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히 쓰이는 그릇이 되자” (20090823)
디모데 후서 2:14~26 (주해설교) (생명샘 전원교회/3,4남전도회)
[시작]
주 안에서 만나서 반갑습니다. 생명샘 전원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되어서 감사합니다. 3,4,남전도회 연령이 30~40세라고 들었습니다. 이 연령대는 인생의 전반기는 아날로그 시대 후반기는 디지털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세대입니다. 학창시절 IMF(1997년)의 외환위기 겪었고 한참 돈을 벌어야 할 때 전 세계적인 금융위기를 겪고 있는 세대입니다. 40대의 인터넷 검색 1위가 로또, 2위가 환율, 3위가 팍스넷(주식정보)이라고 합니다. 돈을 벌어야 하는데 세계적인 경제 위기와 자녀 교육비가 많이 들어서 힘듭니다. OECD국가들 가운데 이혼율이 높고, 사망률이 가장 높다고 합니다. 30~40대는 사회적으로 중추적인 역할을 하면서 가장 치열한 삶의 현장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30~40대는 사회에서 뿐 아니라 교회에서도 중심적인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각 부서에서 실제적인 실무를 많이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 만큼 영적으로 건강해야 하고 성숙의 과정이 필요 합니다. 한편으로는 영적으로 많은 갈등과 유혹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가 디모데 후서를 보낼 때 디모데는 에베소에서 목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30대 중반에서 40대 초반이 아닐까 생각 됩니다. 그래서 디모데 후서를 본문으로 택하여 보았습니다.
[그릇에 대한 비유]
바울 사도는 가르칠 때에 그릇의 예를 들어서 설명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로마서 9장21절에서 토기장이가 진흙으로 그릇을 만들 때 값어치 있고 귀한 그릇으로 만들 수도 있고 값싼 그릇으로 만들 수 있는 것처럼 인간의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에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디모데 후서에서는 교회에서 하나님의 일꾼으로 귀하게 쓰임을 받는 사람이 있고 천하게 쓰임을 받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예를 들고 있습니다.
20절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히게 쓰는 것도 있나니”
여기서 “큰 집”은 하나님의 교회를 말합니다. 이 서신은 에베소 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디모데에게 보낸 목회서신입니다. 일차적으로는 에베소 교회를 염두에 둔 것이지만 모든 교회에 적용이 됩니다. 초기 기독교 시대 뿐 아니라 오늘날 교회에도 적용이 됩니다. 생명샘 전원교회에도 적용이 됩니다.
교회에서도 귀하게 쓰임을 받는 사람이 있고 천하게 쓰임을 받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하게 생각 되는 것은 ‘귀하게 쓰임을 받는 사람’과 ‘천하게 쓰임을 받는 사람’의 기준과 대상일 것입니다. 이것을 계급 구조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장립집사, 권사, 장로, 목사는 귀히 쓰임 받는 그릇이고 서리 집사는 중간급이고 그 이하는 천하게 쓰임을 받는 사람에 포함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불쾌한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계급 구조의 의미가 아닙니다. 얼마나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교회와 지역사회에서 봉사 하는 개인의 영적인 수준을 의미 합니다. 교회의 직분이 그냥 주는 것이 아니고 교회 공동체에서 검정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어느 정도 중요한 객관적인 자료는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절대적인 기준은 아닙니다.
제가 올해로 목사 안수 받은 지 20 째입니다. 20년 동안 목회를 하면서 몇 대째 모태신앙을 이어 온 사람들 가운데 좋은 신앙인도 만나기도 했고 모태가 아니고 못 된 신앙인도 보았습니다. 직분자들 가운데도 귀한 믿음을 소유자한 사람도 보았고 천하게 봉사하는 사람도 보았습니다. 성도들의 눈에 교역자를 보는 눈도 그렇다고 생각 됩니다. 참 귀한 목회자라고 느껴지는 사람도 있고 천하게 느껴지는 목회자도 있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귀하게 쓰임을 받는 사람’과 ‘천하게 쓰임을 받는 사람’의 기준이 교회의 직분이 높고 낮음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희 어머니는 올해 73살 인데 만년서리 집사입니다. 식구들이 많고 집안이 가난해서 학교교육을 받지 못했습니다. 성경을 읽다가 글을 깨우쳤습니다. 매일 성경을 몇 장씩 읽었습니다. 요즈음은 제법 빠르게 읽습니다. 글을 쓰는 것을 배워서 군대에 있는 손자에게 위문편지를 보냈는데 내무반에서 인기 짱이었답니다. 소리 나는 대로 썼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오랫동안 주방장을 하고 계십니다. 자식이 목사라고 교회에서는 일체 자기 의견을 말하지 않는 답니다. 교회에서 인정받고 사랑을 많이 받는 것 같습니다.
교회에서 귀하게 쓰임을 받는 것은 직책이 높고 낮음이 아니고 학력 수준에 있지 않습니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전 12:31) 우리는 주님께 귀하게 쓰임을 받으려는 열망과 목표를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다음 관심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귀하게 쓰임을 받는 것입니다. 제3,4 남전도회 회원 여러분! 귀하게 쓰임 받고 싶습니까? 아니면 천하게 쓰임을 받고 싶습니까? 귀하게 쓰임을 받고 싶지요. 이런 질문은 초등학생들에게 물어보면 대답을 잘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귀하게 쓰임을 받을 수 있습니까?
21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 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이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 이 되리라".
이 구절은 문단의 중앙에 있습니다. 앞쪽과 뒤쪽을 연관을 지어서 살펴 볼 수 있습니다. 문단 앞쪽에 14~19절은 이단에 대한 경계입니다. 교회는 복음을 올바르게 가르쳐야 하고 지켜야 합니다. 이단의 문제는 초기 기독교 시대나 오늘날에나 중요한 문제입니다. 귀하게 쓰임을 받는 사람은 복음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분별해야 합니다. 바울은 구체적으로 후메내오와 빌레도의 거짓 가르침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부활이 이미 지나 갔다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의 육신의 부활을 부정하고 상징적이거나 영적인 의미로만 이해를 했습니다. 장차 있을 그리스도인들의 부활의 역사적인 사건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초기 기독교 시대에 그노시스파라고 불린 집단은 예수님께서는 육체로 오시지 않았으며 인간의 몸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을 뿐이라는 가현설(假現說)을 주장 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그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요한일서 4:2, 3; 요한 이서 7). 서구신학은 그리스 철학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것은 신학을 많은 논쟁적인 관념론으로 빠뜨렸습니다. 독일 철학과 신학이 한때 상당히 인기가 있었고 발전 했었는데 쇠퇴하게 된 것은 관념론의 한계 때문입니다.
아무리 이단들이 일반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보다 열심이 특심하게 보여도 그들은 예수님의 귀한 일꾼으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믿음에서 파선한 자로 간주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의 목회자를 선정할 때나 교사를 선정 할 때 제대로 신학교육을 받고 검증 된 사람이 중요 합니다. 교회 숫자만 늘 수 있다면 이단이라도 좋다는 식은 아주 위험한 발상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귀한 일꾼이 되려면 복음을 정확하고 바르게 배우고 믿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필요한 것은 문단의 후반부인 22~26절입니다.
이것은 앞부분의 복음을 정확하고 바르게 배우고 믿는 것에 이어서 두 번째입니다. 자신을 깨끗하게 하여 거룩한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거룩한 생활은 하나님이 행하라고 하신 것을 적극적으로 행하고 금하라고 하신 것을 금하고 사는 것입니다. 십계명을 지키는 것이 거룩한 삶과 연결 됩니다. 그 다음에는 윤리적인 부분입니다. 한국 교회가 과거에 비해서 윤리적인 부분을 검증하는 것이 많이 약화 되었습니다. 오히려 교육, 재력, 사회적인 지위, 유명도 등 능력에 초점을 두는 경향이 강합니다. 개인의 윤리 부분은 개인의 경건 생활과 연결 됩니다. 22절 이하에 “또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22절) 라는 권면과도 연결이 됩니다. 정욕은 식욕, 색욕, 지식욕, 재물욕, 명예욕, 권세욕 등입니다. 이런 유혹에 사람들 마다 약한 부분이 있습니다.
식욕을 잘 참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79년에 대학 1학년 때 한국대학생 선교회(CCC)에서 활동 할 때 감람산 기도원(김해)에서 3일 금식 수련회를 했습니다. 저도 처음 금식이었습니다. 배고픔을 이기지 못해서 저녁이 되자 매점에서 사먹는 사람들을 목격했습니다. 저는 그 때 3일 금식을 하고 몇 차례 3일 금식을 하다가 5일 10일까지는 늘려서 몇 번 했습니다. 1년에 1월과 9월에 두 번 정도 규칙적으로 금식을 한 경우도 있습니다. 저는 기도원에 들어가서 하지 않고 일상생활을 하면서 했습니다. 식욕을 이기는 테스트는 맛 있는 음식을 차려 놓고 아니면 음식 냄새 좋은 음식점에서 물만 먹고 금식에 성공하면 합격선에 들것입니다.
그 다음은 색욕입니다. 식욕과 같은 본능에 속합니다. 지금까지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아서 하나님 앞에서 실정법을 어기지 않고 살아 왔다면 하나님의 은혜로 알아야 합니다. 그 만큼 어려운 부분입니다. 산속의 스님도, 카톨릭의 신부도, 목사도, 신학교 교수도 칠계를 범해서 넘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카톨릭 신부도 가정을 허락하자는 안이 나오고 있습니다. 매년 신학교를 졸업해서 목회를 하는 사람들 가운데 몇 명은 칠계를 범해서 넘어 집니다. 우리가 이 문제로 실정법은 어기지 않았다고 해도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 5:28).
이 말씀을 대할 때 여러분 어떤 생각이 듭니까? 여기서는 남녀 모두를 의미 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한 번도 이런 생각을 안 해 본 사람 있으면 손 한 번 들어 보아요. 아무도 없지요. 손들기가 부끄러워서 안 드는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사실은 아무도 없는 줄 알고 손을 들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분명이 명하셨다면 분명히 이길 수 있는 길이 있을 것입니다. 끊임없이 기도하며 영적인 경건에 힘쓰고 성령이 충만 하면 그런 생각이 없어집니다. 그것이 가능할까 반신반의 하던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에 전하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인간의 모든 욕망을 끊는 것을 해탈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경건에 힘쓰면 모든 정욕으로 부터 자유로운 영적인 자유함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마음이 악한 욕심에 빠져 있으면 귀하게 쓰임을 받지 못합니다. 그것을 이겨 내야 귀하게 쓰임을 받습니다.
셋째, 귀하게 쓰임을 받으려면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사람과 불순종한 사람이 어떻게 쓰임을 받았는지 많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요셉은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순종의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는 불순종 했습니다. 사울 왕은 불순종 했습니다.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도 불순종 했습니다. 순종하면 귀히 쓰임을 받고 불순종하면 천하게 쓰임을 받습니다. 교회의 가르침에 순종해야 합니다. 목사의 가르침에 순종해야하고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넷째, 귀하게 쓰임 받으려면 준비해야 합니다.
자신의 달란트를 계속 개발해서 귀하게 쓰임을 받을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것입니다. 그리스인들이 공부하고 기술을 배우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노력을 멈추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다섯째, 귀하게 쓰임을 받으려면 선한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은 더욱 선해 집니다. 악한 일을 하는 사람은 더욱 악해 집니다. 갱단에 속해 있으면 악한 일을 하게 됩니다. 우리의 하루하루의 삶의 현장과 행위가 어디에 있는지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선한 일을 끊임없이 행하는 사람이 귀하게 쓰임을 받습니다. 제3,4남전도회 여러분! 생명샘 전원교회 성도 여러분! 모두가 귀히 쓰임 받는 그릇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헌신예배에 초대해 주신 이진흠 목사님과 생명샘 교회 성도들에게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