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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문기정 심리교육 디오라마 원문보기 글쓴이: 문기정
아이를 꾸짖기 전에
Hirai
1. Hirai의 꾸짖지 않는 육아법 (1)장난질을 지켜보자. 「하고자 하는 마음」 즉,「의욕」이란 어떠한 마음의 작용일까요. 가장 근저에 있는 마음의 작용은 호기심입니다. 흥미나 관심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지 않으면 아니 되는 존재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스스로 자극이나 정보를 얻고, 적당한 긴장이나 곤란을 얻으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린이에게 있어서 나타나는 호기심 하나는 「장난스러움」(탐색활동)이며, 또 하나는 지적인 측면의 활동에 이끌리는 것입니다. 장난스러움은 호기심의 시작 호기심은 생후 1년의 아기에게도 나타나기 때문에 인간의 내부에 갖춰진 힘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그게 확실히 나타나는 것은 아장아장 몸을 이동하기 시작할 때부터의 장난스러움입니다. 어린이에게 있어서는 자신의 주위에 있는 모든 사물이 진기한 것입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눈에 보이는 것들이어서 그 실체가 어떻게 되어 있는가를 조사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장난도 1개월 내지 2개월 계속하지만 그 물건의 정체를 알게되면 그만 두게 됩니다. 그것을 졸업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아기는 스스로 졸업을 하여 가기 때문에 졸업할 때까지 기다린다는 태도로 어린이를 기른다면 좋을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안돼!」라는 말로 꾸짖을 필요는 없는 것이죠. 만일 꾸짖는 일이 있게되면 점차 장난질은 하지 않고 어른스런 어린이가 되겠지만, 호기심을 짓밟아, 「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아이가 되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생각하여 장난질을 꾸짖지 않도록 하자고 제안하는 것입니다. 한술 더 떠서, 「하고자하는 마음」이 왕성한 어린이로 만들기 위하여 장난스러운 아이로 키우자고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첫째로 장난질은 연구심의 표현이기 때문에 결코 나쁜 일이 아니며, 어른을 곤란하게 하려는 의도도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로는 이러한 장난질도 1,2개월 지나면 졸업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장난질과 버릇과의 관계 이렇게 이야기하면, 한계를 가르치지 않아도 좋은가하고 묻는 어머니가 있습니다. 그에 대하여 어린이가 그 장난을 졸업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좋다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이 답에 납득하지 못하는 어머니가 있습니다. 많은 어머니들은 버릇들이기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좋은 일인가 나쁜 일인가를 확실히 가르치지 않아도 좋은가고 질문하는 어머니도 있습니다. 그에 대하여 장난질은 나쁜 일이 아니며 어린이는 결코 나쁜 일을 하지 않는 존재라고 하는 사고 방식(성선설)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린이의 장난질은 가끔 부모를 곤란하게 하거나 물건에 손해를 입히는 결과를 초래하는 수가 있습니다. 이때에는 피해를 입어 곤란하다는 것을 어린이에게 가르칠 필요가 있습니다. 아이의 옆에 가서 「엄마는 말이야, 이것을 고치려면 큰일이야.」하고 조용히 호소합니다. 즉 어른에게 있어서는 곤란하다는 것을 가르쳐주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그 이후에는 똑같은 장난은 전혀 하지 않게 됩니다. 그것은 엄마를 곤란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 기반에는 어른과 아이 사이에 오랜 동안 정서적인 연결이 깊어져 있어야 합니다. Hirai는 어린이를 전혀 나무라지 않았습니다. 나무라지 않는 버릇을 제안한지 근 40년이 되었습니다. 부모의 「감성」으로 하고자 하는 마음을 기른다. 어린이의 장난을 유심히 살펴보면 거기에는 창조성의 싹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부모는 감동하는 것입니다. 그것에 감동하는 것은 감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부모가 성가신 일은 하지 않도록, 그때그때 버릇을 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엄마 아빠가 있다면 그들은 어린이의 창조성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린이의 정서 발달 상 중요한 것은 엄마 아빠의 감성의 좋고 나쁨의 정도입니다. 감성이 좋은 엄마 아빠는 어린이가 하고 있는 일, 특히 장난질에 감동하면서부터 장난질을 충분히 인정해 줄 수 있게 됩니다. 그리하여 장난질을 인정받은 아이는 창조성이 풍부한 어린이로 자라게 됩니다. 즉 개성을 발휘할 수 있게 됩니다. 자발적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어린이로 만들자면 하고자 하는 마음 즉 의욕은 어린이의 자발성의 발달이 원조되는 것에 의하여 가능하게 됩니다. 자발성이란 유아의 경우에는 스스로 놀이를 고안하여(자기 사고), 어떻게 놀이를 하면 재미있을까 스스로 결정하고(자기 결정),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놀이를 전개하여 가는(자기실현)능력입니다. 그러한 능력을 가진 어린이는 무엇을 하여도 좋다고 하는 자유가 주어지면, 3세 이상이 되면 생생한 활동을 전개해 나가게 됩니다. 자신 혼자서 또는 친구들을 끌어들여서 놀이를 계속해 나갑니다. 그리하여 얼이 빠지거나 우물쭈물하지 않고, 또 언제나 교사에게 「이것을 해도 좋아요?」하고 승낙을 구하는 일이 없게 됩니다. 어린이의 자발성을 중시하는 유치원을 선택하려면, 어린이가 스스로 고안한 놀이(자유놀이)를 중요시하고 있는 유치원을 찾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유치원에서는 어린이가 하고자 하는 마음에 힘을 더 해주게 됩니다. 자유와 방임의 다름 어린이가 하고자 하는 마음은 자발성의 발달과 함께 성장되어 갑니다. 자발성의 발달에 있어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어린이에게 자유를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유에 대하여 바르게 이해하고 있는 분이 적은 것이 일반적인 현상입니다. 그것은 어린이에게 자유를 주는 것과 어린이를 방임하는 것을 혼동하고 있는 사람이 많은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어린이에게 자유를 주는 것은 절대로 필요한 것이지만 어린이를 방임하는 것은 절대로 해서는 아니 됩니다. 그것은 자유를 주는 것에 의하여 어린이의 자발성이 발달해 가겠지만, 어린이를 방임하면 방종아가 만들어져 버릴 무서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유를 주는 것과 방임하는 것은 대립 개념, 즉 반대가 되는 셈입니다. 그러면, 이 두 가지의 다름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어린이를 방임하는 것은 어린이에 대하여 제멋대로 하게 하는 양육태도로서 부모는 아기에 대하여 교육의 책임을 방기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아이에게는 책임감이 형성되지 않습니다. 자기 본위의 행동이 많게 되고 맙니다. 그에 대하여 어린이에게 자유를 주자고 하는 것은 어린이가 하고 있는 것을 유심히 살피면서 말참견도 하지 않고 손도 빌려주지 않는 양육태도입니다. 어린이가 하고 있는 일을 보고 있으면 그게 느리거나 틀리게 일을 하고 있거나 하여 모든 행동이 미숙하기 때문에 결국 부모로서는 말참견을 하거나 손을 써주고 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부모가 적지 않습니다. 흔히 거드는 것이 친절한 것으로 생각하는 부모가 많은데 그게 과보호적 양육입니다. 특히 조부모들의 어린이 양육은 이 과보호가 특징인 경우가 많고 그 때문에 자발성이 위축됩니다. 부모로부터 「그럼 가만 놓아두는 것이 좋겠군요?」라고 하는 물음이 대단히 많습니다. 다시 되풀이해서 말하거니와 놓아두라는 것은 방임이니까 그래서는 아니 됩니다. 뜻대로 하게 한다는 것은 책임을 짊어진다는 것입니다. 어린이는 꾸물거리면서도 무엇인가 스스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패를 경험하면서 그것을 극복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험에 의하여 어린이의 자발성은 발달하는 것이며 책임능력도 발달해 나가는 것입니다. 무언의 행함을 권함 무언의 행함을 실현한다는 것은, 모든 일에 대하여 참견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재미있는 이야기는 충분히 해도 좋고 어린이가 말하는 것을 잘 들어주는 것은 필요하지만, 명령적인 어조는 삼가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곧이곧대로 기대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아이에게 뜻대로 하게 해 보면 바로 스스로 공부하지 않아서 성적은 점점 나쁘게 되어 가는 상황이 일어납니다. 그에 대하여 부모는 참고 「무언의 행함」을 고수해 가면 조금씩 자발적으로 학습하게 될 것입니다. 즉, 자발성이 조금씩 발달해 가고 있는 상황을 찾아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자발성은 어떤 어린이에게도 생겨나도록 갖추어진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자발적인 어린이는 친구 만들기도 능숙 자발성이 발달하기 시작하면 스스로 친구를 집에 데려 오거나 친구 집에 놀러 가기도 하여 친구를 즐겁게 하게 됩니다. 생활하는 가운데 친구와 즐겁게 노는 것은 사회성의 발달에 있어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친구를 사귀지 못하는 것은 자발성의 발달이 늦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동시에 사회성의 지연을 수반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린이는 어린이다울 때 행복하다. 정말로 좋은 어린이란 어떤 어린이일까요. 장난을 한다든지, 농담을 즐긴다든지 부모나 교사에게 반항한다든지 친구들과 싸움을 한다든지 어린이답게 생생하게 생활하는 어린이입니다. 그러한 것은 연령이 증가하면 모습을 변해가지만 거짓 좋은 아이의 상에 얽매어 있는 부모를 노여워하게 하고 불안하게 할 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점에서 도량이 넓은 부모라면 어린이가 하고 있는 일을 보더라도 안온한 기분을 가지고 있지만, 버릇들이기 주의의 부모라면, 조급해져서 어린이를 나무라거나 때리는 일이 많습니다. 특히 빨리 버릇을 들이려고 서두르는 경우에는 꾸짖게 되어 어린이의 마음을 어둡게 하고 맙니다. (2)좋은 아이의 편견에서 벗어나자. 부모의 말을 듣지 않는 「좋은 아이」 Gesell의 발달에 관한 견해를 보면, 발달단계에 있어서는 주기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말을 듣지 않아서 곤란할 때가 있는가 하면, 그 후에는 비교적 말을 잘 듣는 시기가 있고, 다시 말을 듣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변함없이 부모의 말을 잘 듣는 아이는 무엇인가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어린이에게는 「의욕」 즉 「하고자 하는 기분」이 결핍되어 있는 것이 엿보입니다. 「하고자 하는 마음」이 결핍되어도 부모를 곤란하게 하는 일이 없어서 오히려 부모로서는 다루기 쉬운 아이이기 때문에 「좋은 아이」라고 생각하는 부모가 대단히 많습니다. 어른스럽고, 게다가 부모의 말을 잘 듣고 행위가 바르다고 하는 어린이는 틀림없이 자발성의 발달이 더딜 것입니다. 또 「의욕」이 결핍된 어린이가 많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의욕」이 있는 어린이, 「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 어린이는 장난스럽고, 반항적이며, 「농담, 익살」이 많으며, 친구들과 자주 「싸움」을 하기 때문에 다루기 힘든 일이 자주 발생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좋을까하고 번민하게 됩니다만, 부모를 혼란하게 하고 번민하게 하는 어린이가 진정 「좋은 아이」인 것입니다. 문제가 없는 아이야말로 문제 세 살이 되면 2세와는 현저히 변하여 꽤 침착해 보이며 부모가 다루기도 쉽습니다. 이것이 순한 상태이지만 다시 다루기 어려운 때가 있음을 예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연구자들 가운데는 뭔가 문제가 없는 똑바른 발달을 하는 어린이야말로 문제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어린이의 발달이 요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부모는 안 계시겠지요. 그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어린이에게 꾸짖고 소리치는 것에 변명을 늘어놓는 부모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어린이의 발달 모습에 대하여 충분히 연구해 두면 어린이를 꾸짖지 않게 됩니다. 그 점에서 엄마도 아빠도 어린이를 교육하는 입장에 있기 때문에 모두 발달에 대하여 공부해 두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쁜 아이」라고 하여 꾸짖고 소리침으로써 어린이의 마음에 상처를 남기거나 응어리를 만들기도 하여 어린이의 인격 형성이 비뚤어져 결국 문제아가 되는 예가 대단히 많습니다.
(3) 꾸짖지 않는 교육을 실천하자. 좋은 아이 나쁜 아이 Hirai는 45년에 걸쳐 어린이를 상대로 연구를 계속해 왔습니다. 그 결과 「하고자 하는 의욕」과 「사고력」을 길러주면 훌륭한 청년이 된다고 하는 결론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린이를 상대로 한다는 것은 어린이와 함께 놀거나 어린이와 함께 생활하는 것을 말합니다. 어린이와 함께 놀이와 생활을 하는 가운데 어린이들은 여러 가지 것을 가르쳐 줍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린이에 대한 연구로서 이것 이상 좋은 것은 없을 것 같습니다. 예로부터 이야기 해 온 「아이에게서 배운다.」라는 말을 실감하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부모 말에 잘 따르는 아이를 순진한 아이라고 말하고 있고 어머니, 아버지 되는 분들도 그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많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러한 어린이들 가운데는 자신의 마음에 대하여 거짓을 둘러쓰고 있는 경우가 대단히 많은 것입니다. 꾸지람을 많이 들은 아이들은 지나치게 거짓말을 하게 되어 사춘기가 되면 괴로운 문제들이 확실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본래의 자신과 거짓을 둘러 쓴 자신과의 갭을 느끼게 됨으로써 괴롭게 됩니다. 꾸짖지 않는 교육의 실천 아무래도 인생 초기에 「버릇주의」보모에게 보육되는 것은 「하고자 하는 의욕」을 기르는 데 방해가 됩니다. 그래서 hirai는 손자를 보육소에 넣는 것을 반대하였습니다. 낮 동안의 보육은 자기가 맡겠다고 말을 꺼내었습니다. 부인 역시 은사님의 가르침을 잘 받아서 「꾸짖지 않는 자녀 양육」을 실천해 왔기 때문에 좋은 보모(보육할머니)로서의 자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노후에는 두 사람만의 즐거운 일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손자를 맡아 기르게 되자 그러한 즐거움은 예치해 두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아이들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 즐거움을 보육하는 데서 맛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 결정이 있게 되자, 맨 처음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눈 것은 「장난질」을 중시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장난질」이란 아동심리학에서는 「탐색 욕구에 기초한 행동」이라고 정의되어 있으며, 탐색 욕구란 어른들의 말로 바꾸자면 연구심 내지 탐험심이기 때문에 연구심이 왕성한 성인이 되게 하려면 「장난스러움」을 충분히 인정해 주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 탐색 욕구는 태어날 때부터 타고난 것이기 때문에 「장난질」을 하기 전이라도 침상의 갓난아이가 손을 응시한다든지 눈이 시계추를 따라 간다든지 천정에 그려진 그림을 쳐다보는 일 등 혼자놀이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좋지 않으니 하지 말라고 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갓난아이가 귀여운 나머지 혼자놀이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멋대로 안아 주고 어우르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그들은 가능한 한 그러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간신히 몸을 이동할 수 있게 되면 어린애는 「장난질」이 시작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거실을 ‘보육실’이라고 이름 짓고 주요한 액자나 장식물을 정리한 다음 위험한 물건을 제거하여 충분히 「장난질」을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일을 하여도 절대로 꾸짖지 않기로 약속하였던 것입니다. 유모어의 재능은 일생의 보물 익살, 농담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Hirai자신도 익살을 부린다거나 농담을 즐기기 때문에 손자들과 놀 때에도 「익살, 농담」을 많이 하였습니다. 그것은 아이들도 그러한 것을 대단히 기뻐하기 때문입니다. 손주들은 물론 놀이도 좋아하지만 그것 이상으로 익살을 피운다거나 농담을 하면서 노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아무래도 그러한 일이 많아집니다. 그는 보육소 일을 해 오면서 4세 전후부터 갑자기 「익살, 농담」이 많아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특히 점심시간에 「방귀 뿡」, 「똥꼬, 자지」라고 말하며 즐겨 웃는 것입니다. 그는 어린이들이 즐거워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도 거기에 참가하게 됩니다. 아이들은 기뻐하고 그는 인기 있는 할아버지가 됩니다. 그런데 보육자가 와서는 「그런 말을 해도 좋을까요?」하고 비난 섞인 말을 하였습니다. 그는 마음속으로 ‘자기도 어렸을 때 해 본 주제에…’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지는 않았습니다. 그 손자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2개월 전 2월 무렵이었습니다. 그는 문득 농담이 그의 의식 속에 얼마나 남아 있는지를 확인해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큰 소리로 「대롱대롱 자지」라고 말해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할아버지는 쓸데없는 말을 하고 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전혀 개의치 않았습니다. 즉 완전히 「졸업」을 한 것입니다. 또 구미의 의식 있는 부모들은 알맞은 나이가 되면 어린이에 대하여 유머 센스가 있는 상대를 고르라고 코멘트 해 준다고 합니다. 성실성을 우리나라에서는 높이 평가합니다. 그러나 구미에서는 쓸모없는 인격의 소유자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유머 센스가 부족하고 농담이 없기 때문입니다. 데갱 신부의 말을 바꾸어 말하자면 「애정」이 부족하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혹은 인간은 원래 즐겨 웃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거기에 가식을 붙임으로써, 높이 평가받고자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성실함이 있다는 것은 「거짓아이」일 수도 있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느긋한 어머니 또 익살, 농담이 많은 가정에서는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그런 사람이 있든지, 형이 있어서 어린애의 익살, 농담이 허용되는 분위기가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성실성 퇴치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여학생에 대한 강의에서 결혼 전에 데이트를 해 보아서 그가 성실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학력이 높고 대기업에 취업해 있더라도, 또한 핸섬한 남성일지라도 「싫습니다. 안녕‘이라고 말하는 편이 좋을 거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어머니와 명랑하게 저녁을 먹고 있을 때, 마침 아버지가 집에 돌아오면 조용해져버릴 가정이 될 가능성이 있으며 그러한 가정에서는 점차 어린이에게 문제가 발생하는 예를 보아왔기 때문입니다. 가정에 웃음이 피는 곳에는 어린이의 정서가 안정됩니다. 그리고 친자관계도 밀착됩니다. 그 예를 어린이의 작문에서 보여 드리겠습니다. <나의 엄마, 바보 엄마> <前文 생략> 5년생의 소녀가 등단하려는 순간 그 어린이 옆에 앉아 있던 어머니는 당황하여, 「안 돼, 안 돼, 부끄러워」하고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면서 의자에 웅크립니다. 그래도 초등학교 5년의 소녀는 사뿐히 몸을 일으켜 붉은 커튼 뒤에서 긴 머리를 날리면서 히죽히죽 웃음을 머금고 단상에 오르는 것이 아닙니까. 마이크 앞에서 작문을 양손으로 벌려 잡고 낭랑하고 탄탄한 목소리로 읽어가기 시작하였습니다. <나의 엄마, 바보 엄마> 초등학교 5학년 000 나의 엄마는 바보 엄마.(폭소) 나의 엄마는 바보입니다.(폭소) 채소를 삶으면서 세탁물을 말리려고 마당에 나가면 삶은 것이 끓어 넘칩니다. 아버지가, “어이 바보. 삶은 것이 넘치지 않아?” 하고 말하면, 당황하여 말리려던 세탁물을 내동댕이치고 부엌으로 뛰어듭니다. 세탁물은 흙투성이가 됩니다.(폭소) “바보같이” 하고 말하면, “여보, 미안. 다음에는 주의할께요.” 하고 사죄하는 어머니입니다. 그러나 엄마를 꾸짖는 아빠도 실은 바보 아빠입니다.(폭소) 어느 날 아침 당황하여 뛰어 나와서는, “아침밥은 필요 없어.” 하시고는 양복으로 갈아입으시고 가방을 끼고 현관으로 달려 나갔습니다. 그러자 어머니가, “가방은 왜요? 여보. 오늘은 일요일인데요. 아직 잠 정신이나요?” (폭소) 그러한 바보 엄마와 바보 아빠 사이에서 태어난 내가 영리할 까닭이 없죠.(대 폭소) 동생도 바보입니다.(웃음) 집안 모두가 바보예요.(폭소) 그러나---(장내가 조용해 짐) 나는 크면, 나의 바보 어머니 같은 여성이 되어 나의 바보 아버지 같은 사람과 결혼하여 나와 동생과 같은 바보 자매를 낳아서 집안 모두가 아하하하하고 명랑하게 웃으며 살려고 합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바보 어머니! (일동 눈물) <이하 약> 이 작문을 읽으면 눈물이 납니다. 그리고 여태까지는 현모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해 왔지만, 어리석은 어머니의 좋은 점을 중시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자신의 실패를 웃어넘길 줄 아는 어머니이기 때문이며, 그것은 유머 센스와 관계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어머니 아버지가 많아진다면 어린이의 정서는 점점 안정되어 갈 것입니다. (4) 반항을 의욕의 신호로 보자. 반항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아이들이 2세에서 3세에 걸쳐 반항 현상을 나타낸 때에도 이것이 좋은 징조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어린이들의 반항이 꽤 강하게 되었던 것은 명령조로 말하는 것이 적어졌을 때와 꾸짖지 않는 교육을 시작한 때부터였습니다. 제 1반항기의 특징은 조금이라도 명령조로 말하면 「싫어」라고 말한다든가 반대한다든가 자기가 하려는 일에 손을 거들어 주려고 하면 그 손을 뿌리치든가 도망하든지 하게 됩니다. 때문에 성급한 어머니는 노하게 되고 맙니다. 그리고 자신이 어렸을 때 부모로부터 들었던 것처럼 「엄마 말을 들어요」라는 말이 튀어나오고 맙니다. 아무래도 반항기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은 부모들이라면 「무슨 말을 하고 있어!」하고 꽥 소리를 치고 말겠지요. 그에 따라 반항할 수 없는 상태에 몰아붙혀진 어린이는 점점 어른스러워져서 순하게 되지만 「하고자 하는 의욕」은 잃어버립니다. 그는 많은 부모나 어른들이 바라는 순한 아이는 「의욕」이라는 측면에서는 위험한 아이라고 경고를 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구미의 부모들은 자신의 기분과 생각을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어린이를 기대한다는 점에서 대조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기의 기분이나 생각을 확실히 말하는 가운데 「싫어」라는 것도 포함됩니다. 자신이 한다고 말하면 절대적으로 존중한다. 또 어린이가 「자신이 한다」고 힘주어 말할 때에는 당연히 「하고자 하는 의욕」의 표현이기 때문에 그것이 그 나이의 어린이에게는 무리라는 생각이 들더라도 「도전감」을 중시하여 잠시 어떻게 하는지 지켜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도전은 하고자하는 의욕을 위하여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잠시 도전해 보고 아무래도 불가능하면 해달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 때에는 해 주는 것이 어린이의 기분을 받아들이는 것이 됩니다. 옛날부터 할머니 손에 자란 아이는 쓸모가 없다는 말이 있어 왔었습니다만 「자발성」의 발달에 기초한 「하고자하는 의욕」이 길러지지 않는 경우에는 돈으로 바꿀 수 없을 정도로 일생에의 손실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이러한 경우는 어린이를 많이 거들어주는(과보호) 어머니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습니다. 참을성 있게 지켜본다. 「무언의 행함」을 시작해 보면 공부도 하지 않고 숙제도 하지 않는 날이 계속될 것입니다. 당연히 학업 성적도 떨어질 것입니다. 그렇지만 「자발성」의 발달을 위하여 무언의 행함을 계속하여야 합니다. 하고자 하는 마음이 발달되기까지는 시간이 꽤 필요합니다. 초등학교 저학년의 경우에는 반년 이상, 고학년은 1년 이상 걸리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것은 인격의 발달은 한 발짝씩 진행되는 것으로서 한걸음에 튀어 오르도록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 기간 엄마 아빠가 강한 인내를 가지고 수행하는지의 여부가 그 후의 하고자 하는 마음의 발달에 관계되는 것입니다. 수많은 부모들은 인내를 가지고 계속하지 못하고 말참견을 하거나 간섭을 하고 마는 작심삼일이 되는 예가 적지 않을 것입니다. 반항기 없이 어른이 된 부모의 문제 많은 부모들은 사춘기의 제2반항기가 없지나 않았나 하고 생각하실 것입니다만 어째서 그럴까요. 그 첫째 원인은 부모에게 반항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시험제도 때문에 반항해 볼 기회를 갖지 못해서 일 것으로 생각합니다. 때문에 자아의 발달, 특히 자발성의 발달은 더디어지게 됩니다. 그런 채로 사회생활이 시작되다 보면 상사의 명령에는 잘 따르게 될지는 모르지만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상사에게 전달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것은 상사에게 문제가 있을 때 자기 의견을 확실하게 말하는 젊은 사람이 있다면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HIrai가 서독에 유학하여 얻게 된 최대의 수확은 독일의 교수가 자기에게 덤벼드는 제자를 대단히 귀여워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교수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있는 제자에게서는 학문의 진보를 기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은사를 뛰어넘을 수 있는 점에 의의를 두고 있음을 알았던 것입니다. 어린이의 반항은 그런 의미에서 중요하며 반항하는 어린이를 좋은 어린이로 표창하고자 하는 것이 그의 솔직한 마음입니다. 어떠한 행위에도 적극적인 의미를 붙이자 부모에게도 보육자나 교사에게도 어린이에 대하여 느긋한 마음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느긋한 사람이란 어린이가 하는 일이 자기가 소망하는 행동을 하지 않더라도 그 의미를 적극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분입니다. 즉 어린이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어린이의 기분을 짐작할 것입니다. 즉 감정이입적으로 어린이에게 접근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어린이가 하고 있는 것의 뒤에 놓인 마음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부모가 나쁘게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반대의 선의에 가득한 동심을 맛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감성」의 좋은 점입니다. 동심이란 순진한 마음이기 때문에 순진한 마음에 접하여 자신이 어린이를 악의를 가지고 본 것에 대하여 번쩍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 깨달음이 횟수를 거듭함에 따라 부모는 헤아리는 마음이 커갑니다. 따라서 어린이는 더욱 순진한 마음의 소유자가 됩니다. 대다수의 어른이 더러운 마음의 주인공이라는 것은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봄으로써 곧 알아차리게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어린이에게는 말할 수 차 없는 부끄러운 마음이 꿈틀거리고 있지나 않으신지요. 자신은 어린이에게 명령에 따르라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는 아니신지요. 권력적인 분은 자신이야말로 훌륭하다고 과시하지만 진정 권위 있는 사람은 스스로 과시하지 않아도 주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게 됩니다. 진정 권위가 있는 분은 결코 위엄을 나타내지 않을 것입니다. 부모는 훌륭하다는 생각을 버리자 「부모의 말씀은 무엇이라도 따른다.」라고 자녀에게 가르쳤던 것은 그 시대가 봉건사회였기 때문입니다. 상하관계가 확실해 있어서 윗분이 아랫사람을 지배하였습니다. 현재도 집단 활동 등에서 「선배, 선배」하고 후배가 말하는 것은 다분히 위계사회의 의식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구미에서는 집단 활동 중 상호 호칭은 퍼스트 네임입니다. 그것은 친밀한 인간관계를 중시하기 때문입니다. 가정 내에서도 남편은 아내를 부를 때 「오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은 다분히 봉건시대의 냄새가 납니다. 이런 상황은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는데 그것은 봉건 시대의 의식이 진하게 남아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 의식이 어린이에게 -부모의 말씀에 따르자- 라고 말하는 오만이 곁들여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린애에 대하여 권력적입니다. 그것이 부모의 어린이에 대한 동정심의 발달을 저해합니다. 자녀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잘못이 있으면 「미안」이라고 사과하여 보세요. 사과한다는 것은 겸허함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되면 자녀는 부모를 사모하게 됩니다. 그리고 점점 존경하게 됩니다. 그런 가운데 부모는 훌륭하다는 마음을 부정하게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을 길러 준 부모를 비판할 수 있어야 합니다. 확실하게 비판할 수 있도록 하는 어머니는 다시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으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5)버릇들이기를 그만 두자 동심으로 어린이를 감싸주자 「버릇들이기 무용」의 이유는 버릇의 내용들이 봉건주의 시대의 유물이기 때문입니다. 종전 후 군국주의는 일소되었고 민주적 사회를 목표로 사회와 교육이 변화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2차 대전 종전까지의 교육을 받은 사람들 가운데에는 종적 사회의 의식이 강하게 남아 있어 민주주의에 반하는 발언을 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중학생의 비행이 많게 되면 유아기에 버릇을 엄히 해야 한다는 둥 말하는 사람이 많으며 부모들 중에도 학교의 교사에 대하여 야단을 쳐도 좋으니까 버릇을 들여 주었으면 좋겠다는 주문을 하는 사람이 있는 것은, 아마도 종전의 버릇들이기 의식이 고스란히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야단을 맞는 등의 체벌을 받은 어린이가 사춘기 이후가 되어서 체력이 튼튼해지면 폭력을 휘두르게 된다는 것이 여러 연구에서 밝혀지고 있습니다. 야단을 치는 부모의 행동이 어린이에게 모델이 되는 것이며 체벌을 받은 어린이의 마음에는 냉혹함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Hirai는 체벌은 힘이 강한 자가 약한 자에 대한 폭력이라고 정의하고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있습니다. 군국주의 시대에 상관이 병사들에 대하여 함부로 폭력을 휘둘렀던 것을 생각해 보면 군대 경험이 있는 사람에게는 소름이 끼칠 것입니다. 현재, 학교의 교사 중 체벌을 가하는 분이 있습니다만, 그럼에도 「교육열이 강한 교사」라고 변호하고 있습니다. 그 열심은 자기 본위의 해석이지 어린이의 마음을 헤아린 것은 결코 아닙니다. 즉 헤아림 없는 마음의 표현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의 매」라는 말이 있습니다만, 사랑이란 관용하는 마음인 것이며 매를 사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의 매란 체벌을 가한 어른의 자기변호랄 수밖에 없습니다. 부모 자신이 꾸중 들었던 체험을 되새기며 꾸지람을 많이 듣고 체벌을 받으며 자란 사람이 부모가 되면 자기 자식을 많이 나무라고 체벌을 적지 않게 한다고 하는 사실이 연구 결과 밝혀졌습니다. 어느 사이엔가 부모의 영향이 자녀의 마음에 각인되어 있어 그것이 부모가 된 때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Hirai의 외조부님도 전혀 꾸짖지 않으신 분이셨습니다. 그는 장난꾸러기였기 때문에 외조부님을 놀리거나 장난질을 했습니다만, 한 번도 화를 내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손자를 돌보게 되었을 때, 외조부님의 이미지가 마음속에 떠올라 자녀를 꾸짖지 않는 태도가 확립되었고 꾸짖지 않는 교육을 하자고 하는 슬로건을 내세운 것입니다. 부모나 교사를 부정하는 때는 사춘기입니다. 사춘기가 되면 부모나 교사로부터 이야기 들었던 것, 특히 도덕적인 것이 진실일까 하고 검토하기 시작합니다. 때문에 부모의 말을 듣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제 2반항기」라고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아에 눈을 떠 진정한 자신을 확립하는 것입니다. 또 자기 나름의 인생행로를 걷기 시작합니다. 부모의 인격을 뛰어 넘어 더 좋은 인격의 소유자가 되는 데는 일단 부모를 부정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6) 도전하는 태도를 격려하자. 하고자 하는 마음의 구조 하고자 하는 마음이란 의욕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마음의 움직임입니다. 이 마음의 움직임은 어린이에게도 잠재되어 있는 것입니다. 어떤 어린이에게도 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발성의 발달과 관계가 있습니다. 자발성이 순조롭게 발달한 어린이는 반드시 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래서 탐구심이 왕성한 청년을 육성하려면 장난질을 충분히 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마련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장난질을 하지 말라고 하여도 부모의 바람대로 장난질을 하지 않게 되지는 않습니다. 스스로 호기심을 갖는 대상에 도전하여 그것을 요조조리 살피고 깨뜨리고 부수고 함으로써 그 물건의 구조나 본질을 알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로서는 어린이가 스스로 생각하여 발견한 장난질을 되도록 말리지 않도록 노력하여야 하며 물론 꾸짖어서는 안 됩니다. 꾸중은 어린이가 나쁜 일을 했을 때이므로 장난질이 나쁜 일이 아닌 이상 절대로 꾸짖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자발성이 순조롭게 발달하고 있는 어린이는 놀이의 천재입니다. 여러 가지 새로운 놀이를 만들어 냅니다. 초등학생 대상의 여름 합숙소의 목욕탕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몸을 씻을 때 걸터앉는, 합성수지로 된 앉을 개를 손을 쓰지 않고 욕조 밑으로 밀어 넣는 놀이를 창조한 어린이가 있었습니다. 교사도 해 보았는데 몇 번씩이나 실패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성공적으로 해낸 어린이가 있었습니다. 어린이들은 대단하다며 마음속으로 박수를 보냈습니다. 교사들도 그들이 할 수 없는 일을 그 아이가 해냈기 때문에 큰 박수를 보냈습니다. 그 때 그의 부모가 그 장면을 보았다면 어떻게 했을까요. 「그런 쓸데없는 일을 하려면 공부나 해라」 하고 말하지나 않았을까요. 즉 부모에게 있어서는 공부야말로 가치가 있으며, 이러한 놀이는 무가치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성인과 어린이의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이지만, 우리들 어른은 어린이들의 가치관을 중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지 못하면 아이들과 함께 즐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린이와 함께 즐겁게 놀기 위해서는 어린이가 즐기는 것에 대하여 공감하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공감이란 헤아림입니다. 이 헤아리는 마음을 방해하는 것은 버릇들이기 생각입니다. 버릇들이기에는 틀이 있기 때문에 틀을 벗어난 어린이의 행동에 대하여 압력을 가하게 됩니다. 그리고 말참견이 많은 부모가 되어 간섭이나 명령을 많이 하기 때문에 어린이의 자발성 발달에 압력을 가하는 결과를 낳고 맙니다. 도전하는 자세 도전하는 자세를 기르기 위해서는 어린이에게 체험의 기회를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린이의 마음속에는 이미 자발성이 내재되어 있어서 호기심이 강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체험을 하고자 합니다. 그러한 하고자 하는 마음으로부터 울어 나오는 행동에 자유를 부여하는 것, 즉 간섭하지 않고 가급적 과보호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양육 방식입니다. 물론 어린이의 체험에는 실패가 따릅니다. 실패를 하는 것은 다음 번에는 실패하지 않도록 행동하려는 도전에의 의욕이 이어져 가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초등학교 2,3학년이 되면 자발성이 순조롭게 발달된 어린이의 경우 모험에 도전하려고 합니다. 테이블 위에 놓인 식기를 부엌으로 옮겨달라고 엄마가 주문을 해 봅니다. 「좋아요 」하고 말하며 주문을 수행하려는 아이가 쟁반 위에 식기를 올려놓고 마치 가락국숫집 종업원이 하는 것처럼 그 쟁반을 어깨에 올려 운반한다면 부모님들은 무어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틀림없이 「꽉 잡아요」라든가 「그렇게 들지 말아요」하고 참견하시지나 않을까요. 그것은 「떨어지면 큰일이다.」 라는 말로서 어린이의 실패를 겁내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경제적인 손실과도 관계됩니다. 또 말없이 있다가는 버릇이 잘못 들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한 마음도 있겠지요. 어떻든 참견하고야마는 분이 많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행동을 하는 아이를 볼 때에는 절대로 참견 같은 일은 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것은 어린이의 기분을 알기 때문입니다. 어린이는 진작부터 가락국숫집 종업원이 하는 일에 호기심을 가지고 자기도 해보고 싶다는 욕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린이 자신이 자신의 운동 신경이 그것을 실행할 정도까지 발달하지 않았다는 것을 자각하게 될 때까지는 그만두려고 하지 않습니다. 해보고자 하는 생각을 갖는 것은 모험에 도전하는 일입니다. 한편 생각해보면 어린이의 운동 신경이 발달하여 가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는 기쁜 것입니다. 그리고 무사히 운반해 주기를 기원합니다. 무사히 운반하였을 때 우리는 기쁨을 표현합니다. 「대단하구나.」라는 말이 튀어나옵니다. 그러면 어린이는 「뭐 별로요」 등의 답을 할 것입니다. 성공감에 만족하고 있다는 표현이지요. 이것이야말로 내맡기는 일을 한 것입니다. 어린이는 두 세 번 똑같은 모험에 도전해 보고 자신이 붙으면 종업원과 같은 번거로운 일은 하지 않게 됩니다. 이른바 졸업을 하는 것입니다. 겸허한 부모는 자신에게도 여러 가지 실패가 있다는 것을 생각할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 엄마도 실패한 적이 있어」하고 자녀의 지적을 솔직하게 인정할 것입니다. 부모라 하여도 여러 가지 미숙한 점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있는 그대로 인정함으로써 진정한 의미에서 어린이의 순진한 마음을 키울 수 있으며 어린이에게도 스스로 반성하는 태도를 가르칠 수 있게 됩니다. 자기반성의 능력을 기르는 것은 인간의 살아가는 방법으로서 대단히 중요합니다. 어린이는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실패로 인하여 타인을 미혹에 빠지게 하였을 때, 스스로 「미안합니다.」하고 말할 수 있게 됩니다. 꾸중을 받으며 「미안합니다.」하고 말하는 것과는 전혀 의미가 다른 것입니다. 그 말이 자발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린이가 식기를 떨어뜨려 깨뜨렸을 때 나는 어떠한 말을 거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다음에는 조심해요」입니다. 절대로 실패를 책망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종업원이 하는 것처럼 능숙한 운반 경험을 하여 운동 신경이 발달되기를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린이와 함께 깨진 식기를 주워 모으면서 그 방법을 가르칩니다. 유리 같은 것은 물기 있는 신문지를 사용하든가 접착 태프로 작은 파편까지도 없애는 것을 아이와 함께 합니다. 그런 다음 아이가 식기를 운반할 수 있는 기회를 줍니다. 자기 자신이 과거에 실패한 것을 토대로 성공의 체험을 함으로 인하여 어린이에게 자신감이 붙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자신감은 인생을 살아가는 데 귀중한 힘인 것입니다. 자녀에게 「미안해」하고 말할 수 있는 어머니 부모는 권위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때문에 자녀에게 사과할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권위의 내용을 확실히 해두지 않고 말하는 사람이 많은 것으로 생각됩니다. 나는 권위와 권력을 구분하여 생각하고자 합니다. 권력이란 여러 가지 면에서 힘 있는 사람이 힘 약한 사람에게 명령하거나 거만하게 구는 것으로서 부모가 자녀에 대하여 「부모에게 감히 뭐야」라고 말하는 것은, 부모는 훌륭하다는 것을 자녀에게 과시하고 있는(거만을 떠는)것일 뿐입니다. 자녀는 양육되고 있다는 열등감 때문에 부모의 말이 불합리하더라도 그에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사실 양육되고 있다는 열등감을 느낄 필요는 없는 것이지만 부모가 양육하고 있다는 것을 기회 있을 때마다 말하기 때문에 어느 사이엔가 그러한 기분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자녀를 그런 기분이 들게 만들어 버린 부모는 권력적이라고 말해도 좋습니다. 진정한 권위란 본인은 느끼지 않는데도 그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경애함으로써 빛이 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겸허합니다. 거만스러운 행동은 절대로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말을 경청하고 상대를 존중합니다. 엄마도 아빠도 자녀에 대하여 겸허한 것이 좋겠다는 게 나의 희망입니다. 결코 거만스럽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권위가 있는 부모는 자녀에게 사과하는 일이 많은 것입니다. 「미안 해」라는 말이 서슴없이 나옵니다. 그것은 부모의 인격도 미숙한 것이며 어느 사이 더러운 마음을 갖게 된다는 것에 유념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부모가 자신의 인격에 대하여 생각해 보거나 마음 속 깊은 곳에 숨겨진 욕망을 느끼는 것에 의하여 알게 됩니다. 그런 더러움이 많은 부모가 자녀 교육을 담당하기 때문에 당연히 「미안 해」라는 말이 많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씀씀이가 누적되어 권위가 형성됩니다. 그러므로 권위 있는 인격의 소유자가 되기 위해서는 권력적인 면을 줄여 가는 노력이 필요하게 됩니다. 열린 합숙소의 어린이들 내가 합숙을 시행하려고 한 것은 여러 문제를 가진 어린이의 치료 교육을 실시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었습니다. 나는 청년기에 서독 소아과 치료교육 병동에서 치료 교육을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귀국 후 소아과의 교수에게 그 이야기를 하여 치료 교육 병동을 짓는 것이 좋겠다고 설득을 하여 보았으나 전혀 관심을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그곳에서 단기간이라도 좋으니까 내 나름대로 실시해보고 싶어서 시작한 것이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여름 합숙이었습니다. 제1회는 오줌싸개 어린이만 합숙을 하여 대단히 재미있는 경험을 하였습니다. 그 반수는 합숙 중에 한번도 야뇨를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반수는 좔좔 하였던 것입니다. 그 당시는 세탁기가 보급되지 않아서 뒤처리 세탁이 큰일이었기 때문에 계속하는 것을 단념하지 않으면 안될 처지가 되었었는데 야뇨와 정신적인 문제를 생각하는 좋은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두 번째는 식사에 문제가 있는 어린이를 데리고 합숙을 하였습니다. 소식이나 편식이 중심이 되었습니다. 거기에서도 재미있는 체험을 하였습니다. 이 2회의 합숙 경험을 통하여 문제의 어린이에 대한 합숙의 효과를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문제가 있는 어린이를 우선적으로 데리고 왔는데 그 중에는 세 가지 유형이 밝혀졌습니다. 첫째, 과보호를 받아서 집단에 적응이 안 된 아이들로서 우리들 어른에게 의존하는 마음이 강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또 하나는 부모로부터 간섭을 지나치게 받아 그릇된 「좋은 아이」형으로서 압력을 받고 자유롭게 행동하지 못한 어린이들이었습니다. 합숙에 참가하여 특별한 문제는 없었습니다만 생생하게 장난을 한다든지 싸움을 하는 친구들에 끼지 않고 방관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장난이나 싸움을 하게 되면 나쁜 아이라는 평가를 받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집단생활에 대한 경험이 적고 집단 속에서 어떤 행동을 하면 좋은지 몰라 당황하든가 혼자놀이에 익숙해져서 친구들과 함께 놀지 못하는 어린이도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러한 연구는 그 뒤 등교 거부아 연구를 하는 데 대단한 참고가 되었습니다. 등교 거부아에 만성형과 급성형이 있다는 것에 대하여 설명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합숙 중의 계획은 이제까지의 많은 합숙과 같이 우리들 어른이 결정하였습니다. 일과에 대해서도 6시 반 기상, 세면, 이 닦기, 그리고 체조 식으로 우리들이 어린이에게 지시하였습니다. 그러나 합숙의 횟수를 거듭함에 따라 이러한 지시가 어른의 관리를 우선한 것이라는 데 인식을 같이 하였습니다. 그래서 최후의 10년간은 가능한 한 어른이 관리하지 않는 상황을 만들도록 노력하였습니다. 즉, 어린이에게 자유를 주는 방향에서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①어린이들에게 일과를 제시하지 않고 몇 시에 일어나도 좋고 몇 시에 자도 좋도록 생활 일정의 모든 것을 어린이들에게 내맡겨버렸습니다. ②일체의 금지 사항을 없애버렸습니다. ③어떠한 일을 하더라도 어린이를 나무라지 않도록 동지들과 합의하였습니다. ④어린이가 응석을 부릴 때에는 언제나 그것을 받아 주도록 하였습니다. 이러한 합숙을 하는 가운데 어린이는 본연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즉, 「어린이에게 배운다.」는 것이 가능하였습니다. 그 결과 유아기에 자립한 것처럼 보이는 생활 습관은 가식적이어서 자립하지 못한 것을 알았습니다. 진정 자립했다면 누가 무어라 하여도 자기 의지대로 하여야 합니다. 이런 저런 지시를 하는 사람이 없는 상황에서 생활 습관을 버리는 것은 자립하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규칙적으로 얼굴을 씻고 이를 닦는 어린이도 있었으나 그러한 어린이는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였습니다. 그것은 버릇들이기에 따른 것이지만 자립한 것처럼 보이는 생활 습관은 강박관념에 의하여 실현하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정돈하기에 이르기까지는 요원합니다. 각자의 방은 극히 난잡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정리하기를 명령하는 어른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린이들은 흩어진 것에는 전혀 무감각합니다. 그것은 정돈 등으로써 보기 좋음을 바라지 않으며 정리하는 것으로는 창조적인 면이 거의 없기 때문에 창조적인 어린이일수록 정리정돈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창조성 측면에서 보면 정리정돈을 하지 않는 어린이가 「좋은 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집단을 만들어서 정리정돈연구를 시작한 지 5년째가 되었습니다만, 정리정돈의 버릇은 꿈속에서라도 필요 없다는 것이 확실해졌습니다. 그리고 부모가 주도가 되어서 어린이에게도 참가의 기회를 주어 정리정돈 후의 기분을 맛보는 것만을 목표로 하고, 사춘기가 되어서 아름다움을 스스로 추구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좋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오히려 정리정돈에 길들여진 어린이는 신경증적인 행동을 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열린 합숙에서 가장 생기 있게 노는 어린이가, 초등학교 교사에게는 나쁜 아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 많다는 것이 확실해졌습니다. 이 군은 5년 간 합숙에 참가하고 있는데 그것은 이 군의 형이 합숙에 참가하여 「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으며, 더욱 학교에서는 문제아라고 일컬어져 항상 엄마가 선생님에게 불려가 주의를 받았는데도, 우리 합숙소에서는 가장 어린이다운 어린이로서 높은 평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어머니의 말을 빌리자면 365일 중에서 칭찬을 받는 것은 이 합숙소뿐이라고 합니다. 어머니도 학교의 선생님의 평가에 마음 쓰지 않고 이 군의 어린이다운 「장점」을 인정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학교의 교사는 소 신사․ 소 숙녀를 요구하며 어린이에 대하여 그릇된 평가를 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모들도 그에 동조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다시 한 번 어린이다운 어린이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에 대하여 토론하여 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린이의 창조성에 기초한 도전을 경험하게 되면 어린이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존재라는 감격을 맛볼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어린이의 창조성은 어린이를 버릇들이기의 틀 속에 집어넣고 관리적인 교육을 행하고 있는 한, 경험할 수 없는 일이라 할 것입니다. 어린이에게 자유를 줌으로써 찾아낼 수 있는 어린이의 능력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7)하고자 하는 마음을 키우는 가정을 가꾸자 자유야말로 어린이의 활력원 「하고자 하는 마음」은 어린이에게도 갖춰진 인격상의 힘입니다. 그러므로 「하고자 하는 마음」이 충분히 나타나도록 어린이를 양육하면 반드시 발현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린이에게 자유를 주는 것입니다. 어린이가 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어물어물하고 있거나 꾸물거립니다. 또 많은 실패를 거듭합니다. 어린이는 여러 번 실패를 거듭하면서 이 다음에는 실패하지 않으려고 결심하며, 그래서 실패한 사태에 도전을 할 것입니다. 이러한 도전이야말로 「하고자 하는 마음」과 쉽게 결부되어 갈 것입니다. 어린이가 실패한 때야말로, 말참견이나 손 안 써주기가 「하고자 하는 마음」을 강하게 하는 중요한 양육태도인 것입니다. 실패에 대하여 어린이를 책망하지 않아야 합니다. 과거에 실패한 것을 스스로의 힘으로 극복할 때, 자신감이 커가게 되지만 실패에 책망을 들으면 열등감이 강하게 되어서 도전적인 의욕도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반복해서 말씀 드리지만, 「하고자 하는 마음」을 왕성하게 하는 양육 방식은, 어린이를 지켜보면서 말참견 말기, 손 안 써주기라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어머니의 일은 인내와 애정 어린 응시 「무언의 행함」을 시작해 보면 어린이의 생활 태도는 일시 흐트러질 것입니다. 생활 습관도 문란해질 것이며 공부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상태가 심하면 심할수록 이제까지의 양육 방식에 문제가 있었음을 의미합니다.(말참견, 손 발려주기) 즉, 부모가 명령적 압력에 의하여 생활 습관을 지키게 하고 공부하도록 강요함으로써 자발성이 구축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든 어린이에게는 인격에 우러나올 수 있는 「하고자 하는 마음」이 갖춰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언의 행함」을 통하여 자녀에게 모든 것을 「내맡겨」가면 초등학교 저학년은 6개월 정도, 고학년인 경우에는 1년 정도 지나면 조금씩 조금씩 「하고자 하는 마음」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사이 부모가 「무언의 행함」을 지킬 수 있을지 없을지가 승부가 될 것입니다. 「하고자 하는 마음」은 일생을 통하여 인격의 지주가 되기 때문에 부모님들은 인내력이 필요합니다. 부모의 인내력이 시험되고 있다고 하여도 좋을 것입니다. 「무언의 행함」이 철저히 이루어지면 「하고자 하는 마음」의 발현이 빨라진다는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유머는 사랑에 이어진다. 마지막으로 어린이에게 잘잘못의 구분을 어떻게 가르치면 좋을지 지적해 두고자 합니다. 그것은 「어린이는 부모의 뒷모습을 보며 자란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책을 읽는다든지 그림을 그린다든지 시를 읽는다든지 하는 문화적인 모습을 어린이는 보면서 자신도 책을 읽으려 하고 그림을 그려보고자 생각합니다. 또 부모가 힘을 합쳐 가사를 돌보고 있으면 점점 집안일을 거들게 되는 것입니다. 또 「안녕」 「잘 자요」 하는 인사를 부모 상호간 하는지 안 하는지, 엄마가 무언가 해 드릴 때마다 아빠가 항시 「고마워요.」하고 말하는지 안 하는지, 그 외에도 부모의 일거수일투족을 보면서 그대로 흉내를 내는 것입니다. 엄마도 아빠도 결코 훌륭한 인격의 소유자는 아니기 때문에 여러 가지 바보짓을 한다거나 실패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에는 「미안해요」하고 말하면 좋습니다. 어린이에 대하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점에서 겸허한 것이 참 좋습니다. 결코 자녀에 대하여 위엄을 부리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부모의 뒷모습이 자녀의 마음에 어느 사이엔가 잘잘못을 구별하는 법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분하는 것을 말로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말로 하는 설교는 간섭이며 「하고자 하는 마음」, 「자발성」의 발달에 압력을 가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설교를 하지 않도록 노력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더욱이 가정이 명랑하게 되도록, 웃음이 많은 생활, 즉 유머나 농담이 묻어나는 화제를 많이 활용하십시오. 여기에도 부모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웃으면 복이 온다」는 우리나라의 속담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유머는 사랑에 통하는 길인 것입니다. 2. Hirai 육아법에 대한 중요한 판단(문기정) 양육방식의 유형은 유아의 발달에 관한 견해가 각기 다른 데서 형성되었습니다. Hirai와 같은 성숙주의자들의 경우에는 유아중심의 양육패턴을 형성하였고, Skinner와 같은 행동주의자들의 경우에는 행동의 형성(shaping)을 인위적으로 가능케 하는, 이른 바 부모중심의 훈련식 양육방식을 형성하였습니다. 위와 같은 양대 지주는 지금도 상존하고 있습니다. 양자 공히 장단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숙주의자들은 지나치게 허용적인 태도를 취하거나 과보호적이어서 오히려 좋지 않은 인성을 형성시키기도 합니다. 그러나 애정이 흐르고 유아 존재를 인정하며 존중하는 풍토이므로 Hirai와 같은 육아 원칙을 고수한다면 바람직한 양육 패턴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행동주의자들은 가시적인 변화를 추구합니다. 외현적인 행동의 변화를 조작적으로 형성하고 유지시키기 때문에 얼핏 바람직한 양육 패턴으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그처럼 기계적인 양육이 이루어진 경우에는 형성된 바람직한 행동도 쉽게 소거되기 십상입니다. 기본생활습관을 형성시키기 위하여 갖은 노력을 다 하는 부모나 양육자들이 고려하여야 하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물론 행하다보면 성격화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렸을 때 들여진 버릇이 오래가는 이유는 바로 그것입니다. 다만 버릇들이기식 지배적 양육방식이 아니어야 합니다. 요사이는 양자의 통합론으로서 상호작용주의 육아방식을 채택합니다. 타고난 품성을 그대로 개발하도록 돕는 한편 환경적인 요인을 첨가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양육방식은 인지 교육적 관점에서도 형성되고 있습니다. 특히 의욕에 넘치는 어린이로 기르기 위하여 부모가 보다 추상적인 언어로 자녀의 질문과 요청에 응답하고, 사물에 대한 호기심을 조장합니다. 합리적인 판단에 의존하고, 행동의 결과보다는 행동의 의도에 따라 규제합니다. 자녀의 충동표현을 즉각 수용하기보다는 그 충동을 약간 유예하도록 훈련하기도 합니다. 물리적인 상벌을 지양하고 심리적인 상벌을 택합니다. 그리고 장기적인 성취목표를 제시하는 방식이 그 예입니다. 부모 또는 양육자는 이상의 발달에 관한 철학적 신념을 바탕으로 바람직한 양육 방식을 결정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점에서 본 Hirai의 육아법은 인간중심 교육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던져주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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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선생님 건강이 좋으신것 같아 보기에도 좋읍니다. 저희때는 유아교육이 낯설은데 손자손녀를 생각하니 관심갖고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듭니다. 언제 시간이 허락하면 막걸리한잔 대접하고 싶읍니다. 내내 건강하십시요 대은동 임재석 절 꾸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