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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혁거세는 실존인물 ★ 경주 탑동 나정서 신라초기 유적 발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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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를 실존 인물이라고 쓴'삼국사기'의 초기 기록을 뒷받침 하는 유적이 발견 되었다. |
[ 蘿井에서 발견된 구상유구"[고랑 모양 유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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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3월 경북 경주의 유적지 '나정'에서 신라 초기 우물과 옛 건축물의 흔적이 발견됐다. 깊은 도랑과 나무 울타리로 둘러싸인 우물과 90여평의 대형 팔각 건물지가 그것. 유적의 모습과 유물 연대를 분석한 결과 이곳에 '시조의 사당'을 세웠다는 '삼국사기' 의 기록과 거의 일치했다. 그동안 삼국사기에 기록된 박혁거세의 신라 건국 신화는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여겨졌으나 나정 발굴 성 과로 새로운 연구가 시작됐다. 박혁거세 신화에는 "말이 우는 소리가 들려서 가 보았더니 큰 알 이 있었다"고 기록돼 있다. 그런데 기원전 1세기 조양동 고분에서 는 철제 무기와 말과 관련된 유물이 다수 발굴돼 박혁거세 집단이 선진 문화를 갖고 온 이주민 세력이었다는 추정을 가능하게 한다 . '삼국사기' 기록에 따르면 박혁거세는 여섯 촌장의 추대로 왕이 된다. 실제로 경주에는 '6촌'이란 지명이 남아있고 그 후손들은 지금도 제를 올리며 조상을 기리고 있다. 나아가 제작진은 경주 지역 위성 사진을 통해 신라의 모태가 된 6부의 규모와 인구를 추정해 본다. '나정' 발굴 결과는 '삼국사기' 초기 기록 신빙성 논쟁에 새로운 불씨를 지피고 있다. 일제에 의해 부정돼 왔던 초기 기록은 그동 안 많은 수정을 거쳤지만 아직도 대부분의 학자들이 의문을 제기 하고 있다. 때문에 '나정'의 발굴은 풍납토성과 함께 일제가 부정 한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복원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김종우기자 kjongwoo@busanilbo.com 나정이란 우물 숲 큰 알에서 신라의 시조인 박혁거세가 태어났다는 탄생 설화가 깃든 곳입니다.이 곳 중앙 팔각정터에서 우물 유적이 새로 발견됐습니다. 직경 14미터, 너비 2미터, 깊이 2미터로 둥근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우물을 보호하기 위해 건물을 세운 기둥의 구멍과 바깥에 두른 고랑, 목책 등 신궁을 세웠던 유적도 함께 발견됐습니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2대 남해왕때 시조의 사당을 세우고 21대 소지왕때 시조가 태어난 나을에 신궁을 지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유적 발굴 작업을 벌이고 있는 중앙 문화재 연구원은 이 우물 유적의 성격과 시기가 삼국사기의 기록과 일치한다고 밝혔습니다. 박혁거세가 실존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고 학계는 보고 있습니다. [이문형/중앙문화재연구원 : 고고학 자료와 문헌 기록이 일치함으로서 고대사의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열쇠가 될 것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 박혁거세는 가상이 아닌 실존 인물일까? 발굴단은 추가 발굴 작업과 함께 오는 29일 현지에서 설명회를 가질 예정입니다. [조선일보 유석재 기자] 2004.3.25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를 실존 인물이라고 쓴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을 뒷받침하는 유적이 발견됐다. <BR>중앙문화재연구원(원장 윤세영)은 지난 2002년부터 박혁거세의 탄생 신화가 깃든 경북 경주시 탑동 700의 1번지 나정(蘿井·사적 245호)을 발굴조사한 결과 신라 초기 우물과 건물의 흔적인 구상유구(溝狀遺構·고랑 모양 유적) 등의 유적을 발견했다고 24일 밝혔다. 자세한 내용은..신라의 건국시조(BC 57∼AD 4). 박씨(朴氏)의 시조이며 불구내(弗矩內)라고도 한다. 일반적으로 박혁거세라 지칭되며 거서간(居西干)은 왕호이다. 즉위 후 BC 53년 왕비를 맞아들이고 비와 함께 6부를 순행하면서 백성들에게 농사와 누에치기를 권장하니, 그때 사람들이 그들을 2현(賢)이라 하였다.BC 37년 서울을 금성(金城)으로 정하고 성을 쌓았으며 BC 32년 금성에 궁실을 지었다. BC 28년 낙랑(樂浪)이 침범하였으나 국경에 있는 백성들이 문을 잠그지 않고 창고에는 곡식이 가득한 것을 보고 도덕(道德)의 나라라 찬양하고 스스로 물러갔다. BC 20년 마한 왕이 공물(貢物)을 보내지 않는다고 노여워하자 일본에서 귀화한 호공을 마한에 사신으로 보냈다. BC 19년 마한 왕이 죽자 사신을 보내어 조위(弔慰)하였으며 BC 5년 동옥저(東沃沮)에서 말 20필을 공물로 보내오기도 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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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혁거세의 대해서 (오류발견) 1.이야기 신라 고사에 하늘에서 금의궤짝이 내려왔다고 하여 옛날 성을 김씨라 했다. 신라인은 소호금천씨(小昊金天氏)의 후예이다. 이 소호금천씨의 후손인 진한이 망하자 후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리고 살 길을 찾아 중국 대륙을 누볐다. 때로는 얻어먹고 다녀서 걸의식국(乞衣食國)이라는 말도 나왔다. 그러나 비록 얻어먹고 다녔을망정 군신(君臣)의 후예답게 나라를 세울 수 이었다. 이 나라가 신라라는 것이다. 2.이야기 김부식이 역사를 기록하면서 꾸민 것이다. 다른 기록에 따르면 '신라국은 원래 귀족으로서 김씨이다.먼 조상은 김방이(金傍이)이 당대의 일인자로서 유복한 부잣집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나 어느 때부터인가 가산이 기울 하는 수 없이 얻어먹으면서도 나라를 세워 지켜야 했으므로 걸의식국이 되었다.' 이 기 출처:한권으로 정리한 이야기 한국 고대사 에서...(발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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