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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테레미즈(Termez)
[테레미즈 개관]
테레미즈는 우즈베키스탄의 최남단에 있고, 아무다리야 강을 사이에 두고 아프가니스탄과 마주 보고 있는 인구 약 10만 명의 도시다. 봄에는 아프가니스탄 쪽에서 세찬 황사 바람이 불고 여름에는 덥다. 일찍이 박트리아와 토하리(吐荷羅)의 경계 지역이고 월지(月氏 또는 月支)의 땅이어서 후한(後漢) 때 인도의 대승불교 경전을 처음 한문으로 번역한 지루가참(支蔞伽讖) 등 ‘支’자 성을 쓰는 사람의 출신이 이 지역이다.
고대 테레미즈는 BC 4세기에 건설되었으나 칭기즈칸에 의해 파괴되었고, 그 동쪽에 다시 건설되었으나 중심지가 이동되어 지금의 테레미즈는 1890년 부하라 칸이 러시아의 차르에게 영토할양조약을 맺고 러시아가 군대 주둔지를 만들면서 형성되었다. 러시아는 1900년대 테레미즈와 사마르칸트간의 도로를 건설하였고, 러시아의 10월 혁명 이후 근대 도시로 변모되었다.
17시 32분쯤 메리디안 호텔(Hotel Meridian)에 도착했다. 처음에 501호실을 배정받아 올라갔더니 더블 침대 1개가 있어 프론트에 말하여 412호실로 바꿨다. 이번에는 침대가 3개 있었고, 장식품이라고는 달랑 그림 액자 1개에 TV와 화장대가 있을 따름이었다. 침대에 누워 쉬다가 19시부터 호텔 1층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조주 스님이 러시아의 고고학자 겸 우즈베키스탄학술원 정회원인 콘스탄틴을 초청했다. 콘스탄틴은 구레나룻이 무성하다.
[테레미즈 시내 구경]
호텔 건물 밖에서 담배를 1대 피우며 조수종 교수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마침 김정위, 남성우, 조회환 교수가 테레미즈 중심가에 간다며 같이 가자고 해서 조수종 교수와 함께 따라 나섰다. 티코 택시에 앞에 1명, 뒤에 4명, 합해서 5명이 타고 갔다. 이곳 택시는 대부분 티코이고, 정원에 제한이 없고 미터기가 없어서 택시를 탈 때마다 정원과 요금을 흥정해야 했다.
중심가로 짐작되는 곳에 내리니 요금은 1,000숨이다. 김정위 교수가 1,500숨을 주고 내려서 술집을 찾았으나 중심가치고 건물도 초라하고, 불이 켜진 곳도 드물고, 시골에 온 것처럼 거리가 너무도 한산하다.
어느 뷔페 앞에 가니 청년들이 몇 명 있는데 한 청년이 안내하여 일단 그곳으로 정하고 맥주나 한 잔 하기로 했다.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했더니 어느 청년이 공터로 안내하면서 그곳에서 볼 일을 보란다. 볼 일을 보고 오니 수돗가로 안내하며 손을 씻으란다. 무슬림들은 예배를 보기 전 또는 용변을 보면 반드시 손을 씻는다는데 물이 없는 사막에서는 모래로 항문을 씻고, 손과 얼굴을 씻는다고 한다. 그래서 사막에 사는 사람들은 정력이 세다나.
맥주 3병에 1,800숨이고, 맥주의 도수는 우리나라(보통 4.5-6도)보다 훨씬 높은 12도다. 안주를 주문했으나 안주는 없고, 소금을 내어놓는다. 원래 이곳 사람들은 술을 마실 때 안주를 먹지 않는다고 한다. 나중에 맥주를 더 시키니 없다고 한다. 장사를 그렇게 악착같이 하려 들지 않는다. 조그만 구멍가게이니 오늘은 예정한 물량을 다 팔았나보다. 술집 앞에는 동네 청년들이 다 나와서 구경하며 “꼬레?”라고 묻는다. 21시쯤 티코 택시를 타고 호텔로 와서 맥주 몇 잔 더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대승불교의 발상지; 발크(Balkh)]
옛날에는 테레미즈와 가까웠으나 지금은 테레미즈에서 동남쪽으로 약 60km 떨어진 아프가니스탄의 북쪽에 발크(Balkh)라는 소도시가 있다. 오늘날 테레미즈와 아프가니스탄 사이에 아무다리야 강이 흐르고 있는 것처럼 옛 테레미즈와 발크 사이에도 아무다리야 강이 흐르고 있었다. 현장과 혜초 스님이 인도로 들어갈 때 이곳을 지나갔다. 그 당시 발크는 소왕사성(小王舍城)으로 불릴 정도로 불교가 왕성했던 곳으로 현장 스님은 소왕사성에 도(道)를 이룬 스님이 헤아릴 수 없었다고 『대당서역기』에 전하고 있다. 불탑을 처음 만든 곳도 발크였다. 테레미즈와 발크는 대승불교가 일어나서 발전한 곳이다. 현장 스님이 지나갈 당시의 고대 테레미즈와 발크 사이는 습한 곳이었으나 지금은 60여km 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습하지도 않다.
10월 26일 (금)/ 지척에서 닭 우는 소리, 개 짖는 소리, 새 우는 소리에 잠이 깼다. 창을 열고 내다보니 길에는 가로등이 없고, 개들이 떼 지어 다닌다. 집들도 듬성듬성하고 나지막하여 슬레이트 지붕이거나 공장 같은 집이며, 나무들이 많아 전원도시와 같은 풍경이다. 조깅을 하고 들어와서 아침식사를 했다. 식사 내용이 보잘 것 없고 입에 맞지 않지만 어쩔 수 없다.
[테레미즈 고고학박물관(Termez Archaeological Museum)]
08시 10분경 버스에 올라 출발하니 바람이 쌀쌀하여 초겨울 날씨다. 08시 15분에 콘스탄틴과 함께 테레미즈 고고학박물관에 도착했다. 09시에 개관 예정이지만 조주 스님이 박물관장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어 특별히 08시에 개관하였다. 박물관에 가니 박물관장이 나와서 우리를 환영했다.
이 박물관에는 테레미즈 지역에서 발굴된 박트리아와 토하리의 주요 유물들이 진열되어 있고, 알렉산드로스 이후의 금화가 보관되어 있고, 야외에 카라데파와 화이자데파의 사원지에서 출토된 사원 기둥의 주춧돌이 있다.
이 지역은 전체가 토하리(吐荷羅)에 속했었다. 이 일대의 수한다리야 지역에는 900여개의 유적지가 있고, 약 3,500명의 고고학자가 발굴 작업을 하고 있다고 한다. 1,800점 이상의 그리스 동전이 발견되었는데 그 중 1,700여점은 고고학자들이 발굴하였고, 나머지는 자연적으로 발견된 것이다. 이 지역의 유적지에서 발굴된 것 중 12개의 유적지가 불교 유적지이고, 불교 유적지 중 어떤 것은 길이가 1-10km에 이르는 것도 있다.
이 지역에 유물이 많이 발굴되어 이스마엘 카리모프 대통령이 2001년에 이 박물관을 건립했다. 박물관은 유럽의 기준에 따라 건립되었고, 박물관에도 고고학자들이 많으며, 쿠샨시대 테레미즈는 중요한 역할을 하여 쿠샨 시대의 유물도 많이 발굴되고 있다. 이 박물관에는 우즈베크어, 영어, 러시아어, 독일어 등 4개 언어의 사이트가 개설되어 있다.
1층에는 1세기 쿠샨왕국 왕자의 두상, 1-3세기 불상 몸체(두상과 손발을 따로 만들어 몸체에 붙인다), 큰 항아리(절에서 쓰던 물통), BC 3세기경 제조된 창을 짚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군장모습이 양각된 직경 2m 크기의 금화 확대모형, 2-3세기 불상, 수곽(물이 나오는 석곽) 등이 진열되어 있다.
2층에는 아무다리야강의 자라우세(Zarautsay)지역에서 발견된 BC 6-7만년전 동굴벽화 모형, 10만년전 석기시대의 석기(돌칼, 찍개, 돌도끼, 돌화살촉), 청동기, 토기, ‘ㄹ’자형 뱀 4마리를 네모꼴로 배치하여 조각한 BC 17-15세기 철기시대의 도장 확대모형(카스피해 지역의 아리아인들이 기마와 철기를 가져왔는데 도장은 사유재산제도가 확립되었음을 입증), 두상이 떨어진 비너스상, 그리스시대 동전, 코끼리투구를 쓴 그리스 장군의 흉상 모형, 알렉산드로스대왕의 흉상 모형, BC 1-2세기 어린이를 도안한 모자를 쓴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모형, 초기의 부처상(평범한 보통 사람 모습), 9-19세기 이슬람 건축 유물, 체스 모형, 철사사슬 갑옷 등이 진열되어 있다.
다시 1층 금고로 갔더니 알렉산드로스 당시의 금화와 은화, 장신구(반지, 팔찌, 귀걸이, 목걸이 등), 버클, 은장도 케이스, 4세기의 금화와 은화, 14-15세기 금제 및 은제 주전자,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 때의 황동 물통(아래쪽에 물이 나오게 하는 꼭지가 달려있고, 밑에는 물통을 데우는 장치가 있다) 등이 진열되어 있다. 콘스탄틴 및 박물관장과 함께 기념촬영을 했다.
09시 25분경 박물관을 출발했다. 지나가는 왼쪽에 지금은 시청으로 사용하는 공산당 건물이 있다. 한 때 세계의 절반을 호령했던 공산주의가 이제는 한갓 역사의 유물이 되었는데 아직도 시대착오적인 공산주의를 받들면서 이에 경도된 사람과 국가가 존재한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로터리의 조형물 꼭대기에 봉황 조각이 얹혀 있는데 봉황은 우즈베크의 상징이라고 한다.
09시 40분경 왼쪽에 철조망과 그 너머 아무다리야 강이 보이고, 강 너머에는 아프가니스탄이 버티고 있다. 버스에서 내려서 벌판을 가로질러 주루말라 대탑으로 가는 길에 오른쪽에 보이는 흙무더기는 6세기의 벽돌공장터이고, 왼쪽 저 멀리 보이는 흙무더기는 고대 테레미즈의 성터(城址)다. 성(城)은 성곽(城郭)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이 경우에는 도시(都市)를 말한다.
버스에서 내려 목화밭을 가로질러 대탑으로 걸어갔다. 수로에 갈대가 무성하고, 길에는 잔디와 여러 가지 풀들이 자라고 있다. 방목된 소가 한가하게 밭에서 풀을 뜯고 있고, 대탑 저 너머에 옥수수 밭이 있다.
[주루말라 대탑]
10시 5분 대탑에 도착하여 10시 50분까지 둘러봤다. 밭 가운데 봉화대처럼 솟아있는 흙더미가 3세기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주루말라 대탑 중의 내탑(內塔)이다. 이 탑을 보러 온 관광객은 우리가 처음이라고 한다.
현재 남아있는 내탑의 높이는 약 14m이나 외탑(外塔)을 포함한 실제의 크기는 지금의 2배 이상으로 추정된다. 우리가 보고 있는 내탑은 말린 흙벽돌로 쌓았고, 외탑은 구운 벽돌로 쌓아 겉에 황금을 발랐다고 한다. 불교가 사라지면서 외탑은 주민들이 건축자재 등으로 벽돌을 뜯어가서 훼손되었고, 내탑은 봉화대로 사용하는 바람에 높이가 많이 줄어들었다. 쿠샨시대의 탑은 벽돌로 쌓아서 만드는데 벽돌의 크기는 32x32x12cm 규격이라고 한다.
이 일대는 탑을 중심으로 3,000여 명의 스님이 수도를 하는 절이었다고 한다. 이 지역은 협존자, 마명, 세친을 통해 대승불교의 기틀을 닦은 대승불교의 발상지요 중심지였다. 주루말라 대탑은 현장 스님이 『대당서역기』에서 테레미즈에 황금의 거대한 대탑이 방광을 하며 신이한 현상이 많아 천사외도의 무리들(이슬람)이 예경한다고 전한 탑으로 추정된다.
이 탑이 여러 가지 신이한 현상을 보여 없어지지 않고 지금까지 보전될 수 있었다고 하는데 12-18세기에 아랍인들이 이 탑을 봉화대로 사용하였고, 러시아인들이 탑 위에서 불상을 발굴하여 봉와대가 탑임을 입증하였다.
탑 주위의 토지는 농사를 짓는 밭으로 사용되고 있고 아이들의 놀이터로서 관리가 제대로 안 되어 탑이 계속 훼손되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
[주루말라 대탑 건립에 얽힌 전설]
조주 스님이 대탑을 만든 사연을 이야기 했다. 카니시카왕의 아버지 구쥬라 카드피세스가 월지의 5개 부족을 통일하고 아프가니스탄까지 점령하였으나 후계자를 정하지 않고 죽자 카니시카가 형제를 죽이고 왕이 되었다. 카니시카왕이 여름 수도에서 하얀 토끼를 보고 활을 쐈다. 화살을 맞고 피를 흘리며 도망가는 토끼를 따라갔더니 천신의 모습을 한 아이가 자기는 부처님의 부탁을 받고 왕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하면서 부처님의 법을 설하여 카니시카왕이 이에 감동을 받고 불교에 귀의하여 인도를 정벌하고 자기의 영지인 이곳에 이 대탑을 세웠다고 한다.
대탑을 출발하여 화이자데파로 가는 길에 테르미즈 시장이 지나간다고 하여 시장이 탄 차가 지나갈 때까지 차들이 모두 비켜서 우리가 탄 버스도 한참 지체되었다. 시장이 지나간다고 차를 세우다니 시장의 위세가 그렇게도 대단한가? 우리나라도 한 때는 대통령이 지나가면 비키는 시절이 있었지만.
[화이자데파(Fayaz Tepa Monastery) 박물관]
11시경 대탑에서 서남쪽 약 4km 지점에 있는 화이자데파 입구의 화이자데파 박물관에 도착했다. 이 박물관은 일본인이 건립한 조그마한 흙집으로 일본인들은 화이자데파를 발굴하여 비나야 삼존불(두발은 나발이 아닌 천연의 머리상투) 등 유물의 모조품을 이곳에 진열하였는데 진품은 타시켄트에 별도로 박물관을 지어 보관하고 있으며 일반에 공개하지 않고 있다고 했다.
조주 스님은 일본인이 이곳까지 진출하여 유물을 발굴하고 박물관을 건립한 것을 애석해 하면서도 일본인 덕에 화이자데파의 유물을 볼 수 있어 그나마 고마운 점도 있다고 했다.
[화이자데파 사원지(Fayaz Tepa Monastery)]
박물관을 나와서 화이자데파 사원지(寺院址)로 걸어갔다. 1965년 한 목동이 그리스의 동전을 가지고 놀다가 KGB에 포착되어 주변을 탐색하다가 1967년 소련의 고고학자 알리바움에 의해 이 일대의 유적지가 발견되었다.
사원지에는 흙벽돌을 이용하여 사원의 모형을 복원해 놓았다. 절터, 불탑, 승방, 강당 등이 있다. 불탑은 안에 들어가서 돌며 기도를 하는 곳인데 내탑만 복원한 것으로 원래의 외탑은 복원한 탑보다 훨씬 크다. 탑의 지붕은 돔형이다. 이슬람 사원의 돔 건축양식도 불탑의 돔에서 유래하였다.
이곳의 한 승방에서 비나야 삼존불이 발견되었다. 승방의 부엌에서는 배화교의 흔적이 발견되어 불교와 배화교의 관계를 엿볼 수 있고 특히 비나야 삼존불로 인하여 대승불교가 일어나서 발전된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기원전후에서 3세기 초기까지 아무다리야강이 이 사원의 건너편인 카라데파 아래로 흐르다가 후기에 강이 멀어지면서 주변 환경의 악화로 3세기경 절이 문을 닫고 약 4km이상 이사를 하면서 주루말라 대탑은 들판 한 가운데에 위치하게 되었고, 사원은 아프가니스탄에서 날아온 황사에 파묻혀 주민들로부터 훼손되지 않고 지금까지 유물을 보존할 수 있게 되었다.
[카라데파 사원지(Kara Tepe Monastery)]
화이자데파에서 남쪽 1km 쯤 떨어진 곳에 있는 흙더미가 카라데파다. ‘카라’는 ‘검다’는 뜻이고, ‘데파’는 ‘언덕’이라는 뜻이다.
이곳에는 스님들의 공중목욕탕, 사원, 사후 유골을 묻어놓는 장소 등 많은 유물이 발굴되고 있으나 일본의 자금지원을 받고 있어 지금도 일본인들이 비공개로 발굴을 진행하고 있다. 석굴사원도 있어 알 히컴 하즈리 테레미즈 사원에서 볼 수 없는 정통 양식의 돈황석굴과 비교할 수 있는 좋은 장소이나 비공개라 볼 수 없어 아쉽다. 카라데파의 천막을 쳐놓은 지점은 그 당시 지하 4m 아래 아무다리야강에서 물을 뽑아 올려 만든 공중목욕탕이 있었던 곳이라고 했다. 3세기경 절이 폐문하고 이사했다.
[캄푸리데파 배화교 사원지]
11시 30분 캄푸리데파로 가서 12시 30분까지 발굴 현장을 둘러봤다. 캄푸리데파는 BC 3세기 이전에 건축이 시작되어 7세기까지 건축되어진 장소로 중요한 것으로는 배화교의 유적과 유물, 알렉산드로스대왕 및 그 후계자들의 유물이 있다. 개인 집으로 추정되는 넓은 저택에는 개인 신앙을 위한 것으로 보이는 불상 등의 불교 용품이 보이고 있다. 그 외에도 약 10개 정도의 불교 사원으로 추정되는 유적지가 발굴을 기다리고 있다.
유적의 제일 위층은 이슬람교로부터 아래로 내려가면서 배화교, 불교, 알렉산드로스의 유적이 묻혀 있어 이 지역은 고고학의 일대 보고(寶庫)다.
화이자데파를 발굴하고 그 연속의 가능성으로 이곳까지 발굴을 연장하게 되었는데 1976년부터 발굴이 시작되었다. 유럽의 고고학자들이 자기 비용으로 발굴을 하되 유물은 우즈베키스탄에 주고 보고서만 작성하며, 조주 스님도 발굴비용 1,000만원을 모아 실제로 6개월간 발굴을 하였다고 한다.
알렉산드로스가 임시로 이곳에 주둔했고, 부하 장군이 이곳을 통치했다는 것이 발굴된 유물로 증명되었다. 평야지대 너머 아무다리야강이 있지만 평야지대는 그 당시에는 강이었으나 강이 지금의 아무다리야 강으로 이동되면서 지금의 평야지대로 바뀌었다고 한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마케도니아 성채를 복원한 성채 모형을 지나서 모스크바 대학 고고학 팀의 일원인 러시아 여성 학자가 쿠샨시대의 유물을 발굴하는 현장을 둘러봤다. 아르바이트하는 사람이 호미로 흙을 파고 칼날로 조금 씩 조금 씩 흙을 걷어내며 유물 조각을 찾는 모습을 보면서 보광 스님이 유물 발굴은 게으른 사람이나 하는 일이라고 했다. 하지만 기대했던 유물이 나올 때의 기쁨이 어떠할지 짐작된다. 그 여성 학자는 우리 일행에게 유물에 대한 설명을 했다. 설명에 의하면 이곳에서 옥으로 된 도장(한쪽은 음각, 다른 쪽은 양각), 신상, 좌선 중인 작은 불상 등을 발굴했다고 한다.
다른 쪽에서도 발굴을 하고 있고, 아르바이트 여학생이 물로 발굴된 도자기 파편을 깨끗이 씻고 있었고, 주거지인 듯한 다른 구덩이에는 큰 항아리가 묻혀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12시 35분 버스에 올라 발굴현장을 출발했다. 이 지역은 고려인들이 들어와서 처음으로 벼농사를 시작한 곳이라고 하는데 과연 버스 오른쪽에 벼가 누렇게 익은 논이 보였다. 고려인들은 이곳에서 벼와 목화를 재배하면서 약 300여 명이 살았으나 지금은 대부분 연해주나 러시아로 떠나고 3-4가족만 남아있다고 하며, 테레미즈의 국회의원도 고려인이었으나 애석하게도 얼마 전에 교통사고로 사망하였다고 한다. 간혹 러시아에서 출세한 고려인들이 있지만 그들은 이상하게도 같은 고려인들에게는 냉담하다고 한다. 소수 민족으로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는 행동으로 이해해야 할까?
[고려인 집에서의 푸짐한 점심식사]
12시 50분 캄푸리데파에서 멀지 않은 고려인 집에 가서 14시 20분까지 점심식사를 했다. 고고학 발굴 팀은 이 집에서 현장까지 자전거로 왔다 갔다 하며 숙식을 한다고 하며, 이 집주인도 발굴 현장에서 일을 하고 있고, 조주 스님도 그런 인연으로 이 집 주인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주인 남자는 얼굴이 작고 납작하며 쪼글쪼글 주름져 60년대의 한국인처럼 생겼으나 여자들은 체형이 펑퍼짐하고 뚱뚱하여 현지인과 구별이 안 될 정도다. 이곳에 오래 살면 사람도 이곳 사람을 닮아가는 모양이다.
집은 슬레이트 지붕의 허름한 단층에 방은 여러 개다. 사는 집도, 입은 옷도 우리의 60년대만큼이나 허술하다. 집 뒤에 포도넝쿨을 올린 시렁이 있고, 사다리를 걸쳐놓았으며, 판자 울타리를 경계로 샛문을 통해 옆집과 왕래할 수 있게 했다. 돼지우리, 닭장이 있고, 텃밭에는 마늘이 자라고 있으며, 한쪽 구석에 자전거를 세워놓았다. 부엌에 들어가 보니 바닥에 양파, 감자, 고추, 장작, 수수 빗자루 등이 널려있고, 가마솥에 장작불을 피워 된장국을 끓이고 있어 우리의 60년대 농촌 풍경을 그대로 보는 듯하다.
햇볕 내리쬐는 마당에 탁자와 의자를 놓고 거기에 앉아 점심식사를 했다. 한쪽에 목탄을 피워 돼지고기 꼬치를 굽고, 된장국, 된장국에 삶은 양고기, 밥, 수니채, 양배추김치, 민물고기 젓갈 등으로 모처럼 맛있고 푸짐한 식사를 했다. 이 집에서 담근 포도주를 정제한 토주(土酒)가 나왔는데 약간 불내가 나는 우리나라 전통 소주와 같은 맛이다. 이곳에서도 속이 좋지 않아 또 한 번 용변을 봤다.
나오면서 잘 먹었다고 인사를 하니 고맙다고 하며 한국말을 약간 알아듣기는 하나 말은 잘 할 줄 모르고 할아버지의 고향도 모르며 고려인 3세라고 했다. 주인은 성이 ‘정’, 이름이 ‘그리샤’라고 하나 鄭, 丁, 全, 田, 千을 러시아어로는 모두 ‘뗀’이라고 발음하여 잘 구별하지 못한다고 한다. 이들은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니며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으로 이제는 조상의 고향도, 정확한 성도 알 수 없을 만큼 세월이 흘러버렸다. 이들을 보는 내 마음이 한없이 애처롭기만 하다. 보광 스님이 주인에게 우리나라 돈 3만원을 주었는데 그 돈을 쓸 수 있을지 모르겠다.
9. 테레미즈에서 카르시를 지나 부하라까지
15시 30분 버스에 올라 부하라(Bukhara)를 향해 출발했다. 이곳에서 부하라까지는 550km다. 원래는 카르시(Karshi)에서 1박하고, 다음날 부하라로 갈 예정이었으나 카르시에서 숙박할 곳이 없다고 하여 일정을 바꿨다.
목화밭에서는 사람들이 목화를 따고 있다. 일단 기계로 따고나서 남은 것을 사람이 딴다고 한다. 소가 목화밭에서 목화를 따먹고 있다.
16시 10분경 산악지대로 진입했다. 길에는 적재함에 낙타풀을 가득 실은 트럭이 달리고 있다. 16시 42분 검문소를 지난다. 구릉과 산악이 나타나고, 지형이 상당히 험준하다. 우리의 아득한 조상이 이곳을 지나왔는지도 알 수 없다. 풀이 자라지 않는 것 같은데 두루마기 같은 검은색 옷을 입은 목동이 양떼를 몰고 다니고, 양도 검은색, 땅도 우중충한 회색을 띄고 있다. 어느 정도 평평한 지대가 있고, 그런 곳에는 마을도 제법 크다.
17시 15분쯤 데카나바드(Dekhanabad) 부근에서 잠시 쉬었다. 황량한 구릉지대에는 염소들이 하도 다녀서 비로 쓴 듯 여러 줄기의 길이 나 있다. 도로공사를 하고 있고, 소들이 도로를 어슬렁거리며 다닌다.
이곳 사람들은 주업이 유목생활이고, 양이 주식(主食)의 하나로 재산목록 1호다. 양은 고기와 젖을 먹고, 털과 가죽은 옷을 만들어 입고, 똥은 연료로 쓴다. 양 1마리의 가격은 약 150달러다. 양을 40-100마리 키우면 풍요롭게 살 수 있고, 다른 걱정이 없으니 스트레스 받을 일도 없어 90세를 넘겨 장수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결혼을 하려면 지참금으로 처녀 쪽에 양을 주는데 처녀를 사는 값을 ‘깔림’이라고 한다. 사랑을 전제로 한 결혼에도 신부 쪽은 신랑으로부터 양 40마리를 지참금으로 받는다고 한다.
17시 50분 구자르(Guzar)에서 잠시 쉬면서 노점 시장을 구경했다. 안에는 큰 건물이 있는 시장이 있지만 시장에는 들어가지 않고 노점만 구경했다. 노점에는 이 일대에서 재배한 듯한 수박, 멜론, 단감, 토마토, 사과, 호박, 양파, 당근, 콩 비슷한 곡식들을 팔고 있다.
해는 이미 떨어져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고, 동녘 하늘에는 음력 9월 16일의 크고 둥근 달이 대지를 비추고 있다. 버스 반대 방향에 달이 떠있는 것으로 봐서 우리는 서쪽으로 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8시 5분 버스에 올라 다시 출발했다. 김정위 교수가 이슬람의 오신오행(五信五行)에 대해 말했다. 오신은 알라의 유일성, 천사, 예언자, 성서(십계, 성경, 코란), 모든 것이 알라의 뜻임을 믿는 것이고, 오행은 알라의 유일성의 믿음을 행하고, 예배하고, 십일조를 내고, 금식(라마단)을 하고, 일생에 한 번 이상 메카를 순례하는 것이라고 했다.
왼쪽 가스전에서 타오르는 불꽃이 휘황하다. 우즈베키스탄의 천연가스 생산량은 세계 4위다. 끝없는 지평선 위로 저녁놀이 붉게 타오르고, 달빛과 별빛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경치를 연출한다. 사막은 밤이 아름답다.
카르시의 교외에 이곳 특산인 오색 소금이 생산된다. 천연 미네랄이 풍부하고 짜고 달아서 한국의 천일염보다 낫다고 한다. 빨간 소금이 크리스털처럼 투명하여 오색으로 비친다고 하여 오색소금이라고 부른다. 현장 스님은 『대당서역기』에서 빨간 소금에 대해서 들었다고 전하고, 혜초 스님도 오색 소금에 대한 견문을 썼다. 길거리 상점에 삼성전자의 간판이 보인다.
19시경 카르시를 지나가면서 저녁식사를 할 식당을 못 찾아 카르시를 통과하여 19시 25분경 카르시와 부하라 사이의 카산(Kasan)인 듯한 시골 식당 앞에 정차하여 저녁식사를 했다. 옆 자리의 현지인 아이가 양 꼬치와 토마토를 건네주기에 받기는 했지만 우리 식탁에도 음식이 남아서 먹을 수가 없었으나 다만 아이의 인정만은 먹어 두기로 했다.
20시 20분에 출발하여 22시 8분 부하라의 경내에 진입하고, 22시 20분 부하라의 카라반(Caravan)호텔에 도착하여 8호실에 투숙했다. 음식이 맞지 않는지 오늘은 세 번이나 용변을 봤다. 여행을 다녀도 이런 일이 없었는데 고생이다. 다른 사람은 잘 지내는지 모르겠다.
TV를 켰더니 1번 채널에서 MBC인기 드라마 이서진과 이은주 주연의 ‘불새’가 우즈베키스탄어로 더빙되어 방영되고 있었다. 더빙이 시원찮아 간혹 우리말 대사가 튀어나오기도 했다.(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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