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암동 쌍 과부 댁 이야기”
김 유훈 (밴쿠버 문협)
우리 가족의 고향은 평북 의주이다. 해방 후 사업을 잘 하셨던 아버님께서 지인에게 사기를 당하게 된 이유로 서울로 오게 되셨다. 그래서 형은 신의주에서 나는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우리 가족을 서울로 오게한 분은 아버님의 여동생이였다. 즉 우리 고모 두분이 이미 서울에 계셔서 아버님을 오도록 하였다. 이렇게 두 분의 고모님 덕으로 우리 가족은 서울로 올 수 있었다. 당시 큰 고모님은 남편과 올망 똘망한 남자 아이만 여섯을 두고 지내던 중 6.25전쟁을 당하셨다. 후암동에 사시던 큰 고모님이 마침 장에 간 사이 미군의 비행기 폭격에 남편과 어린 남자 아이 여섯 모두 현장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다행히 큰 고모님의 뱃속에는 임신 중인 아기가 있었다. 그 다음 해 나의 고종 사촌 동생이 태어났다. 이 때 언니를 지켜보던 동생 이 그 유복자를 위해 함께 살며 가정을 지켰다. 당시 작은 고모님은 남대문 시장에서 남자처럼 억척같이 장사하여 언니의 식구들을 거두었다. 그렇게 잘 지내던 중 원치않게 유부남의 아이를 갖게되어 미혼모가 되셨다. 이렇게 우리 두 고모님은 각각 아들하나씩을 키우며 한 집에서 40년을 넘게 사셨다.
나의 사촌 동생은 두 분의 홀 어머니 밑에서 잘 자라주었다. 명문 중앙고를 졸업하고 서울 약대를 합격해서 두 부모님께 기쁨을 드렸다. 그리고 약대를 졸업 후 유명 제약회사에 취직하여 생산 부장에 올랐다. 결혼 적령기의 우리 사촌은 고등학교 때부터 7년간 사귀던 교회 아가씨가 있었다.
그는 숙대를 졸업한 그녀와 곧 결혼할 거라는 우리의 예상을 뒤업고 그녀 대신 자신의 제약회사에서 제품을 포장하는 아가씨와 결혼하겠다고 하였다. 더우기 그녀는 의정부 근교에서 농사짖는 농부의 딸이였는 데 학교는 중학교 정도라고 하여 우리 온 집안은 결사반대하며 난리가 났다. 그러나 나의 사촌은 자신만이 갖고 있는 생각이 있었기에 주변의 반대를 무릎쓰고 기여히 자신의 회사 아가씨를 아내로 맞이 결혼하였다. 그 후 사촌 동생이 7년간 사귀였던 숙대출신 아가씨는 굉장한 자해 소동이 있었다고 들었다.
그후 세월이 많이흘러 큰 고모님 댁에 갔을 때 우리 큰 고모님께서 이렇게 말씀 하셨다. “ 그 땐 내래 와 이리 아들 결혼을 반대했노, 이렇게 결혼하여 아들 딸 잘 낳고, 두 오마니 공경 잘 하는 데…,”라고 말씀 하시며 “거더, 내가 미련해서 이렇게 착한 며느리를 몰라본 것이 늘 마음에 걸리고 미안하고나..”하며 두 눈에 눈물을 지으셨다. 사실 그 어느 누가 서울약대 나온 아들을 두었다면 그 결혼을 하게 할 수 있을 까?
지금은 우리 두 고모님 모두 돌아가셨지만 나는 지금도 서울에가서 우리 제수씨를 볼 때마다 나의 고종사촌 동생이 정말 결혼 잘 했다고 생각한다. 아들 딸 잘 키워 모두 결혼 시키고 남편이 경영하는 약국에서 남편보다 더 장사 잘하고, 고모님 훌륭한 음식솜씨 전수받아 음식 잘 만든다. 또 30여년이 지나고 나니 의정부 땅 값이 엄청 올라 제수씨에게 떨어진 유산이 짭짤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지방에 별장도 마련해 두었다고 나한 테 언제나 와서 쉬라고 할 때 나는 예전에 반대했던 마음이 있어 좀 미안하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우리 큰 고모님은 한 순간에 남편과 아이 여섯을 잃고 어떻게 살아오셨을까? ”를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다. 우리 두 고모님이 든든히 평생을 살아올 수 있었던 힘은 물론 영주교회의 권사로 신앙의 힘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여섯 아들이 죽은 후 태어난 그 유복자를 애지 중지 키우려 했던 그 정성과 세월이라는 자연치료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아들은 두분의 홀 시어머니를 모실 며느리로 숙대를 졸업한 아가씨 대신 제약회사에서 포장하며 성실하게 일하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며 그녀를 택했던 나의 고종사촌동생의 특별한 사연이 그
결혼을 이룬 것이다. 지금도 후암동에서는 이 사실이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다. 유명한 쌍과부댁 과 그 아들의 결혼이야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