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1일, 너무나 맑고 밝고 아름다운 날씨였다. 그러나 사단법인 역사진흥원(이사장 남기정) 가을 역사탐방단의 일원이 되어 찾은 첫 답사지는 어둡고 음울하고 슬픈 곳이었다. 대구 달성군 가창면 용계동 '10월항쟁 등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위령탑' 앞에서 모두들 묵념을 했다.
1946년 10월 1일 대구에서 시작된 시위가 10월 8일까지 경북 일원을 휩쓸었다. 민중은 친일파 척결을 제1구호로 외치면서, 농지개혁과 물가안정 등 현안에 대한 미군정의 무능을 강력히 질타했다. 위령탑 입구의 안내판은 그 과정에서 60여 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밝혀지지 않은 희생자가 몇 배 더 많을 것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위령탑은 보도연맹 희생자를 추념하는 시설이기도 했다. 보도연맹은 이승만 정권이 좌익활동 경력자 등 30여 만 명을 가입시켜 만든 관변단체로, 정부가 그들을 '보'호하고 바른 길로 인'도'한다는 취지를 표방했다.
하지만 이승만 정권은 1950년 보도연맹 회원들을 무차별 학살했다. 북한군에 동조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 살해 이유였다. 재판도 없었고, 무덤도 없었다. 마구 죽여서 '골'짜기에 파묻었다. 그래서 보도연맹 대학살 이후 사람이 죽는 일을 "골로 간다"라고 표현하게 되었다.
위령탑이 있는 가창골 일대는 무수한 사람들이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고 단체로 매'립'된 어두운 역사의 현장 중 한 곳이다. 대구에서는 앞산 빨래터, 달서구청 앞 학산 등도 떼죽음의 현장이다. 전국적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는지 아직도 진상규명이 되지 않고 있다. (이게 나라냐?)
영령들의 억울한 혼이 떠도는 골짜기를 굽이굽이 돌아 용천사로 갔다. 청량한 소리를 내며 흘러가는 계곡물 곁으로 줄곧 이어져 이윽고 헐티재를 넘는 이 길이 대구를 대표하는 아름다운 길이라는 사실은 참으로 슬픈 역설이었다.
용천사는 일연스님이 머물렀던 고찰로, 대웅전이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어떠한 가뭄에도 고갈되는 법없이 물을 '용'솟음쳐 뿜어주는 '샘'이 있는 절이라 하여 용천사라는 이름을 얻었다.
당연히, 일연스님이 마셨던 샘물을 마셔본다. 시원하고 깨끗한 물맛이 소문대로 일품이다. 이상화의 증조부 이동진 선생이 남긴 시 '용천사에서'가 생각났다.
風又是鬂邊聞
가을바람 불어와 살쩍머리 스쳐가고
松柏蒼蒼鶴一群
짙푸른 솔과 잣에는 학들이 깃들어 있네
賸得淸緣仙不遠
맑은 인연 넉넉해 선仙계가 가까운 듯
纔登數仞俗相分
조금 더 오르니 속세와 아주 다르구나
方今天下無間界
바로 지금 이곳에는 인간세계가 없으니
太古山中有白雲
아득한 옛날에도 흰 구름이 가득했으리라
憐爾擔柴負水者
땔감이며 물을 짊어진 가련한 사람들
梵王宮殿奉香勤
부처님 법당에서 부지런히 향을 모시누나
자수성가로 1254마지기나 되는 논밭을 소유하게 된 이동진은 그 중 230마지기를 가난한 일가들에게 나눠주고, 또 480마지기를 공동소유 형태로 만들어 거기서 나오는 소출로 사람들 혼례, 장례, 구휼, 질병 등의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710마지기는 대략 14만2천평(약 50만평방미터)으로, 평당 100만원으로만 환산해도 1420억 원이나 되는 거액이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용천사를 떠나 '청도 봉기리 3층석답'을 둘러보았다. 통일신라가 남긴 이 탑은 우리나라 보물 중 하나이다. 웅장하고 힘찬 기상이 "과연 보물이다!" 싶은 찬탄을 불러일으킨다. 본디 쌍탑이었는데 1930년경에 하나가 멸실되었다(삼국시대까지는 쌍탑이 세워지지 않았다. 최초의 쌍답은 통일신라 신문왕 때의 감은사 탑이다). 아, 아깝다.
그 후 역시 보물인 '청도 석빙고'를 찾았다. 경주, 창녕, 현풍 등지 석빙고와 달리 청도 것은 안을 완벽하계 들여다볼 수 있는, 엄청나게 매혹적인 석빙고이다. 덮개돌들이 없어지면서 결과적으로 그렇게 된 것이다. 안에 들어가보면 금상첨화이겠지만 출입금지 안내판이 버티고 있으니 어쩔 것인가.
석빙고 바로 옆에 청도읍성 성곽이 길게 놓여 있다. 마침 청도축제 중이라 외줄타기 등 흥미로운 구경거리를 여러가지 즐겼다. 김하수 청도군수의 인사말씀도 듣고, 악수도 나누었다.
화양읍을 떠나 대적사 극락전(보물)과 와인터널을 찾았다. 둘을 함께 묶어서 말하는 것은 그 둘이 붙어 있기 때문이다. 와인터널 입구 왼편에 대적사 가는 길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100미터밖에 안 된다.
시끌벅적한 와인터널 입구에서 100미터 거리라면 대적사가 이름처럼 크게(대) 조용한(적) 절(사)이 아니라 번잡하고 어수선한 곳이 아닐까 지레짐작이 된다. 그런데 막상 100미터 안내판을 등지고 출발히는 즉시, 들려오는 것은 새소리뿐이다. 세상에 이토록 조용한 곳은 처음 보았다. 그래서 그런지 절문 앞 어마어마한 거대 고목도 외피까지 신비로운 빛깔을 보여주며 답사자들을 맞아준다.
와인터널 안으로 들어가 한 잔 마시고, 팔조령 정상부 봉수대 터를 찾았다. 경사가 완만한 오솔길을 200미터쯤 걸어올라야 닿는 곳에 위치하는 까닭에, 미리 알고 온 사람이 아니면 찾기 어렵다. 이곳을 1592년 임진왜란 때 소서행장의 제1군이 지나갔다. 참담한 외침의 역사를 생각하며 봉수대 터의 황량한 풍경을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왜병들의 낄낄대는 말소리들이 들리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