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하지 않은 죄인과 이단자들에게 내려지는 징벌인 파문은 교회 역사와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파문된 자들은 성사에 참여하는 것이 금지 되었고, 신도들의 사회에서도 배척당했습니다.
종교적인 동시에 사회적이기도 했던 '파문'이라는 처벌은 죄인을 회개하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었죠.
중세시대부터 파문은 정치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한 나라의 수장을 파문시킴으로써 지배자로부터 권력을 빼앗고, 복종의 의무를 지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파문은 종교적 이유뿐만 아니라 정치와 같은 다양한 이유로 행해지게 되었습니다.
하인리히 4세, 프레데릭 2세와 같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뿐 아니라,
로베르, 루이 12세, 앙리 3세, 나폴레옹과 같은 군주들도 파문되었죠.

장 폴 로랭 - 경건왕 로베르의 파문
경건왕 로베르는 998년 최초의 정치적 파문을 당했습니다.
교회는 로베르가 불임을 이유로 이탈리아 왕의 딸인 첫 번째 부인 로잘라와 이혼한 것은 용인하였으나,
두 번째 부인으로 부르고뉴 공작의 딸 베르트를 선택한 것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로베르의 사촌이기도 한 베르트와 결혼하는 것은 근친상간이며,
한 아이의 대부와 대모였던 이들의 결혼은 문젯거리가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베르트 역시 아이를 가질 수 없었고, 로베르는 다시 그녀와 이혼합니다.
베르트와의 이혼으로 파문은 취소되었고 다시 왕좌에 오른 로베르는 별 어려움 없이
프로방스 공작의 딸 콘스탄스를 세 번째 부인으로 맞이했습니다 .

카노사의 굴욕
로베르가 사망한 뒤, 채 한 세기가 지나기도 전에 또 하나의 정치적 파문이 있었습니다.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1075년 교황청의 주교 임명을 주제로 한 칙령을 발표했습니다.
임명권을 빼앗긴 신성로마 제국의 하인리히 4세는 교황을 페위시키려고 했고,
이에 그레고리오 7세는 왕조를 파문하는 것으로 대응했죠.
왕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영주들은 교황을 지지했고, 왕은 결국 교황에게 몸을 낮출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인리히 4세는 교황이 머무는 카노사의 성으로 찾아가 교황이 죄를 사해 줄 때까지
눈 쌓인 성 밖에서 맨발로 3일간 기다려야 했습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카노사의 굴욕'입니다.
하지만 하인리히 4세는 왕권을 되찾은 후 공의회를 소집해 그레고리오 7세를 폐위했습니다.

십자군의 예루살렘 지도
이슬람의 셀주크투르크 족이 강해지자 서방 사회에는 큰 혼란이 일어났습니다.
이제까지 이슬람 지도자들의 허락 하에 이루어지던 성지순례가 불가능한 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1095년 교황 우르바노 2세는 십자군 원정을 발표합니다.
반응은 열광적이었고, 수천 수만의 귀족, 농민들이 모였죠.
첫 번째 기사단은 약탈과 유대인 박해를 서슴치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투르크 군에 의해 전멸하고 말았습니다.
그사이 유럽에서는 대규모 십자군이 조직되었고 그들은 예루살렘까지 진격합니다.

들라크루아 -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함락
하지만 그런 십자군 원정도 한 세기가 흐르자 그 열정은 사그라들기 시작했습니다.
하고자 하는 의욕도 사라지고, 모두들 계속되는 전쟁이 지쳐있었죠.
교황 인노첸시오 3세가 제 4차 십자군 원정을 발표했을때는 겨우 만명이었다고 합니다.
십자군 원정대는 베네치아 해군의 힘을 빌려야했습니다.
그들은 베네치아 해군의 함선을 이용하기 위한 비용을 지불하기 위해
크로아티아 항구를 약탈하는 것으로 원정을 시작했죠.
크로아티아 역시 기독교를 믿는 형제였지만 베네치아의 수중으로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나서 십자군 원정대는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할 수 있었죠.

인노첸시오 2세
교황을 임명하는 불분명한 기준들이 오랫동안 계속되면서 많은 논쟁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기독교 역사 속에는 정식으로 인정받지 못한 39명의 대립교황이 존재합니다.
누가 공식적인 성 베드로의 후계자로 인정받았는지 규정하는 것은 매우 미묘한 논쟁거리가 되었죠.
스스로 성 베드로의 후계자라 주장하는 이들은 저마다 확실한 논거를 제시했고,
그들 주위에는 그들을 따르는 신자들이 많았습니다.
1130년 호노리오 2세가 선종한 이후, 후계자 선정을 둘러싼 문제들이 수면 위로 떠올랐습니다.
아나클레토 2세를 추종하는 추기경과 인노첸시오 2세를 지지하는 추기경들이 두 파로 갈렸죠.
아나클레토 2세를 추종하는 추기경들이 다수를 이루자 인노첸시오 2세는
로마를 떠나 프랑스로 도피했습니다.
인노첸시오 2세의 선택은 적절했습니다.
그가 프랑스로 피신해오자, 프랑스 루이 6세는 교황 임명을 둘러싼
분쟁을 해소하기 위해 공의회를 소집했습니다.
결국 인노첸시오 2세는 1131년 교황으로 정식 임명되었고,
오랜 기간 영국과 독일, 프랑스 군주들의 힘을 기반으로 교황의 자리를 지킵니다.

조토 - 성 프란체스코의 법열
1223년 성탄절, 이탈리아 그레치오 신자들은 교회에 들어서는 순간
이제까지 보지 못한 공연을 관람하게 됩니다.
동굴처럼 꾸며진 무대위에는 당나귀와 소가 구유앞에 묶여있었죠.
그리스도의 탄생을 나타내는 최초의 구유장식이 성 프란체스코에 의해 무대에 오른 것입니다.
젊은 이탈리아의 수도자였던 성 프란체스코는 '작은 형제들'이란 이름의 수도회를 설립했습니다.
지식인만을 위한 신학자들의 종교에 대항,
청렴함과 명확한 메시지 전달을 최고의 미덕으로 삼아 복음서에 충실 할 것을 주장했죠.

찰스 번 - 그리스도와 성자가 된 루이 9세와 함께 있는 루이 16세
프랑스 랭스에서 치러진 프랑스 왕의 대관식은 왕에게 기적의 힘을 실어주는 종교 의식이었습니다.
루이 9세는 나병 혹은 '로이의 병'이라 부리는 결핵을 앓는 이들을 치료하는 기적을 행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루이 9세는 기적을 행하는 왕으로 흔히 표현됩니다.
그는 군주의 종교적 중요성을 강조한 만큼,
정의를 수호하고 가난한 이의 발을 씻겨 주는 등 뛰어난 성품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루이 9세는 비잔틴 황제에게 비싼 값을 치르고 산 그리스도의 가시 면류관을 보호하기 위해
1248년 생트 샤펠을 건설했습니다 .
하지만 십자군 원정에서 그는 이집트 술탄의 포로가 되었고
1250년 엄청난 몸값을 치르고 나서야 풀려날 수 있었죠.
프랑스로 돌아온 뒤 15년 후 그는 다시 십자군 원정을 떠납니다.
하지만 1270년 튀니지에 도착, 흑사병으로 그곳에서 숨을 거두었죠.
30년이 지난 뒤, 루이 9세는 기독교 군주들의 모델로서 공식적으로 성인의 칭호를 받았습니다.
국가적인 서사시라 할 수 있는 잔다르크의 이야기는 동시에 흥미롭고 놀라운 종교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그녀의 이야기는 초 자연적인 환영을 보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미카엘 대천사와 성녀 가타리나, 성녀 마가리타가 나타나
18살의 소녀 잔에게 '프랑스를 구하라' 고 말합니다.

잔 다르크
잔의 첫 번째 기적은 프랑스의 시농 지방으로 샤를 7세를 호위하러 가던
사령관 보드리쿠르의 경호 임무를 맡게 된 것입니다.
두 번째 기적은 잔이 비밀스런 무언가에 이끌려 단번에 신하들 사이에 숨어있던 샤를 7세를 알아 본 것이죠.
아직 황태자인 샤를 7세에게 다가간 잔은 자신이 영국군과 싸우기를 원하며,
그렇게 된다면 랭스에서 즉위식을 올릴 수 있도록 하겠다고 설득했습니다.
이렇게 잔의 신비한 모험은 시작되었죠.
그녀는 곧바로 중년 여인들에게 처녀성을 검사 받았고, 신학자들은 잔의 신앙심을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1429년 잔은 7개월 간 영국군의 지배를 받던 오를레앙에 도착했고 트로이,
오세르, 샤롱 등에서 차례로 승리를 거두며 랭스로 가는 길을 열었습니다.
7월17일 샤를의 대관식에서 잔은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깃발을 흔들며 왕의 곁을 지킵니다.
하지만 그 후 잔은 계속 실패를 거듭했고 급기야 1431년 마녀로 몰려 루앙에서 화형을 당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녀가 죽은 뒤 1456년 그녀의 유죄 판결을 취소하는 새로운 판결이 공표되었고
잔은 대중적인 영웅이 되었죠.
그리고 1912년 프랑스는 잔을 추모하는 국가 기념일을 제정합니다.
그리고 1920년 베네틱토 15세는 잔을 성인으로 추대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