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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죽음
인간의 죽음이라고? 그렇다면 푸코는 철학자라기보다는 차라리 예언가가 아닌가. 그는 인류가 핵폭탄이나 환경문제 등으로 곧 멸망할 것을 예언한 것은 아니므로 이 말에 현혹되지는 말자. (물론 프랑스의 저널은 이 말을 대대적으로 퍼뜨렸고, 그 덕으로 어렵디어려운 그의 책은 불티나게 팔렸다.) 그가 말한 것은 생물학적인 인간의 죽음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다. 그가 겨냥한 것은 <근대>- 현대를 포함하여 - 였다. 그렇다면 인간의 죽음이란 ‘근대적 인간의 죽음’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오히려 정확할 지도 모른다.
그의 책에서 다루고 있는 시대는 대부분 근대와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그가 겨냥하고 있는 것은 역설적으로 근대다. 어떻게? 근대라는 구조물이 필연이 아닌, 우연의 산물이며, 근대의 논리가 필연적 논리가 아닌 하나의 논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역사적으로 탐구함으로써. 그의 작업을 <고고학>이나 <계보학>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그가 바로 철옹성인 것만 같은 이 사회의 구조를 캐들어 가고, 그 작동원리를 규명함으로써 궁극적으로 해체하려 하였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푸코의 <고고학>은 근대를 해체하기 위하여 근대라는 건물의 지도를 그리는 것에 비유할 수 있고, <계보학>은 그 건물의 동력을 차단하기 위하여 동력을 추적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자 그럼 본격적인 해체작업에 들어가기에 앞서 우선 우리의 사고방식이나 행동양식이 어떻게 질서 잡혔는지 알아야겠다.
지식은 권력이다
“아는 것은 힘이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통상 앎에 대한 경구로 사용되어진다. 하지만 이 말을 이렇게 바꾸면 어떨까? 지식은 권력이다. 학교시절을 상상하면 쉬울 것이다. 지식의 소유자인 선생님은 몽둥이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그가 가르치는 것은 절대였고 그에게 엉뚱한 질문이라도 하게 되면 그 날은 몽둥이 찜질을 당하는 날이 되기 십상이었다. 이 말을 확대해도 될 성싶다. 의학지식을 알고 있는 의사는 환자에게 권력이다. 환자는 그가 하라는 대로 해야 한다. 법 지식을 알고 있는 재판관은 범죄자에게 권력이다. 아무리 무서운 흉악범이라도 그 앞에서는 벌벌 떤다.
푸코는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이 지식과 권력의 관계를 추적한다. 그를 위해 우선 지식에 대하여 알아보자. 지식을 다루는데 중요한 개념 중 하나가 <담론(discourse)>이다. 우리는 ‘담론’이라는 말을 ‘인간이 소리나 문자를 통하여 나타내는 모든 생각’이라고 쉽게 생각하자. 그렇게 놓고 보면 지식을 형성하는 모든 표현을 담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위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역사적인 무의식적 조건 - 푸코의 표현을 따르면 <에피스테메> - 속에서 작동하는 ‘담론’은 한편 인식대상에 대하여 질서를 부여한다. 예를 들어 먹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말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 등을 정의하고 구분한다. 이처럼 ‘담론’은 “말과 사물을 이어주는 고리”이면서 “사물과 언어를 재단하는 방법”이 된다.
한편 이러한 담론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단순히 말만이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사건’이, 권력이 개입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진시황제의 ‘분서갱유 사건’은 특정한 지식을 허용하고, 어떤 지식은 배제하는 ‘효과’를 보게 된다. 그렇다면 지식과 권력은 불가분의 관계이게 된다. (한 손에는 ‘코란’을 한 손에는 ‘칼’을 쥔 이슬람교도를 상상하라.)
때문에 우리는 선생의 말을, 재판관의 언도를 단지 말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힘으로, 우리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힘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정상과 비정상
이제 이렇게 형성된 지식은 지식인(교사, 의사, 법관 모두 특정한 지식을 지닌 지식인이다)을 형성하고, 그에 따른 대상(학생, 환자, 범죄자)을 형성하면서, 그 대상을 판단할 수 있는 기준(모범생/문제학생, 환자/비환자, 범죄자/선량한 자)을 갖는다. 한편 지식은 막대한 물리적, 제도적 지원을 받으면서 특정한 방향으로 사회를 이끌어 간다.
푸코는 광기와 문명, 진료소의 탄생등의 저술을 통하여 이러한 과정을 치밀하게 추적해간다.
푸코에 따르면 광인은 처음부터 격리되지 않았다. 오히려 광인은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에서 나타나듯이 신비한 통찰력을 가지고 있는 인물로 간주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17세기가 되자 대대적인 감금이 시작된다. 그에 따라 광인은 물론 거리의 부랑아, 범죄자, 간질환자, 병자, 가난한 자, 무직자 등이 무차별적으로 갇히게 된다. 나중에 무차별적인 감금은 분류되어 갇히게 시작했고, 광인은 특히 별로의 취급을 받게 되었다. 처음에 광인에 대한 지식이 형성되지 않았을 때에는 물리적인 치료(뻐꾸기 둥지위로 날아간 새라는 영화의 치료장면을 상상하라)를 통하여 치유될 것이라고 보았지만, 후에 훈련과 감시, 처벌 등의 다양하고 세련된(?) 방법들이 시도된다. 한편 광인의 문제는 이제 광인 밖의 문제가 아니라 광인 스스로의 훈련의 문제로 내면화되기 시작한다. ‘당근과 채찍’의 이중전략 속에서 광인은 정상인(?)이 된다.
감시와 처벌
푸코는 이러한 내면화의 과정을 광인의 문제에만 국한하여 고찰한 것이 아니다. 그는 처벌유형의 역사적인 변화를 추적함으로써 처벌의 내면화를 살핀다. 감시와 처벌에서 다루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 책의 첫 장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설치된 처형대 위에서 가슴, 팔, 넓적다리, 장딴지를 뜨겁게 달군 쇠집게로 고문을 가하고, 그 오른손은 국왕을 살해하려 했을 때의 단도를 잡게 한 채, 유황불로 태워야 한다. 계속해서 쇠집게로 지진 곳에 불로 녹인 납, 펄펄 끓는 기름, 지글지글 끓인 송진, 밀랍과 유황의 용해물을 붓고, 몸은 네 마리의 말이 잡아끌어 사지를 절단하게 한 뒤, 손발과 몸은 불태워 없애고 그 재는 바람에 날려 버린다.”
1757년 국왕 루이 15세를 시해하려했다는 죄목으로 처형당하는 다미앵에 관한 처벌내용이다. 이처럼 이 당시 처벌은 공개적으로 일벌백계하여 국민들로 하여금 공포를 느낌으로써 권력에 복종하게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처벌방식이 항상 효과를 보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잔혹함에 대한 비난과 역효과를 낳기조차 하였다. 뭔가 다른 조치가 필요하였다. 다음은 그 뭔가 다른 조치에 예이다.
5시 : 북소리에 기상/ 5분후 두번째 북소리에 침구 정돈/세번째 북소리에 정렬 / 5시 15분 : 아침기도 및 독송 / 5시 45분 : 세면후 아침식사 / 6시 : 노동 / 10시 : 점심 및 휴식 / 10시 40분 : 학습(읽기, 쓰기, 그림그리기, 계산하기 순으로) / 12시 40분 : 마당에서 휴식 / 12시 55분 : 작업장 별 정렬 / 1시 : 오후 노동 / 4시 : 세수 후 반별 정렬 및 식사 / 5시 : 노동 / 7시 : 빵배급 및 독송, 저녁기도 / 7시 30분 : 세수, 의복검사, 독방 도착 / 첫북 : 탈의 / 두번째 북 : 침상에 들어감 (이상 여름의 일과시간표)
분 단위로 짜여진 이 일과시간표는 <파리소년 감화원을 위한 규칙>의 일부이다. 위의 끔찍한 장면과 아래의 표가 실행되는 시기의 차이는 1세기도 안 된다. (위의 표는 마치 우리의 학교 스케줄을 보는 듯하다.) ‘호화로운 신체형벌’은 이제 점차로 유순하게 변하게 된다. 하지만 그것은 더욱 세분화되고 내면화된다. 감시와 처벌은 감옥뿐만 아니라 학교, 병원, 공장, 군대 등 다양한 집단들에게까지 확대된다. 푸코는 이를 <규율의 과학>이라 불렀다.
원형경기장과 판옵티콘
과거의 감시와 처벌방식은 대중공개적인 것이었다. (영화 벤허에 나오는 원형경기장을 상상하라.) 하지만 근대에 와서 감시와 처벌방식은 바뀐다. 푸코는 근대의 감시방식을 벤담의 <판옵티콘(panoticon:일망감시장치)>를 예로 설명한다. 판옵티콘은 중앙에 탑이 있고, 그 주위로 원형건물이 에워싸고 있다. 이 원형건물은 중앙 탑으로 창이 나있고, 독방들로 나있다. 중앙탑은 강력한 빛을 이 원형건물에 투사함으로써 탑에 있는 사람은 원형건물에 갇혀있는 사람들이 보이지만 안에 있는 사람은 원형건물에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게 고안되어있다. “그것은 바로 완전히 개체화되고, 항상 밖의 시선에 노출되어 있는 한 사람의 배우가 연기하고 있는 수많은 작은 무대들이자 수많은 감방이다.”
벤담은 이러한 고안물을 감옥뿐만 아니라 병원, 학교, 공장 등에도 적용하라고 제안한다. 이제 모든 사람들이 소수의 범죄자를 보는 원형경기장이 아니라 한 사람(혹은 없을지도 모른다)이 모든 사람을 감시하는 체계가 구축된다. 그러한 체계 속에서 개인은 분할되고, 훈육되고, 규격화되어진다.
권력은 생산한다
이제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여러 가지 ‘규율(discipline)’을 통하여 권력에 순종하도록 훈육된다. 개인은 태엽을 돌리면 걸어가는 <기계-인간>과 같은 존재가 된다. 순종적인 육체를 만들기 위하여 규율은 1) 공간적으로 개인을 분할시키기 시작하고, 2) 엄격하게 활동을 통제하며, 3) 반복훈련을 통하여 개별화 규격화시키고, 4)세부적인 단계를 만들어 등급을 매기면서, 5)일탈의 위험성을 막기 위하여 시험을 실시한다. 그리하여 개개인을 권력과 지식의 구성요소로 만든다.
푸코는 이렇게 말한다 : 아마도 개인이라는 것이 사회의 ‘이데올로기적인’ 표상의 허구적 원자일 수 있겠지만, 그것은 도한 ‘규율·훈련’이라고 명명되는 권력의 특유한 기술에 의하여 제조되는 현실의 모습인 것이다. 이제는 ‘배제한다’, ‘처벌한다’, ‘억누른다’, ‘검열한다’, ‘고립시킨다’, ‘숨긴다’, ‘가린다’ 등의 부정적 표현으로 권력의 효과를 기술하지 말아야한다. 사실상 권력은 생산한다. 현실적인 것을 생산하고, 객체의 영역과 진실에 관한 의식을 생산하는 것이다.
지도와 동력
이제 잠시 정리해보자. 푸코는 구조주의의 영향을 받아 사물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은 주체의 의지나 이성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단절/형성된 ‘인식틀’에 기초한 <담론>들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구조주의자들과는 달리 담론의 역사성에 대하여 주목한 점을 고려할 때 그의 입장을 <역사적 구조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 한편 구조주의자들이 <담론>의 영역에만 주목하는 반면, 푸코는 <담론>과 <비담론>의 상호작용에 대하여 탐구함으로써 구조주의를 넘어서고 있다. 또한 그는 광기, 감금장치, 진료소, 감옥 등의 형성규칙이 역사적이고 단절적인 것을 살핌으로써 권력이 인간의 신체에 작동하는 원리를 살피고 있다. 한편 그는 지식과 권력의 상관성을 고찰하고, 단순히 억압하는 권력이 아니라 <생산하는 권력>, 몇몇 손에 집중돼 있는 권력이 아니라 내면화되고 편재(偏在)된 권력의 효과에 대하여 분석하였다. 이제 권력은 <지식-권력(savior-pouvoir)>, <생체권력(bio-pouvoir)>, <생산하는 권력>이라는 구체적 이름을 얻게 되었다.
이제 지도도 그려졌고 동력도 찾았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 핵심부에 쳐들어가 동력을 차단할 것인가? 하지만 이것은 불가능한 듯하다. 푸코는 “권력은 ‘항상 이미 거기에’ 존재하며, 누구도 권력 ‘밖’에 존재하지 않으며, 체제와 단절되어 있는 사람들이 뛰어놀만한 어떠한 ‘여백’도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라고 말한다. 그것은 마치 감옥 밖으로 나가기 위하여 작전을 짜던 죄수들이 결국 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과 같다. 외부를 사고하지만 외부는 없다?! 경계를 허물고 싶지만 경계는 이미 없다.
마음을 바꿔라
이러한 난점은 라캉이나 알뛰세가 갖는 난점이기도 하다. 그들 모두는 인간 주체가 <타자>(라캉), <이데올로기>(알뛰세), <권력>(푸코)의 그물망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약하였다. 따라서 저항(해방)의 가능성도 희미해 보인다.
하지만 푸코는 “권력이 있는 곳에 저항이 있다”라고 말한다. 단 이 저항은 이제 하나의 권력, 집중된 권력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아니 애당초 권력은 하나가 아니며, 집중되어 있지도 않다. 그에 따라 푸코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신이 있는 영역에서 그리고 자신의 활동성(또는 수동성)에 기반해서” 투쟁을 시작하라! ‘국지적’이고 ‘부분적’ 저항! 권력의 편재에 맞선 편재된 개인의 투쟁! 또한 푸코는 오늘날의 지식인은 “현실의 무기력과 속박 속에서 취약지점과 통로, 사물의 추세를 탐지하고 가리키며,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현재에만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이며, “끊임없이 마음을 바꾸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이제 푸코의 전략은 총체화를 목표로 하지 않는다. ‘국지적’이고 ‘부분적인 저항’은 분명 수동적이며, 지식인의 ‘마음 바꾸기’ 전략 역시 유약하다고 평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국지적/부분적 저항과 ‘마음 바꾸기’ 전략은 현실에서 무모한 총체화나 반성 없는 신념보다 솔직한 출발점이라 볼 수도 있다. 푸코의 분석에 따르면 이러한 전략은 불가피하기조차 하다.
이러한 푸코의 전략에 만족해야할 것인가? 혹 “권력이 있는 곳에 저항이 있다”는 푸코의 테제는 “저항이 있는 곳에 권력이 있다”로 역전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한 재해석이 가능하다면 푸코와는 다른 전략을 세울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푸코는 이에 대해 대답할 수 없다. 애석하지만 그는 이미 죽었다. 이러한 문제의식에 접근하기 위하여 우리는 들뢰즈를 만나야 한다. 마지막으로 푸코의 전략을 단면을 드러내는, 요즘 젊은이들이 좋아할 것만 같은, 푸코의 말을 사족으로 달아놓는다.
“우리의 인습이 완전히 자의적이라는 사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게임과 아이러니에 지친 우리는 일부러 몸을 더럽게 하고, 수염을 기르며, 머리를 길게 하며, 남자라면 여자처럼 보이게 하는 것(또는 그 반대)이 좋다. 우리는 우리를 조용히 혹사하는 체제를 웃음거리로 만들고, 실체를 폭로하며, 그것을 변화시켜, 완전히 뒤집어엎어 버려야 한다. 내가 저술 작업에서 할 일도 바로 그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