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시민의 유약함을 한 발자국 물러나 엉뚱함으로 풀어버리는 연기.
연기의 최대 관건은 나 자신으로부터 벗어나는 자유로운 해방이다. 아름다운 외모가 장점인 배우는 자신의 외모를 재단하게 되고 그로인해 자유로워지지 못하는 측면이 있다. 연기지망생들이 거울 앞에서 연기하는 버릇이 나쁜 습관으로 연결되는 게 그 이유이다. 나르시시즘에 빠져 무슨 역을 맡든 예쁘게, 멋있게 보이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흐름을 망친다.
대중예술인 드라마는 삶의 페이소스를 통해 삶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설득력이 있다. 따라서 배우의 연기는 삶의 진정성을 드러내는 정직성이 생명이다. 멋있게 뽐내는 배우한테 진정성이 느껴지는가? 예쁜 척을 하는 배우한테 삶의 페이소스를 느낄 수 있는가? 그들은 그저 인형일 뿐이다. 그래서 그들의 생명력은 짧고 소비적이다. 드라마를 통해 관객이 진정 원하는 건 정서의 공감이다.
스크린에 비친 삶은 시간과 공간을 압축해 나 자신을 반추하게 만드는 삶의 교감이다. 그래서 배우는 압축된 삶을 표현하기 위해 밀도 있는 연기를 보여주어야 한다. 송강호라는 배우가 존재감으로 다가온 것은 IMF시기와 맞물린다. 사회에서 내몰린 우리의 가장들은 존재의 하찮음을 받아들여야 했다. 또한 그것을 감추기 위해 과장과 허풍을 가족 앞에서 떨어야 했다. 자신의 미숙함을 감추기 위해 가면을 써야했다. 냉엄한 현실에서 자신의 생채기를 고스란히 드러내야 했다. 송강호의 등장은 이러 시대의 흐름과 일맥상통한다. 소시민적 유약함이 우리 모습임을 인정해야 하는 서글픔을 송강호는 거울을 보듯 자화상 같은 연기를 한다. 인간적 체취가 드러나는 어수룩한 약자의 모습으로 대중에게 다가간다.
그가 설득력이 있는 이유는 세련되게 포장하지 못하고 속을 들켜버린 자의 투박함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진실을 따라가기 위해 끊임없이 되새김질한다. 인형처럼 지시를 받는 배우가 아니라 스스로 성찰한다. <반칙왕>의 임달호가 사랑을 고백할 때조차 ‘가면’을 써야하는 유약함은 묘한 동질감으로 다가온다. 진심을 고백하는 순간에도 자신을 감추려고 노력하지만 들켜버리는 자의 측은함이 배어나온다. <초록물고기>에서 ‘판수’ 역을 맡은 송강호는 이창동 감독에게 양아치들 싸움이 대부분 엉겨 붙고 닭싸움이 되지 않느냐? 갓 데뷔한 신참배우의 설득은 연기플랜을 리얼리티로 바꿔버린다. 사람을 땅에 묻는 연기에서 즉흥적으로 라이터를 꺼내 지지는 살기 오른 연기로 물건 하나가 나왔다고 칭찬을 받는다. 자신이 직관적으로 받아들인 지점에서 송강호는 빠르게 자신으로 회귀한다. 인물을 소화시켜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고집스럽게 자신이 느끼는 진심을 전달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화성연쇄 살인범의 공소시효가 끝났다. <살인의 추억>에서 송강호가 던지는 말이 묘한 울림으로 남는다. “밥은 먹고 댕기냐?” 이는 형사의 마음으로 어딘가에 숨어있을 범인에게 묻는 말이다. 송강호의 연기는 절정의 순간 비실비실 꼬꾸라지듯 모든 게 쓸려나가는 허무함을 짙게 깔고 있다. 그래서 묘한 울림을 만들어낸다. 불의에 대항하기 보단 어떻게든 버티며 살아남아야하는 유약함을 관통하는 서글픔이다. 치사하지만, 비겁하지만 그렇게라도 살아야 하는 소시민의 우화다. 인면수심의 죄를 지은 범인에게조차, 어떻게 이런 잔인한 짓을 하면서도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 가냐?
윽박지르면서도 한편으론 동정어린 시선으로, 그래두 사람인데 밥이나 제대로 먹고 살고 있냐? 회한이 뭉뚱그려지는 공명을 만든다.
이런 송강호의 연기법이 사회 이데올로기와 만났을 때 가공할 파워가 된다. 예컨대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북한군 중사 오경필(송강호)은 초코파이를 맛있게 먹으며 “공화국에서는 왜 이렇게 맛있는 과자를 못 만드는 거야”라고 탄식하는 장면이 나온다. 레드콤플렉스가 견고한 이데올로기조차 소시민의 유약함과 만나면 단박에 끈끈한 핏줄로 변한다. 경계선을 지워버리고 자신이 되새김질한 진실을 그려나가는 체화 된 연기법 앞에선 이념조차 사라진다. 소원해진 옛친구를 만난 것 같은 살가운 친화력이다. 안간힘 쓰면 쓸수록 허무한 자화상으로 돌아올지라도 가슴을 저미는 온기가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