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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 2025. 12. 27.~28.(주말) - 음력(11. 8.~9.), 일출 07:33~일몰 17:19
●산행지: 청룡지맥(靑龍枝脈) 1구간(1박2일) 졸업
●산행코스: 유가사-청룡지맥분기점(1,038m)-비슬산/천왕봉(1,083.4m)-1,051.9m봉-도성암갈림길-802.4m봉-844.9m봉-876.0m봉-703.4m봉-계령(692.3m)-닭지만당산(687.5m)-골재-677.2m봉-638.8m봉-장단이재-597.1m봉-작봉(673.2m)/삼필봉(465.2m)분기봉-수밭고개-배바위(666.3m)-청룡산(793.6m)-752.3m봉-593.4m봉-달비고개-산성산(653.4m)왕복-월배산(596m)-월백산(595m)/앞산(658.7m)분기점-552.5m봉-470.8m봉-352.9m봉-봉덕교/앞산순환도로-영남대병원역-안동고개-심인중고-파도고개-두류산(125.6m)-반고개-대구내서초-남평로사거리-중리네거리-서대구공단네거리-세방지하차도/중부내륙고속도로-계성고-126.9m봉-상리봉(255.3m)-294.2m봉-와룡산(299.7m)-186.0m봉-190.6m봉-150.5m봉-신당고개-궁산(250.9m)-157.2m봉-114.3m봉-금호강/ 강창교-낙동강/ 금호강 합수점
●먹거리: 생수1리터, 제로콜라, 제과빵2, 다이제스트3, 에너지바2, 사탕10
●준비물: 바람막이, 고아텍스, 윈드스토퍼, 보온의류, 스페츠, 스틱, 헤드랜턴, 충전지2, 충전짹, 손수건, 휴지, 물티슈, 장갑, 안대, 귀마개, 칫솔, 양말, 띠지20
●거리: 약 50.7Km
●소요시간: 29.48h
●누구랑: 나홀로
●경비: 고속버스36,200원, 만화방5,000원, 돼지국밥9,000원, 택시18,700원, 찜질방13,000원, 편의점9,500원, 뒤풀이44,000원, 고속버스30,200원
●날씨: -6~8,, 원경이 약간 흐리지만 건강한 날씨..
●산행경과: - 12. 27.(토) : 29.3km
- 06:42 : 유가사 출발
- 08:09~22 : 비슬산 천왕봉(1,083.4m)
- 08:14 : 청룡지맥분기점(1,038m)
- 08:50 : 이곡고개
- 09:22 : 정대봉(876.0m)/ 닭지말랭이
- 09:57 : 용연사 삼거리
- 10:04 : 닭지만당산(687.5m)
- 10:16 : 골재
- 10:42 : 638.8m봉
- 11:16 : 장단이재
- 11:30 : 삼필봉갈림봉(673.2m)
- 11:45 : 수밭고개
- 12:07 : 666.3m봉
- 12:20 : 배바위
- 12:30 : 청룡산(794.1m)
- 12:48 : 상여바위(752.8m)
- 13:25 : 593.4m봉
- 13:30 : 느티나무약수터
- 13:39 : 달비고개
- 14:00 : 산성산(653.4m)
- 14:14 : 산성산삼거리
- 14:21~15:05 : 앞산 갈림길
- 14:42~51 : 앞산(657.9m)/ 성불산
- 15:15 : 555.2m봉
- 15:27 : 470.8m봉
- 15:40 : 352.9m봉
- 16:03 : 앞산순환도로/ 봉덕교 도착
- 20:30 : 봉덕교 출발
- 21:07 : 대구남부경찰서
- 21:37 : 성당시장네거리(양지로-성당로-파도고개로)/ 휴요양병원
- 22:00 : 반고개 도착
* 12. 28.(일) : 21.4km
- 06:38 : 반고개(달구벌대로) 출발
- 06:58 : 남평리 네거리(서대구로-평리로)
- 07:20 : 중리 네거리(국채보상로-당산로)
- 07:38 : 중부내륙고속도로/ 세방지하차도
- 08:30~09:14 : 용미봉 갈림길
- 08:53 : 용미봉(255m)
- 09:18 : 상리봉
- 09:31 : 294.1m봉
- 09:37 : 와룡산(299.7m)
- 09:39~10:30 : 용두봉 갈림길
- 10:03 : 용두봉(262.5m)
- 10:55 : 150.5m봉
- 11:07 : 신당고개(달서대로)
- 11:33 : 궁산(250.4m)
- 11:56 : 157.2m봉
- 12:14 : 이락서당
- 12:16 : 금호강/ 강창교(달구벌대로)
- 12:37 : 합수점/ 금호강-낙동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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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룡지맥(靑龍枝脈)이란...?
청룡지맥은 낙동정맥 사룡산분기점에서 나누어진 비슬지맥이 비슬산(1083m) 정상 직전 400m지점인 동남쪽 어께에서 북쪽으로 분기하여 비슬산(천왕봉, 1083.6m), 청룡산(靑龍山, 792.9m), 산성산(653.4m)을 지나 대구 시내를 가로지르며 두류산(129.4m), 와룡산(299.7m), 궁산(252.6m)을 지나 대구 달서구 파호동 강창교앞 금호강에서 그 맥을 다하는 도상거리 34.7km 되는 산줄기인데, 금호강의 우측 분수령이 된다. 강창교에서 1.7km 정도 제방뚝을 따라 내려가면 금호강과 낙동강에 합수되고, 합수점이 맞은편에는 팔공지맥의 기산에서 온 황학지맥이 끝나는 부근에 4대강 사업의 대표적 상징물인 강정고령보와 디 아크가 위치해 있다.
♤ 청룡지맥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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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룡지맥을 지나는 동네
* 청도군(淸道郡)
경북 최남단에 있는 군. 동쪽으로는 경주시와 인접하고 서쪽으로는 대구광역시와 접하며 남쪽으로는 밀양시와 도계를 이루고 있다. 북쪽으로는 경산시와 맞닿아있다. 주산업은 농업이며, 예로부터 '청도반시'로 알려진 감의 주산지이다. 청도소싸움축제가 청도군을 대표하는 문화행사로 매년 전국규모로 이루어진다. 행정구역은 화양읍·청도읍·각남면·풍각면·각북면·이서면·운문면·금천면·매전면 등 2개읍 7개면 127개리가 있다(법정리 기준, 행정리 기준 212개리). 군청소재지는 경상북도 청도군 화양읍 청화로 70이다. 일찍부터 인간의 거주가 시작되어 삼한시대에 우유국이 있었던 것으로 비정되기도 하나 확실하지 않다. 삼국시대 초기에는 이서국이 있었으나 신라의 세력이 커짐에 따라 멸망하고 신라는 이곳에 솔이산성·오도산성·경산성을 설치했다. 통일신라시대인 757년(경덕왕 16)에 3성을 각각 소산현·오악현·형산현으로 개칭하고 밀성군(밀양)의 영현을 삼았다. 고려초에 이들 3현을 합하여 청도군을 설치했다. 1018년(현종 9)에 밀성군의 속군이 되었다가 1109년(예종 4)에 감무를 파견함으로써 독립했으며, 충혜왕대에 이 고을 사람 김선장(金善莊)의 공로로 청도군이 되었다가 곧 다시 감무가 파견되었다. 1366년(공민왕 15)에 다시 지군사가 파견되는 군으로 승격되었다. 조선시대에도 청도군을 유지했으며, 별호는 오산·도주였다. 지방제도 개정으로 1895년에 대구부 청도군, 1896년에 경상북도 청도군이 되었다. 1906년 월경지 정리로 대구의 두입지인 각북면·각현내면·각초동면·각이동면, 밀양의 비입지인 고미면이 청도에 편입됨으로써 면적이 크게 넓어졌다. 1914년 군면 폐합 때 각북면·금천면은 그대로, 상읍면·차읍면이 화양면으로, 현내면·이동면이 풍각면으로, 내남면·초동면이 각남면으로, 상북면·차북면이 이서면으로, 용산면·하남면이 대성면으로, 중남면·상남면·내서면·초동면이 매전면으로, 동상면·일위면이 종도면으로, 이위면·고미면이 운문면으로 폐합되었다. 1940년에 대성면이 청도면으로 개칭되었다가, 1949년에 청도읍으로 승격되었으며, 이 해에 종도면을 폐지하고 매전면과 금천면에 나누어 속하게 했다. 1979년에 청도군청이 화양면으로 이전하면서 화양면이 화양읍으로 승격되었다. 낙동정맥의 비슬지맥이 뻗어내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를 이루고 있다. 군의 남동쪽에 가지산(1,240m)·운문산(1,188m)·문복산(1,014m)·억산(944m), 서쪽에 수봉산(593m), 남쪽에 화악산(932m)·남산(860m), 북쪽에 선의산(756m)·용각산(693m) 등이 솟아 있다. 군의 서쪽 및 서북쪽 산지에서 발원하는 풍각천·각북천 등이 합류하여 청도천을 이루어 동쪽으로 흐르다가 화양읍을 지나 남류한다. 밀양강의 본류를 이루는 동창천은 무적천 등을 합류하면서 군의 동쪽을 남서류하며, 청도읍 남부에서 청도천이 합류한다. 이들 하천유역을 따라 형성되어 있는 충적지는 농경지로 이용된다. 군내에는 국가지정문화재(보물 18, 천연기념물 6, 중요민속자료 2), 지방지정문화재(유형문화재 19, 무형문화재 2, 기념물 9, 민속자료 6, 무형문화재 2), 문화재자료 9점, 등록문화재 2점이 있다. 선사시대의 유물·유적으로는 화양읍 동천리의 지석묘, 각남면 화리의 지석묘와 석관묘 등을 비롯하여 군내의 도처에서 발견되고 있다. 산성으로는 화양읍의 청도읍성·폐성·백곡토성, 청도읍의 오례산성·철마산성, 운문면의 호거산성 등이 있다. [통합포탈에서 발췌정리]
* 대구광역시(大邱廣域市)
삼국시대에 신라의 위화군(喟火郡)과 달구화현(達句火縣:또는 達句伐)이었다. 757년(경덕왕 16)에 위화군을 수창군(壽昌郡)으로, 달구화현을 대구현(大口縣)으로 개칭하여 양주(良州:양산) 관하에 두었다. 이때 수창군은 대구현·하빈현(河濱縣)·팔리현(八里縣)·화원현(花園縣)을 영현으로 관할했다. 고려시대에 들어와 940년 수창군은 수성군(壽城郡)으로 이름을 바꾸고 1018년(현종 9)에 경주에 속했다가 1390년 감무를 둠으로써 독립했다. 대구현은 1018년 경산부(京山府:성주)의 속현이 되었으나 1143년(인종 21) 현령을 둠으로써 그 지위가 상승하기 시작했다. 조선초 1394년(태조 3)에는 대구현이 수성현과 해안현(解顔縣)을 관할하게 되었으며 1419년(세종 1)에 군으로, 1466년에 도호부로 승격했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대구의 군사적·지리적 중요성이 인정되어 1601년(선조 34) 경상도 관찰사영이 설치됨으로써 경상도의 중심지로 자리잡았다. 현종 때에는 풍각현(豊角縣)을, 숙종 때에는 화원현을 다시 합병하여 면적을 확대함은 물론 교통의 요지를 확보했다. 별호는 달성이었다. 지방제도 개정으로 1895년에 대구부 대구군, 1896년에 경상북도 대구군이 되었다. 1906년 월경지 정리에 의해 두입지인 각북면·각현내면·각초동면·각이동면이 청도군으로 이관되었다. 1911년 동상면과 서상면을 합하여 대구면을 신설했다. 1914년 군면 폐합 때 시가지 부분인 대구면은 대구부가 설치되어 독립되고, 옛 대구부의 30개면이 12개면으로, 현풍군의 15개면이 4개면으로 통합되어 달성군이 되었다. 대구의 성장에 따라 1938년에 달성군의 수성면 일원과 성북면·달성면 일부가 대구부로 편입되었으며, 1949년에 대구시로 개칭되었다. 1958년에 달성군의 동촌·공산·성서·월배·가창의 5개면이 대구에 편입되었다가 1963년 동촌면을 제외한 4개면이 다시 달성군에 환속되었다. 1962년에 구제가 실시되고 1980년에 수성구가 신설되었다. 1981년에 직할시로 승격되면서 경산군의 안심읍·고산면, 달성군의 월배읍·성서읍·공산면, 칠곡군의 칠곡읍이 편입되었으며, 1988년에 달서구가 신설되었다. 1990년 7개구 141개동의 행정구역에서 1992년 서구 평리동·산격동, 수성구 만촌동·지산동·황금동, 달서구 월배동이 분동함으로써 7개구 147개동으로 행정구역이 늘어났다. 1995년 시의 명칭이 광역시로 변경되었으며, 같은 해 지방자치선거를 앞두고 실시된 전국행정구역개편으로 달성군이 통합되어 도농통합시를 이루어 지금에 이른다. 대구광역시의 도심에 해당하는 대구분지는 북쪽으로 팔공산을 중심으로 하는 산지와 남쪽으로 청룡산으로 이어지는 산지, 동쪽으로 용지봉과 대덕산으로 이어지는 산지로 둘러싸여 있다. 그 사이로 금호강이 동에서 서로 흘러 낙동강으로 유입된다. 이 일대는 내륙분지지역이어서 연중 기온의 차가 크며 강우량은 상대적으로 낮다. 1942년 이래 대한민국 기상청 관측 이래 가장 높은 기온인 40도를 여러번 기록한 지역이기도 하다. 일제 강점기 이후 대구시의 면적이 계속 확대되고 해방 이후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인구도 계속 증가했다. 1981년 직할시로 개편될 때에 183만 명이었던 인구는 1990년대 들어 200만 명을 넘었고 2018년에는 248만 명에 이르렀다. 해방 이후 1960년대부터 서문시장을 중심으로 화학섬유 생산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면서 1970년대에는 섬유산업을 기반으로 도시가 발전했으나, 1990년대 후반 IMF로 인해 침체기를 겪었다. 2000년대에 들어 최첨단 소재산업의 중심지로 재도약했다. [통합포탈에서 발췌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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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부 구간거리
청룡지맥 분기점-0.4km-비슬산-2.1km-이고개-1.3km-닭지봉(880봉)-2.3km-닭지만당산(687봉)-3.0km-장단이재-0.9km-삼필봉갈림봉-0.9km-수밭재-1.8km-청룡산-4.0km-달비고개-0.6km-항공무선국갈림길-0.8km-앞산갈림봉-3.6km-봉덕교-2.7km-영대병원사거리-3.7km-두류치안센타-0.9km-반고개-2.9km-세방로굴다리-1.8km-와룡산-2.4km-신당고개-1.0km-궁산-2.1km-강창교-1.6km-금호강/낙동강합수점
♤ 구간거리
- 접속 : 유가사 주차장 ~ 천왕봉 3.9km, 천왕봉 ~ 분기점 0.4km
- 비슬산(천왕봉) ~ 봉덕동 28.8km
-. 비슬산(천왕봉) ~ 수밭고개 14.5km
-. 수밭고개 ~ 봉덕교 14.3km
- 봉덕교 ~ 강창교 22.1km (시내구간 약 11km, 3시간)
-. 봉덕교 ~ 내부순환도로 12.4km
-. 내부순환도로 ~ 강창교 9.7km
* 식수 보충 및 참고사항
- 동대구역 앞 봐라봐라 만화방: 3시간 5,000원
- 천왕봉 약수터: 정상석에서 200m 진행하여 왼쪽 아래로 50m
- 용연사 약수터: 왼쪽 용연사 방향으로 100m 아래(2분 거리)
- 느티나무 약수터: 달비고개 500m 전 오른쪽으로 400m
- 앞산: 왕복 2.1km(50분 소요)
- 내당역 황제불한증막: 13,000원
- 세방지하차도 cu편의점: 중부내륙고속도로 지나자마자 왼쪽
- 용미봉: 왕복 2.4km(50분 소요)
- 용두봉: 왕복 2.2km(50분 소요)
- 신당고개 gs편의점: 한화꿈에그린아파트 상가단지 1층
* 유가사 가는 교통편
- 동서울 ~ 동대구역: 22:30, 3.30h, 36,200원
- 서울 경부 ~ 동대구역: 23:10, 3.30h, 46,800원, 22시, 3.30h, 36,000원
- 서울역 ~ 동대구역 KTX: 05:03, 05:13, 05:27,~ 22:08, 22:18, 22:28, 22:58, 1.50h, 43,500원
- 동대구역 ~ 동대구역 광장 ~ 대구지하철1호선(05:30분 전후 운행시작)
- 동대구역 ~ 진천역: 지하철, 진천역 ~ 유가사행정센터: 급행 8, 8-1, 유가사행정센터 ~ 유가사: 택시
- 1호선 진천역 ~ 유가사 주차장: 택시 19,000원
- 동대구역 ~ 대곡역: 25분 소요
- 1호선 대곡역 1번출구 100m 버스정류소 ~ 유가사: 달성 5번버스(첫차 06시)
- 1호선 설화명곡역 5번출구 ~ 유가사: 달성 5번버스, 택시 18,600원
(첫차가 05:30분 출발하면 대곡역에서 5번버스 이용 가능하나 05:40분 출발하여 설화명곡역에서 택시 이용)
* 합수점에서 서울 올라오는 길
- 지하철 2호선 강창역 ~ 반월당역, 지하철 1호선 반월당역 ~ 동대구역
- 동대구역 ~ 서울역 KTX: 자주
- 동대구역 신세계백화점 3층: 고속,직행버스터미널 ~ 동서울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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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위를 포함하기 이전의 대구는 분지지형을 이룬다. 北팔공 南비슬로 지칭되며 팔공산은 대구의 주산(父)에, 비슬산은 안산(母)으로 비유되며, 동쪽으로 유봉지맥이 서쪽으로 황학지맥이 경계를 이룬다. 자존심이 높은 대구에서는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을 마구 칭찬하면 칭찬을 하면서도 남은 상대를 무시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세계최고, 초일류, 국내 최초 등은 경쟁의식이 유달리 강한 대구를 대표하는 말이다. 달리 말하면 대구에서 인정받으면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1등이라는 뜻도 된다. 과시, 허세가 많은 사람이 목소리가 커서 주류인 양 비춰지기도 한다. 팔공과 비슬지맥을 기맥으로, 청룡지맥을 대구지맥으로 호칭하며 청룡지맥 갈림지점의 산패가 자주 사라지는 이유 또한 대구가 최고라는 강한 생각! 이 정서와 유관하다. 달성의 옛 이름은 달구벌국, 다벌국(가야), 달벌성, 달구벌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워져 오다가, 대구(大邱)라는 지명은 통일신라 경덕왕 시절에 달구화현(達句伐峴)이 한자인 대구현(大邱현)으로 개칭되면서 처음 등장하였다. 큰 대(大), 땅 구(邱)로 큰 언덕, 넓은 언덕이라는 뜻이다. 1750년에는 대구(大丘)의 '구(丘)'가 공자[孔子, BC 551-BC 479; 본명은 공구(孔丘)]의 본명과 겹친다는 이유로 '구(邱)'로 바꿔야 한다는 상소가 있었고, 이 상소는 바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지만 이후 대구(大丘)/ 대구(大邱)가 혼용되다가 대구(大邱)로 정착하게 된다. 이처럼 대구(大丘)가 오늘날처럼 대구(大邱)로 개칭된 것은 조선의 피휘(避諱)제도에 있다. 을미개혁으로 23부제가 실시되자 대구도호부는 대구부 대구군으로 개편되었고, 13도제가 실시되자 경상북도 대구군이 되었다. 1601년에 경상감영이 안동에서 이전해옴으로써 발전의 계기를 맞게 되었고, 그 후 400여 년간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여 지금의 우리나라 제3의 도시로 성장했다.
달성(達城) 또는 대구성은 대구광역시 중구 일대에 위치한 삼국시대 토축 성곽으로 한반도에서 그 역사가 가장 오래 된 토성(土城) 가운데 하나이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첨해왕 15년(261)에 달벌성(達伐城)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선조 29년(1596)에 석축으로 개축하고 상주에 있던 경상감영을 현재의 대구 중구 포정동 경상감영공원 자리로 이전하기 전까지 이곳에 설치했다. 1736년 대구읍성을 쌓을 때까지 대구의 읍성으로서의 역할을 하였던 대구광역시의 뿌리이자 본류라 할 수 있다. 달성공원과 그 일대는 대대로 달성 서씨의 세거지로 달성 서씨의 땅이었다. 달성공원에는 달성 서씨의 유래와 공덕을 기리는 달성 서씨 유허비가 세워져 있다. 대구의 서쪽 지역인 달성군과 달서구는 대구 중구에 있는 달성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달성은 달성공원, 달서와 성서는 그 달성의 서쪽 지역을 말한다. 오늘날의 달서구에는 삼국시대에 신라의 달구화현이 있었고, 삼국 통일 이후인 757년에는 달구화현이 대구현으로 개칭되었다. 고려시대에는 대구현은 유지되었고, 조선시대에 이르러 대구현은 주변의 수성현, 해안현, 하빈현과 함께 통합되어 대구군(大丘郡)으로 승격하였다. 이후 1466년에 대구군이 대구도호부로 승격하였고, 1601년에는 경상감영이 안동대도호부에서 대구도호부로 옮겨지면서 경상도의 중심지가 되었다. 1905년 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일제강점기에는 대구신사(大邱神社)가 있었다. 1914년 4월 1일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대구부와 분리된 달성군이 외곽에 새로 만들어지면서 달성이 없는 달성군이 되었다.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62호로 지정되었다. 1969년 다시 공원으로 탈바꿈하고 1970년 달성공원 동물원이 개장했다. 지금의 달성공원에는 옛 경상감영의 정문이었던 관풍루가 있고 향토역사관·동물원이 있다. 향토 시인 등 예술가와 성인의 시비·기념비가 있어 역사를 담고 있는 공간이다.
대구의 중심에는 읍성이 있었지만 현재에는 지명으로만 남아있다. 대구읍성의 성벽은 지금의 대구 시가지 중심부를 에워싸고 있는 동성로와 서성로, 남성로, 북성로 거리를 잇는 구간을 따라 서 있었다. 대구읍성은 조선 경상도 대구도호부에 있었던 읍성이다. 최초로 대구읍성이 수축된 것은 임진왜란 2년 전인 선조 23년(1590년)의 일이었다. 일본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하여 교통상 요지에 읍성을 쌓게 하면서 대구에도 성을 쌓았는데, 당시의 대구부사 윤방에 의해 토성으로 수축되었던 읍성은 대구가 왜군에게 함락되면서 파괴되었다. 그 뒤 대구에 경상감영이 들어서고, 경상감사 겸 대구부사 민응수(閔應洙)는 조정에 대해 대구에 성을 쌓는 것을 허락해줄 것을 요청했고, 군사적인 목적으로 영조(英祖) 12년(1736년) 4월부터 돌을 이용한 석성의 형태로 다시 축성 공사에 착수했다. 이듬해 6월 읍성은 완공되어 11월에 준공식을 열었다. 흙으로 쌓았던 최초의 읍성이 파괴된지 약 140년만의 일이었다. 영영축성비(嶺營築城碑)에 따르면 대구읍성의 전체 둘레는 2,700m, 높이는 5m에 달했다. 읍성의 동서남북으로 난 진동문·달서문·영남제일문·공북문의 4대문과, 그보다 조금 작은 동·서 2소문까지 여섯 개의 성문이 있었고, 성의 모퉁이에는 동장대, 남장대, 북장대, 망경루라는 4개의 망루가 있었다. 백성들은 출입이 까다롭고 엄격한 4대문 대신 동·서의 두 소문을 주로 이용하였다. 달서문과 진동문 밖에서는 큰 시장이 열렸다. 대표적인 것이 서문시장으로 영남대로의 길목에 위치해 있어 조선 후기에 한양, 평양과 더불어 전국 3대 시장의 하나로 명성이 높았던 시장이었다.
강화도조약의 체결로 문호를 개방한 조선에는 일본인들이 하나둘씩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처음 대구에 들어와 정착하던 1893년에만 하더라도 그들은 대구에서 자그마한 이나 잡화를 파는 상점이나 하는 정도였지만, 1900년에 대구에 일본인들의 조직인 일본인회가 설립되고, 1903년부터 경부선 철도 공사가 시작되어 일본인들은 철도 건설 부지로 예정된 지역의 토지를 사들이면서 대구로 밀려들기 시작했다. 대구 중심부로 상권을 넓히려는 일본인 상인들에게 대구읍성은 골칫거리였다. 성벽 때문에 대구가 근대 도시로 발전하지 못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하루 빨리 읍성을 철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일본인 상인과 경북관찰사 사이의 대립과 충돌이 빈번해지는 가운데, 조정을 자처한 것은 당시 대구군수 겸 관찰사 서리로 대구에 부임해 있던 골수 신념적 친일파 박중양(朴重陽, 일본식 이름: 朴忠重陽 호추 시게요, 1872. 5. 3~1959. 4. 23)이었다. 외교권 피탈 뒤인 광무 6년(1906년) 10월, '옛 것을 고쳐 새 것으로 만든다(革舊改新)'는 명분 아래 박중양은 대구읍성 해체를 시작했다. 박중양이 비밀리에 부산에서 데리고 온 인부 60명이 읍성을 허무는 일은 순조로이 진행되었다. 조정의 허가없이 자신의 독단으로 무모하게 철거를 시작한 것이다. 대구읍성이 헐리고 난 뒤, 경상감영의 객사였던 달성관도 일본인들에게 무상으로 넘어갔다. 1909년, 대구부청 앞에서 포정동, 서문로에 이르는 동서선과 종로에서 대안동에 이르는 남북선으로 동서남북을 가로지르는 십자도로가 개통되었다. 대구읍성의 철거는 결과적으로 대구의 조선인들이 가진 전통 상권을 일본인들에게 넘어가게 만들었다. 일본인들이 객사를 헐어버림으로서 객사 앞 종로 부근을 중심으로 개설되던 약령시의 상권도 사라지고, 객사 주위의 민가마저 일본인 상인들이 사들여 도로를 만드는 가운데, 약령시는 본래의 터전을 빼앗긴 채 이듬해인 1910년부터는 남쪽 성벽이 철거된 자리인 남성로, 지금의 자리로 옮겨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대구를 지나는 철도와 이와 연계된 국도를 건설함으로써 전국 주요 도시로서의 이동이 쉬워지고 넓은 배후지역에 대한 중심도시로서의 기능이 강화된 가운데 대구에 거주하는 일본인의 수는 1910년 약 2천 가구에 7천여 명이 되었다. 성내에 살던 대구부민들의 거주지역을 일본인들이 잠식하면서 원래 살던 주민들은 서남쪽 구릉지대로 밀려나게 되었고, 일제의 지배기구와 은행, 우체국, 일본인 상점들이 대구역을 중심으로 태평로, 동성로 등 대구 동북부를 중심으로 들어서는 등 전통적인 대구의 모습은 사라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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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성군에 정작 달성이 없게 된 사연을 들어서는 글에 달성의 역사와 함께 잠시 살펴보았습니다.
♤ 대구광역시 달성군(大邱廣域市 達城郡)
동쪽은 대구시와 경산시, 서쪽은 낙동강을 경계로 성주군·고령군, 남쪽은 청도군·경남 창녕군, 북쪽은 칠곡군과 접하고 있다. 군청은 대구광역시 달성군 논공읍 금포리에 있다. 삼국 및 통일신라시대 신라가 팽창하면서 이 지역의 소국들은 늦어도 5세기 말∼6세기 초 신라에 복속된 것으로 생각된다. 1895년(고종 32) 전국적인 지방제도의 개편이 이루어지면서 달성군지역은 대구부 대구군과 현풍군으로 나누어졌고, 이듬해 13도제의 실시와 더불어 경북에 속하게 되었다. 1905년 성주군 노곡면이 현풍군에 편입되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대구의 시가지가 대구부로 승격되면서 대구군의 나머지 지역과 현풍군이 통폐합되어 달성군으로 되었다. 대구시의 행정구역이 확장되면서 1958년 동촌·공산·가창·성서·월배면이 대구로 편입되었다가 1963년 동촌을 제외한 4개 면이 환원되었다. 1980년 12월 1일 성서면이 읍으로 승격되었고, 1981년 7월 1일 대구시의 직할시 승격으로 월배읍·성서읍·공산면이 다시 대구로 편입되었다. 동부는 화산암 지대로 험준한 산지를 이루며, 서부는 낙동강 연안을 따라 남북방향으로 길게 평야가 발달해 있고 곳곳에 구릉산지가 분포하고 있다. 동부산지는 비슬산괴와 용지산괴 및 최정산괴로 나눠 볼 수 있다. 서부에는 낙동강으로 흘러드는 하빈천·금호강·진천천·천내천·기세곡천·금포천·현풍천·차천 등의 지류들이 있다. 그 하류 유역에는 하산들·왕선들·쌀밋들·간경들·옥공들·현내들·구지들 등의 충적평야가 발달해 있다. 이러한 평야상에는 용산(龍山, 250m)·성산(城山, 274m)·박산(朴山, 218m)·와룡산(臥龍山, 300m)·궁산(弓山, 253m)·금계산(金溪山, 471m)·대방산(大方山, 378m)·대니산(戴尼山, 471m) 등과 같은 잔구성 산이 솟아 있다.
유가읍 쌍계2리에 칩거하여 말년을 보내고 계신 그분이 잠깐 떠오르네요. 씁쓸하지만 잘 했더라면....
♤ 대구광역시 달성군 유가읍(瑜伽邑)
대구광역시 달성군에 위치한 읍으로 동쪽으로 비슬산을 경계로 청도군과 북쪽으로 가창면, 논공읍, 서쪽으로 현풍읍, 구지면, 남동쪽으로 경남 창녕군 성산면과 마주보고 있다. 유가읍은 현재의 현풍읍, 논공읍 등과 함께 신라시대 때 본래 추량화현 또는 삼량화현에 속하였다. 추량화현은 고려시대에 와서 현풍으로 불리었으며, 1895년(고종 32) 현풍군이 되어 대구부(大邱府)에 속하게 되었다. 1914년 4월 1일 행정 구역 통폐합에 따라 대구부의 외곽지 전부와 현풍군을 통합하여 형성된 달성군 관할의 16개 면 중 하나가 되어, 경북 달성군 유가면이 되었다. 유가읍은 비슬산에 있는 유가사에서 유래하였다. 한마디로 비슬산, 유가사, 유가읍은 불가분의 관계를 가졌다. 표준어로 닭벼슬 혹은 닭 볏을 경상도 사투리로는 닭비슬이라고 한다. 닭벼슬을 닮았다는 이산을 비슬산이라고 했다. 벼슬(高官大爵)이라는 동음으로 고려 958(광종 9)년 후주(後周) 쌍기(雙冀)의 건의로 과거제도를 실시한 이후 벼슬살이를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비슬산 기슭 사찰에 몰려들었다. 달성군의 비슬산이 왜 닭벼슬을 상징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1995년 3월 1일 달성군 전역이 대구광역시에 편입되어, 대구광역시 달성군 유가면이 되었으며, 대구 테크노폴리스의 개발 및 테크노폴리스로의 개통으로 인구가 급속히 늘어나 2018년 3월에 읍으로 승격됐다.
유서깊은 유가사를 이른 새벽 지나야 하다니... 출발하며 잠깐 주지스님을 뵈었는데 영하 8.9도라며 일찍 올라가신다고 인사를 주시네요. 108개의 석탑이 있고, 이렇게 많은 시비도 세워져 있습니다.
♤ 유가사(瑜伽寺)
비슬산 서쪽 기슭에 위치한 유가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의 말사이다. 신라 흥덕왕 2년인 827년에 도성이 창건하였으며 절 이름은 비슬산의 바위 모습이 구슬과 부처의 형상과 같다 하여 지은 이름이다. 유가읍 용리 일연선사길 40번지에서 북향으로 비슬산 정상을 보면 일명 사람 얼굴 모양 혹은 좌불 모양이 드러나며, 유가사 범종각 부근에서 대웅전 위를 올려다보면 비슬산 바위가 기와처럼 얹혀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고려 3대 종파 가운데 하나였던 유가종의 중심 도량이기도 했다. 유가종의 총본산격인 사찰로 전성기에는 3,000여 명의 승려들이 머물렀으며, 보각국사 일연스님(속명 全見明, 1206~1289)도 한때 이곳에 기거하였다. 이후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으나 1976년에 대웅전과 용화전을 중창하는 등 대대적인 불사를 일으켜 오늘에 이른다. 2008년 비슬산을 사랑하는 시민, 문인 등의 뜻이 모인 시비와 2011년 중창불사를 하면서 나온 108기의 돌탑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2003년,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유가사 석조여래좌상을 비롯한 괘불, 삼층석탑, 16기의 부도 등이 있다. 부속암자로는 비구니들의 수도처인 수도암과 경북의 3대 기도처 중의 하나인 도성암이 있다. 비슬산 중턱에 위치하여 비슬산 내 다양한 관광지와 더불어 함께 즐기면 즐기기에 좋다.
유가사에서 비슬산에 오르면 천왕봉 정상석과 청룡지맥 분기점 사이로 올라서게 됩니다. 오른쪽으로 청룡지맥 분기점에 들렀다가 다시 뒤돌아와 천왕봉으로 갑니다.
♤ 청룡지맥분기점(1,038m)/ 도광계/ 삼읍면계(청도군 각북면 → 대구 달성군 유가읍, 가창면)
준희선생님 분기점 산패가 소나무 가지에 매어 있다. 경북 청도군과 대구광역시의 경계로 삼읍면계이자 삼리봉이다. 지맥이 경북 청도군 오산리와 헤어져 대구 달성군 가창면 정대리와 유가읍 양리의 경계를 따른다. [천왕봉 0.4km, 헐티재 3.8km, 대견사 5.0km]를 가리키는 이정목과 국가지점번호, 돌탑이 네개 있다. 오른쪽으로는 비슬지맥 삼봉재와 헐티재로 이어지고, 왼쪽으로는 마령재와 비슬산 진달래 군락지와 대견사, 조화봉으로 이어진다.
♤ 경북 청도군 각북면(角北面)
경북 청도군 북서부에 있는 면으로 풍각현의 북쪽에 있다고 해서 각북면이 되었다. 지형적으로도 외곽처럼 돌출된 형태다. 고려 말기부터 이 일대는 각산리로 불리기도 했는데 이는 마을 뒷산에 솟아있는 각산이라는 봉우리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 중기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각산촌이라는 이름이 등장하며, 최소 500년 이상된 마을임을 짐작하게 한다. 청도군 서북쪽 맨 끝부분에 자리 잡고 있는 각북면은 비슬산과 삼성산이 높게 솟아있어서 남쪽으로는 트여 있으나 삼면은 모두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북쪽과 서쪽은 대구와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풍각면과 마주하고 있는 아주 전형적인 산골 오지이다. 조선시대에는 대구부에 속하였다. 사방이 300m 이상의 산지로 둘러싸인 소규모의 분지 형태를 이루고 있다. 각북천을 비롯한 소하천들이 면의 중앙을 남류하여 청도천을 경유, 낙동강에 흘러든다. 경지는 이들 하천유역에 발달하며 일부 지역은 과수원으로 개간되어 사과·복숭아·포도 등이 생산된다. 주곡작물 외에 송이버섯이 많이 생산된다. 비슬산 동사면에는 신라시대 진덕여왕 때 의상법사가 창건한 용천사가 있다.
♤ 청도군 각북면 오산리(梧山里)
비슬산 동쪽 첫 동네인 오산리는 청도군의 가장 서북쪽에 위치한 동네로, 청도에서는 오지 중의 오지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당시 오이와 고산의 이름을 따서 오산동이라 하였다. 오산리는 오리(梧里), 고산(高山,귀미)와 삼천(三泉)이 합해져서 만들어진 동네이다. 덕산과 오리 사이에 있는 고산은 『대구읍지』에는 고며리라고 적혀 있고, 마을 사람들은 귀미라고 부르고 있다. 오리는 오산을 말하는데, 『대구읍지』에는 동네 이름이 오이원으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에 달성군 화원이나 가창으로 갈 때, 산기슭에 당도해 해가 저물면 오이원(吾耳院)에서 자고 떠났다고 한다. 오이원은 지금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정대리와 오이리를 잇는 길목이며, 『대구읍지』는 지금의 가창면을 상수서(上守西)라고 기록하고 있다. 삼청 또는 삼천 마을은 마을의 세 곳에 우물이 있다고 하여 삼천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비슬산 중턱에 자리잡은 마을은 계단식 밭과 다랑논으로 되어 있다. 고산 마을 북쪽에 있는 들은 경지정리가 말끔히 되어 있다. 오리 서쪽에는 대동골이라는 계곡이 있으며 이곳에서 발원한 청도천의 원류인 오산천은 동쪽으로 흐른다. 대동골은 여름이면 피서 인파로 발 디딜 틈이 없다. 오산리에는 용천사의 물이 좋다고 소문이 나면서 대구에서 용천사 물을 받아가기 위해 오는 사람들이 길을 잇고 있다. 1990년대에 각북면 오산리에서 대구 달성 가창면 정대리로 이어지는 길이 연결되어 전원마을로 각광을 받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노후 삶을 즐기기 위해서 찾고 있고, 예술인들도 하나둘 정착하며 살아가고 있다. 호스피스 병원인 윤성병원이 있다.
♤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嘉昌面)
대구시 달성군 동부에 있는 면으로, 달성군의 읍, 면들 중 가장 넓지만 대부분이 산지다. 가창면은 신라시대 위화군으로 불리다가, 747년(경덕왕 16년) 수창군에 속하였다. 고려 때는 수성현이라 일컬었으며 경주부에 속하였으며 1914년 상수남·상수서·하수남 3개 면이 합쳐져 통일신라 시대부터 사용된 유서깊은 명칭인 가창면이 되었다. 동쪽으로는 경북 경산시, 서쪽으로는 달성군 화원읍, 논공읍, 옥포읍, 남쪽으로는 경북 청도군 각북면 및 이서면과 접해 있고, 북쪽으로는 수성구 파동에 접해 있다. 지리적으로 다른 달성군의 동네와 꽤 차이가 크다. 낙동강으로 인해 넓은 충적 평야가 형성되어 있는 달성군의 다른 동네와 달리, 가창면은 거의 산지로 이루어져 있다. 신천 상류가 면 가운데를 지나며, 그 주위에 약간의 평지가 있을 뿐이다. 역사적으로도 달성군의 다른 읍면들은 옛 현풍군 소속이거나, 조선 전기에서 중기까지의 화원현, 하빈현과 연계된 지역인 것과 달리, 가창면은 달성군의 읍면 중 유일하게 수성현과 연계된 지역이다. 달성군의 월경지로 실질적으로는 수성구 생활권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달성군 가창면 정대리는 지맥 분기점에서부터 배바위 직전 666.3m봉까지 아주 길게 청룡지맥과 같이 합니다.
♤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정대리(亭垈里)
대구 달성군 가창면 정대리는 이 지역의 정대라는 명칭에서 나온 것으로, 원래 마을 뒷산이 가마솥 같이 생겼다고 하여 솥정(鼎) 자를 써서 정대(鼎垈)라 하였으나,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마을에 정자나무가 있어 정대(亭垈)로 고쳤다고 하며, 자연 마을인 매계는 계곡에 매화가 피어 유래한 이름으로 매남·매내미로도 부르는데, 안매남·안매내미 마을과 바깥매남·바깥매내미라 불리는 마을들이 있으며, 한더미·대암은 마을 뒤에 큰 덤(바위)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고, 평지는 평지에 자리 잡은 마을이기 때문에 이름 붙여졌다. 또한 왼개·윈개는 왼쪽에 위치한 마을이며, 초막골은 농부들이 비를 피하여 은신할 수 있는 초막이 있던 마을이다. 용계천이 비슬산 북동 사면에서 발원하여 북동으로 최정산(最頂山, 915m)과 청룡산(靑龍山, 794.1m) 사이의 가창면 정대리와 오리를 흐르고 가창댐에 저수된 후 가창면 용계리에서 신천으로 흘러든다. 용계마을을 가로질러 흐르는 하천으로 계천에서 용이 승천하였다고 전해져 붙여진 지명이다. 지방도 902호선과 이어지는 전형적인 산촌 마을이며, 정대리에는 용계천을 따라 형성된 군도 8호선이 남쪽의 헐티재를 넘어 경북 청도군 각북면으로 연결된다. 정대 미나리가 특히 유명하다. 한편, 대구광역시의 상수원인 가창댐 상류부에 위치하여 발전이 제한되어 있다. 정대리에 있는 달성 조길방 가옥은 국가 지정 중요 민속 문화재 제200호이며, 초등학교 폐교에 만들어진 대구 미술 광장에서는 다양한 조형물과 미술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다.
정상에서 방향을 서쪽으로 잡고 수도지맥의 가야산-오도산을 따라가다 진양기맥의 황매산까지 찾아봅니다. 비슬산 정상 천왕봉은 엄밀하게 따져 0.4km 거리로 청룡지맥 상에 있는 봉우리인데 비슬지맥의 위세에 이름을 내어주었습니다. 2021. 5. 7. 13:32분 비슬지맥을 하며 천왕봉을 지나갔습니다.
♤ 비슬산(琵瑟山) 천왕봉(天王峰, 1,083.4m)/ 1등삼각점(청도 11)/ 읍면계(달성군 유가읍 - 가창면)
대구광역시 달성군 옥포읍, 가창면, 유가읍과 경북 청도군 각북면에 걸쳐있는 산으로, 경남 창녕군과도 가깝다. 1986년 2월 22일에 군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천왕봉 이전에는 대견봉(1,035.4m)이었으나 2014년 10월 국가지명위원회에서 최고봉을 천왕봉으로 변경하였다. 엄격히 말하자면, 비슬산의 제일 높은 천왕봉이 비슬지맥이 아닌 청룡지맥에 속해 있으니 청룡지맥의 이름은 원래 비슬지맥이어야 옳다. 비슬지맥의 기럭시에 눌려 성명권을 내어 준 셈이다. 천왕봉에는 1908년경 대한제국 탁지부에서 설치한 구소삼각점(44 비슬)이 있다. 이 삼각점은 국토지리정보원에서 관리하는 국가기준점(청도 11)으로도 활용되고 있다. 비슬산의 최고봉은 천왕봉이고 그 다음이 대견봉이다. 천왕봉에는 넓고 환한 산상 평원이 펼쳐져 있다. 그걸 주변 마을들에서는 번치라 불렀다. 북편 바로 아래 대구 옥포 김흥리서는 그냥 번치, 동편 바로 아래 청도 각북 오산리서는 이곡번치라 부른다. 번치는 고원지대 평원을 가리키는 일반명사로 다른 지방서도 더러 쓰는 단어이다. 저 번치를 떠받치는 것은, 서쪽을 향해 입 벌린 고래 모양을 한 바위덤이다. 그 서편 및 남서쪽 바로 아래에는 1,036m~1,038m 짜리 두 벼랑 바위가 대문 양쪽 문설주같이 솟았다. 혹자는 저런 모습에서 거문고를 연상하는지, 비슬산이란 이름이 거기서 생겼으리라 추정하는 경우도 보인다. 산 정상의 바위 모습이 마치 신선이 거문고를 타는 형상이라고 해서 붙여진 비슬산은 당나라에서 불교도량이 있는 산을 법산(法山)이라고 했음을 본받아 신라에선 음역으로 ‘포산(苞山)’ 또는 ‘포산(包山)’이라고 했다가 불교를 국교로 삼았던 고려시대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달성군에는 포산 곽씨(일명 현풍곽씨), 포산중·고등학교 등이 아직도 그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다. 더불어 신라시대에 인도의 스님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인도식 발음으로 비슬이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비슬은 인도의 범어 발음을 그대로 옮긴 것인데, '덮는다'는 뜻으로 한자로 쓰면 포(苞)가 된다고 한다. 최근에는 인도의 스님이 이곳에 왔던 불교도량이라고 우주창조의 ‘비슈누(毘紐)’를 ‘비슬(琵瑟)’로 음역했다는 주장도 있다. 한편으로 조선 시인소객들은 소슬바람, 솟을대문 등과도 산 이름을 연결하여 소슬산(所瑟山)이라고도 했다. 예로부터 정성천왕(靜聖天王)이라는 산신이 사는 성지로 알려져 있으며 한가지 소원을 꼭 들어준다고 믿고 있다. 산림청이 발표한 전국 100대 명산 가운데 하나이고, 비슬산괴(琵瑟山塊)는 대구분지 남부산지의 주체이며, 비슬산은 이 산괴의 주봉이다. 여기서 북북서 방향으로 청룡산·산성산이 있고, 앞산(660m)에 이르러 분지상(盆地床)에 임한다. 산지는 전체적으로 급준한 사면을 가지고 분지에 임하고 있으나 그 산정에는 평탄면을 형성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산성산은 480m 부근 이상에서는 갑자기 경사가 완만해지고 곡폭도 넓어져 높이 600m의 고산현(高山峴)까지 계속되고 있고, 청룡산은 500m 부근부터 완경사지가 보이고 산정부에 평탄면이 나타난다. 최정산(最頂山)에 있어서도 약 700m 이상에서는 완사면을 이루고 있다. 비슬산은 800m 이상에서 평탄면이 나타난다. 평탄면의 성인(成因)을 살펴보면 과거에는 이 지방이 현재보다 낮고 완만한 구릉지, 즉 노년기 산지였는데 일대가 융기함에 따라 신천·남천 등 하천의 침식이 부활해 산지를 개석하였다. 그 결과 평탄명 양사면에 급사면이 발달되었다. 이러한 지형의 영향을 받은 하천은 비슬산을 중심으로 방사상으로 흐르고 있다.
♤ 1,054.0m봉/ 삼읍면봉(대구 달성군 가창면 정대리, 유가읍 양리 → 옥포읍 김흥리)
실제는 갈림길에서 도성암으로 더 내려가면 삼읍면봉이 나오는데 지맥의 왼쪽이 달성군 유가읍 양리 → 옥포읍 김흥리로 바뀌는 편리상 삼읍면봉이자 삼리봉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다. 지맥은 우틀로 내려서며 도성암/수도암 갈림길을 지난다.
♤ 도성암/ 수도암 갈림길
삼거리에 도성암 1.4km 이정표가 지키고 있다. 발아래로 대구 달성군 현풍읍이 내려다보이고 멀리 낙동강 건너편으로 고령의 칠봉지맥 능선을 찾아본다.
♤ 1,051.9m봉
비슬산 종주 등산로 이정표[천왕봉 0.4km, 앞산 16.0km, 용연사 8.0km]가 서있다. 청룡지맥 비슬산 정상에서 북으로 400여m 더 간 지점에 솟은 1,051.9m봉에서 출발과 동시에 비슬지맥과의 사이에 정대계곡인 마내미골을 형성한다. 비슬산 천왕봉(1,083.4m) 북동(北東) 비탈서 시작되는 가창호 최상류 구간이다. 일여덟 가구나 살던 도토구지마을(정구지덤 북편)이 있었다할 정도로 규모가 크다. 마을 터 부근에 있는 두 개의 수리덤과 해맑은 무당웅덩이 등등으로 풍광도 빼어나다. 그런데도 이 골짜기를 아는 외지인은 거의 없다. 상수원구역이어서 출입이 차단됐기 때문이다. 가창 헐티재길 막바지 정자가 서 있는 곡각지점이 그 들머리다.
♤ 대구광역시 달성군 옥포읍(玉浦邑)
대구시 달성군의 중서부에 위치하며 읍소재지는 금포리이다. 북쪽에 화원읍, 고령군, 동쪽에 가창면, 남쪽에 논공읍 및 유가읍이 있다. 옥포읍의 옥포(玉浦)는 아름다운 물가, 특히 '옥같이 맑은 물이 있는 포구'라는 의미에서 유래했으며, 낙동강과 인접해 맑은 물과 자연경관이 뛰어난 지역적 특징을 담고 있다. 옛날 본리리에 있는 옥계라는 이름에서 비롯된 것으로, 옥이 많이 나는 고장이라서 생긴 이름이라고 전해지기도 한다. 고려시대까지 화원현에 영속되었다가, 조선시대에 화원현이 대구군으로 통합되면서 조선말기까지 대구도호부의 관할에 있었다. 강림리 및 교항리 일대의 옥포지구 개발, 인근 아파트단지의 개발로 인구가 늘어나2018년 11월에 당시 현풍면과 함께 읍으로 승격됐으며, 김흥리와 반송리에 테크노폴리스로의 진출입로가 있어서 달서구 대곡동 및 유가읍 쌍계리로 갈 수 있다. 또한 2017년에는 기세리의 옥연지 일대에 송해공원과 송해기념관이 조성되어, 대구광역시의 새로운 관광 명소로 추가되었다. 대구미래스마트기술국가산업단지 곧 들어설 예정이다. 따라서 인구 증가가 예상되고, 사업지가 화원읍에 걸쳐서 시가지 연담도 될 전망이다.
♤ 대구광역시 달성군 옥포읍 김흥리(金興里)
대구 달성군 옥포읍 김흥리는 반송리에서 논공읍 달성1차산단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있으며, 이 곳에 있는 설티고개는 논공중앙로와 함께 상당한 급경사 구간이라 차량 운행시 주의해야 한다. 2014년 10월경 테크노폴리스로가 이쪽에 뚫렸다. 김흥리는 옛날 근처에 있는 산에서 금이 많이 날 것 같다고 하여 김흥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또한 김해 김씨가 이 마을에 피난하여 김씨가 살면 흥한다는 뜻에서 불리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산의 모양이 김(金) 자를 닮아서 불리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대구시 달성군 옥포읍 기세리 처향(妻鄕)에 묻혀계신 송해선생님! 옥연지 송해공원 일대가 내려다 보입니다.
♤ 802.4m봉/ 읍면계/ 삼리봉(달성군 가창면 정대리, 옥포읍 김흥리 → 반송리)
바위위에서 비스듬하게 자라 용틀임을 하는 분재를 닮은 멋진 노송이 있는 847m봉 안부에서 바라보이는 옥포읍 저수지를 감상하고 안부로 내려섰다 올라선 봉우리이다. 봉을 내려서면 옥포 김흥 갈림길이다. 지맥의 왼쪽이 옥포읍 김흥리 → 반송리로 바뀌어 687.5m봉/ 닭지봉까지 함께 한다. 지맥은 용연산 방향이다.
♤ 대구광역시 달성군 옥포읍 반송리(盤松里)
반송 마을은 이 지역의 반송이라는 명칭에서 유래한 것으로, 마을 일대가 반석으로 구성되어 옛날에는 나무가 거의 없는 지역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농부가 허기진 승려를 집으로 데려가 극진히 대접하였더니 승려가 농부에게 감사한 마음으로 반송을 심도록 하였고, 그 후로 반송이 산 전체에 퍼져 우거지게 되어 마을 이름을 반송이라 하게 되었다고 한다. 비슬산에서 북쪽 방향으로 뻗어 나온 산줄기의 북서사면에는 산록 완사면이 넓게 형성되어 있는데, 이 산록 완사면이 반송리를 형성하며 취락과 산업 시설이 혼재해 있다. 비슬산 계곡에서 발원한 하천이 김흥리와 경계를 이루면서 북서 방향으로 흐른다. 또 다른 비슬산 계곡에서 발원한 하천이 반송리의 남서부에 위치한 태봉산(364.4m) 계곡을 따라 북서쪽으로 흐르면서, 함박산(432m) 계곡에서 발원하여 남서쪽으로 흐르는 하천과 합류하여 서쪽으로 흐르다가 반송 초등학교 앞에서 김흥리와 경계를 이루는 하천과 다시 합류하면서 계속 북서쪽으로 흘러 낙동강으로 들어간다. 반송리는 동쪽으로는 함박산 옆 기내미재를 넘어 화원읍으로 연결된다. 이렇게 세 개의 낙동강 지류가 형성하는 계곡 방향으로 비교적 넓은 규모의 계단식 경작지가 형성되어 있다.
♤ 이곡고개/ 이고개/ 옥포 갈림길
비슬산 종주등산로 이정표[정상 1.8km, 용연사 3.8km, 옥포 김흥 3.3km, 가창 정대 6km]가 서있는 능선사거리 십자 안부이다. 전에는 대구 시내에서 가창 2번 버스를 타고 가는 정대 버스 회차지 2.3km를 안내했는데 버스가 끊겼을까. 청룡지맥이 마내미골 외곽 역할을 하는 부분으로 이곡으로 줄여 불리는 이고개에 내려선다. 비슬산 이후 사실상의 첫 잘록이로 워낙 유명해 비슬산 최고봉 평원마저 이곡번치라 불릴 정도인데, 번치는 고원지대 평원을 가리키는 일반명사로 다른 지방서도 더러 쓰는 단어이고 이곡은 이고개의 준말이다. 이고개에서 달성 옥포면 쪽으로 내려서면 얼마 안 가 반송 2리 안으로 개설돼 있는 임도에 닿게 된다. 곧이어 준희선생님 '힘힘힘' 격려산패를 지난다.
844.9m봉을 우회하는 길이 있습니다.
♤ 822m봉
비슬산 종주등산로 이정표[청룡산 9.1km, 비슬산 2.0km]를 지나서, 왼쪽 능선으로 우회길이 보이지만, 직진하여 바위 능선을 타고 리지로 가기로 한다. 이곡고개에서 그 직후의 822m봉 올라서기가 까다로울 뿐 이후엔 순탄하다. 여러 봉우리들을 옆구리로 우회하면 다음의 844.9m봉과 876m봉 조차 못 알아보기 일쑤다. 산길이 844.9m봉을 지나친 뒤 785m재에 이르러서야 능선 위로 잠깐 올라섰다가는 다시 876m봉 조차 북서쪽 허리를 감아 돌며 통과해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 봉우리는 그렇게 무관심해서 될 대상이 아니다.
♤ 844.9m봉
선답자 띠지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명적암 남산이자 천년고찰 용연사 계곡(무지개골) 외곽능선 출발점이다. 우틀로 꺽어져 내려선다.
876.0m봉(닭지봉)을 왼쪽으로 우회하는 갈림길이 있습니다.
♤ 정대잿들/ 갈림길 안부
넓은 안부에 단양우공 합장묘 봉분과 비석이 있다. 묘지에서 왼쪽은 우회길, 직진하여 로프를 이용해 정대잿들 안부로 내려선다. 비슬산 종주 등산로 이정표[청룡산 7.5km, 앞산 13km, 용연사 2.5km, 정대잿들 2.8km, 비슬산 정상 2.8km]가 서있다. 대구광역시 달성군 옥포읍 반송리와 가창면 정대리 잿들마을 경계에 있는 곳으로 정대잿들이라 부르는데 정대리 잿들마을을 줄여서 표시한 것이다. 왼쪽으로 우회길이 있는 갈림지점인데 지맥은 직진으로 올라 왼쪽으로 내려서야 한다.
닭이 울며 모가지를 하늘로 길게 내뺀다는 점에서 닭모가지 꼭대기란 매우 높은 곳을 나타내는가 봅니다.
♤ 876.0m봉/ 정대봉/ 닭지말랭이/ 닭지봉/ 3등삼각점(청도 302/ 1982 재설)/ 옥포읍 반송리 - 가창면 정대리
준희선생님 산패가 나무가지에 매어 있다. 전에 880m봉 산패가 있던 곳이다. 지맥상의 최고봉이어서 서쪽 옥포읍에서 무지개골 안으로 가장 뚜렷이 솟아 보이고, 동쪽 가창면에서는 마내미골 안으로 제일 우람져 보인다. 마내미골의 중요 지형을 대부분 포괄하는 880m봉을 정대마을서는 닭지말랭이/ 닭지봉이라 불렀다. 닭모가지 즉, 으뜸이란 셈이다. 봉우리를 내려서면 봉분이 사라진 단양우공 묘비를 만난다. 살짝 우틀로 내려서니 능선 끄트머리에 절개지가 기다린다. 직전에 급좌틀로 꺽어져 암봉 사이로 매어져 있는 로프를 잡고 급경사의 내리막 등로를 지난다. 정대잿들 갈림길에서 우회길로 안내하는 제도권 등로에 합류한다.
단양우씨의 묘가 자주 보여 찾아보니 인근에 단양우씨 집성촌이 있고 말에 관한 전설이 있더군요.
♤ 낙동서원(洛東書院)/ 의마비(義馬陴)/ 월촌(月村)
대구 달서구 상인동 대구지하철 1호선 월촌역 옆 송현주공아파트 뒤에는 단양우씨(丹陽禹氏)의 재실이기도 한 낙동서원이 있는데, 이곳이 과거 월촌마을이었다. 안마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정략장군 우전(禹奠)이 정도전 일파의 정치적 보복을 피하여 낙향하던 당시에 그들을 비추던 달이 유난히 밝게 비추었다는 이야기가 있어서 월촌이라 하였다. 월촌 근린공원에는 ‘의병장월곡우배선선생창의유적비’가 있고, 그 뒤에는 의마비가 있다. 이 마을은 임진왜란 전부터 단양 우씨의 집성마을로 우배선이 살았던 마을이다. 이 마을에는 우배선과 그가 타던 말에 대해 전해지고 있는 이야기가 있다. 우배선이 살던 마을 근처 조암평야에는 물이 빠지고 나면 허허벌판이 되어 야생마가 많이 있었는데, 그중 한 마리는 성질이 사나워 아무도 접근을 못했지만, 오직 우배선만이 이 말을 잘 다루었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이 되어 이 말을 타고 전장을 누볐다. 그의 말은 총명하여 적의 화살이 날아오면 무릎을 꿇어가며 그를 여러 차례 구해냈다고 한다. 전쟁이 끝난 뒤 우배선은 의병장으로서 공로를 인정받아 공신이 되었지만, 얼마 뒤 세상을 떠나게 되었고, 그가 죽자 이 말도 먹이를 먹지 않고 울기만 하다가 사흘 만에 죽게 되었다고 하는데, 이후 사람들은 이 말을 의로운 말이라고 하여 무덤을 만들고 이 무덤을 의마총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이 의마총은 일제 말기 상인 못 확장 공사로 수몰되고 말았으며, 그 후에 사람들이 뜻을 모아 그 못가에 대신 의마비를 세워 현재 전해지고 있다.
♤ 계령(鷄嶺, 692.3m)
비슬산 종주등산로 이정표 [비슬산 3.4km, 청룡산 7.7km]가 서있는 갈림길이다. 비슬산부터가 닭벼슬(鷄冠)에서 비롯되었다는 유래도 있으며, 달구벌이 닭벌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세계적으로도, 신라의 역사에서도 계림의 김알지에서 보듯 닭을 조상으로 여겨 신으로 숭배한 시절이 있었다. 선답자 띠지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암릉구간을 내려온 능선으로 왼쪽으로 우회 길이 있으나, 지맥 산행에 충실하기 위해 산봉우리로 향한다.
♤ 703.4m봉
소나무에 준희선생님 산패가 매어 있다. 정대봉을 까칠한 로프구간으로 가파르게 내려서서 계령을 지나 안부에서 살짝 올라선 암봉이다.
봉우리 전후로 길이 좋습니다.
♤ 696.4m봉/ 헬기장/ 용연사능선 갈림길
지맥은 닭지봉을 지나 10여 분 후엔 800여m 길이의 매우 넓적하고 평평한 구간에 도달한다. 수풀이 우거져 분간하기도 어려우나 등로 오른쪽에 넓은 헬기장이 있고, 여름철 많은 사람들이 올라 피서겸 휴식 장소로 삼는 용연사 동쪽 능선이다. 무지개골 뒷능선이니 무지개능선으로 부르자는 의견도 있다. 평평한 무지개능선 중에서도 중심점은 헬기장이 있는 696.4m구릉이다. 지나온 원정대 마을 안 돌아앉은골과 초막골을 나누는 지릉이 갈라지면서 삼거리에 넓은 터를 형성한 것이다. 조금 더 진행하면 서편으로도 지릉이 내려서면서 무지개골을 닫고 약수터가 있는 황매미골을 연다.
고갯길에서 왼쪽으로 2분 거리에 약수터가 있는데, 한여름에 여기서 물을 보충하면 느티나무 약수터를 그냥 지나도 괜찮을것 같습니다.
♤ 용연사 삼거리(665m)/ 약수터 고개
비슬산 종주 등산로 이정표[비슬산 4.2㎞, 청룡산 6㎞, 반송 3㎞, 정대·초곡 2.5㎞, 명곡 3㎞]가 서 있다. 예전에는 민박까지 했다던 용연사 약수터 휴게소에서 만들어 세운 안내판(약수터 매점 1분 거리, 라면, 막걸리, 부추전)과 이정표, 대구에서 유명한 부름산악회의 나무판 개념도가 함께 세워져 있다. 약수터 고개는 황매미골과 초막골을 연결하는 재로, 좌측으로 2분 거리(약 100m)에 약수터가 있고, 더 내려서면 용연사로 가는 길이다. 반송은 약수터와 용연사를 거쳐 내려가는 서쪽 방향 옥포면 동네다. 초곡(초막골)은 일대서 드물게 장마철에까지 등산로가 잘 유지되는 동쪽 가창면 마을이다. 지맥은 화원자연휴양림 방향이다.
♤ 용연사(龍淵寺)
용연사는 달성군 옥포면 반송리 비슬산 북사면 아래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의 말사로 사찰 입구에 있는 못에서 용이 승천하였다는 전설에서 그 이름이 유래되었다. 통일신라시대인 914년(신덕왕 3)에 보양국사가 창건하였고, 1419년(세종 1)에 천일대사가 중건하였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자 1603년(선조 36)에 사명대사가 인잠·탄옥·경천 등에게 명하여 중창하도록 하였다. 문화재로는 부처님 진신사리를 봉안한 적멸보궁 금강계단이 있다. 이 계단은 1673년에 완성되었으며, 통도사 불사리계단의 형태를 본떠 만들었다. 1971년 보물로 지정된 이 사리는 원래 통도사에 있던 것으로, 사명대사가 제자 청진을 시켜 이 절에 봉안한 것이다. 용연사 극락전의 목불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이 복장유물과 함께 국가 보물 제1813호로 지정됐다. 또한 1995년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용연사 삼층석탑이 있다.
687.5m봉(닭지만당산)을 오른쪽으로 우회하는 갈림길이 있습니다.
♤ 옥포 반송/정대초곡 갈림길/ 안부
비슬산 종주 등산로 이정표[청룡산 6.0km, 앞산 11.5km, 옥포 반송/ 화원 명곡 3km, 비슬산 정상 4.2km, 정대 초곡 2.5km]가 세워져 있는 안부이다. 옥포 반송은 약수터와 용연사를 거쳐 내려가면 있는 옥포읍 동네이고, 정대 초곡(초막골)은 동쪽 가창면 마을이다. 초곡마을은 초막골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 마을로 농부들이 비를 피하여 은신할 수 있는 초막(草幕)이 있던 마을이다. 옥포 반송/정대 초곡 갈림길에서도 역시 오른쪽 우회로가 아니라 삼거리에서 좌틀하여 직진 암릉 구간으로 오른다.
대홍수는 성경에 나오는 노아의 홍수 시대를 말하는가 봅니다. 경상도 사투리로 꼭대기란 뜻인 만당은 만디와 같은 말이고 만디는 마루의 사투리입니다. 마루가 산꼭대기를 나타내니...
♤ 687.5m봉/ 닭지만당산/ 닭지봉능선 분기점/ 삼읍면봉(달성군 가창면, 옥포읍 반송리 → 화원읍 본리리)
비슬산 종주 등산로 이정표[청룡산 5.5km, 앞산 10.9km, 용연사 1.0km, 용문사 2.1km]가 세워져 있다. 이정표 아래쪽에 수기로 쓴 닭지만당산이란 표석이 보인다. 우회길이 있어서 길만 따라 걸으면 687.5m봉을 놓치게 된다. 지맥은 급우틀로 꺽여 급격히 내려선다. 지맥의 왼쪽이 옥포읍 반송리에서 화원읍 본리리로 바뀌는 삼읍면봉이자 삼리봉 지점이다. 지나온 876.0m봉/닭지봉은 정대리 쪽으로 돌출한 것이지만, 산너머 옥포읍에서는 이 687.5m봉을 닭지말랭이라 부른다. 천년고찰 용연사의 뒷산으로 계곡 하류 반송리 마을에서 주변 어떤 산봉우리보다 솟아보이기 때문이다. 가야산은 개 한마리(개산), 비슬산은 비둘기 한마리(비둘산) 앉을 만큼만 남고 세상 모두가 물에 잠겼던 옛날 대홍수 시대에, 이 봉우리는 닭 한마리 앉을 만큼 남아 생긴 이름이라고 한다. 청룡산을 향해 북동으로 우틀하는 지맥과 헤어져 북서로 독립해 가면서 옥포읍 반송리와 화원읍 명곡·본리리를 갈라붙이며 함박산으로 연결되는 분수령의 분기점이다. 그 능선 길을 따라 걸으면 용문삼거리와 등산 차들로 붐비는 기남재/기내미재 등산기점에 도달된다. 청룡산으로 가는 청룡지맥, 그 도중에 북서로 빠져 삼형제봉-닭지봉-용문산으로 이어지는 닭지봉능선, 그 너머 있는 대구 시가지, 정대계곡 건너 헐티재 일대 및 최정산 덩어리까지 훤하다. 북서 방향으로 분기해 기내미재를 향해 가는 닭지봉능선은 마치 팔공산 지릉 같다. 비슬산에선 유례 드물게 화강암과 마사로 이뤄진 것부터가 특이하다. 산줄기를 따라서는 온갖 형태의 기암괴석들이 도열해 예사롭잖은 풍광을 일군다. 마니아가 숱하게 붙어 애지중지하는 게 당연해 보일 정도다.
♤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花園邑)
대구시 달성군에 속하는 화원읍은 달서구에서 달성군으로 진입하는 관문에 해당되는 읍으로 북동쪽으로는 대구시 달서구, 서쪽으로는 대구시 달성군 옥포읍, 남동쪽으로는 대구시 달성군 가창면과 접하고 있으며, 북서쪽으로 낙동강을 건너 경상북도 고령군 다산면과 마주한다. 옛날부터 달서구 월배 지역과는 동일 행정 경계 내에 위치하였을 때가 많아, 두 지역은 하나의 생활권으로 간주되기도 하였다. 화원읍의 명칭은 이 지역의 화원 동산(화원 유원지)에서 유래하였다. 이곳의 성산(城山)에 조성된 화원 동산 일대에는 조선시대 상화대라고 부른 봉수대가 있었는데, 아름다운 꽃이 만발하고, 낙동강의 절경과 어우러져서 경치가 매우 뛰어나 신라경덕왕이 아홉 번이나 왔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는 곳으로, 꽃동산이라는 뜻의 화원이라 불리었던 고장이다. 화원읍은 다사읍 다음으로 달성군에서 두 번째로 인구가 많은 곳이다. 화원읍의 중심 시가지는 북부에 치우쳐 있지만 남동쪽 산지 사이에서 형성된 계곡 주변 농경지와 산록들에도 취락들이 위치하여 본리리, 명곡리 등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다. 화원읍의 중심 시가지는 대구시 달서구와 인접하며, 화원읍은 대단위 주택 지역이 위치한 전형적인 침상 도시의 성격을 가지며 천내리와 명곡리에 중심 시가지가 조성되어 있고, 이곳에 아파트 지역과 상업·서비스 시설이 집중되어 있다. 낙동강 변의 충적 평야와 비슬산 북쪽 산록의 계곡 주변 농경지에서는 농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한편 남평문씨본리세거지, 인흥서원 등 문화 유적과 화원 동산, 화원 자연 휴양림, 마비정 벽화 마을, 화원 시장 등 다양한 유형의 관광 휴양 자원이 많이 분포하고 있다.
♤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본리리(本里里)
대구 달성군 화원읍 본리리는 원래 대구부 인흥면의 면소재지였기 때문에 근본이 되는 마을이라는 뜻의 본리라 하였으며, 본리리의 많은 부분이 산지로 이루어져 있다. 비슬산 북사면에 형성된 골짜기들에서 발원한 천내천이 본리리를 흐르고 있으며, 하천 주변으로 인흥 마을(仁興洞), 마비정(馬飛亭) 등의 마을이 있다. 인흥동이 위치한 천내천 주변은 비교적 넓은 하안 평야가 형성되어 있으며, 용문지와 용문 폭포가 있는 골짜기의 수려한 자연 경관으로 인해 화원 자연 휴양림이 조성되어 있다. 비닐하우스 미나리 재배지로도 유명하다.
월경지인 달성군 가창면과 도로를 개설한다면 이 안부를 통과하는 임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 골재(561m)/ 안부/ 먹재/ 가창임도
닭지만당산에서 급우틀로 안전 목책이 설치된 급경사 등로를 내려선 희미한 임도가 지나는 안부이다. 등로 오른쪽에 달성 마비정/ 누리길 2구간 이정표[가창 정대리 2.3km, 마비정 벽화마을 3.6km]가, 왼쪽에 비슬산 종주 등산로 이정표[용문사 1.5km, 용연사 1.6km, 청룡산 4.9km, 앞산 10.3km]가 세워져 있다. 골재는 약 10년 전에 개설된 화원읍 본리리와 동편 가창면 정대리 초막골을 잇는 차량이 다닐만큼 넓은 임도가 있는 고개다. 가창에서는 차량이 올라올 수 있으나 화원쪽은 임도의 종점인 삼거리이다. 왼쪽 본리리로 내려서면 화원읍 용문지 자연휴양림 상부 계곡으로 이어지고, 오른쪽 초막골로 내려서면 약수터 고개 산길과 만나 초곡마을로 가게 된다. 지맥은 청룡산 4.9km 방향으로 나무 계단길을 오른다. 닭지봉 능선 분기점인 687.5m봉 이후 청룡지맥은 550m재로 대폭 추락한다.
화원휴양림 내에 있는 용문사 주차장에서 계곡을 따라 가창임도로 오르기도 하는데, 능선과 이어진 갈림길에서 능선을 계속 따르면 닭지봉(671.1m), 닭지만당산(687.5m)으로 오르고, 까치봉 방향으로 가면 정상석이 있는 용문봉(605m)입니다. 용문산은 용문사 뒷산으로 지형도상에 이름없는 산이지만 산 중턱에 용문사가 있어 산꾼들이 자연스럽게 용문산이라 부른다고 하네요.
♤ 용문사(龍門寺)
용문사는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비슬산 중턱에 자리해 있으며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 동화사의 말사이다. 용문사는 역사가 비교적 오래지 않아 창건과 관련된 설화가 존재하지 않는다. 용문사는 1937년 승려 수월에 의해 창건되었다. 창건 당시 매우 퇴락한 절이어서 이를 안타깝게 여겨 새롭게 절을 지어 용의 관문이란 뜻의 용문사라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용문사 인근에는 용문(龍門)이란 명칭이 붙은 지명이 다수 존재하는데, 등용문과 같이 용이 승천하며 땅과 하늘의 기운을 이어달라는 의미로 용문이란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절 창건 당시 용문사 주변에는 오래된 기와 파편이 남아 있어, 용문사 이전에도 다른 절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구체적인 기록이나 내용은 확인할 수 없다. 다만 인근에 존재하는 다른 사찰 인흥사와 연관이 있었던 사찰로 추정만 할 뿐이다. 현재의 용문사는 1992년부터 승려 본운이 중창을 시작하여 지금의 형태로 안착하게 되었다. 주변에 용이 승천했다는 이야기가 전하는 광경이 빼어난 용문폭포(계곡)가 존재하며, 폭포의 높이는 약 3m이며 폭포 위로 빼어난 계곡이 3km 정도 이어져 아름다운 풍경을 이루고 있다. 용문폭포를 ‘용문동천’이라고도 부르는데, 동천(洞天)이란 말은 신선이 노니는 공간이란 의미로, 예로부터 자연환경이 아름다운 곳에 유명인이 찾아가 동천이란 글씨를 남기는 전통 또한 찾아볼 수 있다. 실제로 용문동천도 고려시대에 유명한 도은 이숭인이 찾아왔고, 조선시대에 한강 정구, 수백당 문영박 등의 유명한 학자들이 찾아왔다고 전해진다. 이는 바위 표면에 적힌 글씨들에서 동천을 방문한 지식인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인근에는 화원자연휴양림이 존재하는데, 용문사의 인근 경관이 빼어난 것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띠지를 확인할 겨를도 없이 지나쳤습니다.^^ 바람에 날려가 아무것도 없었던듯 싶습니다.
♤ 677.2m봉/ 갑산
나무계단 침목을 따라 까칠하게 약 120m 올라서면 671m봉이다. 비실이대선배님이 작업했던 677.2m봉 산패는 사라지고 봉따먹기 선답자 띠지에 갑산이라고 쓰여 있다. 국토지리정보원에 등록되어 있는 족보있는 봉우리이다.
♤ 675m봉
벤치가 있는 쉼터를 지나고 정대숲(3.6km)갈림길 이정표도 지나며 완만한 능선을 오르내리다 안부에서 직진으로 오른 봉우리이다.
허기가 져서 10:50~11:04에 바닥에 앉아서 제과빵과 제로콜라로 잠깐 식사도 하고 다시 출발합니다.
♤ 638.8m봉
대구지맥 고신님이 설치한 준희선생님 산패가 나무에 매어 있다. 현 위치 표시목[청룡산 4.3km, 비슬산 6.8km]를 지나 오른 특징없는 봉우리로 지맥은 급좌틀이다.
♤ 마비정(馬飛井) 갈림길/ 안부/ 장의자
봉우리에서 내려서면 왼쪽 편에서 이어져 오는 우회로와 만나고, 우회로의 달성 마비정/ 누리길 2구간 이정표[가창 정대리 2.8km, 마비정 벽화마을 3.1km]를 지난다. 200m마다 세워져 있는 위치 표시목[청룡산 3.7km, 비슬산 7.4km]를 지나, 역시 우회 등산로가 아닌 직진 방향 능선 길을 따라 봉우리로 오른다. 마비정은 옛날 청도나 가창 사람들은 화원장이나 한양에 갈 때 이 마을에서 쉬어가곤 했는데 정자 옆에 우물이 하나 있어서 말들뿐 아니라 사람들도 그 우물물을 마시고 원기를 회복하여 날아간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 마비정(馬飛井)이라는 것이다. 실제 샘터가 있다.
♤ 장단이재(560m)
비슬산 종주 등산로 이정표[마비정 1.5km, 청룡산 3.4km, 앞산 8.8km, 용연사 1.6km]와 이정표 밑에 용문 미나리 작목반에서 설치한 노란색의 표지판 용문사, 마비정, 용문 미나리가 놓여있었다. 옛날에는 제법 통행이 많은 네거리로 동쪽 윙계재에서 장단이골을 지나 화원 장터로 갈 때 반드시 거치게 되는 중요한 재였다. 삼거리인 듯 하지만 장단이재는 동쪽 장단이골로도 길이 연결돼 있던 분명한 네거리였다. 즉, 비슬지맥 위의 윙계재 옛길이 화원으로 이어갈 때 거치던 게 바로 이쪽 장단이골과 장단이재 길이었던 것이다. 지맥 마루금은 이정표 뒤쪽 오른쪽으로 나 있는 우회 길이 아니라, 직진 방향의 산 왼쪽 능선으로 이어지는 등로이다. 장단이재서 본리리로 내려가는 길은 골이 아니라 칼등이라 불리는 능선 위로 나 있었다. 대부분 구간이 선명했고 우뚝한 선바위가 길손을 맞기도 했다. 하지만 휴양림 진입도로까지 이어지는 그 능선을 줄곧 타는 게 능사는 아니라 했다. 도중에 북으로 빠져 마비정마을(본리2리)로 연결되는 길이 주통로였다는 것이다. 거기서는 화원시장으로는 길이 평편하게 연결된다.
♤ 마비정(馬飛亭)/ 대구 달성군 화원읍 본리리(本里里)
마비정은 대구 달성군 화원읍 본리리에 있는 자연마을로 전설에 의하면 먼 옛날 이 마을에 하루에 천리를 달리는 비무라는 수말과 백희라는 아름다운 암말이 대나무 숲에 집을 짓고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비무가 꽃과 약초를 구하러 멀리 떠나고 백희만 대나무밭에 혼자 있을 때 전쟁터로 떠나는 마고담이라는 장수가 이곳을 지나다가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천리마가 있으면 전쟁을 이길 수 있다는 생각에 대나무밭에 있던 백희를 비무로 착각하여 전쟁터로 나갈 것을 제안하며 천리마 비무의 실력을 보길 원하였다. 이 말을 들은 백희는 비무가 전쟁터에 나가 고생하고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비무인 척 고개를 끄덕였다. 마고담은 “천리마는 화살보다 빨리 달린다 하니 너의 실력을 봐야 되겠다.” 하고 바위에 올라 건너편을 향해 화살을 날렸다. 백희는 힘껏 달렸지만 화살을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화가 난 마고담은 백희를 단숨에 베어 버렸다. 그곳에서 백마는 피를 흘리며 쓰러져 죽었다. 이때 백희의 먹이를 구하러 간 비무가 돌아와 백희의 주검을 보고 슬픔에 겨워 구슬피 울었다. 그 이후로 사람들은 비무를 보지 못하였고 비무의 울음소리만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백희의 무덤에 꽃과 약초가 끊임없이 놓여 있는 것으로 비무가 다녀간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온 나라에 역병이 돌아 사람들이 죽어 갔지만 이 마을은 백희의 무덤에 놓인 약초로 인하여 역병도 돌지 않았다고 전해 내려온다. 그리고 마고담은 잘못을 빌고자 정자를 짓고 그곳에서 일생을 마쳤다. 그 정자가 마비정(馬飛亭)이다. 이후 이 마을은 마비정이라 불리게 되었다. 일설에는 마을에서 말을 기르면 말이 살쪄서 하늘로 날아간다는 전설이 있어 마비정이라 불렀다고 한다. 마비정 마을은 위쪽 마을이라 상리라고 부르기도 하며, 최근 녹색 농촌체험마을사업을 통한 벽화마을로 탈바꿈해 대구는 물론 전국적인 관광명소로 부각되고 있다. 또한, SBS 인기 예능프로그램인 런닝맨 촬영장소로 알려져 많은 내·외국인의 관광객들이 찾고 있다.
골재에서 삼필봉에 금새 오를지 알았는데 능선을 따라 한참을 진행하고 장단이재도 지나네요. 왼쪽 아래로 삼필봉 능선과 삼필봉을 감상하며 진행했습니다.
♤ 597.1m봉
선답자 띠지가 잔뜩 매달려 있는 굵은 소나무가 있는 봉우리로 그중 하나에 인산이라고 적혀 있다. 우틀로 내려선다. 방구돌이 여럿 흩어져 있는 봉우리를 지나 지맥은 다시 좌틀로 올라선다.
직전 조망바위에서 삼필봉을 바라보고 삼필봉 갈림봉으로 올라섭니다.
♤ 삼필봉(三筆峰, 465.2m)
대구 달성군 화원읍 본리리와 달서구 도원동 경계에 있는 삼필봉은 청룡산 서쪽에서 대곡동 방향으로 뻗어 내린 봉우리로 세개의 연결된 산봉우리가 마치 붓끝과 같이 생겼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다. 세개의 봉우리 중 가장 높은 왼쪽 봉우리인 작봉은 마비정마을 앞능선 최고봉이면서 그 마을과 달서구 도원동 수밭골을 가르는 삼필봉능선 출발점이다. 까치를 연상시킨다 하여 작봉(鵲峯), 중앙은 봉우리의 정상이 시루를 얹어놓은 듯한 바위 봉우리로 되어 있어 증봉(甑峯), 가장 오른쪽은 소나무가 많다고 하여 송봉(松峯)이라고 한다. 그리고 산 아래 마을의 양반가에서 세명의 문필가를 배출한 것에서 유래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청룡지맥이 대구광역시 달서구를 처음 만나는 지점입니다.
♤ 삼필봉 갈림봉(673.2m)/ 황룡산/ 용상등/ 구군계/ 삼읍면봉(대구 달성군 가창면 정대리, 화원읍 본리리 → 달서구 도원동)
삼필봉으로 갈림길이 있는 삼거리봉이다. 비슬산 종주 등산로 이정표[청룡산 2.5km, 앞산 8.0km, 용연사 3.7km, 비슬산 9.0km, 삼필봉 1.6km]가 서있다. 지맥이 대구 달서구와 처음 만나며 지맥의 왼쪽이 대구 달성군 화원읍 본리리 → 달서구 도원동으로 바뀌는 삼읍면봉이자 삼리동봉 지점이다. 삼거리 갈림길에서 왼쪽은 삼필봉으로 향하고, 지맥은 우틀이다. 청룡산에서 비슬산, 시루봉에서 위퇴령(수밭고개), 진등(긴등)이 만나는 곳에 위치해 있다. 옛적에 용 3마리가 각 등에서 꼭대기로 올라와 서로 빨리 하늘로 승천하려고 싸우다가 3마리가 다 승천을 하지 못하고 떨어지니 그 모양이 용의 머리를 닮았다고 하여 용상등 이라고도 한다.
달성은 추경호의원이구요, 달서구 국회의원은 권영진, 유영하, 윤재옥이구요. 수성은 국회부의장 주호영의원!
♤ 대구광역시 달서구(大邱廣域市 達西區)
대구시의 서남부에 위치한 구로 동쪽으로 남구 대명동, 서쪽으로 달성군 다사읍과 고령군 다산면, 남쪽으로 달성군 가창면과 화원읍, 북쪽으로 서구 내당동과 접하고 있다. 구청은 월성동에 위치하고 있다. 금호강이 동북에서 서남 방향으로 흐르고 있으며, 대부분이 충적평야 지대로 구성되어 있다. 북쪽 달성군 다사읍과의 경계지대에는 와룡산과 궁산이 있고, 동남부에는 비슬산괴에 속하는 앞산·대덕산·청룡산·삼필봉 등으로 이어진 산지가 형성되어 있다. 신라시대에 달서화현 달불성에 속하였고, 통일신라시대에는 수창군에 속하였다. 이후 고려시대인 1143년(인종 21) 경산부에 속했던 대구현에 속하게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1419년(세종 1) 대구현이 대구군으로, 1466년(세조 12) 대구도호부로 승격하였다. 달서구 지역은 당시 대구도호부 관내 대구본부의 달서면·성서면과 화원현의 감물천면·조암면·월배면 등에 해당하였다. 1914년 지방제도 개편으로 5개 면이 달서면·성서면·월배면으로 통폐합되어 신설된 달성군에 편입되었다. 현재의 달서구는 달서면을 모태로 하고 있다. 1995년 3월 1일 달성군이 대구광역시로 편입되면서 성서공단 3차 단지 내 화원읍 구라리 일부가 달서구로 편입되었다. 특히 1988년 월성지구를 시작으로 상인, 대곡, 성서, 용산, 장기지구 등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었고, 인구가 급속하게 늘어나게 되었다. 달서구가 거대 자치구로 급격하게 발전하게 된 배경으로는 1984년에 확정된 대구시 기본계획에 의한 송현, 월배, 월성, 대곡, 성서 그리고 상인지구를 중심으로 한 유통, 공업, 집단 거주 단지 개발계획을 들 수 있다. 특히 상인동 일대는 택지 개발지구로 지정되어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형성되었다.
♤ 대구광역시 달서구 도원동(桃源洞)
대구 달서구에 있는 도원동은 골짜기가 깊고 경치가 좋아 중국 시인 도연명의 시 도화원기에 나오는 무릉도원과 같다 하여 도원동이란 지명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원래 대구부 화원현 월배면 소속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당시, 대구부에서 달성군 월배면으로 소속이 변경되었다. 1988년 대구직할시 달서구 도원동, 1995년 대구광역시 달서구 도원동이 되었으며, 수밭마을과 원덕마을이 대표되는 자연 마을이 있으며, 그밖에 자연 마을로는 가는골(細谷), 기시나골(鬼谷), 노리박골(노방골), 상그랑들(산고랑들), 새작골(新寺洞), 샘바랑골, 수밭골(숲밭), 시루봉(甑峯), 원덕(遠德), 위티재(魏退嶺)/(수밭고개), 제비골짝, 진등 등이 있다. 못밑 마을은 없어졌다.
♤ 도원지(桃源池) 갈림길/ 사거리 안부, 장의자/ 도원지
여기에도 비실이선배님이 산패작업을 하셨는데 사라지고 보이지 않는다. 도원지 갈림길 이정표[용연사 3.9km, 비슬산 9.2km, 도원지 3km, 청룡산 2.3km, 앞산 8.0km, 삼필봉 1.8km]를 지난다. 작봉에서 내려선 갈림길이다. 직진하여 희미한 길을 따른다. 곧이어 세작골재를 지난다. 도원지는 대구 달서구 도원동에 있는 저수지로 청룡산(792.6m)과 삼필봉(465.2m) 등으로 둘러싸인 골짜기를 가로질러 해발고도 100m 정도에 1957년 9월 24일 착공, 1964년 12월 31일 준공되어 농업용수를 공급하였으나 지금은 제방 아래쪽으로는 대규모 주택 단지가 개발되어 있어서 농업용수 공급기능은 거의 상실하였다. 저수지 안쪽에 분수대가 설치되어 있고 주변으로는 월광수변공원이 조성되어 주민들의 생활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 과비산(625m)/ 쉼터
도원지 갈림길에서 올라선 숲해설판과 장의자 등이 마련된 쉼터이다. 쉼터 아래로 계곡으로 넘나드는 세작골(新寺洞) 재가 있다. 서편 수밭마을 가는 산길로 수밭재보다 높이가 100m나 더 높은 세작골재도 병존하는 게 이채롭다. 나름의 용도가 있었을 터이다.
안내판과 이정표가 여러 개 서있습니다. 수밭고개 아래쪽에 목을 축이며 쉬어가던 옹달샘이 있었다고 하네요.
♤ 수밭고개(523m)/ 숲밭고개/ 재구비/ 위티재
비슬산 종주 등산로 이정표[용연사 4.5km, 수밭마을 3.0km, 가창 정대 1.8km, 청룡산 1.7km]가 서있는 임도사거리이다. 수밭재에는 [바깥매남 1.8㎞, 수밭마을 3㎞, 청룡산 1.7㎞, 용연사 4.5㎞, 비슬산 9.8㎞]라는 이정표가 서 있다. 중요한 네거리라는 뜻이다. 수밭고개는 대구광역시 달서구 도원동에 있는 고개로 재구비/ 위티재라 불렸고, 금성지에는 위퇴령이라는 이름으로 실려 있다. 이 고갯길은 가창 사람들이 화원장에 물품을 사고 팔기 위하여 이용하였으며 청도·각북의 주민들도 화원 장에 가서 물건을 구입하거나 산에서 생산한 땔감 등을 팔러 다닐 때 넘나들던 가창과 도원동을 이어주던 옛 산길이였다. 그 중 동쪽의 가창 정대리 안매내미·바깥매내미 두 마을 쪽으로 나뉘어 잘 발달한 산길은 옛 도보시대 때 매우 중요한 기능을 했을 터이다. 2020년 현재 편백나무와 밤나무를 식재하여 등산객들을 위한 쾌적한 산행길을 조성하고, 쉼터를 새롭게 조성하는 등 옛길을 복원하였다. 수밭고개를 지나 능선 왼쪽 사면의 등로를 따라 오른다.
♤ 수밭마을/ 숲밭마을
수밭고개에서 왼쪽으로 3km 정도 내려가면 도원동에 속해있는 수밭마을이 있다. 수밭마을은 도원동에서 가장 큰 마을로 마을 앞에 느티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었는데, 약 500여 년 전 선비 박씨가 이곳에 정착할 때 숲이 울창하여 추전(萩田)이라고 부르던 곳이 숲밭(수밭)으로 불리다가 지금의 수밭이 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도원지 일대에 수변공원이 조성되어 시민들의 휴식공간이 되고 있다.
666.3m봉으로 올라서며 가창호도 보이고, 남동쪽으로 비슬지맥 최정산(最頂山, 906.2m)과 멀리 우미산, 삼성산, 상원산 등을 찾아봅니다.
♤ 666.3m봉/ 구군면계/ 삼리동봉(대구 달서구 도원동, 달성군 가창면 정대리 → 오리)
참나무에 준희선생님 산패가 매어 있다. 지맥의 오른쪽이 분기점에서부터 오랫동안 같이 했던 가창면 정대리 → 오리로 바뀌어 여기부터 달서구 도원동과 가창면 오리의 경계를 따라 산성산까지 함께 한다. 수밭재 이후 지맥 흐름은 청룡산을 향해 줄곧 치솟아 약 270m 고도를 높인다. 수밭재를 지나 약간 오르면 등로 좌우 잡목 사이로 마을이 보인다. 왼쪽은 수밭마을과 그 아래 도원지가 조망되고 오른쪽은 정대마을이 내려다보인다. 나무계단길을 오르는 왼쪽으로 청룡산이 보인다. 666.3m봉 정상 직전에 왼쪽 사면으로 우회하도록 나무계단길이 조성되었다. 계단정상부에서 오른쪽의 666.3m봉을 지나 가파른 오르막 등로를 약 15분 올라서면 배바위다. 준희선생님 '힘힘힘' 산패가 있었다는데 보이지 않는다.
아니 세상에 후조(候鳥)인 가창 오리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는데... 이름이 이렇게까지 유사할 수 있나요?^^
♤ 대구 달성군 가창면 오리(梧里)
오리라는 이름은 예전부터 이 마을에 오동나무가 많아서 오동나무를 뜻하는 한자 '오(梧)'를 붙여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원래 오리는 대구부 상수서면에 속하는 지역이었으나, 이후 여러 번 행정구역이 바뀌다가 1995년 달성군 전체 지역이 대구광역시에 포함되면서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오리가 되었다. 비슬산에서 뻗어 나온 산줄기에 둘러싸여 있다. 오리의 북서부는 청룡산으로 가로막혀 있으며, 그 사이에는 달서구 상인동 달비골로 넘어가는 달비 고개가 있다. 오리의 남쪽에는 최정산과 주암산이 솟아 있고, 청룡산과 최정산의 계곡 사이로 흐르는 용계천이 오리를 통과하여 가창호로 이어지고 있다. 오리의 옛 마을인 양달머구·양지·양달은 청룡산의 남서쪽을 등지고 있는 양지바른 곳에 자리 잡은 마을이며, 응달머구·음지·응달은 최정산과 주암산의 북서쪽을 등지고 그늘진 곳에 위치한 마을이다. 또한 구수암·구삼은 마을에 거북이 모양의 바위가 있어 불리게 된 이름이라고 전해진다. 마을 동쪽은 대구광역시의 상수원 보호구역인 가창댐 호수의 일부를 포함하고 있다. 가창댐 위쪽에 위치한 농촌 마을인 오리는 오리 1, 2리로 나뉘어 있다. 대구광역시의 상수원 보호구역인 가창댐 상류쪽이어서 자유롭게 개발할 수 없다. 용계천을 따라 군도 8호선이 오리를 통과하여 용계리에서 국도 30호선과 만나는데, 이 근처에 많은 집이 모여 있다. 오리는 산지에 위치한 농촌 마을이지만 용계리와 이웃하고 있어 대구광역시로 가는 교통은 좋은 편이다.
왼쪽은 천길 낭떠러지이고 조망지점이 자주 나타나 조심해야할 구간입니다. 이 구간의 백미가 고령의 칠봉지맥을 넘어 성주 가야산(伽倻山, 1,432.6m)을 찾아보는 재밉니다. 홀대모에는 수도지맥에서 분기한 가야지맥이 새롭게 소개되어 있네요.
♤ 배바위(760m)/ 배방우
도중에 배바위봉이 하나 있고 지형도는 거기에 배바위가 있다고 표시해 놓고 있지만 주목할 바 못 된다. 그보다는 청룡산 도달 직전에 솟은 절벽바위/ 배바위가 장관이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 지역에 비가 많이 와서 모든 마을과 산들이 물에 잠기게 되는 것에 대비하여 이 바위에다 배를 매어놓았다고 하여 배바위 즉 배방우라고 하였다. 비슬산 쪽을 바라보면 지나온 청룡지맥의 능선들이 산너울을 일으킨다. 배바위 정상에서 도원지 뒤로 대곡 지구 아파트숲, 그 뒤로 사문진교와 화원유원지, 강정고령보가 보이고, 오른쪽 편으로 계명대학교와 와룡산, 궁산이 조망된다. 배바위에 서면 사방으로 조망이 아주 멋지게 펼쳐져 보인다.
♤ 청룡산(靑龍山, 794.1m)/ 헬기장/ 3등삼각점(대구 337, 1994 재설)
정상부에 넓은 헬기장이 있고, 헬기장 끝에 삼각점과 정상석이 자리한다. 산에서 수행하던 이무기가 청룡이 되어 승천했다고 하여 청룡산으로 불러졌다. 청룡산은 대구 달서구 도원동에 위치한 산으로 월배와 가창의 경계를 이루며 넓게는 달서구·남구·수성구와 달성군 가창면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도시 한쪽인 달서구에 치우쳐 있고 앞산의 유명세에 가려 잘 알려지지 않은 산이다. 비슬산에서 북동으로 뻗은 청룡지맥은 청룡산의 이름을 딴 것으로, 해발 고도 700~800m 이상의 정상부 주변에는 경사가 완만한 고위 평탄면을 이루고 있다. 비슬산지에서 북동쪽 방향으로 산성산(山城山, 653.3m), 앞산(658.7m), 대덕산(大德山, 546m) 등으로 이어진다. 청룡산은 넓은 의미의 앞산에 속하는 산으로 앞 산괴 과운데 가장 큰 바위 능선이 절벽을 이루며, 큰 성벽처럼 뻗은 경치는 앞산의 웅장한 장관 가운데서 으뜸이다. 수밭골을 내려다보는 암벽능선은 청룡성능(靑龍城陵)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만큼 청룡산이 빚어낸 최고 걸작의 암벽성능이다. 이 능선은 백악기 말에 분출·관입한 안산암질 각력암으로 이루어져 있어 침식에 대한 저항력이 크기 때문에 비교적 높은 산지를 이루고 있다. 청룡산 정상부에 있는 이정표가 가리키는 청룡산 수련관 3.24km 방향으로 좌틀로 내려서며 진행하다가 갈림길에서 오른쪽 좋은 등로를 버리고 왼쪽 암릉으로 달라붙는다.
서쪽으로 비슬산, 가야산, 낙동강/ 금호강의 합수점을 복습겸 빠르게 스캔하고, 서북쪽으로 팔공지맥 가산을 찾아 전번에 끝낸 황학지맥 산줄기를 찾아보니 '저기가 뚫렸더라면' 하고 가슴이 철렁합니다.
♤ 상여바위(752.8m)/ 생이바위/ 추락주의
청룡산에서 계속되는 암릉지대를 지나 약 15분 진행하면 조망이 빼어난 대단한 절벽능선이 이어진다. 도원지와 달서구 도심 빌딩숲이 내려다 보이는 이 암봉을 그 아래 수밭마을 사람들은 모양새가 상여처럼 생겼다고 하여 상여바위/ 생이바우라 했다. 평평하고 길게 이어진 모습이 상여의 지붕을 연상케 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게 절벽임을 감안하면 상여덤이라 하는 게 더 적절할 것 같다. 청룡산을 지나면 머잖아 달비고개와 산성산을 거쳐 대구 앞산으로 이어진다. 암릉 옆으로 난 등로를 약간 더 가면 '등산로 아님' 안내판이 왼쪽 지맥길에 놓여있다. 지맥은 안내판을 넘어 능선으로 리지를 이어가야 하지만 대부분 질러가는 우회길을 따른다. 왼쪽으로 기암 아래쪽에 동굴이 있다는데 확인하지는 못한다.
♤ 720m봉
비슬산 종주 등산로 이정표[청룡산 1.1km, 비슬산 9.0km, 앞산 4.4km, 달비고개 2.5km]와 119구조 표지판(달서 9-2)이 세워져 있다. 지맥은 바위 조망처를 살짝 우회해 오른쪽 세시 방향으로 바꾸어 나간다. 보훈병원 갈림길 이정표(달비고개 2.76km, 청룡산 정상 1.15km, 보훈병원 2.11km, 청소년수련관 2.09km)를 지난다.
♤ 680m봉
봉우리 한가운데 나무 한 그루가 정상석을 대신한다. 680m봉에서 지맥길은 다시 우틀로 꺾어 내려서서 703m봉으로 이어진다. 결국 20분 전 우회로 갈림길에서 본다면 ⊂자로 이어 온 셈이다. 비슬산 종주 등산로 이정표[청룡산 1.6km, 비슬산 13.1km, 앞산 3.9km, 달비고개 2.0km]와 119구조 표시판(달서 8-2)를 지난다.
♤ 703.4m봉/ 헬기장
헬기장 자리에 소나무가 무성하다. 법광대선배님 띠지가 지키고 있다. 봉우리가 평편하게 길게 이어진다. 청소년수련관 갈림길 이정표(청소년수련관 1.82km, 달비고개 2.35km)를 지난다. 능선과 안부와 봉우리를 오가는 편안한 등로가 이어진다.
♤ 690m봉
다시 얕은 봉우리인 695m봉을 내려서면 119 구조 표시판(달서 8-3)이 있고 등로로 내려선다. 등산로와 이정표가 잘 조성되어 있다.
♤ 660m봉
편안한 등로가 계속 이어진다. 삼거리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내려선다.
왼쪽으로 우회길이 있는데 갈림길에서 잘 생긴 등로를 버리고 오른쪽으로 올라섭니다.
♤ 593.4m봉/ 월배봉/ 느티나무약수터 갈림길
정상에는 많은 띠지들이 있고, 준희선생님 산패가 소나무에 매어 있다. 우회로가 있는 삼거리 갈림길에서 왼쪽 선명하고 넓은 등로를 따르면 달비고개 0.5km 이정표를 지나고 육각정이 있는 능선을 지난다. 직진하면 소나무 그루터기가 있는 정상이다. 좌틀하여 북쪽으로 내려선다. 오른쪽은 약 200m 떨어진 느티나무 약수터를 경우하는 길이며, 삼각점봉인 622.3m봉을 다녀오는 갈림봉이다.
♤ 산성산 월배봉(622.3m)/ 3등삼각점(대구 397/ 1982 재설)
삼각점봉으로 대부분 우회해서 그냥 지나치는 봉우리이다. 622.3m봉을 찾았다면 다시 593.4m봉으로 되돌아 나와 느티나무약수터에서 달비고개로 간다.
여름에는 느티나무약수터를 우회하면 안되겠죠. 문제는 갈수기에도 물이 잘 나오느냐 입니다.
♤ 느티나무약수터
약수터 위에 쉬어갈 수 있도록 평상 두개와 큰 느티나무 한 그루가 있다. 약수터에서 왼쪽으로 난 등로를 따라 나가서 오른쪽 달비고개로 내려선다.
달비고개에서 산성산삼거리 방향으로 약 150m 진행하다가 등산로가 없는 오른쪽 능선으로 올라섭니다.
♤ 달비고개(590m)/ 월배현/ 월배령/ 사거리 안부/ 정자/ (달성군 가창면 오리, 달서구 도원동 → 상인동)
지맥의 왼쪽이 달서구 도원동 → 상인동으로 바뀌는 지점이다. 비슷한 이정표 두개가 서있다. 달비고개는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오리와 달서구 상인동을 연결하며 산성산 남쪽과 청룡산 북동쪽 산줄기 사이의 안부에 있는 고개로 옛날 달성군에서 가창으로 넘어다니던 고개였다. 월배현, 월배령이라고도 한다. 수밭고개 5.3km, 청룡산 3.5km, 가창(용계교) 3.7km, 평안동산 0.9km, 산성산 정상 0.9km, 비슬산 14.5km 달비고개의 오른편에는 달비고개 ~ 용계초등 숲길 안내도와 정자 쉼터를 지나는 일반 등로가 이어지고, 지맥길은 이정표에서 직진 방향인 우상향으로 대구항공무선표지국이 자리하는 산성산을 향해 등로가 없는 경사면을 꾸준하게 올라서면 산성산 가는 양회임도와 만난다.
♤ 월배(月背)
달성의 달(達)은 중남부 고대어 지명에서 산 또는 성 등 높은 곳을 의미하던 말이며, 대구의 옛 이름인 달구벌(達句伐・達丘伐), 달구화(達句火・達丘火), 달벌(達伐) 등에 들어가는 달과 유래가 같다. 이처럼 달은 고어(古語)로 높은 곳이나 산을 뜻한다. 대구지하철 1호선 상인역 동쪽에 위치한 대덕산과 청룡산 사이에는 달비골 또는 달배공이라는 골짜기가 있다. 이 골짜기에서 월배라는 지명이 유래되었다. 927년 왕건이 공산전투에서 견훤에게 크게 패한 후 도망치는 중에 어느 계곡에 위치한 임휴사에서 쉬고 있을 때 크고 둥근 달이 떠올라 왕건의 등 뒤를 비추어 달배골이라고 불려졌다는 설과 계곡이 깊어 달이 뜨면 달빛이 계곡을 환하게 비춘다고 하여 달비골이라고 불려졌다는 두 가지 설이 전해진다. 달을 밤하늘의 달로 보고 한자화한 지명이다.
♤ 대구광역시 달서구 상인동(上仁洞)
상인동은 대구시 달서구에 있는 법정동으로 월배지구의 중심지다. 지명은 우리못이라고 불리는 상인지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1981년 대구시가 대구직할시로 승격되면서 달성군 월배읍 전역으로 남구 월배출장소가 설치되었다. 1982년 월배출장소 관할 구역 일부로 월배1·2동이 신설되었고 이어서 1983년 월배3동이 신설되었다. 1988년 대구직할시 서구 일부와 남구 일부로 달서구가 신설되면서 월배출장소는 폐지되고 월배동은 신설되는 대구직할시 달서구에 편입되었다. 1990년 월배2동은 월배2동과 월배4동으로 행정동이 분동되었다. 1995년 대구직할시가 대구광역시로 개칭되면서 월배동은 대구광역시 달서구 소속으로 변경되었다. 1996년 월배4동이 상인1동, 월배2동이 상인2동, 월배6동이 상인3동으로 행정동의 명칭이 변경되어 오늘에 이른다. 상인3동은 앞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으며 상인1동과 상인2동이 주거지역인데 비하여 상인3동은 대덕산이 있어서 대부분 임야지대인지라 별다른 시설이나 번화가가 없어 다소 휑한 느낌이 드는 동네다. 동네가 앞산 달비골 근처에 있어서 등산객들이 많이 찾으며 동쪽 끝자락에는 수성구 파동, 범물1동으로 향하는 4차 순환도로(앞산터널로)가 있다. 또 월광수변공원이 근처에 있다.
♤ 산성산(山城山, 653.4m)/ 구군계/ 삼면동봉(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오리, 수성구 파동 → 남구 봉덕동)
대구 달성군 가창면 오리, 달서구 상인동, 남구 봉덕동, 수성구 파동에 걸쳐 있는 산으로 능선길에 정상석이 시설물이 있는 정상을 대신하고 있다. 산성산의 이름은 성이 없는 짝퉁이지만 달성군과 대구광역시의 세개 구가 만나는 청룡지맥의 중심지점이라 할 수 있다. 현재는 한국공항공사 대구무선항공기지국(민간인 출입금지)이 있어 차량으로도 정상까지 갈 수 있으며 삼각점도 물론 그 안에 있다. 대구 남구구민 새해 해맞이 행사장이기도하다. 산성산은 이름과 달리 실제 산성 유적이 없어 산이름과는 전혀 무관한 대구 앞산의 일부 능선에 불과하다. 오히려 앞산 케이블카 종점 가장 상단부에 문화재로 지정된 대덕산성이 있으므로 그 일대를 포함한다면 경찰 통신대 있는 곳(앞산)이 산성산이라야 합당하다. 매자골 정상이 대덕산이라는 것 역시 전혀 근거가 없다. 고금의 상황을 정리하자면 산성산 정상은 고산골 정상 미군 통신대가 있던 곳으로, 지금의 앞산이라고 불리는 산 전역은 성불산이었으며 현재의 앞산 정상은 산성산이고 고산골 정상이 대덕산이 된다.
♤ 대구광역시 수성구(大邱廣域市 壽城區)
대구시 동남부에 위치한 구로, 동쪽으로는 경북 경산시, 북쪽으로는 동구, 서쪽으로는 중구와 남구, 남쪽으로는 달성군과 접해 있으며 구청은 대구광역시 수성구 범어동에 있다. 신라시대에는 위화군 또는 상촌창군이었는데, 통일신라시대인 경덕왕 때 수창군으로 바뀌었으며, 가창으로 기록된 곳도 있다. 고려 초에 수성군으로 바뀌었고, 1390년(공양왕 2)에 해안현을 겸하여 감무를 두었다.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수현내면, 수동면 그리고 수북면이 통합되어 달성군 수성면으로 편제되었다. 1981년 7월 1일 대구시가 대구직할시로 승격되면서 경산군 고산면이 편입되어 구역이 확장되었다. 많은 인구유입으로 인해 1992년 9월 1일로 만촌2동이 만촌2·3동, 황금동이 황금1·2동, 지산동이 지산1·2동으로 분동하였다. 1995년 1월에는 대구직할시가 광역시로 되면서 기초자치단체가 되었다. 1996년 1월 범물동이 범물1·2동, 고산1동이 고산1·3동으로 분동하였다. 그리고 2001년 12월 31일 고산2동의 법정동 중 내환동을 대흥동으로 변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수성구에는 효자 하광신, 황금동의 못안과 봉천, 두사충과 모명재, 영험서린 느티나무, 형제봉의 전설, 고모령의 전설 등 다양한 전설과 민담이 내려오고 있다. 현재 제2작전사령부 동쪽에 2개의 산봉우리가 나란히 있는데 하나는 좀 높고 하나는 좀 낮다. 이 두 봉우리를 형제봉으로 부르고 있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은 전설 때문이다. 아득한 옛날 이곳에 힘센 장군 남녀가 살고 있었는데 하루는 둘이 서로 산 쌓기 내기를 했다. 오빠는 옷섶으로 흙을 날라다 산을 쌓기 시작했고 여동생은 치마폭으로 흙을 날라 산을 쌓기 시작했다. 내기의 방법은 해가 뜰 때부터 해가 질 때까지 하루 동안 누가 더 높은 산을 쌓는가 하는 것이다. 흙을 담아 나르는 것의 크기가 오빠의 옷섶보다는 여동생의 치마폭이 훨씬 넓어 그런지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가려는데 누이동생의 산이 오빠산 보다 더 높았다. 심술이 난 오빠가 동생 산을 짓밟아 버려 높던 누이동생의 산이 뭉퉁해 졌다. 그래서 끝이 뾰족한 산을 형봉(兄峰), 다른 밋밋한 산을 제봉(弟峰) 또는 매봉(妹峰)이라 부르고 이 산 아래 마을을 형제봉골 또는 양지마을이라 부른다. 그리고 이 골짜기에서 남부주차장으로 나가는 계곡에 옛날 지장보살을 모신 지장사가 있었다 하여 이 계곡은 지장골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또 옛날 지장골과 형제봉골 일대에는 뱀이 많았기 때문에 이 지역을 통틀어 뱀골이라 불렀다고 한다. 현재 제2작전사령부 영내에 있는 못 이름이 사동지(巳洞池)인 것도 그 때문이다. 그리고 고모령의 전설은 다음과 같다. 형제봉 사이에 있는 고개인 고모령에는 옛날 남편 없이 어린남매를 키우는 홀어머니가 있었는데 하루는 스님 한분이 와서 이 집은 전생에 덕을 쌓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가난하므로 덕을 쌓으면 부자가 될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이에 어머니와 어린 남매는 덕을 쌓기 위해 흙으로 산을 쌓았다. 그리고 이것이 현재의 모봉, 형봉, 재봉이라는 3개의 산봉우리가 되었는데 동생과 형이 서로 높이 쌓고자 시샘을 하여 싸우는 것을 보고 어머니는 크게 실망하여 자식들을 잘못 키웠다는 죄스러움으로 집을 나와 하염없이 걷다가 고개 정상부에서 집을 향해 뒤돌아 봤다는 전설이다. 즉 뒤돌아 볼 고(顧), 어미모(母)를 합쳐 그 고개를 고모령으로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고개 아래 마을이름도 고모마을이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 대구광역시 수성구 파동(巴洞)
대구시 수성구 파동 일대는 중화양씨와 김해허씨가 개척한 마을이라고 한다. 파동의 옛 지명으로는 파잠리, 파남동, 파북동이라 하였는데 1914년 달성군 가창면에 편입되었다. 1958년 1월 가창면이 대구시에 편입될 때 자연스럽게 편입되었으며, 1963년 가창면이 달성군으로 환원될 때 유일하게 달성군으로 환원되지 않고 대구시에 잔류해 같은 해 신설된 동구에 속했다. 1980년 4월 동구 남쪽이 수성구로 분구되며 수성구에 속하였다. 대구 시가지의 동남쪽 끝자락에 있다. 비슬산에서 흘러나온 신천 동쪽에 언덕을 올라가며 형성된 동네다. 신천 서쪽도 행정구역상으로 파동이 있기는 하나 사실상 신천 남동쪽에 있다고 봐도 된다. 대구에서 남쪽인 청도군 이서면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지역으로 여기서 남쪽이 달성군 가창면이고 대구 시민의 식수를 일부 담당하는 가창댐이 있다. 대구에서 살기 좋은 마을을 꼽으라면 '일파이무(一巴二無)'라 하여, 첫째는 파동이고 둘째는 무태동(북구 무태조야동)이라 하는 옛 이야기가 있었다. 양쪽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신천을 따라 세로로 길게 늘어선 형태를 띠고 있어서 전형적인 분지 지형인 대구에서도 독특한 주거 환경을 갖고 있다. 파동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발전하고 있다. 재개발과 재건축이 급격하게 진행된 지역으로, 7,000세대 이상 규모의 아파트 단지가 재개발로 들어섰고, 이 밖에도 수성맨션, 대자연(1,2차 둘 다)맨션도 재건축을 앞두고 있다. 2025년 3월 재개발, 재건축에 힘입어 인구가 3천명 증가하였다. 원래 치킨집이나 중국집, 분식집, 구축 아파트, 주택들밖에 없었지만 신축 아파트들이 들어섬에 따라서 각종 카페가 생기고 있다.
♤ 산성산 갈림길/ 구군계/ 삼면동경계면(대구광역시 달서구 상인동, 달성군 가창면 오리 → 남구 봉덕동)
국가지점번호와 이정표(비슬산 14.9km, 청룡산 4.0km, 산성산 정상 0.6km, 달비골관리소 3.4km, 고산골관리소 2.9km)가 서있다. 산성산 아래 양회임도와 만나는 곳이 달서구 상인동, 가창면 오리, 남구 봉덕동이 만나는 지점으로 우틀하여 양회임도를 따라 산성상을 다녀온다. 지맥은 다시 이곳으로 내려와 양회임도를 따라 직진하며 달서구 상인동과 남구 봉덕동의 경계를 따른다.
♤ 대구광역시 남구(大邱廣域市 南區)
대구시 중남부에 위치한 구로 동쪽으로는 수성구, 서쪽으로는 달서구 송현동, 남쪽으로는 달성군, 북쪽으로는 중구와 접하고 있다. 중구, 서구와 더불어 대구의 구시가지에 속하는 지역이다. 구청은 봉덕동에 있다. 전형적인 남고북저형 지세이다. 남부 산지는 비슬산을 주봉으로 하여 북동 방향으로 최정산, 청룡산, 산성산, 앞산, 대덕산으로 연결되는 비슬산괴(琵瑟山塊)이다. 북쪽 지역은 남부 산지와는 달리 낮고 완만한 신천 주변에 충적평야로 이루어져 있다. 남구를 둘러싸고 있는 비슬산괴에는 앞산을 중심으로 서쪽에는 달서구와 경계를 이루는 대덕산이, 동쪽에는 산성산이 있다. 특히 앞산의 북쪽 사면에는 정상에서 안일사·안지랑으로 이어지는 안지랑골, 은적사 봉덕동으로 이어지는 큰골 등이 형성되어 있다. 중소하천은 대부분 남부 산지에서 발원하여 북류하여 신천(新川)에 합류한다. 1980년대에는 현금부자들이 앞산 기슭에 고급주택을 지어 모여 살던 대표적인 대구의 부촌과 일반 서민 주택촌이 혼재된 형태였으며, 아파트 단지도 대구를 대표하는 고급 아파트로 높은 위상을 자랑하였으나, 1990년대부터 부자들의 대부분은 새로 개발된 수성구로 빠져 나가며 옛 위상을 잃었다. 남구에 세개나 있는 캠프 워커, 캠프 헨리, 캠프 조지 같은 주한미군 기지들도 슬럼화에 일조하고 있다. 이 기지들 때문에 재산권 행사는 물론 재건축이 힘들며, 고도제한이 걸려 있어서 7층 이상 고층 건물들을 남구에서 거의 찾아보기 힘든 이유가 이 때문이다. 최근 들어 기존 헬기장 부지 주변에 고층 아파트가 지어짐으로 보아 고도 제한이 해제된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군사 문단에 나오듯 군부대 전체를 이전하는 사업이 추진 중이라 미래가 밝다.
♤ 대구광역시 남구 봉덕동(鳳德洞)
봉덕동은 대구시 남구에 있는 동으로 이천동과 더불어 남구의 최동단에 있으며, 북쪽의 이천동과는 생활권이 거의 같다. 남구청네거리를 기준으로 동의 서쪽은 대명동, 동쪽은 수성구 중동 생활권이라고 볼 수 있다. 수성구 중동 및 상동과 강 건너 만나는 지역이다. 남구 행정의 중심지로 남구에서 제법 큰 규모의 시장인 봉덕시장이 있다. 괴물, 기생충 등을 제작한 봉준호 감독의 출생지로 알려져 있다. 본래는 대구부 수성현 하수서면의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봉산동과 덕산동을 병합하여 봉덕동이라 하였다. 이 곳은 큰 골의 동편으로 앞산공원의 일부와 고산골, 화교학교, 봉덕시장, 남구청 등이 있다. 지난 날에는 앞산 밑에 이 부근에서 으뜸가는 마을로 삼정골이 있었고, 용두동 부근에는 용두산과 토성이 있었다. 1929년경 대구중학교 동남편 일대에 대구 지역 최초의 능금 과수원이 있었는데, 그 후 인근 경산, 하양 등지로 재배면적을 넓혀 나갔다고 전해진다.
♤ 고산골/ 고산골 공룡공원
고산골은 대구 남구 봉덕동 앞산에 발달한 여러 골짜기 중의 하나이다. 고산골의 유래는 신라 말엽 왕실에는 임금의 대를 이을 왕자가 없어 걱정이 컸다고 한다. 애가 탄 왕은 각지의 용한 의원을 모두 부르고 좋은 약을 다 썼지만 왕비의 몸에는 태기가 없었다. 어느 날 밤에 백발노인이 나타나 서쪽으로 수 백리 되는 곳에 산 좋고 물 맑은 곳이 있으니 그 곳에 절을 짓고 정성을 다하면 소원을 이룬다고 말하고 사라졌다. 왕은 곧 이곳에 절을 짓고 이름을 고산사(高山寺)라 했고 왕비는 이 절에 와서 백일기도를 드렸는데 곧 태기가 있어 옥동자를 낳고 이듬해 또 왕자를 낳았다. 임금은 대단히 기뻐하여 전국의 죄수를 석방하고 큰 잔치를 여는 한편 고산사에 3층 석탑을 기념으로 세웠다. 그 뒤 고산사에는 자식 없는 부녀자들의 백일기도 행렬이 끊이지 않았으며 그 후 이곳을 고산골이라 불렀다고 한다. 고산사는 임란 때 왜병에 의해 소실되었는데 당시 왜병은 석탑 속에 있었던 보물까지 훔치려 하자 갑자기 벼락이 떨어져 왜병은 즉사하고 상층 일부도 부서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1961년 부근에 법장사를 중건하게 되었고 석탑의 잔해를 모아 복원하였으며 당시 고산사가 소재 하였다고 하여 고산골이라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 2006년 앞산 고산골에서 1억만년 전 중생대 백악기 초식공룡의 것으로 추정되는 발자국 화석이 발견되어 2017년에 대구시 남구청에서 마을사업으로 조성한 공원으로 이곳에는 티라노사우루스, 스피노사우루스, 스테고사우르스, 브라키오사우루스, 파키케팔로사우루스의 로봇공룡이 실물과 비슷한 크기로 제작되었다.
이 별 볼일 없는 봉우리를 지나면 주상절리는 못 보는 모양입니다.
♤ 월배산(月背山, 603.3m)/ 기지국중계기/ 대구 남구 봉덕동
양회임도 길옆에 생뚱맞게 솟아 있다. 맥길인지조차 모른 채 그냥 지나치는 사람이 태반이다. 월배봉 또는 월배산은 달배골 계곡 끝머리인 달배고개 북쪽에 솟은 산봉우리이다.
물과 초코다이제스트로 잠깐 요기를 하고, 배낭을 나무 뒤에 감춰두고 앞산으로 출발합니다.
♤ 월백산(585m)/ 안부/ 앞산갈림삼거리/ 구계/ 삼동경계면(대구 달서구 상인동, 남구 봉덕동 → 대명동)
지맥을 벗어난 앞산을 다녀오는 갈림길 능선 안부이다. 왕복거리 약 2.1km로 약 50분 소요된다. 앞산을 다녀오려 좌틀로 내려선다. 산불감시초소로 향하며 오른쪽이 대구 남구 봉덕동 → 대명동으로 바뀐다. 앞산을 다녀와 왼쪽 아래로 내려서며 봉덕동으로 들어서서 앞산순환도로로 내려선다.
성불정 앞 조망바위에 올라서 청룡산에서 ⊃자로 내려온 능선과, 멀리 최정산 정상의 M/W송신탑이 보입니다.
♤ 삼국시대 고분 유적
앞산을 다녀올려면 찐빵과 만두봉 세개를 넘어야 한다. 그 중에 첫번째 봉우리이다. 유적은 등산로 한가운데에 있어 사람들의 왕래로 인해 봉분이 지속적으로 유실되고 석곽이 노출된 상태로 훼손이 진행되고 있어 2013년 10월 28일부터 동년 11월 8일까지 긴급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발굴조사에서는 삼국시대 석곽묘 2기와 높은 굽다리접시, 항아리, 쇠칼 등 13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고분은 단일 봉분내의 주.부곽식 혹은 병열배치된 1.2곽일 것으로 보인다. 석곽묘는 등고선방향과 나란하게 병렬로 배치된 11자형으로 수혈식석곽묘의 구조를 보인다. 주변 지형등을 고려해 볼때 봉분은 저경 730cm정도의 원분으로 추정되며, 출토유물로 보아 5세기 중엽에 조성된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고분의 구조나 부장양상은 대구지역 고분의 일반적인 양상을 보이지만 고분이 조성된 위치가 비교적 고지라는 점으로 보아 고고학적으로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한편, 고분 주변으로는 대구 분지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앞산 정상부를 포함하는 북서쪽에 삼국시대 포곡식 산성인 대덕산성이 위치한다. 이처럼 고분과 산성이 함께 있으면서 해발 500~600m정도의 고지에 고분이 조성된 예는 흔치 않은데, 이는 평지나 낮은 구릉지대에 입지하는 고분과는 달리 어떤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추정된다.
앞산에서의 조망은 사방으로 끝간 데 없이 펼쳐집니다. 야경도 멋지닥 카네요. 저는 공산전투에서 분루를 삼키며, 야반 도주를 해야했던 왕건의 도주로를 찾아보기로 합니다.
♤ 앞산(657.9m)/ 성불산(成佛山)/ 2등삼각점(대구 24/ 1988 재설)/ kbs송신소, 경찰중계기철탑/ 대구 남구 - 달서구
비슬산에서 북동으로 가치를 친 청룡지맥이 약 17km 거리에 이르러 빚어 놓은 산이다. 지맥은 앞산에서 더 나아가 대구 중심가에서 서쪽으로 휘어져 약 16km인 궁산에 이르며 여맥을 낙동강 지류인 금호강에 가라앉힌다. 앞산은 대구광역시의 남구, 달서구, 수성구에 걸쳐 분포한 산으로 달서구 상인동과 남구 대명동의 경계에 있다. 중앙에 앞산 정상과 서쪽으로는 대덕산, 동쪽으로 산성산 능선을 모두 합쳐 세개의 산을 통틀어 앞산이라고 부르며 대구의 자연공원으로 중요한 기능을 가진다. 앞산은 일제강점기 당시 제작된 지형도에서는 전산(前山)으로 표기되어 있다. 『대구읍지』에 의하면 "성불산(成佛山)은 대구부의 남쪽으로 10리쯤에 위치한다. 관기안산(官基案山)이다. 비슬산으로부터 비롯된다."라고 표현되어 있어 앞산이 성불산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관기안산'의 의미는 대구부의 근원이 되는 터인 '경상감영공원'에서 본 풍수적 개념의 안산(案山)을 말한다. 성불산에 대한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여지도서』·『대동지지』·『증보문헌비고』 등에도 있다. 일설에는 앞산이 풍수적 개념인 안산에서 유래했다고도 한다.
♣ 팔공산(八公山): 서기 927년 동수대전에서 여덟 명의 충성스러운 장수가 순절했다고 해서 후일 공산을 팔공산이라고 부르게 됐다.
♣ 무태(無怠): 무태는 왕건이 군사를 이끌고 지금의 대구 북구 서변동을 지나 연경동 방향으로 진군하던 중 군사들에게 “경계를 게을리하지 말고 태만하지 말라”고 당부했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무태조야동은 현재 대구 북구 동·서변동을 일컫는다.
♣ 연경동(硏經洞): 왕건은 무태에서 숙영을 하고 북구 연경동에서 동구 지묘동 방향으로 향했다. 연경동은 ‘선비들이 글 읽는 소리가 들렸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라고 전해진다.
♣ 나발고개: 진군을 계속하면서 지금의 지묘 3동에서 지묘 1동으로 가는 고개에서, 적진을 향해 진군의 나팔을 불었다고 하여 나발고개라 부르게 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견훤의 군사가 왕건의 군사를 둘러싸고, 쳐들어가며 나팔을 불었다고 해서 나발고개라고도 하고, 왕건의 군사를 깨뜨린 견훤 군이 이 고개를 넘으면서 나팔을 불었다고도 한다.
♣ 파군재(破軍峙): 파군재는 동구 불로동에서 동화사와 파계사로 가는 길목에 있다. ‘군대가 깨졌다’는 의미다. 왕건은 파군재에서 견훤군에 무참히 패배했다. 파군재 삼거리에는 현재 신숭겸 장군의 동상이 서 있고 뒤로는 동수대전 전투 장면이 그려진 부조가 있다.
♣ 지묘(智妙)동: 지묘는 ‘지혜로운 묘책’이라는 뜻이다. 신숭겸이 왕건의 갑옷으로 갈아입은 채 어가를 타고 적으로 돌진, 대신 죽음으로써 왕건을 구한 전략에서 비롯된 지명이다. 왕건을 무사히 구하는 과정에서 많은 장수가 죽었다. 왕이 이를 추모하기 위해 그 자리에 지묘사라는 절을 세웠으나 현재는 없어지고 이름만 남아 있다.
♣ 왕산(王山): 지묘동 신숭겸 장군 사당인 표충사의 뒷산인데 적병에 포위되었던 왕건이 이 산으로 올라가서 능선을 타고 세 번만에 뛰어 피신한 곳이라 하여 왕건이 죽을 것을 이 산 때문에 살았다 하여 왕산이라 했다고 한다.
♣ 탑들: 지금의 지묘 1동 앞들을 탑들이라고 하는데, 옛날 동수대전에 전사한 신숭겸장군의 원찰인 지묘사의 탑이 남아있던 곳이라는 데서 연유한 것이다.
♣ 살내/ 전탄(箭灘): 대구 북구 동서변동 금호강과 동화천이 합류하는 두물머리 근처. 이곳에는 ‘화살이 내(川)를 이뤘다’는 뜻의 ‘살내’가 있다. 왕건과 견훤이 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활을 쏴 하천이 온통 화살로 뒤덮였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지금으로 치면 대구 북구 서변동 월드메르디앙 아파트와 북구 동변동 유니버시아드선수촌 아파트 위치에서 동화천을 사이에 두고 대접전이 벌어진 셈이다.
♣ 입석(立石)동: 신라 말엽(후삼국시대)에 왕건과 견훤의 전쟁이 치열할 때 왕건의 부하장수들이 말총으로 큰 돌을 굴려서 입석동까지 왔었다고 하며, 전쟁 중에 부하장수들이 바위를 그대로 두고 떠나버려 그때 이후부터 선돌 즉 입석(立石) 이라 칭하였다 한다. 해방 이후 입석동에는 영천이씨, 영양남씨 등 약 300여 호가 살고 있었으며, 그때까지도 어른 3-4명이 앉을 수 있는 큰 돌이 마을을 관통하여 몇 십미터 간격으로 여러개 있었다고 한다.
♣ 검사(錦沙,金沙)동: 고려 태조 왕건이 공산전투에서 후백제 견훤에게 패하여 도주하다 금호강변 모래가 비단처럼 빛깔이 좋고 크기가 똑같다 하여 금사(金沙)로 불리어지다가 검사로 변천되었다. 대구에서는 금메달을 검메달이라고 발음한다.ㅋ
♣ 일인석(一人石): 일인석은 팔공산 안쪽 염불암에 있다. 팔공산을 향해 도주하던 왕건이 바위에 앉아 퇴로를 궁리하던 중 한 승려가 다가와 "이 자리는 한 사람만이 앉을 수 있는 곳인데, 그대는 누구인가"라고 물으니 왕건이 "내가 바로 왕이다"고 말했다고 한다. 승려는 절을 하고 "북쪽으로 가면 견훤군이 기다리고 있으니 남쪽으로 되돌아가라"고 했다고 전해진다. 왕건이 이 바위에 혼자 앉아 있었다고 해서 일인석이라 부른다.
♣ 독좌암(獨坐巖)/ 독암: 대구 동구 봉무동 노인회관 북쪽 5m 지점 개천가에 있다. 왕건이 봉무동에 있는 독좌암이란 바위에 홀로 앉아 쉬었다는 데서 유래했다. 독좌암 앞에는 독암서당이 자리하고 있다.
♣ 불로동(不老洞): 왕건이 동수전투(일명 : 공산전투)에서 패하여 도주하다 이 지역에 이르자 어른들은 피난가고 어린아이들 만이 남아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불로동에는 200여 개의 거대한 고분군이 있다. 왕건이 견훤에게 패해 도주하다 문득 뒤를 돌아보니 체력이 떨어지는 늙은 병사들은 다 낙오하고 젊은 병사들만 따라오고 있다고 해서 불로동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견해도 있다.
♣ 실왕리(失王里): 대구 동구 평광동 실왕리골에서 사용되었다. 포위망을 뚫고 도망친 왕건이 한 나무꾼을 만나 물과 주먹밥을 얻어먹고 기운을 차렸다고 하는데, 나무꾼이 나무를 다하고 돌아와 보니 밥먹던 사람이 온데 간데 없었으며, 그가 왕이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고 왕을 잃었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 실왕리인데, 조선말에 와서 수치스런 지명이라 하여 시량(是良)으로 고쳐 불렀다고 전하며, 변음되어 시랑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 초례산(醮禮峰)/ 초례봉: 고려 태조왕건이 견훤에게 패한 후 "다음 전투에서는 꼭 이기게 해달라."며 이 산에 올라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하여 초례산이라 이름 지었다. 또한 초례산이라 한 것은 약 1500여 년 전 어씨라는 촌부가 산에 나무하러 갔다가 선녀와 만나 가례를 이루고 초례를 치렀다고 해서 초례산이란 이름이 생겼다고 전해진다.
♣ 혜안(解顔): 해안·안심·반야월=왕건이 견훤 군의 포위망을 벗어난 뒤 ‘불안한 얼굴을 펴고(解顔) 안심(安心)했다’는 데서 비롯된 지명이라는 설이 있다. 해안은 현재 대구 동구 방촌동 지역이다.
♣ 안심(安心): 후백제의 견훤은 원래 상주 고을 가은현 사람으로 본래의 성은 이씨였으나 후백제 왕의 악몽을 갖고 천하를 병탕코자 공산동 수대전을 시정함에 고려 태조 왕건이 정기 5천명으로 공산 아래서 맞아 대전을 벌였으나 전세가 불리하여 장사 김락과 신숭겸이 죽고 제군이 패배함으로 왕건은 난을 피하여 지금의 동내동까지 이르니 적국의 추격이 없으므로 한줌의 땀을 식히고 숨을 돌리게 되니 이 곳을 안심이라고 불렸다.
♣ 반야월(半夜月): 반야월이란 명칭은 여러 가지로 옛날부터 불러왔으나 후삼국시대 왕건이 견훤군사에 패하고 이곳을 지나다가 날은 반야이고 중천에 달이 떠 있어서 이곳을 반야월이라 했다고 하며, 이조 19대 숙종께서 민정을 관찰하기 위해 전국을 순시하던 중에 이 고장에 이르러 반달이 서산에 기우는 야반중에야 희미한 달빛을 따라 한 동리를 찾으니 이를 반야월이라 하였다. 반야월은 왕건이 지금의 해안을 거치고 보니 밤은 반야(한밤)이고 달이 떠 있었다고 해서 반야월이라는 지명이 생겼다. 대구지하철 1호선 해안역·반야월역·안심역이 여기에서 이름을 따왔다.
♣ 안지랑골/안지랭이: 왕건이 견훤에게 패한 후 이 골짜기에 앉아 쉬었다고 하여 안지랑이라고도 하고, 견훤이 왕건을 추적하여 안지랑골까지 왔다는 사실을 토대로 왕지렁이가 안지렁이로 바뀌었다고도 전해온다. 안지랑역이 여기서 이름을 따왔다. 일설에는 물이 좋아 질병 치료에 좋다는 소문이 돌아 이곳에서 앉은뱅이도 일어섰다고 하여 안지랭이로 불리게 되었다고도 전한다.
♣ 은적사(隱跡寺): 대구 남구 앞산공원 인근에 있는 사찰이다. 은적(隱跡)은 숨는다는 뜻으로 왕건이 3일 동안 숨었던 절이라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후일 고려 왕이 된 왕건이 영조대사에게 명하여 이 절을 짓고 은적사라 칭하였다. 은적사 대웅전 옆에는 사람 한 명이 들어갈 만한 조그만 굴이 있는데 왕건이 이 굴에서 사흘간 머물렀다고 하여 왕굴이라고 한다. 당시 3일간 짙은 농무로 자취를 찾기 힘들었고 동굴 입구에 왕거미들이 거미줄을 쳐주어 추격을 따돌리고 안전하게 피신할 수 있었다고 한다.
♣ 안일사(安逸寺): 대구 앞산에 있는 절로 왕건이 반월당을 거쳐 이 곳 절에 이르렀는데, 사흘간 머물렀던 은적사보다 더 안전한 은신처를 원했다. 안일사는 은적사보다 깊은 골짜기에 있어 왕건이 ‘편안하게 머물렀다’고 해서 안일사가 됐다는 설이 전해진다. 안일사에서 500m 거리에 위치한 왕건굴은 왕건이 안일사까지 추격해 온 견훤을 피해 숨어들었던 풍화동굴이다. 이곳의 승려가 왕건을 극진히 대접하고 옷을 갈아입히는 등 편안하게 모셨다. 왕건은 비로소 이 곳에서 안일을 맛보았다고 하여 후에 이 절을 안일사로 개명하였다.
♣ 임휴사(臨休寺): 파군에서 패한 왕건이 숨어든 곳이 지금이 은적사이고, 안지랑골 왕굴로 거처를 옮겼다가 유성사에 편히 머물러 나중에 유성사 이름이 안일사로 바뀌게 되었다. 그리고 달배골 임휴사에서 임시로 군막을 치고 잠시 휴식을 취했다는 전설이 그것이다.
♣ 왕선(王建, 王先) 고개: 대구시 달성군 다사읍 매곡리에 있는 지명으로, 고려 왕건의 도주 과정에서 남겨진 지명으로 추정된다. 왕건이 쉬어 갔다는 '왕쉰'의 변화, 왕건이 다시 섰다는 기신(起身)의 의미 등에서 기원했다는 다른 의견 또한 존재한다. 그러나 왕건이 생사를 다투는 도주 과정에서 편히 몸과 마음을 수습하고, 성주와 접경지라는 지리적 조건을 가지고 있는 왕선 고개에서 마련된 왕건의 새 삶과 결의는 930년 안동 고창 전투, 934년 운주 전투를 거쳐 마침내 936년 일리천 전투의 승리를 마지막으로 후삼국 통일의 완성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 왕건은 동수전투에서 패하며 견훤 군에 쫒겨 반야월에서 금호강을 건너 앞산 자락에 숨었다가 진천천을 따라 달성습지를 건너 다사읍 매곡리로 이동하여 왕선고개를 넘었다. 이후 지금의 30번 국도를 따라 다시금 낙동강을 건너 성주로 가고, 김천, 문경, 충주를 걸쳐 북향하여 개경으로 올라갔다고 유추한다.
앞산 갈림길인 월백산 삼거리로 다시 되돌아와 왼쪽으로 조금 내려서면 양회임도에 닿고 도로를 따르다가 왼쪽으로 봉우리를 지나며 앞산순환도로로 향합니다.
♤ 552.5m봉
양회임도에서 왼쪽 능선으로 오른다. 법광대선배님 띠지가 금곡대선배님과 전문가님 띠지로 교체되어 소나무숲 정상을 지키고 있다.
♤ 470.8m봉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올라서서 정상을 찍고 돌아나온다. 아무것도 찾을 수 없는 특징없는 봉우리로 선답자님들 띠지가 정상을 지키고 있다. 왼쪽으로 앞산 케이블카 상부 역사가 보이고, 오른쪽으로 대구 수성구 방향으로 수성못도 살짝 보인다.
두류산 83타워와 와룡산을 찾아보고 가야할 시내구간을 짐작해 봅니다.
♤ 352.9m봉/ 3등삼각점(대구 327/ 1994 재설)
쉼터의자가 있는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오르는 작은 봉우리이다. 준희선생님 산패가 소나무에 매어 있다. 되돌아 나오지 않고 왼쪽으로 능선을 따라 내려선다. kt송신소가 있는 마지막 봉우리는 오르지 못하고 왼쪽으로 양회임도로 내려서서 봉덕교로 향한다.
♤ 앞산순환도로/ 봉덕교
대구 항공무선표지소(4km) 입구에서 바로 앞쪽 앞산순환도로를 건너는 횡단보도/ 봉덕교를 지나서 대덕맨션 201호를 바라보며 왼쪽으로 왼쪽으로 향해 내려서서 오른쪽으로 꺽어지면 성바울로 성당 앞이다. 우틀하여 효명길에 들어서면 도로 왼쪽 편에 미군부대 고가 수조탑이 보이고 도로 오른편에 봉덕동 성바울로 성당이 위치하고 있다. 지맥은 성바울로 성당에서 담장 안쪽으로 이어지지만 미군부대가 차지하고 있어 1시간 정도 한미친화거리를 우회해야 한다.
시내구간이니 좀더 진행하다가 숙박지를 찾아도 될것 같아 다시 출발합니다. 지맥을 미군부대가 차지하고 있어서 부대를 통과하여 대구남부경찰서로 가야하지만 약 1시간 길게 우회를 하는데 그새 지형이 변했네요. 도로가 새로 개설되고 우회구간이 단축되었어요.
♤ 캠프 워커(CAMP WALKER)/ 워커 기지/ 동명비행장(東明飛行場)
대구시 남구 봉덕동, 대명5동에 있는 주한미군 미국 육군 비행장이며 카투사 부대 기지이다. 바로 인근, 같은 대구 남구에 주한미군 소속 캠프 조지, 캠프 헨리가 있고, 캠프 조지 내에 미군 전용 외국인 초등학교가 있다. 인근에 있는 캠프 헨리와 함께 일제강점기였던 1921년에 건설된 부대로, 일본군에 의해 비행장, 탄약고 등으로 사용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대한민국 국군과 주한미군이 인수했다. 정부 수립 이후에는 대한민국이 사용하였으며, 공군 창설 당시부터 1955년 1월 10일까지는 이곳에 대한민국 공군본부가 주둔했었고, 한국 최초 개발 항공기인 부활호의 비행도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미군이 주둔한 것은 1959년부터다. 1960년부터 1986년까지는 중앙항로관제소가 이곳에 위치했던 적도 있었다. 기지 명칭은 1950년 12월 23일 당시 교통사고로 순직한 미8군 및 국제연합사령부 지상군 사령관이었던 월튼 워커 중장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대구광역시는 3차 순환도로 건설을 위해 이 활주로의 토지를 반환해달라고 주한 미군에 요청하여 2023년, 서편활주로 부근에 소규모의 새 헬기장이 들어섰고 동편활주로와 헬기장이 반환후 철거되었다. 이 자리에는 2025년 11월 5일 대구도서관이 들어섰다. 서쪽 활주로도 협상 진행 중이다. 이전 헬기장보다는 규모는 작고 이착륙 횟수도 예전보다는 적지만 서편활주로의 경우 그 터에 외국인 고등학교와 커머셔리, 면세점 등이 들어서 있어 부지 반환이 생각보다 어렵다. 최근 대구 도심 군부대 이전 사업으로 10조원에 달하는 직접생산 유발액이 발생할 것이란 전망이 있다.
이전에는 봉덕동과 대명동의 경계인 중앙대로를 건너 대명동으로 들어서고, 대명로를 따라 영대병원역을 지나 대구남부경찰서로 향했는데 좌틀로 신축 아파트 부지로 통과해서 우리절 한국불교대학은 보지를 못했어요. 앞산을 다녀오며 대명동을 만났고 시내에서 다시 보니 반갑습니다. 성당시장 내거리까지 대명동을 지나는군요.
♤ 우리절 한국불교대학
영대병원네거리에서 중앙대로를 따라 나가면 도로 오른편에 영남 불교대학 복지재단 건물과, 그 옆 한국 불교대학 관음사, 그 왼쪽 옥불보전 건물이 차례로 서 있는데, 건물의 규모가 어마무시하다. 골드크래스센트럴아파트 신축현장이 나오고 직진을 하면 우리절 한국불교대학이 보이는 대로변에서 주택가 샛길로 들어선다. 샛길을 빠져나오면 도로 건너편에 명덕시장이 보이고 좌틀하면 대구지하철 영대병원역 2번 출구가 나온다.
♤ 대구광역시 남구 대명동(大明洞)
대명동은 대구에서 면적이 가장 큰 동이다. 동명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명나라 제독 이여송과 함께 조선을 도우러 온 장수 두사충(杜師忠)에서 연유된다. 두사충은 시성 두보의 후손으로 중국 산시성 시안에서 가까운 두릉 출신이다. 그는 이여송의 일급 참모로서 작전계획 수립에 항상 참여했고, 조선군과의 합동작전을 할 때도 우리 조선군과 전략 전술상 긴밀한 협의를 하는 아주 중요한 위치에 있는 장수였으며, 그의 활동과 공적은 높이 평가되고 있다. 임진왜란이 평정되자 고국에 돌아가지 않고 두 아들과 함께 조선에 귀화했다. 두사충이 귀화하자 조정은 그에게 대구시내 중앙공원 일대를 주고 살도록 해 주었다. 그 뒤 두사충이 받은 땅에 경상감영이 옮겨오게 되자 그는 자기가 받은 땅을 모두 내어놓고, 계산동으로 옮겨 편안한 생활을 계속하게 되었다. 그러나 구만리 떨어진 타국에서 누리는 행복이었기에 고향에 두고온 부인과 형제들 생각에 눈물 흘린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이에 두사충은 최정산(현재의 대덕산) 밑으로 집을 옮겨 고국인 명나라를 생각하는 뜻에서 동네 이름을 대명동이라 붙이고 단을 쌓아 매월 초하루가 되면 고국의 천지를 향해 배례를 올렸다고 한다. 민간에서는 군공보다는 풍수지리의 대가로 더 유명한 사람이다. 누이가 진린에게 시집갔기 때문에 진린의 처남이 된다. 이순신장군과 매우 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모명이란 고국인 명나라를 그리워한다는 뜻으로 지은 그의 호이다. 대구 수성구 만촌동 형제봉 기슭에 모명재와 두사충 묘가 있으며, 대구를 찾는 중국 관광객들의 필수 여행 코스가 되고 있다. 두릉 두씨(杜陵 杜氏)는 중국 두릉(陝西省 西安)에서 유래했으며, 시조는 송나라 때 병부상서를 지낸 두경녕(杜慶寧)으로 고려 초에 표류하여 정착하면서 우리나라에 뿌리를 내렸고, 임진왜란 때 온 명나라 장수 두사충(杜師忠)의 후손들도 함께 섞여 한국의 두씨 문중을 형성했다. 주요 후손들은 전북 김제(만경), 부안 등에 거주하며 번성했으며, 두릉을 본관으로 삼아 대를 이어오고 있다. 시조 두경녕 계열과 두사충 계열 등 여러 갈래로 나뉘어 있지만, 모두 같은 뿌리를 공유하며 종중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미군부대 담장 옆으로 새로난 대덕로를 따르다 대단위 아파트단지 내를 진행했기에 영남대병원 네거리를 지나지 않았습니다.
♤ 영남대병원 네거리
영대병원역 2번출구를 지난다.
♤ 대구 남부경찰서/ 대명성당
대구 남부경찰서가 정확하게 청룡지맥 마루금에 들어앉아 있다. 왼쪽으로 향하는데 길 건너편에 캠프워커 6번게이트가 보이고 그 뒤로 안지랑이골의 앞산이 보인다. 첫번째 골목으로 우틀한다.
♤ 대명 배수지 생태공원/ 근린공원
대명 생태공원은 수압이 약한 고지대에 사는 남구 주민들에게 수돗물을 잘 공급하기 위해 물살 세기를 강하게 만들어주는 가압장 시설이 있었다. 배수지를 활용하여 지역 주민들의 여가활동과 휴식공간 제공을 위해 조성된 친환경적인 공원이다. 공원을 가로질러 직진해야 하지만 주택가와 남도초교가 길을 막는다. 대명2공원을 지나서 왼쪽 골목길을 들어서서 영남이공대학교 행복1기숙사를 지난다. 야크모텔 골목길을 빠져나와 길을 건너야 하는데 중앙선에 펜스가 쳐져 있다.
야크모텔에서 머물까 했는데 45,000원을 부르고 안 깍아주네요. 좀 더 가보기로 했습니다.
♤ 안동고개
영남이공대 행복2기숙사를 지나고, 도로 건너편 bbq골목으로 들어서야 하는데 현충로를 건너지 못해 오른쪽 영남이공대 후문으로 내려서서 횡단보도로 건넌다는데 왼쪽으로 가서 고개 위의 횡단보도를 건너는게 더 빠르다. 대구광역시 남구 대명동 1712-11에 있는 고개로 약 300년 전 조선시대 임진왜란에 관군으로 구성된 안동군이 현치(現峠:현재의 고개)에 주둔하였으나 당시 사태가 여의치 못하여 후퇴하였다는 전설에 따라 안동고개라 칭하게 되었다고 하는 고개이다. 한국중앙연구원 정해은 역사학자의 논저에 따르면 정유재란에 명군이 대구에 주둔하면서 안동에서 담당한 일은 대구에 주둔한 명군에게 군량과 마초를 마련해 보내는 일이었다.
심인중고가 다사읍 대실역 인근으로 2021년 이전했다고요. 청룡지맥에서 황학지맥으로 이사했군요.^^
♤ 대명심인당(心印堂)/ 심인중고
높은 담벼락이 나와 우회하는데, 지맥이 심인중고등학교를 지나는 모양이다. 대한불교 진각종 대명심인당을 지난다. 불교재단 진각종 사립학교인 심인중고등학교는 1953년 중학교를 시작으로 1957년 고등학교를 개교한 뒤 대명동에서 60여 년 동안 터를 잡아 왔다. 현재 다사읍 죽곡동으로 이전하고 그 자리에 대구 남구 공공실내수영장이 들어설 예정이다. 대명자이그랜드시티아파트가 재개발로 완공단계이며 소화성당도 그 자리에 신축되었다. 양지로를 따라 성당시장 네거리로 내려선다.
성당로를 따라 내당네거리로 내려서면 반고개역이 나오지만 지맥은 두류산에 최대한 근접했다가 반고개로 내려섭니다.
♤ 성당시장 네거리(양지로-성당로-파도고개로)/ 구계/ 삼동경계면(대구 남구 대명동 → 달서구 성당동, 두류동)
휴 요양병원이 전면에 보이는 성당시장 네거리이다. 지맥길은 성당시장 네거리(실제로는 오거리이다)에서 횡단보도를 건너 대구 달서구로 진입하며 2시 방향으로 우틀하였다가 골목길로 대구성남초등학교로 올라선다. 초등학교 앞을 지나는 파도고개로가 두류산을 감싸고 돌기에 두류산을 오르고 내리며 파도고개로를 지나게 된다.
지맥은 성남초등학교 정문에서 파도고개로로 진행하다 횡단보도를 건너고, 왼쪽 골목으로 두류산으로 향합니다. 파도고개로가 두류산 기슭을 휘감아 돌기에 파도고개에서 두류산으로 붙었다가 다시 파도고개로로 내려서게 됩니다.
♤ 파도고개/ 너울고개/ 성남초교
오른쪽에 대구성남초등학교 건물이 보이고 계속 담벼락을 따라 파도고개로로 진행한다. 파도고개는 달구벌대로 지하철2호선 내당역에서 달서구 성당시장 네거리 사이 왕복 2차로의 고갯길을 말하는데 두류산을 절개해 도로를 만들고 주택단지를 조성하면서 생겨났다. 도로의 모양이 파도처럼 물결친다고 하여 파도고개라고 불리는데 크세 세 고개로 나뉜다. 성남초등학교를 지나가다 횡단보도로 도로를 건너 성당로33길을 따라 왼쪽 골목으로 오른다. 태고종 소속 보광사에서 두류산으로 오르는 길이 없고 산둘레에는 펜스가 설치되어 성당로39길을 따라 우틀하며 두류산을 우회한다. 다시 파도고개로로 나온다. 파도고개14길을 따라 반고개역으로 내려선다. 두류중흥S클래스샌텀포레아파트(454세대)를 왼쪽으로 돌아 정문에서 밤골길을 따라 내당역과 반고개역 사이 달구벌대로로 내려선다.
대구의 랜드마크인 두류산 83타워를 우방타워라고도 부르는데, 대구지역의 향토건설업체인 우방건설에서 운영하다 부도가 나서 이랜드 업체가 인수하여 운영한다네요.
♤ 두류산(頭流山, 125.6m)/ 두류공원/ 이랜드/ 83타워/ 삼각점봉
대구광역시 달서구 두류동 597번지 일원에 있으며, 두류3동과 성당동에 걸쳐 있는 두류공원은 두류산과 금봉산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공원으로 이월드 83타워가 들어선 곳은 두류산이고, 문화예술회관 뒷산은 금봉산이다. 공원으로 지정된 것은 1965년이지만, 이후에도 여전히 산등성이에 묘지가 몇 기 씩 있다거나 돼지를 치는 집이 있다거나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다가 1977년 대구시는 이곳에 50만여 평의 공원을 조성하였으며, 본격적으로 개발된 도시근린공원으로서 문화, 교양, 체육시설 등이 구비되어 있어 많은 시민들이 이용하는 공원으로 발전하고 있다. 두류산은 역사적 기록에 의하면 산이 둥글게 펼쳐져 있다고 하여 두리산으로 부르던 것을 지명이 한자화될때 같은 의미의 주산 또는 두류봉으로 쓰여오다가 근래에 와서 두류산으로 지칭되었다고 한다. 공원 내 주요 시설로 두류수영장, 성당못, 문화예술회관, 테마파크인 이월드 83타워 등이 자리잡고 있다. 두류산의 정상부에 자리 잡은 83타워는 대구의 랜드마크이며, 200m 높이의 전망대에선 대구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대구광역시청 신 청사가 공원 인근의 구 두류정수장 부지에 두류공원과 대구광역시청을 연계하는 사업 방향으로 신축되고 있어 공원 부근의 교통이 상당히 혼잡해질 전망이다.
지나는 동네분들을 붙잡고 모텔, 여관이나 잘 만한 곳이 있는지 물어보니 찜질방이 있다고 알려주십니다. 청룡지맥이 대구광역시 서구와 처음 만나는 지점입니다. 여기부터 서구로 진입하여 와룡산 정상의 능선까지 함께 합니다.
♤ 반고개/ 달구벌대로/ 대구2호선지하철/ 구계(대구 달서구 → 서구)
서편 고갯마루에 반고개 지명유래 표지석이 있다. 횡단보도 오른쪽에는 먹거리 무침회 골목이 있고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고, 현재 15개의 무침회 식당이 밀집해 있다. 대구광역시 도심을 동서로 관통하는 달구벌대로를 지나며 대구 달서구 두류동에서 서구 내당동으로 들어선다. 왼쪽 명성약국 옆 골목으로 진행한다. 왼쪽에는 대구 애락원 담벼락이다. 반고개는 대구광역시 서구 내당동에 있는 고개 명칭이다. 현재는 대구벌대로의 평지로 변해있지만 옛날에는 그리 높지 않은 나지막한 고개였다. 서구 내당동은 당산 안쪽에 있는 마을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낙동강 앞 동남쪽 두류정수사업소 동북쪽 산 아래에 노송 세 그루가 있었는데 마을에서는 이들 나무를 당산목이라 불렀다. 그래서 당산목을 기점으로 안쪽에 위치한 마을을 안당골(內堂谷)이라 하고, 현재 두류공원 야구장 서쪽 산 아래를 바깥당골(外堂谷)이라 했다. 따라서 내당동은 안당골에서 비롯된 것으로 안땅골, 내당곡, 내당리, 당골, 땅골 등으로 불리던 마을이다. 1988년 1월 1일에 대구 달서구의 신설로 서구 내당동이 나뉘게 되었는데, 달서구로 편입된 내당동은 두류산의 명칭을 따 두류동이라고 칭하였다. 옛날에는 반고개가 지금의 서구 내당동 일대를 가리키는 것으로 파악된다. 반고개가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일설에는 조선 말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대구로 장을 보러 들어오는 강창 및 다사 주민들과 호남 상인들이 고개를 넘는 도중 떼강도를 자주 만났다고 한다. 그래서 혼자나 몇 명이서 고개를 넘게 되면 반밖에 넘지 못하므로 100명 정도가 모여야 다 남아갈 수 있었다고 한다. 여기서 유래된 이름이 반(半)고개라고 한다. 그리고 지금은 평지와 다름없지만 예전에 이 고개 일대가 가파르고 높아서 바람이 세찼으므로 바람고개라 불렀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강도들이 나타나 밤이 되면 고개를 넘지 못하였다고 하여 밤(夜)고개라 불렀다고도 하며, 고개가 그리 높지 않고 반밖에 되지 않아 슬쩍 넘을 수 있는 고개라 하여 반(半)고개라 불렀다고도 한다. 또한, 이곳에 밤나무가 많아서 밤(栗)고개라 불렀다고 하며, 이와는 다른 이야기로 옛날 노인들이 성주, 성서, 하빈 등지에서 밤을 가져다가 이곳에서 도매를 많이 한 데에서 유래하여 밤고개로 불렀다고도 한다. 또 다른 설로 본 고개는 대구 서쪽 지역 주민들이 대구 서문시장으로 가기 위한 요충지이자 마지막 고개여서 사람들의 왕래가 잦았다고 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방을 써 붙여 알린다는 의미에서 방(榜)고개라고 했다고 한다. 그런데 반고개는 바람고개, 밤고개, 방고개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고개는 하나인데 이처럼 여러 이름과 지명유래를 갖고 있는 지명의 경우 전국적으로 살펴도 그리 많지 않다. 잘못 말하는 와음(訛音)에 의해 잘못 듣는 오청(誤聽)이 더해져 하나의 고개가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 대구광역시 서구(大邱廣域市 西區)
대구광역시 서북부에 위치한 구로, 동쪽으로 중구, 남쪽으로 달서구, 서쪽으로 달성군, 북쪽으로 북구와 접하고 있다. 구청은 대구광역시 서구 평리동에 위치하고 있다. 대구분지 서쪽에 위치한 와룡산을 제외하고는 크게 높은 산이 없고, 대부분 완만한 지형이다. 초기 국가 형성 시기에 축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달성토성(達城土城)이 비산동 일대를 포함한 것으로 보아, 1세기 이후에는 철기문화를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정치체제가 서구의 평리동과 비산동의 구릉지대까지 확산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는 해발고도 100m 이하의 파랑 상의 구릉지를 형성하고 있다. 구릉지 사이에는 곡저평야가 넓게 분포한다. 도시화가 진전되기 전 서구 지역의 구릉지는 주로 밭이나 묘지 등으로 이용되었다. 일찍부터 서대구공단과 비산염색공단 등이 조성됨에 따라 대구 섬유산업의 중심지가 되어왔고, 현재도 대도시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지역과는 달리 제조업 종사자의 비율이 가장 높다. 서대구공단은 1978년 도시계획에 의해 상이동과 중리동에 지정된 임의 공단으로, 흩어져 있는 시내의 여러 공장들을 이곳으로 집단 이주시켰다. 2004년 기준으로 340개의 업체가 입주하고 있으며, 섬유와 기계 관련 업종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2008년 기준으로 조성 당시의 공장 용지 중 약 48.5%가 용도 전환되어, 공단으로서의 기능을 거의 상실하고 있는 실정이다. 1995년 1월 1일 대구직할시가 대구광역시로 명칭 변경되면서 대구광역시 서구가 되었다. 서구 지역에 전해지는 설화로는 비산(飛山)동의 지명이 유래된 ‘날뫼’마을의 기원설화와 달서천의 청어에 대한 전설이 대표적이다. 날뫼에 대한 전설은 다음과 같다. 아득한 옛날, 한 아낙네가 달서천가에서 빨래를 하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그윽한 음악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다. 아낙네가 빨래를 멈추고 고개를 들어보니 서쪽에 커다란 산이 둥둥 날아오고 있었다. 아낙네가 자신도 모르게 산이 날아온다고 소리치자 날아오던 산이 갑자기 내려앉아 버렸다. 이때부터 이산을 ‘날아온 산(飛山)’이라 하여 날뫼라 불렀고, 그 동네 이름은 날뫼마을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날뫼마을은 한자 지명으로 전환되어 비산동이 되었다. 이 날뫼마을 기원설화는 우리나라 상고시대의 신모신앙(神母信仰)에 뿌리를 두고 있는 지명 전설의 전형으로 볼 수 있다.
1916년 현재의 위치에 교회와 환자 숙소를 건립하였으며, 역사자료관에 설립 당시의 사진을 볼 수 있습니다.
♤ 대구 애락원(愛樂園)
애락원은 1909년 선교사들에 의해 설립된 개신교 사회복지 기관이자 의료선교 기관으로 처음에는 대구문동병원, 대구나환자병원, 대구나병원으로 불리다가 1924년부터 대구애락원, 애락보건병원이라고 불렸다. 1909년 내한한 선교사 플레처가 대구에 초가집을 마련하고 한센환자 20여 명을 수용하였다. 1924년에 2층 벽돌 건물로 증축하면서, ‘퍼커스버그 기념관’이라 칭하였고, 한글 명칭도 애락원으로 바꿨다. 플레처 원장이 1942년 6월 강제 출국당하면서 애락원은 위기를 맞기도 하였다. 해방 후 1949년 당시 1,750명 환자를 수용할 정도로 성장하였다. 1995년 한센병 치료기관으로서 대구애락보건병원을 폐업하고, 재단법인 대구애락보건병원 부속의원이란 명칭으로 외래환자 진료(특수 피부과, 피부과, 가정의학과)를 시작하였다. 2004년 법인 명칭을 대구애락원으로 바꾸었으며, 2007년 법인 부속으로 화상환자 전문치료를 위한 광개토병원을 개설했다. 2013년 10월 병원 설립 100주년 기념으로 애락원 역사 자료관을 개관하였다.
♤ 내서초등학교/ 이편한세상두류역앞버스정류장/ 서구 내당동 - 평리동
내서초등학교를 담벼락을 따른다. 오른쪽 좁은 골목으로 보성주택 황제맨션이 보인다. 황제공원으로 향한다. 황제공원 표지석을 끼고 오른쪽으로, 왼쪽은 대구 애락원 오른쪽은 황제맨션이다. 보성홍실타운2차아파트를 지나 e편한세상두류역아파트를 지나 평리로를 따라 남평리네거리로 향한다. 평리로가 내당동과 평리동을 가른다.
♤ 대구광역시 서구 평리동(坪里洞)
대구시 서구 평리동은 삼면이 들판이어서 들말평야로 불리던 지역으로 비교적 넓은 들에 형성된 마을이어서 들마을로 불렸다. 또한 들말(들마), 고구랑들로도 불렸으며 한자 차용으로 평리동이 되었다. 자연 마을로는 당산나무, 도기말(도구말, 도구마), 도둑골, 들마(들마을), 들마못(앞못, 평리못, 평리지), 들마수로, 떡떡골(똑딱골, 떡득골, 떡둑골, 덕대골, 대덕골), 막죽고개, 모삼마을, 문화주택, 범샘, 사적당, 산나들(살나들), 산대지, 애락원촌(애락원), 옹골못, 잿골(기왓골), 진나리고개, 진등골(진동골, 장등골), 참나무뱅이 등이 있다.
♤ 남평리 네거리(서대구로-평리로)
섬말교회 앞에서 서대구로 5번도로를 건넌다. 남평리네거리를 두고 대각선에 있는 내당동의 e편한세상두류역아파트, 평리동의 청구아파트가 물길을 동서로 가르는 지맥길이 된다. 횡단보도를 건너서 오른쪽 평리청구아파트를 끼고 돌아서서 다시 오른쪽 골목길로 진행한다.
퀸스로드로 중리동에 있는 상리공원의 삼각점을 찾아 경원고로 와룡산으로 올랐던 때도 있었나봅니다.
♤ 중평시장(中平市場)/ 평리동 - 중리동
동서1차아파트에서 내려서면 중평시장이다. 아치형 시장 표시기가 서있는 곳에서 왼쪽으로 진행한다. 평리 성당 앞을 지난다. 중평시장을 지나 지맥은 평리동에서 중리동으로 들어선다.
♤ 대구광역시 서구 중리동(中里洞)
대구시 서구에 있는 중리동의 자연 마을로는 능굴고개, 도구말, 시비말, 양지말, 자갈밭 등이 있는데, 능굴고개는 대구의료원 입구에 해당하며, 넘어가기가 쉽다는 유래를 가지는 고개 이름의 자연 마을이다. 시비말은 도구말에 처음 입향한 문씨(問氏)를 비롯하여 나중에 입향한 달성서씨, 경주최씨 간에 서로 시비가 잦아 유래된 지명이다. 중리동 지명유래에 두 가지 설이 있는데, 하나는 평리동과 상리동 가르뱅이 중간에 있는 마을에서 유래한다는 설이다. 둘째는 상리동과 죽전동 사이에 있어 유래되었다는 설이다. 즉, 마을 사이에 위치한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지명이다. 중리동에는 1977년 도립기관인 경상북도 섬유기술 전문훈련소를 모태로, 생산기술 개발과 섬유기술인력 양성을 통한 섬유산업구조의 고도화, 국제경쟁력 제고에 기여하기 위해 설립된 전문 생산기술연구소인 한국섬유개발연구원이 위치해 있다.
지맥에 충실하게 간다면 중리네거리를 지나지 않게 됩니다.
♤ 중리 네거리(국채보상로-당산로)/ 삼동경계면(대구 서구 중리동, 평리동 → 이현동)/ 서대구산업단지/ 중리초교
간선도로를 만나고, 중리진달래 2차아파트 앞 도로로 내려선다. 대구달서초등학교를 지나 큰 도로를 만난다. 앞에 중리롯데캐슬아파트가 보이고 오른쪽으로 계속 진행한다. 국채보상로를 건너서 서대구신협 골목으로 들어선다. 원 지맥길은 서대구 신협 뒷쪽으로 이어지는데 그 뒷쪽은 한국폴리텍대학 대구캠프스가 맥길을 점령하고 있어서 갈 수가 없다. 지맥은 중리초교를 뒤쪽으로 돌아서 나온다. 당산로를 건너며 지맥의 오른쪽이 대구 서구 평리동 → 이현동으로 바뀐다. 중리공원에 화장실도 있다. 왼쪽이 중리초교 담벼락이다. 조금 더 내려서니 다시 국채보상로가 나타나고 이제 도로를 따라서 약 20분 계속 직진하면 세방골지하도가 나온다.
♤ 대구광역시 서구 이현동(梨峴洞)
대구시 서구에 있는 이현동은 자연 마을로는 꿀태, 우꿀새, 배고개, 백정것, 웃골재 등이 있으며, 백정것은 갑을방직 자리에 있었던 자연 마을이다. 마을에 구릉지가 있었고 구릉지 주변에 백정들이 모여 살았다 하여 유래된 마을 이름이다. 웃골재는 서구문화회관 뒤편을 말하는데, 배고개 위쪽에 위치하고 있어 웃골재라 불렀다. 이현동은 배고개와 관련한 지명 유래 세 가지가 전하여 온다. 첫째, 과거 서대구공단 북편의 금호강을 운항하는 배를 정박시켜 두는 나룻터가 있었고, 배고개는 배를 타고 가야 넘을 수 있는 고개란 뜻에서 유래되었다. 둘째는 강가에 오래된 배나무가 한 그루 있었고 이 배나무에 배를 묶어 두었던 것에서 이현동이 유래되었다는 것이다. 셋째는 배나무가 많이 자라는 고개가 있었다고 하여 유래되었다는 설이다. 와룡산 기슭으로 서대구IC가 설치되어 이를 통해 경부고속도로, 중부내륙고속도로지선, 광주대구고속도로 및 중앙고속도로 등 4개의 고속도로가 연결되어 있다. 경부선 철도가 통과하는 지역으로서 대경선 서대구역이 지난다.
일욜이라 부페식당은 문을 닫았고, 옆에 세븐일레븐 편의점도 문을 열지 않았습니다.
♤ 서대구공단네거리/ 대구 서구 중리동 - 이현동
1978년 조성되어 노후된 서대구산업단지를 지나는데 잔략사업구역으로 재생사업과 혁신 사업을 추진하여 활력을 되찾는 노력이 시작되고 있다.
지하차도를 지나 왼쪽에 cu편의점이 보여 도시락과 요굴트로 아침을 먹었습니다.
♤ 중부내륙고속도로/ 세방지하차도/ 삼리동경계면(대구광역시 서구 이현동, 중리동 → 상리동)
예전에 구마고속도로가 중부내륙고속도로로 변경되었다. 계속 직진하면 성서 새방골 방향 서대구공단네거리를 지난다. 세방지하차도를 지나 지맥길은 오른쪽이다.
♤ 새방골/ 대구시 서구 상리동
새방골마을은 상리동 남단에 자리잡은 성서아파트단지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마을로서 새방로가 지나며, 그 옆에 중부내륙지선과 신천대로가 나란히 달리고 있는데, 조선시대에는 대구부 달서면 지역이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가르뱅이와 새방골을 통합하여 달성군 달서면으로 편입되었으며, 이후 대구시 서구 상리동~대구직할시 서구 상리동~대구광역시 서구 상리동으로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 새방골에는 재미있는 설화가 전해 내려온다. 신당리 금호강 하류에 부부가 살고 있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돌풍이 불어 집이 날아와 떨어져 있는 곳이 새방골이라 전한다. 처음 함양 조씨가 한 가구를 개척하고 살았으나, 임진왜란 때 왜란을 피해 진주 강씨가 정착하게 되었다. 그로 인해 새로 집이 생겼다고 하여 새방골이라고 한다.
지맥길을 고속도로가 막아버리는 바람에 지하차도를 건너 우회를 하는 구간입니다. 법왕사로 올라갈 필요가 없어요. 지하차도 지나자마자 곧바로 우틀하여 계성고 정문으로 가면 됩니다.
♤ 법왕사입구 갈림길
법왕사를 지나 대각선으로 지맥 능선으로 오르는 지름길이 있으나 사찰에서 울타리로 산문폐쇄하여 오를 수 없다. 좀더 지맥에 충실하기 위해 울타리 오른쪽으로 내려서서 테니스장 경계를 따라 계성고 정문으로 향한다.
역사가 오래된 만큼 계성고 출신 유명한 분들이 많은데 김동리, 박목월, 현제명, 방송인 왕종근 달성의 추경호의원도 여기 출신입니다. 구계성여고 인근 청라언덕, 계명대 전신 동산의료원 역시 개화기 조선에 진출한 선교사와 연관이 있습니다.
♤ 계성고 정문
계성고는 1906년 선교사 아담스에 의해 설립된 영남지역 최초의 사학이다. 114년 역사의 계성고는 2016년 530여억 원을 투입해 캠퍼스를 서문시장 인근 대신동에서 상리동으로 신축 이전하였다. 디지털도서관, 과학실, 시청각실, 실내체육관 등 교육 공간이 완비된 신식 건물로 자사고 지정 이후 숙원사업이었던 전교생(700명) 수용 가능한 기숙사도 들어섰다. 계성고 정문을 지나 직진하면 등산로 입구 숲길초소에 이르며 도심지가 끝나고 다시 산길이 재개된다.
♤ 126.9m봉/ 쉼터
국토지리정보원의 지도에 등재되어 있는 족보있는 봉우리이다. 아무런 표식도 없고, 쉼터의자 몇개와 개발제한구역 안내판과 석재 말뚝이 정상을 지키고 있다.
♤ 가르뱅이/ 괘이동(掛耳洞)/ 대구시 서구 상리동
가르뱅이란 옛날 마을 입구까지 동쪽으로부터 내려오는 달서천과 와룡산 기슭에서 흐르는 샛강이 모여 지나갔던 곳으로 개울가에 있는 마을, 즉 '강에 걸려 있는 마을'이란 뜻에서 걸 괘와 마을 리, 또는 (동네 방: 뱅이)를 합하여 괘이동 또는 가르뱅이로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상리동은 가르뱅이 위쪽에 있다고 하여 웃마라고 불렀다. 대구부 달서면의 지역이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가르뱅이와 새방골을 합하여 상리동이라 하였으며, 달성군 달서면에 편입하였다가 1938년 10월 대구부로 편입되었다. 가르뱅이의 지명유래는 와룡산이 귓바퀴처럼 생겼다고 해서 괘이방, 갈뱅이라고 구전되었다가 발음 편의상 가르뱅이라고 불렀다고 전하며, 고려 이전부터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한일합방전에 괘이동(掛耳洞)으로 명명되었다.
청룡지맥분기점에서부터 산성산까지 같이 하고 헤어진 달성군을 여기서 다시 만나 청룡지맥 합수점까지 같이 합니다. 달성군이 청룡지맥의 처음과 끝을 같이 한다고 해야겠군요.
♤ 할아버지봉, 손자봉(孫子峰) 갈림길/ 구군계(대구광역시 서구 - 달성군)
[와룡산정상 1.35km, 손자봉 0.2km, 용미봉 1.2km, 계성고 1.0km] 이정표가 서있는 능선 삼거리이다. 대구광역시 서구 이현동과 달성군 다사읍 방천리의 경계이다. 용미봉(龍尾峰, 255m)까지 약 1.2km를 왕복한다. 지맥은 좌틀하여 상리봉, 와룡산정상 방향이다.
♤ 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읍 방천리(坊川里)
달성군 다사읍 방천리는 다사읍의 동부에 위치하며, 동쪽은 대구광역시 서구, 서쪽은 달성군 다사읍 서재리, 남쪽은 대구광역시 달서구와 접하고 있으며, 금호강을 건너 북서쪽은 다사읍 박곡리, 북쪽은 경북 칠곡군 지천면 및 대구광역시 북구와 이웃하고 있다. 말발굽처럼 놓여 있는 와룡산의 정상부를 연결한 능선을 리 경계로 하여 동·서·남 삼면이 와룡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북쪽은 금호강이 흐르고 있다. 이곳의 옛 이름은 여호리(驪湖里) 또는 방내리(坊內里)라 하였으며 또 달리 이반 마을이라고도 했다. 방천리가 있는 와룡산 골짜기는 대구광역시 방천리 위생 매립장이 조성되어 쓰레기 매립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에 따라 자연 마을인 원내·이반 등이 사라졌다. 이곳에 먼저 터 잡았던 밀양 손씨들은 일찍 타처로 떠나갔고 성주 이씨들도 점차 떠나고 한두 집만 남았다. 다만 진주 강씨는 벌족으로 강성하였다. 임진왜란 때 충북 보은에서 이곳으로 입향 은거한 문화 류씨도 번성 세거하며 집성촌을 이루었다. 훗날 청주 한씨, 함안 조씨, 금령 김씨 등도 한두 집씩 있었다. 달성군 다사읍 서재리를 지나면 달서구 성서 지구와 바로 연결되며, 서쪽 다사읍 세천리의 세천교를 통과하여 금호강을 건너면 다사읍의 중심 시가지인 매곡리에 도달한다. 또한 북서쪽에 있는 금호강 해랑교를 건너 다사읍의 북부 지대와도 쉽게 왕래할 수 있다. 음력 정월대보름엔 와룡산 용두봉에 달불을 놓았는데, 인근 자연부락 중 가장 큰 달불이었다고 한다. 방천리 북부에는 와룡대교가 건설되어 있다. 와룡 대교는 금호강 양안에 있는 다사읍 방천리와 북구 사수동을 잇는 대구광역시 최초의 사장교로서, 방천리와 금호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는 인접한 금호 지구와 직접 연결되며, 칠곡 지구와 접근이 편리하다. 또한 방천리는 경부 고속 국도, 중앙 고속 국도 및 중부 내륙 고속 국도 지선이 만나는 금호 분기점(금호 JC)과 가까워 다른 지역과의 접근성이 좋다.
팔공지맥의 스카이라인이 멋지게 조망되는 장소입니다.
♤ 손자봉(孫子峰, 263m)
손자봉은 서구 제2봉이라 불리고 앞산봉이라고도 하는데 바로 옆에 있는 할아버지봉이라 불리는 서구 제3봉과 나란히 있다. 백호의 형세를 가지고 있으며, 임진왜란 때 원군으로 온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 1549~1598)이 와룡산의 정기가 매우 뛰어나서 많은 인재가 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이곳 산의 맥을 짜르니 검푸른 피가 솟구쳤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산이다.
♤ 와룡산 용미봉(龍尾峰, 255m)
방촌동 용두봉에서 시작된 와룡산의 끝 봉우리로, 용꼬리의 형세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상리봉까지의 거리는 약 1.3km이다. 규모는 비슬산에 견주지 못하지만 봄이면 접근성이 좋은 진달래 명소로도 유명하고 대구 북구를 내려다보는 전망대가 조성되어 있다. 왼쪽 바로 아래 금호강을 건너는 금호대교, 중앙의 매천대교,그 다음 멀리는 팔달교, 금호대교 건너 오른쪽으로 침산, 팔달교 건너 함지산이 보이고, 도덕산 뒷편으로 팔공산 비로봉과 팔공산 능선이, 서대구역사,이현공단과 시가지, 환성산과 낙타봉, 초례산이 보이고, 초례산 아래 장군봉이 희미하게 조망된다.
상리봉에서 북동쪽 바로 아래에 경부고속도로와 구마고속도로가 갈라지는 서대구 I.C가 보이고, 그 뒷쪽으로는 금호강이 흐르네요.
♤ 와룡산 상리봉(上里峰, 255.3m)/ 데크전망대/ 헬기장/ 3등삼각점(대구 365/ 재설)
정상에는 인조잔디가 깔린 헬기장과 포토존이 있다. 대구 서구 상리동에 있는 와룡산의 능선과 연결되는 상리봉은 서구 제1봉이라 불리며 2015년 12월에 준공된 상리봉 전망대에 서면 대구 시내가 환상적으로 펼쳐진다. 서구의 도시자연공원으로 해맞이 장소이자 조망 맛집이다. 와룡산 상리봉전망대 안내판 앞에 식별이 곤란한 삼각점이 있다. 전망대 오른쪽으로 준희선생님 산패가 상리봉 정상부를 벗어나는 위치에 참나무에 매어 있다.
지맥이 반고개에서부터 대구 서구로 진입하였고, 반고개역에서 달구벌대로를 건너며 헤어졌던 달서구를 다시 만납니다.
♤ 삼거리 이정목/ 삼구군봉/ 삼읍동봉(대구 달성군 다사읍, 서구 → 달서구)
지맥의 왼쪽이 대구 서구 상리동 → 달서구 용산동으로 바뀌는 지점이다. 왼쪽으로 경원고등학교에서 소망원으로 올라오는 등산로가 합류한다. 목재 이정표(서구 제1봉 0.41km , 서구 제2봉 0.75km, 서구 제3봉 1.30km, 서구 제1봉 1.66km)가 있는데, 서구 제1봉은 상리봉, 서구 제2봉은 손자봉, 서구 제3봉은 할아버지봉, 서구 제4봉은 용미봉을 말한다.
경기도 광주 소재 쌍령 전투는 칠천량 해전, 현리 전투와 함께 우리나라 역사의 3대 패전 중 하나입니다. 『연려실기술』에 의하면 1637년 1월 3일 경상 우병사 민영과 허완이 지휘관이었으며 경상도 근왕병을 이끌고 광주 쌍령까지 올라갔으나 변변찮게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했는데 그 원인 중의 하나가 쌓아놓은 화약의 폭발이었습니다. 경상도관찰사 심연의 종사관으로 참여한 도경유는 이의 책임을 지고 유배를 가던 도중에 죽었는데, 도경유가 공격을 머뭇거린다는 이유로 잘못을 꾸짖고 참수한 비장 박충겸(朴忠謙)의 아들이 원한을 품고 고의로 화약을 폭발시켰다는게 밝혀져 유배에서 풀려났죠.
♤ 대구광역시 달서구 용산동(龍山洞)/ 병암서원(屛巖書院)
예전에는 이 일대에 제50보병사단이 주둔했었지만, 1994년 북구 학정동으로 주둔지를 이전한 후 용산택지지구로 개발되어 용산역 개업 이전부터 아파트 단지가 상당히 많다. 본래는 성서1동의 영역이었으며, 성서1동이 1996년에 장기동으로 개칭한 후에는 장기동 산하의 법정동이었다가 2003년 3월 31일 장기동에서 분리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성주 도씨 서촌계의 랜드마크인 병암서원은 성주 도씨 도응유(都應兪, 1574~1639)와 경유(慶兪, 1596~1636) 형제를 배향하고 있는 서원으로 대구 달서구 용산동 성산고등학교 옆 대로변에 자리하고 있다. 2000년 대구광역시 도시개발계획에 따라 서원 일대가 완전 재개발에 의한 구획정리가 됨에 따라 옛 서원을 헐고 2001년 8월 재건축 기공식을 갖고 공사하여 2003년 5월 목조건물 10여 동을 새로 중건하였다. 대구전통문화센터를 통해 한옥 숙박 및 전통문화 체험이 가능하고 고택 음악회가 열리는 등 서원이 빗장을 열고 다양한 형태로 시민에게 공간을 제공하는 모습이다.
♤ 294.2m봉/ 체육시설, 헬기장/ 2등삼각점(대구 23/ 1988 재설)/ 구군계/ 삼읍동봉(대구 달성군 다사읍 방천리, 달서구 용산동 → 이곡동)
준희선생님 산패가 참나무에 매어 있다. 와룡산 동편 헬기장이라 부르는 상리봉전망대와 와룡산의 중간 지점이다. 지맥의 왼쪽이 대구 달서구 용산동 → 이곡동으로 바뀌는 구군계이자 삼읍동봉으로 대구 달서구 해맞이 장소이다. 내려서서 3분 정도 걸으면 방송기지국(mbc, tbc) 두개가 좌우로 있는 곳을 통과한다.
♤ 대구광역시 달서구 이곡동(梨谷洞)
대구시 달서구 이곡동은 성서의 중심이다. 이곡(梨谷)이라는 지명은 배나무가 많은 데서 유래하였다. 달성군 다사읍 서재리·방천리, 달서구 신당동, 용산동·장기동·갈산동 등지와 경계를 이룬다. 북부는 와룡산을 중심으로 하는 구릉성 저산지이고, 남쪽은 비교적 평지로 구성된다. 와룡산 능선부는 화강암 관입에 의해 변성된 변성퇴적암이고, 기타 구릉지는 중생대 백악기 하양층군의 대구층[이암, 셰일, 사암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인근 금호강과 낙동강의 범람으로 형성된 것으로 토양이 비옥하다. 성서경찰서, 성서우체국 등 성서 지역을 관할하는 관공서들과 대구지방조달청, 국민연금공단 대구본부, 엘앤에프 본사 등이 있으며 이마트 성서점, 롯세시네마 성서, 스타벅스, 맥도날드 등 상업시설이 즐비하다. 남쪽의 성서산업단지가 인접해 기업금융 수요가 많은 특성상 중구 못지않게 은행 지점들이 들어서 있다. 아파트 단지도 꽤 밀집되어 있으며 지금이야 연식이 꽤 되어 예전같지 못하지만,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지금의 월배신도시(신월성) 정도의 달서구 내 최고의 위상을 자랑했다.
♤ 불미골 쉼터 갈림길
왼쪽, 와룡산 남쪽 기슭이 불미골로 와룡산을 우회하는 산책로가 있다. 달서구 이곡동에 있는 불미골 명칭은 대장간이 있는 계곡이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표준어 풀무의 경상도 사투리가 불미이다. 내려가면 불미골이 나오는데 1991년 3월에 와룡산에 도룡뇽 알을 줍기위해 나선 어린이 5명이 실종된, 아직도 미제사건으로 남아 있는 와룡산 개구리 소년들이 마지막으로 목격된 곳이 불미골이라고 한다. 당시 50사단 사격장이 있었다. 불미골로 내려서면 이곡역에 그들이 다니던 성서초등학교가 있고, 병암서원 옆에 개구리소년 추모비가 있다.
1991년 도룡뇽 잡으로 산으로 간 다섯명의 소년들이 2002년 9월 26일 유골로 발견된 미제사건이 떠오르네요.
♤ 와룡산(臥龍山, 299.7m)/ 구군계(대구 달성군 다사읍 방천리 - 달서구 이곡동)
옛 기록을 살펴보면, 『대구 읍지』에 "와룡산은 부의 서쪽 약 10리쯤에 위치한다. 와룡산 일대를 성서(城西)라고 하며 대구 서쪽을 방어하는 성으로서의 역할을 한 것으로 보고 성산봉(城山峯)이라고 불렀다는 얘기도 있다. 또한 와룡산은 과거 대구에 있었던 경상 감영을 등지고 서울을 향하고 있어 풍수지리에서 역산(逆山)[대구를 거역하는 산]이라고도 했다. 정상석이 있고 조망은 없다. 와룡산은 비교적 낮은 산이지만 서대구권을 대표하는 산이다. 대구 분지의 서쪽 경계를 이루는 구릉성 산지로, 달성군 다사읍과 달서구, 서구에 걸쳐 있으나 산체의 대부분은 다사읍 방천리에 분포한다. 와룡산이란 지명은 산의 형태가 마치 용이 누워 있는 모습과 비슷한 데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몸을 남쪽으로 굽혀 북서쪽에 용의 머리인 용두봉, 정상부에 용의 몸통인 와룡산, 북동쪽에 꼬리인 용미봉으로 나뉜다. 서구와 달서구 쪽이 용의 꼬리와 몸체 일부이고, 머리는 달성군 다사 쪽으로 놓여 있다. 와룡산의 이름을 딴 와룡로란 도로가 있으며 초·중·고교명, 시장 등 와룡이 많이 쓰인다. 먼 옛날 용한마리가 금호강에 물을 마시러 내려 왔다가 드러누워 낮잠을 자고 갔다고 하는데 산세가 마치 용 한마리가 누워 있는 듯해서 와룡산이라 불리운다고 한다. 와룡산에 얽힌 이야기는 여러 가지가 전해지고 있는데 아주 오랜 옛날에 산 아래에 옥연(玉淵)이 있어 용이 노닐다가 그 못에서 나와 막 승천하려고 하는데 지나던 아녀자가 이를 보고 놀라서 “산이 움직인다” 고 소리치자, 이 소리를 들은 용이 승천하지 못하고 떨어져서 산이 되었다고 하여 와룡산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와룡산에는 바위에 얽힌 전설도 많다. 병풍바위, 비룡바위, 원한바위 등이 있고 방천리 마을에서 남쪽으로 우러러 보면 와룡산 중턱에는 불면 날아갈 듯한 까들락 바위가 있다. 그 바위에는 약 660m 정도 되는 평평한 잔디밭이 있는데 이 잔디밭은 어느 때인지는 모르겠으나 아장과 적장이 힘을 겨루던 곳이라고 한다. 서구, 달서구, 달성군에서 오르는 다양한 등산로가 있으며, MTB도로로 1,6km 구축되어 있다. 코스마다 등산로가 잘 정비되어 있고 상리봉 전망대에는 헬기장이 자리하며 이곳에서는 대구 시내와 금호강, 앞산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으며 매년 해맞이 행사가 열린다. 봄철 대구 진달래, 영산홍, 벚꽃 군락지로 꽃구경 1번지로 소문난 곳이다. 급좌틀로 내려선다.
달성군 다사읍 서재리는 여기부터 궁산까지 지맥과 함께 합니다.
♤ 용두봉 갈림길/ 구군계/ 삼리동봉(대구 달서구 이곡동, 달성군 다사읍 방천리 → 서재리)
직진하면 달성군 서재리와 방천리 경계에 있는 용두봉(龍頭峰, 262.5m)을 다녀올 수 있는 삼거리로 거리는 약 1.1km이다. 지맥의 오른쪽이 대구 달성군 다사읍 방천리 → 서재리로 바뀌는 구군계이자 삼리동봉 지점이다. 와룡산 정상에서 급좌틀로 내려서 직진으로 약 100m 진행하다가 삼거리에서 급좌틀하여 계단길을 따르며, 점점 고도를 낮춰 산책길을 걸어 신당고개로 내려선다.
♤ 와룡산 용두봉(龍頭峰, 262.5m)
와룡산의 머리격으로 용머리봉으로 불린다. 건설부 시절 식별이 불가한 삼각점이 있다. 옛날부터 이곳에 무덤을 쓰면 주인은 부자가 되지만 그 일대는 가뭄이 든다고 한다. 그래서 가뭄만 오면 동네 청년들이 용두봉에 올라가 무덤을 파고 화장을 하는데, 일제 말엽에도 가뭄이 심할 때면 농민들이 용두봉에 올라가 이상한 곳에서 무덤을 찾아 파내고 내려오면 구름 한점 없던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들고 천둥이 치더니 큰 비가 내렸다고 한다. 용두봉 정상에는 장군들이 물을 길러 먹던 장군정이 있었다고 하는데 장군들이 후퇴하면서 크고 넓은 암석으로 덮어버려 지금은 자취를 찾을 길이 없다고 한다. 촌로들에 의하면 약 100여 년 전만 해도 용두봉 근처에는 장군들의 갑옷이 흩어져 있었다고 전해진다.
♤ 대구 달성군 다사읍 서재리(鋤齋里)
대구 달성군 다사읍에 속해있는 서재리는 동·서·남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북쪽에는 금호강이 흐르고 있다. 서재리의 서쪽은 말발굽처럼 생긴 와룡산의 서부 능선이 둘러싸고 있으며, 활처럼 생긴 궁산에서 북으로 뻗어 내린 산줄기가 가로놓여 있다. 남부는 궁산과 와룡산의 정상부를 연결하는 낮은 산지가 형성되어 있으며, 그 사이 신당고개를 넘으면 계명대학교 성서캠퍼스 및 성서지구로 진입한다. 자연 마을 서재(鋤齋)·도촌(都村)에서 나온 명칭으로, 이 마을이 금호강 변의 섬같이 생긴 지역에 있어 섬도(島) 자를 써서 도촌이라고 하였는데, 성주 도씨 대종파 집성촌으로 서재공 도여유(都汝兪, 1574~1640)의 후손들이 이 마을에 많이 살고 있어서 도촌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한편 성주 도씨 입향조 도여유의 아호를 따서 서재라고 불렀다고도 하고, 와룡산 서쪽의 마을이라 서재라고 불렀다고도 한다. 달서구 성서지구와 인접하여 교통 접근성이 좋으며 그 결과 대규모 아파트와 상가가 밀고 들어와 아파트촌을 변모한 가운데, 도씨들의 집성촌이 가까스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단지가 많이 입지한 주거 지역으로 성장해 왔다. 대구광역시의 배후 주거지 성격을 지니는 곳으로, 다사읍에서 매곡리 다음으로 인구가 많은 지역이다. 금호강의 남쪽 및 와룡산의 북서쪽 사면을 중심으로 형성된 기성 시가지에는 아파트 단지와 상가, 학교, 공장 등이 들어서 있으며, 궁산의 동쪽 사면 옆에도 아파트 단지와 소규모 공장들이 들어서 있다.
♤ 성주 도씨(星州都氏)
경북 성주를 본관으로 하는 성씨 집단으로, 우리나라 도씨의 98%는 도읍 도(都) 자를 사용하며, 都씨는 단일 본이므로, 성이 都라면 무조건 성주 도씨다. 성주 도씨는 고려 태조(太祖)가 후삼국을 통일할 당시 명망이 높은 지방 호족이었던 도진(都陳)을 건국 공신으로 칠곡부원군(漆谷府院君, 일명 성산부원군)에 봉하였기 때문에 관향을 팔거로 하였고 고려 고종(高宗) 때 전리상서를 지낸 도순을 시조로 삼는다. 그 후 팔거현(현 경북 칠곡군)의 토성으로 여러 대를 세거(世居)하다가 1540년(중종 35)경에 성주 도씨 16세인 경상 좌도 병마우후(兵馬虞侯) 도흠조(都欽祖, 1515~1563)가 와룡산 기슭인 당시 하빈현 도촌리에 이거하여 대구에 정착하였다.
♤ 186.0m봉/ 배실 체력단련장
이곡중학교 갈림길 이정표를 지나 체육시설이 불미골까지 이어진다. 왼쪽으로 배실체력단련장(0.9km) 갈림길 이정표도 지난다.
대구에서 유명한 맛집인 바다원 성서본점 횟집이 강창역에서 두 정거장인 대구지하철2호선 성서산업단지역 1번출구에서 140m에 있네요. 비실이부부 대선배님을 모시고 뒤풀이를 여기서 할까 생각 중입니다.
♤ 배실마을/ 대구시 달서구 이곡동
대구시 달서구 이곡동에 있는 배실마을의 배실은 우리말로 배나무골이라는 뜻이며, 마을에 배나무가 많다 하여 유래한 이름으로 배나무골을 다시 한자로 옮기면 이곡(梨谷)이 되니, 지금의 대구광역시 달서구 이곡동에 해당한다. 배실마을은 약 480년 전인 1540년대 무렵에 벽진이씨가 처음 터를 잡았으나 임진왜란 때 폐허가 되었다고 하며, 그로부터 약 230년 뒤인 1770년대 무렵에 김해허씨가 다시 터를 잡았고, 이후 의성김씨·수성나씨·경주이씨·창원황씨 등이 함께 살았다. 1988년 대구직할시 달서구가 신설되면서 서구 관할구역에 있던 이곡동이 달서구에 편입되었다.
♤ 사령봉(190.6m)/ 체육시설/ 사각정
이곡운동장 갈림길을 지나고 서재리(1km)로 내려서는 갈림길인 쉼터봉을 지나 넓은 산책로를 따라 올라선 봉우리이다. 시민들 여가활용에 많은 도움을 주는 운동시설과 휴식시설이 있는 산책로를 따라 능선을 완만하게 내려선다. 성서 이곡운동장 갈림길을 지난다.
♤ 외국어고등학교 갈림길/ 구군계/ 삼리동봉(달성군 다사읍 서재리, 달서구 이곡동 → 신당동)
[배실체력단련장 0.1km, 와룡중학교 1.1km, 계명문화대학 0.9km] 이정표가 서있다. 와룡산29 목조말뚝과 30 목조말뚝 사이에 있는 지점이다.
♤ 대구광역시 달서구 신당동(新塘洞)
대구시 달서구 신당동 일대는 이곡동, 용산2동과 함께 대구 성서지역의 대표적인 택지개발지구이다. 신당동 지역은 와룡산의 정기를 받는 곳이라 예로부터 명당으로 알려져 왔다. 금녕 김씨가 처음 세거하였다. 마을 정자에는 동서남북 그리고 그 가운데에 다섯 그루의 나무가 있었다. 이 나무들은 크게 자라 마을의 당산(堂山)나무 역할을 하였다는 데서 오정동이라는 지명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 후 1910년경부터 해마다 당산제를 올리게 되어 신당동으로 불렀다. 계명대학교 성서캠퍼스, 계명대학교 동산병원과 계명대문화대학교가 이 동네에 있으며 대학가라는 특징 때문에 유흥업소가 상당히 많다. 옆 이곡2동, 이곡1동과는 다르게 대학가라는 특징 때문에 대부분의 건물이 성서주공아파트 등 일부 아파트단지를 제외하면 대부분 주택가로 형성되어 있으며, 성서 1차 일반산업단지가 가까이 있기 때문에 외국인도 옆 동네보다 훨씬 많은 편이다. 계대동문로쪽 로데오거리를 중심으로 대학가가 형성되어 있어서 놀거리가 엄청 많으며, 산책로도 형성이 잘 되어 있는 편이다.
딱히 정상이라곤 없고 평편해서 그냥 지나갑니다.
♤ 150.5m봉/ 체육시설/ 와룡산32 목조말뚝
꽃밭 쉼터가 조성된 와룡중학교 갈림길에서 직진하여 송전탑으로 오른 봉우리로 서재리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조망처에서 5분 정도 내려선 와룡산36 목조말뚝 지점에서 등산로는 직진이지만 지맥은 우틀하여 신당고개로 내려서야 한다.
꿈에그린 아파트 상가단지에 있는 gs편의점에서 물과 간식 등 마지막 배낭을 챙길 수 있습니다.
♤ 신당고개(新塘峴, 55m)/ 달서대로/ 서재지하차도
반바지운영자님 코팅지가 낙석방지 울타리에 매어 있다. 신당동과 다사읍을 연결하는 달서대로가 지나가고 있으며 서재지하차도가 있다. 횡단보도를 건너며 올라야할 궁산이 바라보인다. 안내견센터 안쪽으로 진입한뒤 철탑을 향해 능선으로 오른다. 정상부에 다다르면 신당동 요지(가마터) 안내판이 나오며, 여러 개의 돌탑을 지나 정상 직전 산불감시초소에서 상리봉에서 와룡산을 걸쳐 신당고개로 내려오는 지맥길이 환하게 내려다 보인다.
안내견센터 뒤쪽 송전탑이 서있는 능선으로 궁산을 오르면 금호강 건너편 다사읍 이천리, 달천리, 박곡리에 대단위 비닐하우스단지가 보입니다. 부추, 멜론, 감자, 수박, 버섯 등 원예작물이 재배된다네요.
♤ 궁산(弓山, 250.4m)/ 구군계/ 사리동봉(달성군 다사읍 서재리 → 세천리, 달서구 신당동 → 호산동)
지맥의 오른쪽이 달성군 다사읍 서재리 → 세천리, 왼쪽이 달서구 신당동 → 호산동으로 바뀌는 구군계이자 사리동봉 지점이다. 정상에서 그런대로 조망을 건져보는데 북쪽으로 금호강이 내려다 보이고 가산으로 향하는 팔공지맥이 장쾌하다. 서남쪽으로 커다란 암괴인 가야산이 멀리 내다보인다. 궁산에서 내려서는 길은 직진하여 급좌틀로 원형 나무계단길로 내려선다. 돌탑이 있는 왼쪽 길은 계명대학교로 가는 길이다. 궁산은 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읍 세천리와 달서구 호산동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산으로 와룡산에서 서쪽으로 이어진 산줄기 끝에 위치한다. 강창교부터 서재까지의 산세가 활대 모양을 이루고 있고, 정상에서 계명대까지의 산세가 화살 모양으로 마치 십자가 형태로 시위를 한껏 잡아당긴 활과 같다고 하여 붙은 지명이다. 궁산에는 안내판과 등산로가 잘 정비되어 있어 편안하고 여유롭게 등산을 할 수 있으며, 또한 금호강을 따라 산행을 할 수 있어 대구 유일의 호반 산행이 가능한 곳이다. 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동안 산림이 우거진 숲길을 걸을 수 있고, 주변에 시야를 가리는 곳이 없어 정상에 올라서면 달성군 다사읍은 물론 멀리 화원읍까지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산 아래에 이락서당이 있다.
금호강이 270도로 휘돌아가는 물돌이 지역입니다.
♤ 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읍 세천리(世川里)
대구시 달성군 다사읍 세천리는 북·서·남 삼면을 금호강이 270˚ 굽이 돌아 흐르고 있으며, 남동쪽은 궁산에서 뻗어 내린 산줄기가 가로놓여 있다. 세천리 북동쪽의 낮은 세천고개를 지나 달성군 다사읍 서재리의 서쪽 경계부를 따라 신당고개를 넘으면 계명 대학교 성서캠퍼스 및 달서구 성서지구로 진입한다. 지명의 유래는 남동쪽의 산의 형세가 활처럼 생겼다 하여 궁산(弓山)이라고 부르며 궁산의 주령(主嶺)이 세(世) 자 모양이고, 마을 앞에 금호강이 굽이 돌아 흘러 세천이라 하였으며 궁산 아래 마을이라 세천리를 궁리라고도 한다.
♤ 157.2m봉
만산회 띠지와 소나무에 준희선생님 산패가 매어 있다. 쉼터 의자가 설치되어 있고 오른쪽 나무사이로 성서산업단지 앞을 흐르는 금호강이 보인다. 가파른 계단길을 따라 고도를 낮춘다.
♤ 150.5m봉
강창교로 가는 마지막 봉우리이다.
체육시설 왼쪽으로는 계명대학교 성서캠프스로 내려가는 샛길이 보이고 지맥길은 직진의 원형 나무계단 오르막길로 이어진다.
♤ 114.3m봉/ 구군계/ 삼리동봉(대구 달서구 호산동, 달성군 다사읍 세천리 → 달서구 파호동)
청룡지맥의 마지막 봉우리이다. 지맥의 오른쪽이 달성군 다사읍 세천리 → 달서구 파호동으로 바뀌는 구군계이자 삼리동봉 지점이다. 오른쪽으로 금호강 위에 놓인 세천교와 그 오른쪽으로 성서제5차 첨단일반산업단지가 보인다.
♤ 대구광역시 달서구 파호동(巴湖洞)
대구 달서구 성서지역 중 가장 서쪽 끝에 있는 마을로 금호강을 끼고 있으며, 강창교를 경계로 달성군 다사읍과 마주보고 있다. 자연 마을로는 강창, 삶이들(쌀밋들), 삶잇개(쌀밋개), 지불(금회동) 등이 있다. 파호동에는 강창(江倉)으로 널리 알려진 마을이 있다. 강창은 원래 국가의 세곡이나 진휼미, 군량미 등을 수납·보관·운송을 맡아 강이나 하천변에 설치한 창고이며, 창고와 관련 업무를 담당하던 기관으로 조창으로 총칭된다. 이곳에는 수운판관을 두어 주·군의 조세를 각각 그 부근의 제창에 보관하였다가 다음 해 2월부터 조운을 시작하여 강창에 수송하여 서울로 상납하게 하였다. 이 강창마을도 과거 강창이 있던 곳에서 유래되었다. 호산로를 경계로 서쪽이 파호동, 동쪽이 호산동이다. 강창교가 있는 파호동 강창마을은 조선시대 강창을 두어 동래와 김해 등지에서 오는 미곡을 저장해 두던 곳이다. 강창역이 있어서인지 호산동과 파호동 일대를 통틀어 강창이라 부르기도 한다. 주민들 대부분은 성서 삼성명가타운에 거주하며, 삼성명가타운 아래부터는 성서3차산업단지에 속해있다.
♤ 노는바위
현 파호동 서편 금호강변 절벽 위에는 큰바위(파호동 산 5번지)가 있다. 이 바위에 얽힌 이야기는 1500여 년전 하늘의 선녀들이 내려와 금호강물에 목욕하고, 이 바위에서 쉬어가곤 했는데, 범인(凡人)들에게 발견되자, 다시는 선녀들이 내려오지 않았다고 하여 노는바위라고 부른다.
♤ 배꼽덤
700年 전, 홀로 사는 청상과부가 삶의 낙을 잃고 마을 서편 금호강변 강창덤에서 떨어져 자살하려다가 덤에 있는 나무 가지에 배꼽이 걸려 그대로 죽어 갔다고 하여 이 덤을 배꼽덤이라고 한다.
♤ 이락서당(伊洛書堂 )
이락서당은 대구광역시 달서구 파호동에 있는 조선 중기의 학자인 한강 정구(鄭逑: 1543~1620)와 낙재 서사원(徐思遠: 1550~ 1615)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정조 22년(1798)에 건립한 강학소이다. 정조가 등극하면서 탕평책을 쓰고 학문을 숭상하는 기풍이 일어나자 당시 대구와 달성, 칠곡 등지의 명문가 유생 30명이 뜻을 모아 세운 후 인재 양성과 예학 숭상을 위한 사숙(글방)으로 사용되어 왔다. 이락서당 건립에 참여한 문중은 모두 아홉 문중으로, 성주도씨·광주(光州)이씨·함안조씨·밀양박씨·전의이씨·일직손씨·순천박씨·달성서씨·광주이씨이며, 이들을 통칭하여 9문 11향 30군자라 한다.
♤ 금호강/ 강창교(江倉橋)/ 주차장, 운동시설/ 수도
강창마을은 파호동과 달성군 다사읍 박곡리를 연결하는 나루마을이기도 하였다. 1965년까지만 해도 이곳은 제방이 없어 홍수가 잦았으나, 1966년 대구∼성주 간을 연결하는 폭 10.3m, 길이 245m의 강창교가 착공되고, 4년 만인 1970년에 준공되면서 나루터는 자취를 감추었다. 강창교는 대구시 달서구 파호동과 달성군 다사읍 죽곡리를 연결하는 다리로 30번 국도가 지나간다. 이락서당을 내려서면 산길은 사실상 끝이고, 금호강 강창교 아래에서 지맥을 종료한다. 자전거도로로 청룡지맥이 낙동강과 합수하는금호강/ 낙동강 합수점까지 왕복 3.4km 거리이다.
왕건이 퇴주로로 대구 앞산에서 다사읍 매곡동 왕선 고개로 이동하면서 진천천을 따라 화원유원지를 지나 여기 두물머리의 달성습지를 건넜다고 보기도 한답니다.
♤ 금호강/ 낙동강 합수점
실제의 합수점은 강창교에서 1.8km 더 가서 낙동강과 금호강이 만나는 곳에 있는 달성습지가 합수점이다. 금호대교를 지나 달성습지로 된 합수점으로 가는데 저 멀리 지맥길이 시작된 비슬산이 얼굴을 내민다. 청룡지맥과 황학지맥 합수점이 마주한다. 뒤돌아나오다 금호대교로 올라서서 성서제2차일반산업단지 공단로를 따라 강창교로 나오고 우틀하여 300m쯤 걸으면 강창역이 나온다.

첫댓글 퐁라라운영자님의 청룡지맥 졸업을 축하드립니다.
지난해 송별산행겸 멋진 추억을 남기셨네요.
비실이부부님 모습도 반갑습니다.
지난 한해동안 산하에 발자취를 남기시느라 수고많으셨습니다.
새해에도 건강하시고 복많이 받으세요!
방장님!!
정월에 지맥 하나 출발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대한 추위가 단단하게 준비되고 있습니다.
1인용 텐트에 플라이로 오토바이커버를 생각해봤는데 효과가 어떨지 모르겠어요.
어떤 분은 퀼트침낭을 제안하던데 그것도 무게가 만만치 않습니다.
핫앤쿡도 먹어보니 번거롭고 쓰레기 발생하고, 그저 가볍게 빵과 비스켓 종류가 최곱니다.
병오년 새해 방장님 가정에 만복이 깃드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