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안선>-넘어서는 안 될, 그러나 결국 넘어서야 할
"2002년 월드컵이 한창일 때 전 <해안선>이라는 영화에서 처음 작은 조연으로 배우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많은 오디션을 봤었고 수없이 떨어졌으며 혼자 술도 많이 마셨고 혼자 많이 울기도 했구요. 그 때가 스물 다섯 살 때였네요. 볼살도 아주 통통해서 귀여웠을 때"
2018년 7월 8일.
마흔 한 번째 생일 파티 겸 팬미팅이 열린 자리, 200여 명의 팬들 앞에 선 배우 김강우의 편지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담담한 음성이었지만 낭독 사이사이 미세하게 숨은 떨림을 감지하지 못한 이는 없었으리라.
이십대 중반의 청년은 어느덧 불혹의 나이가 되었고 여러 작품을 거치며 그의 내면은 무소의 뿔처럼 단단해졌다.
<해안선>은 그가 배우로서 스크린에 이름을 올린 첫 영화로, '작은 조연'이라고 표현했지만 신인 배우였던 그가 연기한 '조일병'이라는 인물은 결코 사소한 배역이 아니다.
배우 김강우의 연기와 인간 김강우의 됨됨이 모두를 사랑하는 나는 팬의 한 사람으로서 그의 영화 전작을 정리해 보고자 하는 원을 세웠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배우인 그에게도, 그의 팬인 나에게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해안선>은 그의 17년 영화 역사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2459 박쥐 부대.
해병대원들의 극한의 훈련 장면 뒤로 가시 철책이 해안선을 따라 길게 이어져 있다.
집합 명령이 떨어지자 강상병(장동건 분)은 얼굴에 위장크림을 바르기 시작한다.
위장을 하는 병사는 그가 유일하다.
액션이 과한 그의 목표는 '간첩'을 잡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별명은 '고문관'이다)
그리고 두드러지는 또 한 명의 인물 조일병(김강우 분).
그는 상관과의 힘겨루기에서도 결코 밀리지 않는 당돌한 눈빛의 소유자다.
동네 횟집 청년 철구(유해진 분)는 군인들을 극도로 혐오한다.
"요즘 간첩이 어딨어, 맨날 놀고먹으면서 세금만 축내는 돼지새끼들이"
순찰중이던 강상병은 흥분한 나머지 철구 무리(민간인)에게 총구를 겨누고 동기 김상병(김정학 분)은 그를 말린다.
화가 난 철구는 강상병을 시험해서 살아 나오면 동생 미영(박지아 분)을 준다고 선언한다.
(이후의 모든 불행은 철구의 이 한마디에서 촉발된다)
부대원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는 중에도 강상병은 혼자 기습 침투 훈련을 하고 있다.
그에게 부대에서의 24시간은 훈련이 아닌 실전처럼 보인다.
조일병과의 물 속 권투 장면은 그의 광기를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여준다.
"왜 그러십니까, 제발 그만 하십시요. 괜찮습니까?"
조일병의 가격에 쓰러져 있던 강상병은 방심하고 있던 조일병을 기어이 때려눕히고도 싸움을 끝낼 줄을 모른다.
그 날 밤, 술에 취한 미영은 애인 영길(최희연 분)에게 철책 안으로 들어와 사랑을 증명해 보라며 부추긴다.
영길은 두려워하지만 결국 철책을 넘고 만다.
('작년에 미역 따다 죽은 할머니'의 일화에서 동네 주민들의 군부대에 대한 악감정의 이유가 비로소 밝혀진다)
영길을 간첩으로 오인한 강상병은 그를 사살하고, 명예로운 영웅이 되고 싶었던 그는 '살인자, 나쁜 놈, 미친 새끼'로 전락하고 만다.
분노한 주민들은 강하게 반발하고 강상병은 철구 무리에게 집단폭행을 당한다.
그러나 부대는 '괴물체에 대한 적절한 대처로 해안 방어 근무에 충실'했다면서 표창장을 주고 강상병에게 6박 7일의 특별휴가를 준다.
내막을 알게 된 애인 선화(최영희 분) 마저 그를 떠나고 충격으로 넋이 나간 미영은 부대 주위를 하염없이 맴돈다.
"강상병님, 어땠습니까? 그 때 기분이요. 그 때요, 그 술 취한 놈 총으로 쏠 때. 솔직히 전쟁 아니면 언제 사람을 쏴 보겠어요...나 같으면 진짜 못 쏠 것 같은데"
조일병의 잔인한 호기심은 죄의식과 분노로 이성을 잃어가는 강상병을 도발한다.
실탄이 든 총을 들고 탈영을 시도하던 그는 결국 '심리적인 문제'로 강제 전역을 당하고 만다.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강상병은 실성한 채 그를 바라보고 있는 미영을 본다.
물 속에 세워 둔 장승들 위로 높게 내걸린 현수막 글귀가 예사롭지 않다.
'새만금 갯벌을 살려주세요'
강상병이 죽인 영길에게도, 그를 죽인 강상병에게도, 애인을 잃은 미영에게도 빠짐없이 해당되는 의미심장한 문장이다.
다시 부대로 돌아간 강상병은 미영처럼 해안선을 맴돌기 시작한다.
"우리가 왜 민간인을 도와줘야 됩니까? 그것도 미친 사람을?"
당구장에서 집단폭행 당하는 강상병을 왜 돕지 않았느냐는 김상병의 말에 조일병은 이렇게 항변한다.
"군대라서 참는 거지 계급장 떼고 싸우면 나 누구한테도 안 집니다"
(감독은 코멘터리에서 '신인배우 김강우'를 '잘 할 배우'라는 말로 표현했다)
조일병의 하극상은 강상병이 몰고 올 갈등과 불행을 앞당기는 도화선이 된다.
완전히 이성을 잃은 강상병은 김상병의 총을 탈취하고 동기였던 그들은 결국 서로를 향해 총을 쏘기 시작한다.
일상이 된 폭력과 공포는 개인의 광기에서 집단으로 전이, 확산 된다.
헌병에 체포된 강상병은 정신병원 앞에서 도주해 버리고, 임신한 미영을 데리고 부대를 찾아온 철구는 소대를 발칵 뒤집어 놓는다.
불행하게도 미영은 또 한 번 잔인한 폭력에 뱃속 아이를 잃고 만다.
도망치는 미영과 그녀를 뒤쫒는 소대원들의 모습은 시퍼렇게 무성한 들판 속에서 원경으로 표현된다.
잔잔하고 평화로운 배경 음악과 쫒기는 미영의 공포가 드러내는 역설.
소름끼치는 신이다.
영화 후반부에서는 모든 소대원들이 강상병처럼 얼굴에 검은 위장을 하고 있다.
(집단 광기의 표현이다)
그들이 죽고 죽이는 살벌한 상황에서 보여지는 강상병의 왜곡된(유령처럼 표현된) 모습은 공포에 질린 군인들의 착시이고, 결국 조일병도 그 총에 죽고 만다.
그를 쏜 사람이 강상병인지, 김상병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소대원들이 발견한 시신에는 얼굴이 없지만 입고 있는 군복으로 그가 강상병이라고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군대라는 특수한 조직 안에서 '개인'은 철저히 무시된다. 그들은 폭력의 가해자이면서 동시에 피해자인 비극적 존재이다)
명동 한복판에서 총검술을 실연하는 강상병의 모습은 불합리한 폭력과 공포에 오래 노출 된 인간의 말살된 인격에 대한 일종의 상징이다.
(김기덕 감독의 전작 <나쁜남자>의 결말도 판타지(그의 표현을 빌자면 '반추상')였다)
에필로그에서 즐겁게 족구를 하는 군인들의 모습은 평화롭기 그지없다.
한반도가 그려진 운동장, 중앙을 가로지른 철망 네트가 서서히 사라지면서 영화는 끝이 난다.
섬에서 한 달여를 지내며 힘든 촬영을 하는 동안 김강우는 한 차례 크게 앓았던 적이 있다고 한다.
첫 영화, 낯선 촬영장에서 그가 느꼈을 심적 부담이 얼마나 컸을지는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아마도 배우는 그의 천직이었던 모양이다.
그 어려움을 모두 극복하고 연기 17년 차 배우로 굳건히 자리매김했으니 말이다.
그의 성실한 과거가 마차 바퀴 자국처럼 현재에 이어져 있다고 생각하면 뭉클해진다.
그 길은 성실한 현재를 통해 미래로 끊임없이 이어질 테니.
글/배성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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