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동양의 역사는 염제 신농으로부터
동양의 역사에 약간의 지식이 있는 사람들은 의례히 '동양의 역사는 삼황오제(三皇五帝)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삼황오제란 복희(伏羲)' 신농(神農), 황제(黃帝) 세 황(皇)과 금천(金天), 고양(高陽), 요(堯), 순(舜), 우(禹) 다섯 임금을 말하는데, 이런 지식의 근거는 아마도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서 '염제(炎帝)이 덕이 쇠해지자 천하가 황제(黃帝)에게 복종하였다'고 하여 황제로부터 동양이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기록하였다.
그러나 사마천은 황제를 높이려는 의욕이 앞서 황제보다 앞에 염제가 제위에 있었던 사실을 언급하는 중대한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동양사의 기록은 당연히 황제보다도 앞선 염제로부터 시작해야 했음에도 염제를 의도적으로 제외해 버렸던 것이다. 그의 이런 실수는 역으로 동양의 역사가 염제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입증하는 단서가 되고 말았다.
다만 황제의 역사는 기록으로 남고 염제의 역사는 기록에서 제외됨으로써 신농씨에 대한 사실은 많은 부분 기록에서 사라져갔으나 민속에, 문자에, 전설에, 사람들의 뇌리에 남아 기나긴 세월을 견디어 내고 있는 것이다.
2. 우수인신(牛首人身)의 외모
신농씨의 모습을 나타내는 말에 '우수인신(牛首人身)'이란 표현이 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신농씨가 마치 머리에 두개의 뿔이 난 소처럼 생긴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이것은 사마천이 의도적으로폐기한 신농씨의 이야기가 신화나 전설로 전해지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겪게 되는 신화화의 산물이다.
염제 신농씨는 4500여 년 전 지금의 호북성 수현(隨縣) 역산(歷山)에서 양(羊)을 토템으로 하는 부족의 일원으로 태어났으며 섬서성 기산 아래 강수(姜水)라는 물가에 내려가 성장기를 보냈다.
이런 이유로 신농씨의 성을 '강(姜)'이라 했다고도 하고 신농씨의 어머니가 치우씨 집안의 여인이므로 어머니의 성씨를 따라 '강' 이라 했다고도 한다.
장성하여서는 황제족의 임사(妊巳)씨에게 장가들어 중원의 양대 세력의 하나인 황제족과 '합혼족(合婚族)'의 연을 맺게 되었다.
결혼해서는 4명의 아들과 1명의 딸을 두어 모두 하늘의'태양' 즉 '해'로 이름을 지었는데, 희화(羲和) 주(柱), 해(亥), 희(熙), 수(隋), 뉘조(류(성(姓)류)祖)가 그들이다.
그러나 먼저 정착생활을 시작한 염제족과는 달리 전투적이고 아직도 떠돌아다니던 습성을 버리지 못한 황제족과의 정치적인 갈등이 깊어지가, 사위이며 황제의 아들인 소호(少호(범의소리 호))씨에게 제위를 물려주고 호북성 대파산으로 들어가 차(茶)를 비롯하여 약초(藥草)를 기르며 약성을 파악하여 백성들의 건강을 돌보는 일로 여생을 보냈다.
3. 신농씨로부터 기원한 것들
한때 지나인들이 훼방으로 역사의 기록에서조타 제외되는 대우를 받기도 했지만 그러나 동양에서 최초로 문명의 싹을 키운 신농씨의 역사는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불멸의 명성을 이어오고 있었다.
다음은 신농씨로부터 기원한 인류 문명의 자락들이다.
1) 문자(文字)의 기원
언제부터 인류가 문자를 사용했는가 하는 것은 역사학의 중요한 주제의 하나인데, 고금문 가운데 명씨금문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소위 한자는 염제 신농씨로부터 시작되었음이 밝혀졌다.
염제 신농씨야말로 최초로 문자를 발명하여 자신의 이름을 표시함으로써 비로소 사람들이 이름자를 표시하는 기원을 이루었으며 이로부터 '역사'가 시작되었으므로 역사는 신농씨로부터시작되었다고도 말한다.
2) 농경(農耕)의 기원
인류의 역사 가운데는 인류의 생활방식을 송두리째 뒤바꾸는 큰 변화 예를 들면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로의 전환과도 같은 큰 변화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 첫 번째 변화로 '농경'의 시작을 꼽는다.
인간이 역사를 시작하기 이전에는 야수와 같이 생활했다고 하는 것은 다 아는 일이다.
먹이를 찾아 여기 저기 떠돌아다니며 살았으므로 동물들의 삶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마침내 농경을 시작하게 됨으로써 정착생활이 가능해졌으며 정착생활이 가능해짐으로써 인류가 여유를 가질 수 있었고 문화나 문명이 싹틀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고 하는 것이 인류학의 주장이다.
동양사에서 최초로 정착생활을 시작한 집단이 신농족이라는 사실을 문자의 연구로도 입증이 된다.
정착과 농경을 뜻하는 '입주정거(立柱定居)'의 상징이 'ㅣ' 이다.
머리에 뿔이 난 것처럼 묘사되는 신농씨의 모습은 신농씨 때 이미 가축(소)을 이용한 농사(牧畜)가 시작되었음을 말해주는 또 다른 증거이며 '뿔' 또한 '불' 로써 '염제(炎帝)' 라는 호칭이 '불임검' 이므로 '뿔' 이라는 이름도 신농씨의호칭으로부터 기원하였음을 알 수 있다.
3) 차(茶)의 기원
정치에 회의를 느낀 신농씨가 제위를 물려주고 호북성 대파산으로 들어가 약초를 기르며 약성을 파악하여 백성들의 건강을 돌보았다는 이야기는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백가지 풀을 직접 입으로 맛을 보고 약성을 파악하는 과정에서 때로는 풀독에 중독이 되어 고생하다가 차'(茶)' 를 마시고 독을 풀었다.
지구상에서 차(茶)를 즐기고 배우는 사람들이 염제를 '차신(茶神)'으로 모시는 까닭은 이처럼 일일이 맛을 보아 먹어도 괜찮은 풀과 먹어서는 안되는 풀을 가려주신 신농씨의 공를 기억하기 위한 것이며 우리 한민족의 민속에 명절날 조상에게 드리는 제사를 '차례'라고 부르는 것 또한 염제 신농씨를 제외하고는 생각할 수 없다.
4)시장(市場)의 기원
'신농작시(神農作市)'란 '신농씨가 시장을 열었다'라는 말로써 신농씨 때에 이미 시장에 대한 개념이 성립되어 있음을 말하는 것이었으나 많은 지식인들은 신농씨 때에 시장이 들어섰다는 말에 대하여 신뢰하지 않았다.
시장이라는 말 자체가 근대적인 용어일 뿐만 아니라 역사학에서 신농씨란 신화나 전설 속에서나 존재가 가능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농씨의 이름이 새겨진 화폐가 발견되면서 '신농작시'란 표현이 결코 근거없이 떠돌아다니는 말이 아님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청나라 왕실에서 편찬한 <사고전서>에 청동기로 만든 신농씨의 화폐가 기록되어 있는데 화폐의 중앙에 신농씨의 표시인 'ㅣ' 이 새겨져 있으며, 호미처럼 생겼다하여 '조폐'라는 이름으로 청나라 황실 내고에 실물이 보관되어 있다.
신농씨 때에 이미 시장이 열렸을 뿐만 아니라 화폐가 사용되었다는 사실은 역사학은 물론 경제학의 분야에서도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기존의 학식이나 입장으로서는 수용하기조차 어려운 일일지 모르나 그러나 이것은 역사적으로 입증되는 엄연한 사실이다.
5)간지(干支)의 기원
서양의 기년법이 들어온 이후 우리 사회에는 동서양의 기년법이 동시에 사용되고 있지만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는 우리 한민족은 우리 고유의 기년법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곧 '간지기년법' 이다.
간지가 고대 동방사회의 수사(數詞)로 사용되었다고 하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심지어 주역보다도 60갑자의 실용이 앞섰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런데 우리 고유의 기년법인 간지 기년법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어느 해 무엇을 기준으로 간지의 첫 번째 '갑자(甲子)'년을 시작했을까? 그리고 그 첫 해를 찾는 것이 가능할까?
무언가 특정한 기준이 없이 간지의 중간쯤에서 불쑥 시작했을 리가 없으니 지금으로부터 간지를 역으로 셈해 들어간다면 언젠가는 처음 시작했던 년도을 만나게 될 것인데 간지가 60진법임을 고려하여 60년씩 반복해서 옛날로 뒤돌아 간다면 처음으로 시작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몇개의 '갑자(甲子)' 년을 만날 것이다. 한국기원으로 지금(2005년)이 9202년이므로 이를 60으로 나눈다면 적어도 156회 이상의 갑자년이 있었던 셈인데 과연 간지로 셈하게 되는 첫해는 언제일까?
고대 문자 연구를 통해 확인된 바에 따르면, 염제 신농씨가 산동성 곡부로 장가들어 나라를 세운 첫 해가 기원전 2517년이며 지금으로부터 간지를 역으로추산해 들어가면 이 해가 '갑자년'이 되므로 동양에서 간지 기년법이 시작된 것이 바로 신농씨가 나라를 세운 이 때로부터일 것으로추측한다.
신농씨로부터 시작되는 여러 가지 의미있는 사건들과 또 고대에 처음으로 나라가 세워진 것의 의미를 생각하면 간지 기년의 기원으로 손색이 없다 할 것이다.
신농씨가 나라를 세운 이 해를 사람들은 '상원갑자(上元甲子)'라 한다.
************윗 글은 趙玉九 著 <21세기 신 설문해자>의 책 내용의 일부임을 밝힘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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