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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교원문학회 2016년 하계세미나를 다녀와서
- 왜관 구상문학관, 향촌문화관, 대구문학관, 이상화 고택
1.들어가는 글
2016년 7월 16일 토요일은 경북 칠곡군 왜관읍에 구상문학관과 대구시 계산동 이상화 시인 고택을 탐방하는 서울교원문학회 하계세미나가 있는 날이다. 맑은 날씨가 지속 되다가 비가 전국적으로 온다는 말에 걱정이 되었다. 아침 일찍 서둘러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 8번 출구 앞에서 오전 7시에 출발하거나 2,3호선 교대역 14번 출구 앞에서 오전 7시 반에 출발예정이니 시간 맞추어 버스를 타야하는 일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광화문역에서 김문철, 구준희, 노선관, 이진훈, 임문혁, 정근옥, 정종배, 정통원, 그리고 교대역에서 김완기, 김현주, 김창수, 김항걸, 박숙자, 박수진, 박희동, 방호경, 소혜경, 송방자, 유병란, 이상호, 임한율, 정종채, 하순명, 한명희, 허성열, 홍행숙, 필자였다. 신갈수원정류장에서 김태숙, 의성에서 박해영, 승용차로 이경엽, 우정호, 임표 모두 32명이 참석하였다. 참석하기로 했던 이혜경, 오기쁨, 박훈정은 개인 사정으로 불참하였다.
그 동안 시행했던 하계세미나는 서울시내나 수도권, 그리고 전철이동이 가능했던 김유정문학관 정도였으나 이번 왜관읍이나 대구시 계산동은 처음 시도하는 역사적인 날이었다. 정종배 회장은 인사말을 통해 우천이지만 안전한 진행이 되도록 이해와 협조를 당부하고 구상 시인의 문학적 이해와 대구문화의 향기를 함께 느끼는 기회가 되도록 힘쓰자고 말했다. 리무진 버스는 비가 내리는 날씨였지만 일행을 편안하게 목적지를 향해 달렸다.
2.구상 시인의 발자취
세미나 자료집을 통해 시인이며 구상선생기념사업회 사무총장을 맡고 있는 영동고등학교의 이진훈 선생님의 발표로 진행되었다. 재수록 내용은 세미나 자료집에서 발췌하여 정리하고자 한다.
시인 구상은 1919년 9월 16일 서울 종로구 이화동에서 출생하여 4살 때 원산으로 이주하였다. 형 구대준 신부가 원산으로 발령을 받았고 부친 구종진에게 독일계 신부들이 교구를 개설하면서 혜성학원 원장을 맡겼기 때문에 집안이 모두 이주하게 되었다.
일본 동경에서 학업을 마치고(1941) 함흥 북선 매일신문의 기자가 되었다. 문맹에 참여하고 작품활동을 하였으므로 원산사범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하며 공산당 행사에 외면하고 있었다. 원산문예총에서 해방기념시집발간에 청탁을 강력히 받고 여명도, 길, 밤 등을 제출했는데 자정은 이중섭이 맡았는데 표지그림은 군동상(群童像)이었다. 시집「음향」은 바로 규탄의 대상이 되고 그 것은 바로 구상 시인의 시편이었다. 출신성분이나 행동거지가 반동적이라는 것이다. 사선을 넘어 탈출 월남하는 수 밖에 없었다.(1947)
폐결핵이 두 번째 발병하였다.(1948) 치료비나 입원비를 낼 길이 없자 마산교통요양원에 부인은 의사로 구상 시인은 환자로 입원시키는 계획이 어렵게 이루어졌다. 잊지 못할 일은 진주에 사는 설창수 시인의 편지와 상당액의 위문금이다. 편지에는 모금 취지문과 각출자명단이었다. 이로 인해 평생 의형제를 맺었다. 병마에 시달리며 왜관집을 마련 부인의 순심의원과 살림집과 서재를 겸하고 있었다. 그 후 서울로 올라와 여의도 한강변에 터를 잡았다.
왜관에서 연합신문 문화부장(1949), 6.25전쟁 중엔 육군종군작가 부단장으로 국방부 승리일보를 만들며 종군했다. 이 무렵 연작시가「초토의 시」다. 영남일보 주필 겸 편집국장(1952), 계엄령 하의 부산에서 여러 차례 압수당했는가 하면 괴한의 침입을 받기도 했다. 「민주고발」이라는 사회평론집 발간(1953), 이승만 독재를 비난한 이 평론집은 판매금지 되었다. 대구에서 머문 시인은 야당에서 하는 민권수호국민총연맹의 문화부장으로 이승만 독재를 반대하자 반공법위반죄로 구속했다. 강건한 지사적 면모로 항거하다 6개월여만에 풀려났다. 사건 후 일체의 사회 직책을 맡지 않고 문학에 전념하였다.
효성대학교, 서강대학교, 서울대학교, 중앙대학교, 하와이대학 등에서 후학들을 가르쳤으나 보직은 맡지 않았다. 정치권에서도 권유를 사양하였다. 이용문 장군과 인연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과 자주 어울렸다. 각하라고 부르지 않고 ‘박첨지’라고 불렀다. 장관이나 국무총리 제의를 받아도 피해다녔다. 거처를 서울로 옮겨 신당동에 잠시 살다가 여의도 시범아피트 이사하여(1974) 선종할 때까지(2004) 30년을 살았다.
노밸문학상 후보로 두 번이나 올랐던 구상 시인의 시는 프랑스, 영국, 독일, 스웨덴, 일본, 이탈리아 어로 번역 출판되어 널리 읽히고 있다. 세계 200대 시인에 포함되기도 했다. 영국옥스포드 출판부에서 펴낸「신성한 영감 – 예수의 삶을 그린 세계의 시에 신앙 시」4편이 실렸다.
그는 시를 쓸 때 기어(綺語)의 죄를 범하지 않아야 한다고 했다. 말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언령(言靈)이 있으므로 참된 말만 해야 한다고 했다. 교묘하게 꾸며 겉과 속이 다른, 진실이 없는 말을 결코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기인들과의 교류로도 유명했다. 천재화가 이중섭을 극진히 돌보았는가 하면 시인 공초 오상순, 우리나라 아동문학의 선구자이자 어린이 헌정의 기초자인 마해송, 천상병 시인을 비롯해 걸레 스님 중광에 이르기 까지 인연을 맺은 기인들이 많다. 뿐만 아니라 투병 중에도 장애우 문학지 솟대문학에 그동안 아껴두었던 2억 원을 가족도 모르게 쾌척하는 등 성자와도 같은 삶을 살았던 구상 시인은 지병인 폐질환이 악화된 데이어 교통사고 후유증까지 겹치면서 중환자실과 일반 병실을 오가며 힘들게 병마와 싸우다가 끝네 2004년 5월 11일 사랑하는 아내와 두 아들이 기다리는 하늘나라도 떠났다.
3.점심식사
오전 11시쯤 되어 목적지 근처에서 식사를 먼저하고 구상문학관 관람을 하기로 했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어 더운 날씨 보다는 오히려 시원하게 지낼 수 있어 좋다는 쪽의 생각이 많았다. 50년 전통 고궁(古宮)에서 미리 주문해놓아 순댓국이 준비되어 아침을 일찍 먹은 덕분에 좀 이른 점심도 마다 않고 반가웠다.
좌석은 따로 지정하지 않고 마음에 드는 대로 편하게 앉았다. 오랜만에 모이는 자리라 안부도 묻고 주변이야기로 시간을 보내며 즐기고 있었다. 마치 한 가족이 된 듯 가까워지고 있었다. 자판기 커피를 나눠 마시며 점심식사를 마무리하고 길을 재촉해야했다.
4.구상문학관
구상문학관은 구상 시인의 삶과 작품 세계를 재조명하여 시인의 발자취를 오래도록 기리고, 지역민과 문학인들을 위한 문학 공간으로 활용하고자 건립되었다. 세계 200대 문인 반열에 오른 구상 선생의 선양과 한국시문학에 끼친 업적을 보존하고, 시인이 20년간 거주하며 창작활동을 한 관수재를 복원하여 시인의 삶과 문학과 구도자적 정신세계를 영원히 이어가고자 건립되었다.
구상 시인은 본적이 경북 칠곡군 왜관읍 왜관리이며, 1953년부터 왜관에 정착한 후 20여년간 이곳에서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였다. 이에 칠곡군은 2002년 왜관읍에 구상문학관을 건립, 헌정하였다. 이에 구상은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2만 3천여권의 도서와 자료를 기증하였다. 구상문학관은 개관 이후 칠곡군 지역민들을 위한 문학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칠곡문인협회의 모임이나 행사활동도 이곳에서 이루어지며 최근에는 구상문학관 내의 문학세미나 교실에서 만난 문학동인들(시나루, 언령, 꽃자리)이 눈부신 활동을 하고 있다
문학관의 시설 규모는 부지 면적이 1,611㎡(487.33평)이고 건물 연면적은 699.87㎡(211.71평)이다. 주요 시설을 보면 1층에 전시실, 영상실, 사무실, 관수재가 있는데 이곳에는 문단 활동 당시 시인의 모습을 담은 사진 자료와 문우와 주고받았던 편지, 서화 등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 집필실이자 많은 문화·예술인들이 들렀던 관수재(觀水齋)는 관람객들에게 시인의 체취를 직접 느낄 수 있게 한다. 2층은 도서관, 열람실, 사랑방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구상 시인이 기증한 27,000여권의 도서와 그림, 액자, 병풍, 기념패 등 소장품 300여 점이 있다.
그제사 세상이 바로 보이고/ 삶의 보람과 기쁨도 맛본다.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6.향촌문화관
이 자리는 1912년 대구 최초의 일반은행인 선남상업은행이 있었던 곳이다. 선남상업은행은 일본인 오구라 다께노스께가 설립한 은행으로, 한국인과 일본인의 공동출자로 설립되었으나 1941년에 식민정책을 지원하는 조선상업은행으로 흡수되었다. 그 뒤 한국상업은행 대구지점으로 영업을 해오다가, 2014년 대구의 원 도심을 소중히 지켜나가기 위해 전시문화공간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역사가 살아 숨 쉬는 곳
향촌동은 경상감영의 화약고가 있었던 곳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지금의 무궁화백화점 자리에 중앙염매소가 있었는데, 오늘날 중앙시장의 기원이 된 곳이다. 대구역이 들어서고 읍성이 헐리면서 도심의 새로운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그와 함께 6ㆍ25 전쟁과 근대화의 과정을 증언해 주는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문인들의 정신적 고향
향촌동은 ‘문인들의 정신적 고향’이다. 피란 내려온 문인들이 다방을 본거지로 삼아 원고를 썼고, 어쩌다 원고료라도 받으면 이곳 막걸리집으로 몰려왔다. 또한 인접한 북성로에서 ‘경북문학협회’가 창립되었고, 향토시인 백기만이 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예술인들의 거리
향촌동은 ‘예술인들의 거리’였다. 피란 내려온 문화 예술인들이 다방이나 음악감상실에서 피란살이의 고단한 심사를 달래며 문화와 예술에 대한 열정을 쏟았던 곳이다. 음악가 김동진, 나운영, 권태호, 연예인 신상옥, 장민호, 최은희, 화가 권옥연, 김환기, 이중섭 같은 이들이 숱한 일화를 남겼다.
㉱대구 최고의 번화가
향촌동은 1970년대까지 대구의 중심 이른바 ‘시내’로 불리던 곳으로, 대구 최고의 상가지역이었다. 또한 이름난 다방, 술집, 주부센터, 음악감상실 같은 명소들이 자리 잡고 있어 대구에서 가장 많은 인파가 몰리던 번화가였다.
㉲추억의 거리
향촌동은 광복 이후 근대 대구의 중심 상업지역으로 발전하였고, 6ㆍ25전쟁 때 고단한 피란살이의 애환이 깃든 곳이다. 그때 그 시절 골목마다 자리 잡은 다방과 술집에 얽히고설킨 인연과 추억이 살아 숨 쉬는 도심의 아름다운 공간이기도 하다.
대구는영남학맥의 부리가 내린 학향이면서 동시에 기라성 같은 예술인들을 양성하고 배출해낸 자랑스러운 예향이기도 하다. 특히 문학부문에서 는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걸출한 문인들이 태어나 한국문학사에 불후의 족적들을 남겼다. 일제강점기, 시로서 저항하고 소설로서 민족혼을 불 지펴온 문단의 선각자들과 고난의 시대였던 1950년대 전후문학을 꽃 피워낸 예향 2세대 작가들의 열정은 대구의 사그라지지 않는 정신적 불씨였다.
대구 계산동 2가 84번지에 위치한 고택은 항일문학가로 잘 알려진 이상화(李相和, 1901 ~1943) 시인이 1939년부터 작고하던 1943년까지 거하던 곳이다. 암울했던 일제강점기에 민족의 광복을 위해 저항정신의 횃불을 밝힌 시인 이상화선생의 시향이 남아있는 곳이다.
이상화고택은 1999년부터 고택을 보존하자는 시민운동으로 시작하여 군인공제회에서 인근 주상복합아파트를 건립하면서 고택을 매입해 지난 2005년 10월 27일 대구시에 기부채납했다. 대구시는 대지면적 205m², 건축면적 64.5m²(단층 목조주택 2동)의 고택을 보수하고, 고택보존시민운동본부에서 모금한 재원으로 고택 내 전시물 설치를 완료했다.
이상화 고택은 암울한 시대를 살면서 일제에 저항한 민족시인 이상화의 정신을 기리고 후손에게 선생의 드높은 우국정신과 문학적 업적을 계승하는 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화강석초석 위에 붉은 벽돌로 쌓고, 검은 벽돌의 이형(異形) 벽돌로 고딕적인 장식을 하였다. 이 성당은 대구지방의 유일한 1900년대 성당건축물이다.
10.나오는 글
우리는 문학인으로서의 옷깃을 또 한 번 여미는 시간이 필요하다. 문학에 담겨있는 정신이 순수하고 맑아야 한다. 단순한 사물과의 대화에서 얻어진 비유에 의한 상상력으로 이미지를 형성하는 것만 가지고 생명력을 가질 수 없다.
철학이 마음속에 배어있는 생활에서 문학을 찾아야 한다. 멀리 하늘에 떠있는 구름을 따라 다녀서는 자신의 이야기를 문학에 담지 못할 것이다. 문인의 생활 모습에서 꾸밈없이 솔직하게 이야기되는 순간에 문학을 이야기 할 수 있다.
글을 통해서 정신내면의 세계를 표현하는데는 하나의 도가 터야 한다. 사물이나 사건을 들여다보고 깨달으며 읽어내는 마음의 눈이 깨어야 한다. 그 것은 예민해진 감각을 갈고 닦는데서 비롯된다.
구상 시인을 멘토로 한 새로운 시도를 위한 문학기행으로 삼을 수 있었으면 한다. 대구의 문학과 문화가 한국문학과 문화의 터전으로 다져질 수 있었던 것은 6.25전란이 나은 하나의 부산물이었다. 많은 예술인들이 피난을 가서 정착하며 후학을 양성하던 곳이었다. 괄목할 일은 마산문인협회가 한국문인협회 보다 1년 먼저 창립되었다는 것이다. 우리주변의 우연찮은 일들을 만나면서 보이지 않게 변화하고 움직이는 소용돌이 속에 부딪히면서 구속당하고 살면서 절규하고 있는 것이 문학의 본질이다. 우리는 오늘 또 하나의 부딪침을 만난 것이다.
2016년 7월 17일 늦은 밤
윤 제 철
첫댓글 선생님의 자상하면서도 실감나는 기행문을 읽으니 그날의 일정이 새록새록...
감사합니다.
오랫만에 카페를 방문했어요.
비는 내렸지만 볼 것 들을 것 빠짐없이 이루어진 하계 세미나, 그걸 이렇게 정리하시다니...
노고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