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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
문정규 퍼포먼스의 공동체적 문화의지와 그 자료집 발간의 의의
이 건 용 (군산대학교 교수)
한국의 퍼포먼스는 60년대 말에서부터 70, 80년대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해프닝, 로지컬-이벤트, 바디아트, 퍼포먼스 등으로 불리워지면서 변화를 가져왔다. 이렇게 볼 때 문정규가 활동을 시작한 것은 80년대 중반이기 때문에 한국행위예술 3세대에 속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는 대전에서 대학과 대학원을 마쳤고 대전을 중심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하여 서울, 전주, 군산, 부여, 공주, 수원, 청주, 속초, 횡성, 유성, 인천, 부산, 온양, 천안, 대구 등지와 일본 등에서 퍼포먼스와 설치 또는 평면회화를 발표하여 왔다.
그가 화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퍼포먼스를 통해서이며 그의 주활동무대인 대전에서는 그 윗세대로 대전(大田 1975)과 그가 화단에 등장하기 前에 大田 78세대가 있었다. 특히 동세대인들과 친교를 가지면서 그는 대전의 행위미술계를 이끌었고 대전트리엔날레 등을 통하여 한국과 세계의 청년문화를 대전에 유치하였다.
대전에 인접해 있는 공주에는 야투자연미술가회가 있는데 그는 그 회원으로서도 활약하고 있다. 그의 작품활동 중에 퍼포먼스는 회화나 설치분야와 함께 그가 항상 관심을 기울인 분야이다.
그는 퍼포먼스를 통해서 관객을 의도적으로 참여시키려는 특징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는 퍼포먼스 속에서 행위자이기 보다는 상황의 중매자이거나 기획자의 역할을 즐겨하고 있다. 퍼포먼스의 현장에서 한국적 관객의 성격상 능동적인 참여가 희박한 실정에 비추어 볼 때 그의 익살스럽고 반강제적이며 징발적 관객참여 유도는 가히 가학적 성격이 전혀 없는 바도 아니지만 그의 퍼포먼스 속의 작가적 역할은 시종 익살스럽고 완벽한 관리자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소극적인 관객을 예술 안으로 끌어들여 적극적인 소통의 방식으로 참여시킬 뿐 아니라 사회와 예술간의 리얼리티한 경계를 드러내고 무화시키려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방식은 예술가로서 존재하고 있는 그를 그가 속한 사회와 문화적 관계에서 그 자신의 예술적 특징을 드러내는 데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
어쨌든 오늘날 예술은 대중과의 소통에 실패했거나 그 실패에서부터 출발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는 문정규는 퍼포먼스의 현장 안에서 관객에게 요구하는 사항이 많다. 그는 관객을 달래기도하고 명령하기도 하면서 퍼포먼스를 이끌어간다. 그리고 퍼포먼스에서 그가 쓰는 언어는 항상 복합적이고 이중적이며 아이러니하다. 설사 그 자신의 작품세계를 집중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에서조차 그렇게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필자는 그가 말하고 있는 내용이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의 전부라고 믿지 않는다. 그는 그 자신의 예술적 상황을 궁극적으로 언어를 통해서 드러낼 수 없다는 것을 알 뿐 아니라, 던져진 언어와 관객의 반응 사이에서 상황을 전개시켜야 하기 때문에 그의 언어적 논리는 항상 역설적이고 다중적이다. 위와 같은 문정규의 퍼포먼스에 대한 언급은 그가 쓰고 있는 기법에 관한 것이겠고, 그렇다면 그가 그의 퍼포먼스에서 소통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살펴보면 그것은 오늘날과 같은 상업주의적 삶이 빚어낸 인간간의 소외현상과 그것과 맞물려 일어나는 생태계 전체의 위기의식으로 보여진다. 그는 그의 초기 퍼포먼스에서 현대사회 속에 개인의 소외문제에 접근했고 90년대 이후에는 보다 확장된 개념으로 환경과 생태계에 접근하였다.
그의 익살스런 기획자적 입장, 그리고 관객에게 집요하게 접근하는 참여유도, 강력한 메시지 등은 그의 퍼포먼스 속에서 인간의 상호주체적 사랑과 환경, 자연, 생태계에까지 동일한 밀도로 접근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초기 퍼포먼스에서 인체에 사용된 접착테이프나 기하학적 구조물의 퍼포먼스는 90년대 이후 보다 다중적이고 엑티브한 간막이(실제적으로 간막이를 하고 있는 않지만)의 서로 다른 행위의 장을 형성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공연장 밖에서 안으로, 안에서 밖으로 이동해가며 확장하는, 여러 대의 승용차를 동원한 생태계의 위기의식을 고발하는 퍼포먼스에서는 더욱 그의 체질적 기획력의 대담성이 돋보여진다.
그리고 이러한 최근의 퍼포먼스의 기획적 대담성은 한국사회 안에서 예술가의 역할이나 그 문화적 힘을 스스로 자각하는 데서부터 비롯되는 것 같다. 그 문화적 힘은 어디에서부터 나오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상업주의로 매몰된 한국의 문화 현실을 지속적으로 거부하고, 언더그라운드 정신으로 살아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화와 그 조직의(퍼포먼스의 경우) 민주적이고 언더그라운드적인 지속적 실천을 통해서 상업적이고 계파적인 헤게모니를 거부하고 아나키스트적으로 실천해 온 필자로서는 오늘날 한국의 퍼포먼스계의 다양성과 시대정신의 실천적 의지를 당연한 결과로 바라보고 있다.
어쨌든 문정규의 경우 그가 퍼포먼스를 새로운 시대정신의 실천으로 10년 이상을 지속해왔고 본인의 자료를 개인의 힘으로 출간한다는 것 자체가 한국적 문화환경으로 볼 때 매우 유익한 일로 받아들여지며 한국 퍼포먼스의 30년사 역시 객관적이고 공식적인 문화기금으로 정리되는 계기가 있었으면 하는 것이다. 끝으로 문정규 퍼포먼스의 공동체적 문화의지와 발간되는 그의 자료집이 한국문화계에 창조적으로 촉발되기를 바라는 바이다. ♥
단행본/행위예술, 문정규의 표현어법, 대전, 1997. pp. 18.~20.
Intention of Curtural Community by MOON, Jeong-Kyoo's
Performance & Significance of Publishment of a Collection of His Data
Lee, Kun-Yong (Prof. of Kunsan National Univ.)
Korean performance art has continued to change under the name of happening. Logical event, Body art, Performance, etc. from the late of 1960s to the present via 1970s and 1980s. From this context, it willbe a rational judgment that he belongs to the third generation in korean performance, for it is the middle of 1980s when he has begun to act as a performer. He has been graduated from university and graduate school in Daejeon, in which he has begun to make his works, and he has continued to exhibit performance, installation and painting in domestic cities like seoul, chonju, kunsan, puyeo, kongju, suwon, hoengsung, yusung, inchon, pusan, onyang, chonan, daegu, etc. and Japan.
It is through performance that he has been focussed in the domestic art world, and there was 「Daejeon 1975」 as a senior group and 「Daejeon 78 Generation」 before his activity in Daejeon city where was his major arena.
In particular, he has led the performance art world of Daejeon in a friendly relation with as a colleague, and he has induced youth culture of Korea and the world to Daejeon through 「Daejeon Triennale」, etc.
There is a group, 「YA TOO Nature Artist」, in Kongju near to Daejeon, and he is acting as its member. Among his making activities, performance is a sphere that he has always been concerned about with painting or installation.
He, through performance, has an inclination that he strongly wishes to make the audience participate in his work. And he enjoys to be an agent of situation or planner, not actor in his performance. In a scene of performance, when illuminating the situation that Korean audience do not actively participate because of their personality, his humorous, semi-compulsory and foraging inducement of their participation has no less severe character, but the performers role in his performance is always to maintain a position as an ever humorous and perfect manager.
His attitude of this kind has the characteristic that he not only makes the audience participate in a manner of positive communication by introducing the negative audience into the art, but attempts to disclose and annul the limitation of reality between society and art. And his manner serves as a key role in disclosing his own aesthetic property under the cultural relationship with society that he belongs to.
Anyway, he nowadays premises the fact that art has failed to communicate with the audience or has begun on the basis of failure, and he asks the audience for many things in his performance. He leads his performance by lulling the audience or commanding them.
And, language that he uses in his performance is always complicate, twofold and irony. I do not believe that his tale is always all that he wants to say, for it appears even in his attempt to explain his work with attention. His language logic is always ironical and manifold, for he not only knows that he can not disclose his own artistic situation between the given language and response of the audience.
The above remark on MOON, Jeong-Kyoo's performance is on his technique, and, if so, what is the message that he wishes to communicate in his performance? If looking into it, it seems to be estrangement between human-beings caused by the commercialistic life and feeling of danger dispersed over the whole ecosystem. He has approached to the problem of estrangement of an individual in the initial stage of his performance and environment and ecosystem as its more enlarged concept after that of 1990s.
His position as an humorous planner, his persistent participation inducement of the audience, a strong message, etc. act upon from man's mutual subjective love, environment, nature to ecosystem in his performance in a similar extent.
Therefore, his initial performance with the adhesive tape used for human body or with geometrical structure is more manifold than that of 1990s, and he forms the different fields of action through an active partitioning(it is not real) or he shows his more physical ability of planning in the performance that he indicts a feeling of danger of ecosystem by dint of several cars moving to the stage and from it. And, the bold ability of planning in his recent performance seems to be caused by self-consciousness on the artist's role or the cultural power in this society. From where the cultural power is stemmed?
For Korean performers have persistently refused Korean reality of culture destroyed by commercialism and they lived with an underground spirit.
And so, I regard variety of Korean performance world and practical will of timely spirit as a consequential result, for I have refused commercialistic and partisan hegemony and lived in an anarchistic manner through culture and the democratic and underground continuation of practice of organization (as for performance)
Anyway, he has continued his performance for 10years in a new spirit of the times, and it seems to be a fruitful thing that he publishes a collection of data on his performance and theories for himself under Korean cultural environment, and I anticipate that there will be a moment to publish a collection of 30-years history of Korean performance with an official cultural fu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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