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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 : 2025. 10. 7.~ 9.(화~목) - 음력(8. 16.~18.), 일출 06:33~일몰 18:04
●산행지: 만뢰지맥(萬籟枝脈) 1구간(2박3일) 졸업
●산행코스: 엽돈재-지맥분기점(411m)-355.3m-412.4m-월봉산(435.3m)-싸리재-392.7m-북면산/적성단맥분기점(479.1m)-들목이고개-445.4m-522m-만뢰산(612.2m) 왕복-489.7m-425.1m-482.8m-504.7m-배성고개-장고개-216m-장교현(21번국도)-덕유산(415.6m)-지장고개-환희산(402.6m) 왕복-국사봉갈림봉(385.5m)-덕고개(2차도로)-계산2길-계산3길-206.8m-도하3길-173.3m-한고개(26번도로)-228.1m봉-510번도로-목령산(229.1m) 왕복-에딘버러CC-155.2m봉-205.3m봉-154.2m봉-삽티고개(540번 도로)-200.9m-비봉(200.5m)-233.4m-상봉산(193.4m)-국사리고개(22번도로)-국사봉(172m)-경부고속국도/ 몽단이고개-119m-분고개(2차도로)-응봉산(175.8m)-안새말/ 신촌마을-쌍청교-병천천/미호강 합수점
●먹거리: 생수1.5리터, 크림빵3, 카스타드소보루,빅탕콩샌드, 다이제스트2,초코다이제스트2, 롯샌1, 사탕10, 게비스콘
●준비물: 1인용텐트, 바람막이, 침낭카바, 1회용 우의, 스페츠, 매트리스, 은박메트2, 스틱, 전지가위, 말방울, 헤드랜턴, 멀티LED, 구급약, 부직포, 충전지2, 충전짹, 손수건, 면수건, 휴지, 물티슈, 팔토시, 안대, 귀마개, 칫솔, 양말, 띠지13
●거리: 약 60.1Km
●소요시간: 43.46h
●누구랑: 나홀로
●경비: 시외버스11,300, 점심10,000원, 골프장 구내식당6,000원, 일정가든10,000원, 기차7,500, 전철
●날씨: 15~26, 첫날 가늘게 내리는 비, 둘쨋날 완전 흐림, 셋쨋날 그런대로 맑음
●산행경과:
* 10. 7.(화) : 9.28km(10.2km)
- 17:11 : 엽돈재/ 삼도경계면
- 17:22 : 만뢰지맥분기점(410m)/ 삼면봉
- 19:02 : 멧돌봉(480.9m)/ 호서만뢰작성분맥
- 19:22 : 돌목이고개
- 20:24 : 만뢰산(612.2m)/ 호서만뢰문안분맥/ 비박
* 10. 8.(수) 41.41km(49km)
- 04:56 : 출발
- 05:28 : 489.7m봉
- 06:09 : 482.8m봉
- 07:02 : 504.7m봉/ 남산봉
- 07:17 : 배성고개
- 07:19 : 호서만뢰몽각분맥
- 07:48 : 322.3m
- 08:26~35 : 장교현
- 09:12 : 덕유산(415.6m)
- 09:50 : 지장골고개(285m)
- 10:13~20 : 환희산 갈림길
- 10:17 : 환희산(404m)
- 10:33 : 385.5m봉/ 국사봉갈림봉
- 11:29 : 덕고개/ 진천광역친환경농업단지 도정공장
- 12:35 : 계산리고개
- 14:01 : 도하리고개
- ??:00 : 173.3m봉
- 15:28 : 음달말임도
- 15:50 : 한현고개
- 17:09~49 : 오창에딘버러C.C. 퍼블릭 골프장
- 20:30 : 쉼터/ 비박
* 10. 9.(목) 60.01km
- 04:40 : 출발
- 05:17 : 200.9m봉
- 05:30 : 200.5m봉
- 06:13 : 화산고개/ (주)리엔씨바이오 블루베리 농장
- 07:07 : 233.4m봉
- 07:55 : 상봉산(193.4m)
- 08:51 : 국사리고개/ 동물이동통로
- 09:24~34 : 국사봉(172m)
- 09:54 : 몽단이고개/ 고속도로
- 10:20~11:08 : 분고개
- 11:30~41 : 응봉산(175.8m)
- 12:22 : 병천천
- 12:38 : 쌍청교
- 12:57 : 합수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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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부구간거리
엽돈재-7.2km-들목고개-2.5km-만뢰산-9km-장교현-3.3km-환희산-2.2km-덕고개-2.3km-계산2길-5.9km-한고개-2.9km-목령산-4km-삽티고개-7.4km-국사리고개-5.2km-응봉산-5.1km-합수점
* 구간거리
- 지맥 접속거리 0.25km
- 지맥분기점 ~ 덕고개 24.1km
-. 지맥분기점 ~ 장교현 18.5km
- 장교현 ~ 삽티고개 20.3km
-. 장교현 ~ 덕고개 5.6km
-. 덕고개 ~ 삽티고개 14.7km
- 덕고개 ~ 합수점 32.4km
-. 삽티고개 ~ 병천천/ 미호강 합수점 17.7km
-. 합수점 ~ 쌍천 2리 버스정류장 1.8km(약 30분)
* 식수 보충 및 참고사항
- 만뢰산 190m 직전: 신선샘 120m
- 덕고개 직전: 양계장, 수도
- 계산 2길: 인가, 수도
- 507번도로/ 두릉유리로: 청원한우마실/ 식당(갈비탕)
- 에딘버러골프장: 식수/ 화장실/ 구내식당
- 국사리고개: 국사1리경로당 gs편의점
- 분고개: (주)S.M.E 정문, 수도
- 분고개: 일정가든/ 된장찌개, 음료, 맥주
- 응봉산 아래: 옹달샘
* 엽돈재 가는 교통편
- 동서울터미널 ~ 진천시외버스터미널: 06:30, 07:10, 08:10, 09:20, 10, 11, 11:10, 12, 13:10, 14:10, 15:10, 16, 17,~19, 19:30, 20:30, 1.40h, 11,300원
- 진천시외버스터미널 ~ 천안시 입장 방면행 311번 농어촌버스: 10:00, 15:00, 0.30h, 엽돈재 경유 천안시 입장면 종점행 버스 승차, 엽돈재 하차 부탁
- 진천시외버스터미널 ~ 갈월리 엽돈재가든(종점): 07:30, 09:30, 12:20, 13:40, 16:20, 17:30, 18:40, 20:10 갈월리종점 엽돈재가든에서 엽돈재까지 도보 0.20h 이동
- 진천터미널 ~ 엽돈재 : 택시 26,000원
* 합수점에서 서울 올라오는 길
- 합수점 ~ 오송역: 도보 35분(궁평 3리경로당으로 나와 오송가락로에서 좌틀하여 직진)
- 오송가락로 건너편 궁평 3리 버스정류장 ~ 오송역: 511번, 57번 버스, 0.05h
- 합수점 ~ 강외면 쌍청 2리버스정류장: 도보 30분(약 1.8km), 511, 57번 버스 청주고속터미널 버스: 0.12h
- 오송역 ~ 서울역: 자주~23:31, 0.56h, 18,500원
- 오송역 ~ 조치원터미널 ~ 서울고속터미널
- 오송역 ~ 천안역(무궁화) ~ 천안역 1호선 ~ 서울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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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뢰지맥이란
금북정맥의 서운산(547.7m) 남쪽으로 5.1km 지점의 엽돈재(34번국도) 남쪽 200m의 410m봉에서 서남쪽으로 분기하여 싸리재, 만뢰산(萬籟山, 612.2m), 장교현, 덕유산(415.6m), 환희산(402.6m), 덕고개, 목령산(취령산, 229.1m), 아산청주고속국도, 비봉(198m), 상봉산(193.4m), 국사봉(172m), 경부고속국도를 건너고 마지막으로 응봉산(175.4m)을 들어올린 후 청주시를 바라보며 청주시 흥덕구 오송읍 쌍청리 병천천/미호강 합수점에서 그 맥을 다하는 도상거리 49.5km 되는 산줄기이다.
‘호서정맥’의 역사는 충청도의 역사로서 ‘월간 山’에서는
☞ 호서정맥에 대하여 '한남금북'과 '금북'을 합친 금강의 어미 산줄기라고 한다.
따라서 ‘속리산 천왕봉’에서 시작해 ‘금강 하구의 용당’에서 끝나는 378km의 산줄기를 ‘호서정맥’이라 일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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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뢰지맥 개념도
* 만뢰지맥을 지나는 동네
* 안성시
경기도 최남단에 있는 시로 동쪽은 이천시와 충청북도 음성군, 서쪽은 평택시, 남쪽은 충청남도 천안시와 충청북도 진천군, 북쪽은 용인시와 접하고 있다. 1998년 안성시로 승격되었다. 시의 동부에 비봉산, 마이산, 덕성산, 칠현산 등의 줄기가 뻗어 충청북도와 경계를 이루며 솟아 있다. 정미천과 산맥의 북부 산록지대를 서쪽으로 흐르는 안성천이 도중에 한천을 합치고, 다시 황구지천, 청룡천 등과 합류해서 하천 유역에 넓은 충적평야인 기름진 안성평야를 형성, 농경문화가 발달해 왔고 삼남지방을 잇는 군사, 교통의 요충지이며, 조선시대 3대 시장의 하나였던 만큼 상권이 발달했다. 시청 소재지는 안성시 봉산동이다. '안성맞춤'이라는 명사를 탄생시킨 안성유기와 쌀, 포도, 인삼, 배, 한우고기는 전국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며, 그 밖에도 다양한 문화유적과 연중 문화예술행사가 열리는 예향의 고장이기도 하다. 삼한시대에는 진한에 속했으며, 그 뒤 백제의 영토였다가 고구려 장수왕 때부터 양원왕 때까지 내혜홀로 불렸다. 삼국통일 후 757년(경덕왕16) 백성군으로 개칭되었다. 고려시대 940년(태조23) 안성현으로 개칭되었고, 1018년(현종9) 수주(지금의 수원)에 잠시 이속하였다가 뒤에 천안에 이속하였다. 1236년(고종 23) 몽고군이 침입했을 때 죽주성(竹州城)의 방호별감(防護別監) 송문주(宋文胄)가 죽주산성에 웅거하면서 수주일 동안 선전 분투하여 적을 격퇴시켜 남진을 저지하기도 하였다. 1362년(공민왕12) 지군사로 승격되었고, 1366년(공민왕15) 마전, 신곡은 다시 수주로 환속되었다. 조선시대 안성시는 고려 현종 이래 충청도 천안부에 속하였는데 1399년(정종 1) 안성군 양양부곡이 분리되어 양지현(陽智縣)이 설치되었다. 안성시는 고려 현종 때 이래 충청도 천안부에 속했는데, 1413년(태종 13)경기도로 이속되었다. 죽주(竹州)는 이때 죽산현(竹山縣)으로 개칭되어 현감이 배치되었고 1434년(세종 16)경기도에 소속되었다. 죽산의 별칭으로는 음평(陰平)·연창(延昌) 등이 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홍언수(洪彦秀, 일명 洪自修)와 경기조방장(京畿助防將)으로 전후 5년간 3,000명의 의병을 이끌고 적군의 북상진로를 저지하고자 분전하다가 35세로 순절한 그의 아들 홍계남이 있다. 또 홍계남과 같이 기호·호서 지방의 의병으로 싸우다 전사한 이덕남 등 두 의병장의 전첩비가 지금의 미양면 구수리에 있다. 이때 축성한 서운산성(瑞雲山城)이 경기도와 충청북도의 경계를 이루는 금남정맥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또 임진왜란 중 경기·충청 지방의 군사를 모집하여 천안군과 양성현 일원에 주둔하면서 공수진퇴(攻守進退)의 전술로 왜장 후쿠지마[福島正則]가 거느린 4,500명의 죽산성 주력군을 상대로 황소를 이용한 복개전차대(覆蓋戰車隊) 공격으로 적진을 교란시킨 변이중(邊以中)의 죽산전투는 특기할 만하다. 1895년 공주부 안성군, 양성군과 충주부 죽산군이 되었다가, 1896년 경기도 안성군, 양성군, 죽산군이 되었다. 1914년 안성군, 양성군과 죽산군의 일부를 병합하여 안성군으로 하였으며, 1931년 읍내면을 안성면으로 개칭하고, 1937년 7월 1일 안성면이 안성읍으로 승격되었다. 1963년 용인군 고삼면이 편입되었고, 1983년 원곡면. 공도읍 일부가 평택군 평택읍으로 편입 되었으며, 1987년 보개면 양복리 일부가 금광면으로, 삼죽면 남풍리, 동평리, 가현리가 보개면으로 편입되었다. [통합포털에서 발췌정리]
* 천안시(天安市)
충남 동북부에 위치한 있는 시로, 충남의 최대도시로 대한민국에서 17번째로 큰 도시, 전국의 일반시 중 열 번째로 큰 대도시이다. 대도시 특례를 받는 시로는 충남에서 천안이 유일하며, 비수도권 기초자치단체 중에서는 경남 창원시, 충북 청주시 다음으로 인구가 많다. 동쪽으로 충북 진천군, 청주시, 서쪽으로 아산시, 남쪽으로 세종특별자치시, 공주시, 북쪽으로 경기도 안성시, 평택시와 접한다. 오늘날 천안(天安)이라는 지명은 하늘 아래 가장 편안한 곳이라는 의미 그대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실제로는 정반대의 의미로 지어진 곳이라는 설이 있다. 즉 왕건이 여기에 지명을 붙일 때 이곳이 편안하면 천하가 편안할 것이라는 뜻에서 이름이 붙여졌다는 것. 후삼국시대 왕건과 견훤 사이에 전선이 형성된 지역이었고, 그만큼 교통의 요지이기에 이런 말이 생겨났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천안으로 개칭되기 전의 이름이 '도솔'인 것으로 미루어 이보다도 불교 용어인 '도솔천'에서 유래되었을 가능성도 있으니 유념하자. 천안의 다른 고호(古號)인 '영주(寧州)', '환주(歡州)' 등도 '편안하다(寧)', '기쁘다(歡)' 등의 의미를 담고 있어 천안과 뜻이 통한다. 고조선과 일맥상통하는 토광묘제 집단이 진작부터 자리하고 있었으며, 기원전 2세기에는 현 전북 익산시 일대에 자리잡은 건마국이 주도하는 마한연합에 속해 있었다. 그런 후 AD 1세기 후반 ~ 2세기 초반에 서북한에서 내려온 집단이 동남구 청당동 일대에 자리잡게 되어 번영하며, 이 집단이 이후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기원후 3세기 시점에서는 건마국을 제치고 마한의 새로운 수장국인 목지국이 되어 있었다. 삼국시대에 들어선 뒤 3세기 중후반 경 휘하 거수국으로 거느리던 백제국에게 하극상을 당한 시점부터는 마한의 맹주 자리를 빼앗기고 백제국 휘하의 거수국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후 고구려가 백제의 수도인 한성을 함락해서 오늘날의 충북 청주시 및 괴산군, 세종특별자치시, 대전광역시 일대를 석권하고 백제는 피난수도인 웅진성으로 천도했을 무렵에는 현재의 천안 일대는 백제-고구려 국경에서 북쪽으로 다소 돌출한 국경도시가 되어버렸고, 남북국시대에 들어서는 통일신라에 속하였으며 신라 경덕왕이 지명을 대대적으로 개칭하면서 대목악군은 대록군(大麓郡)으로, 감매현은 순치현(馴雉縣)으로, 구지현은 금지현(金地縣)으로, 상위 행정구역인 웅천주는 웅주(熊州)로 고친다. 사산현은 개칭되지 않고 그대로였는데, 그 상위 행정구역인 나혜홀은 백성군(白城郡)으로, 한산주는 한주(漢州)로 고친다. 후삼국시대에 들어서는 태봉 영역에 들어가게 되어 내내 태봉을 이은 고려의 판도에 있었다. 고려 성종대에 10도제가 실시되며 천안도독부는 공주목(公州牧)에 속하였으며, 이후 도호부제가 축소, 폐지되며 환주(歡州)라는 이름으로 개칭된다. 목주군은 청주목(淸州牧)에 속하게 되며, 별칭으로 신정(新定)이라 불리기도 했다. 현종대에 5도 양계제가 실시되며 1018년, 환주는 다시 천안부(天安府)로 개칭되고 수령으로 도독 대신 지부사가 파견된다. 그리고 목주군과 함께 양광도에 속하게 된다. 이때 속군현으로 온수군(溫水郡, 현 충남 아산시), 인주현(仁州縣, 현 충남 아산시 인주면), 신창현(新昌縣, 현 충남 아산시 신창면), 평택현(平澤縣,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을 새로 두게 되며 지역행정의 중심으로 성장한다. 온수군은 명종대인 1172년에 온수현(溫水縣)으로 격하되고, 인주현은 아주현(牙州縣)으로 개칭된다. 고려 초에 순치현은 풍세현(豊歲縣)으로, 금지현은 전의현(全義縣)으로, 사산현은 직산현(稷山縣)으로 개칭되었으며, 전의현은 청주목의 속현이 되고, 풍세현과 직산현은 상기한 천안부가 1018년에 다시 설치됨과 동시에 천안부의 속현이 된다. 풍세현은 별칭으로 자천(秭川)이라 불리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이 시기 천안부는 속현으로 풍세현, 직산현, 온수현, 아주현, 신창현, 평택현을 거느린 거대한 행정구역으로 발전하게 된다. 조선의 건국과 함께 행정구역이 대대적으로 재편되면서 태종대인 1413년에 천안부는 옛 이름인 영주(寧州)에서 딴 영산군(寧山郡)을 거쳐 1416년 천안군(天安郡)으로 격하되며, 목주군도 1413년에 목천현(木川縣)으로 격하되고, 아주현은 아산현(牙山縣)으로 개칭된다. 그리고 격하와 함께 원래 천안부의 속현이었던 직산현, 온수현, 아산현, 신창현, 평택현이 한꺼번에 천안에서 독립하게 되며, 천안군, 목천현과 함께 모두 청주목에 속하게 되어 원래 천안부가 도맡았던 지역중심적 기능은 모두 청주목으로 이관된다. 그리고 모두 충청도에 속하게 된다. 이에 당시 오늘날 천안시의 경내에는 천안군의 직할지와 목천현, 직산현, 그리고 마지막으로 천안군의 속현으로 남은 풍세현이 분립하게 된다. 1963년 천안읍과 환성면이 천안시로 승격되어 천안군에서 분리되었고, 나머지 천안군 지역은 천안의 '천'에 지명의 접미사로 흔히 쓰이는 '원(原)'을 합성해 '천원군(天原郡)'으로 개칭되었으며 이로써 충남에서 대전시에 이은 두번째 시 승격이 이루어졌다. 1973년에는 성환면이 성환읍으로 승격되었다. 1982년에 천원군청이 오룡동(중앙초등학교 근처)에서 성거면(현 서북구청)으로 이전하면서, 3년 뒤인 1985년 성거면이 성거읍으로 승격되었다. 1991년에 천원군은 다시 천안군으로 명칭이 환원되었다. 1995년 도농통합으로 천안군이 천안시에 병합되었다. 2002년 직산면과 목천면이 직산읍과 목천읍으로 승격되었다. 2005년에 인구 50만 돌파와 수도권 전철 1호선 개통이 이루어졌고, 천안시청이 불당동으로 이전했다. 2008년에 국회의원 선거구를 기준으로 동남구와 서북구로 분구되었다. 2013년 인구 60만을 돌파하였다. 전반적으로 낮은 산이 넓게 분포해 있다. 광덕산(699m)이 천안에서 가장 높고, 성거산(579m), 태조산(424m), 흑성산(519m) 등이 있다. 시 남단의 금북정맥을 기준으로 서쪽은 평지가 있는 반면 동쪽은 산으로 둘러 싸여 있다. 삼국시대 이래, 대부분의 요충지는 폭이 넓은 강을 끼고 수운이 발달한 특징이 있는데 천안은 그 중에서 예외인 고장이다. 즉, 천안은 현재도 인구 60만이 넘는 대도시임에도 유역면적이 큰 하천은 관통하지 않는 곳이다. 천안시 중심 시가지가 있는 금북정맥 서쪽은 아산만에 합류하는 삽교천과 안성천 수계인 반면, 동쪽의 목천읍, 병천면 등 옛 목천군 영역은 병천천-미호강으로 이어지는 금강 수계로 완전히 구분된다. 다만 수계 구분은 현대에 들어서 경부고속도로 등 교통망의 발달로 인해 의미가 많이 사라졌다. 동/남쪽이 산으로 둘러싸인 지형 특성상 동쪽과 남쪽으로의 시가지 확장이 어렵다. 원래 경부선을 경계로 하여 동쪽을 중심으로 성장했으며, 점차 경부선 서측을 개발하기 시작하면서 현재는 2기 신도시인 아산신도시 개발로 인해 천안아산역 인근에서 아산과 연담되어 있다. 최근 개발이 서부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지만, 정작 천안에서 가장 큰 번화가(천안종합버스터미널)는 동남구에 소재한다. 현재 아산신도시 개발 여파로 서북구 인구가 동남구를 한참 앞질렀다. 천안이 60만명을 넘기며 비수도권 대도시로 성장하면서 동-서부로 생활권이 나뉘는 게 아닌, 조금 더 세분화된 도시 구조가 형성되고 있다. 지리적 거리로 볼 때 충청도의 수부도시인 대전광역시보다는 경기도의 수부도시인 수원시에 조금 더 가깝다. 천안에서 대전은 57km인 반면 천안에서 수원은 50.4km이다. 게다가 43번 국도가 아산시 음봉면 쪽으로 넓고 쾌적하게 개통돼 서울, 수원으로의 접근성이 더욱 좋아졌다. 실제로 대전광역시와의 교류보단 서울특별시와의 교류가 압도적으로 많다. 다만, 인접 도시인 세종특별자치시와는 천안시와 바로 경계가 닿아있는 소정면과 전의면 외에는 교류가 적다. 전의면, 전동면 일대가 산지로 둘러싸여 있고, 세종시 중심부인 동지역은 대전광역시로 치우쳐 있어서 실제로 행정구역은 둘이 맞닿아 있음에도 천안과 세종특별자치시와의 거리는 좀 멀다. 청주시 또한 인접해 있지만 천안시가지가 서쪽으로 치우쳐 있고, 동면, 북면, 수신면 등 산으로 막혀 있어서 교류가 적다. 천안시는 현재 도내 다른 지역보다 수도권과 아산시와의 교류가 압도적으로 많다. 1990년대까지는 다른 지방들과 별 차이가 없었으나 2004년 4월 1일 경부고속철도 천안아산역이 개통되고 수도권 전철 1호선이 2005년 1월 20일 천안역까지 연장개통된데 이어 2008년 12월 15일 수도권 전철 1호선이 천안역을 지나 아산시에 소재한 신창역까지 연장된 이후 수도권과의 교류가 확대되었다. 천안시는 과거 조선시대부터 천안삼거리라 불리며 수도권과 영·호남을 잇는 길목으로서 교통의 요충지 역할을 해오던 곳으로, 오늘날에도 대전과 함께 철도와 도로 교통이 매우 발달한 국가 교통의 요충지이다. 대한민국의 지리적 표시제를 적용받는 농산물로는 성환읍의 성환 배, 천안 호두가 있다. 배와 호두 말고도 지역에 따라 농산물이 있는데, 입장 거봉포도, 병천 아우내 오이, 수신 멜론이 대표적이다.[통합포탈에서 발췌정리]
* 진천군(鎭川郡)
충북 서북쪽에 있는 군으로, 서로는 충남 천안시, 남으로는 청주시, 동으로는 증평군과 음성군, 북으로는 수도권인 경기도 안성시와 접해 있다. 진천의 다른 이름은 상산이다. 예로부터 생거진천(生居鎭川, 살아서는 진천에 살다)으로 알려져 있다. 그만큼 살기 좋은 동네라는 명성이 과거에 있었다. 이는 자연재해의 피해가 적고 진천평야의 곡창지대를 끼고 있는 데다 풍작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현대에도 '생거진천'을 지역 농산물 브랜드로 사용하고 있다. 2017년 9월 27일에 태릉선수촌을 대체할 새로운 국가대표 선수촌이 진천에 들어섰다. 고구려 시대에는 금물노군(今勿奴郡 또는 今勿內郡), 수지군(首知郡), 신지군(新知郡)이었다. 그러다가 신라(新羅)의 북진으로 만노군(萬弩郡)이 되었고, 595년(건복(진평왕) 12년) 김유신이 진천 상계리 부근에서 태어났다. 이후 남북국시대 신문왕 5년(685) 전국을 9주로 나눌 때 한산주 흑양군(黑壤郡)이 되었고, 도서현(都西縣)과 음성현(陰城縣)을 영현으로 관할하였다. 나중에는 황양군(黃壤郡)으로 불렀다. 고려 초에 이르러 한때 강주(降州)로 부르다 다시 진주(鎭州)로 개칭하였다. 995년(성종 14) 전국을 10도 12주로 개편할 때는 중원도에 속하였고, 군사적 요충지로서 자사(刺史)를 두었다가, 1005년(목종(穆宗) 8년) 폐지하였다. 1018년(현종(顯宗) 9년) 전국을 5도 양계로 개편하면서 양광도 청주목의 속현이 되었다. 1259년(고종 46) 창의현(彰義縣)으로 바꾸고 현령을 두었다. 1269년(원종 10) 의령군(義寧郡)으로 승격해 지군사를 두었다가, 후에 진주현으로 강등되었다. 조선 시대 초에 상산(常山)으로 칭하다가 1413년(태종 13) 진천현(鎭川縣)으로 개명하고 현감을 두었다. 1505년(연산군 11)에는 경기도에 이속되었다가 중종(中宗) 초 다시 충청도에 환원되었다. 1895년(고종 32) 23부제 시행에 따라 충주부 진천군이 되었다가, 1896년 13도제로 바뀌면서 충북 진천군이 되었다. 6.25 전쟁 당시인 1950년 진천 전투가 진천읍과 잣고개 일대에서 벌어졌다. 1973년 진천면이 진천읍으로 승격했다. 2000년 1월 1일 만승면이 광혜원면으로 개칭되었다. 2019년 7월 1일 덕산면이 덕산읍으로 승격되면서 현재 2읍 5면을 관할하고 있다. 충북혁신도시와 산업단지 개발로 인해 인구증가율이 높다. 교통적으로 수도권과 인접해 있고 수도권 규제로 인한 반사이익 때문이다. 공동으로 혁신도시를 유치한 음성군은 주로 상업용지를 많이 받았지만 진천은 주거용지를 많이 배정받았는데 그 결과 진천은 꾸준한 인구 증가를 보이는 반면 음성은 인구 증가세가 더디고 도리어 감소하는 현상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진천도 2020년 이후로는 인구 증가세가 둔화된 상태이다. 2023년, 17년 연속으로 인구가 증가한 군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도 산하의 군들 중 마지막으로 소멸위험지역을 벗어난 지역이다. 현재 음성과 함께 충북에서 가장 성장이 빠른 지역이며 수도권규제의 반사이익을 얻은 곳 중 하나로, 충남에 천안과 아산이 있다면 충북에는 음성과 진천이 있다.[통합포탈에서 발췌정리]
* 청주시(淸州市, 청원구, 흥덕구)
충북의 시로 충북도청소재지이자 충북 최대도시로 충청도 제2의 도시, 교육의 도시이며 충북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중심지이다. 대한민국에서 14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이며, 비수도권 일반시 중에서는 인구수가 가장 많은 대도시이다. 북쪽으로 진천군, 남쪽으로 대전광역시와 보은군, 서쪽으로 세종특별자시치시와 충남 천안시, 동쪽으로 증평군과 괴산군이 접한다. 삼한시대 청주는 마한의 땅이었다. 백제시대에는 상당현이라 하였고, 통일신라시대에는 서원경이란 이름으로 신라 5소경 가운데 하나였다. 고려 태조 23년(940년) 비로소 "청주"라는 이름을 처음 얻은 이후 조선시대 후기까지 매우 중요한 지방의 요충지 역할을 담당했다. 1908년 충청 감영을 충주에서 청주로 이전했다. 1946년 미군정에 의해 청주부와 청원군이 분리되었으며, 1949년 청주부가 청주시로 개칭되었다. 2012년 6월 27일, 청주시와 청원군의 행정구역 통합이 결정되어 2014년 7월 1일 통합 청주시가 출범하였다. 청주시의 경제 규모는 이미 광역시급 대도시가 되었다. 2018년 기준 청주시의 지역 내 총 생산(GRDP)은 34조를 돌파하여 약 37조인 광주광역시, 약 39조인 대전광역시와 비슷한 수준이다. 이는 인구 100만 명 이상 특례시인 용인과 고양보다 높으며, 1인당 GRDP는 4137만 원으로 인근 대전이나 천안은 물론 웬만한 수도권 도시들보다도 높다. 여기에 2028년에 본격 가동되는 방사선가속기(약 6조원 규모의 경제효과)가 가동되기 시작하면 광역시보다 더 높은 경제 규모를 가진 도시가 된다. 청주는 예로부터 교육도시로 알려졌는데 국립대학교만 무려 5개가 청주에 위치하고 있으며 과거에는 교육 관련 종사자와 학생이 전체 도시 인구의 40% 이상을 차지했다. 또한 전국에서 유일하게 교원 양성 목적으로 설립한 국립 한국교원대학교와 공군 장교 육성의 요람인 공군사관학교 또한 청주에 있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현존 세계최고의 금속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이 청주 흥덕사에서 발행됐다. 2014년 7월 1일, 청주부(청주시)-청원군 분리 68년 만에 통합 청주시가 출범하였으며, 통합하면서 1995년 흥덕구(구 서부출장소)와 상당구(구 동부출장소)의 2개 일반구를 설치하여 기존의 2구를 4구로 재편하였다. 통합으로 인해 청주시의 인구는 15만 명 가량 증가하고, 충북 전체 인구의 과반수(약 53%)를 차지하게 되었다. 시 하나가 도 인구의 과반수를 차지하는 경우는 제주도를 제외하면 청주시가 유일하다. 인구밀도 역시 충북에서 가장 높다. 과거 청원군이 분리되어 있던 시절에는 정말 압도적인 차이로 1위였는데(약 4,400명/km²), 청원군과 통합한 이후에도 비록 인구밀도가 1/5 정도로 급감하였으나 여전히 1위를 고수하고 있다. 면적은 6배 이상 넓어져 서울의 1.5배, 충청도 기초자치단체 2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통합으로 규모가 커지면서 청주광역시 논의도 나왔으나 실질적인 광역시 승격의 어려움으로 특례시 쪽으로 가닥을 잡아봤지만 이 역시 특례시 설치 기준이 인구 수 100만으로 결정되면서 성사되지 못했다. 청주시 자체적으로도 인구수 100만 달성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보는 분위기다. 시가지를 중심으로 청주시의 동쪽은 산이 많다. 우암산을 시작으로 백족산, 가래산, 것대산, 인경산 등 4~500m 높이의 산이 즐비하다. 반면 서쪽의 경우 부모산이 가로막고는 있지만 230m 정도 밖에 되지 않아 서쪽 지역의 개발이 꾸준히 진행 중이다. 북쪽의 경우도 산지가 거의 없고 논농사 짓는 평야지대라서 발전 가능성이 있다. 그리하여 현재 청주 시가지 위쪽에 청주테크노폴리스가 개발 중이며, 개발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된다면 청주의 시가지가 오창지역과 연담화되어 더 넓어질 예정이다. 반면, 남쪽은 산뿐만 아니라 금강 상류를 끼고 있어 상수원 보호구역이므로 발전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낮다. 청주시를 'ㅅ'자 모양으로 서쪽으로는 부모산과 국사봉 사이 평야지대를 미호강이, 동쪽으로는 부모산에서 우암산 등까지 둘러싸인 분지지형 한가운데를 무심천이 관통하고 있다. 비단 청주만이 아닌 충북 자체의 문제지만 내륙 깊숙히 있어 바다를 볼려면 멀리 이동해야 한다. 바닷가가 있는 지역 중 그나마 청주와 가까운 곳이 보령시, 서산시, 태안군인데 가장 가까운 보령에 위치한 대천해수욕장은 1시간 40분이 걸린다. 그나마 청주에 대청호와 청남대가 있기에 바다는 아니더라도 넓은 호수를 볼 수는 있다. 또한 2025년에 청원구에 '미래해양과학관'이 개관되면 갈증이 조금이나마 해소될 것으로 보인다. 경부고속도로와 중부고속도로, 전국 유일의 KTX경부호남선 분기역인 오송역과 충청도 유일의 국제공항인 청주국제공항 등이 위치하고 있는 교통의 중심지이다. 충북의 주요 도시를 잇는 충북선 철도와 충청내륙고속화도로가 있어 명실상부 충북의 중심지이자 교통의 요충지이다. 그러나 청주시가 과거부터 충북의 중심은 아니었다. 1896년부터 1908년까지는 영남대로상의 교통의 요지였던 충주시가 충북의 도청소재지였지만, 경부선 부설 이후 1908년 6월 5일 도청이 청주로 이전하며 상황이 바뀌었다. 사실 충주가 북동쪽으로 좀 치우친 위치이긴 하다. [통합포탈에서 발췌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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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비, 한파 등등 예견된 위험과 맞닥뜨리는 만용을 회피 하는 능력이 산행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중추절에 만뢰산정에서 만월을 맞이할까 싶었지만 하루점도락 예보된 비로 순연하여 출발을 늦췄습니다. 조상의 은덕이랄까요. 벌초를 하는 시기에 지맥산행은 가시잡목지를 지나는데 예기치 않은 도움을 받기도 하지요. 헤드랜턴이 접불로 깜박거려 야간산행에 지장을 받았고, 오룩스앱에 지도가 나타나지 않아 청주시와 처음 만나는 173.3m봉을 가다가 알바인가 하고 되돌아 오고, 목령정에 올라가다가도 알바인가 하고 되돌아 왔습니다. 아마 목령정에 올랐다면 장미원으로 우회하지 않았을까 싶네요.
여태껏 다녀본 지맥 중에 최고도의 스팩을 자랑한다. 김유신 장군, 어사 박문수, 유관순 열사, 시인이자 정치가 정철, 강감찬 장군, 표암 강세황 등등 쟁쟁한 분들이 만뢰지맥 상에 생몰지로 연을 맺고 계시다. 백제와 경계를 맞닿은 영동, 옥천, 보은의 연장으로 신라에서 보면 고구려와도 최전방이랄 수 있고, 삼국이 국경을 맞댄 접경지였다. 경기도와 충청남북도 삼도가 만나는 엽돈재 위 삼면봉에서 출발하여 충청남북도의 경계를 줄곧 따르다가 환희산에서 내려선 국사봉갈림봉에서 충북 진천으로 들어서고, 한현고개에서 청주시 청원구 오창읍으로 진입하여 목령산에서 오창읍을 둘러보고, 마지막으로 흥덕구 국사리에 강감찬장군 묘소를 지나 응봉산에 올라 흥덕구 옥산면, 오송읍을 바라보고 내려서서 병천천과 미호강의 합수점에서 산줄기를 다하는 여정을 마무리 한다.
들머리인 엽돈재(323.3m)는 충남(천안시 입장), 충북(진천군 백곡), 경기(안성시 서운) 세개 도를 경계 짓는 삼도봉(삼도 경계면)인 곳인데, 34번 국도가 통과한다. 만뢰지맥의 동쪽 물줄기는 백곡천이나 성암천이 되어 미호강으로 흘러들고, 서쪽 물줄기는 병천천(46.75km)으로 흘러들어 천안시 북면, 병천을 걸치고 충북 청주의 오창과 옥산면을 걸쳐 청주시 흥덕구 오송읍에서 미호강(89.20km)에 합류된다. 이후 서남진하여 연기군 동면 합강에서 금강(397.79km)에 합류하여 공주로 흘러간다.
전체적인 길의 상태는 길이 없거나 있다해도 동네사람들이 나물이나 버섯을 따러 드나드는 길이라서 있다 없다를 반복한다. 작은 지능선이 사방팔방으로 갈라지고 수시로 방향을 바꿔서 위치 파악하기가 매우 어렵다. 다만 분기점에서 만뢰산 구간, 환희산 정상부, 취령산(목령산)에서 삽티고개는 길이 분명하고 그외는 길이 희미하거나 아예 길이 없는 잡목과 가시덤불로 진행에 애를 먹는다. 긴팔은 물론이고 헌옷에 허벅지나 정강이를 보호하는 보호대를 차는 것이 좋다. 되도록이면 녹음기가 아닌 가을에서 봄사이에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빨간빈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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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거진천(生居鎭川)이란 표석이 서있습니다. 진천하면 떠 오르는 이야기인 생거진천 사거용인(死居龍人), 살아서 육신(肉身)은 진천땅이 좋았고 죽어서 영혼(靈魂)은 용인땅이 좋았다는 추천석에 관한 이야기가 있고, 허생원 딸의 두 아들에 관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물 좋고 비옥한 평야에 풍수해가 없이 농사가 잘 되는 고장이어서 생거진천, 산세가 순하고 사대부가의 지리적 명당으로 좋다 하여 사거용인이라 불렸다고 전합니다.
♤ 엽돈재(葉錢峙, 323m)/ 삼도경계면(경기도, 충남, 충북)/ 시군면계(진천시 백곡면, 안성시 서운면→천안시 서북구 입장면)
엽돈재는 충북 진천군 백곡면 갈월리와 충남 천안시 서북구 입장면 도림리, 경기 안성시 서운면 청용리 사이에 있는 고개이며, 삼도(三道)가 만나는 삼도봉 지점으로 34번국도가 여기를 지나며, 금북정맥에 걸친 고개로 고개 이름이 엽돈재를 다른 이름으로 엽전재(葉錢峙), 엽둔재(葉屯峙), 엽둔티, 율둔티, 조선 시대에는 협탄령(脇呑嶺)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고을 서쪽 협탄소가 있으니 직산소 경계이다’라는 기록이 있고 『여지도서』에는 관아의 서쪽 38리에 대문령에서 뻗어와서 한줄기는 길상산이 되고, 한줄기는 보련산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협탄원(脇呑院)이라는 원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으로도 추정된다. 임진왜란 당시 안성에 사는 홍계남이 의병 수천명을 모아 왜군과 접전하여 승전한 곳이다. 엽돈재 인근에는 홍계남이 쌓은 것으로 추정되는 성터가 남아 있다. 1872년 지방지도의 직산편에 진천과의 경계부에 청룡산과 함께 엽돈치가 나타나는데 고개가 높고 험해서 옛날에는 도둑들이 많아서 이 고개를 넘는 사람들은 도둑들에게 엽전을 다 털렸으므로 고개이름 유래했다고도 한다. 마을 주민들 이야기로는 옛날 장을 보려고 이 재를 넘나드는 사람이 많았는데, 숲이 워낙 깊어 장꾼을 노리는 도둑이 많았던 관계로 엽전을 가지고 가던 사람은 모두 빼았겼다고 한다. 고개 아래에는 보덕원이라는 원(院)이 있는 마을이 있어 이 고개를 넘는 행인들을 보호했다고 한다. 엽돈재에서 만뢰지맥 분기점은 34번국도의 충북방향 오른쪽 절개지 옹벽 끝에서 수준점을 지나 오른다.
♤ 충북 진천군 백곡면(栢谷面)
충북 진천군 서북쪽에 위치하며 면소재지는 석현리이다. 동쪽으로는 진천군 이월면, 서쪽으로는 충청남도 천안시, 남쪽으로는 진천군 진천읍, 북쪽으로는 경기도 안성시와 각각 경계를 이루고 있다. 호서정맥의 여맥이 면내에 미쳐 대체로 200~500m의 산지를 이루고 있다. 곳곳에 장군산(436m)·백석봉(468m)·무제산(574m)·만뢰산(611m) 등이 솟아 있다. 백곡장(百谷場)은 진천군 백곡면 석현리에서 열린 장터라 하여 석현장(石峴場)이라고도 불렀다. 물물교환이 이루어지던 시기에 돌고개(石峴)의 소금장은 유명하였다. 충청남도 아산만 일대에서 생산되는 소금을 사기 위해 충청 내륙 지방인 괴산·증평·음성 등지에서 돌고개로 몰려들었다. 지금도 백곡면 석현리에는 소금소(소금沼)라는 곳이 남아 있다. 백곡천의 지류연안을 중심으로 벼농사가 행해지며, 오이와 참숯이 특산품으로 생산된다. 특히 참숯 생산량은 전국 생산량의 70%를 차지한다. 양백리에는 천주교 성지인 배티 성지(충북 기념물 제150호)가 있다. 진천-용인, 진천-성환을 잇는 국도가 면내를 통과한다.
♤ 지맥분기점(410m)/ 도계/ 시군계/ 삼면봉(진천군 백곡면, 천안시 서북구 입장면 → 동남구 북면)
준희선생님 만뢰지맥 분기점 산패가 참나무에 높이 매어 있다. 이곳에서 지맥의 오른쪽이 천안시 서북구 입장면 도림리 → 북면 대평리로 바뀌면서 만뢰지맥 산줄기는 만뢰산(보탑사)방향인 좌틀로 휘어진다.
♤ 대천고개(305m)/ 도계/ 시군면리계
만뢰지맥 분기점에서 5분 정도 내려서면 대천고개이다. 진천 백곡면 갈월리 엽돈마을과 천안 동남구 북면 대평리 곡간마을을 오가던 고개지만 현재는 다닌 흔적이 없어 좌우로 길이 희미하다.
♤ 355.3m봉
맨발대선배님의 산패가 소나무에 매어 있다.
♤ 진천군 백곡면 갈월리 서수(西水)마을
서수마을을 서수원이라 하는데 엽돈재 밑에 있는 진천쪽 동네를 말한다. 백곡면 갈월리로 험준하고 깊숙하여 조선 시대에는 도적떼들의 소굴이 있었다 한다. 그런고로 이 곳을 왕래하는 상인이나 나그네들은 이곳을 지나는 것이 큰 골칫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임걱정이 한때 이 곳에서 관원(官員)을 괴롭히던 곳이기도 하다. 신라 시대에는 백제와 국경을 이루고 있던 곳이기에 병정들이 진을 치고 주둔했던 곳이 서수마을이다. 당시는 이 곳을 서술원(西戌院)이라 하였으나 지금은 서수원(西水院)이라 부르며, 아직도 그 터가 희미하게 남아 있다. 또한 역마가 있던 자리여서 교통의 편의와 통신의 주역(主役)을 맡기도 했던 곳이다. 임진왜란 때 안성사람인 홍계남(洪季男)이 의병 수천을 모군(募軍)하여 여기에 주둔하면서 왜군과 한바탕 싸워 이긴 곳이다. 그 후 이 곳 사람들은 왜군의 침략을 받은 일이 없이 편안하게 지냈으며, 조정에서 이 소문을 듣고 홍계남공을 수원부사(水原府使)로 명했다. 엽돈재에는 홍계남이 왜군과 싸울 당시 쌓아놓은 성터가 아직 남아 있다고 한다.
♤ 365.5m봉
준희선생님 산패가 참나무에 매어 있다.
♤ 412.3봉/ 4등삼각점(441 복구/ 건설부 )
준희선생님 412.3m봉 산패가 나무에 매어 있다. 아랫부분은 식별하기 어려운 건설부 4등삼각점이 있다.
♤ 월봉산(435.3m)/ 도계/ 시면계/ 삼리봉(천안시 동남구 북면 대평리, 진천군 백곡면 갈월리 → 대문리)
준희선생님 산패가 참나무에 매어 있다. 지맥의 왼쪽이 진천군 백곡면 갈월리 → 대문리로 바뀌는 삼리봉 지점이다. J3클럽 중부지부에서 독립운동 기념산길 50km 월봉산이란 코팅지를 붙혀놨다.
♤ 싸리재/ 성황당터
고개에 싸리나무가 많으면 싸리재(杻峴), 느릅나무가 많으면 유령(楡嶺)이다. 천안시 동남구 북면 대평리 대산마을에서 진천군 백곡면 대문리 새터마을로 넘어가는 고개로 백곡쪽은 벌목으로 인해 시원스러우나 천안쪽은 잡목으로 인해 전혀 등로가 보이지 않는데 자료에 의하면 산이 높고 깊어서 싸리가 고복같이 있다해서 붙혀진 이름이다. 오른쪽 능선 아래 대평리에는 싸리재 마을이 있다. 1914년 이전에 발간된 조선지지 자료에는 싸리고개로 나오고 축현(杻峴)이라는 한자 지명도 보이며 싸리재는 산이 높고 깊어서 비탈이 매우 심한 고개로 잡목이 우거져 있으며 4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백곡에서 천안의 입장장을 보러 다닐 때 반드시 넘어야 할 고개였다고 하니 민초들에겐 유익한 고개였다.
♤ 392.7m봉
준희선생님 392.7m봉 산패가 참나무에 매어 있다. 지맥은 급우틀이다. 392.7m봉 전후에 있는 안부가 둘 다 싸리재로 불린다. 가야할 지맥의 주봉 만뢰산이 쳐다보인다.
♤ 조망바위/ 진천군 백곡면 구수리(九水里)
백곡초등학교 뒤쪽에 있는 마을을 구수골 또는 구수라 한 데서 유래한 이름으로 삼국시대 김유신(金庾信) 장군이 군사 훈련을 하면서 말에게 먹이는 죽 그릇을 아홉 군데에 설치하였다 하여 구슬 또는 구실이라 하였다가 구수가 되었다고 하는데, 이 주장은 신빙성이 떨어진다. 구수는 구유의 방언형으로 구수골은 ‘구유처럼 긴 골짜기’로 풀이할 수 있다. 진천군청에서 서쪽으로 약 8.1㎞ 떨어져 있으며 자연마을로 구수·개죽 등이 있다. 국도 34호선이 남동 방향으로 뻗어 있어 경기도 안성시와 진천 시가지로 이어지며 구릉지가 많은 지역 특성상 벼농사보다는 밭농사가 발달하여 콩 등의 잡곡류와 고추·잎담배가 많이 재배된다.
♤ 420m봉(진천군 백곡면 대문리, 천안시 동남구 북면 대평리 → 양곡리)
지맥이 맷돌봉으로 오르면서 오른쪽이 천안시 동남구 북면 대평리에서 양곡리로 바뀌는 지점이다.
♤ 천안시 동남구 북면 양곡리(陽谷里)
조선 시대에는 목천군 북면 지역이었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 때 통폐합 대상인 변정리와 양곡리(陽谷里) 중 양곡리의 명칭을 따서 붙인 이름이다. 양곡리는 북면의 남동부에 자리 잡고 있다. 동쪽으로 병천면 봉정리, 서쪽으로 북면 운용리·남안리·전곡리·사담리, 남쪽으로 북면 사담리, 북쪽으로 북면 대평리·운용리와 이웃하고 있다. 동쪽 경계부는 300~400여m의 구릉성 산지를 형성하고 있고, 나머지 대부분의 지역은 300여m 이하의 비교적 낮은 구릉성 산지를 형성하고 있다. 자연 마을로 학교말, 양곡, 별장골, 새터말 등이 있다. 양곡천 등 병천천의 지류 유역 농경지에서 벼농사가 이루어지고, 하천 주변 산기슭 완사면에서는 밭농사가 주로 이루어진다. 특산물로는 느타리버섯, 표고버섯이 있다. 기타 도로가 서남부와 중부를 지나며, 남서단 경계부에서 국가 지원 지방도 57호선과 연결되고 있다. 양곡리는 베장골이라고도 부르는데 비록 산중이나 넓게 퍼져서 양지 바른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북박골은 북처럼 생긴 북바위가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점골은 사기를 굽던 골에 가마터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삼성 고개는 삼성현이라고도 부르는데 웃말에서 병천면 봉황리의 삼성으로 넘어간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돌목이 고개는 돌목 고개, 석항현(石項峴)이라고도 부르는데 베장골에서 병천면 봉황리의 돌목으로 넘어간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어두암(語頭岩)은 어두어니라고도 부르는데 바위가 고기 머리 같이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양곡리 동부에 에스원 천안 연수원이 있다.
멧돌봉의 높이가 478.6m, 489.1m, 480.9m 제각각입니다.
♤ 맷돌봉(480.9m)/ 북면산/ 호서만뢰작성단맥분기봉/ 삼면봉/(진천군 백곡면, 천안시 동남구 북면 → 병천면)
지맥의 오른쪽이 천안시 동남구 북면 양곡리 → 병천면 봉항리로 바뀌는 삼면봉으로 지맥은 직좌틀이고, 작성단맥은 우틀/ 남쪽으로 분기한다.
만뢰지맥에서 갈라져나가는 작성단맥이 지나는 은석산에 어사(御史) 박문수(朴文秀, 1691~1756)의 묘가 있군요. 쌍령지맥에서 소개되는지 알았는데 쌍령지맥과 함께 다시 한번 살펴봐야 하겠습니다.
♤ 호서만뢰작성단맥이란?
만뢰지맥 맷돌봉(480.9m)에서 분기하여, 개죽산(452m)-풍산공원묘원-봉황산(427.3m)-작성산(498.1m)-개목고개-은석산(453.8m)-상봉산(253.8m)-병천초교-병천천/ 광기천 합수점에 이르는 약 16.4km의 산줄기이다. 독립기념관이 위치한 흑성산을 중심으로 금북정맥과 작성단맥이 시계반대 방향으로 휘감고 있어 천안독립 종주로란 명칭으로도 불린다.
♤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봉항리(鳳項里)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의 자연마을인 봉항리는 만뢰산과 개죽산 사이의 좁은 평지에 자리한 마을로, 작은 두 하천이 흐른다. 소근리, 삼성리, 석항리와 봉암리 일부를 병합하여 봉암과 석항의 이름을 따서 봉항리라 하였으며 자연마을로는 돌모리, 삼성, 서근바미마을 등이 있으며. 돌모기마을은 봉항리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돌이 많이 있으므로 돌모기라 하였다. 삼성마을은 돌모기 남서쪽에 있는 마을로, 이곳에 효자가 있어 부모 산소에 매일 세 번씩 성묘하였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서근바미마을은 삼성 남쪽에 있는 마을로, 이곳에 밤이 잘 되는데 예전에 밤 한 개가 매우 커 세 근이 나갔다 하여 불리게 된 이름이라 한다.
♤ 개죽산(介竹山, 453.8m)
개죽산은 천안시의 동남구 북면 오곡리와 병천면 봉항리 경계에 위치한 산으로 천안 시가지를 기준으로 동쪽에 위치하며 서쪽으로는 위례산(523m), 성거산(573m), 태조산(252m), 흑성산(504m),가 있고 북쪽으로는 서운산(538m)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은석산(457m)이 그리고 동쪽으로는 만뢰산이 자리하고 있다. 조선지형도에 북면 오곡리와 갈전면 봉항리에 걸쳐져 그려져 있는데, 산 이름의 유래는 특별한 내력이 전해지는 바가 없다. 다만 개죽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하며 개죽나무는 보통 가죽나무라고도 하며 나무의 새순을 식용으로 사용한다. 개죽나무는 가죽나무의 충청남도 지방 방언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산의 북쪽 산기슭에는 에스원 연수원이 위치하고 남동측 산기슭에는 풍산공원묘원이 위치하는데 이는 개죽산이 천안 도심과 지리적으로 고립되어 있고 지가 및 교통의 접근성 측면에서 위락시설이 입지하는데 유리하기 때문으로 파악된다. 개죽산이 서쪽 고젖에는 국도 57호선이 남북 방향으로 지난다.
♤ 돌목이고개(石項峴)/ 성황당고개/ 장의자
준희선생님의 여기가 돌목이고개입니다 산패가 소나무에 매어 있다. 충남 천안시 동남구 북면 양곡리 베장골과 병천면 봉항리 돌목 사이에 위치한 고개로, 진천 대문리 칡목 마을과 천안 병천 봉항리 마을을 넘나드는 돌목이는 돌이 많은 곳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지역에 따라서는 돌아가는 목을 나타내는 곳임에도 돌 회(回)자가 아닌 돌 석(石)자를 붙이는 경우가 많으며, 이곳도 그런 곳의 하나이다.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에는 대문리의 돌목이고개가 석항치(石項峙)와 대응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여기서 돌은 돌[石]로 풀이할 수 있다. 이 고개의 양곡리 입구에 얹힌 바위가 있는데, 일명 호랑이바위라고 전한다. 이 바위는 큰 바위 위에 또 큰 바위가 얹혀 있으며, 그 밑에 굴이 있어서 옛날 이 굴에 호랑이가 새끼를 쳤던 곳이므로 호랑이바위라 부른다고 한다.
♤ 445.4m봉
가파르게 오른 봉우리로 준희선생님 산패가 참나무에 매어 있다. 지맥은 계속해서 충청남도와 북도의 도계를 따른다. 덕유산, 거창, 대전, 옥천, 보은, 문경, 수안보의 그곳처럼 삼국시대의 국경지대였으리니...
♤ 475m봉
급우틀로 안부로 내려선다.
♤ 472.5m봉
맨발대선배님의 산패가 소나무에 매어 있다.
♤ 만뢰산갈림봉(521.9m봉)/ 만뢰산 왕복/ 도계/ 시군계/ 삼읍면봉(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진천 백곡면 → 진천읍)
장의자가 있는 쉼터봉으로 국가지점번호와 만뢰산 119신고 제4지점표지판 이정목이 서있으며, 지맥의 왼쪽이 진천군 백곡면 대문리 → 진천읍 연곡리로 바뀌는 삼읍면봉 지점으로 만뢰산은 진천군 백곡면과 진천읍의 경계인 왼쪽으로 휘어져 약 500m(15분) 떨어져 있는 만뢰산을 다녀온 후에 봉항3리 마을회관 방향으로 내려선다.
수로왕이 세운 금관가야(가락국)의 마지막 임금 구해왕의 아들인 김무력장군은 법흥왕의 금관가야 병합으로 신라 귀족 가문으로 편입되었으나 성골 세력에 밀려 최전방인 보은 삼년산성에서 복무를 합니다. 대를 이은 김유신이 신라의 중심 세력에 들어가지만 처음부터 그런건 아니었지요.
♤ 만뢰산(萬賴山, 612.2m)/ 1등삼각점(진천 11/ 1984 재설)/ 읍면리계(진천군 백곡면 대문리 - 진천읍 연곡리)/ 헬기장, 정상석, 등산안내도
만뢰산은 진천에서 제일 높은 산으로 충북 진천군 진천읍·백곡면과 충남 천안시 병천면과 경계를 이루지만, 정상은 도(道)경계에서 진천 쪽으로 약 400m 안쪽에 위치하며 진천군 내 하천 분포의 일대 분수령을 이루고 있는 산이다. 만뢰산의 정상 100m 전에 만뢰정(萬賴亭)이 있다. 만노산(萬弩山), 금노산(今奴山), 금노산(今弩山), 금물노산(今勿奴山), 보련산, 이흘산으로도 불리는데 고구려시대의 지명을 따서 그대로 붙인 이름이라고 전해 온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보련산(寶連山)'으로 수록되어 있으며 "고을 서쪽 20리에 있다."라는 기사가 있다. 「동국여지승람」에는 본래 고구려 땅이었던 진천지역이 신라 땅이 된 뒤 김유신의 아버지 김서현이 만노태수로 부임하였는데 북으로 고구려, 서쪽으로 백제군과 대치하면서도 군민들에게 선정을 베풀어 군민들이 평화롭게 지냈다 하여 만뢰산(萬賴山)이라 불렸다고 한다. 만은 만백성을, 뢰는 의지한다를, 만뢰산은 만백성이 의지하는 진천(만노)의 치소이다. 금북정맥 엽돈재 위 삼면봉에서 충남과 충북의 경계를 이루며 동남쪽으로 뻗은 만뢰지맥 산줄기가 만뢰산 400m를 앞두고 남쪽으로 뻗어가고 또다른 산줄기는 만뢰산, 갈미봉, 태령산으로 이어진다.
♤ 만노산성(萬弩山城)
『조선환여승람』에 의하면 만뢰산은 신라 때의 만노군 읍묘(邑廟)로서 김유신의 아버지인 김서현이 태수가 되어 백제에 대항할 때 만뢰산에 만노산성을 축조하였다고 한다. 석축으로 둘레는 약 1.2㎞이고 안에 우물이 1곳 또는 2곳이 있는데 성은 이미 폐하였다고 한다. 『문화유적총람』에 의하면 “만노산성은 진천의 성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웅장한 성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지금은 성의 형태를 분간하기 어렵고 흔적만 남아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만노산성은 산 정상부에 둥글게 석축의 성벽을 돌리고, 동쪽으로는 능선을 따라 길게 쌓아 평면이 장타원형인 테뫼식으로 축조되었다. 만뢰산의 정상에서 동쪽으로 뻗은 능선 곳곳에 석축의 흔적이 남아 있는데 장성의 형태로 남쪽을 방어하도록 길게 쌓은 것으로 보여 주목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고을 서쪽 24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3천 9백 80척이요, 안에 우물 하나가 있었는데 지금은 폐지되었다."라는 기사 내용이 있다. 병자호란 당시 산 정상에 있는 만노산성에서 유창국(柳昌國)이 조감과 함께 적과 맞서 수천 명의 피란민을 구했다고 전한다. 『여지도서』에는 "협탄령에서 뻗어 나와, 떨어진 줄기가 성산(城山)이 된다."라는 내용이 있다. 만노산성의 축조에 대한 정사의 문헌 기록은 없으나 삼국시대의 토기편, 신라시대의 기와편, 고려시대의 그릇 조각과 기와편이 수습되고 있어서 삼국시대 말기부터 고려시대, 병자호란 때에도 입보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김유신 장군 태실이 있는 태령산까지는 약 5.2km로 다녀오기엔 무리입니다.
♤ 호서만뢰문안분맥이란?
만뢰지맥 덕유산 못 미쳐 만뢰산에서 동쪽으로 분기한 문안분맥은 태령산(453.5m), 문안산(415.8m), 봉화산(411.3m), 양천산(351.1m), 불당산(247m)을 지나 미호강으로 맥을 다하는 길이 27.3km(신산경표) 진천 지역의 마루금으로 좌측은 미호강으로 우측은 성암천으로 흘러드는 지류를 흐르게 한다.
♤ 보련마을 갈림길/ 진천군 진천읍 연곡리(蓮谷里) 보련(寶連) 마을
진천군 진천읍 연곡리에 있는 보련마을은 자연마을이자 산촌 체험 마을로 연곡리는 신라시대에 절을 세우고 그곳에서 연화세계를 꿈꾸었다는 뜻에서 붙인 이름으로, 보련은 연화대(蓮花臺)와 관련하여 붙인 이름이다. 만뢰산 깊은 품안에 들어와 있으며, 화랑촌이라고도 불리는데, 삼국통일의 주역인 김유신 장군이 이지역 출신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상곡리, 보연리, 비립리를 병합하여 보연과 상곡의 이름을 따서 연곡리라 했다. 연곡리는 주변에 도덕봉, 약수봉, 옥녀봉 등 아홉 개의 봉우리가 병풍처럼 펼쳐져 있어 마치 한 송이 연꽃이 피어난 모습처럼 아름다워 예부터 명명되어 왔다고 전해진다. 자연마을로는 보련골(보련, 寶連), 비선골(비립), 쥐눈이 등이 있다. 보련골은 보련산 밑에 있는 마을로 신라시대에 절이 있었다. 극락세계를 연화세계라 하므로 연곡리라 하였고, 연화대(蓮花臺)와 관련지어 보련골이라 했다. 비선골은 보련골 남서쪽 1.5km 지점에 위치한 마을로 백비(白碑:글씨가 써 있지 않은 비)가 서 있다 하여 비선골 또는 비립동이라 부른다. 이곳에 서 있는 백비가 보물 404호인 진천 연곡리 석비이다. 최근 건립된 우리나라 최대의 목탑 보탑사가 있다.
♤ 489.7m봉
맨발대선배님 산패가 참나무에 매어 있다.
♤ 도솔암갈림길
완만하게 능선을 진행하며 내려가면 보탑사 0.85km 갈림길을 지난다. 왼쪽으로 보탑사 가는길이고, 만뢰지맥은 멱수 방향으로 간다.
♤ 보탑사(寶塔寺)갈림길
보탑사갈림길을 지나면 능선을 올라 425.1m봉은 정상부 직전에서 우회하여 지나고, 완만하게 오르며 무명봉 하나 또 지난 후에 482.8m봉을 오르게 된다.
♤ 보련산 보탑사(寶塔寺)
충북 진천군 진천읍 연곡리에 소재한 보탑사는 고려시대 절터로 추정되는 곳에 대목수 신영훈 장인의 감독하에 창건된 절로 보탑사가 주목받는 이유는 신라시대 황룡사 구층목탑을 모델로 한 삼층목탑 양식이기 때문이다. 3층 목탑 높이가 42.71m이며 목탑을 떠받치는기둥만 29개에 이른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걸어서 내부를 오르내릴 수 있는 목탑이라는 점도 특별하다. 못을 일절 사용하지 않고 목재를 끼워 맞추는 전통 방식을 고수했다. 또 경내에는 보물 제404호로 지정된 고려시대 석비인 "진천 연곡리 석비"가 있다. 거북 받침위에 비몸을 세우고 비머리를 얹은 일반형 석비로 비문이 없어 백비라고 불린다.
♤ 482.8m봉/ 삼각점봉/ 도계/ 시군읍면계/ 삼리봉(진천읍 연곡리, 천안시 병천면 봉항리 → 관성리)
482.8m봉에 오르며 지맥의 오른쪽이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봉항리 → 관성리로 바뀌는 삼리봉을 지난다. 준희선생님 산패가 참나무에 매어 있고, 식별하기 어려운 삼각점이 있다.
♤ 천안시 병천면 관성리(冠星里)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에 위치한 관성리는 만뢰산 밑의 평지에 위치하였으며 농지가 넓게 분포한다. 마을 서쪽으로는 광기천이 흐르며 의동저수지가 자리한다. 자연마을로는 명성골, 의동, 사잣골마을 등이 있으며 명성골마을은 관성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고, 의동마을은 명성골 북동쪽에 있는 마을로서 뒷산의 모양이 옷을 널어 높은 것과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사잣골마을은 의동 북동쪽에 있는 마을로, 뒷산이 웅장고 큰 재 밑이 되므로 사잣골이라 하였다.
♤ 465m봉
지맥은 급좌틀로 휘어져 내려선다. 간벌목이 등로에 가득한 그만그만한 찐빵봉을 오르내리며, 왼쪽 아래로 보탑사가 보인다.
♤ 425.1m봉
바랑산선배님 산패가 소나무에 매어 있다. 진행하며 조망이 약간 트이는 나무가지 사이로 금북정맥 성거산(聖居山, 579.1m)이 바라보인다. 고려 태조가 이 산을 바라보니, 산 위에 오색의 구름이 떠있어 신이 계시는 산이라 하고, 조선 이태조와 세종대왕이 온양온천에 갈때 이 곳에서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 482.8m봉/ 삼각점봉/ 이정표
이정표가 가리키는 멱수 방향으로 향한다. 판독이 불가능한 삼각점이 열십자 방위표시만 내보이고 있다. 서쪽으론 독립기념과 뒷산인 흑성산이 보이고, 오른쪽으론 질고개에서 갈래친 호서만뢰몽각분맥의 능선이 바라보인다.
지맥은 여기서 우틀로 꺽이며 장교현까지 길게 내리막이 이어집니다.
♤ 남산봉(504.7m)/ 3등삼각점(진천 318/ 재설)/ 도계/ 시군읍면계/ 삼리봉(천안시 병천면 관성리, 진천읍 연곡리 → 상계리)
이정표가 서있는 봉우리로 맨발대선배님 산패가 산벚나무에 매어 있다. 지맥의 왼쪽이 진천읍 연곡리 → 상계리로 바뀌는 삼리봉 지점으로 지맥은 이정표가 가리키는 멱수 3.86km 방향이다. 멱수는 진천군 진천읍 상계리에 있는 자연마을의 이름으로 신라시대에 절이 있었는데, 그 절에서 미역을 빨면 그 물이 마을까지 흘러왔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한편 선녀들이 내려와 목욕을 하는 형국이라 하여 멱수라고도 한다. 남산봉에서 내려선 185번 송전철탑에서 왼쪽으로 태령산과 진천읍의 미군부대가 있는 문안산이 건너다 보인다.
♤ 청허자(淸虛子) 이거이(李居易) 묘소/ 진천군 진천읍 상계리
진천읍 상계리에 있는 멱수 마을에는 조선의 개국공신 이거이(李居易) 묘소가 있는 곳으로 이거이는 청주이씨이고, 청주이씨 시조는 고려의 개국공신으로 지낸 이능희 선생인데 이거이는 충간공 4째 아들로 자는 낙천(樂天), 호는 청허자(淸虛子)로 문백면 사양리에서 태어나 고려말 문과급제 조선조 태조 2년에 우산기사를 걸쳐 병마절제사, 문하부사, 한성부사 등을 역임했으며 태조 이성계를 도와 조선 개국에 일등정사 공신이 되었고, 정조 2년에 좌명공신으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왕자의 난 이후로 태종이 집권한 다음 대간들의 탄핵으로 아들 저와 함께 진천으로 내려와 유배 생활을 하다가 복직되어서 우정승을 거쳐 영의정까지 오른 사람이다. 아들 저는 태조 이성계의 장녀인 경신공주와 혼인하여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에 올랐으며, 또다른 아들 백강은 태종의 장녀인 정순공주와 혼인하여 청평부원군(淸平府院君)에 올랐다.
♤ 진천 김유신탄생지/ 진천군 진천읍 상계리(上桂里)
충북 진천군 진천읍에 있는 신라의 장수 김유신의 탄생지와 태실은 1999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길상사(吉祥祠), 사곡리장수굴, 화랑벌, 병무관, 쏠고개, 당고개, 말탄터 등 김유신과 관련된 사적이 많이 남아 있다. 김유신장군탄생지는 ‘김유신장군유허지’라는 명칭으로 1988년 9월 30일에 충북도기념물로, 김유신장군태실은 ‘김유신태실 및 돌담’이라는 명칭으로 1997년 6월 27일에 충북도기념물로 지정되었다가 1999년 6월 11일에 이 둘이 합해져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김유신장군 탄생지는 진천읍 상계리 계양(桂陽)마을이다. 이곳은 김유신의 아버지 김서현(金舒鉉)이 만노군(萬弩郡) 태수로 있을 때 치소(治所)가 있었던 곳으로 전한다. 그리고 큰 담을 쳤다하여 ‘담안밭(장군터·장수터)’이라 불리고 있다. 또한 인근에 태실과 만노산성 등 신라시대의 유적이 있어 탄생지로 추정되는 곳이다. 현재 연보정의 서쪽인 완만한 평탄대지에 자연석을 이용해 3∼5열로 구축한 3단의 석축이 남아 있다. 연보정은 김서현이 만노군의 태수로 있을 때 치소에서 사용하던 우물로 전하고 있다. 자연석으로 석축을 돌려 쌓았으며, 샘의 직경은 1.8m, 후면의 높은 쪽은 2.6m나 되는 곳도 있다. 특히 연보정은 4m정도 수로를 전면에 내고 있으며, 수로 좌우측에는 정교하게 쌓은 석축이 남아 있다. 이 우물은 김유신장군과의 관련뿐만 아니라 축조방식이 자연석을 이용한 고식인 점으로 보아 삼국시대의 것으로 추정된다.
♤ 태령산(胎靈山, 453.5m)/ 태령산성
김유신장군 태실은 진천읍 상계리 뒷산인 태령산성의 정상부에 있다. 태실은 원형으로 3단의 석축을 쌓고, 그 위에 흙으로 덮은 봉분형의 형태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태실의 형태이다. 자연석으로 둥글게 기단을 쌓고 봉토를 마련했으며, 태령산 정상을 따라 돌담을 산성처럼 쌓아 돌려 신령한 구역을 나타내고 있다. 즉 이곳 주위의 석축형태가 태아(胎兒)의 모양을 하고 있는데 산의 지세를 따랐다기보다는 신앙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현존하는 석축의 높이가 약 1.2∼1.8m이고, 직경 약 9m의 타원형으로 남아 있다. 현재는 태실 중앙에 1986년도에 보수한 직경 3m, 높이 35㎝의 원형 석단이 있어 잔디를 씌워 놓았다. 태령산성은 김유신장군 탄생지 뒷편, 태령산에 있으며, 삼국시대나 고대의 변방 산성지들과 같이 성벽의 높이는 낮고 자연할석을 이용, 간략하게 축조하였다. 규모는 작고, 성내 면적이 매우 협착하며, 축조수법은 정교하지 못하다. 산성의 전체적인 형태는 태아의 모양을 하고 있으며, 둘레는 190m, 높이는 1.2∼2m에 달해 산성(山城)이라기보다는 태실을 둘러싼 돌담의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 경사가 급한 동쪽을 제외하고는 보존상태가 양호하며, 삼국시대 신라의 산성축조술을 엿볼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산성이면서 아울러 태실을 보호하기 위해 축조된 보호시설로서 기능도 있다.
♤ 배성고개(排星峙)/ 임도삼거리/ 도계/ 시읍면계/ 삼리경계면(천안시 병천면 관성리, 진천읍 상곡리 → 금암리)
충남 천안시 동남구 동면 덕성리 배성마을에서 충북 진천군 진천읍 금암리를 잇는 고개인데, 잔돌이 보이는 비포장임도 삼거리이고 고개 윗쪽 나무가지에 준희선생님의 ‘여기가 배성고개입니다’ 산패가 매어 있다. 지명은 덕성리에 속하는 자연마을인 덕현, 신리, 배성 중에 배타니 마을을 배성(排星)이라고도 하는데 높은 산이 사방에 둘러 있으므로 박달안이라 하던 것이 변하여 바타나가 되고 또 배성이 되었다고 한다. 한편 배성은 배선에서 변화했으리라 추정할 뿐이며 배선은 배산의 변화형으로 볼 수 있다. 배성이 지명으로 쓰인 경우는 배산골, 배산굴, 배산동, 배산말, 배산바우, 배산보, 배산삐뚜리 등이 있는데 이들 대부분은 배 모양의 형국을 지녔다거나 배나무가 있었다는 설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배성고개는 배 모양의 고개나 배나무가 있던 고개로 풀이할 수 있다. 배성고개를 장고개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잠시후에 가면 장고개가 나타난다. 지맥은 배성고개 임도삼거리에서 오른쪽 임도를 따라 진행하게 된다. 임도가 지맥능선 바로 밑으로 돌아간다.
♤ 431.7m봉
능선에 올라서서 지맥에서 왼쪽으로 약 50m 떨어져 있는 431.7m봉을 다녀온다.
사자골고개는 방향만 다를뿐 배성고개와 임도로 인접해 있습니다.
♤ 사자골고개
몽각산갈림길 이후 지나는 안부로 충북 진천군 진천읍 상계리 남산골마을과 충남 천안시 병천면 관성리 사자골마을(일명 찬샘골)을 연결하는 고개로서 사자골고개는 새절의 변화형으로 새젓골 〉 새자골 〉 사자골이 된 것이다. 따라서 사자골은 새로 지은 절이 있는 골짜기로 풀이된다. 사자골고개는 진천읍 방면에서는 그리 가파르지 않으나 천안시 병천면 방면에서는 매우 가파른 고개이다. 예전에 소 등에 짐을 싣고 충청도를 넘나들던 길이었고 6.25전쟁 때는 피난길로도 이용하였으나 지금은 막혀 이용하지 않는다.
배성고개에서 숲에 물기도 있고, 넝쿨이 많아 잠깐 임도를 따랐습니다. 지맥 바로 아래에 임도가 같이 하네요.
♤ 몽각산갈림길/ 질고개/ 도계/ 시읍면계/ 삼읍면봉(진천군 진천읍,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 동면)
배성고개에서 오른쪽 도로를 따라 5분쯤 돌아가면 주능선과 다시 만나는 곳이 질고개이고 NO. 14번 송전철탑이 서있다. 능선을 오르내리는 넓은 임도길을 따라 완만하게 오른 봉우리로 지맥의 오른쪽이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관성리 → 동면 덕성리로 바뀌는 지점이다. 특징없는 밋밋한 잡목봉이다. 질고개의 유래는 알 수 없으나 고개 아래에 절이 있어 절을 넘나드는 절고개가 질고개로 바뀌었을 확률도 상당하다. 여기서 도로는 오른쪽으로 가고, 지맥은 철탑을 지나 50m 오른 둔덕에서 왼쪽으로 꺽어지는데 여기가 몽각산으로 가는 갈림능성이다. 이어서 NO. 14번 송전철탑이 또 나온다. 번호는 같지만 방향이 다른 송전탑이다. 왼쪽 옆으로 5기의 큰 묘지가 보이고 지맥은 묘지 왼쪽으로 내려선다.
만뢰지맥에서 분기하는 몽각분맥이 지나가는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용두리에 유관순열사 생가터가 있군요.
♤ 호서만뢰몽각분맥이란?
만뢰지맥이 만뢰산어깨를 지나 내려온 진천읍, 천안시 동면, 병천면의 삼면지점인 등고선상 390m 지점인 질고개에서 서남방향으로 분기하여 천안시 병천면과 동면의 경계를 따라 사자골고개(310m)-몽각산(夢覺山, 398.2m)으로 올라 또 한줄기를 동남방향으로 분기하여 서림산(徐林山, 316.8m)으로 가고, 행암고개(250m)-광덕산(廣德山, 297.7m)-두촌고개(250m)-방고개(190)-동성산(銅城山, 237.9m)-광터골고개(150m)-21번국도/ 탑원도로(90m)로 내려선다. 유관순열사생가 도로(70m)-매봉산(梅峰山, 169.6m)-596번지방도로(70m)-바라박산(246.8m)을 지나 병천면 송정리 와촌마을, 몽각산이 발원지인 녹동천이 병천천을 만나는 합수점에서 끝나는 약 16km의 천안 청원지역의 마루금으로 좌측으로 용두천으로 우측으로 녹동천으로 흘러드는 지류를 흐르게 한다.
♤ 몽각산(夢覺山, 398.2m)
몽각산의 지명 유래는 실전되어 그 의미를 확실히 알 수 없다. 따라서 여러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몽각산(夢覺山)이라는 명칭 자체는 불교 용어집이나 사전에서 공식적으로 언급되는 단어는 아니나 몽각(夢覺)이라는 단어는 불교에서 꿈과 깨달음을 연관시켜 사용하는 용어이다. 따라서 몽각산은 "꿈에서 깨어나는 산", 즉 깨달음을 얻는 과정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산으로 해석될 수 있다. 꿈(夢)은 불교에서 무명(無明), 즉 진실을 알지 못하는 상태를 상징한다. 또한, 꿈은 일시적이고 덧없는 현상들을 나타내며, 현실과 같이 착각하기 쉽다는 점을 강조한다. 깨달음(覺), 즉 진실을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 불교에서 깨달음은 모든 존재의 본성을 바르게 이해하고 번뇌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몽각(夢覺)은 꿈에서 깨어나는 것, 즉 무명에서 벗어나 진리를 깨닫는 과정을 의미한다. 몽각은 불교 수행의 중요한 목표 중 하나이다. 따라서, 몽각산은 꿈과 같이 덧없는 현상에서 벗어나 진리를 깨닫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 천안시 동면 덕성리(德星里)
천안시 동남구 동면에 있는 덕성리는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형태의 전형적인 농촌 마을로 자연마을로는 단지박골, 벌터, 배타니, 머귀나무골, 범박골 등이 있다. 단지박골은 모양이 단지같이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벌터는 신리(新里) 벌판에 있는 마을로 잔덕재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새로 마을을 이뤘다고 한다. 배타니는 배성(排星)이라고도 하는데 덕성리에 있는 마을인데 높은 산이 사방에 둘러 있으므로 박달안이라 하던 것이 변하여 바타나가 되고 또 배성이 되었고, 머귀나무골은 장교다리 입구쪽에 있는 골로 머구나무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고 범박골은 이곳에서 주물철을 생산하는 틀을 생산하였다. 특산물로는 고추, 오이 등이 있다.
♤ 장고개(場峴)/ 임도삼거리/ 도계/ 시읍면계/ 리계
바랑산님의 '여기가 장고개입니다.' 산패가 참나무에 매어 있다. 장고개는 충북 진천군 진천읍 금암리와 충남 천안시 동남구 동면 덕성리 배성마을을 연결하는 고개로 장(場)과 고개로 나뉜다. 장은 정기적 또는 부정기적으로 많은 사람이 모여 여러가지 물건을 사고파는 곳을 말한다. 따라서 장고개는 천안쪽의 사람들이 진천읍 금암리에 서는 읍내장을 정기적으로 보러 다니던 고개로 풀이된다. 임도삼거리인 장고개는 그리 높지 않은 고개로 때로는 소 길마에 볏짐을 싣고 넘나들기도 했다. 고갯마루에 서낭당과 함께 참나무 고목이 있다. 지금은 천안시와 진천읍 사이에 국도가 개설되어 이용하는 사람이 별로 없는 고갯길이 되었다. 우마차길은 능선 왼쪽으로 내려가고, 앞봉으로 올라서면 오른쪽 20여 미터 거리에 송전철탑이 있다.
♤ 322.3m봉
우틀로 약 20m쯤 내려가다가 급 좌틀하는 알바주의 지점이다. 왼쪽의 뚜렷한 등로를 버리고 직진 능선으로 올라선다. 시야가 트이는 곳에서 진천읍 방향으로는 공군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봉화산이 보인다.
300m전부터 길이 보이지 않는 잡목지를 헤치고 내려서야 하고, 장교현에서 충청북도 표지판이 있는 곳에서 절개지로 오릅니다. 엽돈재와 마찬가지로 생거진천 돌표석이 서있습니다.
♤ 장교현(長橋峴, 220m)/ 21번국도/ 충절로/ 도계/ 시군계(천안시 동남구 동면-진천군 진천읍)
절개지 오른쪽의 배수로를 따라 내려서고 공장 녹색 울타리를 따라 급경사를 올라선다. 고개에 (주)삼우그린 공장이 있다. 왼쪽은 충북 진천군 진천읍 금암리, 오른쪽은 충남 천안시 동남구 동면 덕성리의 경계를 이룬다. 1464년(세조 10년) 임금이 병을 고치기 위하여 전국의 여러 명산대천을 찾아다녔다. 그때 세조가 보은 속리산으로 거둥하게 되었는데, 진천의 길상산(吉祥山, 467m)에 충청도 군사 4만여 명을 모아가지고 큰 훈련을 실시하였다. 그때 충청도 목천 서쪽에 있는 각 고을의 장교들이 군사를 거느리고 이 고개에서 쉬어갔으므로 장교고개, 혹은 장교다리고개 등으로 부른다고 한다. 다른 이름으로는 장교치(將校峙)라고도 부르며 팔도군현지도(목천)과 조선지도(목천)에 직산, 안성과의 경계에 장교치(將校峙)가 나타난다. 조선지형도에 덕유산 북쪽 동면 덕성리와 진천 금암리 경계로 장교현(長橋峴)이 표기되어 있다. 금암리버스정류장으로 내려가 진천으로 탈출이 가능하다.
♤ 256m봉
장교현에서 충북 진천읍 표지판 오른쪽의 절개지를 오르면 뚜렷한 등로가 나타난다. 등로를 따라 약 5분 진행하여 오른 봉우리이다.
♤ 395m봉/ 도계/ 시군읍면계/ 삼리봉(천안시 동남구 동면 덕성리, 진천군 진천읍 금암리 → 지암리)
잔펀치를 업다운으로 지나 395m봉에 오르며 지맥의 왼쪽이 진천읍 금암리 → 지암리로 바뀌는 지점으로 정상에 올라서면 덕유산이 가깝게 보인다.
♤ 충북 진천군 진천읍 지암리(芝岩里)
지암리는 진천군 진천읍에 있는 마을로 지장리, 유점리, 상가리, 산직리, 가암리, 입장리, 신리를 병합하여 지장과 가암의 이름을 따서 지암리라 하였으며 자연마을로는 가루개, 가술, 놋점(鍮店), 덤바위, 사태골, 새말, 서낭당이, 안놋점, 입장골(笠場一), 작은덤바위, 절안, 주막거리, 지정골(지장리) 등이 있다. 가루개는 곱돌가루가 많다 하여, 가술은 지형이 갓처럼 생겼다 하여, 놋점은 놋그릇점이 있었다 하여, 입장골은 지형이 갓(笠)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지정골은 옛날 지장사라는 큰 절이 있었으므로 붙여진 지명이다. 유적으로 진천 지암리 석조여래입상이 있다.
♤ 덕유산(德裕山, 415.6m)/ 덕곡산/ 도시군읍면계/ 삼리봉(진천 지암리, 천안 동남구 동면 덕성리 → 죽계리)
천안시의 동쪽, 천안시 동남구 동면 덕성리, 죽계리와 충북 진천군 진천읍 지암리의 경계에 위치한 산으로 「조선지형도」에 표기되어 있는 산이다. 나뭇가지 사이로 가야할 환희산이 보인다. 덕성리 일대에서 용두천이 발원하는데, 덕유산이 속한 연속적인 산지가 용두천의 분수령이라 할 수 있다. 덕유산과 함께 만뢰산(612.2m), 환희산(402.6m), 국사봉(356.8m) 등이 연속적인 산지를 구성하며 천안시의 동쪽 경계를 형성하고 있다. 덕유산의 동쪽으로는 성암천이 북에서 남으로 흐르고 있는데, 용두천이 속한 병천천 하류 유역과 성암천이 속한 미호강 중류 유역의 경계로 자리 잡고 있다. 덕유산 일대는 전형적인 산지에 해당하며, 천안시 경계의 동쪽에 자리 잡고 있기에 도심과는 거리가 멀다. 천안시를 벗어나 충북 진천군 관내인 덕유산 북동쪽 약 1.8㎞ 지점에 아크 벨리 컨트리클럽이 위치하고, 천안시 관내인 덕유산 북서쪽 약 2㎞ 지점에 동산식물원이 자리 잡고 있다.
벌목지를 지나면서 시야가 트이는 왼쪽 멀리, 환희산의 왼쪽으로 진천의 명산 초평면에 두타산(頭陀山, 598m))이 바라보입니다.
♤ 지장골고개(地藏峙, 285m)/ 도계/ 시군읍면리계/ 무속인 비닐움막
천안시 남동구 동면 죽계리의 대골은 대동 또는 죽동이라고도 하며 죽계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고 마을 뒤에 대숲이 있으며 철을 다루던 곳이였던 대골에서 충북 진천군 진천읍 지암리의 지정골(지장리)을 이어주는 고갯마루로서 무속인 터와 성황당이 있다. 지장골이라는 지명은 이곳 지장골 고개 양쪽인 천안과 진천 두군데 모두 있어 어느 지명에서 유래가 되었는지 알지 못하지만 대부분 진천의 지암리에 옛날 지장사라는 큰 절이 있었으므로 붙여진 지명인 지정골(지장리)에서 유래된 이름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지장골 고개는 천안시 남동구 동면 죽계리 방향으로만 등로가 나있고 진천군 진천읍 지암리의 지정골(지장리) 방향으로는 사람들이 다닌 흔적이 사라져 고갯마루의 기능이 사라진 고개이다.
♤ 지장보살(地藏菩薩)
지장보살은 불교의 큰 보살이자 중생의 구원자로서, 지옥으로 떨어지는 사자(死者)의 영혼을 모두 구제한 후에 스스로 부처가 될 것을 서원했으며 6세기 이후 중국에서 지장보살이 널리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한국에는 신라 진평왕 때 원광이 '점찰보'를 설치하면서부터 지장신앙이 대중화되기 시작했다. 지옥에서는 염라대왕과 대립되는 존재로 표현되지만, 염라대왕은 지장보살에게는 한 수 접고 들어가는 존재다. 그래도 염라대왕과 지장보살은 서로 존중하고 존경하는 사이므로 잔충돌은 많으나 서로를 미워하지 않는다. 지장보살은 삭발 승려로, 머리 뒤에는 서광이 빛나고 두 눈썹 사이에는 백호가 나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지장보살의 묘사나 불상을 유심히 보면 유독 초록색 머리가 눈에 띄는데, 일반적인 수행자, 승려의 삭발머리를 나타낸 것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살색 대머리로 묘사하는 경우도 있다. 이는 중생을 구제하는데 쉼 없이 영원히 구제한다는 상징적 의미가 있다고 한다. 완전히 대머리로 묘사하는 건 우리나라보다는 중국이나 일본에서 더 자주 볼 수 있다. 지장보살은 고통받는 이들의 요구에 따라 자신의 모습을 바꾸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윤회의 여섯 세계, 즉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에 상응하는 6가지 모습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지장보살은 명부전, 지장전, 시왕전이라 불리는 법당의 주존(主尊)으로 모시고 있다.
환희산갈림봉으로 오르는 가파른 등로에 준희선생님 '힘힘힘' 격려산패가 참나무에 매어 있네요.
♤ 환희산 갈림봉(404m)/ 도계/ 시군읍면계/ 삼리봉(천안시 동남구 동면 죽계리, 진천군 진천읍 지암리 → 진천군 문백면 봉죽리)
지맥의 왼쪽이 진천군 진천읍 지암리 → 문백면 봉죽리로 바뀌는 지점으로 진천군 읍면계를 따라 환희산을 다녀온다. 환희산갈림봉 아래에서 봉을 오르지 않고 왼쪽 등로를 따라 약 180m 떨어진 환희산을 다녀온 후에 되돌아와 지맥을 이어간다.
♤ 충북 진천군 문백면(文白面)
진천군 문백면은 남쪽으로 청주시, 동쪽으로 초평면(草坪面), 북쪽으로 진천읍, 서쪽으로 충남 천안시와 접한다. 면의 중앙에 양천산(凉泉山, 350m)이 솟아 있으며, 북부 백곡천(栢谷川)과 미호강(美湖江)의 합류지역을 제외하면 대부분 해발고도 200∼300m의 저산성 구릉지이다. 논은 백곡천과 미호강의 합류지역과 미호강 지류의 산간지역에 좁게 분포하여 쌀 생산은 적으나, 구릉지의 완사면을 이용한 밭농사로 보리·잡곡·잎담배·고추 재배와 낙농으로 농가소득을 올리고 있다. 교통은 진천~청주를 남북으로 연결하는 지방도가 있다. 문화재로는 진천농교(충북유형문화재 28), 정송강사(鄭松江祠:충북기념물 9), 충간공남지묘소 및 신도비(충북기념물 80), 이정부부묘와 묘표석(충북기념물 94), 송강정철신도비(충북기념물 187), 유희원(柳希願) 효자문, 양천성지(凉天城址), 진천옥성리사지(鎭川玉城里寺址), 최유경(崔有慶) 효자문, 어수정(御水井), 사양영당(思陽影堂) 등이 있다.
♤ 충북 진천군 문백면 봉죽리(鳳竹里)
진천군 문백면에 있는 봉죽리는 어은리, 봉암리, 대상리, 석보리, 옥산리 일부가 합쳐져 봉죽리가 되었다. 자연마을로는 갈마지, 바사리, 봉암, 대말, 은골이 있으며, 갈마지(석보)는 봉죽리 남쪽에 있는 마을로, 말에게 갈증을 풀게 하기 위해 물을 먹이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바사리는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말을 죽였다 하여 마살리라 불리던 것이 바사리로 변했다. 지형이 말의 바를 사려 놓은 형국이라 바사리로 불리게 되었다는 설도 있다. 국도 17호선이 남북으로 뻗어 있어 청주, 진천읍, 경기도 용인시 등과 연결되어 교통이 편리하다.
♤ 환희산(歡喜山, 402.6m) 왕복/ 2등삼각점(진천 25/ 1984 재설)/ 진천군 진천읍 지암리-문백면 봉죽리
약간의 공터가 있는 정상부 중앙에 정상석과 삼각점이 있고, 정상석 뒤쪽에 표지판과 많은 시그널이 붙어 있다. 정상에 서면 청주시와 진천읍 및 천안시 등의 도심이 한눈에 들어오고 산 전체가 가사문학으로 유명한 정철의 유적 순례지라고 할 수 있으며 등산객들 뿐만 아니라 여행객들도 찾고 있다. "기쁨을 안겨주는 산" 이라는 뜻이 있지만, 한편으로 하늘산 > 한으산 > 환희산으로 변화했을 가능성도 있어 "높은산"이라는 뜻도 있다고 한다. 정상부에 테뫼식 토축 산성인 환희산성이 있으며, 산 중턱의 등산로를 따라가면 송강 정철 묘소가 있고, 산 아래 봉죽리 어은마을에는 정철의 위패를 봉안한 정송강사(鄭松江詞)가 있다. 어은골은 고기가 숨어 있는 지형과 흡사하다 하여 송시열이 붙인 지명이다.
♤ 환희산성(歡喜山城)
충남 천안시 동면 장송리와 진천군 진천읍 지암리에 걸쳐 있는 삼국 시대 산성으로 목천에서 진천으로 가는 환희산 정상부에 위치해 있다. 고문헌 기록에 환희산성(歡喜山城)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어 축조 경위 등의 연혁은 알 수 없으나, 삼국 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1932년에 간행된 『상산지(常山誌)』에 환희산(歡喜山)에 대한 기록이 있지만 산성의 존재는 언급되지 않았고, 그 후 조선 총독부에서 간행한 『조선 보물 고적 조사 자료』에 환희산성에 대한 기록이 나와 있다. 환희산성은 테뫼식[정상을 중심으로 산의 7,8부 능선을 따라 둘러쌓음]의 토축 산성이다. 환희산 북쪽 봉우리에서 남서쪽으로 이어진 남쪽 봉우리와는 약 200m의 거리가 되며, 북쪽 봉우리의 북쪽으로 평탄면 일부가 있다. 동-서 너비는 약 10m에 불과하다. 북쪽 봉우리는 서쪽 경사면에 약간의 석축(石築) 흔적이 있을 뿐 벽체는 분간하기 어렵다. 둘레는 약 500m이다.
송강 정철은 정여립사건의 수사 책임자, 위관(委官)이 되어 기축옥사에 깊이 관여되었고, 이로 인해 동인백정(東人白丁)이라고도 불렸습니다. 동인의 영수는 유성룡이었고, 피해를 본 대표적인 호남의 동인 집안은 광산이씨, 해남윤씨, 탐진최씨, 유희춘 집안 등이었죠. 성격이 괴팍하고 술을 즐겨 알콜 중독증까지 있었다는데 말년 이후 죽어서까지 편안하지 못 했어요. 선조에 의해 이용당했다는 말도 있지만 명종 당시 동서분당의 당파싸움은 현재까지도 이어집니다.
♤ 송강(松江) 정철(鄭澈, 1536~1593) 묘/ 충북 기념물 제106호/ 진천군 문백면 봉죽리
송강 정철 묘는 경기도 고양에서 1665년(조선 현종 6) 이장되었다. 왕실의 외척으로 금수저를 물고 서울 장의동(藏義洞), 지금의 청운초교 옆에서 태어났다.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시인으로 명종 17년(1562)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하였고,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쳐 선조 17년(1584)에 대사헌이 되었다. 1589년 우의정이 되어 서인의 대표로 동인을 추방하였으며, 다음해 좌의정에 올랐다. 1591년 광해군의 책봉을 건의하여 파직하였으나,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기·충청·전라의 3도체찰사가 되었고, 1593년 중국 명나라에 사은사로 다녀왔다. 정철은 정치가로서 큰 일을 많이 하였지만, 붕당 싸움에 말려 반대당의 배척을 받았다. 그러나 가사문학의 대가로 가사와 단가 100여 수를 지어 국문학에 크게 공헌하여 국문학사에 그를 빼놓고는 이야기 할 수 없다. 작품으로는『관동별곡』·『사미인곡』·『속미인곡』등의 가사와 시조 107수가 전한다. 굴곡진 삶을 산 송강 정철은 말년에 강화도의 벗 권필을 찾아 송정촌에 머물며 그이 나이 58세인 1593년 12월 8일 사망한다. 묘는 송강사 남쪽 100m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데, 원래 고양군(현 고양시) 원당면에 있던 것을 조선 현종 6년(1665)에 송시열 선생이 현 위치에 묘자리를 정하고 후손 정양이 이장하였다. 묘 앞에는 상석이 있고, 상석을 중심으로 좌우에는 망주석·문인석이 각 1쌍씩 있으며, 묘의 오른쪽에는 묘비가 있다.
지맥의 좌우가 도계인 충남 천안시와의 경계를 떠나 충북 진천군으로 들어서는 지점으로, 여기부터 충남을 벗어나 완전하게 충북 진천군으로 접어들게 됩니다.
♤ 385.5m봉/ 국사봉갈림봉/ (진천군 문백면 봉죽리, 천안시 동남구 동면 죽계리 → 진천군 문백면 계산리)
정상 직전에 국사봉 갈림길에서 국사봉으로 가는 길을 따라 충남북 도계가 갈린다. 맨발대선생님 산패가 참나무에 높이 매어 있다. 지맥의 오른쪽이 천안시 동남구에서 진천군 문백면 계산리로 바뀌며 지맥이 좌우 모두가 완전하게 진천군으로 들어서는 지점이다. 지맥은 좌틀로 내려선다. 묘지로 내려서서 넓은 임도를 따르다 악취가 나는 초대형 양계장을 지나 능선으로 오른다. 옛지도에는 양계장이 있는 이곳을 덕고개라 표기를 하고 있는데 오른쪽으로는 안적골 가는 길이다. 천안시 동남구 동면 장송리에 있는 안적골은 골이 아늑하고 깊어 난을 피하기 좋은 곳이라 하여 옛날부터 피난처로 유명하였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양계장에서 찐빵을 하나 넘으니 지맥은 축산 분뇨를 발효시켜 만든 퇴비공장 뒤쪽 능선을 따른다.
♤ 국사봉(國師峰, 291.8m)
국사봉은 충남 천안시 동남구 동면과 충북 진천군 문백면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북쪽으로 환희산(402.6m), 북서쪽으로 덕유산(415.6m)이 위치하며, 세 산이 연속적인 산지를 이루고 있다. 덕유산 인근 동면 덕산리 일대에서 발원한 용두천이 국사봉 서쪽에 발달한 곡저를 따라 흐르고 있다. 국사봉에 연한 산지가 용두천의 분수계라 할 수 있으며 또한 국사봉 동쪽으로 약 2.3㎞ 지점에 발달한 곡저에 성암천이 흐르는데, 용두천은 충북 청원군 옥산면 금계리 일대에서 병천천과 합류하고, 성암천은 청주시 청원구 오창읍 도암리 일대에서 합류하게 된다. 명칭의 유래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돌로 쌓은 제단이 있으며, 또한 신라의 토축 산성으로 파악되는 국사봉산성이 남아 있으며, 남북 길이 300m, 동서 너비 100m, 둘레 약 700m 가량이 현존하는 것으로 파악되며, 문헌 기록은 없지만 진천의 남서쪽에 해당하는 천안 방면을 방어하기 위하여 신라가 쌓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국사봉에는 전염병을 치료한 승려와 관련한 일화가 전해온다. 과거 천안과 진천 일대에 전염병이 돌아 많은 사람이 죽었는데, 이때 한 승려가 나타나 돌림병을 두려워하지 않고 환자들을 돌보았다고 한다. 승려가 봉우리에 올라 천제(天祭)를 지낸 후 전염병이 사라지자, 인근 주민들이 승려의 은덕을 기리려 국사(國師)라 하였으며, 천제를 지낸 봉우리를 국사봉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일화가 그것이다. 한편 우리나라에는 국사봉 지명이 다수 존재하고 있는데, ‘국사’는 무속 사회에서 굿을 하던 곳을 나타내는 말로서 굿의 이두식 표기라 주장하는 견해도 있다.
♤ 진천군 진천읍 계산리(溪山里)
진천읍 계산리는 진천군청에서 남동쪽으로 약 15㎞에 있으며 행정구역 통폐합 때 산직리, 낙계리, 신리를 병합하면서, 낙계와 산직의 이름을 따서 계산리라 하였다. 남북으로 금북정맥이 가로지르는 험준한 산악지대로 영동과 영서로 갈라져 있으며, 영동에는 미호강, 영서에는 성암천이 흐른다. 평야지는 극히 적고, 계곡부가 많으며, 자연마을로는 덕고개, 세거리(신리), 안적골, 흐네기(흐락기)가 있다. 덕고개는 덕고개 밑에 있는 마을이다. 막골(마옥, 마위동)은 산직마을 서쪽으로 1.5㎞에 있는 마을로, 옛날 이곳에서 옥돌을 갈고 닦아 장신구를 만들었다 하여 마옥(磨玉)골이라 불리던 것이 바뀐 이름이다. 세거리(신리)는 안본골 서쪽에 새로 된 마을이라 하여 이름 붙여졌고, 문백면과 충남 천안시 동면, 청원구 오창읍으로 가는 세 갈래 길이 있다. 안적골은 산직말 북쪽 1㎞에 있는 마을로 옛날부터 피난처로 유명하였다. 이곳에 와서 난리를 피하고 평안히 살았다 하여 안적골이란 지명이 생겼다. 흐네기(흐락기)는 산직말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계곡 물이 마을 가운데로 흘러간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덕고개 산패가 있는 열려진 철대문 안으로 들어서면 인가가 한채 있는데 그집에서도 충분히 물을 구할 수 있겠더라고요. 그물망 울타리가 쳐진 왼쪽 밭으로 올라서면 맨 위에 문이 만들어져 있어 그리로 나가면 됩니다.
♤ 덕고개(2차도로)/ 1번군도/ 송강로/ 인가
정확하게는 양계장 뒤쪽 능선이 지맥 마루금이다. 양계장 뒤 묘지에서 오른쪽으로 내려오면 고개 왼쪽에 사기그릇 폐기장이 있고 폐기장으로 들어오는 도로가 있다. 왼쪽 골짜기에서 1번 군도상의 LG P&C 앞으로 이어지는 낮은 안부가 지도상의 덕고개로 추정되나 1번군도가 나면서 이길은 없어졌으니 편의상 여기서 왼쪽 솔밭 넘어 1번군도를 덕고개로 부르기로 한다. 퇴비공장 담장을 끼고 능선으로 오르면 잡목과 가시나무 구간이다. 공장 절개지를 지나 덕고개로 내려서고 개인 사유지 철대문 뒤쪽 단풍나무에 맨발대선배님의 '여기가 덕고개입니다.' 산패가 매어 있다. 진천군 문백면 계산리와 봉죽리를 잇는 고개로 고개 오른쪽에 민가 한채가 보인다. 철망 대문 안으로 들어가서 농가집에서 왼쪽 산으로 붙는다. 1번 군도가 지나는 2차선도로로, 봉죽리에는 송강 정철의 사당인 정송강사(鄭松江祠)가 있는 곳이다. 당시 서인의 거두로 1580년도 강원도 관찰사로 나아가 관동팔경을 벗하였으며, 이듬해 조정에 돌아왔으며 1589년 우의정 얼마후 동인에 밀려나 명천 진주 강계 등지로 귀양을 다니고 1592년 임진왜란을 당하여 귀양에서 풀려나와 평양에서 임금을 맞은 뒤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오는 등 임금과 나라를 위해 최선을 다하다가 강화에서 병사했다. 정철이 강원도 관찰사로 있을 때 지은 관동별곡 평창의 성산 기슭에 들어가 지낼 때 지은 성산별곡 등을 위시하여 우리말체로 된 수많은 가사들은 국문학사상의 일품들인데, 1580년(선조13) 정월 작자가 45세 때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내외 해금강과 관동팔경 등의 절승을 두루 유람한 후 그 도정(道程)과 산수 풍경 고사 풍속 및 자신의 소감 등 읊은 노래로 조선시대 가사 가운데서도 대표작으로 손꼽을 만한 백미편이다. 음률이 주로 3·4조로 이루어진 이 가사의 용어는 비교적 순수한 우리말이 많고 비록 한문 어휘라 하더라도 대게 우리말 화한 것들로 이 가사는 파란이 심하였던 작자의 관직생활에서 비교적 득의에 찼던 시절의 작품인 만큼 전체의 분위기가 웅장하고 명쾌하여 화려체의 문장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 특색이다.
송전철탑에서 지나온 환희산과 국사봉이 뚜렷하게 잘 보입니다.
♤ 225.8m봉
마루금에서 약간 벗어나 있어 다녀온다. 지맥은 송전철탑이 있는 급우틀이고 왼쪽으로 잠깐 다녀오는 봉우리이다.
버섯을 따는 부부가 앉아서 쉬고 계시네요.
♤ 206.8m봉
225.8m봉을 오른쪽으로 우회하여 등산로변 체육공원(산스장)에서 맥길은 급좌틀로 내려서고, 체육시설 너머로 흐네기 마을가는 뚜렷한 등로가 보인다. 진천군 문백면 계산리에 있는 흐네기(흐락기)는 산직말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계곡물이 마을 가운데로 흘러간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인근 주민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등산로를 계속 따른다. 길이 좋아서 오른쪽으로 빠지는 길을 놓치고 좋은 길을 따라 한참 직진해서 알바하는 경우가 많다.
고개 옆 인가 마당에 벌통이 가득하네요. 수도가 있다는데 저는 물이 800cc 있어서 진행합니다.
♤ 계산 2길(171m)/ 1차선 포장도로/ 리계(진천군 문백면 계산리-봉죽리)
진천 문백면 계산리에서 봉죽리로 넘어가는 1차선 도로로 문백면 소재지로 향하는 길이다. 도로를 가로질러 절개지 능선으로 올라선 봉우리에서 문백면 소재지가 보이고 왼쪽으로는 가섭지맥 능선과 가섭산(709.4m) 정상이 보인다.
♤ 195m봉
염소목장이었던 녹슨 철망 울타리를 만나 좌틀로 진행한다.
♤ 계산 3길(177m)/ 포장도로/ 리계(진천군 문백면 계산리-봉죽리)
진천군 문백면 계산리에서 봉죽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계산리쪽에는 공장들이 보이고 봉죽리쪽으로 넘어가면 문백면 소재지로 향하는 길인데 교통량은 거의 없는 편이다.
206.8m봉 직전에 우틀로 공장지대로 내려가는 능선이 있네요. 띠지도 있고, 잠시 헷갈렸어요. 간벌목으로 막아놓았더군요. 206.8m봉을 찍고 공장지대로 내려서다 직전에 내리는 능선이 앞에 보이길래 혹시 하며 그리로 다시 넘어갔더니 공장지대로 내려서는 알바였습니다.
♤ 206.8m봉
바랑산선배님 산패가 소나무에 매어 있다. 지맥은 206.8m봉 갈림길에서 우틀하여 공장지대로 내려선다. 조금씩 산초나무, 아카시나무 가시가 비추기 시작한다.
공장 안으로 들어가 알바를 하고 다시 지맥길에 달라붙었는데요. 글쎄 제가 달라붙은 곳에 수도가 있습니다. 가시나무 잡목길이 나타나기 시작하며 주능선을 따라 2~300m 거리에 계속 됩니다.
♤ 183m봉/ 삼리봉(진천군 문백면 계산리, 봉죽리 → 도하리)
안부에 있는 공장건물 왼쪽의 철망 울타리를 지나 능선으로 올라선 봉우리로 지맥의 왼쪽이 진천군 문백면 봉죽리 → 도하리로 바뀌는 삼리봉 지점이다. 지맥은 급우틀이다. 산불이 난 흔적이 있고 산초나무, 초피나무, 아카시나무 군락지를 지난다.
♤ 도하 3길/ 진천군 문백면 계산리/ 리계(진천군 문백면 계산리-도하리)
가시잡목길을 내려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고개로 등로 왼쪽으로 축사와 공장들이 보이고 축사 분뇨 냄새가 코를 찌른다. 고개를 넘어가면 문백면 도하리로 이어지는데 오른쪽 절개지 사면으로 능선 오름길이 아카시나무가 엄청나다. 26번 송전탑으로 올라가 송전탑 아래로 통과한다.
우리나라 문화사적 업적에 있어서는 이분을 빼놓고는 감히 논하기 힘든 분이십니다.
♤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 1713~1791) 묘소/ 충북 진천군 문백면 도하리
조선의 문신이자 서화가로 시·서·화 삼절로 불렸고 당시 화단에서 '예원의 총수'로서 조선 후기 학문과 예술의 발전에 중추적인 구실을 했다. 6세부터 글을 짓고 8세 때 숙종 국상에 어울리는 구장(鳩杖)에 대한 시를 짓는 등 어려서부터 시문에 뛰어난 자질을 보였으나, 형 세윤(世胤)이 귀양살이하는 것을 보면서 과거에 응시할 생각을 버렸다. 32세 때 가난으로 처가인 안산(安山)으로 옮긴 뒤 약 30년간을 지내면서 문인으로서 시·서·화를 고루 갖추고 그 깊이를 더해갔다. 강세황은 집안 선조들과 임금의 두터운 관계로 영·정조에게 상당한 배려를 받았다. 1763년 영조가 그가 서화를 잘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인심이 좋지 않아서 천한 기술이라고 업신여길 사람이 있을 터이니 다시는 그림 잘 그린다는 말을 하지 말라"라고 말하자, 이에 감격하여 이때부터 거의 20년 동안 붓을 놓고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1773년 영조의 배려로 61세의 나이에 처음 벼슬길에 올랐다. 1776년 기구과(耆耉科), 1778년(정조 2) 문신정시(文臣庭試)에 수석합격하여 관계가 가선대부에 이르렀다. 그뒤 영릉참봉·사포별제(司圃別提)·병조참의·한성판윤 등을 두루 거쳤다. 1784년 천추부사(千秋副使)로 북경에 갔을 때 덕보(德保)·박명(博明)·김간(金簡) 등 당시 중국 지식인들과 접촉하면서 자신의 문화적인 면모와 긍지를 발휘했다. 김홍도(金弘道)를 비롯한 조선 후기 화단의 발달은 그에게서 영향받은 바 컸다. 1790년 78세에 지중추(知中樞)가 된 다음 해에 세상을 떠난다.
알바 하는지 알고 급거 뒤돌아 왔는데 억울해요. 60m는 갔는데 말이죠. 오룩스에 지도가 나타나지 않아요.ㅠㅠ
♤ 173.3m봉/ 4등삼각점(진천 466/ )/ 시군계/ 읍면계/ 삼리봉(진천군 문백면 도하리, 계산리 → 청주시 청원구 오창읍 복현리)
지맥길은 좌틀하여 임도를 따라 내려서나, 오른쪽으로 약 70m 떨어져 있어 배낭을 내려놓고 다녀온다. 준희선생님 산패가 참나무에 매어 있다. 진천군을 지나온 만뢰지맥이 청주시 청원구와 처음 만나는 지점이다. 임도를 내려서면 벌을 치는 가건물이 보이고, 왼쪽 능선으로 올라서서 시계방향으로 빙 돌아가는데 벌치는 곳에서 노래방기기를 크게 틀어놓아 골짜기가 시끄럽다.
♤ 172.5m봉
지맥의 오른쪽이 진천군 문백면 계산리 → 청원구 오창읍 복현리로 바뀌는 지점이다. 좌틀 10시방향으로 진행한다. 서래야 박건석님의 172.5m 계산봉이란 코팅지가 붙어있던 봉우리이다.
♤ 청주시 청원구 오창읍(梧倉邑)
청주시 청원구 북쪽 끝에 있는 읍으로 읍소재지는 장대리이고, 동쪽은 북이면(北二面)·내수읍, 남쪽은 옥산면(玉山面), 북쪽과 서쪽은 진천군 문백면(文白面) 및 충남 천안시 병천면(幷川面)·동면(東面)과 접하며, 청원군에 속해 있다가 2014년 7월 1일부로 청주시와 청원군이 통합 출범하면서 청주시에 편입되었다. 불당산(佛堂山, 246m)·취령산(鷲嶺山, 228m)·국사봉(國仕峰)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경계로 서쪽에는 산지가 발달해 있고 동쪽에는 오창평야가 펼쳐지며, 서쪽에는 솔림산(率林山, 235m)·약사산(藥師山, 245m)·서림산(徐林山) 등 금북정맥의 지맥이 뻗어 있다. 이 산맥의 동쪽 사면에는 미호강(美湖江)의 지류인 용두천(龍頭川)이 흐르고 있어 하곡평야가 발달하였다. 조선시대 청주목의 북강외일면과 북강외이면에 속했던 지역이고 작천(까치내) 즉 북강의 바깥에 위치하는 지역이라는 뜻에서 유래된 지명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청주)에 오근원이 오근부곡 옛터에 있다고 수록되어 있고 오근창은 1669년(현종 10) 청주목사가 미호천 유역에서 생산되는 쌀을 보관하기 위해 옛 오근원 터에 새로 지은 창고이다. 오창면이란 지명은 오근창에서 유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오근창은 전설에 의해 오공창으로도 불렸고 청주의 북쪽에 있기 때문에 북창으로도 불렸다. 동쪽에는 북쪽 진천에서 남류하는 미호강이 평야 중심을 흐르면서 관개용수를 공급하여 미곡을 많이 생산한다. 배추와 무 등 채소재배와 양잠이 활발하고, 콩·팥을 중심으로 한 두류와 참깨·들깨·낙화생 등의 특용작물과 사과·잎담배 생산으로 유명하며, 또한 한우와 오리를 많이 사육한다. 면의 중앙부에는 오창과학산업단지가 건설되고 있다. 교통은 중부고속도로가 통과하며, 청주∼진천 간 국도와 조치원∼증평(曾坪) 간의 지방도가 교차한다. 문화재로는 충비(忠婢) 삼월(三月)의 비(충북문화재자료 14), 장자(長者) 성터, 송천서원, 기암서원, 충열각, 동고정, 목령산성, 괴정리의 석가여래상, 괴정리 현풍곽씨 정려문, 창리의 석조보살입상 등이 있다.
♤ 청주시 청원구 오창읍 복현리(卜峴里)
청원구 오창읍의 북동쪽에 위치한 복현리는 동쪽은 장대리, 서쪽은 양지리, 남쪽은 창리, 북쪽은 모정리와 접하고 있으며, 오창과 진천을 잇는 17번 국도상의 복현교 서쪽에 있는 마을로, 동쪽으로는 성암천이 인접하여 남류(南流)하고 있으며 북쪽은 진천군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복현리는 평지가 넓은 편이며, 여러 작은 하천이 흐르고 있고 그 하천들은 용두천으로 흘러간다. 자연마을에는 도촌, 분터골, 새터, 서촌, 복고개, 수정아파트가 있다. 도촌은 길가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분터골은 지형이 제비똥처럼 생겼다 하여 그 말을 한문으로 표기한 것이다. 새터는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해서 이름 붙여졌으며 솔밭이 있다. 서촌은 한고개의 밑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한고개라고도 불린다. 수정아파트는 1990년대 초 신축된 아파트단지이다.
♤ 음달말도로/ 복현리 임도
나뭇가지 사이로 그랜드C.C.가 보이고 목장 울타리인 쇠파이프 울타리를 왼쪽으로 지나 내려선 양회임도이다. 왼쪽으로 진천군 문백면 계산리 새거리마을이 보인다. 청주시 청원구(옛 청원군) 오창읍 복현리 음달말로 넘어가는 양회임도를 지나 이번에는 등로 오른쪽 아래로 양달말을 보며 지난다. 잡목가시들이 많다. 밭을 지나 왼편에 공장 건물이 보이는 절개지로 올라서서 진행하는데 미끄러져 떨어질세라 조심조심 지난다. 묘지에서 우틀하여 한고개로 내려선다.
지맥이 청주시 청원구 내안으로 완전하게 들어서는 지점입니다.
♤ 한현고개(145m)/ 26번 군도/ 2차선도로/ 화복로
청주시 청원구 오창읍 복현리에 있는 고개로 지명 유래는 고개 아래 마을 이름에서 가져온듯 하다. 충남 천안시 동면과 충북 청원군 오창읍을 잇는 26번 도로가 지나가고 있는데 시골길 치고는 교통량이 상당히 많다. 삼거리에서 오른쪽 길로 오른다. 166m봉에서 한현고개로 내려서면서 지맥은 청주시 청원구 오창읍 복현리 내로 들어서서 화복로를 건너며 복현리를 가로질러 성산리와의 경계에 있는 228.1m봉으로 오른다.
이 봉우리를 만나보지 못했어요. 잡풀지대로 길을 찾지 못해 옆 왼쪽 능선으로 오르다가 죽을 뻔 했네요. 그나마 전지가위가 있어 능선으로 오르긴 했는데 하필이면 손가락 사이에 밤나무 쐐기를 쏘여 밤늦게까지 고생을 하기도 했고요.
♤ 228.1m봉/ 리계/ 충북 청주시 청원구 오창읍 복현리-성산리
한고개에서 약 15분 소요되고, 능선상에 가시잡목으로 잠시 오른쪽으로 난 신설도로를 따르기도 한다. 청주시 청원구 오창읍 복현리와 성산리의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맨발대선배님의 산패가 소나무에 매어 있다. 지맥은 정상에서 급좌틀하여 복현리와 성산리의 경계를 따라 진행한다.
♤ 충북 청주시 청원구 오창읍 성산리(星山里)
오창읍에 있는 성산리는 평야가 넓은 편이며, 서쪽의 성재천과 동쪽의 용두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데 서쪽에는 경부고속도로가 지난다. 자연마을에는 빌미기, 덕대, 나무까치, 능골, 옥정이, 질푼이, 한현이 있다. 나무까치는 과거에 까치가 울고 갔다는 큰 나무가 있어서, 능골은 빌미기 남쪽에 있는 마을로서 어떤 묘가 있어서, 질푼이는 빌미기 서남쪽 질푼이고개 아래에 있는 마을로 지형이 양푼처럼 생겼다 하여 이름 붙여졌다.
음식점 청원한우마실을 지나가니 식사를 할 수도 있겠습니다. 뒤쪽에 막국수집도 있어요. 저 오른쪽에 보이는 묘지로 내려섰습니다.
♤ 510번도로/ 복현고개/ 청주시 청원구 오창읍 복현리-성산리/ 성현길
오른쪽 오창읍 성산리 방향으로 그랜드파크모텔이 보인다. 청주시 청원구 오창읍 성산리와 양지리의 경계에 있는 고개이다. 양지리 방향쪽으로 가면 중부고속도로 오창I.C와 17번 국도를 만나는 곳인데 교통량이 많다. 도로를 가로질러 급경사의 능선을 치고 오른다. 산수동고개라고도 하고 양지리고개라고도 부른다.
♤ 507번도로/ 2차선도로/ 두릉유리로/ 삼리경계(청주시 청원구 오창읍 복현리, 성산리 → 양지리)/ 보호수
지맥이 우틀하며 지맥의 왼쪽이 청주시 청원구 오창읍 복현리 → 양지리로 바뀌는 삼리경계면 지점이다. 청주시 청원구 오창읍 성산리와 양지리를 이어주는 2차선 두릉유리로가 지나는 고개로 통행량이 많은 편이다.
고속도로 너머로 멀리 한남금북정맥 상당산과 좌구산이 바라보입니다.
♤ 32번국도/ 아산-청주고속도로/ 생태통로
철계단으로 내려선 절개지 중간에서 배수로를 따라 왼쪽으로 이동하여 신설 4차선 고속도로 위에 설치된 생태통로를 건너 앞쪽의 경사지를 오르면 목령산으로 올라가는 임도가 나온다.
목령정에서 오창읍내 아파트단지와 넓은 들이 내려다 보이고, 가야할 방향에 지맥을 차지하고 있는 오창에딘버러C.C.도 잘 보입니다.
♤ 목령산(鶩嶺山, 229.1m)/ 취령산(鷲嶺山) 목령산성/ 삼각점봉/ 팔각정(목령정)
목령산은 충북 청주시 청원구 오창읍 성산리, 주성리, 양청리 사이에 있는 산으로 산의 모양이 마치 따오기 같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라고 한다. 그리고 목령산 정상에서 남서쪽 능선으로 둘레 약 390m의 테뫼식 석축산성인 길이 18m, 폭 15m, 높이 1.2m 정도의 규모의 목령산성이 있다. 목령산성은 충북 청주시 청원구 오창읍 양지리, 주성리, 양청리에 걸쳐 있는 목령산 정상에서 남서쪽 능선으로 쌓은 퇴뫼식 석축산성으로 오창읍에서 사방의 도로망과 평야를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의 요충지에 해당한다. 목령정 아래에 있는 삼각점은 방위표시만 나와 있어 글자와 숫자는 식별이 불가하다. 목령정에서 내려와 직진 방향의 운동시설이 있는 등산로를 따라 오창장미원이라 불리는 오창공원묘지 방향의 우회로로 향한다.
골프장을 지나는 지맥을 우회하는 경로에 있습니다.
♤ 오창 공원묘지/ 오창 장미원
골프장 직원과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 목령산에서 일반등산로를 따라 진행하여 국가지점번호가 있는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오창장미공원 철계단으로 내려서고, 오창공원묘지 입구 도로 건너편 돌계단을 올라 문화휴식공원입구를 가리키는 이정표를 따라서 나무 계단으로 올라선다.
목령산으로 오르다가 알바하는건가 하고 다시 내려와 원 지맥길을 걸었습니다. 오룩스에 지도가 나타나지 않아 빗어진 참사에요. ㅋㅋ
♤ NO39 송전철탑/ 삼리봉(오창읍 양지리, 성산리 → 양청리)
목령산을 오르며 지맥의 오른쪽이 청원구 오창읍 성산리 → 양청리로 바뀐다. 지맥은 송전철탑 뒤로 내려서서 우틀로 155.2m봉으로 이어지는데 맥길 정중앙에 오창에딘버러C.C. 골프장이 있어 안전상의 문제 때문에 직원들의 저지로 통과하기가 어렵다. 목령산갈림삼거리인 NO39 송전탑에서 직진으로 10여분 정도 올라가면 목령산 정상이다. 지맥은 송전탑에서 오른쪽 아래로 내려서 능선으로 들어서면 마루금이 골프장으로 이어진다.
에딘버러C.C. 직원들 모두 친절하네요. 등산객에게 별다른 반감도 없습니다. 구내식당에서 밥도 먹고 물을 얻어 출발합니다.
♤ 에딘버러C.C./ 퍼블릭골프장
지맥은 오창읍 양청리 내안으로 능선을 따르나 골프장이 들어서 있어 골프장 직원들과 마찰을 피하려고 목령산에서 일반 등산로를 따라 진행하여 오창공원묘지 관리소앞을 지나고 155.2m봉에서 다시 지맥능선에 닿는 우회 경로를 선택하기도 한다.
♤ 155.2m봉
준희선샌님 산패가 참나무에 매어 있다. 골프장을 우회한 지맥이 다시 지맥과 만나는 봉우리이다. 목령산에서 오창장미공원으로 여기까지 우회를 하는데 약 30분이 소요되는데 골프장을 통과해도 시간은 비슷하다. 골프장이 끝나는 지점에서 지맥은 청원구 오창읍 성산리와 양청리의 경계를 만난다.
♤ 205.3m봉
바랑산선배님 산패가 참나무에 매어 있고 계속하여 주민들의 등산로를 따른다. 지맥은 문화휴식공원 방향이다. 바랑산 목패를 보고 실소를 금하기 어려웠다. 산패에 써있는 바랑산님 닉네임을 보고서 누군가 산 이름을 바랑산으로 착각해 목패를 만들어 달아놓은 것이다.
더 가고 싶었지만 헤드랜턴이 깜박깜박 들왔다나갔다 말을 안 들어요. 이슬을 피할 수 있는 쉼터에서 비박을 하기로 하고 04시에 일어나 04:40분에 출발해 삽티고개 고속도로 갓길을 지났습니다. 손가락 사이 쐐기에 쏘인 부분에 통증이 심해 서너 시간 잠이 오지 않아 끙끙 앓았어요. 미칠것 같더라구요.
♤ 195m봉/ 이정표/ 삼리봉(청원구 오창읍 성산리, 양청리 → 구룡리)
장의자 두개가 설치되어 있는 삽티고개로 가는 갈림길 쉼터로 지맥은 우틀이다. 지맥의 왼쪽이 오창읍 양청리 → 구룡리로 바뀌는 지점이다.
♤ 154.2m봉
우틀하여 삽티고개로 내려서는 구간의 마지막 봉우리이다.
건너편 능선으로 이어가야 하는데 아래쪽 540번 지방도를 가로질르기가 쉽지 않고, 횡단보도까지는 약 1.2km를 돌아야 하네요. 하지만 고속도로 갓길로 60m만 진행하여 비계철계단으로 올라서면 간단합니다.
♤ 32번국도/ 아산-청주고속국도
고속도로 절개지 상단에서 직진으로 내려선다. 잡목능선을 직진으로 진행하다가 삽티고개 닿기 직전에 우틀하여 내려서서 32번도고속도로를 갓길로 진행한다.
♤ 삽티고개(105m)/ 540번도로/ 생태통로
낙석방지철망에 반바지운영자님 코팅지가 매어 있다. 충북 청원구 오창읍 성산리와 구룡리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샵티의 ‘샵’은 ‘사이를 의미’하는 뜻으로 사이에 있는 고개마루라는 뜻으로 보인다. 540번 도로와 아산~청주간 32번 고속도로가 교차하며 서오창 I.C가 있다. 지형이 상전벽해가 되었다. 육교처럼 보이는 아산~청주간 고속도로의 성산교가 지맥인데 한참을 우회해야 한다. 그래서 32번 고속도로 갓길을 따라 성산교를 건너고, 배수로 옆으로 절개지능선을 따라 오르거나 절개지에서 철계단을 따라 올라선다. 지맥의 오른쪽 청원구 오창읍 성산리 질푼이고개 버스정류장에서 오송역으로 탈출이 가능하다. 왼쪽으로 약 1.2km 걸어서 내려서면 청원고등학교버스정류장에서 청주북부터미널이 가깝다.
♤ 200.9m봉/ 청원구 오창읍 구룡리, 성산리 → 화산리
지맥은 200.9m봉을 왼쪽으로 살짝 비켜가며 직진으로 오르면 바랑산님 산패가 소나무에 매어 있다. 4번송전탑이 있는 200.9m봉에서 지맥의 오른쪽이 청원구 오창읍 성산리 → 화산리로 바뀌는 지점이다. 좌틀로 내려선다.
화산소류지로 능선이 뻗어 있는 갈림길에서 직진합니다.
♤ 청주시 청원구 오창읍 화산리(花山里)
화산리는 평야가 넓은 지역이며 북쪽에는 용두천이 흐르고 있으며 곳곳에 크고 작은 저수지가 있으며 남쪽에는 화산천이 흐른다. 자연마을에는 왜골(오야골)이 있다. 왜골은 화산리에서 으뜸되는 마을이며 전주 이씨가 집단으로 거주한다 하여 오얏골이라고 부르다가 그것이 변하여 왜골이란 이름이 된 것이다. 서쪽에는 그랜드골프장이 있으며 2014년 7월 1일 청원군과 청주시 통합 출범으로 청원군에서 청주시로 편입되었다.
삽티고개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 200.9m봉을 지나고, 5번송전철탑에서 오른 200.5m봉입니다.
♤ 비봉(200.5m)
5번송전탑에서 200.5m봉으로 오른다. 준희선생님 산패가 소나무에 높이 매어 있다. 초록색 그물망 울타리를 따라 능선에 오른 봉우리로 지맥은 급좌틀이다.
지맥이 청주시 청원구에서 흥덕구 내안으로 들어서는 지점입니다.
♤ 175m봉/ 구계/ 읍면계/ 사리봉(청원구 오창읍 화산리 → 흥덕구 옥산면 호죽리, 청원구 오창읍 구룡리 → 흥덕구 옥산면 남촌리)
지맥의 왼쪽이 청주시 청원구 오창읍 구룡리 →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남촌리로 바뀌고, 지맥의 오른쪽이 청원구 오창읍 화산리 →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호죽리로 바뀌는 지점이다. 지맥이 개발지로 토지 조성 중에 있어 훼손된 지맥을 따라간다.
♤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玉山面)
청주시 흥덕구 북부에 위치한 면으로 북동쪽으로 오창읍, 남동쪽으로 강서2동, 남서쪽으로 오송읍, 북서쪽으로 세종특별자치시 전동면, 충남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에 접해 있다. 수신면과는 오랫동안 길이 없었으나 2018년에 새로 개통되었다. 조선시대 청주목 서강외이면에 속했던 지역인 옥산은 면소재지인 오산리의 중심마을인 오미에서 유래된 지명으로 즉 지명에서 오미는 흔히 옥산이나 오산으로 표기되며 이때 욕이나 오는 오에 대한 음차 표기이고 산은 미에 대한 훈차 표기이다. 이곳에서 면 이름은 옥산면으로 표기되었고 법정 마을 이름은 오산리로 표기하고 있다. 가락리 일대 아파트 입주로 인해 청주시의 면 중 제일 인구가 많다. 또한, 음성군 대소면 다음으로 충북 내 면 중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면 2위를 차지하고 있다. 청주시 읍면 지역에서 잘 나가는 오창읍, 오송읍 사이에 위치한 면으로 두 읍의 배후지 같은 역할과 동시에 점점 개발 중에 있다. 불과 201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여타 다른 면 지역과 같이 시골 느낌이 나는 지역이었는데 현재는 가락리를 중심으로 각종 상권과 인프라가 구축되고 농수산물도매시장 이전과 이후 청주센트럴밸리까지 조성되면 청주의 4번째 읍 승격까지 가능성이 있는 가파른 성장세를 보이고 있는 지역이다. 타 지역과의 왕래하기 편리한 곳에 위치해 있다. 인근의 오창읍(오창과학단지, 청주북부터미널), 오송읍(오송생명과학단지, 오송역), 강내면(흥덕구청)은 물론이고 옥산면의 중심지인 오산리에서 차로 한 15분만 가면 바로 롯데아울렛, 현대백화점 충청점이 있는 복대동 대농지구(지웰시티)이다. 또한, 북쪽으로 가면 충남 천안시(병천면, 수신면)이다. 게다가 강내면과 더불어 오송역과 청주역을 이용하기 멀리 떨어져 있지 않고 적정한 위치에 있다.
♤ 173m봉/ 삼리봉(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호죽리 →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남촌리 → 소로리)
지맥의 왼쪽이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남촌리 → 소로리로 바뀌는 지점으로 마루금 왼쪽에 (주)리엔씨바이오 블루베리 농장이 있다. 준희선생님 '힘힘힘' 산패가 소나무에 매어 있다. 7번송전철탑으로 내려선다. 마루금이 뭉텅 잘린 절개지로 인해 진행이 어려워 공장 마당을 가로질러 능선으로 올라서는데 등로가 보이지 않아 산초나무, 아카시나무 등 가시잡목을 헤치고 올라서야 한다. 공장 뒤쪽 묘지로 올라서서 능선으로 붙는다.
♤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소로리(小魯里)
소로리는 본래 청주군 서강외이하면의 지역으로 조선조 세조가 보은군 속리산을 다니며 온양온천으로 가는 길에 이곳을 지나다가 글 읽는 소리가 많이 나는 것을 듣고 공자의 나라인 노나라와 비슷하다 하여 소노라 하였다고 한다. 1914년 행정구역통폐합으로 오창면 창리를 병합하여 소노리라 해서 옥산면에 편입되었다.
233.4m봉을 찍고 다시 돌아나와 상봉산으로 향하는 길에 야생 똘배를 만났습니다. 지나온 화산고개 불루베리농장이 보이네요.
♤ 233.4m봉/ 삼리봉(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소로리, 호죽리 → 국사리)
능선에 올라 녹색그물망 왼쪽으로 한동안 진행한다. 맥길에서 오른쪽으로 약 10m 벗어나 있으며 맨발대선배님 산패가 소나무에 매어 있다. 산패 알현 후 뒤돌아 나가야 한다. 지맥의 오른쪽이 흥덕구 옥산면 호죽리에서 국사리로 바뀌는 삼리봉 지점으로 지맥은 급좌틀로 내려서서 다시 우틀로 간다.
♤ 상봉산(上峰山, 193.4m)/ 리계(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국사리 - 소로리)
강감찬장군 묘소의 주산이 된다. 등로에서 왼쪽으로 조금 벗어나 있어 우회하기 쉽다. 준희선생님 산패가 소나무에 매어 있다. 상봉산 내림길에 왼쪽으로 옥산면 남촌리 들녁이 시야에 들어온다.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소로리에 있는 산으로 소로리에서 제일 높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옛 청원군에서 청주시로 편입된 지역이다. 오른쪽 송전철탑쪽으로 향한다.
국사리고개로 내려서는 지점에서 알바하는 경우가 있다는데 여기서부터 오른쪽으로, 묘가 나오면 또 오른쪽으로 복기를 합니다.
♤ 151m봉
지맥은 151m봉에서 국사리 내안으로 들어서며 국사리고개로 내려선다. 개가 짖는 거위, 칠면조사육장을 지나 밀양박씨 묘가 나오는 지점이다. 여름에는 칡넝쿨과 잡목이 빽빽해 정상적인 진행이 어려운 구간이다.
생태통로가 칡넝쿨에 산초나무, 찔레나무, 아카시나무로 지나기 어렵더군요. 전지가위를 꺼내 뻥 뚫었습니다.
♤ 국사리고개(22번도로)/ 오산가좌로/ 생태통로/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국사리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국사리와 금계리, 오창으로 이어지는 22번 군도가 지나며 고개 윗쪽으로는 생태통로가 있고 밀양박씨 종중묘가 있다. 국사로를 따라 왼쪽으로 나서면 국사1리경로당 건너편에 gs편의점이 있고, 조금 더 내려선 구암마을에 강감찬장군묘가 있다. 국사2리 경로당 앞에 느티나무와 팔각정이 있다.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국사리에 있는 구암마을은 동네 모양이 솥의 안처럼 생겼다고 한다고 해서 ‘솥저골’이라고 하기도 하고, 동네 뒤에 거북이 모양의 바위가 있어서 ‘구암’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 고려 문하시중 인헌공(仁憲公) 강감찬(姜邯贊, 948~1031)장군 묘/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국사리
진양(진주)강씨는 주나라 강태공의 후예로 고구려 병마도원수 강이식(姜以式, 597년 수나라 30만대군을 격파)을 시조로 한 오래된 씨족이고 인구는 130만명(2021년)으로 우리나라 6위이다. 박사공파, 소감공파, 관서대장군(시중공)파, 은열공파, 인헌공파가 오대파(五大派)인데 박사공파가 1백만 인구로 가장 많고 인헌공파에 강감찬이 있고 은열공파에 강감찬의 부장 강민첨이 있다. 고려 삼한벽상공신 강궁진(姜弓珍)은 인헌공파의 시조이고 금천(지금의 서울 관악구 금천)에 살았던 연유로 일부가 금천(衿川)강씨로 분성하였다. 강궁진의 아들이 강감찬으로 키가 작고 풍채는 볼 품 없었다고 하나 청렴하고 인품 좋고 전략가였다. 36세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60세부터 두각을 나타내고 70세에 귀주대첩을 거둔 뒤 식읍8백석을 받고 문하시중에 올라 84세에 졸(卒)하였다. 1018년, 거란의 소배압이 10만 대군을 지휘하며 남침하자 고려는 서북면 행영을 조성하고, 강감찬을 행영의 도통사로 삼았다. 이어 20만 대군을 소환하여 강감찬을 상원수로 임명하고, 지금의 군단장과 같은 직위를 맡겼다. 제3차 여요전쟁에서 상원수로서 고려군을 총지휘하여 귀주대첩에서 거란군을 전멸시켰다. 『고려사』는 강감찬을 가리켜 문곡성의 화신이라 했고, [용재총화]는 염정성의 화신이었다 전한다. 아마도 구전되는 설화를 바탕으로 한 것이라 내용상 차이가 생긴 것으로 보인다. 일화에 등장하는 문곡성은 북두칠성의 4번째 별로 문운(文運)을 주관한다. 반면에 북두칠성의 5번째 별인 염정성은 형살(刑殺)을 주관한다. 북두칠성은 일곱 별마다 도교적 색채의 이름이 있다. 국자의 맨 앞별에서부터 차례로 탐랑성∙거문성∙녹존성∙문곡성∙염정성∙무곡성∙파군성이라 한다. 강감찬이 과거에 장원급제한 문신이면서도 거란을 물리친 무장의 재능을 갖추었기 때문에 두 별이 등장한 듯싶다. 중국에서는 문곡성의 화신을 판관 포청천으로 봤다. 그 문곡성이 중국에서 고려로 건너온 셈이니 그가 바로 강감찬 장군이다. 강감찬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위치는 충북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국사리이다. 오늘날 강감찬의 묘가 있는 마을에는 발견 이전부터 유명한 장수의 무덤이 동네 산자락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전설이 구전되어 왔으며 그 무덤 주변 역시 영험한 장소로 여겨졌다고 한다. 금천 강씨 후손들은 이같은 구전 이야기를 바탕으로 1963년 일대 묘지를 수소문하던 끝에 '姜邯贊'(강감찬) 이름이 쓰여진 묘지석을 발견해서 강감찬 묘로 삼았다고 한다. 하지만 문화재 위원들이 지석이 너무 망실되어서 판독이 어렵다는 이유로 해당 무덤이 강감찬 묘라는 결론을 내리지 않았고 문화재 지정도 보류했다. 조선 왕조에서 관리받던 시기에는 분명 존재했을 분묘와 석물이 하나도 존재하지 않아 모두 1964년 이후 제작되었다. 강감찬의 진짜 묘가 아닐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으며 지자체에서도 문화재 지정은 하지 않았고 청원군에서 강감찬 묘에 지내는 제례 비용을 문중에 대주기만 하다가 2014년 청주시와 청원군이 통합이 되어서 현재는 청주시 흥덕구에서 향토유적 제104호로 관리하고 있다.
♤ 국사봉(國師峰, 172m)/ 육각정/ 리계(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국사리-가락리)
참나무에 맨발대선배님 산패가 높게 매어 있다. 국사봉 정상은 대단지 아파트 부근에 자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운동삼아 다니기에 넓은 공터에 많은 운동시설물과 쉼터가 조성되어 있다. 청주시 청원구 옥산면 국사리와 가락리 경계에 걸쳐 있는 산으로 인근에 국사일반산업단지가 조성중이며 주변에 강감찬묘소와 사당인 충현사가 자리하고 있다. 조선 태조가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도성의 수호신사(守護神祠)로 지은 사당인 국사당(國師堂)이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으로 이곳 국사봉은 고려시대 명장 강감찬 장군의 묘소가 있고, 서쪽에 몽단이 고개와 분고개가 있으며, 산아래 마을 지명으로 국사리가 있다. 국사봉에서 우틀로 내려서고 135m봉에서 좌틀하여 내려서서 고속도로 암거가 있는 곳으로 간다. 이 봉을 지나 계속 오른쪽으로 직진하여 고속도로를 건너는 방법도 있다. 청주에는 세 곳의 국사봉이 존재한다. 낭성의 국사봉(國師峰, 586m), 남일의 가산리 국사봉(國師峰, 291.8m), 옥산의 국사리 국사봉(國仕峰, 172m)이다. 앞의 두 곳은 '스승 사(師)'자를 쓰는 국사봉이라면 그 봉우리의 정기를 받아 지혜로운 인물이 났다 하여 붙인 것인데 '선비 사(士)'자의 국사봉과도 통한다. 다음으로 많이 쓰는 것은 '역사 사(史) 자의 국사봉으로 주로 국태민안을 비는 제사를 지냈던 곳들이다. 청주 흥덕구 옥산면의 국사봉은 이와 달리 '벼슬 사(仕)'자를 사용한다.
♤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가락리(佳樂里)
마을 너머로 경부고속도로가 지나가고 오른쪽 아래에 경부고속도로 옥산휴게소가 있다. 가락리는 본래 청주군 북강외이하면의 지역으로서 풍수지리적으로 지형을 보면 국사봉 밑의 지형이 옥녀직호금형을 이룬다고 하며, 붓당골이 베틀의 ‘북’에 해당되고, 다비골이 베틀의 바디에 해당되고, 현재의 가락리가 베틀의 실 뽑는 가락에 해당되고, 부모산은 베틀의 도투마리에 해당된다고 한다. 이처럼 지형이 가락처럼 생겼다고 해서 가락리라고 하고 또는 희락리라고 부른다. 1914년 행정구역통폐합에 따라 옥산리, 방죽리, 남산리를 병합하여 가락리로 옥산면에 편입되었다.
선배님들의 띠지기 잔뜩 걸린 곳에서 좌틀입니다. 고속도로에 바짝 다가가 왼쪽으로 능선을 끝까지 따라갑니다.
♤ 경부고속국도/ 몽단이고개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과 청원구 오창읍을 잇는고개로 507번지방도와 696번지방도가 중첩되는 구간이다. 병자호란 때 의병장 박동명과 관련한 전설이 전해지는 곳이다. 왼쪽으로 경부고속도로 암거를 통과하여 507번 도로를 따라 오른쪽으로 이동하여 몽단이 고갯마루 전에 수로가 있고 수로를 지나 왼쪽 산으로 올라 지맥을 이어간다.
♤ 몽단이재(접지골, 65m)/ 장남령/ 매은당(梅隱堂) 박동명(朴東命)장군 의마지총 유래비/ (梅隱堂義馬塚碑)
인조 14년 1636년 병자호란 당시 매은당 박동명장군이 목사로 재직 중 의병들을 모아 광주 견무계에 이르러 청나라 군사와 전투에서 화살을 맞고 전사하자 말이 장군의 저고리를 물어뜯어 왔을 뿐 아니라, 의관장(시신을 찾지 못하여 의관으로 대신 장례함)으로 진혼제를 지내자 의마는 발굽이 땅에 붙어 칠일 간 아무것도 먹지 않아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전설에 따르면 박동명장군의 혼백이 고향으로 돌아오던 중 끊어진 곳이라고 하여 몽단이고개(夢斷嶺)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장군의 충직한 애마의 장례를 치뤄주고 무덤을 만들고 의마총(말무덤)을 만들어 넋을 찬양한다고 한다. 현재도 인근에 순천 박씨의 집성촌이 있다.
♤ 매은당(梅隱堂) 박동명(朴東命)장군
박동명장군(미상∼1636년)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시응(時應), 호는 매은당(梅隱堂), 춘무(春茂)의 아들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버지가 충청도에서 조헌(趙憲)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적을 공격하였는데, 아버지를 따라 참전하여 언제나 선봉으로 나서 많은 전공을 세웠다. 전란이 평정된 뒤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태안군수·제주목사 등을 역임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왕을 호종(扈從)하였으며, 청나라 군사의 공격을 받아 형세가 위급해지자 위험을 무릅쓰고 분전하다가 장렬하게 죽었다. 나라에서 충용(忠勇)을 가상히 여겨 고향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게 하고, 공조판서에 증직되었다. 시호는 충경(忠景)이다.
♤ 석산(132m)
정상 넘어에 서산송공 통덕랑 합장묘가 있고 봉우리 너머는 급경사의 절개지이다. 아래로는 옥산레미콘 채석장과 병천천의 환희교가 내려다 보이며, 오른쪽 멀리 옥산면과 세종시 경계에 동림산(東林山, 458m)이 바라보인다. 동림산은 고려 명장 강감찬 장군이 노년에 은거했던 곳으로 전해지고, 무문골에서 부적으로 모기를 쫒아냈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능선에서 분고개까지는 오른쪽이 절개지라 9부능선으로 길이 이어집니다.
♤ 119m봉
507번 도로에서 7분여 잡목을 헤치고 능선에 올라 지맥에 접속하여 올라선 봉우리로 지맥은 좌틀한다.
♤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환희리(歡喜里)
환희리는 옥산면의 남서부에 위치하며 동은 덕촌리, 서는 강외면 공북리, 남은 강외면 호계리, 북은 동림리에 접한 농촌 마을이다. 환희리는 본래 청주군 서강외이하구의 지역으로 하누재산 밑이 되므로 ‘하누재’ 또는 ‘환희’라고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천내리와 동포리 일부를 병합하여 환희리라 하여 옥산면에 편입되 었다. 1975년 7월자로 1, 2리로 분구되었다. 현재는 3구까지 분구되었다. 안동권씨가 환희2구에 약 30%정도 살고 있다. 마을에 이주한 연유는 확실하게 모르나 약 400년전쯤 안동권씨 23세 도사공 어른이 피난을 와서 마을을 세웠다고 한다. 마을 끝에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가장 높은 곳에 백록 서원이 자리하고 있다. 백록 서원은 1710년(숙종 36)에 권상(1508~1589)의 위패를 봉안하기 위해 세운 안동 권씨의 서원이다.
119m봉에서 130m봉으로 가며 왼쪽으로 밭 아래에 오산리 모래실 마을에서 올라온 인가가 한채 보입니다. 여기 지날 때도 전지가위를 꺼내 길을 다듬었습니다.
♤ 130m봉/ 삼리봉(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국사리 → 환희리, 오산리)
국사리를 지나온 지맥이 환희리와 오산리와 만나는 삼리봉으로 지맥은 좌틀하여 환희리와 오산리의 경계를 따른다.
♤ 분고개(45m, 2차선도로)/ 국사오산로/ 일정가든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오산리와 죽청리를 잇는 고개로서, 가락리와 덕촌리의 경계에 있으며 596번 지방도가 지난다. 과거에 채씨와 윤씨가 산송을 벌였는데 채씨가 져서 분이 턱까지 올랐다는 전설에서 유래된 지명이라고 한다. 그러나 전국에 분고개라는 고개 이름이 몇 군데 확인이 되는데 토기를 만드는 분토가 나는 고개 등으로 질그릇을 만드는 사기막이 있던 곳에 쓰이고 있다. 공장 뒤쪽이 지맥길인데 길이 막혀 공장 옆으로 간다. (주)에스.엠.이 회사앞에서 오른쪽으로 약 1분쯤 걸으면 만나는 일정가든 간판 왼쪽의 오산리 마을 도로를 따라 배수지로 오른다.
♤ 옥산배수지/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오산리
좌우로 진행이 가능한데 오른쪽으로 오르는게 편하다.
♤ 한양바위/ 삼리경계면(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환희리, 오산리 → 덕촌리)
한양바위를 지나 정상 가기 직전이 지맥의 왼쪽이 흥덕구 옥산면 환희리 → 덕촌리로 바뀌는 삼리경계면이다. 한양으로 과거보러 가신 남편이 돌아올 날짜가 지났어도 오지 않아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바람이 불어도 날마다 응봉산 이곳에 올라 한양쪽을 바라보다가 기다림에 지쳐 까맣게 타버린 마음은 재가 되고 선 채로 돌로 굳어 버렸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지나온 석산과 굽이져 흐르는 병천천 옆으로 환희리 마을이 조성되어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 응봉산(鷹峰山, 175.4m)/ 2등삼각점(청주 24/ )/ 팔각정(응봉정), 전망데크/ 삼리봉(흥덕구 옥산면 덕촌리, 환희리 → 신촌리)
넓다란 전망데크에서 바라보는 미호강 건너편 경부고속도 옥산휴게소 방향이고 그 오른쪽으로 오송역이 있다. 2등삼각점이 있는 팔각정에 올라 미호강과 병천천의 합수점도 바라본다. 팔각정 옆 느티나무에 준희선생님 산패가 있는데 한쪽만 매달려 있다. 매가 날개를 펴고 앉아있는 듯하여 응봉산이라 부르는데 응봉산은 험준한 바위산이 아니기에 이 산의 정기를 받고 태어난 사람들은 대체로 심성이 온유하다고 한다. 산 앞들에 미호강과 뒷들에 천수천이 옥산을 품에 안고 흘러가는 모양은 안동의 하회마을과 형제간 같아 보인다고 하며, 조선 초기 무학대사가 도읍지가 될만한 땅을 찾다가 이곳을 살펴보고는 이 산의 정기를 받고서 덕을 갖춘 인물이 많이 나 덕으로 빛날 마을이라 하여 남쪽 산아래 마을 이름을 덕광촌이라고 근 육백년간 불려왔으며 이와 같이 신령스럽고 주옥같이 귀한 산이 있기에 옥산(玉山)이란 지명을 얻었을 것이라고 한다. 어쩌면 옥산면의 덕촌, 신촌, 오산리를 나쁜 기운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지켜주는 수호조(守護鳥)같다고 소개한다. 지맥은 팔각정에서 되돌아 내려가 전망데크 오른쪽으로 향한다.
응봉산에서 내려서서 광단말도로에서 큰새말까지 공장지대 뒤편으로 등로를 따르기도 하고, 도로를 따라 우회하기도 합니다.
♤ 덕촌고개/ 1차선도로/ 광단말도로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덕촌리 군졸마을과 지월마을로 이어지는 도로이다. 덕촌리는 본래 청주군 서강외이하면의 지역으로 큰 절이 있었으므로 덕절 또는 덕촌이라 하였다고 한다. 또 무학대사가 지나다가 보니 동네가 응봉산을 주산으로 좌우로 산세가 뻗어 있고 앞은 부모산을 안산으로 자리잡은 동네로 조선의 도읍지로 정하려 했으며, 덕과 빛이 많은 인재가 배출될 동네라 하여 덕광촌이라고 하였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자연마을에는 반곡, 보촌, 광단말, 광촌, 서촌, 괴동, 신기, 지월, 삼성골, 팔모종, 미평이 있다.
공장 안으로 들어서면 안되고 우회해야 합니다. 우회해서 오른쪽 묘지가 있는 곳에서 밭으로 내려서서 마을길로 들어서서 올라왔습니다.
♤ 큰새말도로/ 신촌1길
지맥이 신촌길에서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신촌리 내안으로 들어서서 안새말과 큰새말을 지난다. 덕촌리 큰새말은 신촌에서 가장 큰 동네라는 뜻에서 지어진 이름이다.
넓따란 임도는 직진으로 가고 왼쪽 봉우리에 선답자 띠지가 보입니다.
♤ 63m봉
만뢰지맥의 마지막 봉우리이다. 오른쪽으로 병천천이 보이고 좌틀하여 공장옆 울타리를 따라 내려선다. 담벼락 아래 호박 비닐하우스로 내려서고 양회임도를 따라서 병천천 제방길로 향한다. 이후로 합수점까지는 오른쪽으로 병천천을 바라보며 제방길을 따라 약 2.8km를 더 가야 한다.
♤ 큰새말/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신촌리마을
산길에서 붉은색의 축대와 비닐하우스 사이를 지나 내려오면 신촌리 마을도로에 닿고, 도로에 내려서면 오른쪽으로 보이는 병천천 하천둑 위를 걸어 신촌교 아래를 지나고, 왼쪽 차도를 따른다.
♤ 쌍청삼거리/ 신촌교
청주시 흥덕구 오송읍에 있는 쌍청리(雙淸里)는 마을로 엄나무 두 그루가 서 있어 엄나무정이(雙淸)이라 하였다. 쌍청천이 흐르며 자연마을로는 당감산, 들판, 봉도리, 새터가 있다. 당감산은 쌍청리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옛날에 성으로 통하는 길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들판은 봉도리 앞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새터는 쌍청리 서쪽에 새로 된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앞에 쌍청교가 보이고 오른쪽 건너편으로 오송읍 빌딩군들이 보인다.
♤ 쌍청교/ 쌍청 2리 정류장
쌍청교 남단까지 가서 직진하여 병천천 하천 둑길을 따라 병천천과 미호강이 합수되는 지점을 향한다. 상청교 직전에서 지맥이 흥덕구 옥산면 신촌리 → 오송읍 쌍청리로 진입한다.
♤ 병천천/ 미호강 합수점/ 삼리경계면(청주시 흥덕구 오송읍 쌍청리, 궁평리-강내면 석화리)
병천천 위를 지나는 신설 508도로를 지나 조금 더 가면 병천천과 미호강이 만나는 합수점이다. 미호강교로 충북선 철도가 지난다. 쌍청리로 다시 돌아나올 수 있고, 오송역으로 가기 위해 자전거 다리로 병천천을 건너 궁평 3리 경로당을 지나 버스정류장(36번 국도)으로 나가도 된다. 2023년 장마에 궁평지하차도에 물이 차서 인명피해가 많이 난 그 지역이다.
♤ 병천천(竝川川)
병천천은 천안시 동남구 북면 대평리에서 발원하여 청주시 흥덕구 강내면 석화리와 강외면 궁평리 경계에서 미호강에 합류하는 하천으로 금강의 제1 지류 미호강의 지류 하천으로서 유역 면적은 366.63㎢이며, 하천 연장은 47.30㎞, 유로 연장은 46.75㎞이다. ‘병천(並川)’이라는 이름은 하천법상 명칭이 아니지만, 잣밭내=백전천(栢田川)과 치랏내=칡밝내, 갈전천(葛田川)의 두 물이 이곳에서 합하여 어우러지므로 아오내, 어우내, 혹은 줄여서 아내라고 부른 데서 비롯되었으며, 북천(北川)과 동천(東川)이 합류하기 때문에 유래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이는 북쪽에서 흘러내리는 병천천 본류와 동쪽에서 흘러드는 도원리의 광기천을 뜻하는 것 같다. 두 내가 나란히 남류하다가 병천면 탑원리에서 하나로 합해지기 때문이다. 병천천을 구계(九溪)라 부른다고도 하였는데, 이는 ‘아홉내’가 변하여 ‘아오내’로 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옛 목천 고을의 아홉 내가 병천천으로 합해지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병천’의 ‘병(並, 竝)’은 물이 합해지는 곳에 붙는 이름으로서, 교(交) 또는 합(合)의 의미를 지녔다. 하천 합류 지점 곳곳에는 이외에도 어을(於乙), 기(岐), 양(兩) 등이 붙여지는 예가 많다. 또한 하천 명칭에 병천천, 대천천, 승천천, 등 천(川) 자가 중복 표기되는 경우가 많이 나오고 있다. 이는 원래의 내(川) 이름이 병천천처럼 행정구역 명칭으로 사용됨에 따라 하천 명칭과의 혼란을 방지하기 위하여 다시 천 자를 붙이기 때문이다.
♤ 미호강(美湖江)
총 길이 89.2㎞에 이르는 금강 지류다. 유역면적 1,860.9㎢로 미호강은 『동국여지승람』에는 동진(東津)은 그 근원이 셋이니 "하나는 진천 두타산이오, 하나는 청주 적현이며, 하나는 전의에서 나오는데 남으로 흘러 공주의 금강으로 들어간다"고 기록돼 있으며, 1872년 연기현 지도는 미호강을 동진강으로 표기하고 있다. 조선 후기에 발간된 『해동역사』 속집 제14권 지리고의 기록을 보면 '동진강은 망이산으로 부터 나와 남쪽으로 흘러 진천현의 남쪽을 지나고 또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연기현의 남쪽에 이르러 금강으로 들어간다'고 기록돼 있다. 19세기에 간행된 청주읍지에서 '작천은 고을의 북쪽 20리에 있다 각각 물줄기의 맥은 진천, 청안, 괴산, 회인의 경계에서 나와 작천에 합류한다. 상류는 오근진이 되고 하류는 진목탄이 돼 연기 경계인 동진에 닿는다'고 돼있다. 이처럼 부용산과 충북 음성 망이산성 옹달샘에서 발원해 진천·증평·청주시 및 세종특별자치시를 거쳐 남서류하면서 모두 지방하천이나 소하천인 백곡천(柏谷川)·보광천(寶光川)·무심천(無心川)·천수천(天水川)·조천(鳥川) 등 지류를 합치고 부강(芙江) 서쪽인 세종시 합강리에서 금강에 합류한다. 상류부의 진천과 음성 서부지역에 진천평야(진천분지)를, 중·하류부에는 조치원을 중심으로 부강·청주·증평 일대에 걸친 광대한 미호평야(일명 청주분지)를 형성한다. 1981년 미호강지구 대단위농업종합개발사업이 완성되었고 미호강 대단위농업종합개발사업 확장공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 사업이 완료되면 대청댐의 물을 이용하여 금강 상류부인 미호강과 그 지류인 무심천·보광천 주변에 발달된 구릉지일대를 개발하여 관개·배수 개선과 개간·개답을 비롯하여 경지정리 등을 시행하여 대청댐의 농업용수 이용을 극대화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 지역은 충청북도 최대의 농업지역으로 미곡 생산은 물론, 하천을 따라서 낙농업과 양잠업이 발달되어 있다.
♤ 일제 잔재 미호천의 진짜 이름은
☞ http://www.jb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314781
일제 잔재 '미호천'의 진짜 이름은…
[중부매일 이지효 기자] 운초문화재단(이사장 류귀현)은 창립 5주년 기념사업으로 까치내문화예술회와 일제 강점기에 강등돼 불려진 미호천의 명칭을 복원하고 강......
www.jbnews.com
♤ 충북 국가하천 ‘미호천’, 108년만에 ‘미호강’으로 명칭 변경
☞ http://www.atlas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5321

첫댓글 비가그쳐다행이다싶었는데찬이슬에애를먹었군요. 지칠줄모르는열정과지식에감탄과감사드립니다.
작은도움이되었다니영광이구요 남은지맥무사완주기원합니다. 수고하셨읍니다.
네~ 태진선배님, 추석명절 잘 보내셨죠?
그나마 많이 내리지 않고 잦아드는 비라 다행이었습니다.
고속도로가 밀려 30분이나 정체가 되었네요.
전번 운영자모임에서 방장님이 진천에 사시는 태진선배님 말씀을 하시던데, 퍼뜩 생각이 떠올라 연락드렸습니다.^^
흔쾌히 엽돈재에 올려주셔서 그나마 밝을 때 출발이 가능했답니다. 감사드립니다.^^
긴시간 수고 하셨습니다ᆢ 오랜 저편의 기억들이 새록새록합니다
만뢰지맥에는 상배성님 띠지가 많이 보이지 않더군요..
모래재, 장교현에 내려서서 공장에 들어가 음료수 두병을 얻어, 한병은 마시고 한병은 장착했습니다.
산에 가면 꼭 하나씩 떨어뜨리고 오게 되네요.
이번엔 열개 정도의 띠지 묶음을 후반부 어디에서 떨어뜨렸어요.
밤나무 쐐기에 손가락 사이를 쏘여 엄청 고통스러웠습니다. ㅋㅋ 감사합니다.^^
비와서 고생했네
글쎄 하지만 요날 가지 않으면 안되겠더라고...
오늘 또 비가 오는데... 결과적으로 잘 다녀왔어
산에서 두밤 자고 진행하니깐 피로가 훨씬 덜하네 무릎에 부담도 안가고...
첫날은 날씨고 꿀꿀하고 비도 내린것 같네요
이슬이 있고 물기가 있으면 진행하기는 힘들고 하지요
그래도 마지막 날은 날씨고 좋아서 다행이었네요
홀산으로 최대한 경비도 줄이고 한번에 마치는 지맥도 괜찮은 방법인것 같습니다
이렇게 할려면 많은 노력과 고생도 따르겠지요
비올때 등산화 방수카바가 아주 좋은것 같네요
저는 아직 착용해서 산행해 본적이 없네요
담에 한번 시도 해볼까 합니다
늘 안산 즐산 하시고 아프지 마시고 건강하게 살아갑시다
수고 많이 하셨고 만뢰지맥 완주 축하 축하 드립니다^)^
와룡산선배님!
여름 장마가 무색합니다. 여름에도 이만큼 비가 내리지 않았네요.
어찌된 일일까요. 단풍이라도 좀 고울지.. 좋은 쪽으로 생각을 옮겨봅니다.
잦은 비 예보로 추석연휴에 만뢰지맥 계획을 세워두고 갈팡질팡 하였습니다.
첫날 만뢰정에 올라 비박을 친게 그나마 만뢰지맥을 수월하게 하는 한 수가 되었고요.
오후 3시반에 출발하여 두시간 반은 전경을 바라볼 기대도 하였지만
만뢰산 전후로 경치를 모두 포기하는 상황이 되어 아쉬운 마음 가득합니다.
만뢰지맥에 가시가 많아 여름에 기피하는 지맥으로 분류되는데
가시 지역은 계산 3길 이후 공장지대에서 도하 3길까지 단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국사리고개로 내려서는 곳에 칡넝쿨 등 잡목지가 약간 있고...
전지가위만 지참한다면 그다지 어려운 지맥으로 분류한다는게 억울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가장 어려웠던 점은 오룩스에 지도가 나타나지 않아 방향만 감지하고 진행해야 했던 점입니다.
사전에 충분히 공부를 하지 않았더라면 만뢰지맥 완주는 장님 문고리잡기가 되지 않았을까요..
완주 축하에 감사드립니다.^^
퐁라라운영자님의 2박3일에 걸친 만뢰지맥 졸업을 축하드립니다.
아무튼 대단하십니다!
무거운 박배낭메고 비박하는 모습도 상상하면서
음성의 태진님도 반갑게 만나 수고해 주셨네요.
말씀처럼 만뢰지맥은 삼국시대의 요지로 역사적인 명인들과의 연이 닿은 곳인 듯 합니다.
생거진천, 사거용인을 한번쯤 새겨볼 수 있구요.
미호강/병천천 합수점의 뭉게구름이 조화를 이루는 형상입니다.
수고많으셨습니다.
네, 방장님!
한강 뚝섬 인공암벽에서 10시에 운동 시작했어요.
태진선배님은 낙동하시다가 주왕산 왕거암에서 하산해
택시를 기다리며 저체온증을 심하게 겪어 그 뒤로 정맥을 그만두시고 동네 산악회에서 활동하신데요.
박배낭은 가능하면 10Kg을 넘지 않으려 합니다. 이번엔 8Kg 되지않았을까 싶어요.
덕고개 양계장을 넘어가다 어디에서 배낭커버도 잃어버렸어요.
마지막 걸어서 오송역으로 간것도 큰 성과 중에 하납니다.^^ㅋ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