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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를딛고서는길(20) - 차별(4) 누가복음 15장 1-2절
<차별(4) : 타인을 향한 차별> 차별을 친해질 기회로 삼으라
잘못된 선입견으로 상대방을 차별하여 대하고 있다면, 이를 해결하는 방법은 지난 시간에 확인해본 바와 같이 내 안에 내가 성급히, 그러나 충분하다고 생각하며 작성해낸, 상대방에 대한 보고서를 폐기처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매일 새로 만나는 것처럼, 그를 향한 편견과 선입견 없이 대하는 것입니다. 편견과 선입견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선입견을 버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소극적인 의미로는 우리의 기억을 지워내고 비워내는 것이겠지만, 적극적인 의미는 이렇게 될 것입니다. ‘지금 내가 상대방에 대해서 경험한 것, 지금 내가 저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하나를 알면 열을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를 알았으나 그 하나도 온전치 못하다.’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전제에 더하여, ‘오늘도 하나님께서 저를 위해서 저의 손을 붙잡고, 저의 연약함과 저의 부족함을 돌보시며 당신의 위대한 계획 가운데 빚어가고 계시다.’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 더 성숙하고 변화되고 달라질, 상대방을 더욱 잘 알기 위해서, 알아가기 위해서, 하나님 내 곁에 허락하신 그와 함께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동역자가 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그리고 저를 잘 아는 타인으로부터 “너가 알고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아닌데?” 라고 하는 이야기를 듣지 않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와, 그 사람이 그런 사람이었어?” 하면서 오늘 내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게끔 그 관계를 만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서로를 더 알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서로 간에 지금보다 훨씬 더 깊이 있는 사귐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도 잠깐 말씀드렸지요? 우리는 한 공간에 함께 있기만 했을 뿐 서로에 대해서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입니다. 한집에 사는 부부가 한 평생을 살았어도 서로를 잘 모르는데, 직장에서 함께 일했다고, 학교에서 한 교실에서 공부 좀 했다고, 내가 그를 몇 번 만났다고, 그 상대방을 내가 아주 잘 안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다시 말해, 우리의 선입견으로 인해 상대방을 차별하게 되는 상황이 생겼을 때, 우리는 밀려드는 감정들을 그대로 내버려 두어서는 안됩니다. 눈에 보이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그냥 차별해 버리는 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수준에서 하는 일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기에 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이 되어 판단하고 결정하고 고착화시켜 버립니다. 왜 그렇다고 했습니까? 그게 다 자기 스트레스 받지 않으려고 그러는 것입니다. 빨리 빨리 들어오는 감정과 정보들에 대한 답을 내려버리곤, 그게 전부라고 그게 정답이라고 굳게 믿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일하심을 믿는다면, 우리는 그 벽을 부수고 넘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마음에 밀려든 차별의 생각을, 오히려 상대방과 더 깊은 관계를 가질 수 있는 기회로 여기고 우리의 손을 더욱 내밀어야 하는 것입니다. 늘 열려진 태도로 상대를 대해야 하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그렇게 손을 내밀기 시작하면, 그 결과는 하나님께서 책임지신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선입견은 사라질 수밖에 없고 상대방이 가진 진심을 알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특히 상대방을 차별하여 제외하고 싶기까지 부정적인 보고서를 가지고 있었다면, 그를 보면서 기대하는 부분 또한 없었을 것이기 때문에, 이제부터 새롭게 알아가는 모습들이 오히려 생각한 것보다 긍정적이고 커다란 기쁨으로 다가올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선입견, 편견은 사라지게 됩니다. 차별을 정당화하며, 어쩔 수 없다고, 호불호의 문제라고 이야기하던 우리의 교만과 오만도, 하나님 기뻐하실 수 없던 모습도 그때는 전부 다 버릴 수가 있게 되는 것이지요.
만약 유다가 다말에 대해 마음을 열고 조금 더 알아갔더라면, 하나님께 기도하고, 다말과도 이야기를 더 나누어 보았더라면, 과연 이 이야기의 결말은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한 가족으로 받아들이고, 더욱 많은 대화를 나누고, 서로 아들을 잃은 위로, 남편을 잃은 위로를 하면서 그 시련을 잘 극복해 갔더라면, 아마 하나님은 참 좋은 결말을 허락해주셨을 것입니다. 다말도 상처를 잘 이겨냈을 것입니다.
상대방에 대해서 부정적인 감정이 들고, 그로 인해 그릇된 태도를 갖게 될 때,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입장을 바꾸어 보는 것입니다. 물론 입장을 바꾸어 상대방의 심정을 헤아려보고 상대방의 상황을 이해하는 것은 비단 차별이라는 영역에서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것은 상대방에 대한 부정적인 마음을 제거함에 있어서 꼭 거쳐야만 하는 과정인 것이지요? 오늘 상대방이 보이고 있는 기대에 못 미치는 모습에 대해서, “근간에 무슨 일이 있었나부다.” 그 정도만 생각해 주셔도 대단한 배려인데, 나아가 상대방의 입방에서 한 번만 나를 볼 수 있다면, 우리는 더 이상 차별을 가하는 가해자 노릇을 더는 하기 힘들 것이 분명한 것이지요. 차별의 아픔을 한번이라도 느껴본 적이 있다면, 그것이 얼마나 잔인하고 눈물 나는 일인지를 잘 알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성경적인 해결책 중 또 한가지가 바로 이것입니다. 차별을 하려고 할 때, 차별당한 기억을 떠올려보시는 것입니다. “못생긴 나무가 산을 지킨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우리 주변만 보아도 금방 알 수 있는 말입니다. 특별히 좋은 대우를 받고 자란 자녀보다 상대적으로 사랑받지 못하고 차별받고 자란 것 같은 자녀가 오히려 끝까지 부모님 곁을 지키고 효도하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의 경우, 남존여비 사랑이 심했던 과거 시절, 부모가 아들을 극진히 챙겨주는 반명, 딸에게는 그렇게 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지요? 아들은 대학을 보내주어도, 딸들은 그저 돈이나 벌든지 시집을 가라고 이야기를 했던 것이지요?
저 어렸을 때 본 드라마인데, 여러분도 기억하실까요? 아들과 딸이라고, 최수종 김희애씨가 나온 드라마인데, 이란성 쌍둥이였던 것 같애요, 거기 나오는 최수종씨의 이름은 귀남이 였습니다. 귀남아~ 그리고 그 동생인지 누이인지가 김희애씨 였는데, 이름이 바로 후남이, 그리고 막내 여동생의 이름은 종말이~ 뭐 그랬던 것이지요.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자녀가 모두 성장한 후에는 오히려 그토록 차별받던 딸이 어려서부터 사랑받고 자란 아들보다 부모에게 더 잘하곤 하는 것입니다. 왜 그러는 것일까요? 자신이 무시당하고 차별당했을 때 서러웠던 기억이, 오늘 늙으신 부모님, 무시당하고 서럽게 차별당하지 않도록 하려고, 오늘도 그 딸들이 부모님을 챙기고 섬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아들을 둔 엄마들이 속았다면서, 이거 죽자 살자 키워놨더니 소용없더라며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들 시리즈 3
아들 시리즈 1 = 잘난 아들은 국가의 아들,
돈 잘 버는 아들은 사돈의 사위
빚진 아들은 내 아들.
아들 시리즈 2 = 사춘기가 되면 남,
군대에 가면 손님,
장가가면 사돈.
아들 시리즈 3 = 낳았을 땐 2촌,
대학가면 4촌,
군대 다녀오면 8촌,
장가가면 사돈의 8촌,
애 낳으면 동포,
이민가면 해외동포.
혹여라도 누군가를 차별하게 되는 순간이 오게 된다면, 차별받고 자랐지만 더 큰 효도를 하는 딸들의 심정을 떠올려보시길 바랍니다. 각자마다 인생의 어느 구간에서 분명 한번 쯤은 받아본 그 차별의 경험을 떠올려 보며, 상대방만큼은 그런 서운함과 억울함을 겪지 않도록 해주고 싶은 마음이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있을 수 있길 바랍니다. 어떻게 하면 이렇게 할 수 있을까요? 상대방의 마음이 다칠까 상할까 내가 그를 더욱 곁에서 챙겨줄 수 있게 될까요? 그렇습니다.
오늘 저가 내 부모로 보일 때, 오늘 저가 내 형제, 자매로 보일 때, 역시 우리는 차별하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누가 내 형제 자매를 보면서 “쟤는 왜 저러냐”고 이야기를 하면, “쟤는 저런 애가 아니라 이런 아이”라고 두둔하고 편들어 주듯, 오늘 우리가 그렇게 상대방을 보듬고 안는 복된 관계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내가 저를 잘 아는 사귐이 우리의 모든 관계 속에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우리 하나님께서 늘 그렇게 말씀을 해오셨더라구요.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바로 이런 기억력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똑똑하고 머리좋은 사람이 되라고 요구하지 않으시는데, 특별한 영역에서만큼은 특출한 기억력을 가질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이 “차별”에 대한 기억력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시당하고 차별받는 사람들을 억울하게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차별의 마음이 들 때마다 과거의 기억을 끄집어내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끼리 서로 누군가를 차별하고 또 차별받을 때, 하나님은 애굽에서의 기억을 떠올릴 것을 말씀해 주셨던 것입니다. 뭐라고 하셨는데요?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너는 객이나 고아의 송사를 억울하게 하지말며 과부의 옷을 전당잡지 말라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일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거기서 속량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이 일을 행하라 명하노라”(신24:17-18)
이스라엘 백성이 경험한 애굽의 삶이 어떠했습니까? 430년동안 입니다. 그들은 그야말로 무자비한 차별의 현장을 경험해야 했던 것이지요? 잘못이 없어도 히브리인이라는 이유로 극심한 차별대우를 받아야 했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노예가 됩니다. 흙을 이기고 짚을 넣어 벽돌을 구워야 했습니다. 또한 모든 부역에 동원되어 일을 해야 했습니다. 교육이라곤 받질 못했습니다. 엄마에게 아빠에게 배운 것이 전부인 그저 그렇게 살다가 죽어야 된다고 생각한 사람들, 가끔씩 고깃 가마 옆에서 고기를 훔쳐먹는 것이 유일한 즐거움이었던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내 새끼를 나일강에 던져도 아무 말 못한 채 그 죽음을 받아들여야만 했던 사람들이 이스라엘 민족이었던 것입니다.
얼마나 서글프고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차별받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그 애굽에서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수많은 차별의 문제를 해결해 낼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시며 말씀을 해주셨던 것입니다. 차별로 인해 고통받았던 과거의 고통을 기억한다면, 그 누구도 차별하거나 고통스럽게 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스라엘에게서는 그러한 기억력이 잘 발휘되질 못합니다. 내 고통은 알아도 타인의 고통은 알고 싶지도 않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토록 노예생활의 질고를 겪은 이들이 노예를 부리는 것입니다. 나무를 하게 하고 부역과 노동에 저들을 동원했던 것이지요? 언제 그랬냐는 듯, 개구리 올챙이적 생각못하든, 저 사람이 저렇게 지내면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들겠나 하는 생각을 못하면서 사는 것이지요? 오늘도 이 세상에서 내가 제일 힘들고 내가 제일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상대방이 나로 인해 겪을 고통까지 돌아볼 여력이 없는 것입니다. 나 땐 더했어. 넌 지금 암것도 아녀!
여러분, 좋은 기억력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공감하는 마음, 타인의 고통을 읽을 수 있는 마음, 솔로몬이 하나님께 구한 듣는 마음이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차별의 기억, 그리고 그 가운데 우리가 받은 은혜의 기억, 그 기억을 바탕으로 차별이 아닌 은혜의 사람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예수님은 어떠셨을까요? 예수님은 우리처럼 차별하셨을까요? 다른 사람이 다 차별하니까 당신도 슬그머니 묻어가셨을까요? 조용히 그저 입 다무시고 그 차별을 방관하셨을까요? 아니면 나아가 차별의 주동자가 되셨을까요?
예수님은 이런 평가를 들으면서 사셨습니다. 오늘 본문 누가복음 15장 1-2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눅15:1-2)
“이 사람이 죄인을 맞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구나!”
예수님이 죄인들을 영접하고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다는 사실을 그들은 비난했던 것입니다. 이 말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무심코 내뱉은 것이었지만, 사실은 예수님에 대해서 이보다 더 정확하게 설명하는 말을 성경에서 찾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예수님을 비난하기 위해 이렇게 말했지만, 그들의 말 속은 정말 위대한 진리를 담고 있었던 것입니다. 원수의 조롱과 비방 속에 진리를 담아내시는 분은 역시 우리 놀라운 하나님이신 것이지요.
여러분,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이들이 말한 것과 같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죄인을 영접하고 죄인들과 같이 음식을 먹는 분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죄인을 환영하고 반가이 맞아들이시는 분입니다. 그들이 누구인데요? 오늘날에도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죄인, 세리, 창기, 유대사회에서 손가락질 받는 직업을 가진, 갖고 싶어 가진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가진, 천대받고 외면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을 늘 차별했고, 사람취급도 하지 않았습니다. 보기만 하면 세리든, 창기든 돌로 쳐서 죽이려 했던 것이지요? 특히 종교지도자들은 정결법을 이야기하며, 거룩을 이유로 그들을 멸시하고 차별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오히려 그들과 함께 하셨고, 그들을 영접하셨고, 그들과 친구가 되어 주셨던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예수님은 점점 더 종교 지도자들의 비난과 정죄를 감수하셔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리곤 마침내 눈밖에 나고 마셨던 것이지요?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거늘”(마12:14)
저들이 아무리 차별해도, 죽이려고 해도, 우리 예수님은 죄인들의 곁을 세리와 창기들의 곁을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바로 이런 분이십니다. 죄인을 찾아오셔서 그들을 영접해주시는 분이십니다. 죄인들과 대화하고 싶어 하는 분이십니다. 죄인들을 어떻게든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이 뜨거운 열망은 과거에도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결코 변하거나 결코 식어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나눠 잡수시던 바로 이 주님 때문에 우리도 하나님께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잊지 않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만일 우리 주님이 종교적으로,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깨끗하고 고상한 사람들만 찾아다니셨다면,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전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 같은 사람도 이렇게 예수 믿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교회를 다니며 신앙생활 할 수 있게 된 것은, 죄인을 영접하는 이 사람, 바로 우리 예수님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시간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구세주로 온전히 영접하지 못하는 분들이 만일 이 자리에 계신다면, 저는 여러분이 이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되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이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든지 간에,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을 어떻게 생각하고 판단하든지 간에, 하나님은 있는 모습 그대로 여러분을 환영하고 맞아들이는 분이십니다. 또한 교회는 다니지만, 예수님을 믿기는 하지만, 아직도 하나님께서 나의 죄에 대해 심판하시고 나를 거절하시면 어떻게 할까 두려움 속에 사는 분들이 계신다면, 저는 그런 분들도 확실하게 알게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있는 모습 그대로 여러분을 영접해 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 사람들이 여러분을 향해 죄인이라고 손가락질 합니까? 뒤에서 수군거리고 흉봅니까? 그러라고 하십시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주님이 나를 영접해 주셨다고 말하십시오. 그래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셨다고, 그래서 나를 구원하셨다고 자신 있게 말하십시오. 나 같은 죄인을 하나님이 살리셨다고 선언하십시오.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죄인을 영접하시는 주님의 은혜라고 자랑하십시오. 우리 주님은 그런 분입니다. 죄인을 영접하기를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차별이라는 벽을 끝내 넘지 못했고, 그로 인해 하나님 나라와 거리가 먼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마21:31)
기억하십시오. 차별과 하나님의 나라가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 지를 말입니다. 그리곤 오늘부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몸소 보여주신 그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재현해나가시는 복된 분들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차별과 나눔, 분리와 격리가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가 위화감 없이 친구가 되어야하고 가족이 되어야 합니다. 아무 것도 묻지 않으시고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사랑, 그분의 복음의 특징을 성경은 이렇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십니까?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를 소유하고 계십니까? 이 의는 차별이 없는데, 왜 우리는 오늘도 차별하고 가르고 나누고 따로 세우고 있습니까?
두 시간에 걸쳐 세 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내가 누군가를 대함에 있어서 차별의 마음이 들 때 어떻게 하라구요? 첫 번째? 하나님도 내 생각에 동의하실까? 하나님도 내 판단, 내 결정, 내 차별을 인정해 주실까를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두 번째? 차별의 감정이 상대방에 대한 무지에서 나오는 것임을 기억하고,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참으로 미미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상대방을 더 알아가고 친밀해지기 위한 기회로 삼는 것입니다. 더 손을 내밀고 더 다가가는 것입니다. 저와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차별당한 기억을 떠올려보시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내가 경험했던 아픔들을 저가 겪을 것을 생각해주시고, 또한 나를 구원하신 은혜 하나님의 역사를 생각하면서, 오늘 내가 차별하고 있고, 차별하고자 했던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그런 우리가 되시길 축복합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상대방보다 더 부족할 수 있는데, 하나님은 나를 품어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저 상대방을 내게 좋은 친구로 주시고자 하시는데 내가 저를 거절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은혜받은 자” 로서, “은혜받은 자” 답게 살아야 하는데, 그 은혜를 잊었던 것입니다. 그 고통과 서러움의 고리를 끊어내지 못했던 것입니다.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은 내가, 일백 데나리온 빚진 자의 목을 잡은 것입니다. 갚으라고 독촉하고 윽박지른 것입니다.
속상하고 죄송하고 아픈 모습이지요? 이제는 끝내시면 됩니다. 오늘 우리 주님이 도우실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묵상하고 붙든 이 말씀이 오늘 우리를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말씀은 살아 운동력이 있는, 오늘 우리를 건지시고 고치시는 능력인 까닭입니다.
말씀을 마무리하면서 축복합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서 계신 모든 곳, 만나시는 모든 사람들의 상처와 아픔을 보듬고, 새로운 관계의 지경을 넓혀나가시는, 또다시 우리 가운데 생겨나는 모든 차별을, 가족같은 친근함으로, 어느 것도 끊을 수 없는 삼겹줄, 풀리지 않는 든든한 매듭으로 바꾸시는 복된 분들, 우리 하일 식구들이 다들 되시길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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