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ltimate High-바다에서 에베레스트까지 혼자 힘으로
저자: 괘란 크롭(Göran Kropp)
출판년도: 1999년
쪽수: 228쪽
출판사: 디스커버리 북스
‘바이 페어 민즈(by fair means)!’
순수하고 공정한 방법과 수단으로 산을 오르려는 정신은 순수 알피니즘과 알파인 스타일을 추구하는 등반가들에게는 절대적인 것이다. 알프레드 머메리와 헤르만 불, 라인홀트 메스너는 이 정신의 선구자들이다.
이들의 전통을 이어받은 29세의 괘란 크롭은 자신의 체력과 능력만으로 에베레스트에 도전했다. 산소 마스크를 쓰고 도전하는 등반가에게 에베레스트의 진정한 높이는 8,848미터가 아니며, 산소 마스크는 인간의 순수한 본성과 자연을 가로 막는 벽일 뿐이라는 것이다. 셀파의 도움과 고소 캠프 등의 어떠한 외부지원도 거절했고 단지 자신의 능력만으로 진행했다.
궁극의 절대적인 높이 8,848미터에 도달하려는 그의 계획은, 고향인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네팔 카트만두까지는 트레일러가 달린 자전거로,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까지는 포터 없이 혼자서 모든 짐을 운반하고 무산소로 고정 로프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가 받은 외부의 지원은 독일로 넘어올 때 이용한 나룻배와 생일 때 받은 쵸콜릿 한 개, 그리고 에베레스트 등정 후 하산할 때 사용한 아이스폴 루트뿐이었다.
1995년 10월 16일, 자전거에 연결한 트레일러에 110kg의 짐을 싣고 11,000km에 이르는 카트만두까지의 자전거 여정이 시작되었다. 이 짐에는 자전거 여행에 필요한 장비와 에베레스트 등반에 필요한 식량과 장비, 연료 일체가 준비되어 있다. 혼자서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하는 그로서 등반 식량은 모두 동결건조된 고소식량으로 최대한 경량화 시켰다.
동유럽과 아시아를 통과하는 130일 간의 여행은 스웨덴(430km), 독일(310km), 체코(223km), 슬로바키아(77km), 헝가리(265km), 루마니아(233km), 불가리아(390km), 터키(1,191km), 이란(1,601km), 파키스탄(1,177km), 인도(914km)를 거쳐 네팔(340km)에 이르렀다.
여러 나라의 시가지를 통과하며 겪었던 비웃음과 냉대, 몰상식한 돌멩이 습격과 멱살잡이, 경적시위, 총격사건, 지프와의 충돌 등등 과연 이대로 카트만두까지 갈 수 있을까로 많은 날을 고민으로 보내기도 했다.
그의 이번 계획은 1990년 무즈타그봉과 1993년 K2봉 단독 무산소 등정(세계에서 두 번째)에 성공하면서 시작되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대규모 원정대는 많은 포타와 셀파, 대량의 짐을 필요로 했고 엄청난 경비와 수많은 쓰레기만을 양산할 뿐이었다.
또한 그는 평소 메스너를 존경해 왔는데, 1980년 메스너의 에베레스트 무산소 단독등정은 그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고향 집에서 에베레스트 정상까지 오직 자신의 체력과 정신력에 의지해서 오를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여기서 자전거를 이용한 등반의 힌트를 얻게 되었고, 해발 0미터에서 8,848미터까지 오직 자력에 의한 도전은 또 다른 ‘바이 페어 민즈’를 성취하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1996년 2월 22일, 외로움과 질병, 적개심을 극복하고 카트만두에 도착했다. 한 달 동안의 휴식을 취한 그는 배낭 두 개에 65kg의 짐을 지고 캐러밴을 떠났다. 루크라까지 비행기를 이용하고 많은 포타와 셀파를 대동한 각국의 등반대는, 그를 보고 ‘미친 스웨덴 사람’이라고 비아냥댔다. 자신의 캠프를 배낭으로 옮기는 바보라는 것이다.
4월 13일, 고향을 떠난 지 6개월만에 해발 5,100미터 지점의 에베레스트 쿰부 베이스캠프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에게 에베레스트는 더 이상 산이 아니었다. 각국의 상업등반대가 밤마다 파티를 열고 음주와 가무를 즐기는 모습은 거의 목가적인 풍경을 연출했던 것이다.
스캔들도 발생했으며 콜라 한 병에 7달러, 미리 개척해 놓은 아이스폴 루트 통과비로 2,200달러 그리고 상업등반대의 1인당 참가비는 6만5천달러에 달했다.
4월 16일, 기본 장비와 텐트, 6일분의 식량을 갖고 등반을 시작했다. 미리 루트를 설치해 놓고 통과비를 받는 아이스폴을 우회해서 새로운 루트를 개척하며 오르는 유일한 사람이 된다. 비디오 촬영을 위해 나온 그의 동료가 건네주는 바나나를 거부했고, 미국의 상업등반대장인 스코트 휘셔가 주는 치즈도 ‘바이 페어 민즈’ 원칙으로 받지 않았다.
5월 3일, 캠프 3을 새벽 2시에 출발하여 사우스 콜을 거쳐 남동릉으로 붙었다. 그러나 사람의 흔적이 없다. 그해 처음으로 등정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무산소로 혼자서 루트를 개척하느라 숨이 턱턱 막히며 남봉에 도착한 시각이 오후 1시 30분, 정상까지는 100여 미터 남짓. 1시간은 더 걸린다. 하지만 오후 2시 이전에는 정상에서 하산을 시작해야 어두워 지기 전에 안전한 귀로가 보장되는데, 이것은 거의 철칙으로 되어있다.
그는 과감하게 돌아섰다. 사우스콜까지 어렵게 내려오지만 그를 기다린 것은 구름과 개스, 폭풍이었다. 한 치 앞을 분간할 수가 없었다. 겨우 찾은 텐트 속에 혼수상태로 빠져들었고, 베이스캠프로 무사히 돌아온 후 휴식을 취했다.
5월 8일, 4개의 상업등반대가 등반을 시작하면서 그 악명높았던 에베레스트의 대참사가 시작되었다. 참가 대원들의 무경험이 탈진을 가속시켰고, 이들을 무리하게 끌어 올리려는 가이드와 셀파의 체력소모가 전진을 더디게 만들었다. 그해 처음 시도되는 등정이기에 고정 로프를 설치해야 했고, 남봉과 힐러리스텝 부근의 병목으로 인한 지체가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죽음의 지대에서 대화의 인지 능력은 6세 된 아이의 수준으로 떨어졌고 단지 동물적인 감각으로 움직일 수 있었다. 상업등반대 대장들의 과도한 등정 집착과 정신적 압박은 정확한 상황 판단을 방해하기에 충분했으며, 여기에 갑작스런 폭풍과 눈보라로 하산하던 8명이 희생된다.
“이번 등반을 위해 그토록 힘들게 준비해 왔는데 여기서 돌아서야 하나? 저 위에는 아직도 그들의 시신이 남아 있는데…. 아는 사람들의 시신을 넘어 정상을 향해야 하나? 남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나에게 지금도 외부 지원없이 등정할 수 있는 여력이 남아 있나? 날씨는 좋아질까? 삶에 대한 열정 때문에 산에 간다고? 얼어죽는 것보다도 더욱 참혹스러운 것은 고독이다.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재도전하는 정신의 소유자가 위대한 등산가이다.”
크롭은 갈등과 고민 끝에 5월 17일, 재도전에 나섰지만 캠프4에서 이틀을 머문 후 캠프2로 내려왔다. 3주일 동안 세 번째 도전이 되는 23일, 드디어 남봉에 올라섰다. 거의 탈진한 상태인 그의 앞으로 등정을 마친 아이맥스팀이 지나갔다. 그들의 산소 마스크와 장비가 환상처럼 보였고 심한 무력감을 주었다.
힐라리스텝에는 고정 로프가 설치되어 있었다. 크롭에게는 마지막 달콤한 유혹이었다.
“바이 페어 민즈!”를 외치며 그는 고정 로프를 이용하지 않고 넘어간다. 정상에는 자신의 열 번째 등정에 성공한 앙리타 셀파가 그를 맞이했다.
크롭은 정상에서 “나는 살아서 베이스캠프까지 내려가야 한다. 자전거로 고향까지 가는 일이 아직 남아있기 때문이다”라고 자신의 녹음기에 말을 남겼다. 카트만두에서 한 달 동안의 휴식을 취한 크롭은, 절대 높이 8,848미터에 도전한 에베레스트 등반의 완성을 위하여 고향을 향해 힘차게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그의 다음 등반 대상지는 2004년에 단독으로 남극점에 도달하는 것이다. 고향에서 남극 까지는 8개월을 계획하고 있다. 카누 항해술을 배울 예정이다. 그것은 비행기로 가지 않고 단독 항해로 다시 ‘바이 페어 민즈’를 실현하기 위해서이다.
첫댓글 참으로 치열한 등반을 추구했던 크롭(1966년 12월 11일-2002년 9월 30일)은 2002년, 미국 워싱턴주의 한 암장에서 암벽등반도중 추락사했습니다. 그는 스웨덴 최초의 K2 등정자이고 파키스탄과 티베트, 남미까지 섭렵했으며 환경보호주의자, 채식주의자, 자동차 경주 선수로도 활동했고요 우주왕복선을 타기 위해 티켓도 구입했더랍니다~ 크롭의 에베레스트 등반은 화석연료를 사용하지 않은 가장 순수했던 등반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