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진핑이 언급한 '진린'과 '등자룡'
시진핑(習近平·61) 중국 국가주석이 4일 서울대 강연에서 명나라 장수 진린(陳璘)과 등자룡(鄧子龍)을 거론했다. 시 주석은 진린에 대해서는 “명나라 장군 진린(陳璘)의 후손은 오늘까지도 한국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시진핑 주석이 진린과 등자룡을 언급한 이유는 향후 등자룡과 이순신 장군이 그랬듯 한국과 중국이 힘을 합쳐 일본의 역사 인식 문제를 해결해나가자는 취지일 것이다.
진린(陳璘, 1543~1697)은 중국 광동성 출신으로 1597년(선조 30년) 정유재란 시 어위도총관 및 전군도독부도독(前軍都督府都督)으로서 5천 명의 수군을 거느리고 조선으로 들어와 전라도 강진군 고금도에서 이순신(李舜臣)과 더불어 전공을 세워 광동백(廣東伯)에 봉해진 중국 명나라의 장수이다.
처음에는 이순신(李舜臣)과 불화가 있었지만 이순신이 진린에게 수급을 양보하는 등 공을 세우도록 도움을 주자 점차 이순신에게 감복하여 진정으로 이순신을 존경하게 되었다. 이후 명나라 조정에 이순신의 전공을 상세하게 보고하여 만년제가 이순신에게 8가지 선물들(영패(令牌), 도독인(都督印), 귀도(鬼刀), 참도(斬刀), 곡나팔(曲喇叭), 독전기(督戰旗), 홍소령기(紅小令旗), 남소령기(藍小令旗))을 보내도록 하는 데 일조를 했다. 전쟁 당시 사용했던 무기는 총으로 추정하고 있다.
전란이 끝난 후 그는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갔으며 사망한 뒤에 태자소보(太子少保)에 추증되었고, 그의 손자 진영소는 감국수위사(監國守衛使)를 지내다가 명나라가 멸망하자 벼슬에서 물러나 난징으로부터 배를 타고 한반도로 와서 남해의 장승포에 표착하였다가 조부인 진린이 공을 세웠던 강진 고금도로 옮겨 살았다. 그 후 다시 해남현 내해리로 이거하여 정착하였으므로 광동 진씨(廣東 陳氏)의 뿌리가 내리게 되었다.
광동진(陳)씨 종친회의 진방식씨에 따르면 ‘진린’은 전남 해남군 신이면 황조리를 근간으로 한 ‘광동진(陳)씨’의 시조로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구하기 위해 파병된 명나라 군대의 수군 도독이다. 이순신 장군과 함께 전쟁을 치렀으며,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숨진 후 이를 이어받아 승리로 이끈 장군이다. 그는 이순신 장군의 시신을 완도 고금도로 옮겨와 당시 중국의 전통 장례절차에 따라 사당을 짓고 100일 동안 시신을 안치해 그를 기리도록 했다.
진린 장군의 후손이 한국인이 된 배경에 대해 종친회는 “임진왜란이 끝나고 명나라가 청나라에 패망하자 진린 장군의 손자인 영소가 명나라에 대한 충절을 지켜 청나라를 섬기지 않고 배를 타고 우리나라로 망명한 것”이라고 했다. 영소는 명나라 감국수위사를 지내다가 1644년(인조22) 명나라가 망하자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후 그는 “원수들과 하늘을 같이 할 수 없다”며 남경에서 배를 타고 동도 남해의 장승포에 도착했다. 영소는 진린이 싸웠던 고금도(완도)를 찾아 칩거하다가 해남으로 와서 결혼을 하여 아들 석문(碩文)을 낳고 생활하다 사망했다.
석문은 여러 곳을 떠돌다 34세 되던 무렵에 (해남의)황조리에 터를 잡고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고 한다. 황조리에는 진린 장군의 초상화와 함께 신위를 모시는 ‘황조별묘’가 있으며, 해남군은 진린장군의 고향인 중국의 옹원현과 자매결연을 맺고 꾸준히 교류하고 있다. 지난 1992년 중국의 북경대 상옥하(尙玉河)교수가 진린 장군의 후손이 황조리에 살고 있다는 것을 밝혀냈고, 1994년 일행들이 옹원현 시조의 탄생지를 방문하게 됐다. 광동진씨는 진린장군의 14세손인 진봉식(陳奉植)(78)씨가 주관해 최근 족보를 완성했다.
등자룡은 정유재란 때 일본군과 싸우고 있던 이순신장군을 돕기 위해 명나라의 절강에서 파견된 수군 도독 진린의 휘하로 참전한 장수다.
그는 마지막 전투인 노량 해전 때 이순신이 빌려준 판옥선 2척 중 1척에 휘하 군사들과 타고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다가, 일본군의 습격을 받아 전사했다. 당시 70세의 노장이었다고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