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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일시: 2024. 11. 20~21.(수,목), 음력(10. 22~21), 일출 07:16~일몰 17:19
●산행지: 수락지맥 2구간 졸업
●산행코스: 무림리고개-분기점-234.0m-용암산(475.4m)-407.7m-316.2m-224.1m-비루고개-297.8m-도정산(288.3m)-박수고개-162.6m-숯돌고개-175.5m-사기막고개-향로봉(463.4m)-607.9m-수락산(640.6m)-도솔봉(538.5m)-372.6m-덕릉고개-불암산(509.7m)-421.6m-247.1m-노원고개-삼육대-담터고개-새우개고개-135.4m-세종포천고속도로-검암산(171.4m)-구릉산(177.9m)-북부간선도로/충군육교-151.3m-망우리고개-278.5m-망우산(281.3m)-279.5m-깔딱고개-318.5m-용마산(348.6m/왕복1.1km)-285.5m-아차산(295.7m)-기원정사-아차산역-어린이대공원-서울숲-중랑천/ 한강합수점
●먹거리: 생수1리터, 단백질바2, 사탕5, 초코파이2, 빵, 베지밀 + 초코파이2
●준비물: 스틱, 헤드랜턴, 바람막이, 긴팔, 고아텍스, 손수건2, 비상약, 충전지, 충전짹, 휴지, 물티슈, 띠지10
●거리: 약 56.9Km(29.5+27.4)
●소요시간: 19.47h(11.19+8.28h)
●누구랑: 나홀로
●경비: 편의점 6,900원, 뒤풀이 14,000원 + 모두부 7,000원, 뒤풀이 17,000원
●날씨: 2~12, 첫날 흐림, 둘쨋날 흐림
●산행경과:
- 2024. 11. 20.(수)
- 07:57 : 무림리고개
- 08:18 : 수락산분기점
- 08:58 : 234m봉
- 10:04 : 442m봉
- 10:08 : 용암산(477m)
- 10:28 : 407.7m봉
- 10:42 : 314m봉
- 10:56 : 316.2m봉
- 11:13 : 비루고개
- 11:10 : 224.1m봉
- 11:33 : 297.8m봉
- 11:47 : 연장봉(285.7m)
- 12:00 : 도정산(288.3m)
- 12:18 : 도정약수터
- 12:25 : 박수고개
- 12:28 : 162.6m봉
- 12:40 : 숯돌고개
- 12:48 : 구숯돌고개
- 13:08~20 : 사기막고개, 행동식
- 13:57 : 향로봉
- 14:23 : 약수터
- 15:45 : 수락산 홈통바위(604m)
- 14:55 : 외계인바위(567m)
- 15:02 : 수락산 주봉(640.6m)
- 15:40~47 : 도솔봉(537m), 행동식
- 16:34 : 덕릉고개
- 17:28 : 불암산(509.4m)
- 18:09 : 불암산성
- 19:15 : 담터고개
- 2024. 11. 21.(목)
- 07:52 : 담터고개
- 08:38 : 새우개고개
- 08:53 : 팔강산(135.4m)
- 09:17 : 검암산(171.4m)
- 09:25 : 구릉산(177.9m)
- 09:36 : 북부간선도로/ 구망우고개
- 09:50 : 151.3m봉
- 10:00 : 망우고개
- 10:44~50 : 망우산2보루(281.3m), 행동식
- 10:59 : 동락정
- 11:02~11:33 : 시루봉보루
- 11:17 : 시루봉
- 11:44 : 망우산1보루(279.5m)
- 12:08~12:27 : 시계/ 삼동봉
- 12:18 : 용마봉(349m)
- 12:59~13:09 : 고구려정 삼거리
- 13:03 : 아차산성(208m)
- 12:28~48 : 모두부(우리콩)
- 13:58~14:40 : 능동어린이대공원
- 14:50~56 : 화양정
- 15:55 : 서울숲
- 16:23 : 합수점(중랑천-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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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락지맥(水落枝脈)이란 ?
수락지맥은 한북정맥의 축석령 남동쪽 1.4km 지점의 220m봉에서 남동쪽으로 분기해서 용암산(475.4m), 도정산(288.3m), 수락산(640.6m), 불암산(509.4m), 구릉산(171m), 망우산(281.3m), 용마산(349m), 아차산(286m)을 거쳐 한강의 지류인 중랑천과 한강 합수점에서 그 맥을 다하는 도상거리 43.4km인 산줄기이다.
동쪽으로 한북정맥 수원산에서 발원한 왕숙천을, 서쪽으로 한북정맥 불곡산(佛谷山, 466.4m)에서 발원한 중랑천을 경계지으면서, 중랑천이 한강에 합류하는 서울 성수동 서울숲공원에서 그 맥을 다하지만, 아차산을 지난 이후 6km구간은 도심지화 되어 사실상 진행이 무의미하므로, 대부분 아차산역이나 광나루역에서 종료한다.
용암산(475.4m)은 광릉수목원 영역이라 출입이 통제되고, 불암산에서 내려가 담터고개 직전에는 군부대의 철조망이 막고있어 삼육대학교 영역을 통해 멀리 우회할 수밖에 없고, 담터고개 건너편에는 육군사관학교(화랑대)가 차지하고 있어 마루금을 따를 수가 없다. 아차산에서 지하철 아차산역으로 내려오면 번잡한 도심지라 더 이상 진행하기 어려우므로 합수점까지의 마지막 6km 구간은 대부분 산행을 생략한다.
♤ 수락지맥 개념도
♤ 수락지맥을 지나는 동네
* 포천시
경기도 북동부에 있는 시로 남쪽은 의정부시, 동쪽은 남양주시, 가평군, 서쪽은 양주시, 동두천시, 연천군, 북쪽은 강원도의 철원군과 화천군이 접하고 있다. 경기도에서 가장 면적이 큰 도시이다. 해방 이후 북부지역이 북한지역에 속했다가 한국전쟁 이후 모두 수복되었다. 1980년대 후반부터 아파트 단지와 공장이 들어서면서 인구가 증가했다. 지금의 포천시는 옛 포천현과 영평군이 합하여 이루어진 곳이다. 시의 북부는 옛 영평군 지역이고, 남부는 옛 포천현 지역에 해당한다. 옛 포천현은 삼국시대 초기에는 백제의 영역이었으며, 고구려의 남하로 고구려의 마홀현(馬忽縣) 또는 명지성(命旨城, 臂城)이었다. 신라의 삼국통일 후 757년(경덕왕 16)에 견성군(堅城郡)으로 개칭되었다. 고려초에는 다시 포주(抱州)로 개칭했으며, 1018년(현종 9)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양주(楊州)의 속현이 되어 병합되었다. 조선초의 군현제 개편에 의해 1413년(태종 13)에 포천현이 되어 조선시대 동안 유지되었다. 지방제도 개정으로 1895년에 한성부 포천군, 1896년에 경기도 포천군이 되었다. 1906년 월경지 정리에 의해 양주의 두입지인 산내면과 청송면이 편입되고, 1914년 군면 폐합 때 영평군이 폐지되어 포천에 병합됨으로써 면적이 크게 넓어졌다. 1937년에 서면이 포천면으로 개칭되었다. 1945년 8·15해방으로 38˚선 이북에 속하는 군의 북부가 북한지역에 편입되었다가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던 6·25전쟁 후 모두 수복되었다. 1973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포천면 탑동리가 양주군 동두천읍으로 분리되었다. 1979년에 포천면이 읍으로 승격되고, 1983년에는 연천군에서 관인면이 편입된 대신 청산면이 연천군으로 이관되고, 내촌면 화현출장소가 화현면으로 승격되었다(→ 영평군). 2003년 10월 19일 도농복합시로 승격되면서 포천읍이 포천동과 선단동으로 분리되었다. 사방이 해발 500~1000m의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지형이며, 내촌면과 소흘읍 일부(이상 한강 유역권)를 제외한 전역이 임진강 유역권이다. 따라서 북쪽 방향으로 계곡이 형성되어 있어 철원군, 연천군으로는 언덕을 넘지 않고 자연스런 통행이 가능하다. 최상류권은 최남단인 소흘읍과 가산면 일대이지만 의외로 이 지역에 가장 넓은 평지가 형성되어 있다. 독특한 지형 때문에 서울 방면으로 가려면 의정부, 양주, 남양주 어느 방면으로든 고개를 넘어야 하는 지형으로, 포천 발전에 장애가 되고 있다. 그 동안 서울 방면으로 연결되는 도로는 43번 국도의 축석고개, 47번 국도의 내촌면 방향 뿐이어서 상시 정체로 몸살을 앓고 있었으나, 2017년 6월 30일 세종포천고속도로 구리~포천 구간이 개통되면서 상시 정체는 어느정도 해소되었다. [통합포털에서 발췌정리]
* 의정부시(議政府市)
의정부시는 대한민국 경기도 중북부에 위치하고 있는 위성도시로 서울특별시의 군사기능을 담당한다. 6·25전쟁 후 미군기지가 들어서면서 군사도시로 발달한 지역이다. 계속된 인구유입과 도시화에 따라 1963년 시로 승격되어 양주군에서 분리되었다. 1963년에 의정부시가 분리, 독립될 때까지 이 지역은 양주의 영역이었다. 민락동에서 흑요석기를 포함하는 제4기층이 발견되어 이미 구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신석기시대 유적은 아직 발견된 바 없으며, 청동기시대 유적으로는 금오동·고산동·용현동일대에서 간돌칼·간돌화살촉·민무늬토기 등이 발견되었다. 이 지역은 고조선시대에는 진(辰)에 속했고, 삼한시대에는 진한에 속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시대에 이르러 초기에는 백제에 속했으나 475년 이후 고구려에 속하여 매성군(買省郡, 일명 昌化郡)이라 하였으며, 신라 때인 757년(경덕왕 16) 내소군(來蘇郡)으로 개칭되었다.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견주(見州)로 이름을 고쳤고, 1012년(현종 3) 양주의 절도사가 폐지되고 안무사로 개편되었다. 1018년 양주에 편입되었으며, 1308년(충렬왕 34)에 한양부로 개칭되었다. 조선 초인 1394년(태조 3) 다시 한성부로 개명되면서 부치(府治)가 동촌 대동리(大東里: 현재의 서울시 광진구 광장동 부근)로 옮겨지고 지양주사(知楊州事)로 강칭되었다. 1397년에 부치가 다시 옛 치소인 견주(현 양주시 고읍동)로 이전되고 양주부라 불렸다. 1413년(태종 13) 양주도호부로 고쳐지고 속현으로 견주(見州)·사천(沙川: 동두천시 전역과 양주시의 은현면지역)·풍양(豊壤: 남양주시의 진접읍·진건읍지역)의 3현을 두었다. 1466년(세조 12)에 다시 양주목으로 승격되었으나 1504년(연산군 10) 양주목이 폐지되고 왕의 수렵지구로 될 때 의정부시는 잠시 폐허가 되기도 하였다. 1506년(중종 1) 중종반정으로 다시 복구되어 양주목의 소속이 되어 계속 갑오개혁 때까지 양주목에 속하였다. 1895년(고종 32)에 전국의 팔도제가 폐지되고 23부 336군이 새로 설치되게 되어 양주목이 한성부 소속의 군이 되었을 때 의정부시는 양주군의 시북면(柴北面)·둔야면(芚夜面)지역에 속하였다. 1912년 행정구역개편 때 양주군 32개 면 중 시북면·둔야면지역으로 오늘의 의정부시의 모체를 이루게 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다시 시북면과 둔야면이 시둔면(柴芚面)으로 개칭되었고, 1922년에 주내면 유양리에 있던 양주군청사가 시둔면 의정부리로 옮겨오게 되어 의정부시는 양주군의 심장부를 이루면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1938년 시둔면이 양주면으로 개칭되었고, 1942년 양주면이 의정부읍으로 승격되었다. 1950년 6·25사변 때는 수도 서울의 관문으로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지역이었고, 전쟁을 거치면서 군사도시로서의 변천을 겪기도 하였다. 1963년 1월 1일에 시로 승격되면서 한수(漢水) 이북의 경제·사회·문화·군사·교통의 중심지로 발전하고 있다. 1980년 4월 1일에는 양주군 별내면의 고산리와 산곡리가 편입되었으며, 1994년 7월 1일 장곡동이 장암동과 신곡동으로, 1995년 3월 2일에는 신곡동이 신곡 1,2동으로 분동(分洞)되었다. 1998년 10월 14일 의정부 1동과 4동이 통합되었고, 2003년 2월 3일에는 호원동이 호원 1,2동으로, 송산동이 송산 1,2동으로 분동되어 현재와 같은 15개 행정동이 되었다. 사방이 산지로 둘러싸인 분지를 이루고 있으며, 북쪽은 한북정맥의 지맥인 천보분맥이 뻗어 있다. 추가령구조곡이 서부를 남북방향으로 관통한다. 시의 동부에는 용암산(477m)·깃대봉(289m) 등이, 서부에는 사패산(552m)·도봉산(717m) 등이, 남부에는 수락산(638m) 등이 솟아 있으며, 북쪽은 천보산(337m)으로 가로막혀 있다. 중랑천이 추가령구조곡을 따라 흐르며, 그 지류인 백석천·회룡천·부용천 등이 동부와 서부 산지에서 발원해 중랑천에 흘러든다. 이들 산지 사이의 시 중앙부에는 100m 내외의 구릉지와 평야가 펼쳐져 있다. 시가지는 평야 위의 구조곡을 따라 형성되어 있다. 기후는 중부내륙에 위치해 있고 주변에 산이 많아 한서의 차가 심하다. 경원선과 수도권 전철이 추가령구조곡을 따라 중서부지역을 남북으로 통과하고, 서울 교외선이 북서부를 가로질러 경원선의 의정부역에 연결된다. 서울-동두천을 연결하는 국도가 경원선·수도권전철·중랑천과 나란히 달린다. 또한 양주시 장흥면 방면으로 연결되는 국도와 포천-남양주를 잇는 국도가 나 있다. 북부와 동부의 시계(市界)를 따라서 탑고개·백석이고개·비루고개·박수고개·사기막고개 등이 있어 과거에도 이 시가 경기도 동북부지역에서 서울로 통하는 길목이었음을 보여준다. [통합포털에서 발췌정리]
* 남양주시
경기도 중앙에 위치한 시로 동북쪽은 가평군, 동쪽은 북한강을 끼고 양평군, 서북쪽은 의정부시, 서쪽은 서울특별시, 남쪽은 구리시·하남시·광주시, 북쪽은 포천시와 접하고 있다. 한북정맥 남단에 위치하여 전체적으로 해발고도가 높은데 동부는 산지지역이고 서부는 평야지대가 넓게 펼쳐져 있다. 서쪽에는 수락산(水落山, 638m)·불암산(佛巖山, 508m)이 서울특별시와, 동쪽은 상산(霜山, 825m)·축령산(祝靈山, 879m)이 가평군과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북쪽에는 주금산(鑄錦山, 814m)이 포천시와, 남쪽에는 천마산(天摩山, 819m)과 백봉(白峰山, 590m)이 있다. 이 밖에 수리봉(537m)·철마산(711m)·운길산(雲吉山, 610m)·예봉산(禮峰山, 679m)·문안산(文安山, 536m)이 솟아 있다. 이들 산지 사이로 왕숙천(旺宿川)이 남류하여 한강에 합류하며, 수동천(水洞川)·구운천(九雲川)·마석우천(磨石隅川) 등이 동류하여 북한강에 합류한다. 한강의 북안에 접한 지역으로서 구석기시대부터 많은 유적이 분포하고 있다. 청동기시대에 이어 철기시대는 역사적으로 삼한시대로, 남양주 일대는 마한에 속했던 곳으로 추측된다. 마한 54국 중 고리국을 풍양·양주일대로 비정하는 학자도 있다. 삼국시대에 이르러 남양주는 백제의 영역에 속했으며, 『동국여지승람』과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475년(장수왕 63) 고구려의 남하정책으로 한강 남안 지역이 고구려의 영토로 편입된 뒤 매성군(買省郡) 또는 창화군(昌化郡)에 속하였다. 또한 고구려 영역 하에 진건·진접읍 지역은 한산주(漢山州)에 속한 북한산군(北漢山郡) 관내의 골의노현(骨依奴縣)으로 불렸다. 551년(성왕 29) 나제동맹(羅濟同盟)으로 백제가 다시 이곳을 회복한 뒤에는 백제에 잠시 귀속되었다. 신라 진흥왕은 2년 후에 백제가 점유한 한강 하류지역마저 탈취하여 한강유역 일대는 신라에 의해 모두 점유됨과 동시에, 이곳에 북한산주(北漢山州)가 설치되었다. 757년(경덕왕 16) 군현제를 정비하면서 양주지역 일대는 내소군(來蘇郡)으로, 진건·진접읍 지역인 골의노현을 황양(荒壤)으로 개칭하였다. 이때 황양은 북한산에서 이름이 바뀐 한양군(漢陽郡), 치소에 속하였다. 『고려사』에 의하면, 935년(태조 18) 한양군이 양주 또는 남경(南京)으로 바뀌었는데, 양주라는 지명은 후삼국시대에도 사용되었으나 고려시대에 이르러 보편화되었다. 고려 태조 때 현 양주군 지역은 견주(見州)로 되었고, 동두천 지역은 사천(沙川), 남양주의 진건읍·진접읍 지역은 풍양현(豊壤縣)으로 불렸으며 양주의 속현이 되었다. 1394년(태조 3) 조선왕조가 한양부에 도읍을 정하면서 한성부(漢城府)로 개칭되었고, 양주의 치소가 아차산(峨嵯山) 남쪽의 대동리(지금의 서울특별시 광진구 광장동 부근)로 옮겨졌고, 양주가 지양주사(知楊州事)로 강등되었다. 이듬해 양주부로 승격되었고, 1397년에는 치소가 견주(고주내, 지금의 양주시 고읍동)로 옮겨지고 이곳이 양주로 불렸다. 1413년 양주도호부로 승격되었다가 1419년(세종 1)에 잠시 양주의 관할로 되었으며, 1466년(세조 12) 양주목이 되어 진(鎭)이 설치되었다. 이때 풍양현이 양주목의 속현으로 되었으며, 1504년(연산군 10) 양주목이 폐지되고 왕의 사냥터가 되었으나 중종반정(中宗反正) 후인 1506년(중조 1) 양주목으로 복구되었다. 이 때 양주의 치소가 불곡산 남쪽(지금의 양주시 유양동)으로 옮겨졌는데, 지금의 남양주시 지역을 포함하여 35개 면을 관할하였다. 남양주의 옛 이름은 풍양인데, 이 고장은 바로 풍양조씨(豊壤趙氏)의 관향이기도 하다. 19세기 조선 후기 실학의 집대성자로 불리는 정약용(丁若鏞, 호 茶山)은 지금의 와부읍 능내리 마재(조선시대 광주부 초부면)에서 출생, 유배에서 풀려난 뒤 이곳 향리의 여유당(與猶堂)에서 만년의 학문 연구와 저술 활동을 마무리하였다. 1895년(고종 32) 지방 관제 개정에 따라 8도제가 폐지되고 전국이 23부로 나뉠 때 한성부 소속 양주군이 되었다가, 이듬해 23부제가 폐지되고 13도제로 개편될 때 경기도 양주군이 되었다. 1906년 광주군 초부면(草阜面)이 양주군에 편입되었고, 1914년 군면 통폐합에 따라 양주군은 주내·희천·은현·광적·백석·시둔·별내·진접·진건·화도·와부·미금·구리·노해·이담·장흥의 16면 148개 리를 개편 관할하였는데, 이 중 남양주 지역과 관련된 것은 7개 면이었다. 1938년 10월 군청이 주내면 유양리에서 시둔면으로 옮겨지면서 동시에 양주면이라 개칭되었고, 1942년 10월 양주군이 의정부읍으로 승격되었다. 1946년 연천군의 남면이 양주군에 편입되었고, 1950년 6·25전쟁 때 수동면을 무대로 활약한 대한민국백혼대(大韓民國白魂隊)의 반공활동은 특기할 점이다. 1963년 1월 1일 이담면이 동두천읍으로, 의정부읍이 시로 승격되었다. 이때 화도면의 3개 리(운수·송천·지둔)와 진접면의 1개 리(수산), 그리고 가평군 외서면의 3개 리(입석·외방·내방)가 병합되어 수동면이 신설되었다. 또한, 노해면과 구리면의 5개 리(묵동·중화·상봉·신내·망우)가 서울특별시로 편입되었다. 1973년 7월 1일 구리면이 읍으로 승격되었고, 1979년 5월 1일 미금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80년 4월 1일 구리·미금 2개 읍과 별내·진접·진건·수동·화도·와부의 6개 면, 68개 리가 분리되어 남양주군이 신설되었는데, 이 때 별내면의 고산·산곡의 2개 리가 의정부시에 이속되었다. 이 해 12월 1일 와부면이 읍으로 승격되어 3읍 5면이 되었고, 1983년 2월 15일 진건면의 양지·오남·팔현의 3개 리가 진접면에 편입되었다. 1986년 1월 1일 구리읍이 시로 승격 분리되었고, 4월 1일 와부읍 조안출장소가 조안면으로, 퇴계원출장소가 퇴계원면으로 각각 승격되었다. 1989년 1월 1일 미금읍이 시로 승격 분리되었고, 4월 1일 진접면이 읍으로, 1991년 12월 1일 화도면이 각각 읍으로 승격되었으며, 이듬해 4월 1일 진접읍 오남출장소가 설치되었다. 1995년 1월 1일 도농통합에 따라 미금시와 남양주군이 통합되어 새로운 남양주시가 되었으며, 5월 6일 양지·오남·팔현의 3개 리가 오남면으로 승격되었다. 2001년 9월 12일에 진건면과 오남면이 각각 읍으로 승격되었다. 2005년 6월 청학출장소, 2006년 1월 풍양출장소, 2006년 11월 동부출장소가 각각 개소되었다. 2012년 1월 별내동이 개청되었으며, 2016년 1월 3개 행정복지센터(와부·조안, 화도·수동, 호평·평내)가 개청되었다. [통합포털에서 발췌정리]
* 구리시
경기도 중앙부에 있는 시. 조선시대의 구지면과 망우리면이 도시로 발달한 지역이다. 이 2개 면의 앞글자에서 지명이 유래했다. 서울시 동북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서울과 퇴계원을 연결하는 국도가 시의 북서부를 지난다. 중앙선과 경춘선이 시내를 통과한다. 농업비중은 낮으나 근교농업이 행해진다. 인창동에 있는 동구릉이 유일한 관광자원이다. 동쪽과 북쪽은 남양주시, 남서쪽은 한강을 끼고 서을특별시 강동구,, 남동쪽은 경기도 하남시, 서쪽은 서울특별시 중랑구와 광진구 광장동, 노원구에 접한다. 경기도 31개 시.군 가운데 가장 작고, 전국의 자치구를 제외한 기초자치단체(시/군) 중에서 면적이 가장 좁다. 이 지역은 서쪽으로 아차산을 경계로 서울과, 동쪽으로 왕숙천(王宿川)을 경계로 남양주시와 접하며, 남쪽으로 한강을 경계로 서울 강동지역과 마주보고 있기 때문에 예로부터 한강 주변 요충지의 하나였다. 고구려의 장수 온달이 잃어버린 땅을 찾기 위해 남하했다가 이곳 아차산성과 광장진전투에서 전사한 것이나, 과거 한양에서 동쪽으로 향하는 간선도로인 평구도가 통과했던 예를 통해서도 이를 알 수 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구지면과 망우리면의 통폐합이 구리면의 시초가 되었다. 이후 망우리면 일대는 지금의 중랑구가 되었다. 1973년 구리면이 읍으로 승격했으며, 1980년 양주군을 분리하여 의정부시 남쪽 일대에 남양주군(지금의 남양주시)을 신설하자 미금읍·와부면·별내면·진접면·진건면·수동면·화도면 등이 남양주군으로 편입되었다. 1986년에 구리읍이 시로 승격했다. 전체적인 지형은 지대가 낮고 평야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시의 남동쪽에 아차산(316m)과 용마봉(龍馬峰, 348m)이 있다. 아천동과 교문동 등 서쪽 지역은 높이 100m 이상의 비교적 높은 지역이며 나머지 지역은 50m 이하의 평탄한 지형을 이루고 있어 서쪽에서 동쪽으로 기운 듯한 지세를 보이고 있다. 인창동에 있는 동구릉(東九陵, 사적 제193호)은 태조를 비롯한 조선 역대 9대의 왕들과 왕비들의 능이다. 동구릉은 조선 태종 8년 태조의 건원릉기(建元陵基)로 쓰인 이래 현릉(顯陵, 문종 및 왕후)·목릉(穆陵, 선조 및 왕후)·휘릉(徽陵, 인조비)·숭릉(崇陵, 현종 및 왕후)·혜릉(惠陵, 경종비)·원릉(元陵, 영조 및 왕후)·수릉(綏陵, 추존 문조 및 왕후)·경릉(景陵, 헌종 및 왕후) 등 9릉 17위로 이루어져 있다. 그밖에 사로동에 병자호란 때의 난중일기인 <병자록(丙子錄)>을 저술한 나만갑선생신도비(羅萬甲先生神道碑,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26호)가 있으며, 아천동에 세종의 후궁인 명빈 김씨의 묘와 아차산성(峨嵯山城, 사적 제234호) 등이 있다. 구리시의 유일한 관광자원은 동구릉이다. 동구릉은 유적관광지로서 의미가 있을 뿐만 아니라 능 일대가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있어 활엽수와 침엽수의 조화로 아름다운 경관을 이룬다. 서울에서 오는 당일 코스 관광객이 많다. [통합포털에서 발췌정리]
* 서울특별시(서울特別市)
서울특별시는 대한민국 수도로 최대도시이다. 평양시, 경주시, 개성시와 함께 오랜 역샤를 가진 대한민국의 고도 중 하나다. 법률상 대한민국 제1의 도시로 규정되어 있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유일한 특별시고, 수장인 서울특별시장은 대한민국 광역자치단체장 중 유일하게 장관급 대우를 받으며 국무회의 참여권 및 발언권이 있다. 서울특별시는 대한민국 제2의 도시인 부산광역시보다도 인구가 약 3배 더 많은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종주도시다. 역사적으로도 백제, 조선, 대한제국의 수도이자 현재 대한민국의 수도로서 중요성이 높다. 기원전 18년 백제가 현 송파구·강동구 지역에 도읍을 정한 후 492년간 한성백제 시대가 이어졌다. 이후 475년 고구려가 한성을 함락했는데, 북쪽에 기반을 둔 국가인 고구려는 기존 백제의 한성에서 북쪽으로 한강을 건너 현 광진구·성동구·구리시 일대를 거점으로 삼아 고구려의 북한산군 남평양으로 지정했고, 이후 서울특별시는 강북 지역을 중심으로 발전했다. 553년 신라가 서울 지역을 차지하고 신라의 한산주 한양군이 되었다. 이후 고려 시대에는 약 250년간 개경 이남의 남경이었다. 조선 시대에는 510년 동안 조선 및 대한제국의 수도 한성부였고, 이어 70여년간 대한민국 수도인 서울특별시로서 지위를 차지하는 도시로 한국사에서 도합 1,070여 년간 수도로서 기능을 했고 부수도 기간까지 합치면 1,300년이 넘는 유구한 역사의 고도다. 전통적으로 서울은 강북 지역만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1960년대 서울 대확장을 통해 한강 이남까지 관할구역이 확장되었다. 현재의 서울특별시 영역은 옛 한성부 영역에서 조선 후기의 양천현 전체와 시흥현, 과천현의 상당 지역, 광주유수부와, 양주목의 일부를 추가로 편입한 형태이다.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도시인 만큼 평지에 일목요연하게 설립된 계획도시가 아니라 산과 강 등의 자연을 등지고 자연스레 형성된 도시 형태이며, 독특한 특징도 여럿 있다. [통합포털에서 발췌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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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간별 세부거리
220m봉-4km-용암산-3.3km-비루고개(195m)-2.7km-도정산(道正山, 288m)-2.1km-숫돌고개(93m)-1km-사기막고개(125m)-2.3km-수락산-3.5km-덕능고개-1.7km-불암산-4km-담터고개-2.7km-새우개고개(65m)-1km-구릉산(178m)-2.1km-망우리고개-4.7km-아차산-2.3km-아차산역-6km-중랑천(한강수변공원)
* 구간거리
- 들머리 2.5km
- 지맥분기점 ~ 담터고개 30.8km
-. 무림리고개(다름고개) ~ 덕능고개 25.2km
- 담터고개 ~ 합수점 23.7km
* 식수 공급지 및 산행 정보
- 도정산 약수터
- 43번국도: 이마트편의점
- 칠성대 약수터
- 수락산 주봉 아래 160m: 불로약수
- 불암산 거북바위: 거북산장
- 담터고개: 추어탕집
- 망우리고개: 망우카페
- 기원정사 이후 도심 식당거리
* 서울에서 수락지맥 분기점 내려가는 길
- 서울 3100번 직행 ~ 축석검문소: 0.40h
- 축석검문소 ~ 무림리고개 : 20번 마을버스
- 의정부역 4번출구 동부광장정류소, 흥선지하도 버스정류장: 21번 버스, 무림리고개까지 약 35분 소요
* 수락지맥 합수점에서 대중교통 이용하는 방법
- 중랑천/한강 합수점에서 용비교를 건너 국철 응봉역 이용
- 중랑천/한강 합수점에서 다시 뒤돌아나가 성수대교북단 사거리에서 버스 이용(강남터미널 146번)
- 중랑천/한강 합수점에서 다시 뒤돌아나가 서울숲역에서 분당선, 2호선 뚝섬역 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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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식지에서 접근하기 용이한 지맥은 아꼈다 하는 거라는데 수락지맥은 접근성도 편리하고, 중간 지점에서 끊어 대중교통으로 귀가하여 다음날 이어갈 수도 있고, 종착지 대중교통도 좋은 편이라 서울 산꾼들에겐 아껴두었다 쓰는 양념과도 같은 지맥입니다. 올해는 스포츠클라이밍에 매진하느라 지맥을 다니지 못했는데 멀리 있는 지맥은 갈 여유가 못 되고 시즌이 끝난 저 자신에게 선물처럼 지맥 하나 건네주고 싶어 수락지맥을 택했습니다. 수락산까지만 가면 이후부터는 동네 놀이터처럼 바닥이 닳도록 다녔던 길인지라 눈을 감고도 갈 수 있는데다 종착지가 집에서 불과 버스로 세 정거장이니 걸어서 귀가도 가능합니다. 수락산의 모습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다니 기대가 되네요. 수락지맥도 지맥의 끝을 두고 굳이 중랑천과 한강의 합수점인 서울숲을 종착지로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합수점은 풍수지리에서는 중요하게 다뤄지나 지맥의 개념에서 합수점은 없습니다. 162개 지맥 중에 합수점으로 향하는 지맥은 채 50개에도 미치지 못하는데 이를 두고 '산자분수령원칙'이라 말하는 분들은 원칙을 다시 배워야 합니다. 정맥조차도 입해처로 향해야 한다는 원칙이 있음에도 사회적, 정치적 영향으로 그렇지 못한 오류를 신산경표에서 수정하였는데 이는 학문적으로 칭송받을 업적이지만 숭어가 뛴다고 망둥어도 뛰는 격입니다. 망둥어가 뛴다고 꼴뚜기도 뛰어서야 쓰겠습니까. 지방의 산꾼들에게는 화양정과 요즘 뜨기 시작하는 성동구 성수동 그리고 서울숲까지 관광할 수 있어 좋은 기회일 수 있으나 서울의 산객들에게는 수락지맥을 합수점까지 길게 늘릴 특별한 이유가 없습니다. 수락지맥은 아차산 이후로는 한강으로 스며드는데, 광나루로 해도 무난하고 조금 더 연장한다면 능동 어린이대공원을 지나 화양정에서 낙천정이 자리한 발산, 한강변의 잠실대교로 해도 무난하다고 봅니다. 그나마 구의동, 자양동 한강변 일대에 강건너 풍납토성, 몽촌토성과 대치하던 고구려의 보루 흔적이 있었다는데, 구의동 해발 53m의 구릉지대는 1977년 화양택지지구 개발로 대단위 아파트촌으로 개발되었다네요. 뚝섬은 한강과 중랑천의 범람원이었고, 홍수로 한강과 중랑천이 범람하면 중랑천 물길이 성수동을 가로질러 한강으로 곧장 통했다고도 합니다. 즉, 화양리 서쪽으로 뚝섬 일대는 거은 물에 잠기는 곳이었습니다. 건국대 일감호에서 발원하여 중랑천으로 합쳐지는 성수천이 있었는데 지하철 2호선이 건설되며 복개되었습니다. 따라서 굳이 수락지맥의 산줄기를 아차산에서 연장한다면 합수점을 찾아갈게 아니라 기원정사-어린이대공원-구의역-잠실철교 검문소-한강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결론적으로 수락지맥을 아차산까지 진행했다면 그 이후로는 끝점을 어디로 하든 큰 의미는 없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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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락지맥 분기점(215m봉)/ 시계/ 삼리동봉(포천시 소홀읍 무림리, 이동교리 → 의정부시 자일동)
포천시 소흘읍 무림리(茂林里)와 이동교리(二東橋里)를 잇는 무림고개(98번도로, =다름고개)를 출발해서 한북정맥의 지맥분기점(215m)으로 올라간다. 의정부에서 21번 버스를 타고 내린 무림리 버스정류장에서 왔던 길로 10여m 되돌아가면 농원밥집 뒤편으로 한북정맥에서 이어지는 길이 있고 수락지맥 분기점으로 갈 수 있다. 갈림길이 나오는데 지맥이 포천시를 지나와 의정부시와 만나는 지점으로 수락지맥의 분기점이다. 오른쪽이 소홀읍 이동교리(二東橋里)에서 의정부시 자일동으로 바뀌는 지점이며 좌우로 길이 있는데 오른쪽으로 진행하면 한북정맥이고 왼쪽이 가야할 수락지맥 분기점이다. 짧은 오르막을 넘어서 철조망을 따라 진행하면 주택단지 임도로 내려온다. 잘 포장된 마을 임도로 내려와 전원주택단지를 지나서 다시 산길로 진입한다. 밭경계에 울타리를 쳐놔 진행하기가 고약하다.
♤ 234m봉/ 시계/ 삼리동봉(포천시 소홀읍 무림리, 의정부시 자일동 → 낙양동)/ 4등삼각점(포천 460/ 1994 재설)
준희선생님 수락지맥 산패가 참나무에 매어 있다. 지맥의 오른쪽이 의정부시 자일동에서 낙양동으로 바뀌는 지점이며 의정부 소풍길과 만나는 곳으로 소풍길 이정표 왼쪽에 있는 삼각점봉을 다녀온다.
♤ 의정부 소풍길
수락지맥은 8개 코스의 광릉숲생물권보전지역둘레길과 의정부 소풍길이 인접해 있다. 의정부 소풍길은 의정부 대표시인 고(故) 천상병의 작품 귀천(歸天)에서 아름다운 이 세상을 “소풍”이라고 표현한 것을 인용한 것으로 소풍길은 '소가 바람을 쐬는 길'이라는 의미도 있다. “어릴 적 소풍 가는 마음으로 의정부의 곳곳을 즐기고 느끼자”는 의미로, 의정부시를 에워싸고 있는 원도봉산, 사패산, 흥복산, 천보산, 수락산 등 시외곽 대구간 6개 코스와 중랑천, 부용천 등 시내를 가로지르는 소구간 3개 코스로 구성되어 있는 자연적인 숲길이다. 이 구간 의정부 소풍길 대구간4코스 산림욕길 이정표와 자주 만난다.
♤ 282.9m봉/ 시계/ 삼리동봉(의정부시 낙양동, 포천시 소홀읍 무림리 → 이곡리)
21번, 24번 고압선 철탑이 연달아 있는 봉우리로 지맥의 왼쪽이 소홀읍 무림리(茂林里)에서 이곡리(梨谷里)로 바뀌는 지점이다.
정상 직전에 올라선 봉우리로 벙커가 있네요. 수락지맥 기차바위 정상까지 봉우리마다 벙커가 무지 많습니다.
♤ 삼시봉(282.9m, 의정부시 낙양동, 포천시 소홀읍 이곡리 →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
용암산 정상 직전에 있는 벙커 봉우리로 지맥의 왼쪽이 포천시 소홀읍 이곡리에서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로 바뀌는 삼시봉 지점이다. 지맥은 여기부터 포천시와 헤어지고 남양주시와 의정부시의 경계를 따른다.
정상에 벙커가 있고, 벙커 안에다 개가 새끼를 낳은 모양입니다. 갑자기 꼬리를 감아말은 흰개가 나타났는데 주변을 떠나지를 못하네요.
♤ 용암산(龍岩山, 475.4m)/ 감시초소, 방공호/ 시계/ 의정부시 낙양동 -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
수락지맥에 속한 용암산(鎔岩山, 475m)은 광릉수목원 비탐이기에 이정목이나 표지기가 없어 흐릿한 길을 따라 주의해서 진행해야 한다. 의정부지명유래집을 찾아보니 원래 용(龍)이 아니라 쇠를 녹인다는 뜻의 용암(鎔岩)산이 변한 것이라고 한다. 정상에는 산불감시초소와 통신시설물이 있고 오른쪽으로 계속 내려가면 광릉 국립수목원의 전망대가 있는 임도(林道)에 닿는다. 정상 동쪽 남양주 경계로는 국립수목원 광릉숲이 자리잡고 있으며, 주변에 광릉, 봉선사, 휘경원, 크낙새 서식지, 밤섬유원지 등의 관광지가 있다. 용암산 정상부는 광릉숲생물권보호지역으로 통제되어 산중턱 5부 능선에 우회로가 있다. 경기 포천시 소흘읍, 남양주시 진접읍, 별내면, 의정부시의 경계로 일명 소리봉 또는 물푸레봉이라고 한다. 한북정맥의 수락지맥으로, 수리봉(536.8m)과 능선으로 연결되어 있다. 산의 이름은 산에 바위가 많고 산의 능선 모양이 용같은 모습이며 또는 속설로 용처럼 생긴 바위가 있다하여 용암산으로 불리어졌다. 골짜기에 물푸레골이 있으며, 상봉에 있는 긴 등성이를 긴등이라 하고, 그 골짜기가 긴등골짜기다. 쇠를 녹이는 대장간이 있었을 수도 있겠다.
♤ 광릉(光陵)/ 사적 제197호/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
죽엽산(竹葉山, 615.8m) 자락에 위치한 광릉은 제7대 세조(1417~1468)와 정희왕후(1418~1483)의 능으로 면적만 무려 249만 4,800제곱미터에 달한다. 풍수가들은 광릉을 쌍룡농주형(雙龍弄珠形, 두 마리 용이 여의주를 가지고 노는 형상)이라고 한다. 자리가 좋아서 이후 400여 년간 세조의 후손이 조선을 통치했다는 설명도 있다. 광릉 숲은 2010년 유네스코 생물권 보전 지역으로 지정되었는데 식물 865종, 곤충 3,925종, 조류 175종 등 모두 5,710종의 생물이 산다. 여기엔 흰진달래 등 특산 식물과 장수하늘소 등이 포함되어 있다. 단위 면적당 식물 종 수는 헥타르당 38.6종으로 설악산 3.2종, 북한산 8.9종을 크게 웃돈다. 곤충도 175.2종으로 설악산 4.2종, 주왕산 12.3종보다 많으며 우리나라에서만 사는 크낙새(천연기념물 제11호)도 이곳에 있다. 이처럼 생물이 풍부한 이유는 무엇보다 인간 활동이 집중되는 온대 중부 지역에서 이례적으로 장기간 숲이 보전되었기 때문이다. 광릉 숲은 왕릉의 부속림이므로 일반인의 출입을 엄격하게 통제했고, 일제 강점기에도 임업 시험림 구실을 해왔으므로 개발과 훼손을 피할 수 있었다. 광릉은 6·25전쟁의 흔적을 많이 갖고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정자각을 올린 정면 석대를 보면 수많은 총탄 자국이 보인다. 배위청 원형 기둥의 총탄 흔적은 고리를 박아 엄폐했다. 영조가 세조 등극 200주년을 기념해 만든 비각 내의 능표에도 흔적이 보인다. 세조와 정희왕후 능침의 석물에도 총탄 자국이 많이 있는데, 정희왕후의 능침에 있는 좌측 석마 한 개는 원형을 볼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되었다. 우측 무인석은 두 동강 난 것을 보수한 흔적이 보인다. 광릉의 원찰은 광릉에서 약 2Km 떨어진 인근 농안 마을에 있는 봉선사다. 고려 광종 20년(969) 법인국사가 창건했고 정희왕후의 명으로 중창되었다. 이름도 '선왕의 능침을 수호하는 원찰'이라는 의미를 담아 지었으므로 광릉과는 한 짝 같은 존재다. 한명회, 구치관 등이 책임을 맡아 건설한 사찰로 왕실 원찰 중에서 으뜸으로 대접받았다.
수락지맥에서 세조(世祖, 1417~1468)와 신숙주(申叔舟, 1417~1475)와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이 다시 만나다니 참으로 얄궂은 운명의 장난입니다.^^
♤ 세조(世祖)
세조는 태종 17년(1417) 세종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세종 27년(1445) 수양대군에 봉해졌다. 문종이 형이고, 안평대군과 금성대군이 동생이며, 단종은 조카다. 세종의 뒤를 이은 병약한 문종은 자신의 단명을 예견하고 영의정 황보인, 좌의정 남지, 우의정 김종서 등에게 어린 왕세자가 등극했을 때 그를 잘 보필할 것을 부탁했다. 몸이 약했던 문종이 즉위한 지 2년 3개월 만에 죽자 그의 어린 아들인 세자 홍위가 왕위에 올랐다. 이때부터 문종의 고명을 받은 의정부 대신들과 안평대군, 종친 세력의 수장 격인 수양대군 사이에 본격적으로 권력 다툼이 벌어졌다. 의정부 대신들이 안평대군과 결탁한 이유는 수양대군을 견제하려는 의도가 가장 컸다. 세종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은 호방한 무인의 기질이 있었던 수양대군과 달리 학문과 예술에 밝아서 고매한 학식을 지닌 여러 문인들과 교류했다. 수양대군의 주변에 유독 무인과 건달 들이 모여들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수양대군은 권람, 한명회 등 무인 세력을 거느리고 야망의 기회를 엿보다가 단종 1년(1453) 김종서의 집을 불시에 습격해 그와 그의 아들을 죽였다. 이 사변 직후에 수양대군은 "김종서가 모반했으므로 주륙했는데, 사변이 창졸간에 일어나 상계(上啓)할 틈이 없었다"라고 사후에 임금에게 아뢰었으며, 곧이어 단종의 명이라고 속여 중신을 소집한 뒤 사전에 준비한 생살 계획에 따라 황보인, 이조판서 조극관 등을 궐문에서 죽였다. 이를 계유정난이라 한다. 이후 좌의정 정분과 조극관의 동생인 조수량 등을 귀양 보냈다가 죽였으며, 수양대군의 친동생인 안평대군도 강화도에서 사사했다. 과거 태종이 왕자의 난을 일으켰을 때 이복동생들은 죽였어도 동복형제들만은 극형을 면하게 했던 것과 달리 수양대군은 친동생이라고 봐주지 않았다. 이후 실권을 잡은 수양대군은 1455년 단종으로 하여금 양위하게 하고 왕위에 올랐다. 세조는 1428년(세종 10)에 윤번(尹璠)의 딸과 혼인했으며, 윤씨 부인은 세조가 등극한 후 정희왕후(貞熹王后)가 되었다. 세조와 정희왕후는 2남 1녀의 자녀를 두었다. 첫째 아들 의경세자(懿敬世子)는 1455년(세조 즉위)에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나 2년 만인 1457년(세조 3)에 죽었으며, 둘째 아들이 세조의 뒤를 이어 예종이 되었다. 이 밖에 세조는 한 명의 후궁에게서 두 명의 아들을 더 낳았다. 세조는 의정부의 정책 결정권을 폐지, 재상의 권한을 축소하고 6조 직계제를 부활해 왕권과 중앙 집권 체제를 강화했다. 세조가 가장 신경을 쓴 것은 국방력으로 호적·호패제를 강화하고 전국을 방위 체제로 편성했으며 중앙군을 5위 제도로 개편했다. 건주(建州) 야인을 소탕하는 등 서북면 개척에 힘쓰는 한편, 국토의 균형 잡힌 발전을 위해 각 도에 둔전제를 실시했다. 또한 과전법의 모순을 시정하기 위해 과전을 폐하고 직전법을 실시, 현직자에게만 토지를 지급해 국가 수입을 늘리는 등 조선 왕조가 장기적으로 존속할 수 있는 토대를 닦았다.
♤ 광릉숲유네스코생물권보전지역
경기 포천시 소홀읍 직동리 소재 국립수목원은 1997년 광릉숲 보전대책의 성과 있는 추진을 위해 광릉시험림의 천연림을 이용하여 조성한 수목원으로 1999년 개원한 국내 최고의 산림생물종 연구기관이다. 1987년 개원당시에는 광릉수목원이었으나 1999년 국립수목원으로 명칭을 변경했다. 광릉숲은 동서로 4Km, 남북으로 7Km의 공간으로 우리나라 생물다양성의 보고,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온대지방의 성숙림,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보전국유림, 우리 산림 및 임업연구의 산실이다. 광릉숲은 조선 세조의 능(광릉)의 부속림으로 지정된 이후 550여 년이 지났으며 온대북부의 대표적인 원시림이 형성되어 6천여 종에 달하는 다양한 야생동식물이 서식하는 생물다양성의 보고로서 2010년 유네스코는 광릉숲을 생물권보전지역으로 지정하였으며, 이는 우리나라에서 설악산, 제주도, 신안 다도해에 이어 네번째이다.
♤ 420m봉/ 시계/ 삼리동봉(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 의정부시 낙양동 → 민락동)
용암산에서 임도로 내려서기 전에 지맥의 오른쪽이 의정부시 낙양동에서 민락동으로 바뀌는 지점이다.
지맥의 왼쪽이 수리분맥을 기준으로 진접읍에서 별내면으로 바뀌는 지점입니다.
♤ 407.7m봉/ 시계/ 삼읍동면봉(의정부시 민락동,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 → 별내면 용암리)/ 수리봉갈림길
의정부시와 남양주시의 경계로 지맥의 왼쪽이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에서 별내면 용암리로 바뀌는 지점이며 진접읍 부평리와 별내면 용암리의 경계에 있는 수리봉(537m)으로 가는 갈림길로 개발제한구역 표석이 있다. 남양주시는 별내동과 별내면이 서로 붙어있는데 별내면이 북쪽으로 더 산 깊숙이 박혀 있다.
♤ 316.2m봉/ 시계/ 남양주시 별내면 용암리 - 의정부시 민락동
준희선생님 수락지맥 산패가 참나무에 매어 있다. 지맥은 316.2m봉에서 좌틀로 내려서며, 직진으로 내려서면 본민락 민락코스트코로 내려서서 신숙주선생 묘가 있는 부용산(芙蓉山, 209.8m)으로 진행한다.
용암산에서 내려서는 길에 있는 출입통제표지판에서 무지랭이 계곡으로 내려서는 길이 있습니다.
♤ 무지랭이고개(無至嶺, 220m)
용암산 서쪽인 의정부 민락동 계곡 아래로 산림욕장이 조성된 무지랭이계곡에 무지랭이고개가 있다. 무지랭이는 상식을 잘 모르는 사람을 일컫는 말인데 왜 이런 부정적인 이름이 붙었을까? 알아보니 전혀 다른 뜻이다. 의정부시청에 따르면 원래는 고개를 넘어가도 인가가 없어 더 이상 갈 데가 없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무지령(無至嶺)이 변한 것이다. 무지랭이계곡 무지랭이약수터로 내려서면 본민락이다.
♤ 290m봉/ 시계/ 삼리동봉(남양주시 별내면 용암리, 의정부시 민락동 → 고산동)
지맥의 오른쪽이 민락동에서 고산동으로 바뀌는 지점이다.
♤ 비루봉(224.1m)/ 시계/ 남양주시 별내면 용암리 - 의정부시 고산동/ 4등삼각점(성동 413/ 1994 재설)
남양주시와 의정부시의 경계에 있는 비루고개 직전의 봉우리로 비루봉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개명산과 부용산이 한눈에 보이는 묘지옆 전망대가 있다. 수도지맥을 하며 고령군 쌍림면 만대산에서 고령신씨 시조묘를 가까이 지난 기억이 있는데, 권력의 양지를 쫒아 사육신과 반대의 길을 걸은 신숙주(申叔舟, 1417~1475)가 저곳 부용산 아래에서 편안하게 잠들어 있다.
♤ 비루고개(195m)/ 벼루개/ 시계/ 남양주시 - 의정부시
돌무지 성황당의 흔적이 보인다. 비루고개는 남양주시 별내면 용암리(비루개마을)와 의정부시 고산동을 넘나드는 오솔길이 지나가는 고개이다. 고개 넘어 별이 보인다 하여 별고개로 칭하며, 별 위처럼 높은 곳에 있는 마을이라고 해서 '별을 가까이 할 수 있는 고개'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여기부터 숯돌고개까지는 이정표와 등로가 정비되어 있다. 혹시 연적을 만드는 벼루고개가 와전된건 아닐까?
♤ 293.8m봉/ 시계/ 삼동리봉(남양주시 별내면 용암리, 의정부시 고산동 → 산곡동)
준희선생님 수락지맥 산패가 나무에 매어 있다. 지맥은 좌틀하여 297.8m봉으로 오르며 지맥의 오른쪽이 의정부시 고산동에서 산곡동으로 바뀌는 지점이다. 동남쪽으로 꺽어져 내려선다.
♤ 연장봉(285.7m)
장의자가 놓여져 있는 쉼터가 있으며 정면으로 천마산과 백봉산이, 그 뒤로 용문산이 조망된다. 오른쪽은 관음봉이고 오른쪽 끝으로 불암산이 보인다.
♤ 도정산(道正山, 288.3m)/ 깃대봉/ 시계/ 삼리동봉(의정부시 산곡동, 남양주시 별내면 용암리 → 청학리)/ 4등삼각점(성동 412/ 복구)
도정산 정상은 등로에서 왼쪽으로 조금 벗어나 있으며 도정산 정상석이 있는 곳에서 지맥의 왼쪽이 별내면 용암리에서 청학리로 바뀐다. 조금만 더 진행하면 깃대봉에 4등삼각점이 있다. 마루금은 오른쪽 약수터방향으로 꺽어 박수고개로 내려섰다가 다시 능선으로 진행하게 된다. 도정산은 구한말 정갑성이 은거하며 외세를 물리치기 위해서는 도를 바로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며 난세를 구할 참다운 진리를 바르게 깨달은 산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도정산을 일제강점기 측량의 산물인 깃대봉이라 부르는건 어불성설이다. 산의 정상 가까이에는 처사 정갑용이 은거했던 초막 집터가 있었으며, 산 아래에는 경주 이씨와 의령 남씨가 오래도록 주거해온 집성촌이 있다.
♤ 도정약수터
약수터 주변에 운동기구가 있다. 세갈래 길이 있는데 박수고개는 오른쪽 방향이다.
♤ 박수고개(145m)
경기도 의정부시 산곡동 동의정부IC와 남양주시 별내면 청학리 사이의 고개이다. 고개를 넘는 사람들이 성황당에 모여 박수를 치며 넘었다하여 박수고개라는데 신빙성은 좀 떨어진다. 세종포천간고속도로 건너편으로 심온 천상병시인 초장지에 의정부 산곡동 추모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천 시인은 의정부시 장암동 자택에서 1993년 4월 28일 사망했다. 유택은 의정부시 산곡동 소재 공설묘지(산곡동 추모공원이 아님)에 마련했었는데, 얼마 뒤에 산곡동 일대의 토지소유권 소송에서 승소한 땅주인이 시인의 묘소를 이장하라고 요구를 해서 아주 난처했었다고 한다(지금 그 자리에 설치된 것이 바로 사립 산곡동 추모공원이다). 천 시인의 사후 의정부 장암동에서 친정어머니와 같이 살던 부인 목여사가 2010년 8월 26일에 향년 76세로 사망하자, 시인의 주변 사람들과 의정부시의 노력으로 두분의 유해를 의정부시립공원묘지(양주시 광적면 석우리 소재)에 같이 모실 수 있게 되었다.
♤ 162.6m봉
봉우리 아래에는 군용 벙커가 있고 위에는 환기구가 있다. 그리고 바닥에는 군용 삼각점이 보인다. 이곳부터는 차량소리가 시끄럽다. 내리막길을 내려서니 43번 국도가 지나가는 숯돌고개가 나온다.
♤ 숯돌고개(礪峴, 90m)/ 43번국도/ 편의점
숯돌고개는 남양주시 별내면 청학리와 의정부시 산곡동을 넘나드는 송산로 4차선 43번국도가 지나가는 고개로, 오른쪽으로 약 100m 진행하면 횡단보도 신호기가 있고, 버스터미널이 보이는 왼쪽으로 내려가면 지하도를 지난다.
♤ 구 숯돌고개
숯돌고개 송산로를 건너 곧바로 맞은 편으로 달라붙어 철책을 타고 옛날 숯돌고개인 도로에 내려선다. 이곳은 의정부에서 수락산 청학리 유원지 가는 길이고, 조금 지나면 순화궁고개를 지나 예비군 훈련장과 덕릉고개, 그리고 상계동 당고개로 가는 길이다. 숯돌고개 구길은 대전차장애물이 있다. 수도권외곽고속도로 생태터널을 지나 수락산으로 향한다.
♤ 175.9m봉/ 헬기장/ 벙커봉
숯돌고개에서 수락산으로 오르는 첫번째 봉우리로 발칸포대, 헬기장, 참호, 교통호가 조성되어 있다. 의정부 천보산과 그 뒤로 불곡산이 보인다. 널찍한 임도를 따라 내려서다가 오른쪽에 띠지가 안내하는 숲길로 들어선다.
♤ 사기막고개(125m)/ 시계/ 의정부시 산곡동 - 남양주시 별내면 청학리
이름만으로도 사기(옹기, 도자기)를 굽는 마을의 위에 있는 고개라서 붙은 이름이지 않을까 싶다.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청학리에 위치한 고개로 사기를 굽던 막이 있어서 '사기막'이라고 불린다. 이 마을에 '마당바위'가 있어서 '마당바위마을' 또는 한자식 이름인 '장암'이라고도 불린다. 마당처럼 넓고 평평한 바위의 모양이 중간은 굽었고 좌우는 넓기 때문에 빗물이 잘 빠져, 항상 사람들이 앉을 수 있다.
♤ 향로봉(香爐峰, 463.4m)/ 시계/ 남양주시 별내면 - 의정부시 산곡동
수락산 향로봉은 내원암 대슬랩 소리바위/ 사과바위에서 올라선 근육질의 암릉이다. 향로봉은 수락8경 중 하나로 조선시대 후기 내원암에 머물던 정허거사(연대미상)가 가을 풍경을 보고 수락팔경을 시로 읊었는데, 수락8경은 옥류/은류/금류폭포와 미륵봉의 흰 구름, 향로봉의 맑은 바람, 칠성대의 기암괴석, 불로정의 약수, 선인봉의 영락대를 말한다. 소리바위 뒤쪽 능선 너머로는 불암산이 보이고, 수락산 정상쪽으로는 내원암이 보인다. 지나온 용암산-퇴뫼산 능선 뒤로는 천마지맥이 지나간다. 바위에 구멍이 숭숭 뚫려 바람이 불면 소리가 난다고 소리바위이다. 수락산 정상 주봉은 미륵암이고 의정부쪽으로 도정봉이 있고, 동쪽으로는 도솔봉이 있다. 모두 불교식 용어이다. 영락대와 칠성암 사이에 약수터가 있고 수락산 주능선의 기차바위봉으로 향한다.
사과바위를 다녀오는 길에 오른쪽 아래로 내원암이 내려다 보입니다. 내원(內院)이란 도솔천에서 석가모니불이 입적한 후 56억 7천만년 뒤에 사바세계로 내려와 중생을 구원할 미륵불이 계시는 곳이 도솔천 내원궁입니다.
♤ 내원암(內院庵)
미륵부처님이 상주하시는 곳, 도솔천 내원궁에서 그 이름을 따온 내원암은 수락산 중턱에서 조금 더 올라간 금류폭포 상단, 비교적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 내원암은 신라시대에 창건되었다고는 하나, 창건자는 알려지지 않았다.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奉先寺)의 말사이며, 비구니 스님의 수행처다. 내원암에는 두가지 전승이 내려온다. 첫째가 세조의 왕위찬탈에 분노한 매월당 김시습이 말년에 10년간 이곳에 머물며 도를 닦았다는 장소이고, 둘째는 21대 영조와 23대 순조가 이곳에서의 기도로 탄생했다는 전설이다. 내원암은 1693년 숙종이 파계사(把溪寺)의 영원(靈源) 스님을 불러 수락산에서 백일기도를 올리게 한 뒤 영조(英祖, 재위 1724~1776)가 태어났는데 영조를 얻은 이후로 조선왕실의 원당으로 기도처가 되었다고 한다. 내원암은 특히 정조(正祖, 재위 1776~1800))와의 인연이 깊은데 설화에 의하면 영조가 일찍 서거하자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가 왕손을 얻고자 대구 파계사에서 수도하던 용파화상(龍波和尙: 용파는 현응스님의 법명이며, 숙종은 현응이란 시호를 부여했다)을 내원암으로 불러들이고, 삼각산 금선사 농산화상(聾山和尙)과 함께 정조의 원자 잉태를 기원하는 100일 기도를 드렸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설화에 의하면 100일 기도가 끝나는 무렵 농산화상이 입적하여 원자로 환생하니 이 분이 순조임금이라는 것이다. 남양주에는 조선조의 왕릉이나 비빈(妃嬪)이나 고관대작의 제사를 지내는 원찰로 지정된 사찰이 많은데 내원암 역시 그중 하나에 속한다. 이 절은 철종, 고종 때에도 전각들이 중수되어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한국동란으로 소실되었지만 1790년(정조 14)에 드디어 네 번째 간택된 후궁 수빈 박씨가 순조를 낳자, 정조는 1794년 후사를 잇게 해준 내원암에 칠성각을 지어주고 광응전(光膺殿)이라고 쓴 어필을 내렸다고 한다. 하지만 내원암은 안타깝게 1950년 한국전쟁으로 전소되었는데 1955년 칠성각을 시작으로 1968년에 대웅전을 새로 건립하였고 그 후 영산각과 미륵전을 복원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 선인봉 영락대(仙人峰 迎樂臺, 482m)
의정부시 산곡동 수락산에 소재한 암벽 바위이다. 수락산은 전체가 화강암 석벽과 암반으로 되어있어 도처에 철모바위, 홈통바위/ 기차바위, 등 기암괴석이 즐비하며 샘, 폭포가 많은 반면 나무는 적어 바위의 경치가 뛰어나다. 선인봉 영락대는 수락산 하강바위에서 동쪽으로 바라다 보인다. 선인봉은 옥류폭포, 은류폭포, 금류폭포, 향로봉 청풍, 미륵봉 백운, 칠성대 기암괴석, 불로정 약수와 함께 옛부터 수락8경으로 꼽힌다. 정허거사의 수락8경 시에는 선인봉 영락대에서 신선, 선녀가 놀고 간다는 구절이 있다. 오리바위를 돌아 오솔길을 거쳐 212계단의 가파른 돌층계를 오르면 내원암이 있는데, 이곳의 석조미륵입상의 위치에서 선인봉과 칠성대가 바라다 보인다.
♤ 약수터
영락대에서 칠성대로 가는 중간에 바위봉우리 아래 약수터가 있다. 쥐오줌 만큼 나와 갈수기에는 걱정된다.
♤ 칠성대(七星臺)/ 유두바위(젖꼭지 바위)
칠성대라는 명칭은 이곳이 아이의 무병장수를 빌던 장소였다는 설에서 비롯됐는데, 칠성대 기암괴석의 상단부에 두개의 작은 바위가 달팽이의 촉수 모양처럼 튀어나와 있다. 아이를 낳은 후 북두칠성에 아이의 무병장수를 빌었다는 민간 전통에서 이름이 연유했다. 정허거사의 수락8경(水落八景) 시에는 '칠성대 기암 금강산이 무색하다'는 뜻의 구절이 있다. 향로봉과 영락대, 칠성대, 기차바위를 잇는 수락지맥의 등산로를 통해 찾을 수 있다. 산의 서쪽 비탈면에 있는 내원암의 뒤로는 석조미륵입상이 있는데, 여기에서 선인봉과 칠성대가 바라다 보인다.
♤ 608m봉/ 헬기장/ 기차, 홈통바위/ 시계/ 의정부시 - 남양주시/ 삼리동봉(남양주시 별내면, 의정부시 산곡동 → 장암동)
경기 의정부시 장암동의 기차바위는 가늘고 긴 세로 홈통 모양으로 깊게 골이 파져 있는 바위를 뜻하며 수락산 정상에서 장암역 방향으로 진행하는 등로에 있는 바위 암벽이다. 길이는 대략 5~60m이고 굵은 밧줄이 설치되어 있다. 지맥의 오른쪽이 의정부시 산곡동에서 장암동으로 바뀌는 삼리동봉 지점이다.
♤ 외계인바위/ 시계/ 남양주시 별내면 청학리 - 의정부시 장암동
수락산 정상(주봉)/ 미륵봉으로 오르는 계단 직전에 오른쪽으로 50m 내려선 지점에 있다.
수락산에서 계단을 내려서서 좌틀하여 약 150m 더 내려서면 수락산장 앞에 수락8경 중에 하나인 불로약수가 있습니다. 내원암으로 내려서는 길입니다.
♤ 수락산(水落山, 640.6m)/ 남양주시 별내면 청학리/ 3등삼각점(성동 301/ 1994 재설)
수락산은 서울시 노원구, 경기도 의정부시, 남양주시 별내면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높이는 638m이고 서울과 의정부간의 국도를 사이에 두고 서쪽에 자리잡은 북한산(北漢山 ,837m), 도봉산(道峰山, 739.5m)과 함께 서울의 북쪽 경계를 이룬다. 거대한 화강암 암벽이 노출되어 있다. 바위산으로 1977년 7월 9일에 공원으로 지정되었는데 둘레의 전체 면적은 6,692,795㎡이다. 내원암 일대 계곡에 바위가 벽을 둘러치고 있어 물이 떨어지는 모양이 아름답다하여 수락산(水落山)이라 하였다는 설과 골짜기 물이 맑아 금류, 은류, 옥류라 하는 폭포를 이루어 떨어지는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자태에서 이름이 붙여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산봉우리 형상이 목이 떨어져 나간 모습(首落)이라 하여 붙여진 한자 표기로 고개를 숙이고 있거나, 골짜기 물이 맑아 금류(金流) · 은류(銀流) · 옥류(玉流)라 하는 폭포를 이루어 떨어지는 산의 자태에서 이름이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서쪽 사면에 쌍암사(雙巖寺)·석림사(石林寺), 남쪽 사면에 계림암(鷄林庵)·흥국사(興國寺), 동쪽 사면에 내원암(內院庵) 등이 있고, 이 암자의 뒤에는 고려시대 이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높이 2m의 석조미륵입상(石造彌勒立像)이 있다. 수락산은 산이 낮고 계곡이 짧으나 조망이 좋으며, 의정부나 창동에서 등산할 수 있으며 능선은 등산로로 이용되고 있다. 철모바위, 코끼리바위/ 장군바위(570m), 하강바위, 치마바위 등 모양에 따라 이름 붙여진 다양한 바위가 있다.
♤ 623m봉/ 철모바위/ 삼특시봉/ 남양주시 별내면 청학리, 의정부시 장암동 → 서울특별시 노원구 상계동)
지맥의 오른쪽이 의정부시 장암동에서 서울특별시 노원구 상계동으로 바뀌는 지점이다.
♤ 도솔봉(兜率峰, 538.5m)
수락산의 동쪽에 있는 봉우리로 산 아래 도안사, 학림사, 수암사 등 사찰이 많다. 오른쪽은 수락산보루가 있는 상계동 수락산역, 당고개역 그리고 왼쪽은 불암산으로 향하는 덕능으로 갈라지는 삼거리이다.
♤ 373.6m봉/ 4등삼각점(성동 409/ 1994 복구)/ 마당바위/ 특별시계/ 서울특별시 - 남양주시/ 삼리동봉(서울시 노원구 상계동, 남양주시 별내면 청학리 → 남양주시 별내동)
조금 아래에 마당바위 고압선 철탑이 서있고, 지맥의 왼쪽이 남양주시 별내면 청학리에서 별내동으로 바뀐다.
이 분이 불수사도북의 강북오산을 연결하신 게로군요.
♤ 천수몽(千壽몽)
천수몽이라는 석물이 설치되어 있다. '천수몽'은 돌아가신 분 성함을 따서 '천수의 꿈'이라는 뜻으로 삼남매가 아버님을 기리기 위해 설치했다고 한다. 2013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거의 10년 동안 매일 곡갱이와 삽으로 길을 내고 톱으로 나무를 자르고 해서 군부대 휀스 옆길을 조성했다고 하며 부친이 애착을 남긴 등로에 유골을 뿌려 달라고 했는데 자손이 차마 그럴 수 없어 유골함을 만들어 설치했다고 하는 애절한 사연이 있다.
♤ 덕능고개/ 예비군동원훈련사단
수락산과 불암산을 연결하는 지점으로, 서울시 노원구 상계동 당고개에서 남양주시 별내면 청학리 덕능마을로 넘어가는 고개로 고개 위에 동물이동통로가 있고, 아래로는 불암산터널이 지난다. 그 옆으로 예비군교육장이 있다. 선조의 아버지인 덕흥대원군의 묘소인 덕릉이 고개 동쪽에 있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묘/ 덕릉
선조의 아버지로 잘 알려진 덕흥대원군 이초(1530~1559)의 묘이다. 1980년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조선 초기 두 차례에 걸친 왕자의 난과 계유정난으로 왕자들이 정변을 일으켜 권력을 잡는 상황이 벌어지자 왕실이나 신료들 공히 종친에 대한 경계심이 심화되었다. 종친이 국정에 개입하면 왕의 지위를 위태롭게 하고 관료들의 기득권을 한순간에 뒤집을 수 있다는 사실이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세조대에 28세의 젊은 나이로 영의정까지 올랐던 귀성군 이준이 예종대에 이르러 한순간에 추락한 것도 군신 간에 종친에 대한 이해타산이 일치했던 탓이었다. 그 결과 성종대에 이르러 종친의 정치참여는 법적 규제 장치를 통해 원천 봉쇄되기에 이른다. 그때부터 아무리 뛰어난 학문과 재능이 있더라도 종친에게는 뜻을 펼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실의에 빠진 종친들은 음풍농월이나 하면서 덧없이 세월을 흘려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임금이나 신료들은 이런 종친들의 운명을 감안하여 살인이나 대역죄 같은 중죄를 범하지 않는 이상 웬만한 비리는 눈감아주었다. 그나마 위안거리라면 종친의 범위가 현임 국왕의 4대손까지로 규정되어 있으므로 그 한계를 벗어나면 왕실과 인연이 끊어진 것으로 간주되어 후손들이 과거를 통해 벼슬자리에 나갈 수 있었다. 중종의 서자였던 덕흥군 이초 역시 다른 종친들과 마찬가지로 날개 꺾인 왕자의 길을 걷다가 죽었지만, 셋째아들 하성군이 보위에 오르자 조선사 최초의 대원군으로서 사후 임금에 버금가는 예우를 받았다. 하지만 그의 아들 선조는 재위 내내 서자 출신에 방계혈족이라는 두 가지 콤플렉스에 시달렸다. 덕흥대원군 이초(李岧)는 1530년(중종 25년) 3월 5일, 경복궁에서 중종의 서9남이자 증 의정부 좌의정 안탄대의 딸 창빈 안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선조의 할머니이자 중종의 후궁인 창빈 안씨의 능이 한국전쟁 이후 들어선 동작동 국립묘지이다. 9세 때인 1538년(중종 33년) 덕흥군으로 책봉되었고, 13세 때인 1542년(중종 37년) 영의정 하동부원군 정인지의 손자로 지중추부사와 판중추부사를 지낸 정세호의 딸 하동 정씨와 가례를 올린 다음 전례대로 궁궐을 나가 한성부 인달방의 도정궁에서 살았다. 문정대비 윤씨가 수렴청정을 하고 있던 명종 초기에 여느 왕자들처럼 종친부 소속이었던 그는 여항을 오가며 세월을 낚고 있었다. 덕흥군 이초는 꿈과 희망을 거세당한 종친이었지만 그래도 부귀영화를 누리며 도도한 권세를 행사하던 왕실의 일족이었다. 1567년(명종 22년) 6월 28일, 이복형인 명종이 후사없이 승하하고 유명에 따라 당시 16세였던 덕흥군의 셋째아들 하성군 이균이 보위에 올랐다. 선조는 등극과 동시에 생부인 덕흥군을 왕으로 추존하려 했지만 사림파가 장악하고 있던 삼사에서는 그가 덕흥군의 아들 자격이 아니라 명종의 지명으로 즉위했음을 들어 맹렬하게 반대했다. 고심하던 선조는 1569년(선조 2년) 11월 1일, 북송 영종의 생부 복왕(濮王)을 추존한 고사를 들어 아버지 덕흥군을 덕흥대원군으로, 어머니 하동군부인은 하동부대부인으로 추존하고, 종묘에 고할 때는 황백부모(皇伯父母)라 칭하도록 했다. 또 친형 하원군 이정에게 정1품에 가하고, 4대에게 작위를 내리며 덕흥대원군묘를 봉사하게 하였다. 아울러 잠저였던 도정궁 후원에 가묘(家廟)를 세우고 신위는 백대(百代)가 지나도 옮기지 못하게 했다. 묘역 규모 112㎡이며, 묘역은 사성(莎城)으로 둘러 쌓여 있으며 봉분은 호석으로 둘러져 있고 높이 190㎝, 둘레 15.7m의 쌍분이다. 봉분 앞에는 상석이 있고 그 앞에 장대석으로 계절(階節: 무덤 앞에 평평하게 만들어 놓은 땅)을 쌓고 정면에는 석등을 배치하고 좌우로 망주석과 문인석을 각각 배치하였다. 묘비는 대리석으로 규모는 높이 168㎝, 너비 53㎝, 두께 18㎝이다. 비문은 ‘덕흥대원군하동부대부인정씨지묘(德興大院君河東府大夫人鄭氏之墓)’라고 되어 있다. 또 묘소 앞 약 20m 지점에 대리석으로 된 신도비가 있는데 규모는 총높이 350㎝, 비 높이 196㎝ 너비 80㎝, 두께 27㎝이다. 귀부와 이수는 화강암으로 되어 있고 1573년(선조 6)에 세워졌다. 비문은 홍섬(洪暹)이 지었으며 송인(宋寅)이 썼다. 한편 묘소 아래 아들 하원군의 묘가 있고 묘지기 마을에는 대원군의 위패를 모신 덕흥사(德興祠)와 원찰 흥국사(興國寺)가 있다.
♤ 불암산(佛巖山, 509.4m)/ 특별시계/ 삼동봉(남양주시 별내동, 서울시 노원구 상계동 → 중계동)/ 2등삼각점(성동 24/ 1994 재설)
다람쥐광장에서 쥐바위로 불암산으로 오르며 지맥의 오른쪽이 서울시 노원구 상계동에서 중계동으로 바뀌는 지점이다. 서울 노원구와 경기도 남양주시에 걸쳐 있으며 북한산, 도봉산, 수락산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산이다. 불암산의 유래는 화강암의 큰 바위로 된 봉우리가 마치 송낙(松蘿笠: 소나무 겨우 살이로 만든 여승이 주로 쓰든 모자)을 쓴 부처의 형상이라 하여 붙은 이름이다. 불암산 남면은 치마를 두른 듯하다 하여 치마바위라고도 하며, 불암산은 하늘에서 내린 보배라 하여 천보산(天寶山)이라고도 하며 또는 필암산(筆巖山)이라고도 한다. 불암산은 서울시 경계에 위치한 5개 산 가운데 가장 낮은 산이다. 상계동과 남양주시를 잇는 덕릉고개를 사이에 두고 수락산(638m)과 마주보고 있는데, 이 산이 갖는 이름 그대로 바위산을 이루고 있다. 또 산 이름이 불교적인 느낌을 주듯이 산자락 곳곳에 사찰이 많다. 불암산의 대표적인 사찰은 정상에서 동남쪽 산기슭에 있는 불암사다. 전설에 의하면 불암산은 원래 금강산에 있었던 산이라고 한다. 어느날 불암산은 조선왕조가 도읍을 정하는데 한양에 남산이 없어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다. 그래서 자기가 남산이 되고싶어 금강산을 떠나 한양으로 출발했다. 그러나 지금의 불암산 자리에 도착하여 보니 한양에는 이미 남산이 들어서서 자리를 잡고 있었다. 불암산은 한양의 남산이 될 수 없었기에 금강산으로 되돌아 갈 돌아갈 작정으로 뒤돌아서서 갈 준비를 했다. 하지만 한번 떠난 금강산에는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생각에 돌아선 채로 그 자리에 머물고 말았다. 이 때문에 불암산은 현재 보는 것과 같이 서울을 등지고 있는 형세이다.
♤ 거북바위
불암산 암릉을 거은 다 내려선 거북바위 옆에 산장이 있고, 오른쪽으로는 불암사로 내려서는 등산로가 있다.
♤ 깔딱고개
서울시 노원구 중계동 정암사와 남양주시 별내동 불암사 사이를 넘나드는 고개이다.
♤ 불암사(佛岩寺)
경기도 남양주시 천보산에 있는 통일신라의 승려 지증국사가 824년(헌덕왕 16) 창건하였고, 도선국사가 중창하였으며, 무학대사가 삼창하였다.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의 말사이다. 조선시대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 양주군 불우조에 보면 불암사 주변의 경치를 읊은 다음과 같은 시가 전하고 있다. “우리 집 서쪽 영에 절이 있는데, 여러 벗들과 손잡고 함께 놀았다. 달 숲에 송뢰소리, 두릉이 묵었고, 늙은 나무 굽은 바위 이백이 썼다. 객자가 안 오니 원숭이 서럽고, 노승이 잠들려니 산새가 운다. 아득한 띠끌 세상 어느 곳인가. 흰 구름 땅에 가득, 길을 몰라라.” 누가 지었는지 알 수 없는 시이지만 옮겨 적어 몇 백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의 불암사 주변과 비교를 해 본다. 같은 불암산에 자리한 석천암이나 천보사는 하늘을 찌를 듯, 대지를 짓누르고 있는 거대한 바위를 뒤로 하고 있다. 그러나 불암사는 바위의 웅장함이나 시원한 전경이 있지는 않다. 서울근교 사대명찰 중의 하나로서, 세조 때 왕성 사방에 왕실의 원찰을 하나씩 정할 때 '동불암'으로 꼽혔던 곳이다. 이때 서쪽에서는 진관사, 남쪽에서는 삼막사, 북쪽에서는 승가사가 함께 뽑혔다. 최근 절 뒤 암벽에 조각한 마애삼존불은 조각솜씨가 우아하다. 대웅전의 현판은 명필 한석봉의 글씨이다.
♤ 421.6m봉/ 불암산성/ 봉화산/ 헬기장
불암산의 메인 봉우리 정상에서 남쪽으로 이어지는 봉우리에 위치하며, 불암산성을 언제 처음 지었는지는 정확히 모른다. 다만, 발굴된 유물 중에 신라시대 토기 조각이 많이 있는 것을 보아 신라 때 지은 것으로 추정한다. 아차산성과 가까워 일부에서는 고구려의 성으로 추정하기도 하나, 성의 형태를 비롯하여 유물 형태의 차이가 있어 고구려 성은 아닌 듯 하다. 고려 시기에도 활용된 듯 하며, 《대동지지》에 따르면, 임진왜란 때에는 의병장 고언백(高彦伯)이 이곳에 성을 쌓고 싸웠다고 한다. 산 정상부를 마치 띠두르듯이 축조한 테뫼식 원형 산성이다. 세로로 긴 벽석과 직사각형 모양으로 만든 면석을 차곡차곡 쌓아 올렸는데 거의 수직에 가까운 모습이다. 그리고 면석이 무너지지 않도록 길쭉한 돌을 길이에 맞추어 두었다. 전체 형상은 봉우리 주변을 둘러서 오각형의 모양이다. 현재 대부분은 허물어져 있고 서쪽과 동쪽의 벽 일부만이 조금 남아있다. 정상 근처에는 산성의 집수시설로 추정되는 구덩이가 있다.
♤ 천보암(天寶庵)
천보사는 남양주 불암산 중턱에 있는 사찰이다. 『문종실록』에 ‘문종 1년 3월 병진일에 의정부가 원유(왕실의 사냥터)의 혁파를 건의’하는 내용의 상소문이 있는데, 그 상소문에서 불암산을 ‘천보사 인근의 산’이라 칭하고 있어 1451년(문종 1)에 천보사가 이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일제의 침탈로 황폐하여졌으나 1955년 이후 승려 동훈이 중건하였다. 부처바위라는 뜻의 불암산은 주봉이 마치 송낙(여승이 쓰는 모자)을 쓴 부처의 형상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며, 불암산의 다른 이름이 천보산이다. 천보산이자 불암산이기도 한 이 산에는 불암사와 천보사가 있는데, 천보사는 불암사에서 서남쪽으로 500m쯤 떨어진 곳에 있으며 비탈진 등산로라서 오르기에 쉽지는 않지만 차량이 다닐 수 있도록 포장을 해 놓아 자차를 이용하면 쉽게 갈 수 있다. 천보사 주차장에 닿으면 남양주 별내 신도시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고 풍광이 아주 멋지다. 천보사 범종루 앞에서 가파른 시멘트 길을 오르면 눈앞에 거대한 자연 암벽(코끼리바위)이 나타나고 암벽 앞에 천보사 대웅전이 오롯하게 자리하고 있다. 천보사는 예로부터 '천연보궁'으로 불리며 기도 영험이 있는 사찰로 유명했다고 한다. 코끼리바위 암벽에는 마애석불이 새겨져 있으며, 그 아래 쌓은 석축에는 미륵불좌상과 오층석탑이 있다. 오층석탑은 천보사의 가장 오래된 것으로 조선 후기 양식을 띄고 있다. 천보사가 있는 불암산은 해발 508m로 주요 등산로만 10개가 있으며 등산로도 평탄한 편이라 초보 등산가들도 정상까지 쉽게 오를 수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 학도암(鶴到庵)
대한불교 조계종 학도암은 특이하게도 서울에 있으나 김천 직지사의 말사이다. 조선 후기인 1624년(인조 2) 무공(無空)이 한 암자를 지금이 자리로 옮겨와 창건한 사찰이다. 초기의 사찰 명칭은 알 수 없지만 전하는 말에 따르면 절 주위의 불암산 경치가 너무 아름다워서 학이 이곳에 날아와 노닐었다고 하여 학도암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가 승병들과 함께 양주에서 한양으로 넘어오는 왜군을 막기 위해 불암산 학도암과 수락산에 매복하였다가 노원평 전투에서 큰 승리를 했다고 한다. 1878년(고종 15) 벽운(碧雲)이 중창하였다. 일제강점기인 1922년 성담(聖曇)이 주지로 있을 때 산림 10여 정보(町步)를 매입하여 절을 확장하였다. 1950년 6.25전쟁 때 절이 소실되었고, 이것을 1965년 주지 김명호가 중창하여 오늘에 이른다. 절의 대웅전 뒤편 암벽에는 높이 13.4m의 거대한 마애관음보살좌상이 새겨져 있다. 학도암에는 조선 고종과 명성황후의 사랑이야기가 전해온다. 조선 고종3년(1866년) 민치록의 여식 민자영은 16세에 왕비로 간택을 받아 가례(결혼)를 올렸으나, 고종(15세)은 이미 후궁 영보당 귀인 이씨를 총애하고 있었다. 가례를 올린 첫 날 남편 고종은 왕비의 처소엔 들지 않고 귀인 이씨의 처소에 들었다. 황후가 되었으나 첫날밤에 왕이 다른 여인에게 간 것이다. 더군다나 1868년 4월 귀인 이씨가 고종의 첫 아들인 완화군을 낳자 고종은 더욱 총애하였으며, 흥선대원군 조차 명성황후와 대소신료들을 앞에두고 완화군을 안고 왕실이 튼튼해졌다며 크게 기뻐 하며 춤을 추었다. 왕의 사랑을 받은 후궁이 먼저 아들을 낳자 황후는 크게 불안해 하였다. 구중궁궐속에서 임금을 비롯한 누구에게도 사랑을 받지 못하던 나이 18세에 불과한 어린 황후에게 한 궁녀가 부처님을 조성하면 그 가피로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다며 불사를 권하였다. 그날 밤 명성황후의 꿈에 큰 바위 위에 앉았던 학이 품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게 된다. 다음날부터 꿈에 나온 학과 큰 바위가 있는 사찰을 찾았는데 그곳이 바로 학도암이다. 이 마애불상은 1870년대에 명성황후의 발원으로 조성되었다고 한다. 이외에도 1819년(순조 19)에 제작된 부도가 남아 있다. 학도암은 서울 불암산의 대표적인 사찰로 전국에서 가장 큰 규모의 마애관음보살상이 있다. 특히 이 마애불상은 왕실 발원을 통해 조성되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대략 10여 점만이 알려진 조선시대의 마애불 중 하나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 247.1m봉
봉이 아니라 언덕처럼 몽긋한 243m봉에 개끗한 육각정자가 있다.
♤ 노원고개/ 특별시계/ 삼동봉(남양주시 별내동, 서울시 노원구 중계동 → 공릉동)
서울시 노원구 중계동 은혜사와 남양주시 별내동 산들소리 수목원 사이의 고개이다. 지맥의 오른쪽이 서울시 노원구 중계동에서 공릉동으로 바뀌는 지점으로 직진으로는 212m봉이 보이고 좌틀하여 효성APT 3km← 방향으로 계속해서 길을 이어간다. 서울시 공릉동은 공덕리(孔德里)와 태릉에서 한 글자씩 합하여 만들어진 이름이다. 노원고개에서 철제울타리를 넘어서서 담터고개로 내려서야 하나 군부대인지라 울타리를 따르다가 왼쪽 삼육대학교로 우회로를 따른다. 진갈색 철책을 지나 오른쪽의 능선으로 군부대 지맥길로 들어섰다면 유격장에서 오른쪽 줄기로 올라서야 한다.
♤ 태릉(泰陵) & 강릉(康陵)/ 사적 제 201호
태강릉은 제11대 중종의 제2계비 문정왕후 윤씨(1501~1565)의 능인 태릉과 제13대 명종(재위:1545~1567)과 인순왕후 심씨(1532~1575)의 능인 강릉을 태릉에서 동쪽으로 1km 떨어진 능선에 모시게 되어 태강릉으로 부르는 왕릉이다. 태릉과 강릉은 약 480여년을 어머니와 아들, 며느리가 불암산(508m)을 의지한 체 가까이서 나란히 함께 조성되어 있다. 명종은 덕릉고개에 있는 중종의 서자인 덕흥대원군의 형이다. 명종의 비인 인순왕후는 본관은 청송이며 성은 심씨로 12세 때 경원대군(명종)과 가례를 올리고 인종이 죽은 후 1545년 14세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시어머니 문정왕후의 섭정으로 명종과 인순왕후는 허수아비였으며 윤원형 등의 외척세력이 득세하여 부정부패가 만연하자 백정출신 임꺽정이 의적행각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태릉에서 입장권을 발권하여 태릉을 관람한 후 강릉으로 가려면 해당 입장권을 들고 강릉 매표소에서 보여 주어야 한다. 원래 동일한 능역 안에 있었지만 개발 등의 여파로 완전히 분리된 상태이며 입구도 다르다. 강릉 입구는 삼육대학교 정문 바로 옆에 붙어 있기 때문에 찾기가 힘들다면 삼육대학교 정문을 찾아가면 된다.
신수근(愼守勤, 1450~1506)은 연산군과 처남 매부 사이입니다. 신수근은 연산군의 아내인 폐비 신씨의 오빠이자 중종의 첫번째 부인인 단경왕후 신씨의 친정 아버지입니다. 그런고로 중종반정은 신수근에게는 매부를 폐하고 사위를 옹립하는 일이었습니다.
♤ 문정왕후(文定王后)
중종의 정비는 연산군의 공신 신수근의 딸 단경왕후 신씨였으나,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축출된 후 공신들의 압력으로 폐출되고, 후궁이던 윤여필의 딸 윤씨가 왕비로 책봉되었다. 하지만 장경왕후 윤씨가 세자 호(인종)를 낳고 엿새 만에 죽자, 파평 윤씨 윤지임(尹之任, 1475~1534)의 딸이 왕비로 책봉되었다. 그 계비가 문정왕후다. 그 무렵 문정왕후의 득남 불공을 드리러 봉은사에 갔던 막냇동생 윤원형이 보우대사의 소개로 정난정(1506~1565)을 알게 되었고 문정왕후가 당시로서는 많은 나이인 34세에 자식(명종)을 낳게 되었다. 중종의 사후 세자 호가 즉위하여 인종이 되었지만, 불과 8개월 만에 죽자 문정왕후가 낳은 13살의 왕자가 즉위하여 명종이 되었다. 문정왕후가 수렴첨정을 하며 소윤인 윤원형(尹元衡, 1503~1565)이 주도하여 인종의 외척인 대윤을 모조리 숙청시킨 사건이 을사사화다. 이때 정난정은 문정왕후와 윤원형을 오가며 맹활약 했다. 2년 뒤 문정왕후의 전횡을 비방하는 양재역 벽서사건으로 정미사화가 발생하여 대윤 세력은 완전히 멸문지화를 당하였다. 문정왕후는 올케 정난정을 통해 보우대사를 소개받았다. 정난정을 보고 한눈에 반해버린 윤원형은 끝내 정실부인을 내쫒게 되고 정난정은 정식으로 윤원형의 부인이 되어 남편을 따라 외명부 종1품 정경부인이 되었다. 1565년 문정왕후가 65세로 죽자 대간들의 상소로 윤원형은 방귀전리(放歸田里)되었다. 도성에서 금부도사가 내려온다는 소문을 들은 정난정은 독약을 마시고 자살하고 이에 상심한 윤원형도 5일 뒤에 자살했다.
♤ 제명호
제명은 이재명(James Milton Lee)목사의 한국어 이름이다. 1912년 부친이 선교사로 봉직하고 있던 평안남도 순안 의명학교에서 태어났다. 평생 한국의 재림교회 교육을 위해 봉사한 그는 1947년 현재의 삼육대학교 부지를 마련하는 일을 비롯하여 당시 삼육신학원 원장을 역임하며 학교 발전에 큰 공을 세웠다. 특별히 1953년 그의 교섭으로 미군장비가 동원되어 이 호수가 만들어졌으므로 이 호수는 그의 이름을 따서 제명호라 명명하였다.
♤ 삼육대
삼육대학교는 1906년 10월 10일에 현재의 평안도 순안국제비행장터인 평안남도 순안에서 의명학교(義明學校)란 교명으로 출발했다. 이 이름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너희에게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라"라(말 4:2)는 성경말씀의 "의로운 해(태양)"(義明)에서 유래했다. 성경에서 "의로운 해"는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삼육교육의 기독교적 사명과 이상을 가리킨다. 구한말 국운이 기울어져 가던 1906년 10월 10일에 개교한 이래 본 대학은 일제 강점의 민족수난, 동족상잔, 그리고 산업화의 긴 세월동안 민족계몽과 교육 근대화의 횃불이었다. 일제의 탄압으로 폐교되기도 했고 학장과 이사장을 역임했던 최태현 목사가 일본 경찰의 고문으로 순교했다. 한국에서는 유일하게 전 캠퍼스 절대 금주와 금연, 지.덕(영).체의 전인교육, 그리고 청교도적 정신을 가르치는 작고도 알찬 고유한 대학이다. 원 지맥길은 삼육대로 내려서기 전에 왼쪽 능선을 따라 담터고개로 향하나 군부대가 들어서 부득이 삼육대 제명호를 지나 교정에서 왼쪽 도로를 따라 사회교육원을 걸쳐 후문으로 향한다. 후문 상가를 지나 큰 도로에서 우틀하여 담터고개로 향한다.
♤ 담터고개 사거리/ 장기(墻基)/ 삼특시경계(서울특별시 노원구 공릉동, 남양주시 별내동 → 구리시 갈매동)
서울시 노원구 공릉동에서 남양주시 별내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담터고개를 지나면서 사유지와 육군사관학교로 지맥이 들어가 도로따라 우회해 새우개고개(47번국도)에서 지맥 마루금을 다시 만난다. 구리시 갈매동에 있는 담터마을은 삼화농장 북쪽(갈매동 6,7,8,9통)에 있는 마을 이름으로 북쪽과 서쪽으로 둘러싼 작은 야산들이 마치 마을을 담으로 둘러싼 듯하여 붙은 이름이다. 옛날에는 담터마을로 불리다가 일제시대에는 양주군 노원면 장기리로 불리웠고 해방이후에 다시 담터라는 이름을 되찾았다고 한다. 추어탕집 골목을 지나서 갈비집이 나오고 갈비집 마당을 거쳐서 담터마을로 내려간다. 이곳 담터마을은 시골마을이나 지금은 마을 주택보다도 중,소형공장과 물류창고들이 점령을 하고 있는 느낌이다. 이곳은 길을 잘못 들면 迷路처럼 힘들었던 곳인데 개발로 철거가 완료 되었다. 옛날 경춘선이 지나가는 철길 흔적을 건너 개활지를 지나 오른쪽으로 꺽어 올라 태릉C.C 담장을 따라 걷는다.
육군사관학교를 화랑대라 부르고 정문에 화랑의 동상이 세워져 있으나 삼국을 통일한 데 기여한 화랑보다는 민족의 웅비를 나타내는 광개토대왕의 동상이 서야 더 어울릴 성 싶은 개인적 소회가 있습니다.
♤ 육군사관학교
1946년 5월에 창설된 남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가 같은해 6월 15일조선경비사관학교(朝鮮警備士官學校)로 개칭된 뒤, 정부가 수립되면서 9월 5일 현재의 교명(校名)으로 확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육군사관학교의 역사는 1945년 12월에 문을 연 군사영어학교[Military Language School]와도 관계가 깊다. 군사영어학교는 1946년 2월 27일태릉(서울시 노원구 공릉동)으로 이전하여 남조선국방경비대(南朝鮮國防警備隊)의 창설과 더불어 폐교될 때까지 약 110명(일본육사출신 12명, 학병출신 72명, 지원병출신 6명, 만주군출신 18명, 중국군출신 2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군사영어학교가 해체된 이튿날인 1946년 5월 1일에 군사영어학교에서 임관하지 못한 학생 60명과 경비대 각 연대의 사병 중에서 2∼3명씩 선발된 28명 등 모두 88명을 제1기생으로 하여 조선경비사관학교가 개교하였다. 대한민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수립되기 직전까지 배출된 제1기에서 제7기까지 약 1,800여 명의 사관후보생들은 기별에 따라 최단 45일부터 최장 6개월 정도의 교육을 받은 후 임관되었다. 경비사관학교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직후, 즉 1948년 9월 5일 국군의 창설과 동시에 육군사관학교로 개칭되면서 교육기간이 다소 연장되었다. 실제로 제8기는 22주, 제9기는 23주의 교육훈련을 각각 받았다. 1950년 6월 4년제 정규과정으로 생도 2기생이 입교하여 대망의 정규 사관교육이 시작되는 듯하였으나 6.25로 실현되지 못했다. 당시 육군사관학교는 전쟁 발발 3일 후인 1950년 6월 28일에 임시 휴교 조치되었다. 졸업을 1주일 앞두고 있던 생도 1기와 4년 과정으로 입학한 지 20여 일밖에 안되었던 생도 2기의 재교생들은 생도 신분으로 전선에 투입되었다. 그들은 포천 부근의 부평리 전투를 비롯하여 갈매리전투, 광나루전투 등 모두 여덟 차례의 격전을 치렀다. 육군사관학교는 1953년 7월 휴전과 더불어 전선의 국면이 안정되자 이듬해 6월에 태릉으로 복귀하여 새로운 교육환경을 준비하게 되었다. 특히 학교 설립의 법적 근거인 <사관학교설치법>이 1955년 10월에 공포되면서 육군사관학교는 수업 연한이 4년인 대학과정으로 인정받게 되어 졸업생에게는 이학사(理學士) 학위를 수여함과 동시에 육군소위로 임관하게 되었다. 지리적인 위치로 보아 태릉은 서울의 동북 방면에서 시내로 향하는 주요 접근로를 감제할 수 있는 불암산과 수락산을 끼고 있어 군사작전상 요지에 해당한다. 이러한 점을 감안하여 일제강점기 일본군 당국은 지원병 훈련소를 이곳에 설치했었고, 1945년 8·15 광복 후에는 국방경비대의 제1연대 A중대가 기존 시설을 바탕으로 주둔했었다. 태릉이 이렇듯 그 나름의 역사적 배경을 지니고 있었지만 1957년 3월 당시 교장이었던 백남권(白南權) 장군이 지명의 개칭을 논의케 하였다. 국민의 여망을 담은 육군사관학교가 민족적 전통이나 화랑 후예의 기상을 닦는 국방의 요람지로서 발전하기 위해서는 ‘화랑대’라는 명칭이 적합하다는데 의견이 모아졌다. 21세기를 맞아 육군사관학교는, 세계화와 정보화 추세에 부응하여 미래 전장을 주도할 수 있는 군 인재 양성을 위해 야전과의 연계성을 제고하고, 전공과정을 심화하여 장차 군사전문가로 발전할 수 있는 기초를 제공하고, 생도들의 과다한 학습부담을 경감시켜 더 많은 자율학습 시간을 부여하며, 교과목간의 경쟁적 발전의 동기를 부여하는 등 새로운 변화를 계속 시도하고 있다.
담터고개에서 올라선 산성교회 이후로는 지맥이 태능C.C. 안으로 흘러 우회하는 구간입니다. 갈매역과 태능C.C. 사이로 개발이 진행되어 철거가 완료되었고 새우개고개까지 아스팔트 도로조차도 뒤집혀져 있습니다.
♤ 구리시 갈매동(葛梅洞)/ 갈매역(경춘선)
경기도 구리시 최북단 서쪽에 위치한 법정동으로 갈매동을 기준으로 동쪽으로는 구리시 사노동이 있고, 남쪽으로는 구리시 인창동, 서쪽으로는 노원구 공릉동과 중랑구 신내동이 있고, 북쪽으로는 남양주시 별내동이 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구리시인데 구리시 중심부와 매우 떨어져 있고, 무엇보다도 갈매언덕(동구릉)으로 막혀 있어서 구리와 사실상 단절되어 있다. 서울특별시의 인구를 분산시키기 위하여 계획한 구리갈매공공주택지구 개발 덕에 그나마 촌동네 수준에서 벗어났다. 갈매라는 이름의 어원에는 두 가지 설이 있는데, 하나는 주위 산의 형세가 칡과 매화와 같대하여 갈매라 했다하고 다른 하나는 목마른 말이 화접리(현재 남양주시 별내동 지역)샘말의 물을 먹는다는 '갈마음수'형이라는 풍수지리 용어에서 비롯되었다. 이후 구리시의 외곽으로 버려져 있다가 2010년 경춘선 개장 때, 갈매역 동쪽(구리시 방면)이 역세권개발사업으로 갈매동이 정식으로 개발되었다. 2023년에 갈매역 서쪽(태릉 방면)에 대한 개발계획이 발족되었다.
♤ 새우개고개/ 특별시계/ 삼구동봉(구리시 갈매동, 서울특별시 노원구 공릉동 → 중랑구 신내동)
구리시 갈매동과 서울 공릉동을 잇는 2차선 도로로 내려서고 갈매우체국과 태릉골프장 후문을 지나, 중앙선 철길을 넘어서서 47번 국도를 만난다. 서울 중랑구 신내동의 자연마을인 새고개 마을에서 경기도 구리시 갈매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로서, 고개가 새우등처럼 굽어 있다 해서 새우골개라 하였다. 새우개고개를 지나며 지맥의 오른쪽이 서울시 노원구 공릉동에서 중랑구 신내동으로 바뀐다. 47번 국도가 지나는 곳으로 도로를 건너 SK주유소 옆 오른쪽 절개지로 올라선다. 절개지로 올라서면 배밭이 나타나고 왼쪽에 보현사가 보이고, 배밭을 통과하여 오른 능선부에 식별이 어려운 팔강산(135.4m) 삼각점이 나타난다. 삼각점이 있는 삼거리에서 등로가 뚜렷한 직진길을 버리고 오른쪽으로 꺽어져 내려서니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꽤나 많이 걸려있다.
♤ 검암산(儉巖山, 171.4m)/ 특별시계/ 삼동봉(서울시 중랑구 신내동, 구리시 갈매동 → 인창동)/ 4등삼각점(성동 441/ 1994 재설)
세종포천고속도로 상부를 지나는데 생태통로라고 하기엔 근린공원 수준이다. 오른쪽으로 등로가 있지만 비계철계단으로 올라 울타리를 넘어서야 검암산(171.4m)을 들러서 간다. 삼각점이 있는 정상에는 쉼터가 조성되어 있다. 불암산에서 부터 지나온 지맥이 훤히 내다보이며 독도선배님의 코팅지가 나무에 매어 있다. 왼쪽으로 동구릉 울타리를 따라 조금 더 진행하면 구릉산(177.9m)에 이른다. 임진왜란 때에는 고언백(高彦伯)이 건원릉의 주산인 검암산에 두개의 보루를 설치하여 왜적들을 유격전으로 격퇴하는 등 큰 활약을 보여주었다.
♤ 구릉산(九陵山, 177.9m)/ 동구릉
구릉산 정상은 군부대가 차지하고 있다. 동구릉을 둘러싸고 있는 산을 말한다. 동구릉이 있어 구릉산으로 부르지만 건원릉비에는 검암산이라 표기되어 있다. 또 김정호가 지은 대동지지에는 검암산(儉岩山)이라 표기되어 있다. 소나무가 울창한 산의 색이 검어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주변 마을 사람들은 금암산(錦岩山)이라 부르기도 한다. 검(劍)자가 칼을 의미하므로 불길하다 하여 구릉산이라고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 구릉산이라는 명칭은 아홉개의 능이 모두 들어선 이후 명칭으로 그리 오래된 것은 아니다. "동오릉", "육릉동", "칠릉" 등으로 능이 새로 생길 때마다 시기별로 다른 이름으로 불리다가 동구릉으로 명칭이 정착된 시기는 1855년으로 추존왕 익종의 묘를 용마봉에서 이곳으로 옮겨와 아홉개의 능이 들어서면서 부터이다.
♤ 북부간선도로/ 옛 망우고개/ 국군구리병원
동구릉 펜스가 끝나자마자 57동원사단사령부 철조망을 타고 내려간다.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과 서울 중랑구 태릉을 잇는 북부간선도로가 지나가고 있다. 도로 양쪽으로 55사단과 57사단이 자리를 잡고 있고 이곳이 원래 망우리고개라고 한다. 도로가 가운데 광고판에 가려진 방호벽이 있고 지맥길이 도로로 인해 끊기는 바람에 군부대가 있는 왼쪽으로 이어간다. 옛 망우고개는 여기인데 나중에 1킬로 남쪽에 새 길을 내면서 그곳이 망우리고개로 불리웠다고 한다. 풍수를 중요시 했던 태조는 무학대사, 하륜 등으로 하여금 자신의 음택(陰宅)을 물색하게 하였다. 양주 땅 검암산 밑에 좋은 음택 자리가 있다는 전갈을 받은 태조는 그곳으로 왕림한다. 청룡, 백호 두 산줄기가 너른 벌판을 감싸안은 아늑한 명당은 돌어 별로 없는 옥토였다. 결국 태조는 세상을 떠난 후 자신의 뜻대로 이 명당에 묻혀 건원릉(健元陵)이 마련되고 그 후에도 능이 여럿 들어서서 '서울 동쪽의 9릉'이라 해서 동구릉이 되었다. 좋은 산후지지를 정한 태조는 만족했다. 돌아오는 길에 망우리고개에 올라서서 자신의 음택이 될 자리를 바라보고 혼자 말하듯이 한 마디 했다. "이제야 근심을 잊겠노라." 근심(憂)을 잊겠다(忘)는 뜻의 이 한 마디 말은 결국 망우(忘憂)라는 지명을 낳았고, 이것이 고개 이름과 동리 이름으로 붙여진 것이다. 임오군란 때에는 민비가 궁녀복으로 변장하여 화양정을 들러 이 길로 충주로 피난했다는 일화를 적고 있다.
♤ 군부대 정상/ 특별시계/ 삼동봉(구리시 인창동, 서울특별시 중랑구 신내동 → 망우동)
북부간선도로를 건너 군부대 울타리로 올라선 봉우리로 울타리 안쪽으로 정상부에 초소가 있고, 그 옆에 선돌바위가 있다. 지맥의 오른쪽이 서울시 중랑구 신내동에서 망우동으로 바뀌는 지점으로 가야할 망우산이 바라다 보인다.
♤ 151.3m봉/ 특별시계/ 삼동봉(서울특별시 중랑구 망우동, 구리시 인창동 → 교문동)
국군구리병원 옆 철조망을 따라 올라선 정상부에서 다시 사유림 철조망이 이어진다. 지맥의 왼쪽이 구리시 인창동에서 교문동으로 바뀐다.
망우카페를 지난 삼거리에 아래쪽으로 망우리 사잇길로 올라서면 유관순열사, 김상용시인, 송촌 지석영선생, 이인성 화백, 도산안창호선생 이장지에 유허비 등을 놓치게 되어 저는 위쪽으로 망우산3보루에 올랐습니다.
♤ 망우리고개/ 6번도로
경기도 구리시 교문동과 서울특별시 중랑구 망우동 경계에 있는 고개로 수도 서울의 동쪽 관문이다. 역사적인 일화에 의해 붙은 이름으로 조선 태조가 말년에 이 고개를 넘어 현 건원릉 자리에 자신이 묻힐 묘자리를 정하고 난 후 근심을 잊었다고 하여 붙여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세조실록』 권31, 9년 12일 임인조와 『세조실록』 권31, 13년1월 기묘조에는 망올리(亡兀里, 芒兀里)로 표기되어 있다. 따라서 태조 이성계와 관련한 망우의 유래는 후세인들이 지어낸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 망우산(忘憂山, 281.3m)/ 서울시립묘원
경기도 구리시 교문동과 서울 중랑구 망우동의 경계에 위치한 산으로 망우산 2보루 유적지가 있는 곳에 전망대가 있고 그 옆 소나무에 준희선생님 산패가 매어 있다. 보루의 훼손이 심한 곳이다. 망우산의 유래는 1394년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사직의 기초를 놓은 조선 태조 이성계가 무학대사와 하륜 등으로 하여금 자신의 음택을 물색하게 했다. 양주 검암산 기슭, 지금의 동구릉(東九陵) 내 건원릉(健元陵) 자리에 신후지지(身後之地, 사후에 자신이 묻힐 명당)를 정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한 고개에 이르러 멀리 자기의 능터를 굽어보던 태조가 “이제야 모든 근심을 잊겠노라(於斯吾憂忘矣)” 했다 하여 이 고개를 망우(忘憂, 근심을 잊음) 고개, 또는 망우리 고개라 불렀다. 옛날 태조가 넘던 고개가 있는 망우산이 오늘날 묘지공원이 되었으니 예언이나 한 듯하다. 망우산에는 서울시립장묘사업소 망우묘지가 있다. 총면적 60만여 평에 33만여 기의 분묘가 있다. 공동묘지 지정은 1933년 경기도 임야 일부를 경성부에서 양도받아 묘지로 사용하면서부터 91년 서울시가 중랑구로부터 인수한 망우묘지는 이미 73년부터 포화상태로 더 이상 묘지 구하기가 어렵다.
♤ 256m봉/ 특별시계/ 삼동봉(구리시 교문동, 서울특별시 중랑구 망우동 → 면목동)
망우산 2보루를 지나 사색의길 정자인 동락정으로 내려서기 직전 봉우리에서 지맥의 오른쪽이 중랑구 망우동에서 면목동으로 바뀐다. 망우역사문화공원 순환로인 사색의길 맨 위에 있다. 가까이에 죽산 조봉암, 만해 한용운, 영화감독 노필, 친일행적이 있는 언론인 장덕수, 박희도와 이장한 남파 박찬익, 고하 송진우 묘터가 가까이 있다.
관룡탑, 시루봉과 망우1보루 갈림길 삼거리에서 시루봉을 다녀옵니다.
♤ 시루봉(204.2m)/ 태자봉(太子峰)
윗골 북쪽에 있는 아차산의 봉우리로 고구려에서 축성한 보루지 중에 하나이다. 조선시대에 나라에서 남양 홍씨에게 내려준 사패산이라 한다. 봉우리가 시루처럼 넓다하여 시루봉이라 하며, 한다리에 살던 내시와 남양 홍씨들 간에 땅 싸움이 벌어져 시위봉이라고도 한다. [경녕군파 선원이씨세보]에 있는 지도에는 '태자봉(太子峰)'이라 표기되어 있다.
♤ 265.3m봉/ 특별시계/ 삼동봉(서울특별시 중랑구 면목동, 구리시 교문동 → 아천동)
산불감시초소를 지나 망우산 1보루 가기 직전의 무명봉으로 지맥의 왼쪽이 구리시 교문동에서 아천동으로 바뀐다.
♤ 망우산1보루(279.5m)/ 4등삼각점(성동 493/ 1994 재설)
철덮개로 덮혀있는 4등삼각점 옆에 준희선생님 산패가 매어 있다. 망우산의 세개 보루 중 유일하게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망우산 1보루 유적지가 있는 정상부는 헬기장 조성과 대규모의 군용 교통호가 만들어지면서 상당 부분 파괴된 것으로 보인다. 또, 인근에 있는 거대한 분묘 뒤쪽에 다량의 화강암 석재를 이용해 석축을 쌓았는데, 두께가 얇고 비교적 거칠게 다듬은 상태를 보았을 때 성벽의 석재를 재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2004년 10월 27일 일대의 다른 보루들과 함께 '아차산 일대 보루군'이라는 명칭으로 사적 제455호로 지정되어 경기도 구리시에서 관리하고 있다. 삼각점은 튼튼한 덮개 아래 고이 모셔져 있다.
♤ 318.5m봉/ 헬기장/ 특별시계/ 삼동봉(구리시 아천동, 서울특별시 중랑구 면목동 → 광진구 중곡동)
용마산 5보루를 지나 용마봉, 아차산으로 가는 삼거리 헬기장이 시계이자 지맥의 오른쪽이 서울시 중랑구에서 광진구로 바뀌는 삼구동봉이다. 축조시기를 알 수 없는 용마산 장성이 지난다. 서울시 광진 중곡동은 능말(능동)과 면목동의 가운데에 있어 가운데말, 간뎃말이라고 하던 것을 한자명으로 표기한 이름이다.
♤ 용마산(龍馬山, 349m)/ 일등대삼각점
서울특별시 광진구 구의동과 중곡동에 걸쳐 있는 산이며, 장군봉이라고도 한다. 아차산에서 제일 높은 봉우리이며, 아차산과 함께 한북정맥에서 갈라나온 수락지맥의 끝을 이룬다. 예전에는 아차산을 포함해 남행산이라고도 불렀다. 예로부터 중랑천 지역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으며, 고구려가 전쟁에 대비해 만든 소규모 요새지인 보루 유적이 있다. 1970년대 들어 서울특별시가 아차산과 용마봉 일대에 아차산공원·용마공원·용마돌산공원 등 도시자연공원을 조성하였다. 산에는 아기장수 전설이 전해지는데, 삼국시대에는 장사가 태어나면 가족을 모두 역적으로 몰아 죽이는 때가 있었다고 한다. 백제와 고구려의 경계였던 이곳에서 장사가 될 재목의 아기가 태어났는데, 걱정하던 부모가 아기를 죽여버렸으며 그뒤 용마봉에서 용마가 나와 다른 곳으로 날아간 데서 용마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또는 조선시대 산 아래에 말 목장이 많아 용마가 태어나기를 기원하는 뜻에서 용마산이라는 이름이 생겨났다고도 한다.
♤ 아차산(峨嵯山, 295.7m)
구리시의 서쪽을 둘러싸고 있는 산이다. 『삼국사기』에는 '아차(阿且)'와 '아단(阿旦)' 두가지 표기가 나타난다. 지금의 '아차(峨嵯)'와 음과 뜻이 똑같은 명칭은 조선시대에 쓰여진 고려 역사책인 『고려사』에 처음 나타난다. 조선시대에는 지금의 봉화산을 포함하여 망우리 공동묘지지역과 용마봉 등의 광범위한 지역이 모두 아차산으로 불렸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아차산은 남쪽을 향해 불뚝 솟아오른 산이라 하여 남행산이라고도 하며 마을사람들은 아끼산, 아키산, 에께산, 엑끼산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아끼산, 에께산, 엑끼산 등과 유사한 명칭은 『경기지(京畿誌)』 양주조에 화양사가 '약계산(嶽溪山)'에 있다고 설명한 데서 나타난다. 이 악계산은 아차산과 같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지금의 아차산 서쪽 봉우리를 지칭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아차'와 '아단'의 뜻은 일반적으로 '작은' 또는 '아들'로 보고 있다.
♤ 대성암/ 범굴사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의상대사는 서울서 해돋이를 가장 먼저 만끽할 수 있는 아차산에 두 개의 절을 두었다. 산 중턱(지금은 주택가로 변했다)에는 화양사(華陽寺)를, 산 정상 바로 아래엔 범굴사를 지었다. 화양사에 뿌리를 둔 절이 지금의 영화사고 범굴사 명맥을 이은 절이 대성암이다. 구리 아차산3층석탑은 아차산 남쪽 중턱에서 동북쪽 방향 계곡 위 산지의 넓은 암반 위에 축조되어 있다. 가람의 한 요소이기보다는 석탑 자체가 독립적인 요소로 가람과는 별도의 장소에 위치하고 있다.
아차산에서 아차산성을 빼놓을 수 없답니다. 현재 한창 복원 중이며 구리시와 서울시의 경계입니다. 당초 아차산성에서 장로신학대학으로 내려 광나루에서 끝낼려고 했으나 아차산에서 서울숲으로 이끄는 관광도 괜찮겠다 싶어 이어봤습니다.
♤ 아차산성(阿且山城, 208m)/ 특별시계/ 구리시 아천동 - 서울특별시 광진구 광장동
아차산1보루에서 내려서며 고구려정과 낙타고개를 지나 아차산성에서 구리시와 헤어지고, 서울특별시 광진구 광장동으로 진입하여 장로회신학대학을 통과하여 광나루역에서 수락지맥을 마무리 한다. 아차산성은 서울특별시 광진구 아차산 남단에 있는 둘레 1km의 포곡식 석축 산성이다. 발굴 조사 결과, 아차산성은 7세기를 전후한 시점에 축조되었고, '북한산성(北漢山城)'이라 적힌 명문 기와가 발견되어 신라 진평왕 대인 604년에 재설치된 신라 북한산주(北漢山州)의 치소라는 것이 밝혀졌다. 아차산성은 백제 개로왕이 고구려 장수왕에게 죽임을 당한 아차성(阿且城), 고구려 온달 장군이 신라군과 싸우다가 전사한 아단성(阿旦城) 등으로 알려졌으나 이와 관련된 고고학적 증거는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아차산성은 삼국시대 백제 초기에 축조된 산성이나 고구려 장수왕의 남하로 고구려 영토가 되었다가 신라가 나제동맹을 깨고 한강유역으로 진출하며 다시 신라의 영토가 되었다. 보루가 현재 복원 발굴작업이 진행 중이다. 한강유역을 두고 대치한 고구려와 백제의 전투로 백제의 개로왕이 전사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고구려정에서 영화사로 내려서서 모두부(7천원)로 점심을 하고 이어갔습니다. 기원정사는 영화사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 영화사(永華寺)/ 화양사/ 서울특별시 광진구 구의동
대한불교 조계종 직할교구 본사 조계사의 말사인 아차산 영화사는 서기 672년(신라 31대 문무왕 12년)에 의상대사께서 창건하였으며 화양사(華陽寺)라 하였다. 그후 1395년 용마산 기슭 군자봉에 옮겼다가 1907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기고 영화사라 하였다. 현재의 사찰 모습을 갖춘 것은 중창의 원력을 세우신 태공월주 대화상에 의하여 1997년 완성되었다. 대웅전 안에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왼편에는 일체중생의 고통을 대자대비로 구제하여 주시는 관세음보살을 모셨고 오른편에는 지옥중생을 구제하여 주시는 지장보살을 모셨다.
♤ 어린이대공원/ 유강원(裕康園)/ 서울특별시 광진구 능동
서울 광진구 능동은 오래전부터 몇몇 성씨가 모여 살던 집성촌으로서 많은 주민들이 살았던 이 일대 중심 동네였다. 1904년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 순종 비인 순명황후 능터를 지금 어린이대공원 자리에 만들며 능골·능말·능리로 불리기 시작했다. 1926년 경기도 남양주 금곡동에 있는 순종 능 옆으로 이장을 한 이후부터는 유릉터로 불리워 왔다. 어린이대공원 정문을 지나 분수대 가는 길에서 멀지 않은 곳에 당시 옛 '유강원' 터에 남아 있던 왕릉석 조각들이 야외에 전시되어 있다. 일제강점기인 1927년 경성골프구락부가 국내 1호 골프장으로 만들어져 1972년 폐장되기까지 운영되었다. 서울시 광진구 능동에 위치한 어린이대공원은 한국 최초의 어린이공원으로서, 당시 서울컨트리클럽의 골프장으로 사용되던 능동 부지에 어린이를 위한 대공원을 조성하도록 하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1970.12.4.)에 의해 추진이 시작되어 1973년 5월 5일 어린이날에 개장하였다.
서울시 지정보호수 제2호 수령 700년이 넘은 느티나무가 그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화양정 터 주변 주택가에 몇 백년 묵은 느티나무가 많이 있군요.
♤ 화양정(華陽亭)/ 성덕정(聖德亭)/ 서울특별시 광진구 화양동
화양정은 사복시(司僕寺) 전곶평 말 목장(牧場) 안에 있던 정자로, 1432(세종 14)년에 세워져 군사훈련, 사냥, 계회(契會) 등에 이용되었다. 그림에 나타난 화양정은 4각 정자로서 돌기둥 기단 위에 문이 없는 개방형 난간으로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기둥 둘레가 한 아름이 넘었으며 내부는 100여간 이상이어서 정확한 크기는 가름할 수 없지만 규모가 매우 컸다. 화양정의 이름은 세종이 직접 지었다고 전해지며, 세종이 목장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높은 위치에 정자를 지은 목적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수천마리의 말이 넓은 들판을 뛰어놀고, 한가로이 노니는 경치를 즐기기 위함이었고, 다른 하나는 당시 군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말의 양육 상태를 관리 감독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 1911년 낙뢰(落雷)로 소실되었다. 암컷 말을 키우는 목장 자마장리(雌馬場里)가 자양동의 어원이 되었다.
♤ 낙천정(樂天亭)/ 서울특별시 광진구 구의동
구의동은 아차산 기슭에서 한강변에 이르는 곳에 자리한 자연촌락 구정동(九井洞)의 九자와 산의동(山宜洞)의 宜자를 따서 구의동이 되었다. 잠실대교 한강변 자양3차현대아파트 낙천정(樂天亭) 자리는 해발 42.8m의 대산(臺山) 혹은 시리미산, 발산이라고 하였다. 한강변 일대에 강건너 풍납토성, 몽촌토성과 대치하던 고구려의 보루 흔적이 있었다는데, 구의동 해발 53m의 구릉지대는 1977년 화양택지지구 개발로 대단위 아파트촌으로 깍여나가 개발되었다. 잠실대교 한강변 자양3차현대@ 낙천정(樂天亭) 자리는 해발 42.8m의 대산(臺山) 혹은 시리미산, 발산이라고 하였다.
♤ 서울대학교박물관 발굴조사팀
광진구 구의동 잠실대교 북단 한양아파트가 있는 곳은 해발 53m의 태봉이라 불리는 구릉이었고 이 구릉 정상부에 무너져 내린 둥근 형태의 석축 시설물이 있었다. 화양지구 토지구획 정리사업이 시작되면서 서울대학교 박물관이 이곳을 발굴조사했는데 400점 가까운 토기는 물론 다량의 철제유물이 출토되었고 토기 종류도 단지, 항아리, 시루 등 갖가지였다. 철기도 칼·창·화살촉·도끼 등 무기류, 보습·가래·쇠스랑 같은 농구류, 솥·항아리 같은 생활용기 등으로 다양했다. 무엇보다 1,300여 점에 이르는 철제 화살촉이 눈길을 끌었다. 한 유적에서 이처럼 많은 종류의 철기가 대량으로 출토된 사례는 그리 흔치 않다. 유적 자체도 독특했다. 지름 15m, 둘레 46m, 높이 1~1.8m 정도의 석축을 쌓고, 그 안에 온돌과 출입구, 배수로 등을 갖춘 주거 유적이 확인됐다. 주거 유적 중심부에는 폭 1.5m, 깊이 2.3m가량의 집수시설로 추정되는 구덩이가 있었다. 석축 남쪽 2곳에는 네모난 돌출부가 있었는데, 한강 남쪽의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쪽을 향하고 있었다. 이 유적의 성격을 어떻게 볼 것인가 처음부터 논란이 있었다. 많은 군사 유물이 나온 것으로 미루어 보아 군사 요새일 가능성이 제기됐다. 그러나 다소 의문이 있지만 애초부터 이 유적이 백제 고분일 거라는 선입관이 강했다. 그래서 군사 유적일 여지를 어느 정도 남겨둔 채 이 유적을 백제 고분으로 간주했다. 이때만 해도 학계에서 고구려 유물에 대한 이해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이 유적이 고구려 유적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1988∼1989년 몽촌토성 발굴에서 출토된 토기를 복원하는 과정에서 유명한 고구려의 나팔형 토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으로 남한에서 고구려 토기 출토가 확인된 것이다. 그런데 구의동 보루에서 출토된 토기들이 몽촌토성에서 출토된 고구려 토기와 비슷함을 알게 되면서 뒤늦게 구의동 유적이 고구려 군사 유적임을 깨닫게 되었다. 이 유적이 위치한 구릉 정상은 해발 고도가 높지 않으나 한강변에 접해 있어 강 건너 백제 풍납토성이나 몽촌토성 등 한강 남쪽의 넓은 지역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요충지였다. 이 보루는 일종의 전방 초소 역할을 하던 곳이다. 구의동 유적에서는 창 9점, 도끼 4점, 긴 칼 2점 등 개인 무기가 출토되었는데, 보병의 휴대 무기가 창이니까 창의 숫자만큼 군인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즉 10명 정도의 군사들이 주둔했던 소규모 군사시설임을 짐작할 수 있다. 군사초소 유적에서 철기류와 토기류가 대량으로 출토된 점이 의아했다. 초소가 폐쇄됐으면, 군사들이 당연히 무기 등과 생활도구들을 갖고 이동했을 터다. 그런데 이 유적의 출토 양상을 보면 이런 무기와 도구들이 버려진 모습이었다. 군사들이 밥을 짓기 위해 이동할 때 반드시 먼저 철거하는 철솥과 철항아리가 요새 안 온돌 아궁이에 그대로 걸려 있는 채로 출토됐다.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군사들이 자신을 지킬 무기를 버리고 갈 리가 없다. 아마도 무기나 솥 같은 도구들을 미처 챙기지 못하고 겨우 몸만 빠져나가야 할 급박한 상황이 벌어졌음에 틀림없다. 아니면 그곳에서 병사들이 모두 전멸했거나 더구나 주거지에서는 불탄 흔적도 남아 있었다. 무기와 토기들이 불탄 자리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었고, 불을 끄려는 흔적도 볼 수 없었다. 불이 나면서 그걸 끝으로 이 유적은 파괴되고 더 이상 사용되지 않았던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어느 날 이 구의동 보루에 머물던 고구려군이 미처 예상치 못했던 적의 기습 공격을 받았던 것일까? 그렇다면 그때가 언제일까? 이 구의동 보루 유적은 강 건너 백제 도성을 조망하기 위해 축조된 시설이다. 그렇다면 이 보루는 아직 백제가 한성에 도읍하고 있을 때 고구려군이 내려와서 한강 북쪽을 차지했을 무렵에 처음 만들어졌을 것이다. 빠르면 광개토왕이 백제를 압박할 때이거나, 늦어도 장수왕이 한성을 공격하기 이전 5세기 중엽일 것이다. 이때 백제군이 한성을 위협하는 고구려군을 막기 위해 강을 건너 공격해왔던 것일까? 그런데 이곳 보루와 부근 아차산 보루 유적에서 출토되는 고구려 유물은 대체로 5세기 중엽에서 6세기 중엽에 걸치는 것들이다. 시기를 좀 더 뒤로 당겨야 한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다. 바로 551년, 백제 성왕과 신라 진흥왕이 동맹해 고구려를 공격해온 그때다. 이때 백제 성왕이 이끄는 백제와 가야의 연합군은 한성(漢城)을 공파하고 한강 하류의 6군을 차지했고, 거칠부 등 여덟 장군이 이끄는 신라군은 죽령을 넘어 한강 상류의 10군을 확보했다. 백제 성왕과 신라 진흥왕, 이 두 명의 걸출한 군주가 손을 잡고 고구려를 공격하게 되자 고구려군은 그냥 무너져내리듯 한강 일대 영토를 순식간에 빼앗기고 말았다. 고구려는 왜 이렇게 쉽게 한강유역을 내주었을까? 이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다시 구의동 보루로 돌아가보자. 장수왕과 문자왕 때 고구려가 차지한 한반도 중부지역은 대략 금강 상류지역에서 소백산맥 이북 지역이었다. 차츰 백제나 신라에 영토를 빼앗기면서 점차 경계선이 북상했다고 하더라도, 백제 군대가 한강 남쪽까지 코앞에 다다른 상황은 아니었을 것이다. 즉 백제와 신라가 동맹해 북진군을 일으켰을 때, 한강 북쪽 구의동 보루에서 본다면 아직 적이 쳐들어오기까지 대비할 수 있는 시간이 넉넉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의동 보루의 군사들은 너무 급박해서 무기까지 내팽개치고 도망했거나 혹은 전멸한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기습을 당했다기보다는 전혀 방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다. 한강이라는 천혜의 방어선도 사람이 지키지 않으면 도랑만도 못한 법이다. 당시 고구려의 남쪽 방어망은 총체적 난국에 빠져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구의동 고구려 보루 유적은 우리에게 많은 역사적 진실에 접근할 수 있는 귀한 자료를 가득 담고 있다. 이 구의동 보루 유적은 남한에서 처음으로 발굴된 고구려 유적이라는 점만으로도 보존할 가치가 있다. 그러나 이 유적은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보루가 자리했던 구릉조차 깎여나가 언제 구릉이 있었는지 알기 어렵다. 보루가 있던 자리에는 1983년에 고층 아파트가 들어섰다. 이제 보루의 흔적은 발굴조사보고서의 사진으로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 자리에는 보루보다 더 높은 아파트가 서 있지만, 개발이란 이름 아래 수많은 역사 유적을 파괴했던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이 시대의 단견(短見)을 증언하고 있을 뿐이다.
화양제일시장을 지나 건대 맛의 거리로 지하철 2호선을 건너 양꼬치거리에서 우틀하여 서울숲으로 직진했습니다. 뚝도시장을 통해 구도로로 빠지고 싶었지만 일직선으로 진행하는 연무장길이 요즘 핫하다는 성수동 뜨는 동네, 가게마다 손님이 줄을 서는 곳입니다.
♤ 뚝섬(纛島)
성동구 성수동 전체 및 송정동 일부 지역, 광진구 자양동·화양동·구의동 일대를 아우르는 지역으로 대략 광나루로의 남쪽 지역에 해당하며 실제로 섬은 아니다. 이 지역은 본디 한강과 중랑천이 만나는 합류부 부분에 위치하며, 동 전역이 퇴적 지형의 평지이고, 자연적으로는 거대한 범람원(氾濫原)이다. 그래서 예전부터 장마철에는 중랑천 물이 넘쳐 원래는 서쪽으로 휘어져 돌아가야 할 중랑천이 송정동, 성수동을 지나쳐 바로 한강으로 들어갔다. 이때 만들어지는 일시적인 섬이 바로 뚝섬이었다. 즉, 화양리 서쪽으로 뚝섬 일대는 거은 물에 잠기는 범람원(氾濫原)이었다. 현재의 건국대 서울캠퍼스 일감호에서 발원하여 중랑천으로 합류하는 성수천이 있었는데 1980년에 서울지하철 2호선 공사를 하면서 그 위를 복개했고 현재는 아차산로와 서울지하철 2호선이 그 위로 다닌다. 성수동은 성수동 성당 자리에 성덕정(聖德亭)과 성수동에 정수장이 들어서서 성수동이 되었다. 뚝섬유원지에 있던 나루터는 뚝도진, 뚝섬나루, 독백탄(禿白)으로도 불렸다. 이곳은 조선시대부터 강남(현재의 강남구 청담동 지역)과 송파를 이어주던 나루터였다. 1940년에 뚝섬 유원지가 건설된 이후 1970년에 영동대교가 건설되기 전까지도 뚝섬나루는 제 역할을 했었다.
♤ 서울숲(Seoul Forest)
서울숲은 성수대교 북단 서울특별시 성동구 성수동1가에 있는 서울 도심 속에 자연과 문화가 어우러진 대표적인 테마공원으로 주변에 중랑천, 응봉산, 달맞이공원, 한강(성수대교), 뚝섬유원지 등이 있어 거대한 녹지를 이루고 있다. 2005년 6월 18일에 개원하여 시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임금의 사냥터, 상수원, 경마장, 골프장 등 다양한 용도로 활용된 이곳은 주거 업무지역으로 개발하려다 약 35만 평의 부지에 약 2,352억 원의 사업비를 들여 환경친화적인 대규모 도시속 녹지 휴식공간으로 거듭났다. 영국의 하이드파크, 뉴욕의 센터럴파크와 견주어도 손색없는 서울의 웰빙 공간이다. 서울숲은 문화예술공원, 체험학습원, 생태숲, 습지생태원 등 다섯가지의 특색있는 공간과 기타 시설들로 구성된 다양한 테마로 나누어진 공원으로 각 구역마다 독특한 경험과 볼거리를 제공하는 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다. 서울숲 안에 있는 뚝고수원지 제1정수장은 미국인 콜브란(H. Collbran)과 보스트위크(H.R Bostwick)가 고종의 허락을 받고 1906년(광무 10년)에 착공하여 1908년(융희 2년)에 완공한 한국 최초의 정수장으로 공사 자재 일체를 전부 미국과 영국제로 사용했다. 뚝섬로, 고산자로 등 여러 도로로 인해 토막난 상태라 면적에 비해 부지 활용이 효율적인 편은 아니다. 성수대교나 강변북로 밑, 강변북로 위나 뚝섬로 무지개터널 위로 여러 통로들을 만들어 놓긴 했지만 여러 권역 사이의 이동에는 불편한 점이 많다. 넓은 잔디밭과 어린이 놀이 시설이 있어 가족 단위 방문객이 많으며, 산책로가 잘 만들어져 있어 연인들도 많이 찾는 곳이다. 자전거렌탈샵에서 자전거를 빌려 타는 사람도 많이 보이며, 가끔 쫄쫄이를 입고 단체 라이딩을 하는 사람들도 보인다. 봄, 가을 그리고 날씨 좋은 주말에 방문객들이 성황을 이룬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거의 매주 주말마다 코스프레 촬영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습지 생태원뿐만 아니라 수변 휴게실 뒷편에서도 코스프레 촬영을 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 중랑천/한강 합수점/ 놀빛광장/ 서울특별시 성동구 성수동
성동구 응봉산 아래 한강과 중랑천의 두 물이 만나는 두물개를 한문으로 두무포로 적었다. 강건너로 압구정이 마주하며 한강을 통하는 포구가 있어 한때 남한강을 통해 한양으로 이동하는 조운선이 정박하던 곳이었다. 지금은 성수동 정수장과 옛 경마장 자리에 서울숲이 조성되어 있다. 뚝섬은 첨부터 산줄기라 하기 미안한 구릉지였고, 개발로 밀어버려 별다른 의미가 없다. 굳이 수락지맥의 산줄기를 아차산에서 좀 더 연장한다면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합수점을 찾아갈게 아니라 기원정사-어린이대공원-구의역-낙천정-잠실철교 검문소-한강이 아닐까 싶고 조금 더 연장한다면 조선시대 연무장으로 사용되었던 화양정을 둘러보고 한강으로 향해도 좋다. 경수초교에 수준점, 그리고 장안철교와 살곶이다리 사이 뚝방길 아래에 14.2m 수준점이 있다.
첫댓글 운영자님 수락지맥 마무리 하셨네요
모처럼 지맥 산행기를 접해 봅니다
예전 우리는 두구간으로 2019년10월 11월에 나누어 했습니다
그때 광나루역에서 마무리 하였고요
수락산 불암산 용마봉도 생각이 납니다
망우리공원 망우산 근처에 날씨가 포근해서 개나리가 많이 피어 있었네요
망우리공원에 화가 이인성 도산 안창호 선생 묘소를 지나 가기도 했지요
용마봉 근처에서 막걸리 한잔 기억도 납니다
홀산으로 부지런히 산행 하시는 모습 넘 보기 좋습니다
환절기 건강 관리 잘하시고 행복한 맥길 이어가시기를 바랍니다^(^
와룡산선배님!
2019년이면 벌써 5년 세월이 흘렀군요.
그쯤 진행하신 선배님들은 세종포천고속도로 건설현장을 바라보셨을것 같네요.
지방에서 올라와 담터고개에서 1구간을 끊는다면 버스로 서너정거장 나와,
화랑대역2번출구 정류장에 불한증막사우나를 이용하면 좋겠단 생각을 해봤습니다.
저는 불암산 내려가다 거북바위 산장에 불이 켜져있길래 들어갔는데 막걸리 한잔에 소고기 두첨 얻어먹었습니다.^^
전에 산장지기는 돌아가셨고 새로운 분이 영업을 시작할 준빌 하더군요. 격려와 응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