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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醴泉) 左道. 5일 반. 서울과의 거리는 4백 98리이다
異名: 보주(甫州). 기양(基陽). 청하(淸河.) 양양(襄陽).
* 예천군수겸안동진관병마동첨절제사
* 예천훈도 종 6품
동쪽은 안동부(安東府) 경계까지 22리, 풍기군(豐基郡) 경계까지 34리, 남쪽은 용궁현(龍宮縣)경계까지 21리, 서쪽도 용궁현 경계까지 33리, 북쪽은 충청도 단양군(丹陽郡) 경계까지 70리, 서울과의 거리는 4백 98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신라의 수주현(水酒縣)이다. 경덕왕(景德王)이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군(郡)으로 하였다. 고려 초에 보주(甫州)로 고쳤고, 현종(顯宗) 때에는 안동부에 예속시켰으며, 명종(明宗) 2년에는 태자(太子)의 태(胎)를 이 고을에 장치(藏置)하고 기양(基陽)으로 고쳐서 승격시켜 현령(縣令)으로 하였다. 신종(神宗) 때, 남도초토사(南道招討使) 최광의(崔光義)가 동경의 적[東京賊]과 이 고을에서 싸워서 크게 이겼으므로 지보주사(知甫州事)로 승격시켰다. 본조에서는 태종(太宗) 13년에 예에 따라 보주군(甫州郡)으로 고쳤고, 16년에는 다시 지금의 이름으로 하였다.
【속현】 다인현(多仁縣) 본래 신라의 달이현(達已縣)으로, 혹은 다이현(多已縣)이라고 하였다. 경덕왕이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서 상주(尙州)의 속현으로 하였다. 고려 때에 본군의 속현이 되었다. 본군의 서남쪽 40리에 있으니 용궁현 동촌에 넘어 들어가 있다. 다른 이름을 인양(仁陽)이라고 한다.
【관원】 군수(郡守)ㆍ훈도(訓導) 각 1 인.
【군명】 수주(水酒)ㆍ보주(甫州)ㆍ기양(基陽)ㆍ청하(淸河)ㆍ양양(襄陽).
【성씨】 본군(本郡) 임(林)ㆍ윤(尹)ㆍ권(權) 권(權)은 본래 흔(昕)씨 였으나 고려 신종(神宗) 원년에 명종(明宗)의 휘(諱) 자를 피하여 권씨(權氏)로 고쳐 사성(賜姓)하였다. 허(許)ㆍ이(李) 모두 내성(來姓)이다. 황(黃)ㆍ방(邦) 모두 촌성(村姓)이다. 다인(多仁) 황(黃)ㆍ최(崔)ㆍ장(張), 목(睦) 육(陸)이라 하기도 한다. 나(羅)ㆍ백(白) 모두 내성(來姓)이다. 보진(寶進) 명(明) 효천(孝川)도 같다. 최(崔)ㆍ김(金) 모두 속성(續姓)이다. 선천(善川) 윤(尹) 연천(連川)ㆍ웅천(熊川)도 같다. 금천(金川) 심(沈). 우니곡(亏尒谷) 태(太). 고림(高林) 김(金)ㆍ황(黃) 모두 속성(續姓)이다. 동로(冬老) 김(金)ㆍ임(林) 모두 속성(續姓)이다.
【풍속】 풍속은 평이(平易)한 것을 숭상한다. 관풍안(觀風案). 여염에 야박한 풍속이 없다. 이지강(李之剛)의 시(詩).
【형승】 동쪽과 서쪽의 두 재[嶺] 사이에 끼어있다. 윤상(尹祥)의 기(記)
【산천】 덕봉산(德逢山) 군의 서쪽 3리에 있다. 진산(鎭山)이다. 산 위에 흑응성(黑鷹城)이 있다. 서암산(西菴山) 군 서쪽 8리에 있다. 비봉산(飛鳳山) 다인현(多仁縣)의 남쪽에 있다. 군과의 거리는 남으로 35리. 용문산(龍門山) 군의 북쪽 32리에 있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신라 때에 고승(高僧) 두운(杜雲)이 이 산에 들어와서 초막을 짓고 살았는데, 고려 태조가 일찍이 남쪽으로 정벌을 나가는 길에, 여기를 지나다가 두운의 이름을 듣고 찾아갔다. 동구(洞口)에 이르러 홀연히 용이 바위 위에 있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용문산(龍門山)이라고 불렀다. 보문산(普門山) 군의 동쪽 34리에 있다. 작성산(鵲城山) 군의 북쪽 75리에 있다. 하가산(下駕山) 군의 동쪽 31리에 있다. 남천(南川) 군의 남쪽 1리에 있다. 사천(沙川) 군의 동쪽 14리에 있다. 영천군(榮川郡) 임천(臨川)의 하류이다. 양천(襄川) 군의 남쪽 1리에 있다. 그 근원은 풍기군(豐基郡) 명봉산(鳴鳳山)에서 나와서, 본군의 남쪽 12리에 이르러 사천에 들어간다. 대곡탄(大谷灘) 다인현(多仁縣)의 동쪽 9리에 있다. 선창진(船倉津) 현(縣)의 동쪽 3리에 있다. ○ 두 갈래의 물은 자세하게 용궁현(龍宮縣)에 나온다. 홍련지(紅蓮池) 다인현에 있다. 군의 동쪽 60리의 거리에 있다. 『신증』 정개산(鼎蓋山) 군의 동쪽 6리에 있다. 귀모현(歸毛峴) 군의 동쪽 10리에 있다. 대지지(大旨池) 군의 서쪽 8리에 있다.
【토산】 철(鐵) 다인현의 동쪽 대곡탄에서 난다. 자초(紫草)ㆍ왕골[莞草]ㆍ은어[銀口魚]ㆍ붕어[鯽魚]ㆍ꿀[蜂蜜]ㆍ송이[松蕈]ㆍ인삼ㆍ산무애뱀[白花蛇]ㆍ오미자(五味子)ㆍ잣[海松子]ㆍ닥종이[楮]ㆍ설면(雪緜).
【성곽】 덕봉산성(德峯山城) 돌로 쌓았다. 둘레가 4천 80척, 높이가 10척 6촌(寸), 안에 우물 둘, 못 1개가 있다. 군창(軍倉)이 있다.
【봉수】 서암산 봉수(西菴山烽燧) 동쪽으로 안동부 풍산현(豐山縣) 소산(所山) 봉수에 응하고, 서쪽으로는 용궁현 용비산(龍飛山) 봉수에 응한다. 소이산(所伊山) 봉수 다인현에 있다. 동쪽으로 비안현(比安縣) 대암산(大巖山) 봉수에 응하고, 서쪽으로 용궁현 용비산 봉수에 응한다.
【궁실】 객관(客館) 윤상(尹祥)의 기(記)에, “무릇 주군(州郡)에 관사(館舍)를 설치하는 것은, 사신(使臣)이 왕화(王化)를 선포(宣布)하는 때를 기다려, 행례(行禮)할 곳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아주 작은 고을이라도 없앨 수 없는 것이다. 예천군(醴泉郡)은 동쪽과 서쪽에서 죽령(竹嶺)과 초령(草嶺) 두 재[嶺] 사이에 끼어 있다. 죽령으로부터 상주(商州) 낙동(洛東)으로 가는 자, 초령으로부터 화산(花山)에 가는 자는 반드시 이 고을을 경유하게 된다. 그래서 사신의 순시(巡視)와 길가는 나그네의 오고 감이 거의 없는 날이 없다. 그런데, 객관이 좁고 누추하여서 고을과 더불어 서로 걸맞지 않았다. 기미년에 완산(完山) 이지명(李知命) 후(侯)가 이 고을의 수령으로 나왔다. 정사를 본지 3년에 정사는 형통하고 사람들은 화합하게 되었다. 이에 고을 사람들과 모의하고 감사(監司)에게 보고하여, 농부나 공장이들을 수고롭게 하지 않고, 놀고 있는 사람들을 일시켰다. 관사가 이루어지니 뜰 층계[階廳]가 높고 커서 심한 더위의 무더움을 제거할 수 있고, 마루의 간살이 넓고 시원하여서, 예(禮)를 행할 때에 읍양(揖讓)할 위치를 마련하기에 넉넉하다. 서늘한 곳과 더운 방을 따로 만들었으며, 외관(外觀)과 실질(實質)은 알맞게 되었으니, 이후(李侯)의 정사하는 것이 급소(急所)를 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또한 한도를 넘지 아니하였다. 공사를 일으켰으나 백성의 힘을 수고롭게 하지 않았으니 어짐[仁]을 베풂이요, 사신을 우대하고 왕명을 존중하니 공경함이 크다. 어짐과 공경함을 갖추었으니 수령의 직책은 다한 것이다. 예천은 나의 누대(累代)의 고향 땅이다. 이후의 정사하는 것은 내가 잘 아는 바이다. 그러므로 대강 일의 경과를 적을 뿐이다.” 하였다.
【누정】 쾌빈루(快賓樓) 객관의 동쪽에 있다. ○ 서거정(徐居正)의 시(詩)에, “양양(襄陽 고을의 옛 이름)의 누(樓) 위에 늦은 바람 차운데, 청산(靑山)을 향하여 주렴 걷고 홀로 난간에 의지해 선다. 죽령(竹嶺) 높아 하늘이 낮으니 북두(北斗)를 보고, 화산(花山)에서 나오는 길 동관(東關)에 이어졌네. 호걸스럽게 읊으니 도리어 이 강산 좁은 것을 깨닫게 되고, 크게 취(醉)하니 우주가 너그러운 것을 알겠다. 정말 웃을 만하구나. 공명(功名)이 무르익기만 생각하고, 몸과 세상이란 남가일몽(南柯一夢)인 것을 알지 못하니.” 하였다. 『신증』 이의무(李宜茂)의 기(記)에, “신유년에 나는 철성(鐵城) 이심원(李深源)ㆍ성산(星山) 이자고(李子固)ㆍ남원(南原) 황실지(黃實之)와 더불어, 백성을 옮기는 일로 봉명사신(奉命使臣)이 되어 길을 나누어 영남으로 내려갔다. 나는 장차 안동(安東)으로 가려고 하는데, 길이 예천을 경유하게 되어서, 예천의 객관 동헌(東軒)에 유숙하게 되었다. 동헌의 북쪽 모퉁이에 누(樓)의 옛터가 있었는데, 바야흐로 새로 창건하고자 하여 재목을 모아놓은 채 공사를 시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누의 이름을 물으니 쾌빈(快賓)이라 하였으며, 그 신축을 시작하지 못한 이유를 물으니, 태수(太守) 민후(閔侯)가 사건으로 인하여 갈려 갔기 때문에 성취하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배회하며 두루 살펴보면서 오랫동안을 슬프게 여기었다. 이 누가 성취되지 못한 것은, 또한 우리들 이번 걸음에 불쾌한 일의 한 가지라고도 생각하였다. 이로부터 각군을 두루 다니며 각군의 웅장하고도 걸출한 누각들을 보니, 그때마다 이 누의 성취 못 된 것이 한스러웠다. 얼마 뒤에 윤후(尹侯)가 이 고을에 수령으로 와서, 제일 먼저 이 누부터 준공시키기를 계획한다는 것을 듣고, 혼자서 스스로 다행하게 여겨 기뻐하면서, 또, 과연 한 번 그 누에 올라가 봄으로써, 우리 일행을 쾌하게 할 수 있을까 생각하였다. 두어 달이 못 되어서 심원(深源)은 경주(慶州)로부터, 자고(子固)는 진주(晉州)로부터, 실지(實之)는 상주(尙州)로부터 각각 일을 마치고 이곳에 모이게 되었다. 와 보니 쾌빈루라는 것이 높다랗고 빛나게 서 있어서, 마치 며칠이 못 되어서 이루어진 것 같았다. 우리들은 서로 경하해 말하기를, ‘윤후의 이 일이 이렇게 신통하고 또 신속하였으니, 현명하지 않고야 해낼 수 있겠는가. 옛 사람들은 한 가지 일을 시행하는데 있어서도 멀고도 큰 것을 계책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현명하다고 말하지 않겠는가.’ 하고, 드디어 서로 더불어 누에 올라 사면을 바라보니, 높은 산이 뒤에 솟아 있고 큰 냇물이 앞을 지나간다. 민가는 사방에 퍼졌으며, 편평한 언덕과 끊어진 둔덕이 둘러싸고 옹위(擁衛)하여서, 마치 이 세상 밖의 딴 한 동천(洞天)인 것 같다. 이것 또한 이 누의 좋은 경치들이다. 조금 뒤에 잔치를 열고 술을 마련하여 함께 마시면서 낙성(落成)을 축하하였다. 좌우에서 술잔을 주고받고하여, 술잔과 그릇들이 뒤섞이고, 거문고와 피리ㆍ젓대 소리가 사이사이 일어나니, 서로 일어나 춤을 추어서 즐겁고 유쾌한 정경이 거나하여 누가 주인이며 누가 손인지 알지 못하겠다. 마치 균천(鈞天)에 올라 광악(廣樂)을 듣는 것 같아서, 아무리 뛰고 춤추어도 오히려 부족한 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일찍이 들으니, 누대를 설치하는 것은 경치를 구경하기 위함만이 아니고, 장차 막히고 답답한 것을 인도하여 통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때때로 나가서 노닐며 구경하여 노고(勞苦)와 안일(安逸)을 조절하는 것도, 또한 정치하는 자의 없을 수 없는 일이다. 하물며 윤후의 이 일은 옛것에 의거하여, 확대해서 전공(前功)을 떨어뜨림이 없게 하고, 뒷사람이 보기에 사치함이 없게 하였음이랴. 사물의 말절(末節)에 구애됨이 없이, 사람들이 올라가 유람하고 술 마시고 노래 부른 나머지에 스스로 쾌(快)하게 되도록 하였다. 우리들이 이 누에서 낙성축하연(落成祝賀宴)을 연 것은 한갓 우리들만의 다행일 뿐이 아니고, 도리어 이 고을의 큰 행복인 것이다. 윤후는 여러 고을의 동인(銅印)을 찼었는데 모두 성예(聲譽)와 치적(治績)이 드러나서, 공수(龔遂), 황패(黃覇)처럼 되는 것도 다 쉽게 여길 만하니, 이번에 이 고을에 온 것이 어찌 그저 수령이 되었을 뿐이겠는가. 아마 이 일로 말미암아 미루어서, 모든 황폐하고 타락(墮落)한 것을 수거(修擧)하는 일은 하나도 원대한 계책에서 나오지 않는 것이 없게 하여, 이 백성들로 하여금 위로 봉양하고 아래로 기르는 데에 스스로 만족할 수 있게 하고, 어진 풍속과 화합한 분위기 속에 고무(鼓舞)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니, 사람의 마음이 쾌족하게 되는 것은 유독 손[賓]이겠는가, 주인이겠는가, 또는 이 백성들이겠는가. 나는 경중(輕重)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하겠다. 외람되게 연석에 참여하였으므로, 후의 청탁을 중하게 여겨 대강 일의 경과를 적어서 돌려보낸다. 후의 휘(諱)는 수천(壽泉)이고 자(字)는 영호(永灝)인데, 파평(坡平)의 이름 높은 가문이다.” 하였다. ○ 김종직(金宗直)의 시에, “매괴(玫瑰 해당화(海棠花))가 피어 다할 때에 보주(甫州)에 머무르니, 푸른 못[池], 푸른 봉우리에 더더구나 높은 누(樓)까지. 징병되어 나가는 위사(衛士)는 새 마음을 망설이고, 웃음을 웃게 하는 아름다운 아가씨 취한 이를 벗하여 논다. 보리 알맹이를 소생시키는 산비[山雨]는 지나가고, 물고기 새끼를 보호하는 수의(水衣 물에 뜨는 푸른 풀)가 떠 있다. 티끌 세상에서 반날[半日]동안 한가함을 얻은 곳이니, 마음에 쾌한 것이 어찌 반드시 만호(萬戶)의 유(留)이겠는가.” 하였다. ○ “뽕나무ㆍ삼대ㆍ버드나무ㆍ느릅나무가 펀펀한 냇가에 성했는데, 누워서 양양(襄陽)의 하늘을 본다. 이 몸은 벽유당(碧油幢 임금과 왕후가 쓰는 기름 먹인 푸른 당막) 아래에서 온 손님, 누에 오르니 회포가 더욱 아득하구나.” 하였다.
『신증』 연빈루(燕賓樓) 객관의 동쪽에 있다. 향사당(鄕射堂) 군의 서쪽 2리에 있다. 권오복(權五福)의 기(記)에, “영(嶺)의 남쪽 60여 주(州)는 고려가 삼국을 통일한 때로부터 합하여 한 도(道)를 두었으며, 아조(我朝)에서도 그대로 하였다. 크게 인재(人材)와 물산(物産)의 부고(府庫)가 되었으니, 우리 예천도 그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예천은 본래 신라의 수주현(水酒縣)이다. 신라 시대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전후 수천 년 동안에 고을의 수령은 몇 사람이었으며, 향대부(鄕大夫)는 몇 사람이었던가. 그중에서 옛 도[古道]에 뜻을 두고, 옛 예[古禮]를 회복하여 능히 백성을 예속(禮俗)으로 인도한 사람이 몇 사람이나 있었는지 알지 못하겠다. 고을의 수령은 장부(帳簿)의 처리와 받아들이는 일에 바빠서, 시설(施設)하는 데에는 겨를이 없었으며, 향대부들은 비록 세속을 교화시킬 방법이 있었으나, 한 고을에서는 관리하는 바가 없었다. 소위 지위가 높지 않은 자는 비록 착하더라도, 지위가 높지 않으면 사람들이 믿지 않았으므로, 식자(識者)들은 이 일을 병되게 여기었다. 우리 전하가 즉위하신 무신년에, 옛날에 있었던 곳에 다시 유향소(留鄕所)를 두게 하였으니, 좌수(座首)가 있고 별감(別監)이 있다. 나이와 덕망이 높은 자를 추대하여 좌수라고 일컫고, 그 다음을 별감이라고 일컬었다. 그들이 한 고을의 풍속을 규찰(糾察)하고 관리하였다. 향소의 임원은 부(府)는 4명, 군(郡)은 3명, 현(縣)은 2명이었다. 우리 고을은 군(郡)이다. 윤계은(尹季殷) 후(侯)와 권추(權推) 후가 별감(別監)이 되고 나의 아버지가 좌수(座首)가 되었다. 계은씨는 바로 제학(提學) 윤상(尹祥)의 아들이다. 집안의 대대가 문헌(文獻)이므로 백성을 예속(禮俗)에 인도할 것을 생각하였다. 이것이 향사당(鄕射堂)을 짓게 한 유래이다. 향사당은 좌우 채와 주방(廚房) 등 모두 20칸이다. 향부로(鄕父老)들이 함께 돈을 내어서 기와를 굽고 재목을 모았으며, 군수(郡守) 이잠(李箴) 공도 또한 재목(材木)을 도와주었다. 임자년에 처음 착공하여 계축년에 마쳤다. 그 공사를 감독한 자는 고을 사람 누구 누구이며, 그 공사를 집행한 자는 고을의 아전 누구 누구이다. 지난해 가을에 내가 휴가를 얻어 금당곡(金堂谷)에 귀성(歸省)하였더니, 고을의 부로(父老)들이 나를 향사당으로 이끌고 갔다. 술이 반쯤 취했을 때에 윤후가 잔을 잡고 말하기를, ‘우리 고을에서 이 향사당을 열려고 한 것이 오래 되었으나, 그 적당한 터를 잡지 못하여 어떤 이는 북정(北亭)을 철훼(撤毁)하고, 그 자리에 향사당을 세우자고 하는 이도 있었다. 끝없는 여러 사람의 논의가 대개 또한 몇 해를 끌었다. 하루는 군의 치소(治所) 서쪽 2리 남짓한 곳에 가보게 되었는데 거친 언덕 개암나무ㆍ망초대 우거진 사이로 높은 곳에 올라가 바라보다가, 기이한 곳을 발견하였다. 모든 그 눈에 보이는 것, 마음에 꾀하는 것이 뛰어난 경지 아닌 것이 없었다. 여러 산은 푸르게 둘러싸고, 냇물 하나가 옥 같은 물결을 쏟고 있는데, 숲은 무성하고 대나무는 길며, 집은 그윽하고 지세는 막히어서 마치 하늘아버지와 땅어머니가 감춰 두고 사람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드디어 여기에 당(堂)을 짓기로 결의하였다. 향사당이 이루어지자, 그대가 마침 왔으니 한 말씀 기(記)가 없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무릇 제사(題詞)나 기(記)를 짓는 것은, 반드시 대가(大家)의 손을 얻어야 하는 것인데, 지금 문장에 이름 높은 대가들이 우뚝우뚝하여 서로 바라다볼 만큼 많으니, 요구하여 좋지 않을 이가 없을 것인데, 버선의 실 같은 보잘것없는 내가 도리어 어찌 능히 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으나, 후가 굳이 명하므로 나는 더 이상 사양할 수 없게 되었다. 곧 말하기를, ‘당(堂)을 개설(開設)하는 것이 어찌 한갓 허튼 일이겠는가. 고대의 성스러운 황제와 밝은 임금은 몸소 인(仁)과 의(義)를 실행하여 백성을 인도함이 두터웠으나, 그것만으로는 오히려 부족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또 향관(鄕官)을 설치하여 가르쳤으니, 여서(閭胥)니, 족사(族師)니, 비장(比長)이니, 당정(黨正)이니 하니 등속과 같은 것이 있어서, 각기 계령(戒令)ㆍ정사(政事)ㆍ백성 모으는 일[屬民], 법령을 읽어 들려주는 일[讀法] 등을 맡았다. 봄, 가을에는 예(禮)로써 모여서 고을의 학교에서 술 마시고 쏘게 하고, 그들의 덕(德)과 행(行)과 도(道)와 예(藝)를 기록하고, 그들의 과오를 규찰하여 권장하고 징계하였다. 풍속이 순후하고 아름다워져서 한 세상을 인(仁)ㆍ의(義)의 경역(境域)에 올려 놓았었다. 지금의 유향소(留鄕所)라는 것은 즉 옛날 당정(黨正)의 남은 뜻이다. 고을에 완악하고 간특하여 제 멋대로 방자하는 자, 효도하고 우애하지 아니하는 자, 친족간에 화목하지 아니한 자, 인척(姻戚)간에 친애하지 아니한 자, 친신(親信)하지 아니하며 진휼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이 당(堂)에서 그에 대한 징계를 의논할 수 있으며, 아전으로서 간특한 마음을 남몰래 품고 있어서, 성(城)과 사(社)를 의지하고[城孤社鼠] 백성의 재물을 침탈하는 자가 있으면 이 당에서 징계를 의논할 수 있는 것이다. 주관(周官) 향삼물(鄕三物)의 가르침을 미루어 행하고, 여남(汝南)의 월단평(月旦評)을 실시하여 한 고을의 풍속을 격려하는 것도, 또한 이 당(堂)에서 하지 않는 것이 없다. 그렇다면, 이 당의 임무에 포함된 사항은 광범위하다. 그런데 홀로 사(射)로써 편액(扁額)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말하기를 향사(鄕射)의 예(禮)는 오래 된 옛 풍속이다. 공자(孔子)가 확상(矍相 땅 이름)의 포전(圃田)에서 활을 쏘니 구경하는 자가 담처럼 둘러 섰었다. 술잔을 들게 하고 말하기를, ‘어릴 때와 장년기에는 효제(孝悌)하고, 늙어서는 예(禮)를 좋아하여 유행하는 풍속에 좇지 아니하며, 몸을 닦으면서 죽기를 기다리는 자가 이 자리에 없습니까.’ 하니, 대체로 가는 자가 반이나 되고 있는 자가 반이나 되었다. 또 술잔을 들고 말하기를, ‘학문을 좋아하여 게으르지 않고 예를 좋아하여 어지럽지 않으며, 노년이 되어서는 도에 알맞게 하여, 변하지 아니하는 자는 이 자리에 없습니까.’ 하니, 겨우 남아 있는 자가 한 사람이었다. 술잔을 드는 사이에 그 착한 자를 골라서 머무르게 하면, 그에 해당하지 아니한 사람은 스스로 물러가는 것이다. 이것은 《시경(詩經)》에서 말하는 바 손님의 차례를 현명함의 정도로써 한다는 것으로 업신여기지 않는 것이다. 공자가 말한 바 ‘고을에 가보아서 왕도(王道)의 쉽게 실행됨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 국가가 옛 법을 좇아서 예교(禮敎)를 숭상하여 향사(鄕射)의 예의를 마련하였다. 무릇 활 쏜다[射]는 것은 한 무예(武藝)이지만, 손님을 차례 있게 하고 벌배(罰杯)를 드는 예가 이 의식에서 거행된다. 그리하여 한 고을의 숙덕(淑德)함과 사특(邪慝)함을 구별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향부로들이 오직 향사당이라고 현판을 걸었으나, 권장하고 징계하는 모든 뜻이 실로 그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활 쏘는 것은 마땅히 단(壇)에서 해야 하는 것인데, 이제 당(堂)이라 함은 무엇인가. 말하기를, 활 쏘는 것은 단에서 하고, 향빈(鄕賓)의 숙계(宿戒 의식ㆍ제사의 기일에 앞서 목욕재계하는 일)는 당에서 한다. 옛날의 향당(鄕黨)의 선생들은 살아서는 사(社)에 모이고, 죽어서는 사에서 제사되는 것이었다. 아, 이 당은 그 사와 같은 것이다. 내가 훗날 벼슬에서 물러나와 이 당에 결사(結社)하여, 봄ㆍ가을의 좋은 날에 닭ㆍ돼지의 안주로 한가하게 부로들을 따라 다니게 되면, 그때에 다시 술 마시고 활 쏘고 하는 예절을 강론하리라.” 하였다.
【학교】 향교(鄕校) 군(郡)의 북쪽 1리에 있다. 군수(郡守) 김겸(金謙)이 세웠다.
【역원】 통명역(通明驛) 군의 동쪽 7리에 있다. 수산역(守山驛) 다인현(多仁縣)에 있다. 망현원(芒峴院) 군의 동쪽 20리에 있다. 호명원(虎鳴院) 군의 남쪽 16리에 있다. 황리원(黃利院) 군의 서쪽 5리에 있다. 우두원(牛頭院) 군의 서쪽 20리에 있다. 북원(北院) 군의 북쪽 7리에 있다. 모현원(毛峴院) 군의 북쪽 11리에 있다. 죽원(竹院) 다인현의 서쪽 22리에 있다. 광덕원(光德院) 다인현의 동쪽 21리에 있다.
【불우】 용문사(龍門寺) 용문산(龍門山)에 있다. 고려 태조가 두운(杜雲)을 위하여 창건한 것이다. 뒤에 명종(明宗) 때에 태자(太子)의 태(胎)를 절의 왼편에 있는 봉우리에 장치(藏置)하고 이름을 창기사(昌期寺)라 고쳤다. 산기상시(散騎常侍) 이지명(李知命)이 기(記)를 썼다. ○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두 번째 용문사에 이르니, 산이 깊어서 세속의 소란함이 끊어졌네. 상방(上方 중 있는 곳)에는 중의 평상[榻]이 고요하고, 옛 벽(壁)에는 불등(佛燈)이 환하다. 한 줄기[一道] 샘물 소리는 가늘고, 일천 봉우리 달빛이 나누인다. 고요히 깊은 반성에 잠기니, 다시 이미 나의 가졌던 것까지 잊어버린다.” 하였다. 『신증』 대곡사(大谷寺) 비봉산(飛鳳山)에 있다. ○ 이규보(李奎報)의 시(詩)에, “돌 길이 높고 낮아 평탄하기도 평탄하지 않기도 하니, 한가한 손이 과하(果下)를 타고 채찍을 늘어뜨리고 가네. 가벼운 바람은 고요히 연기 빛을 쓸어 가고, 넘어가는 달 때로는 새벽 빛을 겸하여 밝다. 짧은 산기슭 앞머리에서 절[寺]의 현판을 보고, 배를 옆 언덕에 가로 대고는 여울[灘] 이름을 묻는다. 외로운 마을 어디에서 쓸쓸히 피리를 부는가, 타향에서 병들어 있는 사람의 심정은 괴로워지기 쉬운데.” 하였다.
【사묘】 사직단 군의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 덕봉산(德峯山)에 있다. 여단 군의 북쪽에 있다.
【고적】 안인폐현(安仁廢縣) 김부식(金富軾)이 말하기를, “본래 난산현(蘭山縣)이다.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보주(甫州)의 영현(領縣)으로 하였다.” 하였다. 지금 어디인지 자세하지 않다. 고림부곡(高林部曲) 군의 서쪽 20리에 있다. 용궁현(龍宮縣)의 북촌(北村)에 넘어 들어가 있다. 효천부곡(孝川部曲) 군의 남쪽 18리에 있다. 보진부곡(寶進部曲) 다인현(多仁縣)의 남쪽 27리에 있다. 동로평소(冬老坪所) 군의 북쪽 53리에 있다. 작성(鵲城) 둘레가 6백 10척이다. 지금은 폐성(廢城)이다. 서쪽에 석문(石門)이 있는데, 높이가 11척, 넓이가 12척이다. 삼면(三面)은 암석(巖石)이다.
【명환】 고려 조운흘(趙云仡). 본조 전백영(全伯英)ㆍ김겸(金謙)ㆍ안성(安省), 이혜(李惠) 일찍이 지보주(知甫州)를 지냈고, 시(詩)로 유명하였다. 이백겸(李伯謙)ㆍ윤기견(尹起畎)ㆍ김인민(金仁民)ㆍ정종소(鄭從韶). 『신증』 박한주(朴漢柱) 정사는 잘 되고 다스림은 태평하였으며, 아전은 두려워하고 백성은 심복(心服)하였다.
【인물】 고려 임민비(林民庇) 의종 조(毅宗朝)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동중서 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에 이르렀다. 정승이 되어 의젓하여 옛 풍모가 있었으며, 착한 이를 좋아하고, 급한 것을 구제하며, 확실하고 꾸밈이 없었다. 그런 까닭에 비록 무부(武夫)와 사나운 졸병이라도 또한 그를 존경할 줄 알았다. 73세에 치사(致仕)하였으며,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임종비(林宗庇) 사륙체(四六體)의 문사(文詞)에 재주가 있었다. 임춘(林椿) 종비(宗庇)의 종자(從子)이다. 의종(毅宗) 때의 사람인데 문장(文章)으로써 세상에 드날렸다. 여러 번 과거를 보았으나 급제하지 못하였다. 정중부(鄭仲夫)의 난(亂) 때에 온 집안이 화(禍)를 만났으나, 춘은 몸을 빼어 탈주하여 겨우 화를 면하였으나, 끝내 곤중하게 살다가 일찍 죽었다. 호(號)를 서하선생(西河先生)이라고 한다. 문집(文集)이 있어서 세상에 전하고 있다. ○ 《고려사(高麗史)》에, “서하(西河) 사람이다.”라고 하였는데 무엇에 근거하였는지 알 수 없다. 임지한(林支漢) 원종(元宗) 때에 본군의 아전으로서 동도(東都)의 배반한 장수 최종(崔宗)ㆍ최적(崔積)ㆍ최사(崔思) 등의 정벌에 종군(從軍)하여 공이 있었다. 벼슬로써 상을 주려고 하니 임지한이 사양하고, 상주(尙州) 관내의 다인현(多仁縣)을 본군에 이속(移屬)시켜 주기를 청하여 원종이 허락하였다. 임유정(林惟正) 급제하여 벼슬이 좨주(祭酒)에 이르렀다. 옛 사람의 글귀를 모아서 새로 시(詩)를 만드는 일에 능숙하였다. 《백가의집(百家衣集)》이라는 저서가 있다. 본조 권맹손(權孟孫) 급제하여 벼슬이 예문관 대제학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제평(齊平)이다. 윤상(尹祥) 현(縣)의 아전으로서 급제하였다. 학문이 정밀하고 깊었으며, 남을 가르치는 데 게을리하지 않았다. 16년간이나 성균관 대사성으로 있었으며, 벼슬이 예문관 제학에 이르렀다. 나이 78세가 되어서 고향에 퇴로(退老)하니, 배우는 자가 구름처럼 모여 들었다. 83세에 졸(卒)하였으며 근대(近代)에 가장 뛰어난 유학(儒學)의 스승이었다.
【유우】 본조 조용(趙庸) 홍무(洪武) 임신년에 여기에서 귀양살이하였다. 자세한 것은 진보현(眞寶縣)에 나온다.
【효자】 본조 임즐(林騭) 벼슬이 감찰(監察)에 이르렀다. 아버지를 위하여 3년 동안을 여묘(廬墓)살이하면서 웃는 일이 없었다. 일이 조정에 알려져서 정려하였다. 김뉴(金忸) 그의 아버지가 일찍 죽어서 그가 어렸기 때문에 상주노릇을 못하였더니, 장성하여서 어머니가 죽자 3년 동안을 여묘살이하고, 아버지를 위하여 계속하여 또 3년을 여묘살이하였다. 일이 조정에 알려져서 가각고 녹사(架閣庫錄事)에 임명하였다. 반유(潘濡) 아버지를 위하여 3년간 여묘살이하였다. 일이 조정에 알려져서 정려하였다. 권절산(權節山) 어머니를 위하여 3년 동안 여묘살이하였다. 일이 조정에 알려져서 정려하였다. 윤혁(尹奕) 군(郡)의 아전이다. 부모를 봉양하는데 집이 비록 가난하였으나 일찍이 술과 고기가 떨어진 일이 없었다. 부모가 죽으니 슬퍼함이 예(禮)를 넘게 하였는데, 일이 조정에 알려져서 정려하였다. 노순(盧珣) 진사(進士)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그의 조부 진(珍)에게서 길러졌다. 진이 나이 60에 어머니를 위하여 여묘살이하다가 병이 들어 거의 죽게 되었다. 순이 약을 받드는데 반드시 먼저 맛보며, 북두칠성에 기도하여 제 몸이 대신 죽기를 구(求)하였다. 조부의 똥을 맛보아 쓰더니[苦] 병이 과연 나았다고 한다.
【열녀】 권씨(權氏) 안동(安東) 권계생(權啓生)의 딸이다. 20세 때에 그의 남편 송효종(宋孝從)이 죽으니, 몸소 흙을 져다가 집의 북쪽에 장사지내고, 5세된 어린 아들을 데리고 아침저녁으로 무덤 곁을 떠나지 않은 채 3년을 마쳤다. 하루는 범이 아들을 잡아가니 권씨는 왼손으로 아들을 붙들고, 오른손으로 범에게 항거하며 말하기를, “하늘이여, 아는 것이 있거든 빌건대 굽어 살피소서.” 하니 범이 곧 버리고 갔다고 한다.
【제영】 십리상마우로심(十里桑麻雨露深) 윤상(尹祥)의 시에, “천 길 산성에는 운연(雲煙)이 오랬고, 십리 들 뽕나무와 삼[麻] 대에는 비와 이슬이 깊구나.” 하였다. 문전화류격평천(門前花柳隔平川) 이거인(李居仁)의 시에, “문 앞의 버들과 꽃은 평평한 냇물을 격했고, 발 밖의 소나무 가득한 봉우리는 푸르름이 하늘에 닿았구나.” 하였다.
《대동지지(大東地志)》
【고읍】 다인(多仁) 용궁(龍宮) 동남쪽 경계 너머에 있으며, 군(郡)과는 남쪽으로 45리 떨어져 있다. 본래 신라의 달이(達已)인데 다이(多已)라고도 한다. 경덕왕 16년에 다인(多仁)으로 고쳐 상주(尙州) 영현(領縣)으로 삼았으며, 고려 초에 이에 속한 후 본군에 내속하였다. ○ 읍호는 인양(仁陽)이다.
【방면】 동읍내(東邑內)ㆍ남읍내(南邑內)ㆍ서읍내(西邑內)ㆍ북읍내(北邑內) 모두 끝이 10리이다. 신당(神堂) 동쪽으로 처음이 10리이고 끝이 15리이다. 보문(普門) 동쪽으로 처음이 25리이고, 끝이 40리이다. 음산(陰山) 동쪽으로 처음이 10리이고 끝이 20리이다. 뇌택(雷澤) 동쪽으로 처음이 10리이고, 끝이 20리이다. 신당명(神堂鳴) 남쪽으로 처음이 15리이고 끝이 25리이다. 위라곡(位羅谷) 위와 같다. 개포리(開浦里) 서남쪽으로 처음은 10리이고 끝이 20리이다. 유등천(柳等川) 서쪽으로 처음이 10리이고 끝이 20리이다. 당동(堂洞) 서쪽으로 처음이 10리이고, 끝이 30리이다. 지서아(只西牙) 서쪽으로 처음이 20리이고 끝이 25리이다. 제곡(諸谷) 서북쪽으로 처음이 15리이고 끝이 30리이다. 유리동(流里洞) 위와 같다. 화북(花北) 서북쪽으로 처음이 25리이고 끝이 80리이다. 동로소(冬老所) 서북쪽으로 끝이 90리이다. 위의 두 면은 서북쪽으로 쑥 들어갔는데, 동쪽은 풍기(豐基)의 상리(上里)와 하리(下里) 두 면이다. 화북면(花北面)의 서랑(西郞)과 상주(尙州)의 산양(山陽)ㆍ산동(山東)ㆍ산서(山西)ㆍ산북(山北)의 네 면은, 동로소의 갈라진 곳과 경계하고 있다. 서쪽은 문경(聞慶)의 신북면(身北面) 경계에 접하여 있고, 북쪽은 청풍(淸風)ㆍ단양(丹陽)ㆍ풍기(豐基)가 교차하는 곳에 접하여 있다. 현내(縣內) 남쪽으로 처음이 40리이고 끝이 50리이다. 현서(縣西) 남쪽으로 처음이 50리이고 끝이 10리이다. 현남(縣南) 위와 같다. 현동(縣東) 처음이 50리이고 끝이 70리이다. 위의 네 면은 다인(多仁) 고현(古縣)의 땅이다. 동쪽은 안동의 풍남면(豐南面), 의성(義城)의 우곡면(羽谷面), 비안(比安)의 정서면(定西面)과 접해 있으며, 남쪽은 상주의 중동면(中東面), 용궁(龍宮)의 내하(內下)ㆍ남하(南下) 양면(兩面)과 접해 있으며, 북쪽은 동현(同縣)의 중상(中上)ㆍ중하(中下) 양면과 접해 있다. ○ 고림부곡은 용궁(龍宮)의 북쪽 경계에 넘어들어갔으며, 군은 서로 20리 떨어져 있다. 효천부곡은 남쪽으로 18리이다. 보진부곡은 남쪽으로 27리이다.
【성곽】 작성(鵲城) 작성산 위에 있고 둘레는 6백 10척이다. 서쪽에는 석문(石門)이 있으며, 삼면은 모두 암석(巖石)이다. 고성(姑城) 안인(安仁) 고현에 있다.
【창고】 읍창(邑倉)ㆍ현창(縣倉) 다인(多仁) 고현이다. 갈평창(葛平倉) 서북쪽으로 40리이다. 산창(山倉) 문경(聞慶) 조령산성(鳥嶺山城)에 있다.
【진도】 현창진(縣倉津)
【토산】 뽕[桑]ㆍ석이버섯[石蕈]
【누정】 용두정(龍頭亭)ㆍ읍호정(揖湖亭)
【사원】 정산서원(鼎山書院) 광해(光海) 임자년에 건립하고 숙종(肅宗) 정축년에 사액하였다. 이황(李滉) 문묘 편에 보라. 조목(趙穆) 자(字)는 사경(士敬)이고 호는 월천(月川)이며, 횡성(橫城) 사람으로 벼슬은 공조 참판이다.
* 영천(榮川) 左道. 5일 정. 서울과의 거리는 4백 33리이다.
안동진관영천군(安東鎭管 榮川郡)
異名: 영주(榮州).순안(順安). 내령(奈靈). 강주(剛州). 구성(龜城). 내이(奈已)
* 영천군수겸 안동진관병마동첨절제사. 문관 음관 4품
* 영천훈도. 종9품
좌수 1인. 별감 2인. 군관 4인. 인리 26인. 지인 12인.
사령 12명. 관노 27명. 관비 25구.
0 호구 己卯式元戶
호수: 3,649호. 인구: 23, 452명. 남자: 8,715명. 여자: 14,737명.
三千六百四十九戶人口二萬
三千四百五十二口內 男八千七百十五口女一萬四千七百三十七口
東至禮安界五十一里西至豐基界十二里南至安東界四十一里北至順興界十五里東北至順興界十里西南至安東界三十里距京四百三十三里五日程南距監營三百里三日程南距兵營四百四十里五日程南距水營五百六十里六日程南距統營六百三十里七日程
동으로 안동부(安東府) 경계에 이르기까지 27리,
예안현(禮安縣) 경계에 이르기까지 51리,
남으로 안동부 경계에 이르기까지 41리,
서로 풍기군(豐基郡) 경계에 이르기까지 12리,
북으로 풍기군 경계에 이르기까지 14리,
남쪽으로 대구감영까지 3백리 3일정.
남쪽으로 울산병영까지 4백40리 5일정.
남쪽으로 동래수영까지 5백60리 6일정.
남쪽으로 통제영까지 6백30리 7일정.
0【건치연혁】
본래 고구려(高句麗)의 내이군(奈已郡)이다 내(奈)는 날(捺)로 된 것도 있다. 신라(新羅) 파사왕(婆娑王)이 취했고, 경덕왕(景德王)이 내령군(奈靈郡)이라 고쳤다. 고려(高麗) 성종(成宗)이 강주단련사(剛州團練使)라 고쳤고, 현종(顯宗)은 길주(吉州)에 귀속시켰더니, 인종(仁宗)이 순안현령(順安縣令)이라 고치고, 고종(高宗)이 위사공신(衛社功臣) 김인준(金仁俊)이 살고 있는 시골이라 하여 지영주사(知榮州事)로 승격시켰다. 본조 태종(太宗) 13년에 예에 따라 지금 이름으로 고쳤고, 세조(世祖) 3년에 순흥(順興)을 없애버리고, 마아령(馬兒嶺) 아래 물 동편 땅인 부석(浮石)ㆍ무짐이[水息]ㆍ관천(串川)ㆍ파문단(破文丹) 4리(里)를 끊어서 이 군에다 귀속시켰다.
0 관청건물(公廨)
객사(客舍) 동헌(東軒) 향사당(鄕序堂) 군관청(軍官廳) 장관청(將官廳) 인리청(人吏廳)
0 성씨
본군 민(閔)ㆍ우(禹)ㆍ애(艾)ㆍ팽(彭)ㆍ동(董), 고(高) 내성(來姓)이다.
연(延) 촌성(村姓)이다. 정(鄭) 봉화(奉化) 김(金) 영월(寧越) 전(全) 정선(旌善).
【풍속】
풍속은 검소하고 진솔함을 숭상한다 관풍안(觀風案). 인물은 번성하고 많았다
문헌(文獻)의 제민루기(濟民樓記).
【산천】
철탄산(鐵呑山) 군의 북쪽 1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귀산(龜山) 군의 서남 1리에 있으며, 군의 옛 이름 귀성(龜城)이 이에 말미암았다.
학가산(鶴駕山) 군 남쪽 40리에 있다.
봉황산(鳳凰山) 군의 북쪽 20리에 있으며, 옛날에는 순흥에 속하였다가,
이제 이 군에 귀속되었다.
마아령(馬兒嶺) 군 북쪽 36리에 있는데, 길이 심히 험하였으며, 충청도 영춘현(永春縣)으로 가는 길이다.
관적령(串赤嶺) 군 북쪽 33리에 있다.
방하수(防河藪) 군 서쪽 2리에 있다.
덕산수(德山藪) 군 남쪽 3리에 있다. ○ 이 고을은 본래 수재를 근심하였는데, 하륜(河崙)이 군수가 되었을 때, 흙을 쌓고 나무를 심어 이 두 수(藪)를 만들었다. 그 뒤에 백성들이 그 이익을 힘입었다.
임천(臨川) 군 서쪽 3리에 있다. 풍기군의 남북쪽 냇물과 옛 순흥(順興) 동쪽 냇물의 하류로, 귀산 밑을 지나 남으로 흘러서 사천(沙川)에 이르러 합하여 예천군(禮泉郡)의 사천(沙川)이 되었다.
사천(沙川) 군의 동쪽 15리에 있으며, 봉화현(奉化縣) 물야계(勿也溪) 하류이다.
『신증』
봉산(烽山) 군 동쪽 15리에있다.
연화산(蓮花山) 군 남쪽 15리에 있으며,
백병산(白屛山) 군 북쪽 50리에 있다.
풍락산(豐樂山) 군 동쪽 56리에 있다.
담보산(韂甫山) 군 북쪽 5리에 있다.
백령(白嶺) 군 남쪽 15리에 있다.
병령(竝嶺) 군 동쪽 20리에 있다.
장암천(藏巖川) 군의 남쪽 12리에 있다.
초수정(椒水井) 군 북쪽 42리에 있다.
【토산】
종이[紙]ㆍ잣[海松子]ㆍ인삼(人蔘)ㆍ송이[松蕈]ㆍ꿀[蜂蜜]ㆍ옻[漆]ㆍ은어[銀口魚]ㆍ
지황(地黃)ㆍ복령(茯苓)ㆍ왕골[莞草]ㆍ석이버섯[石蕈].
【성곽】
귀산성(龜山城)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1천 2백 81척이요, 높이가 9척이며,
그 안에는 우물이 있고, 또 군창(軍倉)이 있다.
【봉수】
성내산(城內山) 봉수 군 북쪽 14리에 있다. 동으로는 안동부(安東府) 내성현(奈城縣)
당북산(堂北山) 봉수에 응하고, 서로는 풍기군(豐基郡) 망전산(望前山) 봉수에 응한다.
【누정】
자민루(字民樓) 객관(客館) 북쪽에 있다. 선덕(宣德) 정미년에 군수 권상(權詳)이 세웠다.
제민루(濟民樓) 귀산(龜山) 남쪽에 있다. 선덕 계축년에 군수 반저(潘渚)가 세웠으니,
곧 의학루(醫學樓)이다. 교수관(敎授官) 문헌(文獻)이 기(記)를 지었다. 소루(小樓) 객사
남쪽에 있다. 천순(天順) 년간에 군수 정종소(鄭從韶)가 세웠다.
『신증』 김종직(金宗直)의 기(記)에, “죽령(竹嶺) 남쪽에 자리잡은 고을 중에 영천이 제이(第二)가 된다. 그 산천은 밝고 빼어났으며, 그 고을 터는 상쾌하고, 그 백성의 풍속은 검소하고 순박하였다. 이 고을에 원으로[製錦] 오는 이가 가끔 군자(君子)가 많았으나 그 중 남의 이목에 표표히 뛰어난 이는 하호정(河浩亭)ㆍ정습인(鄭習仁)ㆍ최원부(崔元傅) 세 사람뿐이었는데, 지금의 수령 오천(烏川) 정 선생(鄭先生)도 역시 그들과 같이 칠 수 있는 이었다. 그는 어버이 봉양을 이유로 대부(臺府)를 사직하고 이 고을을 맡았다. 무릇 그의 시설한 것은 마치 현보(縣譜)를 가진 듯하거니와, 공경으로써 윗사람을 받들고 따사로움으로써 백성을 사랑하고, 정직함으로써 간사한 자를 다스리었다. 넉넉한 자질로 다스리기 쉬운 백성을 교화하니, 비유하건대, 소백정[庖丁]이 날선 칼날로 소뼈 사이를 쳐서 소를 잘 잡듯 하였으니, 어찌 어긋날 걱정이 있겠는가. 1년이 되지 않아 경치가 잘 되고 백성이 화락하였다. 한가한 날 자민루(字民樓)에 올라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이 고을은 사신ㆍ빈객이 죽령을 넘어 왕래하는 요충이다. 사신이 있으면 반드시 빈좌(賓佐)가 있다. 매양 뜨거운 여름을 당하면 집이 찌는 듯 답답하여, 마음을 맑은 바람에 씻어 번민함을 버리려고 생각할 적에, 사신은 이 누(樓)가 있지만 빈좌들은 어디에 거처할 것인가. 이것이 어찌 하나의 결함이 아니겠는가.’ 하고 드디어 사방을 둘러보다가 동남쪽 구석에서 쓸모없는 집 한 채를 얻었으므로 이에 이를 개척하여 새롭게 하되, 그 기둥을 약간 높이고 곁에는 울타리를 두르고, 그 아래에는 땅을 파서 못을 만들어 두어 말[斗]의 고기를 넣고, 못 안에 있는 섬에는 참대[苦竹] 여덟 아홉 그루를 심고 잡꽃을 그 사이에 간간히 심었더니, 난초는 그 기슭을 덮고 부용은 그 물결을 가렸다. 벽을 바를 적에 내가 가서 올라보니, 소나무는 죽죽 벌였고 울타리는 한가했으며, 푸른 이랑 누런 두렁은 수를 놓은 듯 엇갈리어 준조(尊俎)에 빛났다. 뽕나무밭을 매는 자와 농사짓는 이들이 그늘에서 쉬지는 못하지만 소장(訴狀)을 가진 이는 장애될 근심 없어, 산업을 권면하고 농사를 처리하는 정치에 도움 됨이 적지 않았다. 이에 잔을 들어 주인에게 축하하며 말하기를, ‘세상의 수령(守令) 가운데, 게으른 이는 남을 의지할 뿐 스스로 진작하지 못하니, 비록 관청이 퇴락해도 받치고 붙들어 그냥 세월만 보낼 뿐 손 하나 감히 놀리지 못하오. 그리고 강한 이는 그 지혜를 뽐내어 백성의 힘을 가벼이 동원하매 번거롭게 명령을 내리면서 영선(營繕)이 그치지 않으니, 많은 백성들이 매 맞는 것처럼 고통스러워하오. 선생이 한 것은 이들과 같지 않으니, 여력(餘力)에서 나온 것이며, 옛것을 새로이 한 것이며, 어두운 것을 밝게 한 것으로 터럭만치도 백성을 수고시키지 않았고 재물을 소비하지 않았소. 그래서 비록 군청에 있으면서도 이 역사가 있은 줄 몰랐고, 지나가는 길손이 비와 이슬을 피할 수 있으며, 쉴 자리를 염려하지 않게 한 것이니, 이것이 이른바 어진 사람의 행동이라 이르는 것이요. 아, 선생의 뒤를 이어 일을 하는 이가 선생을 모범으로 삼는다면 현명한 수령되기를 바랄 수 있을 것이오.’ 하였다.” 했다. ○ 옛 사람의 시(詩)에, “반마(班馬)로 오르니 억지로 스스로 넓히며, 잔춘(殘春)의 마음은 바로 근심의 실마릴세. 울 밑에서 잔을 드니 붉은 꽃 싫도록 보고, 처마 아래에 발을 거니 푸른 산 받아들이네. 기다란 휘파람은 능히 원별(遠別)을 위로하고, 흩어진 놀이는 잠시 환관(環觀)을 다하네. 오천(烏川)의 풍경은 모두 시의 재료, 읊으면서 한가로움을 얻게 해주네.” 하였다. 『신증』 쌍청당(雙淸堂) 객관(客館)의 동쪽에 있으니, 군수 김세훈(金世勳)이 지었으며, 좌우에 쌍으로 연못이 있다.
【학교】
향교(鄕校) 군의 동쪽 1리에 있으니 하륜(河崙)이 지주(知州)로 있을 때 세웠다.
【역원】
창보역(昌保驛) 군 서쪽 9리에 있다.
평은역(平恩驛) 군 동쪽 26리에 있다.
효대원(孝大院) 군 동쪽 7리에 있다.
문수원(文殊院) 군 남쪽 11리에 있다.
금림원(金林院) 군 동쪽 36리에 있다.
승리원(乘利院) 군 서쪽 10리에 있다.
가이원(加耳院) 군 북쪽 20리에 있다.
장금원(長金院) 군 서쪽 23리에 있다.
덕산원(德山院) 군 남쪽 3리에 있다.
철겸원(鐵鉗院) 군 서쪽 3리에 있다.
0 사찰
행의사(行衣寺) 군 서쪽 20리에 있다.
흑석사(黑石寺) 군 남쪽 15리에 있다.
응석사(凝石寺)ㆍ정불사(淨佛寺)ㆍ부석사(浮石寺) 모두 봉황산(鳳凰山)에 있다. ○ 궁예(弓裔)가 일찍이 이 절에 이르러 벽화(壁畫)에 그려진 신라왕의 상(像)을 보고 칼을 뽑아 쳤는데, 고려(高麗) 때에 와서도 그 흔적이 그냥 있었다. 이것은 생시에 버림을 당했던 것을 원망한 데에서 나온 것이다. ○ 《보한재집(補閑齋集)》에 “고려 사천감(司天監) 이인보(李寅甫)는 경주도(慶州道) 제고사(祭告使)로서 산천(山川)을 돌며 제사지냈는데, 일이 끝나 장차 돌아가려던 저녁에 부석사(浮石寺)에 닿았다. 객우(客宇)가 조용하고 좌우에 사람이 없었는데, 홀연히 한 여인이 언뜻 마루 사이로 보이더니 좀 뒤에 춤추듯 마당을 돌아와서 절을 했다. 절을 마친 뒤에 섬돌을 올라 방에 들어와 앉았다. 사천감은 비록 괴이하게 생각했지만 자색(姿色)이 뛰어났으므로 차마 거절치 못했다. 여인이 말하기를, ‘제가 사는 곳은 여기서 멀지 않아요. 높으신 뜻을 혼자 사모해서 왔습니다.’ 하고, 그 응대(應對)함이 총민하였다. 사흘 묵고 떠나서 우정(郵亭)에 숙박했는데, 여인이 하느적 하느적 따라왔다. 사천감이 말하기를, ‘왜 또 왔소.’ 하였더니, 여인이 말하기를, ‘뱃속에 당신의 애기가 있어요. 다시 하나를 더하고자 해서 온 것이어요.’ 하였다. 새벽이 되자 작별을 고하고 흥주(興州)로 들어갔다. 막 잠자리에 들려고 하는데 여인이 또 왔다. 사천감은 후환이 될까 해서, 여인을 보고도 모르는 척하고 상대하지 않았더니 여인은 발끈 골을 내면서 방문을 나가는데, 회오리 바람이 땅을 말아 올려 집의 문짝 하나를 부서뜨리고 나뭇가지를 꺾어놓고는 갔다.” 하였다.
『신증』 당 나라 고종(高宗 이치(李治)) 의봉(義鳳) 1년에, 신라 문무왕(文武王)이 스님 의상(義相)에게 하명하여 이 절을 창건하고 부석(浮石)이라 이름 지었다. 동쪽에는 선묘정(善妙井)이, 서쪽에는 식사룡정(食沙龍井)이 있는데, 가물 때 기도드리면 감응이 있었다. ○ 박효수(朴孝修)의 시에, “새 울고 꽃 져서 꽃다운 나이 이우는데, 나그네 길 시간은 빨리도 가네. 어느 날 마셔보리, 용정(龍井) 물 차 맛을, 마루에 가득한 솔과 달 인연을 함께 하고자.” 하였다.
【사묘】
사직단 군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 군 북쪽 7리에 있다. 여단 군 북쪽에 있다.
【고적】
선곡현(善谷縣) 김부식(金富軾)이 말하기를, “본래 고구려의 가곡현(賈谷縣)이다.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고치고 내령군(奈靈郡)에 귀속시켰다.” 하였다. 지금은 자세하지 않다. 무신탑(無信塔) 군(郡)에 무신(無信)이란 탑이 있다. 공민왕(恭愍王) 때, 정습인(鄭習仁)이 지군(知郡)으로 있으면서 말하기를, “이상하도다. 악목(惡木)에서는 쉬지 않고 도천(盜泉)은 마시지 않는다 하니, 이는 그 이름이 나쁘기 때문이다. 탑은 고을에서 쳐다볼 수 있게 우뚝 서 있는 것인데, 어찌 무신(無信)을 표방한단 말인가” 하고서, 쪼아 없애게 하고는 그 벽돌로 빈관(賓館)을 지었다. 신돈(辛旽)이 이를 듣고 노해서 계림옥(鷄林獄)에 구속하고 다시 전법(典法)으로 얽어 사지(死地)에 처치하려고 했다. 정신(廷臣)들이 가련히 여겨 이를 구원해 주었으나 서인(庶人)으로 폐했다. 시사기(市肆基) 신라 임금이 이곳에 오랫동안 주필(駐蹕)하다가 돌아갔다.
시사(市肆)의 터는 지금 군 서쪽 2리에 있다.
날이군(捺已郡) 신라 소지왕(炤智王)이 이 군에 행행(行幸)했다. 고을 사람 파로(波路)에게 벽화(碧花)란 16세 된 딸이 있었는데, 예쁘고도 고왔다. 그 아비가 이를 잘 꾸며서 가마에 태우고 빛깔 고운 비단으로 휘장을 두르고서 임금께 바쳤다. 임금이 찬물(饌物)이라고 여기고 열어보니 미녀였다. 그 뒤로는 여러 번 그 집으로 미행(微行)했다. 중도에 고타군(古陁郡)이 있는데, 하루는 한 노파의 집에 묵게 되었다. 묻기를, “나랏 사람들은 임금을 어떻다고 하오.” 하니 노파가 말하기를, “모두들 성인(聖人)이라고들 하지만, 저만은 이 말을 의심스럽게 여깁니다. 듣건대, 임금께서 날이(捺已)의 계집에게 가노라고 누차 미복(微服)으로 다닌다고 합니다. 무릇 용(龍)이 고기의 옷을 입고 있으면 어부에게 제어당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임금께서는 만승(萬乘)의 존엄으로써 스스로 신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를 성인(聖人)이라 한다면 성인되지 못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은 이 말을 듣고 크게 부끄러이 여기고, 남몰래 그 계집을 데려다 궁중에 숨겨 두었다.
벌지부곡(伐只部曲) 군 동쪽 15리에 있다.
마구부곡(馬駒部曲) 군 북쪽 60리에 있다.
용산부곡(龍山部曲) 군 서쪽 20리에 있다.
임지도부곡(林只刀部曲) 군 동쪽 15리에 있다.
성을량부곡(省乙良部曲) 군 동쪽 15리에 있다.
오등부곡(烏等部曲) 군 북쪽 30리에 있다.
유수부곡(楡水部曲) 군 북쪽 30리에 있다.
답곡부곡(沓谷部曲) 군 북쪽 30리에 있다.
이곡부곡(泥谷部曲)ㆍ내소리부곡(奈小里部曲) 정종소(鄭從韶)가 수령으로 있을 때, 군지(郡誌)를 지으면서, “이곡(泥谷)은 바로 지금의 며전리(㫆田里)이니 군 서쪽 25리에 있고, 내소리(奈小里)는 바로 지금의 사내리(沙奈里)이니 군 동쪽 1리에 있다.” 하였다. 그러나 두 부곡(部曲)은 예와 이제의 명칭이 같지 않으니 어디서 고증하여 이런 말을 하였는지 모르겠다. 『신증』 장군곡(藏軍谷) 군 동쪽 8리에 있다. 속담에 전하기를, “고려 태조(太祖)가 나라를 통합할 때 오천(吾川) 사람들이 불복하므로 이곳에 병사를 숨겨두었다가 이를 격파했다.” 한다.
【명환】
고려 정습인(鄭習仁) 공민왕(恭愍王) 때, 전교령(典校令)으로 지주(知州)로 나갔다. 시무(視務)하려 할 제, 아전이 고사(故事)에 따라 소재도(消災圖)를 찾아가 향을 사를 것을 청하였다. 습인이 말하기를, “인신(人臣)이 불륜(不倫)한 일을 하지 않거늘 재앙이 어떻게 생긴단 말인가. 무망(無妄)하기보다는 순수(順受)할 뿐이다.” 하고서 아전에게 명하여 철거시켰다. 본조 하륜(河崙) 지주(知州)였다.
【인물】
본조 김증(金曾): 과거에 두 번 급제했다. 벼슬은 금산 군수(金山郡守)에 이르렀다.
김담(金淡): 증의 아우이다. 두 번 급제했다.
벼슬은 이조 판서에 이르렀으며, 시호(諡號)는 문절(文節)이다.
【효자】
고려 문재도(文載道): 홍무(洪武) 임술년(壬戌年) 봄에 왜적(倭賊) 수천 명이 본군(本郡)에 침략해 와서 사람을 많이 죽였다. 재도는 그 아버지를 업고 산골에 들어가 숨었는데, 왜적이 찾아와 그 아버지를 쏘아 맞혔다. 재도가 살촉을 뽑고 칼을 휘둘러 왜적을 베었더니 왜적들이 굴복했으므로 부자가 목숨을 온전히 했다. 이 일이 임금께 알려져 정려(旌閭)하였다. 벼슬은 평해군사(平海郡事)에 이르렀다.
본조 김이음(金爾音): 과거에 급제했고 벼슬은 관찰사(觀察使)에 이르렀다. 일찍이 어버이를 위해 3년간 여묘(廬墓)했으므로, 태조(太祖) 때 정려하였다.
우제(禹濟): 벼슬은 감정(監正)에 이르렀다. 효자(孝子)로써 정려하였다. 『신증』 안수철(安壽鐵) 그 아버지가 광질(狂疾)에 걸렸으므로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피를 약에 섞어 먹였더니 병이 나았다. 일이 임금께 알려져 정려하었다.
【제영】
휴가초초과귀성(携家草草過龜城) 정몽주(鄭夢周)의 시에, “가족을 데리고 허둥지둥 귀성을 넘는데, 나그넷길이라 아무도 성명을 모르노라. 신세가 기구하여 살쩍머리 셋거늘, 내일 아침에는 또한 영마루를 넘어 갈까나.” 하였다. 일수영회포고성(一水縈廻抱古城) 김효정(金孝貞)의 시에, “한 줄기 물은 휘돌아 옛 성을 안아 흐르나니, 산의 형세는 곧 바로 거북의 이름 얻었다.” 하였다. 계분연미음변인(溪分燕尾吟邊咽) 윤자영(尹子濚)의 시에, “시내는 제비꼬리처럼 갈려 읊음 속에 흐느끼고, 산은 까치 머리되어 그림 가운데 모여든다.” 하였다.
대동지지(大東地志)》
【방면】
산이(山伊) 동쪽으로 처음은 5리이고, 끝은 10리이다.
봉향(奉香) 처음은 5리이고, 끝은 10리이다.
망궐(望闕) 끝은 10리이다.
사흥(司興) 남쪽으로 처음은 5리이고, 끝은 10리이다.
두전(豆田) 남쪽으로 처음은 10리이고, 끝은 30리이다. 권선(權先) 위와 같다.
호문(好文) 서남쪽으로 처음은 10리이고, 끝은 30리이다.
신혈(辰穴) 남쪽으로 처음은 25리이고, 끝은 40리이다.
적포(赤布) 남쪽으로 처음은 10리이고, 끝은 20리이다.
어화(於火) 동남쪽으로 처음은 10리이고, 끝은 20리이다.
천상(川上) 동남쪽으로 처음은 27리이고, 끝은 40리이다.
말산(末山) 동쪽으로 처음은 10리이고, 끝은 30리이다.
임지(林只) 동쪽으로 처음은 20리이고 끝은 60리인데, 봉화(奉化) 남쪽 경계와 안동 재산면 (才山面) 서쪽 경계를 넘어 있다.
북면(北面) 처음은 30리이고, 끝은 50리인데, 소천촌(韶川村)은 순흥(順興) 이부석면(二浮石 面)의 경계를 넘어 있으며, 답곡촌(沓谷村)은 동부(同府) 일부석면(一浮石面)의 경계를 넘어 있고, 교각촌(校各村)은 동부 동원면(東元面)의 경계를 넘어 있다. 우측 두 촌의 북쪽은 영 춘(永春)과 접해 있다. 오록(梧鹿) 동북쪽으로 50리이며, 순흥(順興) 삼부석면(三浮石面)의 경계를 넘어 있고, 북쪽은 영춘과 접해 있다.
벌지부곡(伐只部曲)은 동쪽으로 15리이며,
용산부곡(龍山部曲)은 서쪽으로 20리이고,
마륜부곡(馬輪部曲)은 북쪽으로 60리이다.
임지력부곡(林只力部曲)은 즉 임지면이며,
성을량부곡(省乙良部曲)은 동쪽으로 15리이다.
오등부곡(烏等部曲)ㆍ유수부곡(楡水部曲)은 북쪽으로 30리이다.
답곡부곡(沓谷部曲)은 북쪽으로 30리인데, 즉 답곡이며
이곡부곡(泥谷部曲)은 지금의 미전리(彌田里)이고 서쪽으로 25리이다.
내소리부곡(奈小里部曲)는 지금의 사내리(沙奈里)이며, 동쪽으로 1리이다.
【봉수】
창팔래산(昌八來山) 동쪽으로 30리이다.
【방면】 읍창(邑倉)ㆍ동창(東倉) 동쪽으로 30리이다. 북창(北倉) 오록면(梧鹿面)에 있다.
【토산】 닥종이[楮].
【누정】 영훈정(迎薰亭) 남쪽으로 3리이다.
【사원】 이산서원(伊山書院) 선조(宣祖) 계유년에 건립하고 갑술년에 사액하였다.
이황(李滉) 문묘(文廟) 조에 있다.
(여지도서)
0 坊里
奉香面距官門五里. 望闕面距官門五里. 山伊面距官門十里. 可興面距官門十里. 豆田面距官門三十里. 好文面距官門三十里. 權先面距官門三十里. 辰穴面距官門四十里. 赤布面距官門三十里.
於火面距官門二十里. 川上面距官門五十里. 林只面距官門六十里. 末巖面距官門三十里.
梧麓面距官門五十里
道路
自官門東距末巖面三十里自末巖面至禮安界洪亭子十五里西距臨川五里自臨川至豐基界昌保驛十里南距平恩驛三十里自平恩驛至安東界金林院峴十五里北距韂甫山五里自韂甫山至順興界城內山十里東北距望洞五里自望洞至順興界鍤峴五里西南距可興面十里自可興面至安東界豆田面二十里
0 建置沿革
本高句麗 奈己郡 奈一作㮈 新羅婆娑王取之景德王改奈靈郡 高麗成宗改剛州團練使顯宗屬吉州仁宗改順安縣令高宗以衛社功臣金仁俊之鄕陞知榮州事本朝太宗十三年例改今名世祖三年省順興以馬兒嶺下水東之地浮石水息串川破文丹四里割屬于郡肅宗十年癸亥復設順興府浮石以下四里還屬順興府
0 郡名
奈己 奈靈 剛州 順安 榮州 龜城
0 形勝
小白鎭其北鶴駕拱 其南龜溪 西流沙川東注 山川明秀 邑居爽塏 金宗直 小樓記
0 城池
龜山城 石築周一千二百八十一尺 高九尺 內有井 又有軍倉 今廢
0 官職
郡守 文蔭四品. 座首一人. 別監二人. 軍官四人. 人吏二十六人. 知印十二人. 使令十二名.
官奴二十七名. 婢二十五口
0 山川
鐵呑山 在郡北一里自鳳凰山來爲鎭山山勢向南走形如走馬故名以鐵呑蓋取鉗勒駐馬之意也 龜山 在郡西南一里平地獨立不知來脈郡之舊號龜城以此 鶴駕山 在郡南四十里自靈芝山來 鳳凰山 在郡北二十里自安東太白山來舊爲順興之地今屬于郡今還屬順興府 馬兒嶺 在郡北三十六里自安東太白山來道甚險阻至忠淸道永春縣之路今屬順興府 串赤嶺 在郡北三十三里自安東太白山來今屬順興府 防河藪 在郡西二里 德山藪 在郡南三里郡素患水災河崙 知郡時築土植木成此二藪自是民賴其利 臨川 在郡西三里豐基南北川及順興東川之下流過龜山下南流合于沙川爲醴泉郡沙川 沙川 在郡東十五里奉化縣勿也溪下流 舊增烽山 在郡東十五里自鳳凰山來 蓮花山 在郡南十五里自豐基龍巖山來 白屛山 在郡北五十里自安東太白山來今屬順興府 豐樂山 在郡東五十六里自安東文殊山來 韂甫山 在郡北五里自鳳凰山來 白嶺 在郡南十五里自鳳凰山來 竝嶺 在郡東二十里自安東文殊山來 藏巖川 在郡南十二里卽臨川下流 椒水井 在郡北四十二里今屬順興府 新增靈芝山 在郡東三十里自豐樂山來上有祈雨壇 東龜臺 卽龜山南麓巖壁斗起如龜飮水之狀 西龜臺 與東龜臺隔水相對
0 姓氏
本郡. 閔 禹 艾 彭 蕫 高 來 延
村. 鄭 奉化 金 寧越 全 旌善
新增 金 咸昌. 全 沃川. 金 禮安. 權 安東. 宋 冶城. 吳 高敝. 李 公州. 金 豐山. 李 慶州.
朴 羅州. 裵 星州. 張 仁同. 趙 漢陽. 朴 務安. 南 英陽 .李 直城. 李 永川. 黃 昌原. 柳 全州 金 淸道. 金 延安. 鄭 淸州. 丁 羅州. 成 昌寧. 朴 高靈. 琴 奉化. 金 義城 .李 德水. 羅 壽城
0 風俗
俗尙儉率 觀風案 人物富庶 文獻 濟民樓記
0 學校
鄕校 在郡東三里 .河崙 知郡時建新增萬曆丁酉天將茅國器領兵過本邑就謁 文廟極言校地形勢之勝但以白虎低微仍成蹊逕爲欠崇禎乙亥進士朴䙕茂議于鄕塞之成阜金安國明倫堂詩曰憶㤁銀臺掌演綸耳邊天語尙如新丁寧爲向諸生道小學工夫日撿身
0 壇廟
社稷壇 在郡西三里 文廟 在鄕校 城隍祠 在郡北七里
新增
移設于郡南五里 厲壇 在郡北三里
新增
伊山書院 嘉靖戊午郡守 安瑺建書堂 于郡東山伊里 隆慶壬申享文純公 李滉 萬曆甲戌賜額後以院基狹隘 移建于郡東十五里許 院號則仍舊齋扁學規皆書堂 時李滉所定而院有 觀物堂 文純公 李滉詩曰觀物須從觀我生昜中微旨邵能明若敎舍已惟觀物俯仰鳶魚亦累情
○李滉記曰榮郡據小白之南地靈而風美號稱人材之淵藪其俗尙文藝尤好爲群居肄業名之曰居接一境之士咸萃焉亦有自他方負笈而來者雖多不厭皆官措供給殆無闕歲其來尙矣舊有穀若干石以養秀士乃 正德年間郡守 李侯沆所置差人典守久而不替蓋拳拳乎樂育之意非他郡所及而顧未有館舍之作每一聚會卽假容於郡之醫院旋會旋罷斯爲未盡善也, 嘉靖甲寅冬順興 安侯瑺來莅是郡勤謹職事政通弊祛尤以右文興學激勸人材爲先務郡之諸士以及父老相與謀曰我侯文成公之後也觀其所以存諸中與夫施諸政事者其能知治本以不爽先志乃如此吾鄕學舍之作若以請於我侯宜無不成者時哉不可失也遂以白侯侯慨然曰是固吾志矧諸君之所以責我者如是我何敢不力乃卜基於郡之東距郡治六七里而蕃川一峴截然爲之蔽其中曠絶寥閴初不與城塵人事相涉焉侯於是量事功計徒役辦需費父老諸生莫不感侯之義出穀與物有差俾士人全應璧賓守儉安彭壽等爲之監董經始於戊午七月歷四朔而功告訖爲屋三十二間又移搆養正堂於其側堂故郡守琴侯椅所創以訓童蒙者也於是立規約定員額增贍穀數百餘石良賤若干口乃大會儒生以落成焉旣而咸曰學則成矣不可以無名與記乃遣儒生張壽禧來屬於滉且曰吾鄕先正可祠於學者未有定論於書院之制斯爲未備欲姑以書齋名之何如滉辭之不得則復之曰古之書院所祀豈盡其鄕之人哉有祀先聖先師者亦有不立祠廟者惟視其力從其宜而已今玆學也猶未遑於置田一事置祭田以定所祀且俟復日而議之未爲不可第觀其立學規模實倣於書院之制何必避其名而遷就於書齋之稱乎請因其本地之號而稍變之
名曰伊山書院 其正堂曰敬止 東齋曰誠正 西齋曰進修 門曰志道 臺曰觀物 庖廚庫藏 無一不具自是士之來遊者無問於遠近其至如歸而無向來假容旋罷之患矣抑嘗聞之人之有道也無敎則近於禽獸聖人有憂之敎以人倫三代之學皆所以明人倫也至於後世聖王不作古道崩滅而文詞科擧利祿之習潰人心術馳狂瀾而莫之回則內而 國學外而鄕校皆昧然莫知其敎漠然無事乎學矣此有志之士所以發憤永歎抱負墳策而遁逃於山巖藪澤之中相與講所聞以明其道以成已而成人則書院之作於後世勢不得不然而其事之可尙爲如何哉故昉於宋朝盛於元 明而吾東魯千一之運亦創見於近代繼作於其後 朝廷又從而奬成之豈不爲斯道之大幸耶雖然尙不以老師宿儒爲山長以主敎而倡率焉故入院之士徒有斐然狂簡之志而竟未免奪於習俗之卑忘聖人之敎失後賢之意然則今何所從事而可乎本之五倫而以窮理篤行爲學者朱先生白鹿洞規也志伊學顔而誠明兩進敬義偕立者又其見於賦詠者然也仁以傳道而欲濟斯民張南軒所望於岳麓諸子者重矣養其全於未發之前察其幾於將發之際善則擴而充之惡則克而去之又朱先生示夫石鼓諸生以下學之功者至矣故於是并取而爲諸君誦焉如使異日 朝命設山長得鉅儒而倡敎其所以爲敎者亦不過是而實具於諸君所性之中矣尙何事於他求哉諸君其勉之
0迃溪書院 在郡東三十里 隆慶庚午創建 康熙癸卯享 贈參判 李德弘
0義山書院 在郡西二十五里 萬曆庚戌創建康熙甲辰享 贈參判 李介立
康熙己未追享右尹 金應祖
0鄕賢祠 在郡南五里 萬曆乙卯 創建天啓辛酉 享文節公 金淡. 大司諫 朴承任.
吏曹參判 金玏. 康熙己酉 追享吏曹參判 金榮祖
0三峯書院 在郡東十五里 崇禎庚寅創建 順治甲午 享觀察使 金爾音 大司憲 李瀣
贈左承旨 金蓋國 贈左承旨 金隆
0壯巖書院 在郡東五里 康熙癸亥創達 享忠正公 洪翼漢 忠貞公 尹集 忠烈公 吳達濟
泗溪書堂 在郡西三里 順治甲午創建康熙癸未 享司諫 黃孝恭 校理 羅以俊
0 公廨
客舍 東軒 鄕序堂 軍官廳 將官廳 人吏廳
0 倉庫
軍器庫 大同庫 司倉 東倉 在郡東三十里 北倉 在郡北五十里
0 物産
紙 海松子 松蕈 添 銀口魚 地黃 茯苓 莞草 人蔘 蜂蜜 石蕈 三種所産之土今屬順興
0 驛院
昌保驛 在郡西九里. 東距平恩驛三十九里. 南距安東幽洞驛二十里. 西距順興昌樂驛三十里.
北距順興竹洞驛二十里. 大馬一匹. 中馬三匹. 卜馬十匹. 驛吏二十六人. 奴十名婢三口.
平恩驛 在郡東三十里 南距安東甕泉驛二十里. 西距本郡昌保驛三十九里.
大馬二匹. 中馬二匹. 卜馬十匹. 驛吏九十七人,
孝大院 在郡東十七里. 文殊院 在郡南十一里. 金林院 在郡南三十六里. 垂利院 在郡西十里
長金院 在郡西南二十三里. 德山院 在郡南三里. 鐵鉗院 在郡西三里.以上七院今廢
加耳院 在郡北二十里 今屬順興府
0 牧場
無分養馬二匹 每年八月受 來翌年四月上送本寺
0 烽燧
城內山烽燧 在郡北十四里 東應順興沙郞堂 西報豐基望前山相距二十里
新增 昌八來山烽燧 在郡東三十里 東應禮安綠轉山 北報奉化龍站山 相距二十里
0 樓亭
*字民樓 在客館北宣德丁未知郡 權詳所建今廢 濟民樓 在龜山南宣德癸丑知郡 潘渚建乃醫學樓也敎授官文獻爲記 小樓 在客館南天順中郡守 鄭從韶建舊增金宗直記邑于竹嶺之陽榮爲第二其山川明秀其邑居爽塏其民俗儉易往往製錦于是者類多君子人而其表表在人耳目惟河浩亭暨鄭公習仁 崔公元傳三人而已今守烏川鄭先生亦其齊驅者也以親故辭臺府出爲是郡凡所施設似若有縣譜諄諄以奉上煦煦以愛民侃侃以嫉邪用有㭲之資化易治之民譬如庖丁之以無厚入有間夫焉有扞格之患哉不期年而政通人和暇日登字民樓喟然曰郡爲使華賓客踰嶺往來之衝有使華必有賓佐每當畏景窓櫳蒸鬰思欲濯淸風而去瞀忞使華則是樓在焉賓佐何居斯無奈一欠乎遂環視觀宇於東南隅得宂舍一區乃拓而新之稍崇其柱傍繞以檻其下闕隙地爲池種魚數斗池中有島植以苦竹八九科間以新花蘭芷被其岸芙蓉冒其波方塗塈之始余過而登焉蒼松伍伍籬落閑閑綠疇黃壠如繡相錯暎帶尊俎以至桑耘者不得休于蔭牒訴者無患阻于障有助於勸督剖決之政爲不少於是執爵而慶於主人曰世之守令懶者爲人所持不克自振雖官府頹頓撑扶以了歲月而莫敢一搖手强者矜其智巧輕用民力諉以承稟營繕不休至使千室如被榜橽先生之爲則不然出於餘力卽舊而新因闇而廓一毫不以勞於民費於帑雖在郡朝亦不自知有是役也而過客得避溽濕無憂於救暍玆其所謂仁人之擧也哉噫踵先生而至有所作爲者動以先生爲法則庶乎爲賢守令矣○前人詩班馬登臨强自寬殘春心緖卽憂端墻頭把酒看紅膩簷角鉤簾納碧㠝長嘯可堪勞遠別浪遊聊欲盡環觀烏川物色供詩科贏得吟哦賭一閑○令廢
舊增
*雙淸堂 在客館東郡守 金世勳所建堂之南北皆有蓮池新增文純公 李滉詩大葉盤盤小葉田紅粧明媚擁蒼烟微風颭蓋時時動急雨跳珠箇箇圓晦父欣逢數君子濂翁愛說濯淸漣憑闌盡日追餘賞陟覺襟懷已灑然○金尙憲詩昨夜凉風襲桂堂敗荷千柄倒回塘幾家黃葉秋容老一壁靑燈旅枕凉幽興未尋潘岳賦淸談先據庚公床多君美政能消劇坐嘯蘇州燕寢香
新增
*迎薰亭 在郡南三里郡守 鄭從韶搆 初名 南亭 文純公 李滉 名以迎薰手書揭額
* 同樂亭 在郡衛前郡守 洪柱世搆 前有方池池中種蓮又有三島
* 龜鶴亭 在郡西三里西龜臺下 參判 백암 金玏所搆 東對東龜 南挹鶴鴐 下臨龜川泉石 絶勝
서애 柳成龍 詩
繞郭沿溪細逕賒, 官橋村樹巧歲遮 苔侵古石玄衣濕. 峀列晴霄彩翼斜.
異地逢場眞不偶, 幽居占勝儘堪誇,主人高節如淸獻, 龜鶴相隨老一涯
지봉 李晬光 詩
曲曲池臺面面山, 一亭形勝盡圖看, 泥塗曳尾龜同樂, 月露棲身鶴共閑,
秋滿菊花霜後逕, 夜深漁火雨中灣, 何時杖屨尋眞隱, 壑霧溪風入醉顔
택당 李植 詩
卽今林壑小神仙, 曾是天門蓍蔡賢, 山勢沖虛遙拱檻, 巖形坼兆逈臨川,
投身綠水蹤藏六, 飮露瑤池歲閱千, 安得陪公遊賞地, 共龜呼吸鶴蹁躚
0寺剎
* 行衣寺 在郡西二十里今廢
* 黑石寺 在郡東十五里
* 凝石寺 在郡南十五里 淨佛寺 今廢
* 浮石寺 在鳳凰山 弓裔嘗至此寺見壁盡新羅王像拔劍擊之至高麗時其刃跡猶在蓋怨生時見棄也 補閑齋集 高麗 司天監 李宣甫以慶州道祭告使歷祀山川旣畢將還暮抵浮石寺客宇瀟然無左右忽 有女乍見廊廡間小選蹁躚來庭下拜之拜訖升自階往就室居焉監雖怪之以姿色絶代不忍拒也女曰 妾所居去此不遠竊慕高義以來其應對惠利爲留三日而出止郵亭宿焉女苒苒來監日何復來爲女曰 腹有君之息一矣乞復添一所以至耳比曉告別行入興州將宿女復來監恐爲後患遂面之而不省女怫 然作色卽出戶回風卷地擊毁廳事間一扉截樹抄而去舊增唐高宗儀鳳元年新羅文武王命僧義相創 是寺名曰浮石東有善妙井西有食沙龍井旱則禱雨有應朴孝修詩鳥啼花落減芳年客路光陰去忽然 何日試茶龍井水滿軒松月共夤緣 ○今屬順興府
新增
* 陳月寺 在郡南四十里
0 榮川
古蹟
* 善谷縣 金富軾云本高句麗
* 賈谷縣 新羅景德王改名屬奈靈郡今未詳
* 無信塔 郡有塔名曰無信恭愍朝鄭習仁爲知郡曰異哉惡木不息盜泉不飮惡其名也烏有巍然其形爲 一邑所瞻視而以無信表之者命刻日夷之用其甎修賓館辛旽聞而怒繫鷄林獄移繫典法欲置死地廷 臣憐之營救得免廢爲庶人
* 市肆基 新羅王駐驆于玆久而乃返市肆之基在今郡西二里
* 㮈已郡 新羅炤智王幸此郡郡人波路有女碧花年十六美而艶其父盛餙之置轝中羃以色綃獻之王以 爲饌物開視卽美女也其後累微行至其第幸之路經古陁郡宿於一老嫗家問曰國人以王爲何如主嫗 曰衆以爲聖人妾獨疑之竊聞王幸㮈已女累微服而來夫龍變魚服爲漁者所制今王以萬乘之尊不自 愼重此而爲聖孰非聖乎王聞之大慙潛逆其女置於宮中
* 伐只部曲 在郡東十五里 馬駒部曲 在郡北六十里
* 龍山部曲 在郡西二十里 以上三部曲 今屬順興府
* 林只刀部曲 在郡東十五里
* 省乙良部曲 在郡東十五里
* 烏等部曲 在郡北三十里
* 楡水部曲 在郡北三十里
* 沓谷部曲 在郡北三十里 以上三部曲 今屬順興府
* 泥谷部曲 奈小里部曲 鄭從韶爲郡時 作郡誌云泥谷卽今旀田里則在郡西二十五里奈小里卽今沙 奈里則在郡東一里然二部曲古今稱號不同未知何所考而爲是說
舊增
* 藏軍谷 在郡東八里諺傳高麗太祖統合時吾川人不服藏兵于此擊敗之
0 名宦
高麗
* 鄭習仁 恭愍朝以典校令出知州將視事吏以故事請詣消災圖焚香習仁曰人臣不蹈非彝災何由生若 其旡妄順受而已命吏撤去
本朝
* 河崙 知州 新增尹祥 永樂甲辰知郡有治行文純公 李滉稱爲近代師儒之最
* 金守溫 景泰甲戌知郡 有治績
* 李賢輔 在任一年節補積年逋糴取券焚之民稱之
* 安瑺 嘉靖乙卯到任治六年創建伊山書院定立學規奬育人材
* 郭越 隆慶丙寅到任治四年吏畏民懷有善政碑
* 趙纉韓 萬曆乙卯到任治三年爲政嚴明擒捕獷賊李景起近邑賴以安息
영천군수 재임시 도사공 김지선의 청으로 이산서원기를 지었다.
0 人物
本朝
* 金曾 再中科第官至金山郡守
* 金淡 曾之弟再登第官至吏曹判書謚文節
新增
* 朴承任 羅州人 文正公 尙衷之後 俱中司馬 同年登第 以弘文正字 賜暇湖堂 官至大司諫
遊學文純公 李滉之門 學問淵深 文章渾浩 又精於星筭 隆慶己巳以賀至赴京師 前此使臣爲鴻 臚寺所觸怒貶降使臣班列於僧徒雜類之下 承任至卽呈文禮部往復論辨力爭遂得復立舊班如初
天啓辛酉入享鄕賢祠
* 黃孝恭 昌原人官至司諫 嘗遊文純公 李滉之門 有易範圖說康熙癸未 入享泗溪書堂
* 金功 文節公 淡之玄孫 司馬 文科 官至吏曹參判 早遊文純公 李滉門下 爲士類推重
壬辰之亂爲本道安集使 諸郡賴安宣廟賜敎褒之光海朝諫立奉慈殿削職 歸老田里後以宣武原從 功臣 贈吏曹判書 萬曆壬寅以 賀節使朝天 神宗皇帝賞賜大學衍義一帙 印欽文之璽
當宁丙寅特 命其後孫 弘運 進冊取覽 又賜新件 命承旨寫 特旨于卷首 天啓辛酉 入享 鄕賢祠
* 金蓋國 延安人蘿葍山人 濤之後 司馬 文科 官至郡守夫 性至孝持身淸介 壬辰之亂爲義兵將 孝廟朝以孝行 贈承旨 順治甲午 入享三峯書院
* 金隆 咸昌人 性方嚴以禮律 已弱冠遊文純公 李滉門下 以學行 除參奉後 贈左承旨
順治甲午 入享于三峯書院
* 李德弘 永川人 弱冠以篤行 見重於文純公 李滉所著有經書質疑心經質疑等書 官至縣監後
贈參判 康熙癸卯入享迃溪書院
* 金鸞祥 淸道人 登第 官至大司諫 以乙巳名賢入名臣錄
* 李廷憲 公州人壬辰戰死釜山 當宁壬戌 贈左承旨 旌閭
* 李介立 慶州人文靖公 達衷之後 中司馬 操履雅飭事親至孝訓誨不倦 宣廟朝 與張顯光 同薦 遺逸官至縣監後 贈左承旨 肅廟朝加 贈參判康熙甲辰入享于義山書院
* 金榮祖 豐山人參判 楊震之玄孫 司馬 文科 官至吏曹參判 當光海時十年杜門
仁廟返正後始出仕丙子變後獨請陳奏 天朝又斥山城錄勳之非 兄弟八人 皆中司馬 五登文科
康熙己酉入享鄕賢祠
* 金應祖 榮祖之弟 登司馬 文科 官至右尹 天品甚高操 行端潔
早遊文康公 張顯光之門 得性理之學 孝廟在東宮時 仁廟嘗問書筵官有了經義者
孝廟以應祖對文章明白簡嚴所著有四禮問答 追遠錄 山中錄等書康熙己未入享義山書院
* 羅以俊 壽城人 司馬 文科 官至司諫 淸行自守 晩節恬退 丙子亂館中諸生皆散 以俊與 金鋼 金錕奉五 聖位版權安于南漢 行在所 康熙癸未 入享泗溪書堂
* 孝子
高麗
* 文載道 洪武壬戌春倭賊數千冠本郡殺人甚衆載道負其父避匿山中賊尋至射中其父載道發鏃奮劍 斬賊賊徒披靡父子得全事 聞旌閭後官至平海郡事
本朝
* 金爾音 登第 官至觀察使 嘗爲親廬墓三年 太祖朝事 聞旌閭 順治甲午入享三峯書院
* 禹濟 官至監正以孝子 旌閭
舊增
* 安壽鐵 其父得狂疾自斷手指和藥而進病愈事 聞旌間
新增
* 鄭道昌 文忠公 夢周之後 十六其父爲賊所殺誓死復讐積十一年不脫服不娶妻不顧生業窮捕四方 盡殺賊徒 顯宗朝事 聞旌閭
* 烈女康召史 通禮 權斗文之妾 壬辰倭亂 斗文爲平昌守 賊拔劍擊 斗文召史以身蔽之賊不忍害 仍爲所虜召史恐辱及自墜絶崖而死事 聞旌閭
* 金氏 生員閔鋮之妻 正郞 友益之女 夫歿絶不飮食而死事 聞旌閭
* 金召史 校理 朴宗阜妾參奉 孝先之庶女也其夫死水醬不入口數月而死事 聞旌閭
携家草草過龜城 鄭夢周詩云云逆旅無人識姓名身世嶮巇雙鬢改明朝又試嶺頭行 一水 縈廻抱古城 金孝貞詩云云山形端合得龜名 溪分燕尾吟邊咽 尹子榮詩云云山作鴉鬤盡 裏欑
0 旱田
元帳付一千九百七十五結七十八負一束內各樣免稅陳雜頉并八百九十六結九十五負回束己卯時起一千七十八結八十二負七束
0 水田
元帳付一千二百三十二結十負九束內各樣免稅陳雜頉竝七百四十五結六十九負三束己卯時起四百 八十六結四十一負六束
0 進貢
人蔘 淸蜜 蒲黃 單乾雉 生獐 生雉 滿花席 黃花席 彩花席 別紋席
0 糶糴
元會米二千七石七斗四刀八合九夕雜穀五百三十石十斗三刀四合賑色米一千一百二十七石十斗七 刀八夕雜穀五千三百二十五石二斗一刀二合三夕常平廳米一千七十八石十斗五刀七合一夕雜穀一 萬一千二十三石二斗九刀五夕私賑米五石十斗四刀五合六夕雜穀一千一百七十六石八斗一合別會 米九刀八合一夕雜穀五百七十五石十二斗二刀四合十月關倉十二月封倉己卯條爲准
0 田稅
米二百六十六石四斗三合六夕太二百四十四石十二斗二刀八夕三月依定式作錢收捧以陸路七日達 于京納戶曹位米三石四斗九刀二合太五十七石八斗二刀三月收捧五月以陸路至忠淸道丹陽裝載江 船八日到泊龍山江納宣惠廳己卯條爲准
0 大同
作木三十五同田稅一時收捧上納宣惠廳米一千三百七十五石三斗四刀一合一夕儲置本郡一從宣惠 廳區別多寡無常己卯條爲准
0 均稅
田稅條米四十四石一斗六刀五合太二十七石十四斗一合六夕田稅一時收捧上納大同條木五同四十 七疋十二尺九寸結錢一千五十六兩八錢四分選武木一同十疋三月收捧五月以陸路七日達于京納均 廳己卯條爲准
0 俸廩
衙祿位三十九結九十五負二束米六石八斗六合八夕太四石一斗七刀四合公須位十四結九十九負米 三石五刀六合太十四斗四刀官需米三百五石民結所出每夫鷄雉各一首柴十五丹炭一斗五刀藁草四 丹生草三舟式捧用
0 軍兵
訓鍊都監砲保六十二名. 御營正軍三十一名. 資保三十三名. 官保一百十七名. 禁衛正軍三十九 名. 資保四十二名. 官保九十八名. 兵曹騎兵四各. 資保十二名. 官保二百五十九名. 步兵三百九 十名. 禁軍保七名. 袱直保十五名. 扈輦隊保四名. 內吹保二名. 樂工保十名. 司饔院匠人保八十 一名. 水軍二百十九名. 武學三十二名. 射夫二十名. 束伍馬軍九十六名. 保一百八十六名. 步軍 五百六十五名. 保五百六十五名. 烽軍二百名
* 풍기(豊基) 左道. 4일 반. 서울과의 거리는 4백 40리이다.
異名: 기목(基沐). 기주(基州). 기천(基川). 영안(永定). 안정(安定).
* 풍기군수겸안동진관병마동첨절제사. 문관 4품
* 풍기훈도. 종9품.
좌수 1인. 별감 2인. 군관 5인. 인리 19인. 지인 10인.
사령 10명. 관노 11명. 관비 12구.
0 호구 己卯式元戶
호수: 2,401호. 인구: 10,176명. 남자: 4,304명. 여자: 5,872명.
二千四百一戶人口一萬一百七十六口內 男四千三百四口女五千八百七十二口
安東鎭管豐基郡 東至榮川界十八里南至安東界三十里西至順興界十里北至順興界十里距京四百十里四日半程南距監營三百里三日半程東南距兵營四百八十里五日半程東南距水營六百二十里七日程南距統營六百三十里七日程
동쪽으로 영천군(榮川郡) 경계에 이르기까지 14리,
남쪽으로 예천군(醴泉郡) 경계에 이르기까지 51리,
서쪽으로 충청도 단양군(丹陽郡) 경계에 이르기까지 24리,
북쪽으로 충청도 영춘현(永春縣) 경계에 이르기까지 69리,
서울에서의 거리는 4백 10리이다.
남쪽으로 대구감영까지 3백리 3일정.
남쪽으로 울산병영까지 4백80리 5일 반정.
남쪽으로 동래수영까지 6백20리 7일정.
남쪽으로 통제영까지 6백30리 7일정.
0【건치연혁】
본래 신라의 기목진(基木鎭)이다. 고려 초에는 기주(基州)라 부르다가 현종(顯宗)이 길주(吉州)에 귀속시키고, 명종(明宗)이 감무(監務)를 두더니 뒤에 안동부(安東府)에 다시 귀속시키고, 공양왕(恭讓王)이 다시 감무를 두어 안동부의 속현(屬縣) 은풍(殷豐)을 예속시켰다. 본조에서는 기천 현감(基川縣監)으로 고쳤는데, 뒤에 문종(文宗)의 태(胎)를 은풍현(殷豐縣)에 안치하게 되자 마침내 두 현(縣)의 이름을 따서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군(郡)으로 승격시켰다.
【속현】 은풍현(殷豐縣) 본래 신라의 적아현(赤牙縣)이다. 경덕왕(景德王)이 은정(殷正)이라 고치고, 예천군(醴泉郡)의 영현(領縣)으로 하였다. 고려 초에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현종(顯宗)은 안동부에 귀속시켰는데, 공양왕(恭讓王) 때 본군(本郡)에 이속(移屬)시켰다. 별명은 은산(殷山)이다. 군 서남쪽 37리에 있다.
0 관청건물(公廨)
객사(客舍) 동헌(東軒) 서헌(西軒) 향사당(鄕射堂) 군관청(軍官廳)
장관청(將官廳) 인리청(人吏廳)
0 【성씨】
본군 정(鄭)ㆍ안(安)ㆍ피(皮)ㆍ방(邦)ㆍ음(陰)ㆍ진(秦)ㆍ신(辛), 김(金) 영월(寧越)ㆍ삼척(三陟). 이(李) 평창(平昌). 최(崔) 흥해(興海) 배(裵) 성주(星州). 은풍(殷豐) 오(吳)ㆍ박(朴), 전(全) 김(金)이라 하기도 한다. 신(申). 순흥(順興) 안(安)ㆍ신(申)ㆍ이(李)ㆍ윤(尹), 석(石) 촌성(村姓)이다. 김(金)ㆍ정(鄭) 모두 내성(來姓)이다.
【풍속】
풍속은 강하고 사나움을 숭상한다 관풍안(觀風案). 백성은 경상(耕桑)을 즐겨한다. 이선(李宣)의 시.
【형승】 산천이 수려하다 김효정(金孝貞)의 시.
【산천】
죽령(竹嶺) 군 서쪽 24리에 있는데, 신라 아달라왕(阿達羅王) 5년에 처음으로 길을 열었다.
소백산(小白山) 순흥현(順興縣)에 있다. 군에서의 거리는 32리이다. ○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소백산이 태백산에 이어져, 서리서리 백 리(百里)나 구름 속에 꽂혀 있네. 분명히 동남계(東南界)를 모두 구획하였으니, 하늘ㆍ땅이 이루어져 귀신은 인색을 깨쳤네.” 하였다.
명봉산(鳴鳳山) 은풍현(殷豐縣) 서쪽 16리에 있으며, 본조 문종(文宗)의 태(胎)를 안치했다.
여현(礪峴) 군 남쪽 14리에 있다.
골리현(骨里峴) 군 서쪽 12리에 있다.
경원봉(慶元峯) 소백산(小白山)에 있다. 군에서 북쪽으로 22리 떨어져 있으며 고려 충숙왕(忠肅王)의 태(胎)를 안치했다.
윤암봉(輪庵峯) 소백산에 있다. 군에서 북쪽으로 32리에 있으며, 본조 소헌왕후(昭憲王后)의 태를 안치했다.
초암동(草庵洞) 소백산에 있다. 군에서 북쪽으로 45리 떨어져 있으며 고려 충렬왕(忠烈王)의 태를 안치했다.
욱금동(郁錦洞) 소백산에 있다. 군에서 북쪽으로 13리 떨어져 있으며, 고려 충목왕(忠穆王)의 태를 안치했다.
양곡동(陽谷洞) 순흥부(順興府)에 있다. 군에서 북쪽으로 15리 떨어져 있다.
죽계(竹溪) 순흥부에 있다. 군에서 북쪽으로 23리 떨어져 있다. ○ 이색(李穡)의 안 시어(安侍御)를 전송하여 지은 시(詩)의 서(序)에, “순흥 안씨(順興安氏)는 세세로 죽계(竹溪) 가에 살았다. 죽계의 근원은 태백산(太白山)에서 나온다. 산이 크고 물이 멀리 흐르듯, 안씨의 흥성함도 끝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남천(南川) 군 남쪽 1리에 있다. 그 근원은 죽령(竹嶺)에서 나온다.
북천(北川) 군 북쪽 3리에 있다. 그 근원은 욱금동(郁錦洞)에서 나온다. ○ 이상 두 물(남천(南川) 북천(北川))은 군 동쪽 3리에 이르러 합류되어 영천군(榮川郡)의 임천(臨川)에 들어간다.
순흥(順興)의 동천(東川) 하나는 부(府)의 동쪽 1리에 있고, 하나는 부의 동쪽 10리에 있으니, 그 근원은 모두 소백산(小白山)에서 나와 부의 동쪽 13리에 이르러 남ㆍ북의 두 개울이 합친다.
은풍(殷豐)의 동천(東川) 현(縣) 동쪽 20보(步)에 있으며, 그 근원은 골리현(骨里峴)에서 나온다.
서천(西川) 현 서쪽 10리에 있으며, 그 근원은 명봉산(鳴鳳山)에서 나오는데, 현 남쪽 8리에 이르러 동천(東川)과 합류되어 예천군(醴泉郡)의 양천(襄川)이 된다. 『신증』 도솔성산(兜率城山) 죽령 아래 있다. 부로성산(夫老城山) 은풍현에 있는데 봉우리 위에 못이 있다.
【토산】
수정석(水精石) 양곡동(陽谷洞)에서 난다 ㆍ인삼(人蔘)ㆍ잣[海松子]ㆍ지치[紫草]ㆍ왕골[莞草]ㆍ꿀[蜂蜜]ㆍ송이[松蕈]ㆍ석이버섯[石蕈]ㆍ닥종이[楮]ㆍ은어[銀口魚].
【봉수】
죽령(竹嶺) 봉수 서쪽으로는 충청도 단양군(丹陽郡) 소이산(所伊山)에 응하고, 동쪽으로는 망전산에 응한다.
망전산(望前山) 봉수 군 남쪽 8리에 있으니, 동쪽으로는 영천군(榮川郡) 성내산(城內山)에 응하고, 서쪽으로는 죽령에 응한다.
『신증』 【누정】 제운루(齊雲樓) 객관(客館) 동쪽에 있다.
【학교】 향교(鄕校) 군 북쪽 7리에 있다.
【역원】
창락역(昌樂驛) 옛날 순흥(順興)의 땅으로, 군 서쪽 13리에 있다. 승(丞)이 있다. 본도의 속역(屬驛)이 아홉이니 즉 평은(平恩)ㆍ창보(昌保)ㆍ옹천(甕泉)ㆍ유동(幽洞)ㆍ통명(通明)ㆍ안교(安郊)ㆍ도심(道深)ㆍ죽동(竹洞)ㆍ선안(宣安)이다. ○ 승(丞) 1인. 죽동역(竹洞驛) 군 동쪽 19리에 있다. 남원(南院) 군 남쪽 2리에 있다. 산요원(山腰院) 군 서쪽 20리에 있다. 창락역(昌樂驛)의 남원(南院) 군 서쪽 11리에 있다. 순지원(蓴池院) 군 동쪽 10리에 있다. 인빈원(寅賓院) 군 남쪽 27리에 있다.
【불우】
용천사(龍泉寺) 군 북쪽 7리에 있다. ○ 고려 태조(太祖)의 화상[眞]이 문경(聞慶) 가은현(加恩縣) 양산사(陽山寺)에 있었는데, 신우(辛禑 폐왕 우(廢王禑)) 5년에 왜구(倭寇)를 피해서 이곳으로 옮겼다.
성혈사(聖穴寺)ㆍ초암(草庵) 모두 소백산이 있다.
쌍악사(雙岳寺) 은풍현 경청산(警淸山)에 있다.
양지사(陽地寺) 죽령 아래에 있다.
【사묘】 사직단 군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 군 서쪽 3리에 있다. 여단 군 북쪽에 있다.
【고적】
순흥폐부(順興廢府) 본래 고구려 급벌산군(及伐山郡)이다.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급산군(岌山郡)으로 고쳤다. 고려 초에는 흥주(興州)로 고치고, 성종(成宗) 때에는 순정이라 일컬었으며, 현종(顯宗)은 안동부(安東府)에 귀속시켰다가 뒤에 순안현(順安縣)으로 이속시키고, 명종(明宗)은 감무(監務)를 두었으며 충렬왕(忠烈王)의 태(胎)를 안치하여 흥녕 현령(興寧縣令)으로 고치고, 충숙왕(忠肅王)의 태를 또 안치하여 지흥주사(知興州事)로 승격시켰으며, 충목왕(忠穆王)의 태를 또 안치하여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부(府)로 승격시켰다. 본조에 와서, 태종(太宗)은 도호부(都護府)로 고치고, 세조(世祖) 임금 때, 부사(府使) 이보흠(李甫欽)이 수인(囚人)들에게 협박되어 난리를 꾀했다 해서, 본군(本郡)에 혁속(革屬)시키고 마아령(麻兒嶺)의 개울 동쪽의 땅은 이를 잘라 영천(榮川)에 귀속시키고, 문수산(文殊山) 개울 동쪽의 땅은 이를 봉화(奉化)에 귀속시켰다. 읍성(邑城)은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1천 19척이며 높이가 6척이다. 군에서의 거리는 북쪽으로 22리이다. 인풍현(隣豐縣) 김부식이 말하기를, “본래 고구려 이벌지현(伊伐支縣)인데, 경덕왕이 이름을 바꾸고 급산군(岌山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하였는데, 지금은 자세하지 않다. 등항성(登降城) 군 서쪽 5리에 있다. 속담에 전하기를, “고려 태조(太祖)가 남정(南征)했을 때, 이 현(縣)에 7일 동안 머물렀는데, 백제의 항서(降書)가 이르렀으므로 드디어 주필(駐蹕)했던 곳을 등항성(登降城)이라 이름지었다.” 한다. 상을곡성(上乙谷城) 은풍현(殷豐縣) 남쪽 34리에 있다. 둘레 9백 80보(步), 높이 5척인데, 안에 10개의 샘과 1개의 개울이 있다. 소백산고성(小白山古城) 산꼭대기에 옛 석성(石城)이 있다. 둘레 1천 4백 28척이다. 감곡부곡(甘谷部曲)ㆍ대룡산부곡(大龍山部曲)ㆍ임곡소(林谷所) 모두 순흥부(順興府) 조에 있다. 숙수사(宿水寺) 소백산(小白山)에 있다. ○ 노여(魯璵)의 시에, “가벼운 옷차림으로 그윽한 경치 찾았더니, 난초의 뜰은 10년 전의 모습이어라. 벽의 값어치는 몇 년간 시와 함께 비싸고, 절의 이름은 천고에 물과 더불어 흐르누나. 추위가 산 빛을 미니 스님은 문을 닫고, 차가움이 개울 소리를 누르니 손님은 누대에 오르도다. 휘바람 불며 서성거리니 어느덧 날은 저물며, 난간에 기대어 고개 돌리면 고향 생각 나누나.” 하였다. 경원사(慶元寺) 소백산(小白山)에 있다.
봉서루(鳳棲樓) 순흥부(順興府)에 있었는데 지금은 황폐되었다. ○ 안축(安軸)의 기(記)에, “나라의 동남쪽에는 본래 산은 하나인데 고개[嶺]는 세 개이니, 태백(太白)ㆍ소백(小白)ㆍ죽령(竹嶺)이 그것이다. 영남(嶺南)에 뿌리박은 첫째 고을은 바로 우리 흥주(興州)이다. 주(州)에서 동쪽으로 가면 황폐하고 편벽된 부락이 나오고, 주에서 똑바로 북쪽으로 가면 태백이 나오며, 북쪽에서 약간 서쪽으로 꺾여 가면 소백이 나오는데 큰 길은 하나도 없고, 주에서 서쪽으로 가면 죽령이 나오는데 서울로 가는 길이고, 주에서 남쪽으로 가면 길이 갈려서 동남의 여러 읍으로 통하게 된다. 고을의 형세가 이러하기 때문에 나그네들이 출입하는 것은 동ㆍ북쪽으로는 없고 모두 서ㆍ남쪽뿐이다. 옛적에 이곳에 고을을 설치하였을 때 오직 서ㆍ남쪽에만 후정(候亭)을 세운 것은 고을의 형세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 서정(西亭)은 다만 서울에서 남쪽으로 가는 이들이 왕왕 지나칠 뿐이지만, 남정(南亭)은 서쪽에서 남쪽으로 가는 이도 이리로 나가고, 남쪽에서 서울 가는 이도 이리로 들어온다. 남쪽의 여러 주에서 임금의 명을 가지고 일을 독려하는 사신은 이리로 들어오지 다른 데로 가지 아니한다. 그러므로 공적인 손님이나 사적인 나그네들을 전송하는 일이 없는 날이 없다. 고을 사람들이 서정을 가벼이 보고 남정을 무겁게 보는 것도 또한 사리가 그러한 것이다. 정자는 주의 남쪽 5ㆍ6리쯤 되는 곳에 있다. 북쪽으로는 영험한 산악을 바라보고, 남쪽으로는 무성한 수림을 마주보며, 동쪽으로는 푸른 개울에 닿고, 서쪽으로는 너른 들을 누르고 있는 것이 이것이다. 우리 주에서는 누대(樓臺)의 이름이 대대로 내려오는 것이 많다. 모두 산에 바짝 붙고 깊은 절벽에 있다. 그것이 이름난 것은 아마 산 높고 물 맑기 때문일 것이다. 저처럼 산에 바짝 붙고 깊은 절벽에 있어 비록 맑고 그윽한 멋이 있다고는 하지만, 바라보이는 산은 한두어 번 겹친 것에 지나지 않고, 바라보이는 물은 한두어 번 굽이진 것에 지나지 않아, 두루 바라보더라도 하나의 동굴, 하나의 구렁에 지나지 않으니, 이것은 한 줌의 산, 한 움큼의 물을 얻은 것일 뿐이다. 만약 남쪽으로 가서 이 누정에 오르면, 높은 것으로는 만층으로 깎아지른 정상을 쳐다볼 수 있고, 먼 것으로는 천 겹으로 겹친 봉우리를 바라볼 수 있다. 이상한 바위들이 우뚝우뚝 하고, 수많은 골짝들이 빙빙 돌고 있으며, 구름의 변화 안개의 엉김이 천태만상이라, 이를 피해서 숨을 수 없다. 게다가 개울 물은 백 갈래로 흐르면서 소용돌이 치고 폭포로 날다가, 산 아래에 모여들면 사납던 형세는 늦추어지고 시끄럽던 소리는 조용해진다. 누정 아래에 이르러서는 깊게 가라앉은 물이 느릿느릿 십여 리나 흐른다. 여울의 조잘거리는 소리가 들을 만하고, 돌맹이의 잘다람이 사랑할 만하니 산수(山水)의 크기[大]가 이에서 완비되는 것이다. 해마다 2월이면 농사를 시작한다. 남쪽 밭에 가는 사람들은 누정 아래를 끼고 다니고, 서쪽 들로 나가는 사람은 누정 밖에 줄짓는다. 도랑을 파면 빗물이 소용 없고, 가래를 매면 구름을 기다릴 것 없다. 이 누정은 오직 산수의 아름다움만 있는 것이 아니라 농사 짓은 풍경을 보는 즐거움도 가졌다. 내가 고을 사람이 되기 때문에 결발(結髮)했을 때 놀던 곳이다. 관직에 있는 동안 언제나 남쪽을 바라보면서 그리워했었다. 작년 봄에 사한(史翰)을 파(罷)하고 한가한 시간을 얻어 어머님을 찾아뵙게 되었다. 고향에서 놀면서 이 누정에 여러 차례 올랐으나 기울어 있는 채 오랫동안 수리되지 못하고 있었다. 어떤 이가 나에게 말하기를, ‘이 누정은 산수(山水)에서 그 위대함을 얻었거늘 사람들에게 버림당하여 거의 부수어 질 것 같소. 그런데 저 깊은 절벽에 왜소한 것은 오히려 사람들이 받아들이니, 이것이 괴이하지 않소.’ 하였다. 나는 대답하기를, ‘사람의 마음은 크기도 하고 작기도 하오, 마음이 큰 이는 그 위대함을 보고 그 왜소함을 알지만, 마음이 작은 사람은 왜소한 것에 매여서 위대한 것을 잊소. 옛날에 공자는 동산(東山)에 오르고는 노(魯) 나라가 왜소하다고 했고, 태산(泰山)에 오르고는 천하(天下)가 왜소하다고 했소. 세상 사람들은 천 길되는 산은 귀하게 여기지 않으면서 조그만 석가산은 귀하다 하고, 만경창파는 사랑하지 아니하고 마당의 연못은 사랑하오. 이로써 보건대 사람이 이것을 버리고 저것을 취하는 마음을 알 수 있을 것이오. 이 누정은 눈을 들어 멀리 보면 아름다운 산과 물이요, 머리을 숙여 내려다 보면 언덕의 풀과 흙이요, 다락이 버림받은 것은 다락의 죄가 아니요, 이를 보는 사람이 작기 때문이니, 만약 마음이 큰 사람이 이 고을을 맡아 이 누정에 오른다면 또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하지 않으리란 것을 어찌 알겠소. 더구나 사물의 이치는 성패에 때가 있는 법이니, 이 누정은 마땅히 다시 새로워질 날이 있을 것인데, 무엇 때문에 다시 부서질 것을 근심하겠소.’ 하였다. 얼마 뒤에 직랑(直郞) 채상(蔡祥)공이 우리 주(州)로 하명되었단 것을 들고, 나는 이 누정에 대해 커다란 바람을 가졌다. 내가 서울로 돌아갔을 때, 채(蔡)공은 고을에 도착했다. 그는 이 누정에 올라보고 과연 산수를 보고 즐거워했으나 누정의 퇴락함을 보고는 탄식했다. 그리하여 장인에게 명하여 다시 지어 새롭게 하였으니, 규모가 크고 채색이 고왔다. 대개 영남에 있는 누대(樓臺) 가운데 이와 훌륭함을 견줄 것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또 백성 한 집을 보내어 지키게 함으로써 장구한 계책을 도모했으니, 저 조잡하고 소홀하게 금방 만들었다가 금방 부서지는 것과 같은 자리에 놓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누정이 완공 된 뒤, 공은 손님이 오면 곧 이 누정에 올라 마중했다. 남쪽 손님으로 탁한 안개에 곤란받던 사람은, 이 누정에 올라 산을 바라보면 높이 들리고 구름이 나는 상상을 맛볼 것이고, 물가에 나가면 무우에서 바람쐬고 기수에서 목욕하는 즐거움이 생길 것이다. 공은 혹 농사철을 당하면 관청의 사무를 일찍이 파하고 이 누정에 올라 매일 농사를 살피며, 일의 빠르고 늦음, 부지럼함과 게으름을 책하고 캐물어 상벌(賞罰)을 내렸으므로 백성들은 모두 스스로 권면하여 서로 앞다투어 늦은 자는 빨리하고 게으른 자는 부지런하게 되었다. 이때로부터 관아에는 예절을 책하는 손님이 없게 되고, 들에는 생업을 잃은 농민이 없게 되었으니, 아전은 이로써 편안하게 되고 연사(年事)는 이로써 풍성하게 되었다. 모두가 공의 선사요 누정의 공덕이다. 나는 이 누정이 다시 새롭게 되었다 함을 듣고, 산수(山水)가 알아주는 사람을 얻은 것을 치하하며, 내 바람이 어긋나지 않았음을 기뻐하는 마음으로 이 기(記)를 부친다.” 하였다.
【명환】 고려 최재(崔宰) 충목왕(忠穆王) 초에 지흥주(知興州)로 나갔다. 백성에게 편리를 주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시행하였다. 전적(田籍)이 오래되어 어지러워졌으므로 재(宰)는 이를 개수하면서, 구본(舊本)도 여전히 놓아두고서 대질하였다. 소문을 들은 사람은 탄복했으나 국권(國權)을 담당한 자는 이를 꺼려서 교체시켜버렸다. 최운해(崔雲海) 신우(辛禑) 때 순흥 부사(順興府使)에 제수되었다. 당시 왜적이 객관(客館)을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운해는 이와 더불어 싸웠는데, 노획한 마소와 재물들을 곧 사졸(士卒)과 주민(州民)에게 나누어주었다. 싸움에서 크게 이겨 경내가 편안하게 되었다.
【인물】 고려 안유(安裕) 흥주(興州) 사람이다. 뒤의 이름(즉 안향(安珦))은 우리(조선(朝鮮)) 문종(文宗)의 휘(諱)에 저촉되므로 처음 이름을 쓴 것이다. 원종(元宗) 초에 과거에 급제했다. 일찍이 충선왕(忠宣王)을 좇아 원 나라에 갔는데, 원 나라의 승상(丞相)이 전지(傳旨)하기를, “너희 임금은 어찌하여 우리 공주(公主)와 가까이하지 않는가.”하였다. 유가 말하기를, “안방의 일이야 외신(外臣)이 알 수 없는 것이오. 오늘 이것을 가지고 질문하니, 들을 가치가 없지 않겠소.” 하였다. 승상이 이로써 아뢰니, 황제(皇帝 원제(元帝))가 이르기를, “이 사람은 대체(大體)를 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찌 먼 나라 사람으로 볼 것인가.”하고서 다시 묻지 아니하였다. 벼슬은 중찬(中贊)에까지 이르렀다. 학교(學校)가 날로 쇠퇴하는 것을 근심하여 섬학전(贍學錢)을 설치할 것을 건의했고, 또 그의 노비[藏獲]를 들였다. 문장(文章)이 맑고 힘차서 볼 만했으며, 또 감식(鑒識)하는 안목이 있었다. 만년에는 항상 회암(晦菴 주희(朱喜)) 선생의 화상을 걸어 두고 경모(景慕)하다가 드디어 회헌(晦軒)이라는 호(號)를 썼다. 충숙왕(忠肅王) 6년에 문묘(文廟)에 종사(從祀)되었으며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안우기(安于器) 유(裕)의 아들이며 벼슬은 검교찬성사(檢校贊成事)에 이르렀다. 안목(安牧) 우기(于器)의 아들이며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정당문학(政堂文學)에까지 이르렀다. 안원숭(安元崇) 목(牧)의 아들이며 급제하여 벼슬이 정당문학에 이르렀다. 안축(安軸) 충숙왕(忠肅王) 11년에 원 나라의 제과(制科)에 급제, 요양로(遼陽路) 개주(蓋州) 판관(判官)에 제수되었다. 당시 충숙왕(忠肅王)은 원 나라에 잡혀 있었다. 동지들에게 말하기를, “임금이 근심하면 신하는 욕을 당하고,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음을 당하는 것이요.”라 하고는 상서(上書)하여 송사하였다. 임금은 이를 가상히 여겨 성균관 악정(成均館樂正)으로 올려 제수하였다. 한때 표전(表箋)ㆍ사명(詞命)이 대부분 그의 손에서 나왔다. 상주(尙州)에 목사(牧使)로 나가 있을 때 어머니는 흥녕(興寧)에 있었는데 왕래하면서 효도를 다했다. 벼슬은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 흥녕군(興寧君)에까지 이르렀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저서로 《관동와주집(關東瓦注集)》이 있다. 안보(安輔) 축(軸)의 아우이다. 충목왕(忠穆王) 원년에 원 나라의 제과(制科)에 급제, 요양행 중서성(遼陽行中書省) 조마(照磨)에 제수되었다. 보는 말하기를, “수명(授命)하고도 공직(供職)하지 않는 것은 불공(不恭)스럽다. 더구나 조마(照磨)란 단지 문서(文書)를 수장(收掌)하는 것이며 다른 일이 없으니, 내 마땅히 성(省)으로 나가야 할 것이다.” 하였다. 상관(上官)ㆍ성관(省官)은 그의 재주를 중히 여겨 예우하였다. 보가 말하기를, “내가 이제 책무는 다하였다. 어머니가 늙으셨으니 돌아가 봉양하지 않는다면 효가 아니다.” 하고, 이에 벼슬을 버리고 나라로 돌아왔다. 어머니가 늙었다는 이유로 귀향하여 봉양하기를 청하여 뒤에 동경(東京) 유수(留守)가 되었다. 생산(生産 치부(治富))에 마음 쓰지 아니하여, 죽고 나자 집에는 곡식 한 섬의 저축도 없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안종원(安宗源) 축(軸)의 아들이다. 나이 17세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충목왕 때 사한(史翰)으로 선보(選補)되었다, 질(秩)이 차서 옮기게 되었는데 동료 심동로(沈東老)가 나이는 많은데 위계가 아래였으므로 종원이 양보했다. 축(軸)은 이를 듣고 기뻐하면서, “도덕이 앞선 이에게 양보한 것이다. 이쪽에서 남에게 양보했으니 누가 이쪽을 버릴 것인가. 우리 집안에 사람다운 사람이 있으니 번창할 것이다.” 하였다. 신돈(辛旽)이 천권(擅權)할 때, 사대부들이 다투어 붙었다. 집정(執政)에게 붙은 사람들이 말하기를, “우리들이 자네를 영상(領相)에게 천거하면 간관(諫官)을 얻을 수 있을 것일세.” 하니, 종원은 사양하면서, “내 본래 게을러서 남에게 붙는 일은 내 재주가 아닐세.”라고 말했다. 집정은 이에 대해 부끄럽게 여겼다. 벼슬은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 흥녕부원군(興寧府院君)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본조 안천보(安天保) 태종(太宗) 때의 사람이다. 벼슬은 영돈녕부사(領頓寧府事)에 이르렀다. 바로 소헌왕후(昭憲王后)의 외구(外舅)이다. 안원(安瑗) 원숭(元崇)의 아들이다. 벼슬은 유후(留後)에 이르렀다. 시호는 경질(景質)이다. 안경공(安景恭) 종원(宗源)의 아들이다. 태조(太祖)의 개국공신(開國功臣)이었으며 흥녕부원군(興寧府院君)에 봉하였고, 시호는 양도(良度)이다. 안순(安純) 경공(景恭)의 아들이다.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판중추겸 판호조(判中樞兼判戶曹)에 이르렀다. 치사(致仕)하고 물러나서 금천별서(衿川別墅)에 살았다. 나라에 큰일이 있으면 그에게 가서 물었다. 시호는 정숙(靖肅)이다. 안숭선(安崇善) 순(純)의 아들이다. 경자과(庚子科)에 장원(壯元)했다. 벼슬은 의정부 좌참찬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신증』 안침(安琛)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판서(判書)에 이르렀다. 아들 처선(處善)ㆍ처성(處誠)은 모두 과거에 급제했으나 일찍 죽었다.
【효자】 본조 권득평(權得平) 임오년에 진사(進士)가 되었다. 그 아버지가 실명(失明)하였으므로 출입할 때 언제나 부축했으며, 음식은 반드시 몸소 받들었다. 양친이 4일 간격을 두고 모두 죽었는데 3년 동안 여막(廬幕)에 거처하면서 몸소 조석(朝夕)의 전(奠)을 올렸다. 대상(大祥)을 지낸 뒤 다시 어머니를 위해서 재최(齊衰) 3년을 입었으며, 가묘(家廟)를 짓고 조석의 전을 폐하지 않았다. 출입할 때는 항상 인사를 드렸다. 홍치(弘治) 기미년에 이 일이 알려져 정려(旌閭)되었다.
【제영】 한한오묘상(閑閑五畝桑) 정재(鄭載)의 시에, “넘실넘실하는 남쪽 개울의 물, 널찍널찍한 다섯 이랑의 뽕이로다.” 하였다. 황량고루의연재(荒涼古壘依然在) 강희맹의 시에, “사람은 누정에 기대었고 대자리는 비었으니, 달 밝은 밤의 피리 바람을 막지 못하누나. 황량한 옛 보루는 의연히 있는데, 기억하는가. 닭 잡고 오리 잡던 공적을.” 하였다. 방산민십실(傍山民十室) 조원(曹瑗)의 시에, “산 옆에는 민가 열 채, 다만 아는 것은 농사일 뿐.” 하였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연혁】 본래 신라의 대매(代買)이다.
【방면】 동부(東部) 읍으로부터 끝은 15리이다. 서부(西部) 읍으로부터 끝은 20리이다. 동촌(東村) 읍으로부터 끝이 20리이다. 생고개(生古介) 남쪽으로 처음은 5리이고, 끝은 15리이다. 와룡동(臥龍洞) 서남쪽으로 처음은 5리이고, 끝은 15리이다. 보좌리(普佐里) 남쪽으로 처음은 15리이고, 끝은 50리이다. 상리(上里) 서쪽으로 처음은 15리이고, 끝은 60리이다. 하리(下里) 서남쪽으로 처음은 25리이고, 끝은 50리이다.
【성지】 도솔산고성(兜率山古城) 죽령(竹嶺) 아래에 있다. 부로산고성(夫老山古城) 유지(遺址)가 있다. 등항성(登降城) 서남쪽으로 5리이다. 어름성(於凜城) 빙성(氷城)이라고도 하며 은풍(殷豐) 고현(古縣)에 있는데, 남쪽으로 30리이다. 둘레는 9백 80보이고, 10개의 샘과 한 개의 시내가 있다.
【창고】 읍창(邑倉)ㆍ은풍창(殷豐倉) 고현(古縣)에 있다.
0 旱田
元帳付一千二百五十九結三十二負五束內各樣免稅陳雜頉并六百四十二結九十八負三束己卯時起六百十六結三十四負二束
0 水田
元帳付九百六十結六十八負二束內各樣免稅陳雜頉并二百六十九結三十六負己卯時起六百九十一結三十二負二束
0 進貢
彩花席 滿花席 別紋席 邊兒寢席黃花席 生免 生雉 單乾雉 人蔘 白芍藥 赤芍藥 茯神 山藥 續隨子車前子 赤茯苓 當歸 芎芎 連翹 苽蔞仁 淸蜜
0 糶糴
元會大米十五石十二斗七升九合三夕雜穀九百三十三石十二斗三升七合八
夕賑色大小米七千八百二十六石二斗六升九夕雜穀二百十九石九斗五升五合一夕常平廳大小米一千一百四十八石十一斗九升五合六夕雜穀四千三百六十四石七斗二升六夕私賑雜穀三百一石一斗五升一合別會大小米九百七十四石三斗六升六合六夕雜穀八十七石八斗三升九夕九月開倉十二月封倉己卯條爲準
0 田稅
米二百九十七石十三斗四升八合五夕太一百三十石九斗九升六合八夕依詳定作錢作木十八疋每年二月收捧三月以陸路七日達于京納于戶曹位太三十九石十二斗三月收捧于忠淸道丹陽郡江頭因藏船到泊新南基江浦納于宣惠廳己卯條爲準
0 大同
作木二十三同錢木參半田稅一時收捧上納米四百二十石八斗七升三合儲置本官一從惠廳區畫多寡無常己卯條爲準
0 均稅
田稅條來一石六斗六升六合六夕太十四斗二升四合四月依詳定作錢大同條木千一疋二十九尺錢木參半結錢七百八十六兩六戔九分田稅一時收捧上納選武布四十五疋九月收捧十月以陵路七日達于京納于均廳己卯條爲準
0 俸廩
衙祿位三十九結九十九負米十石三斗八升九合六夕太六斗六合四夕公須位十五結米十三斗八升八合四夕太三石一斗一升一合六夕官需米三百石民結所出每夫生雉一首生雞一首柴二十六丹炭四斗藁草四丹膏草四丹式捧用
0 軍兵
訓鍊都監砲保九十一名御營廳正軍二十六名官納保五十二名資保二十八名禁衛營正軍十五名官納保六十三名資保十六名別破陣保十一名兵曹騎兵一百三十五名步兵二百二十五名別騎兵十一名禁軍保十四名袱直十八名扈輦隊保七名掌樂院樂工保十四名司饔院匠人十八名烽軍一百名束伍馬步軍三百十二名馬步軍保三百二十八名水軍四十名
* 청도(淸道) 左道. 8일. 서울과의 거리는 7백 42리이다.
異名: 도주(道州). 鰲山(오산). 마악(馬岳). 이산(伊山).
이성(伊城). 대산(大山).
* 청도군수겸대구진관병마동첨절제사.
* 청도훈도. 종9품.
동으로 언양현(彦陽縣) 경계까지 1백 18리,
경주(慶州) 경계까지 92리,
남으로 밀양부(密陽府) 경계까지 40리,
동부(同府)의 풍각현(豐角縣) 경계까지 16리,
북으로 대구부(大丘府) 수성현(壽城縣) 경계까지 24리,
경산현(慶山縣) 경계까지 23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7백 42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이서소국(伊西小國)이었는데, 신라 유리왕이 정벌해서 빼앗고 뒤에 구도성(仇刀城) 경내의 솔이산(率伊山) 이(伊)는 사(巳)로도 쓴다. 경산(慶山) 가산(茄山)이라고도 한다. 오도산(烏刀山) 등 세 성과 합쳐서 대성군(大城郡)을 설치했다. 구도(仇刀)는 구도(仇道), 오야산(烏也山)은 오례산(烏禮山)이라고도 하는데, 오도산이 그 지방인 듯하다. 경덕왕 때에 구도를 오악현(烏岳縣)으로 개칭하고, 경산을 형산현(荊山縣)으로 개칭하고, 솔이산을 소산현(蘇山縣)으로 고쳐서 모두 밀성군(密城郡)의 영현(領縣)으로 하였다. 고려 초기에 세 성을 다시 합쳐서 군으로 하여 지금의 이름 일명 도주(道州) 으로 고쳤다가 곧 밀성에 붙였다. 예종 4년(1109)에 감무(監務)를 두었고, 충혜왕 때에 군 사람 김선장(金善莊)이 공이 있어서 지군사(知郡事)로 승격하였다가, 얼마 안 가서 다시 감무가 되었고, 공민왕 15년에 다시 군이 되었는데, 본조에서 그대로 하였다.
【관원】 군수ㆍ훈도 각1인.
【군명】 도주(道州)ㆍ오산(鰲山)ㆍ이산(伊山)ㆍ이서(伊西)ㆍ대성(大城)ㆍ마악(馬岳).
【성씨】 본군 신(申)ㆍ김(金)ㆍ백(白)ㆍ이(李)ㆍ조(曺), 최(崔)ㆍ손(孫) 모두 내성(來姓)이다.
【풍속】 풍속은 검약하고 솔직한 것을 숭상한다 《관풍안(觀風安)》에 있다.
【산천】 오산(鰲山) 군의 남쪽 2리에 있는데, 진산(鎭山)이다. 동쪽에 한 골짜기가 있어 고사동(高沙洞)이라 하는데, 하늘에서 장차 바람이나 비가 오려면 먼저 운다. 구름 기운이 솟아서 구름이 골짜기 안으로 들어가면 비가 오고, 구름이 골짜기 밖으로 나오면 바람이 불며, 크게 울면 그날로 효험이 있고, 작게 울면 2, 3일 지나서야 효험이 있다. 운문산(雲門山) 군의 동쪽 96리에 있다. 오혜산(烏惠山) 군의 동남쪽 31리에 있다. 마곡산(馬谷山) 군의 동쪽 1백 13리에 있다. 갑을령(甲乙嶺) 군의 서쪽 54리에 있다. 성현(省峴) 군의 북쪽 23리에 있다. 자천(紫川) 군의 북쪽 5리에 있다. 근원은 밀양부 비슬산(琵瑟山)에서 나와서 유천(楡川)에 이르러, 운문천(雲門川)과 합치고 동부(同府)의 추화산(推火山) 동쪽에 이르러 재악천(載岳川)과 합쳐서 성(城) 남쪽에 이르러 응천(凝川)이 된다. 운문천(雲門川) 군의 동쪽 90리에 있다. 근원은 운문산에서 나와서 유천에 이르러 자천과 합친다. 유천(楡川) 군의 남쪽 40리에 있다. 곧 자천과 운문천이 합치는 곳이다. 금물법지(今勿法池) 군의 북쪽 14리에 있다. 『신증』 거연(巨淵) 군의 동쪽 30리에 있다. 용단(龍壇)이 있어서 가뭄을 만나면 비를 빈다. 이목연(李木淵) 운문사 남쪽에 있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신물(神物)이 있어서 비를 빌면 효험이 있다.”고 한다.
【토산】 종이[紙]ㆍ꿀[蜂蜜]ㆍ은어[銀口魚]. 젓대[笛竹] 군의 동쪽 와암리(臥巖里)에서 나온다. 석이버섯[石蕈]ㆍ송이[松蕈]ㆍ감[枾]ㆍ밤[栗]ㆍ옷[漆]ㆍ호두[胡桃]. 석류황(石硫黃) 마곡산에서 나온다. 지황(地黃)ㆍ복령(茯苓) 『신증』 닥종이[楮].
【봉수】 남산 봉수 군의 남쪽 10리에 있는데, 남으로 밀양부 분항(盆項)에 응대하고, 북으로 팔조현(八助縣)에 응대한다. 팔조현 봉수 1군의 북쪽 24리에 있는데, 남으로 남산에 응대하고, 북으로 대구부 법이산(法伊山)에 응대한다.
【누정】 청덕루(淸德樓) 객관 동쪽에 있는데, 지군(知郡) 최안을(崔安乙)이 세우고, 최원우(崔元祐)가 기문을 지었다. ○ 전녹생(田祿生)의 시에, “해우(廨宇)는 언덕 밑에 높다랗고, 높은 누각은 꼭대기를 누르고 있네. 하늘에 평지가 있어, 더운 여름이 서늘한 가을 같구나. 민력(民力)은 원래 빌지 않았으니, 누명(樓名)이 과연 뜬 말 아닐세. 굳이 사시의 경치를 말할 것 있나. 청덕(淸德)이 최후(崔侯)를 설명해 주네.” 하였다. ○ 고려 심효생(沈孝生)의 시에, “고군(古郡)에는 진기한 경치가 많은데, 높은 누각이 언덕 머리에 있네. 여염 30리에 문물(文物)이 몇 천 년이냐. 일월(日月)은 술병 안에 길이 머무르고, 산천은 거울 속에 떠 있네. 여기서 세상을 피하기 좋구나. 공업(功業)일랑 공후(公侯)에게 맡기세.” 하였다. ○ 권근(權近)의 시에, “날 저문데 다락에 오른 객이, 성취한 일 없이 늙어만 가네. 나무에 부는 바람 비를 보낼 듯하고, 보리는 벌써 익어가네. 고을이 오래 되었으니 지령(地靈)이 뛰어나고, 산이 비껴 있어 검푸른 빛을 띠었네. 떠돌다가 도리어 자리를 얻었네. 청안(靑眼)에 어진 원이 있구나.” 하였다. ○ 정이오(鄭以吾)의 시에, “군각(郡閣)에 아름다운 조망이 넉넉하여, 큰 언덕이 끝이 없구나. 누가 출새곡(出塞曲)을 부나. 사객(詞客)은 비추부(悲秋賦)를 짓네. 나무가 떨어지니 들이 도리어 멀고, 연기가 일어나니 산이 뜬 것 같구나. 누가 장차 현송(絃誦)으로 다스려, 능히 무성후(武城侯 무성의 원 언언(言偃)을 말함)를 계승하랴.” 하였다.
『신증』 청향루(淸香樓) 객관 동쪽에 있다.
【학교】 향교 군의 북쪽 3리에 있다.
【역원】 성현역(省峴驛) 성현 아래에 있다. 본도의 속역(屬驛) 16개, 곧 용가(龍駕)ㆍ쌍산(雙山)ㆍ 내야(內野)ㆍ일문(一門)ㆍ범어(凡於)ㆍ유천(楡川)ㆍ설화(舌化)ㆍ금동(金洞)ㆍ양동(良洞)ㆍ수안(水安)ㆍ온정(溫井)ㆍ오서(鰲西)ㆍ무흘(無訖)ㆍ유산(幽山)ㆍ매전(買田)ㆍ서지(西芝) 역을 찰방(察訪)한다. ○ 찰방 1인이 있다. 유천역(楡川驛) 군의 남쪽 40리에 있다. 서지역(西芝驛) 1군의 동쪽 81리에 있다. 매전역(買田驛) 군의 동쪽 50리에 있다. 오서역(鰲西驛) 군의 서쪽 2리에 있다. 제생원(濟生院) 군의 남쪽 24리에 있다. 양원(陽院) 군의 북쪽 19리에 있다. 공암원(孔巖院) 군의 동쪽 86리에 있다. 길이 암벽 사이에서 나와서 마치 문 같은데 수십 보가 된다. 이길원(利吉院) 군의 서쪽 12리에 있다. 『신증』 냉천원(冷泉院) 군의 남쪽 15리에 있다. 늑원(勒院) 군의 서쪽 2리에 있다. 여의원(如意院) 군의 동쪽 10리에 있다.
【불우】 적천사(磧川寺) 오산 남쪽에 있다. ○ 중 인각(麟角)의 시에, “숲 너머 산에서 종소리 멀리 들려 나오니, 푸른 봉우리에 절이 있겠구나. 나무가 빽빽하여 문 비추는 달빛 가리고, 골짜기가 비어서 문 두드리는 지팡이 소리에 대답하네. 물은 흰 명주를 깔아 온전한 돌에 흐르고, 무지개는 푸른 깁을 끌어다 고소(古松)에 걸었네. 늙은이 며칠 머무름을 괴이타 마라. 그 옛날 보조(普照)가 유적(遺跡)을 보였네.” 하였다. 운문사(雲門寺) 운문산 아래에 있다. 처음 이름은 작압(鵲岬)인데, 신라의 고승 보양(寶壤)이 창설한 것이다. 고려 태조가 편액을 내리기를, “운문선사(雲門禪寺)라 하였다. 윤언이(尹彦頤)가 지은 승 원응(圓應)의 비문이 있다.
【사묘】 사직단 군의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 군의 남쪽 2리에 있다. 여단 군의 북쪽에 있다.
【고적】 폐성(吠城) 군의 동쪽 7리에 있는데, 동서가 모두 석벽이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고려 태조가 동으로 정벌하여 군의 경계에 이르렀는데, 산적이 이 성에 모여서 웅거하면서 항복하지 않자, 태조가 봉성사(奉聖寺)의 중 보양에게 물으니, 보양이 이르기를, “개는 천성이 밤을 맡고 낮을 맡지 않으며 앞만 지키고 그 뒤는 잊으므로, 마땅히 낮에 그 북쪽을 공격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태조가 따르니, 적이 과연 패하였다고 한다. 오혜산성(烏惠山城)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9천 9백 80척, 높이가 7척이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안에 시내가 3, 못이 5, 샘이 3개가 있다. ○ 지금 살펴보건대, 구도(仇刀)는 오례산(吳禮山)이라고도 하는데, 예(禮) 자는 혜(惠) 자와 소리가 근사하니, 바로 이 성인 것 같다. 매전부곡(買田部曲) 지금은 역 마을이 되었다. 북곡부곡(北谷部曲) 군의 동쪽 25리에 있다. 부곡부곡(釜谷部曲) 군의 북쪽 15리에 있다.
【명환】 고려 금의(琴儀) 정치하는데 있어서 강정(剛正)하여 흔들리지 않으므로 한쪽에서는 청도의 철상공(鐵相公)이라고 불렀다. 민종유(閔宗儒) 군에 대성(大姓)이 많아서 다스리기 어렵다고 불리는데, 종유가 청탁을 받아들이지 않고 법에 의해서 다스렸으므로 잘 다스린다고 가장 이름났다. 본조 문여량(文汝良) 지군(知郡)이다. 『신증』 이굉(李汯)ㆍ이윤(李胤)ㆍ안구(安覯)
【인물】 고려 김지대(金之岱) 처음 이름은 충룡이었다. 학문을 힘쓰고 글을 잘하며, 풍모가 헌출하고 깨끗하며 척당(倜儻)하여 큰 뜻을 가졌다. 고종 때 강동(江東) 싸움에 아버지가 군대에 참여하게 되자 지대가 태학생(太學生)으로서 아버지를 대신하여 나갔다. 전사(戰士)들이 방패 머리에 모두 기이한 짐승을 그렸는데, 지대는 홀로 한 절구(絶句)를 쓰기를, “나라 걱정이 신하의 걱정이요, 어버이 근심이 자식의 근심일세. 어버이를 대신하여 보국(報國)하면 충과 효를 다 닦을 수 있네.” 하였다. 원수(元帥) 조충(趙冲)이 군사를 점열하다가 보고 놀라서 그 까닭을 묻고, 그 사람됨을 알아서 일을 시켰다. 이듬해 기묘년에 개선하여 돌아와서 과거에 1등으로 합격하니, 규례에 따라 전주 사록참군(全州司錄參軍)을 제수받았다. 드센 자를 누르고 외로운 자를 돌보아주며, 귀신같이 일을 적발하였다. 뒤에 전라도를 안찰(按察)하러 나가서는 최항(崔沆)이 보낸 중 통지(僧通知)를 강 속에 빠뜨려 죽였다. 최항이 아버지를 이어 정권을 잡자 비록 전의 유감을 품고 있었으나 지대가 청렴하고 삼가서 허물이 적었기 때문에 해칠 수 없었다. 지위는 중서시랑 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에 이르렀고, 시호는 영헌(英憲)이다. 김선장(金善莊). 김한귀(金漢貴) 감찰대부(監察大夫)이었다. 공민왕이 그 청을 쫓아서 본현을 지군사(知郡事) 고을로 승격시켰다.
【효자】 본조 김극일(金克一)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서 어머니를 위해 종기를 빨고 아버지를 위해 설사를 맛보았다. 전후로 여묘살이 6년을 했는데, 한 호랑이가 무덤 곁에서 새끼를 젖먹이니, 극일이 제사지내고 남은 것을 먹이기를 가축을 기르듯이 하였다. 아버지에게 천첩(賤妾) 두 사람이 있었는데, 아버지가 살아 계셨을 때와 같이 섬겼고, 그들이 죽자 모두 기년복(朞年服)을 입었다. 천순(天順) 갑신년에 이 일이 임금에게 들리어 정문하였다. 이관명(李官明) 그 어머니가 밤에 범에게 물려 가는데, 때마침 큰 비가 와서 천지가 칠흑같이 어두워 이웃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두려워 나오지 않으니, 관명이 13살인 누이 연가(延加)와 9살인 조카딸이 있는데, 혼자서 이 두 아이와 함께 범을 쫓아갔다. 오른손에 도끼를 잡고 왼손에 횃불을 잡고서 5, 6리쯤 가서 불이 꺼지자, 솔가지를 따서 횃불을 만들어 다시 1, 2리를 쫓아가서 범을 꾸짖고 어머니의 시체를 빼앗아 돌아오니, 동네 사람들이 슬퍼하고, 관을 만들어서 장사 지냈다. 박윤손(朴閏孫) 수군(水軍) 박동(朴同)의 아들이다. 17살에 어머니가 빨래하는데 따라갔다가 범이 어머니를 물어 가자, 윤손이 왼손으로 어머니를 붙잡고 오른손으로 돌을 던지며 5리 남짓 쫓아갔다. 이웃 사람들이 듣고 와서 구하자, 범이 드디어 버리고 갔는데, 그 어머니는 한밤중에 이르러 죽었다. 이 일이 임금에게 들리어 정려하고 복호(復戶)하였다. 『신증』 종비(從非) 군리(郡吏) 김군산(金郡山)의 아내이다. 효성으로 어버이를 섬기고, 죽어서는 상을 마치자 영당(影堂)을 지어 아침저녁으로 제사 지내기를 살아 있을 때에 섬기듯이 하였다. 이 일이 임금에게 들리어 정려하였다.
【제영】 당시예악이서국(當時禮樂伊西國) 이첨(李詹)의 시에, “당시 예악은 이서국에 있었고, 오늘날 정기(旌旗)는 원수(元帥)가는 곳에 있네.” 하였다. 청덕루중취옥적(淸德樓中吹玉笛) 이첨의 시에, “비파 소리 속에는 양주곡(楊州曲)이요, 비취 주렴 앞에는 태백(太白)의 잔이로다. 청덕루 안에서 옥적을 부니, 1년에 세 번 돌아가기를 즐기네.” 하였다. 일구현고다교목(一區縣古多喬木) 김효정(金孝貞)의 시에, “한 고장 오랜 고을에 큰 나무 많고, 사면 추녀가 트여 좋은 산을 대하네.” 하였다.
《대동지지(大東地志)》
【토산】 잣[海松子]ㆍ호두[胡桃]ㆍ자초(紫草)ㆍ은어[銀口魚]ㆍ잉어[鯉魚]
【고읍】 소산(蘇山) 동으로 50리이며, 매전역(買田驛) 땅이다. 본래 솔이산성(率伊山城)이다. 경덕왕(景德王) 16년(757)에 소산이라 고쳐서 밀성군(密城郡)의 영현을 삼았고, 고려 초에 본군에 합하였다. 오악(烏岳) 남으로 35리이며, 유천역(楡川驛) 땅이다. 본래는 오도산성(烏刀山城)인데 오구산(烏邱山)ㆍ오례산(烏禮山)ㆍ오야산(烏也山)ㆍ구도성(仇道城)이라고도 부른다. 경덕왕 16년에 오악이라 고쳐서 밀성군의 영현을 삼았으며, 고려 초에 본군에 합하였다. 형산(荊山) 동남으로 7리이며, 폐성(吠城) 땅이다. 본래는 가산성(茄山城)인데 이서국기(伊西國基)라고도 하며 가산(駕山)이라고도 한다. 경덕왕 16년에 형산으로 고쳐서 밀성군의 영현으로 삼았으며, 고려 초에 본군에 합하였다.
【방면】 상읍내(上邑內) 읍으로부터 동서쪽으로 10리이고, 남북쪽으로 7리이다. 차읍내(次邑內) 북쪽으로 처음은 5리, 끝은 20리이다. 상동(上東) 동북쪽으로 처음은 40리, 끝은 1백 10리인데, 동은 경주(慶州)와 접해 있고, 서는 자인(慈仁)과 접해 있으며, 북은 영천(永川)과 접해 있다. 중동(中東) 동쪽으로 처음은 50리이고, 끝은 70리이다. 상남(上南) 동남으로 처음은 20리이고, 끝은 70리이다. 하남(下南) 남으로 처음은 10리이고, 끝은 40리이다. 상북(上北) 처음은 10리이고, 끝은 25리이다. 차북(次北) 처음은 10리이고, 끝은 20리이다. 내종(內終) 동쪽으로 처음은 10리이고, 끝은 25리이다. 외종(外終) 동쪽으로 처음은 25리이고, 끝은 40리이다. 적암(赤巖) 동남으로 처음은 20리이고, 끝은 40리이다. 내면(內面) 처음은 5리이고, 끝은 15리이다. 외서(外西) 처음은 30리이고, 끝은 60리인데, 창녕(昌寧) 동쪽 경계를 넘어 있다. ○ 매전부곡(買田部曲)은 바로 매전역 땅이다. 북곡부곡(北谷部曲)은 동쪽으로 25리이다. 부곡부곡(釜谷部曲)은 북쪽으로 15리이다.
【성지】 읍성(邑城) 선조 24년(1591)에 쌓았는데, 1천 5백 70보(步)이다.
【봉수】 북산(北山) 북쪽으로 24리이다.
【창고】 읍창(邑倉)ㆍ상동창(上東倉) 동쪽으로 90리이다. 하남창(下南倉) 동쪽으로 10리이다. 서창(西倉) 외야면(外也面)이다.
【토산】 닥종이[楮].
【사원】 자계서원(紫溪書院) 선조 무인년(1578)에 건립하고, 현종 신축년(1661)에 사액하였다. 김극일(金克一) 본관은 김해이며, 벼슬은 지평인데, 집의를 추증하였으며, 사시(私諡)는 절효(節孝)이다. 김일손(金馹孫) 목천(木川)에 보인다. 김대유(金大有) 자는 천우(天佑)이고, 호는 삼족당(三足堂)이며, 일손의 조카이다. 벼슬은 정언이고, 응교를 추증하였다.
* 금산(金山) 右道. 6일. 서울과의 거리는 5백 13리이다.
異名: 金陵(금릉) 지금의 김천.
* 금산군수겸상주진관병마동첨절제사.
* 금산훈도. 종9품.
동쪽 개령현(開寧縣) 경계까지 12리,
남쪽으로 지례현의 경계까지 41리,
서쪽으로 충청도 황간현(黃澗縣)의 경계까지 41리,
북쪽으로 상주의 경계까지 34리,
서울과의 거리는 5백 53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신라의 금산현으로 개녕군의 영현이었다. 고려 현종(顯宗) 9년에 경산부(京山府)에 이속(移屬)되었고, 공양왕 2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본조의 공정왕(恭靖王) 때에 어태(御胎)를 묻었으므로 승격하여 군이 되었다.
【관원】 군수ㆍ훈도 각 1인.
【군명】 금릉(金陵).
【성씨】 본군 전(全)ㆍ김(金)ㆍ백(白)ㆍ이(李). 어모(禦侮) 박(朴) 정(鄭)ㆍ방(方)ㆍ오(吳)ㆍ전(田)ㆍ심(沈)ㆍ신(申) 모두 속성(續姓)이다. 황(黃)ㆍ김(金) 모두 내성(來姓)이다. 조마(助馬) 임(林). 영명(迎命) 권(權)ㆍ김(金)ㆍ강(姜)ㆍ이(李)ㆍ장(張)ㆍ백(白). 황금(黃金) 이(李)ㆍ전(田)ㆍ김(金), 주(朱)ㆍ문(文) 모두 속성(續姓)이다.
【산천】 오파산(五波山) 군의 동쪽 1리에 있는 진산이다. 황악산(黃嶽山) 군의 서쪽 15리에 있다. 공정왕 때에 어태(御胎)를 산 동쪽 직지사(直旨寺)의 북쪽 봉우리에 안장하였다. 속문산(俗門山) 군의 북쪽 37리에 있다. 고산(高山) 군의 서쪽 35리에 있다. 이 산의 북쪽은 곧 상주의 공성(功城) 및 중모(中牟)의 2현이다. 극락산(極樂山) 군의 서북쪽 11리, 황간현의 경계에 있다. 흑운산(黑雲山) 군의 북쪽 31리에 있다. 병점(餠岾) 군의 남쪽 11리에 있다. 고성산(高城山) 군의 남쪽 9리에 있다. 좌현(左峴) 속문산 동쪽 선산부의 경계에 있다. 괘방현(卦方峴) 군의 서쪽 15리, 황간현의 경계에 있다. 감천(甘川) 군의 동남쪽 11리에 있다. 곧 지례현의 감천의 하류로서 동쪽으로 흘러 개령현의 경계로 들어간다. 직지천(直旨川) 근원이 황악산에서 나와 군의 남쪽 5리를 지나 동쪽으로 흘러 감천으로 들어간다. 연화지(鳶嘩池) 군의 남쪽 1리에 있다.
【토산】 은어[銀口魚]ㆍ송이[松蕈]ㆍ산무애뱀[白花蛇]ㆍ지황ㆍ꿀[蜂蜜]이다.
【성곽】 속문산성 돌로 쌓았고, 둘레가 2천 4백 50자, 높이가 7자다. 안에 샘 2개, 못 2개가 있다. 군사 창고도 있다.
【봉수】 고성산 봉수 남쪽은 지례현의 귀산(龜山)에, 서쪽은 충청도 황간현 눌이항산(訥伊項山)에 응한다. 소산(所山) 봉수 군의 북쪽 29리에 있다. 동쪽은 개령현 감문산(甘文山)에, 북쪽은 상주 회룡산(回龍山)에 응한다.
『신증』 【궁실】 동헌(東軒) 조위(曺偉)의 〈중수기〉에, “금산은 신라 때에는 개령의 영현이었는데, 고려 때에 경산부(京山府)에 이속되고 공양왕 때 비로소 감무(監務)를 두었다. 본조에 와서는 공정대왕의 어태(御胎)를 안치하였고 군으로 승격시켰다. 역대의 연혁 변동이 많았으나 땅이 경상도와 충청도의 갈리는 곳에 놓여 있어, 청주(淸州)를 경유하는 일본사신과 우리나라 사신은 반드시 이곳을 지나가므로, 관에서 접대하는 번거로움이 상주(尙州)와 맞먹을 정도로 왕래의 요충지다. 본래 있던 관청건물은 좁고 낮아 여름에 무덥고 답답했다. 오는 손님들이 시루 안에 들어앉은 것처럼 답답하고 괴로워하였다. 성화(成化) 기해년 가을에 병조 정랑(兵曹正郞) 파산(巴山) 이인형(李仁亨) 공이 이곳에 원으로 오자, 정치가 잘되고 백성은 혜택을 입어 폐단은 없어지고, 이로운 점은 흥하여 다스림이 온 도의 으뜸이 되었다. 4년이 지난 임인년에 향리의 부로들을 불러 이르기를, ‘관사(館舍)를 마련하는 것은 귀한 손님을 접대하고 왕명을 존중하기 위함이다. 이 고을은 지은 지 오늘까지 1백여 년이 되어 허물어진 곳이 반이 다 될 뿐 아니라 서늘한 누대와 높은 정자가 없어 손님을 모시고 올라가 볼 만한 곳이 없으니, 이 어찌 관리들만의 걱정이겠는가. 당신들 부로(父老)들의 수치이기도 하므로 새로 짓고자 한다.’ 하니, 부로들이 좋다고 하였다. 이에 사실을 갖추어 감사에게 상신하여 허락을 받고, 재목을 모으고 공사를 진행함에 있어, 한 사람의 백성도 번거롭히지 않고, 놀고 있는 사람들로 옛터를 넓혀서 지었다. 그 규모는 대마루와 서까래가 높직하고 짜임새가 치밀하며, 안의 온돌방과 바깥 담장에는 붉은 흙으로 곱게 바르고 화초도 심었는데, 착공한 지 겨우 반년 만에 준공되었다. 지난날의 좁던 것이 넓고 훤하여지며, 낮던 것이 높직하고 시원하게 되었다. 비록 누대는 없고 정자도 없으나, 지형이 높고 탁 트여서 전망이 매우 좋다. 겹겹이 싸인 멧부리는 책상머리에 읍하고, 우거진 숲과 풀이 무성한 들은 발을 드리운 창에 와서 비친다. 바람은 시원하고 새들은 지저귀면서 드나드니, 그윽하고 조용하고 깨끗하고 산뜻한 정경은 사람으로 하여금 속세에서 벗어난 느낌을 가지게 한다. 향리의 부로들이 모두 모여서 뜰에서 축하하며 공의 덕을 칭송하고 그의 공을 신기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갑진년 여름에 내가 사명을 받들고 남쪽에 와서 어버이에게 문안드리고, 이어 군에 나아가 공에게 뵈니, 공이 새로 지은 동헌에 앉아 술잔을 들면서 나에게 부탁하기를, ‘우리의 공사가 끝나자마자 때를 맞추어 그대가 왔으니, 일의 전말을 기록하여 후세에 민멸되지 않게 해달라.’ 하였다. 나는 생각하니, 관우(館宇)의 흥폐로써 한 고을의 성쇠를 알 수 있으며, 한 고을의 성쇠로써 세도(世道 형편)의 성쇠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우리 군은 신라, 고려를 거쳐 천여 년을 내려오면서 항상 속현(屬縣)으로서 땅은 좁고 백성은 분주한 일에 지쳤었는데, 이제는 큰 군으로 승격되어 인구가 늘고, 밭과 들의 넓어짐이 전의 배가 되었다. 감무를 둔 이래로 전후 몇 사람이 와서 다스렸으나, 공의 현명함이 가장 드러났다. 정사는 공평하고 송사는 사리에 맞아서 집집마다 글읽고 노래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심지어는 관우가 헐어서도 고치지 않던 것을 이제 모두 새로 지었으니, 세도의 성쇠는 한 고을의 성쇠를 보아 알고, 한 고을의 성쇠는 관우의 흥폐를 보고 안다는 사실을 어찌 믿지 않겠는가. 일본국의 사자로서 연이어 여기에 오는 자는 반드시 지금 달라진 광경을 보고 놀랄 것이며, 더욱 조정의 정치가 전에 비하여 점점 융성해지는 것을 알고, 마음속으로 우러러보고 부러워할 것이다. 그렇다면 공이 해놓은 이 일이 어찌 작다고 하겠는가. 하물며, 세상에 뛰어난 공의 명성으로써 많은 선비 중에 장원하고, 구름길[雲路 벼슬하여 출세하는 길]에 마음껏 날 수 있는 빛나는 소문이 날로 퍼지는데, 영진(榮進)할 뜻을 끊고 봉양하기에 편하도록 고을 원을 자청했다. 그 큰 재주를 굽혀서 한 고을을 다스림에 있어 청렴으로 처신하고, 위엄으로써 관리를 거느리며, 자애로써 백성에게 은혜를 베풀었다. 모든 장부와 문서와, 작고 큰 사무를 꼭 한결같이 처리하고, 나머지 일도 모두 정리하지 않은 것이 없다. 남은 힘으로 영선(營繕)할 적에도 사방의 백성들이 도끼질하고 담쌓는 수고를 안 적이 없다. 들인 힘은 간단한데 거둔 공은 빨랐으니, 훗날 조정에 서서 일을 처리해 나갈 적에도 이러한 방법을 쓸 것이다. 공의 뒤를 이어 원으로 오는 이도 아마 공의 뜻을 따라 공이 미처 다 하지 못한 일을 더할 것이니, 그렇게 되면 이것 또한 우리 백성의 복이요, 우리 고을의 행복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신증』 【누정】 서하루(棲霞樓) 객관 동쪽에 있다. 군수 김세균(金世鈞)이 세우고, 강혼(姜渾)이 이름을 지었다. 경렴당(景濂堂) 김종직이 옛날에 살던 집으로, 군의 서쪽 백천리(百川里)에 있다. 당 앞에 못을 파고 연을 심고 이름을 경렴이라 하였다.
【학교】 향교 군의 남쪽 1리에 있다.
【역원】 김천역(金泉驛) 군의 남쪽 10리에 있다. ○ 본도에 소속된 역 20을 찰방(察訪)한다. 추풍(秋豐)ㆍ답계(踏溪)ㆍ안언(安彦)ㆍ무계(茂溪)ㆍ안림(安林)ㆍ금양(金陽)ㆍ부상(扶桑)ㆍ동안(東安)ㆍ팔진(八鎭)ㆍ무촌(茂村)ㆍ고평(高平)ㆍ양원(楊原)ㆍ권빈(勸賓)ㆍ성기(星奇)ㆍ양천(揚川)ㆍ금천(琴川)ㆍ문산(文山)ㆍ작내(作乃)ㆍ장곡(長谷)ㆍ성초(省草) ○ 찰방 1사람이다. ○ 이첨(李詹)의 시에, “낡은 집이 산기슭에 의지하였고, 위태로운 다리는 옅은 모래를 건넜다. 땅이 기름지어 가을에 풍년들었고, 나무는 늙어서 해마다 꽃도 안 피네. 사신 탄 말이 역 아전을 놀라게 하고, 시골 풍속은 들노래에서 들려주네. 유연(悠然)히 회포가 움직이는 것, 좋은 계절을 나그네로 지냄일세.” 하였다. 문산역(文山驛) 군의 북쪽 2리에 있다. 추풍역(秋豐驛) 군의 서쪽 35리에 있다. 남원(南院) 군의 남쪽 3리에 있다. 김천원 김천역 동쪽에 있다. 과곡원(果谷院) 군의 남쪽 35리에 있다. 좌현원(左峴院) 좌현 남쪽, 군에서 북쪽으로 38리 되는 곳에 있다. 당지원(堂旨院) 군의 서쪽 21리에 있다. 이정원(梨亭院) 군의 북쪽 20리에 있다. 두하원(豆下院) 군의 북쪽 28리에 있다.
【불우】 직지사(直旨寺) 황악산(黃嶽山) 동쪽에 있으며, 고려 임민비(林民庇)가 지은 대장당(大藏堂) 기문이 있다. 진흥사(眞興寺) 병점(餠岾)에 있다. 능여암(能如菴) 직지사 서쪽에 있고, 신라 말엽의 고승 능여가 거처하던 곳이다. 복룡사(伏龍寺)ㆍ난암(卵菴) 모두 흑운산(黑雲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군의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 오파산(五波山)에 있다. 여단 군의 북쪽에 있다.
【고적】 어모(禦侮)폐현 본래 신라의 금물현(今勿縣)이었고, 음달(陰達)이라고도 하였다. 경덕왕 때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감문군(甘文郡)에 소속시켰다. 고려 현종 때에는 상주에, 본조 태조 때에는 본군에 소속되었으며, 지금은 직촌(直村)이 되었다. 굴곡부곡(屈谷部曲) 군의 남쪽 3리에 있다. 신가량부곡(新加良部曲) 군의 남쪽 23리에 있다. 조마부곡(助馬部曲) 군의 남쪽 25리에 있다. 어미곡부곡(於未曲部曲) 군의 동쪽 27리에 있다. 영명향(迎命鄕) 군의 동쪽 30리에 있으며, 개녕현 남촌(南村)으로 넘어 들어간다. 황금소(黃金所) 군의 서쪽 30리에 있다. 수다곡소(水多谷所) 군의 남쪽 28리에 있다. 파매처(巴買處) 군의 서쪽 7리에 있다. 속칭 봉계리(鳳溪里)라고 한다.
【명환】 본조 김증(金曾) 경태(景泰) 말엽에 군을 맡아 다스렸는데, 정치가 인자하고 자상하였으며 공명하고 과단성이 있었다. 관직에 있을 때 죽으니 아전과 백성들이 슬퍼하기를 부모를 잃은 것과 같이 하였다. 권득경(權得經) 세조 때에 예조좌랑으로서 어머니를 위해 청원하여 군수가 되었다.
『신증』 이인형(李仁亨)ㆍ권빈(權璸)ㆍ문근(文瑾) 정사가 청렴하고 송사가 간명하였다.
『신증』 【인물】 본조 조위(曺偉) 젊어서 과거하였고, 시와 문장을 잘하였다. 벼슬이 호조 참판에 이르렀으며, 연산 때에 순천(順川)에 귀양가서 죽었다. 호는 매계(梅溪)이며 시집이 있다.
【우거】 본조 이호성(李好誠) 세종 기해년에 무과에 급제, 무용과 청렴으로 세상에 이름이 높았다. 여러 차례 서북 변경을 지켰고, 옛날 명장의 풍도가 있었으며, 벼슬이 경상우도 절도사(慶尙右道節度使)에 이르렀다. 금극화(琴克和) 그의 선조는 봉화(奉化) 사람인데, 이 군에 이사해 살면서 벼슬이 옥과(玉果) 현감에 이르렀다. 형 극해(克諧)가 죽고 그의 아들 유(柔)가 아직 어렸으므로, 극화가 3년 동안 복상하면서 유를 자기 이들과 같이 길렀고, 유도 그를 아버지처럼 섬기었다. 나이 97세에 죽었다. 이호인(李好仁) 하빈(河濱) 사람으로 대대로 본군의 장암촌(壯巖村)에 살았다. 벼슬이 임피(臨陂) 현감에 이르렀다. 효성이 지극하고 집안이 엄숙하였으며, 제사는 한결같이 가례에 따랐고, 시(緦 석달 복 입는 것)와 공(功 대공은 9월 소공은 5월 복 입는 것)의 친척이 죽어도 모두 제대로 복을 입었다. 유익명(兪益明) 세종 때에 무예로 이름이 났으며, 동북 변경을 지키기 전후 20여 년이었다. 최선복(崔善復) 과거 급제하고 집현전에 들어가 여러 차례 승진하여 벼슬이 경주 부윤에 이르렀다. 최선문(崔善門) 벼슬이 검교 의정부찬성(檢校議政府贊成)에 이르렀다. 이약동(李約東) 과거하여 벼슬이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일에 임하여 청렴ㆍ근엄하였다.
【제영】 첨외벽봉조(簷外碧峯稠) 현맹인(玄孟仁)의 시에, “수양버들은 실실이 늘어지고, 갓핀 연꽃은 점점이 떠 있는데, 난간에 의지하여 다시 고개를 돌리니, 처마 밖에는 푸른 봉우리가 빽빽하구나.” 하였다. 야활갱인조(野闊更人稠) 박융(朴融)의 시에, “대숲에 서늘한 바람이 일고, 솔밭에 푸른빛이 떠도니, 객사의 난간은 의지하여 놀기 알맞은데, 들은 넓고 사람은 빽빽하구나.” 하였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연혁】 본래는 신라 동잠(桐岑)이었는데, 경덕왕(景德王) 16년에 금산(金山)이라 고쳐 개령군(開寧郡)의 영현(領縣)이 되었다.
【방면】 군내(郡內) 끝이 10리다. 미곡(米谷) 서쪽으로 처음이 8리, 끝이 10리다. 금천(金泉) 남쪽으로 처음이 8리, 끝이 10리다. 고가대(古加大) 남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10리다. 건천(乾川) 남쪽으로 처음이 40리, 끝이 50리며, 갑자기 성주(星州)ㆍ지례(知禮) 두 읍 사이에 들어갔다. 조마(助馬) 서남쪽으로 처음이 40리, 끝이 50리다. 과곡내(果谷內) 남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15리다. 과곡외(果谷外) 서남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40리다. 파탄(巴氽) 서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15리다. 본래는 파매처(巴買處)인데, 지금 봉계(鳳溪)라고 한다. 땅은 기름지고 백성은 모두 잘 살았다. 황금소(黃金所) 서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50리다. 구소요(仇所要) 북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40리다. 천상(川上) 북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15리다. 천하(川下) 북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20리다. 위량(位良) 동북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50리다. 대항(代項) 서남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45리다. 연명(延命) 본래 연명향(延命鄕)이다. 동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40리고, 성주(星州) 북쪽 경계와 개령(開寧) 남쪽 경계에 들어가 있다. ○ 굴곡(屈曲) 부곡은 남쪽으로 3리다. 신가량(新加良) 부곡은 남쪽으로 23리, 조마(助馬) 부곡은 남쪽으로 25리고, 지금 조마면이다. 미곡(米谷) 부곡은 남쪽으로 27리, 수다곡소(水多曲所)는 남쪽으로 28리다.
【토산】 대[竹]ㆍ감ㆍ석이버섯[石蕈].
【성지】 고성산고성(高城山古城) 남쪽으로 9리며, 남은 터가 있다.
【누정】 풍월루(風月樓) 읍내(邑內). 봉황대(鳳凰臺) 대(臺)의 서쪽에 용금문(湧金門)이 있다.
【창고】 읍창 김천역창(金泉驛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