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동아일보의 탄생>
ㅣ. 3.1운동 이후 총독부는 문화정치를 표방하면서 세 신문(조선, 동아일보, 시사신문)을 허가했다. 굴뚝으로 연기가 배출되는 것처럼 조선인의 신문을 통해 그들의 불만을 어느 정도 배출시키고, 신문으로 표출되는 조선인들의 불만을 미리 살핌으로써 3.1운동과 같은 사태의 재연을 방지하겠다는 의도였다. 한글신문은 처음에는 모두 '친일단체 우두머리'에게 허가되었다. 그러나 이내 반일세력의 수중에 돌아갔다.
1920년대 한글신문은 8차례의 발행 정지와, 신문사 별로 수백 건의 압수 처분을 당할 정도로 가혹한 처분을 받았다. 이는 언론통제의 가혹함을 보여주는 동시에 기자들의 저항정신을 보여주는 것이다. 총독부조차 "신문인은 모두 지사로서 자임하여 신문지가 차압 처분에 부쳐지는 것을 명예같이 여겨 각 신문지가 독필(毒筆)을 생산한다"고 인정할 정도였다.
2. 1929년 광주학생사건을 거치면서 1930년대 한글신문의 필봉이 무뎌졌다. 언론의 상업화가 주 요인이었다. 조선인들이 신문을 구독할 경제적 여유가 없었기에 신문들은 일찍부터 광고 시장 확대에 힘을 쏟았다. 언론의 상업화는 필연적으로 신문 지면에도 영향을 미쳤다.
광고 수주는 구독자 수와 직결되는데, 대다수 독자들은 총독부의 정책을 비판하면서 민족의식을 고양하는 기사를 좋아했다. 그렇다고 독자의 기호를 따르다 보면 총독부를 불편하게 만들어 신문 제작상의 어려움이 생긴다. 검열에 걸려 압수당할 위험에 노출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독자를 만족시키면서도 총독부를 불편하지 않게 하는 기사를 생산하는게 편집국장의 능력이었다. 이 시기의 핵심 상품은 ‘저항’이라기보다는, 일본과 구별되는 존재로서 ‘조선’ 또는 ‘민족’을 끊임없이 강조하는 것이었다. 언론의 상업화 심화로 총독부와 독자를 다 같이 만족시켜야 하는 것이 신문사의 입장이었다.
3. 일제는 신문사들의 이런 사정을 환히 들여다보고 있었지만, 총독부가 만족할 정도로 신문들이 편집방침을 바꾸는 데는 오랜 시일이 걸릴 것으로 판단했다. 일단 허가한 신문을 폐간시키는 것은 총독부로서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1936년 총독부는 ‘언문 신문지면 개선사항’을 정해 각 신문사를 대상으로 실행에 옮길 계획을 세웠지만, 위반 시 제재 규정이 없었기 때문에 명령보다는 협조 요청에 가까웠다.
4. 총독부의 신중한 통제정책은 1936년 일장기 말소사건을 계기로 180도로 전환했다. 1936년 8월 25일자 동아일보 1판에는 손기정 선수의 가슴에 일장기가 있었으나, 2판에서는 사라져버렸다. 총독부로서 이 사건은 ‘울고 싶은데 뺨 때려주는 격’이었다.
손기정의 우승으로 인한 민족의식 고양에 위기의식을 느낀 총독부의 입장은 강경했다. 동아일보를 무기정간하고 ‘언문신문지면 개선사항’보다 훨씬 강화된 ‘언문신문지면 쇄신요항’을 수용할 것을 강요했다. 전자가 6항인데 비해 후자는 18항으로 내용도 구체적이었다.
(총독부의 언론통제는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물꼬를 트고, 1937년 중일전쟁으로 쐐기를 박았다.)
5. 동아일보의 정간으로 광고와 구독자가 조선일보로 몰렸다. 일장기말소사건은 조선일보의 성장을 촉진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총독부와의 관계를 고민하도록 만들었다. 총독부는 이제 단순히 ‘잘못된’ 행위를 처벌하는데 그치지 않고,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을 적극적으로 강요했다.
1937년 신년호의 신문 1면에는 일왕 부부의 사진이 처음 등장했고, 조선 총독의 연두사, 정무총감과 경무국장의 연두 소감도 함께 실렸다. 신년호의 지면은 총독부의 강요와 조선일보 내부에서의 시류 순응 움직임이 서로 맞물려 만들어졌다. 조선일보는 민족의 계도자보다 수익성 좋은 기업을 선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