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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다르크 / 오를레앙의 처녀 [1412.1.6 ~ 143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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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 다르크는 1412년 프랑스의 작은 마을 동레미에서 신앙심이 깊은 부농의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농부이자 마을에서 여러 가지 직책을 맡고 있던 자크 다르크, 어머니는 이자벨 로미이다. 그녀는 1424년 대천사 미카엘, 성 카타리나, 성 마거릿이 나타나 프랑스를 침략한 잉글랜드군을 몰아내고 왕세자 샤를(후에 샤를 7세)을 왕위에 올리라는 계시를 받았다고 한다. 과거 역사 인물들의 병력을 연구하는 현대 의학자들은 이 잔 다르크의 계시가 사실은 간질병으로 인한 착시 혹은 환청 현상의 일부였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한다.
16살 되던 해에 잔 다르크는 친척의 도움을 받아 로베르 드 보드리쿠르 백작을 찾아가 샤를 대공이 있는 시농 성으로 갈 수 있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백작은 잔 다르크를 웃어넘겼으나 백작 휘하의 장 드 메츠와 베를랑 드 폴뤼니는 그녀의 편이 되었다. 그 둘의 도움을 받아 백작과의 두번째로 만난 잔 다르크는 열세에 몰린 프랑스군이 오를레앙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장담하였고, 보드리쿠르 백작은 잔 다르크의 열정에 감동했다.
보드리쿠르 백작의 허락을 받은 잔 다르크는 시농 성으로 가 샤를 대공을 알현했다. 반신반의하던 왕세자는 잔 다르크를 직접 만나본 후 그녀의 도덕심과 의지에 감탄했다. 전설에 따르면 대공은 과연 잔 다르크가 하느님이 보낸 사자인지 시험하기 위해 자신의 옷을 시종에게 입혀 옥좌에 앉혀놓고 자기는 변장을 한 채 가신들 속에 섞여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잔 다르크는 방에 들어오자마자 바로 초라한 차림의 대공 앞으로 다가가 경의를 표했다는 것이다.
잔 다르크는 푸아티에에서 프랑스 교회의 성직자들로부터 도덕성 심사를 받은 뒤 프랑스군의 일원으로 오를레앙에 갈 수 있도록 허가를 받았다.

이어 잔은 루아르 강변의 여러 도시에서 겨울을 나고 있던 왕과 재회했다. 1429년 12월말 국왕 샤를은 잔과 그녀의 부모·오빠를 귀족에 임명하는 특허장을 내렸다. 1430년초 부르고뉴 공작은 브리와 샹파뉴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랭스의 주민들은 불안해했으나 잔은 3월에 그 도시에 대한 왕의 관심과, 자신이 그곳의 방어를 맡겠다는 약속을 제시함으로써 안심시켰다. 부르고뉴 공작이 콩피에뉴 공격에 착수하자 주민들은 도시의 수호를 결의했다. 3월말에서 4월초경에 잔은 왕을 떠나 오빠 피에르, 시종인 장 돌롱, 그리고 무장병사 몇 명만을 대동하고 콩피에뉴 원조길에 올랐다. 4월 중순 그녀는 믈룅에 도착했고, 그 도시 주민들은 그녀의 출현에 힘입어 샤를 7세에 대한 지지를 선포했다. 1430년 5월 14일 잔은 콩피에뉴에 도착하여 랭스 대주교 르노 드 샤르트르와, 왕의 친척인 방돔 백작 루이 1세 드 부르봉을 만났다. 그녀는 그들과 함께 수아송으로 갔으나 그곳 주민들은 입성을 저지했다. 르노와 방돔은 마른 강과 센 강의 남쪽으로 되돌아가기로 했지만 잔은 그들과 함께 가기를 거부하고, 콩피에뉴의 '좋은 친구들'에게 돌아가는 길을 택했다.
1430년 5월 23일 잔 다르크는 콩피에뉴에서 요새를 방어하다 영국군과 부르고뉴군에게 포로로 잡힌다. 부르고뉴 공작 필립은 프랑스 정부에 몸값을 제시했으나 샤를 7세는 이를 방관했다. 잔 다르크는 여러 번 도주하려 했으며, 한 번은 약 230m 높이의 탑에서 해자로 뛰어내리기까지 했다. 프랑스 정부에서 아무 대응이 없자 부르고뉴 공작은 마침내 잔 다르크를 1만 리브르에 잉글랜드군에 넘겼다. 그녀는 당시 잉글랜드령이었던 노르망디 지방의 루앙으로 압송되어 이단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피에르 코숑 주교가 재판을 지휘했다.
잉글랜드의 베드포드 공작은 조카인 헨리 6세를 프랑스 왕위에 올릴 심산이었으므로, 샤를 7세의 즉위를 도운 잔 다르크에게 앙심을 품고 있었다. 코숑 주교는 잔 다르크의 혐의를 입증할 수 있는 증거들이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재판을 강행했다. 후에 법정 서기들은 상부의 강압에 못 이겨 재판 기록을 잔 다르크에게 불리하도록 일부 날조했다고 고백했다. 잔 다르크에게는 자문관이나 변호인의 도움을 받을 권리가 주어지지 않았다. 재판엔 그녀를 도울 증인조차 나오지 않았다. 코숑 주교는 잔 다르크가 교황에게 항소할 기회마저 막아버렸다. 이에 비해 잉글랜드측은 70명에 달하는 법률 자문관을 구성했다. 교회법에 따르면 이단 재판의 피고인 잔 다르크는 마땅히 여자 간수들이 지키는 수녀원에 수감되어야 했으나, 잉글랜드 정부는 그녀를 병사들이 감시하는 감옥에 수감했다. 재판에 드는 모든 비용은 잉글랜드 정부가 부담했다.
절대적으로 불리한 입장에서 잔 다르크는 홀로 자신을 변호했다.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은 적이 없는 농가 출신의 18살 된 소녀가 연륜있는 주교들과 신학자들로 구성된 심판관들과 그들의 끈질긴 유도 심문에 맞서 펼친 변론은 놀라울 정도로 논리적이고 이성적이었다. 심판관들은 읽고 쓸 줄도 모르는 그녀의 유려한 변론에 여러 번 말문이 막히기도 했다.
코숑 주교는 마지막에 잔 다르크에게 남장 혐의를 추궁했다. 당시 여성이 남장을 하거나 남성이 여장을 하는 일은 종교적인 죄였다. 잔 다르크는 남장은 남성들이 많은 군대에서 제대로 근무할 수 있기 위해, 또한 유사시에는 정조를 지키기 위해 취한 행동이었다며 반박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후에 그녀는 법정의 명령에 따라 여자 옷을 입었으나, 얼마 되지 않아 감옥을 찾아온 한 영국 영주가 그녀를 강간하려 한 후 다시 남자 차림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그 후로 잔 다르크는 사형을 당할 때까지 머리를 자르고 남자 복장을 했다.
오랜 재판 끝에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잔 다르크는 곧바로 처형하겠다는 협박을 받고 교회의 처분을 따르겠다는 문서에 서명했다. 그녀는 문맹이었으므로 자신이 어떤 문서에 서명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1431년 5월 29일 법정은 잔 다르크에게 화형을 언도했다.
<백과사전>

1.원인
영국은 영국 섬 말고도 노르망디 공에게 정벌당하면서 노르만 왕조가 세워졌을때 노르망디 땅을
①프랑스의 승리- 대부분의영토 회복
②양 국가의 봉건 영주 몰락, 중앙 집권 국가의 형성, 민족 의식 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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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를 전장(戰場)으로 하여 여러 차례 휴전과 전쟁을 되풀이하면서, 1337년부터 1453년까지 116년 동안 단속적(斷續的)으로 계속되었다. 이에 대하여 영국왕 에드워드 3세는 그의 모친이 카페왕가 출신(샤를 4세의 누이)이라는 이유로 프랑스 왕위(王位)를 계승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양국간에 심각한 대립을 빚게 되었다. 영국의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 경제를 혼란에 빠뜨리기 위하여 플랑드르에 수출해오던 양모(羊毛) 공급을 중단하고, 그 보복으로 프랑스의 필리프 6세는 프랑스 내의 영국 영토인 기옌, 지금의 가스코뉴 지방의 몰수를 선언하였으며, 1337년 에드워드 3세는 필리프 6세에게 공식적인 도전장을 띄우게 되었다. 원래 플랑드르는 프랑스왕의 종주권(宗主權) 아래에 있었지만, 중세를 통하여 유럽 최대의 모직물 공업지대로서 번창하여, 원료인 양모의 최대 공급국인 영국이 이 지방을 경제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다. 기옌 역시 유럽 최대의 포도주 생산지였으므로, 프랑스왕들은 항상 이 두 지방의 탈환을 바라고 있었다. 따라서 전쟁의 근본적 원인은 이 두 지방의 쟁탈을 목표로 한 것이다. |
기본적으로 백년전쟁은 프랑스 왕위 계승 다툼입니다.
프랑스의 카페 왕조의 후계자가 없었기 때문에 발루아 백작 필립 6세가 왕위에 오르게 되면서 발루아 왕조가 형성됩니다. 이 때 영국왕 에드워드 3세는 (필립 4세의 외손자였는데) 자신의 왕위 계승권이 더 높다며 반발합니다.
필립 6세는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에 가지고 있던 봉토인 아키텐 공작령을 몰수하겠다고 선포하고, 에드워드 3세 역시 왕위 계승의 정당한 권리가 자신에게 있다고 하여 전쟁을 준비합니다.
1339년 북부 프랑스와 플랑드르에서 소규모 충돌이 일어난 것을 계기로 하여 1340년부터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됩니다.
1340년 영국 함대는 라인강 하구의 슬로이스에서 프랑스 함대를 격파, 1345년에는 에드워드 3세와 그의 아들 흑태자 에드워드가 함께 노르망드에 상륙합니다.
1346년 크레시에서 숫적으로 압도적인 프랑스 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고 1347년에는 칼레를 점령, 그 후 잠시 전쟁이 소강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1350년 프랑스의 필립 6세가 죽고 쟝 2세가 즉위하게 되며, 1355년 흑태자의 지휘하에 다시 전쟁이 시작됩니다. 1356년 푸아티에에서 흑태자는 다시 한 번 숫적으로 우세한 프랑스 군을 격파, 국왕 쟝 2세를 포로로 잡습니다. 쟝 2세는 몸값으로 어마어마한 액수의 돈을 내고 풀려나면서, 아키텐과 칼레를 영국에게 양도한다는 내용의 브레티니 조약을 채결하고 일시적으로 전쟁을 중단합니다.
크레시와 푸아티에, 그리고 이후의 아쟁쿠르 전투에서의 승리는 크게 두 가지 요인 때문이었습니다.
그 첫번째는 영국군의 높은 군율입니다. 영국군의 주력은 독립적 자영농민- 즉 평민 출신 병사인 궁병들이었습니다. 궁병들은 두 가지 이유에서 고용되었는데, 우선 그들의 공격력이 우수했고, 두 번째로 그들의 급료가 기병의 반밖에 안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들은 기사나 그 휘하의 기병들에 비해 통솔이 잘 되었으며 명령을 충실히 이행했습니다. 영국 궁수들이 사용한 신무기 - 영국 장궁English Longbow 는 160m 거리에서 두께 5cm의 참나무판을 관통할 수 있을 정도의 위력이 있었으며, 강철촉 화살을 사용한다면 갑옷을 관통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했습니다. 더군다나, 1분에 10~16발을 쏠 수 있는 엄청난 연사속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만, 크레시/푸아티에/아쟁쿠르에서는 영국군의 화살은 철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기사의 갑옷을 뚫기는 어려웠습니다.)
두 번째 원인은 프랑스 군의 어리석음입니다. 프랑스 군은 단단한 방어진을 형성하고 있는 영국군을 향해 무모하게 돌격하는 것은 물론이고, 앞에 있는 아군 궁수나 보병을 짓밟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프랑스 기사들은 지휘관의 명령을 잘 듣지 않고 멋대로 돌격하는가 하면 후퇴하곤 했습니다. 이것은 작전을 수행하는 것이 어려워짐은 물론 개별 전투까지 혼란스럽게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프랑스는 거듭되는 패배로 인해 사기가 떨어지고, 영국군의 약탈로 인해 민심이 흉흉해지게 됩니다.
이후 쟝 2세가 죽고 샤를 5세가 즉위한 후 샤를 5세가 아키텐 공작령의 소귀족들을 선동하여 전쟁이 재개되는 등 소규모 전투가 일어나고 그치기를 반복합니다.
1377년, 에드워드 3세가 서거하고 리쳐드 2세가 즉위합니다. (흑태자 에드워드는 부왕의 사망 이전에 죽게 됩니다. ㅠ_ㅠ) 1380년에는 프랑스의 샤를 5세가 서거함으로서 샤를 6세가 즉위....
두 왕이 모두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왕위계승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정신병을 앓고 있던 샤를 6세를 지지하는 파와 반대하는 파로 나뉘어 정치적 싸움이 이어졌고, 영국에서는 왕위를 두고 전쟁이 일어나 1399년 랭커스터 가가 최후의 승자가 되어 헨리 4세가 즉위하기까지 전쟁이 계속되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두 나라간의 전쟁은 소강상태가 되었습니다.
1413년, 헨리 4세의 뒤를 이어 영국왕위에 오른 헨리 5세는 프랑스 정복 전쟁을 재개하게 됩니다. 헨리 5세의 군대는 재정적으로 큰 압박을 받고 있어서 프랑스 군보다 압도적으로 불리한 처지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쟁쿠르에서 역시 종래의 장궁병을 이용한 방어진을 이용하여 압승을 거두고 북프랑스의 많은 땅을 점령합니다. 이를 기회삼아 헨리 5세는 트루아 조약을 맺고 샤를 6세의 딸 카트리느와 결혼하여 자신의 왕위계승권을 기정사실화 하는데 성공합니다.
하지만 샤를 6세의 반대파는 황태자 샤를(후의 샤를 7세)를 지지하면서 이 조약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1422년 영국왕 헨리 5세와 프랑스왕 샤를 6세가 잇달아 사망합니다.
영국왕위에 오른 헨리 6세는 자신이 영국 왕이며 프랑스 왕이라고 선포하지만, 왕태자 샤를과 그 지지파는 이를 거부함으로서 전쟁이 다시 시작됩니다.
1428년 영국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진군, 오를레앙을 포위함으로서 왕태자 샤를을 궁지에 몰아넣지만, 이 시기에 유명한 잔 다르크가 등장하여 오를레앙을 해방시킴으로서 왕태자 샤를이 샤를 7세로 프랑스 왕위에 등극합니다.
이후 잔의 활약으로 프랑스 군은 승승장구하지만, 1430년에 영국군에게 포로로 잡히게 되어 종교재판에 회부, 마녀혐의로 화형당합니다.
그러나 이 무렵에 이미 전황은 프랑스 군에게로 기울어 있었고, 1450년에 이르러 프랑스는 노르망디 전역을 회복하는데 성공합니다.
거듭되는 패전으로 왕권에 타격을 받은 영국에서는 요크 가와 랭커스터 가 간의 왕권다툼 - 장미전쟁-이 벌어지게 되고, 이 혼란을 기회로 프랑스 군은 더욱 더 진격하여 1453년에는 영국군의 최고 거점이었던 보르도를 함락시킵니다.
이후 몇 차례 소규모 전투가 계속되다가 1475년에 강화를 체결함으로서 전쟁이 끝납니다.
프랑스는 백년전쟁을 거치면서 왕권이 강화되고, 영국군에게 거듭되는 패배를 통해 봉건 영주의 군대를 비상시에 소집하는 체계가 비효율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어 상비군 제도가 생김으로서 군사적으로도 큰 발전을 이루게 됩니다. 또한, 영국군의 약탈 등으로 인하여 프랑스 인들 사이에 '국민의식'이라 할만한 것이 생겨나게 됩니다.
한편, 영국은 전쟁 중 거듭되는 왕권다툼을 벌이게 됨으로서 왕권이 약화됨은 물론, 기존에 프랑스 내에 가지고 있던 봉토들마저 대부분 상실하게 됩니다.
</ 중국어회화모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