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을식(54)시인은 언어를 화장하거나 미학적인 계교를 부리기 보다는 투박하고 어눌하게 자신의 진솔한 삶의 실체를 기록한다. 또한 시에 있어서 절제의 논리를 도입하고 더 나아가 장인다운 세공을 가하며 보다 높은 격조를 노래한다. 일물일어설을 근간으로 한 언어의 경제논리에 따라 어느덧 말의 절제는 오늘날 시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하나의 미덕이기 때문이다.
그의 1시집 ‘진트재 너머’가 고향을 향한 그리움과 애틋한 사랑의 노래라면, 2시집 ‘시인의 겨울’은 전라도 사람들의 맺힌 한이 온갖 들꽃과 개펄과 무등과 금남로에 묻어 나온다. 그 지역적 한이 보편화되어 오늘의 우리 사회 어디에서나 힘없이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모두의 정서로 전형화되어 부각된다.
그의 시인됨의 자세는 진지하다. “시란 정신의 낱올로 놓은 옥양목과 같고, 시를 쓰는 것은 씨와 날을 얽어 그런 베를 짜는 것과 같을진대, 시에 빠져 들수록 시린 삶은 더 잔혹해지는 것 같다. 그럼에도 시를 쓰며 싶어함은 그것이 오로지 시인의 몫인 그런 잔혹한 삶일지라도 문학의 불씨를 꺼뜨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으리라 믿기 때문일 게다. 어쩌면 모든 것이 내 삶의 바람이자 문학에 대한 깨달음과 다짐이기도 하다. 그러나 시란 참으로 멀고도 멀고 어렵고도 어려운 구도의 길과도 같다는 걸 느낀다”
그런데 왜 시를 쓰고 시인이어야 하는지는 시인 자신의 삶의 창틈에 스며드는 한 줌의 바람과 한 줄기 빗물 때문일 게다. 그러나 때로 가던 길조차 방황할 때가 있고, 생각조차 길들이지 못해 불면의 밤을 지새울 때가 있으며, 가끔 빈 들판에 홀로 서있는 듯한 느낌을 떨쳐버리기 어려울 때도 있다. 문학의 열병으로 인한 불면과 가슴앓이, 그런 인고의 시간 속에 만난 원고지와 잉크가 그 빛을 바랠수록 그는 더욱 더 시를 쓴다는 것에 대한 의미를 부여한다.
그러면서 그는 문단풍토를 신랄하게 비꼬기도 한다. 함부로 내쏟아지르는 문학지도, 문학상도, 패거리지어 떠들어대는 온갖 허접쓰레기 같은 논의들도 정시인에겐 강건너 불이다. ‘허튼 소리’ 연작에서 문단을 후려치고, ‘풀린 産制-어느 문학지에 대하여’, ‘팔리지 않는 시집-어느 서점에서’, ‘시시비비’ 등에서 기득권 차지하기에 여념이 없는 한국문단의 패거리 문화에 대해 시로서 도전하기도 한다.
그의 첫시집에 드러난 그의 담론세계는 난이나 장미같은 식물이미지를 주축으로 한 세계로부터 해체되고 피폐한 고향이야기, 시인됨의 자세 등에 이르기까지 고전적인 성격이 짙다. 그것은 주로 자연서정시들이 보여주던 인생론적인 것, 정신적 삶에서의 올곧음 등이다. 정신적 삶에서의 올곧음은 근대시가 시작된 이래로 시인됨의 자세이자 뜻이기도 하다. 일찍이 황현이 말한 ‘난작식자인(難作識字人)’류의 시인됨과 뜻이 그것이다. 곧 시인이란 먹물든 식자로서 그에 상응한 사명과 책임이 언제나 역사와 세상에 대하여 있다는 생각인 것이다.
“요즘 들어 부쩍 얼굴 두꺼운 시인들이/너도 나도 도청 앞 광장과/망월동을 노래하고 있다./ 참으로 민망한 일이다.”(‘허튼 소리․1’ 일부)
“이상한 의상과 머리 모양, 해괴한 몸놀림으로/오빠부대를 사로잡는 그룹 가수들의/노래집 시디가 날개 돋친 듯 팔린단다”(‘팔리지 않는 시집’ 일부)
그는 묵연히 우리를 노려보고 있는 역사 앞에서 무책임하고 무딘 언설만 새삼 늘어놓고 있는 이들에 대한 질책이나 속악한 대중문화만이 판치는 세속에 대해 꼬집는다. 시인은 역사와 현실 앞에 겸허한 자세로 묵묵히 함성의 씨앗을 묻는 그런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달리 말하면 먹물든 지식인의 역할, 현실과 삶에 대해 진지하게 묻고 또 고뇌하는 그런 모습을 그는 원하고 있다.
“그 곳에 황토길이 있고/그 황톳길이 맞닿는 곳의 논배미에/해마다 자운영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그 논배미 끝 개골창가의/찔레꽃 새순의 껍질을 벗겨 먹으며/허기진 배를 달래던 곳,”(‘진트재 너머․2’ 일부)
“산, 촌스런 산./치장하지 않는 산/모두가 떠나가도 홀로 남아/全-羅-道를 지키며 사념하는 산./풀뿌리를 씹으며/허기진 배를 달래는 산./그러나 누구에게도 아세하지 않는 산”(‘無等山’ 일부)
위 작품은 정시인의 제1고향과 지금 살고 있는 제2의 고향에 대한 노래다. 황토와 허기로 대표되는 그의 시적 공간이다. 그의 고향은 속악한 현실과 견주어 보면 물신화나 사물화된 현실 공간에서 건너다 보는, 그래서 단순히 옛 유년의 기억이 묻은 공간만이 아닌, 그가 지향하고 지켜야 할 공간으로 나타난다.
또한 제2의 고향인 무등산은 일년열두달 그 밑에서 하루같이 살아가고 있는 그의 삶을 지켜보고 있다. 일찍이 서정주의 무등산이 중용과 여유의 인간적인 덕목을 지닌 모습으로 그려졌다면, 정시인의 무등산은 이 밖에도 인고와 통한이 서려있고 피멍든 아버지의 모습으로 제시되고 있다. 곧 산은 평화롭고, 촌스럽고, 표정이 없는, 통한의, 인고의, 그러나 초연하지 않고 준엄한 모습과 뜻을 지니고 있다.
“날이 저물어도/나는 난이 보인다/폭풍설 속에서도/난이 보인다”(‘蘭․2’ 일부)
“그 해 겨울 운주사 골짜기/그냥 그 가녀린 잎이 좋아/캐어다 심은 난//새촉을 튀워/난분에서 솟구치는 향/……/운주사 골짜기에 나도 누울까 보다”(‘蘭이 있는 雲住寺’ 일부)
그는 많은 기간을 난에 매료돼 함께 살았다. 많은 작품들을 난에 대해 이야기해 왔다. 그의 마음의 움직임이 세속의 일상성이 아닌 본향같은 정신적 공간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현실과 역사에 대한 식자인의 노릇을 말하고 삶의 고답적 공간을 동경하는 바램이기도 하다. 또한 그는 난의 세계에서 자신의 이상적 정황을 발견한다. 그 정황은 겨울 한기를 가는 잎으로 당당히 맞서 버티고 때로는 꽃으로 내면을 열어 체취를 풍기는 난 특유의 모습이다. 그와 같은 삶의 자세를 그는 시로 묘사한 것이다.
제2시집에선 역사의 현자에 못지 않게 바위 틈새의 한포기의 난이 삶의 의미를 각성시키는 보다 소중한 존재로 다가서기도 한다. 안방 아랫목에서 화로를 끌어안고 움츠리고 앉아 봄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거칠고 언땅에 묵묵히 삽질을 하며 봄을 창출해 낸다.
또한 광주항쟁 때의 능동적인 투사들의 모습보다는 소시민으로 물러앉아 버렸던 모습을 반성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날카로운 이빨에 혀바닥이 잘렸다/나비의 전신에서 솟구치는 피,/그 파란 피가 쏟아져 포도를 흥건히 적셨다./그 때 시민들은 묵연히 이를 지켜보고 있었다./……/다른 나비 한 마리 조문하지 않았다./시체를 끌어 안고 통곡하는 나비도 없었다./ 그 자리에 피를 먹고 자란 잡풀만 무성했다”(제1 ‘죽은 나비들 거미줄에서’ 일부)고 기록한다.
그 숱한 참여자들을 사상해 버리고 정시인이 이렇게 결과론적으로만 말하는 연유는 비극적인 아픔을 보다 진지하게 인식하면서 살아 남은 자들의 반성을 위한 것으로 보여진다. 이런 현장부재 내지 묵인의 관점에서 정시인은 난의 미학으로까지 접근해 간다.
“산중에 숨어 살기로 했소/……/누구에게도 이곳 알리지 않고/소나무 밑 부엽토, 녹색 옷으로/그 생각, 그 색깔로만 살기로 했소”(‘난타령‘ 일부)에서 보듯이 난은 자신의 모습, 회한을 드러내지 않는다. 이런 난의 절창을 한 번 보자. “쉿, 키를 낮춰야 해/소나무 밑으로 숨어/치장하면 안돼/향을 띄우면 더 위험해/재너머 회색분자들이/몰려올지도 몰라/썩은 비가 내릴지도,/그럼 끝장이야.//애써 꽃은 피웠는데”(’난 타령․1‘ 전문)
“잘 닦인 구두 콧날의 위대함에 밟혀/숨어있던 인동초의 질긴 뿌리/그 얼음장 밑의 묵근한 보리알의 순수//희망은 언제나 절망의 거름을/먹고 자라는 법, 이제/그 한대의 냉대와 핍박은 끝나고,//아, 겨울 들녘의 눈발 속에서도/꺼지지 않고 끝내 버티어 섰던 씨알의/긴 몸살 끝의 옹골진 합창소리”(‘묵근한 종자’ 전문)
그에게 도시란 곧 광주의 참담한 비극이자, 산업화와 비인간화의 상징이다. 그 곳으로부터의 탈출은 언제나 고향을 지칭하는데, 현실적으로는 도시에 몸담고 살아야 한다는 제약이 그로 하여금 갈등의 요인을 낳게해 소주와 난으로 마음을 달래곤 한다.
그의 문학적 삶은 어쩌면 그동안 그런 바람과 비에 젖으며 사유하던 그의 작은 몸부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한가지 신념을 가지고 있다. 아무리 다그쳐도 이 땅에 바람은 불고 비는 내리며, 들꽃은 들녘의 길섶에 아무렇게나 피었다 진다는 것, 그 또한 푸르고 슬프면서도 싱그런 그런 비바람을 맞으며 들꽃을 찾아 헤매게 될거라는 것, 그런 동안 이 어둡고 번잡한 시대의 혼란 속에서도 자유와 사랑을 위한 향수가 문학의 세계에서 새촉을 틔우고 꽃을 피울 수 있을 것이란 믿음이 간다.
그는 시란 아주 민첩한 감각에 의한 추측은 세계를 지배하고, 그것이 아무리 미미한 징조에 불과하더라도 지극히 중대한 일이고, 이러한 문화의 본질적인 근원을 발효시키는 누룩의 역할을 하는 것이 진정한 시의 임무라고 말하면서 아직도 그는 시를 쓴다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고 진지하게 겸손해 한다.
이 땅에 부는 바람과 내리는 비는 초원같은 폐원의 끝에 피었다 지는 들풀의 새촉을 틔우고 꽃망울을 터트린다. 그는 그런 푸르고 슬픈 바람, 싱그런 비라면 온몸으로 바람과 비를 맞으며 들꽃이 아무렇게나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들길을 걷고 싶어한다. 비바람을 흠뻑 맞으며 싱그런 영감에 젖고 싶은 욕망으로 시를 쓴다
공직떠나 고뇌하며 문학정신 재충전
고교때부터 글모임'갯벌'등 활발한 활동
정을식 시인은 1949년 전남 보성군 웅치면 유산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고교시절부터 시와 소설을 병행해서 써오면서 당시 조선대학교 부속고등학교 글모임인 ‘갯벌’을 창립하는 등 활발한 문학활동을 해왔다.
정시인은 그 당시 광주에서는 보기 드문 문재였다. 고교졸업 1년만인 1970년 광주일보 신춘문예에 소설가 박영준씨의 심사로 단편소설 ‘陰蟲’이 입선되었기 때문이다. 그 후 그는 1976년 광주일보 신춘문예에 고 이동주 시인의 심사로 시 ‘薔薇밭에서’가 당선돼 시와 소설 모두 등단하는 감격을 안았다.
그는 20여년전 본향에 머물면서 신춘문예의 열병을 앓으며 수없이 방황하곤 했다. 빨간 사인펜과 봉투와 원고지를 사기 위해 20리길이 넘는 읍내까지 눈보라치는 눈길을 걸어가야 했던 일, 그것이 연유가 되어 지독한 겨울감기를 앓으며 우울해 했고, 감기를 앓으면서도 독한 술과 진한 담배로 그해 12월의 원고지와 싸워야 했던 일들을 기억하곤 한다.
그는 1972년 조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3년을 수료하고 곧바로 보성 웅치중학교에서 교사생활을 시작한다. 그러나 그는 3년만에 다시 광주지방법원 법원주사(참여주사)로 전직을 해 18년동안 근무하면서 어릴 때 그의 분신이나 다름없었던 시와 소설쓰기를 게을리 하기도 했다.
온몸으로, 바로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그런 시와 소설을 쓰는 일보다 거의 매일 작성해야 할 법정 참여기록의 분량이 그를 늘 짓누르고 있었다. 그 무의한 속박으로부터의 탈거, 그러나 그가 차지하고 있던 어떤 한정된 공간의 상실의 아픔도 늘상 지니고 있었다.
그는 거기서 자유로워지기 위해 교단과 공직을 떠나 자신의 일을 시작한다. 그게 지금 하고 있는 법무사사무소다. 좀더 자유롭고 좋은 글을 쓰기 위해 뛰쳐나왔지만 그에겐 또다른 벽이 기다리고 있었다.
교단과 공직을 떠난 여러해 동안의 참담했던 한인생활, 현실과 이상의 괴리 속에서 그는 많이 헤매고 그 스스로를 할켰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고뇌하지 않으면 문학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 진통이 마침내 그의 생활방식의 변화와 문학정신을 다시 재충전 할 수 있는 길로 안내했다. 그후 그는 詩와 蘭이 공존하는 삶의 방식을 선택했다.
그는 현재 한국소설가협회, 광주전남소설가협회, 국제펜클럽회원이며 광주일보신춘문학회 회장을 맡고 있다. 등단 20여년만인 1997년 첫시집 ‘진트재 너머’를 상재했으며, 그 이듬해 또다시 두 번째 시집 ‘시인의 겨울’을 발간하는 왕성한 시력을 보여주었다. 3시집 ‘떠돌다가 머물다가’는 탈고를 완료, 조만간에 발간된다.
글 ; 이재창 편집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