나님’은 신학적으로 ‘삼위일체(三位一體)’를 부정하는 ‘단일신론’, 즉 이단을 옹호하는 이름이 된다는 것이다. 온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여호와 하느님은 유일하신 분이지만 ‘하나’는 여호와가 될 수 없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섬기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삼위일체’이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름을 ‘하나’로 못 박으면 어떤 의미에서든지 ‘삼위’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논리상 ‘하나(one)’는 어디까지나 ‘하나’이지 ‘삼위’가 될 수는 없다. 그래서 유대교나 회교, 그리고 현대의 유니테리안파가 믿는 단일신론에 빠지는 것이다.

  

  여호와 하느님은 ‘유일신’이시지 ‘단일신’이 아니다. 신학적으로 ‘유일신’과 ‘단일신’은 낮과 밤이 다른 것처럼 다른 것이다. 성경에 계시된 하느님은 한 분이시지만, 그 분은 삼위일체이신 한 분의 하느님이신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이라는 말은 ‘삼위일체 유일신’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적합하지 않다.


  실로 어원상의 의미로나 문법적으로나 신학적으로나 ‘하나님’보다는 ‘하느님’이 유일신관을 나타내는 가장 좋은 이름이다. ‘하느님’, 즉 ‘한알님’은 무슨 회의를 해서 갑자기 만든 이름이 아니다. 그것은 홍수 이전 사람들이 부르던 창조주 유일신인 ‘알’에서 유래된 것으로 역사상 가장 오래된 신명(神名)인 것이다.


  ‘알’에서 가지 쳐 나온 말 ‘얼’

  

  ‘얼’이라는 토박이말도 ‘알’에서 가지 쳐 나온 말로서 역시 ‘신(神)’, ‘넋’과 같은 의미의 말이다. ‘정신 나간 사람’을 두고 ‘얼간이’(얼이 간 사람) 혹은 ‘얼 빠진 사람’이라고 하고, ‘얼떨떨함’이나 ‘얼이둥절’(어리둥절)은 ‘정신을 가다듬지 못한 상태’이며, ‘얼뜨기’는 ‘다부지지 못하고 겁이 많은 사람’을 뜻하며, ‘얼버무림’은 ‘제대로 버무리지 못함’을 이르는 말이다. 이렇게 ‘얼’은 ‘정신’을 뜻하는 우리의 훌륭한 토박이 말이다. 이 ‘얼’이라는 말의 시작이 바로 ‘알’이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고대 수메르어에서도 인간의 정신(Human spirit)을 뜻하는 단어가 ‘A-LA’였다는 것이 뒷받침 해준다.* 이 ‘얼’을 드러내는 곳이 인체에 있어서는 ‘얼골’(얼골→얼굴)이다. ‘얼골’을 보면 그 사람의 영적인 상태, 즉 ‘얼’이 어떤 것인가를 대충 알 수 있다. ‘얼골’에 그것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몸 안에서 ‘얼’이 사라지면 송장이 되고 나중엔 뼈만 남는데, 그것은 더 이상 ‘얼골’이 아니므로 ‘해골’이라고 한다.

  

  한국인의 무덤이 동그란 까닭 

  

  한국인의 무덤은 동그란 모양의 봉분인데, 그것은 ‘큰 알’을 뜻한다. 셈의 후손으로서 하늘에 제사지내며 삶을 영위했던 한국인의 선조들은 스스로 천손민족(天孫民族), 즉 ‘한알님’의 백성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에게 죽음이란 ‘한알’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무덤이 동그란 모양의 ‘알’인 것이다. 그들은 ‘한알님’의 백성으로서 ‘알’에서 왔으니 ‘알’로 돌아가고자 했다. 실로 한국인은 ‘알이랑 정신’으로 살고 죽는 ‘알이랑 민족’이 아닐 수 없다.


                     

  이제 우리는 ‘알’이 원래 무슨 말인지 확실히 깨달았다. 그것은 홍수 이전 최초의 인류 가계로부터 내려온 지상 최초의 낱말 중 하나로서, 고대에 창조주 유일신을 뜻하는 하느님의 이름이었다. 그래서 ‘알이랑’은 ‘하느님과 함께(With God)’라는 말이다. 이제까지 ‘아리랑’에 대해 수긍할 만한 해석이 없었던 이유는 ‘아리랑’은 본래 ‘알이랑’이었다는 이 단순한 사실을 몰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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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메르인들은 머리털이 검고 곧으며, 후두가 편평하며, 태음력을 사용하였고, 한국어와 어순이 비슷한 교착어를 썼다. 대영백과사전에는 수메르인의 교착어가 한국어와 같다고 지적하고 있다. 수메르어와 한국어는 뜻과 음이 일치하는 단어가 아주 많이 있다. 한국어의 광명을 뜻하는 밝은 BAR-BAR, 금은 GUSH-KIN(KIN은 금, 누런 금속이라는 뜻, 삼국시대까지만 해도 우리 겨레는 금은 ‘구지’라고 했다), 길은 GIR, 굴(穴)은 GUR, 구릉(산보다 낮은 언덕)은 KUR, 노래는 NAR, 님(높은 분에 대한 존칭어)은 NIM, 달(月)은 DAL, 대갈(머리)은 DAD-DIL, DA-GAL, 독(장독)은 DUG, 밭(田)은 BAD, 빛은 BIR, 어른은 UR, 하늘(한?)은 AN-UR(가장 높다는 뜻), 칼은 KAR, 엄마는 UMMA, 아빠는 ABBA등 유사한 말이 굉장히 많다. 특히 수천 년 동안 거의 변화가 없었던 인칭대명사나 지시대명사는 더욱 일치한다. 나는 NA(나), 너는 NE(네), 그는 GE(게), 지시대명사 이는 I(이)로 각각 발음되고 뜻도 같다. 수메르인은 우리처럼 머리카락을 묶어 상투를 틀었다. 그리고 우리와 똑같은 형태의 씨름을 했으며, 고구려, 가야, 신라 등에서 쓰인 회도를 사용했다. 또한 파미르 고원이 원산지인 파를 즐겨 먹었다. 이 모든 것들은 한국인과 수메르인이 같은 종족이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들은 대홍수 후 동방으로 이동했던 우리 한국인들의 형제 족속들로서, 바이칼호(天海)에서 출발하여 서쪽으로 다시 역이동해 중앙아시아(실크로드)를 거쳐서 메소포타미아 지방에 들어가 문명을 일으킨 것으로 추정된다. “History begins at Sumer”의 저자인 S. N. Krammer 박사는 수메르인은 동방에서 왔다고 주장한다. “The Genesis of Civilization”의 저자인 David M. Rohl 박사는 수메르(Sumer)라는 지명은 노아의 아들 셈(Shem)에서 유래했다고 단정한다. 우리 한국인은 셈의 후손이다. 추천 도서: ①새뮤얼 노아 크레이머, 역사는 수메르에서 시작되었다(서울, 가람기획), 2000 ②데이비드 롤, 문명의 창세기(서울, 해냄), 1999 ③문정창, 한국 ? 슈메르 이스라엘 역사(서울, 한뿌리) 1979.   

                                                                                                           - 계  속


알이랑민족회복운동 

유석근 목사

club.cyworld.com/alilang 

 

인류 최고(最古)의 찬송가 아리랑[3]

 

 

  고개를 넘어 간다


  “고개를 넘어 간다”는 가사는 무슨 뜻일까? 그것은 고대 한민족이 이란고원을 지나 파미르고원을 넘어, 천산산맥과 알타이산맥을 넘어갔다는 말이다. 실로 수많은 고개를 넘은 것이다.


  ‘파미르 고원’을 지나(支那) 사람들은 총령(蔥嶺: 파총, 재령)이라고 하는데, 이는 한국어 파(蔥) 마루(嶺) 그대로 파마루(파미르)이다. 지리학에서도 역시 파미르 고원(蔥嶺)에서는 파(蔥)가 많이 야생한다고 한다. 파미르 고원은 ‘파마루’로서 파(蔥)가 많이 자생하는 산마루(嶺)이기에 파마루(파머루) 고원인 것이다. ‘파미르’의 어원이 한국어 ‘파마루’이다. 한국인은 남자를 사내라고 한다. 사내는 원래 ‘산아이’가 [산아이→사나이→사내]로 변한 것이다. 우리 선조들이 고대에 산지, 즉 파미르고원→천산산맥→알타이산맥을 넘어 동방으로 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언어적인 연관성은 고대 한국인이 참으로 ‘파미르고원’을 지나 ‘천산산맥’을 넘고 ‘알타이산맥’을 넘어서 동방으로 이동해 왔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고고학적 증거이다.

 

  알타이 고개를 넘어서 동쪽으로 조금 더 이동하면 바이칼(밝알) 호수가 나온다. 한국인의 선조들은 이 바이칼 호수를 거쳐 동쪽으로 계속 이동하다가 마침내 아시아 동녘에서 제일 높고 밝은 산인 한밝산(犬白山→白頭山)에 이르러 배달나라를 세웠던 것이다. 백두산 산정에 올라 창조주 한알님께 천제(天祭)를 드린 후에!(우리 겨레가 평지가 아닌 산꼭대기에서 드렸던 산정제사는 대홍수 후 노아가 알아랏 산정에서 거행했던 역사적 ‘제천의식’을 답습한 것이었다).


  알이랑 알이랑 알 알이요

  알이랑 고개를 넘어 간다


  따라서 이 노래 가사를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이요

                   하느님과 함께 고개를 넘어 간다.

                   (with God, with God, with God, just God.

                       accompany with God, I will take over the mountains.)


  ‘아리랑’은 창조주 하느님을 섬기던 고대 한국인이 이 땅에 오기까지 수많은 산과 언덕과 고원들을 넘어 오면서 부른 ‘찬송가’였던 것이다. ‘아리랑’이 우리 겨레의 마음속에 그토록 크게 자리 잡고 있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것은 겨레의 역사와 가장 오랫동안 함께 해온 민족의 숨결이며 역사의 맥박이기 때문이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이란 누구를 뜻할까? 문맥상 그들은 “하느님과 함께 고개를 넘어 가는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이 된다. 왜냐하면 “알이랑 고개를 넘어 간다”는 바로 앞의 가사는 “하느님과 함께(with God) 고개를 넘어 간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 가사는 유일신 하느님을 섬기는 자들, 곧 천손민족의 찬송이며 믿음의 고백이었다. 그러므로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이란 창조주 하느님을 불신, 배척하는 무리들을 의미한다.  


  십리도 못가서 발병 난다


  “십리도 못가서 발병 난다”는 것은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에 대한 악담이나 저주가 아니다. 만약 노래 가사가 “나를 버리고 가는 놈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 난다”고 했다면, 그것은 실제로 발에 병이 나라고 욕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가사는 가는 놈이 아니고 가시는 님이다. 따라서 “십리도 못가서 발병 난다”는 것은 발병이 나서라도 더 떠나가지 못하고 나의 품으로 되돌아오라는 회귀원망(回歸願望)의 연정(戀情)을 노래한 것이다.


  즉 창조주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버린 자들을 향해 다시 순수한 하느님 신앙으로 되돌아 올 것을 사랑으로 촉구하는 것이다. 이렇게 겨레의 노래 ‘알이랑’에는 “하느님을 위한 열정”과 “잃은 자를 위한 연민”이 함께 깊이 배어 있다. 즉 경천애인(敬天愛人)의 얼이 담겨 있는 것이다. 성경에 의하면 경천애인(敬天愛人)은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다(마 22:37~40).

 

  청천 하늘엔 잔별도 많고,

  우리네 가슴엔 수심도 많다


  아리랑의 2절은 푸른 하늘의 잔별만큼이나 우리 가슴엔 수심도 많다고 노래한다. 왜 알이랑 찬송을 부르며 동방으로 천동(遷動)하던 우리 조상들의 가슴엔 그리도 근심이 많았을까? 그것은 1절의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 때문이었다. 즉 유일신 신앙(제천신앙)을 저버린 자들이 제천민족 우리 조상들의 커다란 근심거리가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세상 근심과는 차원이 다른 ‘거룩한 근심’이었다(고후 7:10).

 

  이와 같은 역사적 사연을 간직한 '알이랑' 찬송은 우리 조상들이 동방의 산지를 넘어 이 땅에 오기까지 끊임없이 불리어졌다. 그리고 오늘도 겨레의 삶 가운데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상 자세히 살펴본 바처럼 아리랑은 ‘찬송가’이다. 그래서 ‘아리랑’은 우리 한민족의 정체성을 한마디로 알려주는 ‘천손민족(天孫民族)’ 코드이다. 우리 배달겨레는 세계 만민 중 민족사를 ‘알이랑’ 곧 ‘하느님과 함께’라는 유일신 신앙으로 시작한 단 하나의 민족인 것이다. 
                                                

                                                알이랑민족회복운동 

유석근 목사

club.cyworld.com/alilang  

 

출처http://blog.daum.net/rione30/17083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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