羅州金氏鼻祖, 季子湟왕자, 梵空선사
천년 만에 세상으로 나오시다.
- 法水寺址三層石塔 안내판 史實기록기념 獻貢茶禮 거행 -
나주김씨 중앙종친회(회장36세 謹鶴)는 2009.7.11일 11:30분 산자수명한 영남의 명산 가야산 남쪽 산자락인 경북 성주군 수륜면 백운리에 소재한 1200여년의 무상한 세월의 흐름 속에 凜然(늠연)한 모습으로 서있는 法水寺址 삼층석탑에서 경향각지에서 찾아온 80여명의 종친들이 참석한 가운데 신라김씨 천년왕손의 적통인 우리나주김씨의 비조이신 신라 마지막 56대 경순왕의 계자(막내아들)인 湟왕자께서 신라의 천년사직을 신흥 고려 국에 遜讓(손양)시 망국한을 가슴에 묻은 채 성주가야산 법수사(당시 금당사)에 입산하여 축발하시고 범공선사가 되신지 1075년 만에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86호인 법수사지 삼층석탑 안내판에 기록이 된 것은 경하하고 기념하기 위한 헌공다례를 성황리에 거행하였다.
헌공다례는 산천이나 신불, 성인 또는 조상님께 재를 올릴 때 옛날부터 전해내려 오는 고유하고 품격 있고 간편한 제례나 齋(재)의 형식으로 황왕자께서 불교 화엄종에 귀의하시여 법공선사로 종신하시었기 때문에 불교의 육법공양을 가미한 헌공다례를 봉행하는 것이 범공선사에게 적합한 의례이고 예우인 것 같아 불교관계자들 및 종친 여러분들로 부터 수차례의 의견을 수렴하여 무형문화재52호인 헌공다례로
봉행하게 되었다. 헌공다례는 제대로 격식을 차려 봉행하려면 시간과 경비가 만만치 않게 소요되지만 처음 하는 행사이고 범공선사 자신이 모든 것을 버리고 입산하여 청빈한 삶을 살다 열반하신 선사이기 때문에 소박하고 조촐하게 거행하기로 하고 6법공양중 등공양, 향공양, 쌀공양(떡), 꽃공양은 미리 진설하고 헌다례(차공양)는 3헌으로 제철 과일인 수박과 참외, 바나나 감귤과 자손 번창을 의미하는 대추는 미리 진설하고 조상과 자손의 연결은 의미하는 밤만은 별도로 공양을 올리고, 국화는 참석한 모든 종친들이 헌화하는 것으로 정하고 봉행하도록 하였다.
헌공다례는 중앙종친회 伯衡(36세)부회장의 사회로 진행이 되었다. 먼저 백형부회장의 개회선언과 참석종친 일동의 경건하고 정중한 경배에 이어 중앙종친회 有顯(36세)부회장의 ‘왜
헌공다례를 천여 년 만에 봉행하게 되었는지와 범공선사 약사 설명과 향후 자손들의 각오를 아뢰는 고유문의 낭독이 있었으며 이어서 헌다례가 봉행되어 ➀공양은 헌다례의 집례자인 한국다례회 회장 관성 박정아님(중앙위원 35세 효장종부)이, ➁공양은 謹鶴 중앙종친회장이 ➂공양은 用輝(33세)중앙회고문께서 공양하시었고 뒤이어 과일(밤)공양은 윤상식님(36세 인형 감사종부)이 공양하였고 꽃공양은 참석 종친 및 가족전원이 흰 국화꽃을 헌화하였다. 이어서 80여명의 참석 종친이 두 줄로 서서 1000여년의 굴곡진 세월 속에 만고풍상을 겪으면서도 그 자태를 뽐내며 凜然(늠연)히 佇立(저립)해 있는 석탑을 우측 어깨 쪽으로 3회를 도는 탑돌이를 한 후 謹鶴 중앙종친회장의 인사말이 있었다.
근학회장은 “사작불수하고 영사입산하신 비조님의 충절과 효경심, 분별력 있고 사려 깊은 자애로움, 무량한 자비심을 가지신 황왕자 범공선사의 얼과 정신을 길이 기려 깊게 새기고 선양하여 비조님에게 부끄럼이 없이 당당하고 떳떳한 후손으로 살아
가자고 역설하시고 이곳 성주법수사지를 우리나주김문의 영원한 마음의 고향으로, 성지로, 순례지로 가꾸도록 하자“라는 요지의 인사말씀이 있었고, 이어서 기섭(33세)고문이 선창하고 참석자들이 복창한 가정 충효, 세수돈목의 종훈 삼창을 끝으로 헌공다례 공식행사를 마치고, 법수사지 왼쪽 편에 있는 신토불이 식당에서 오찬을 하였다. 오찬후 범공선사께서 법수사에 계시면서 왕래 주접하셨던 해인사를 방문하여 범공의 얼과 정신을 기리고 추모하였다.
문헌 등에 의하면 湟왕자가 입산 시에 부왕인 경순왕의 어진을 그려 모시고 해인사에 봉안했다가 해
인사가 화재를 당하자 신라왕실의 원찰이었던 영천 은해사로 이안하였고 이 어진을 1778년 경주 숭혜전으로 옮겨 모셔서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이 어진은 국보로 지정하기 위한 절차가 경북도와 경주시에 의해 진행되고 있는 중이다. 오후4시가 거의 다되어 해인사 경내에서 범공선사의 얼과 정신을 기리고 추모하고 나니 부슬부슬 가량비가 오기 시작하였다. 장마철이고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계절이라 행사 중에 비가 오거나 더우면 행사진행에 지장이 있지 않을까 많은 걱정을 했는데 비조님께서 천여 년 만에 후손들이 찾아와 헌공다례 올림을 기특하게 여기시고 음덕을 베푼 때문인지 11일 날씨는 구름이 알맞게 드리우고 가야산 쪽에서 시
원한 바람이 불어와 헌공다례를 원만히 마치게 되었다. 해인사 순례가 끝나고 떠날 무렵에야 비가 오는 것을 보고 참석하신 종친들은 이구동성으로 참절묘하다고 감탄을 하였다.
이날 참석하신 종친들은 기형(36세), 용휘(33세), 기섭(33세) 중앙회고문, 근학회장, 명희 수석 부회장, 행의(34세), 유현, 백형 부회장, 광진(34세), 인형감사, 용찬(33세), 안웅(34세), 인수(35세), 장형(36세), 재철(37세), 성권(37세), 대선(37세), 대희(38세)자문위원, 준승(35세), 효장(35세) 성광(36세), 재환(36세), 두형(36세), 성숙(37세), 성익(37세), 성복(37세), 광희(38세)등 중앙위원과 춘관, 윤희(38세), 성복(37세 광명)등 많은 종친, 그리고 이번에 새로 조직된 중앙 부녀회 이순자회장, 윤상식 부회장, 이금숙총무이외에 약20명의 종부들이 참석하는 등 80여명의 종친 및 종부들이 참석하였다.
우리 비조이신 계자는
운상기품인 왕자의 몸으로 棄妻子(기처자)하고 입산하여 축발하고 불가에 귀의하여 법공선사가 되시어 산승으로 살면서 신라 멸망에 대한 참회와 중생제도와 국태민안을 발원하고 간절히 기구하시다 열반하신 일은 천명을 알고 천년제국의 망국한을 한 몸에 짊어지려는 사려 깊고 분별력 있는 숭고한 선택이 아닐런가?
계자의 천년의 숨결, 천년의 향기는 영겁을 넘어 온누리에 퍼지고 그분이 우리에게 준 울림은 깊고 넓고 영원하다. (只常)
고유문(告由文)
이제 2009년 7월11일 우리 나주 김씨 비조이신 경순왕의 계자 湟王子, 梵空(범공)선사, 懿英公(의영공) 영위전에 나주군 36세손 중앙종친회장 謹鶴을 비롯한 자손일동은 옷깃을 여미며 合掌頓首(합장돈수) 하고 감히 告 하나이다.
계자 湟왕자께서는 935년 부왕이신 경순왕께서 가없이 은근한 경천순민한 대의를 따르시어 신라의 천년사직을 신흥 고려 국에 손양하실 때 “어찌 천년사직을 하루아침에 남에게 넘겨 줄 수 있는가”라고 형인 마의태자와 더불어 극력반대 하였으나 사세가 돌이킬 수 없고 부왕의 의지가 워낙 강하여 받아들여지지 않자 통곡하시며 처자를 속세에 두시고 영사입산하시어 화엄종에 귀의 범공스님이 되시어 참회와 발원으로 업장을 녹이고 중생제도와 국태민안을 기구하고 사바세계를 극락정토로 만들려고 면려 정진하시다 종신하시었으나 전란과 만고풍상 등으로 굴곡진 유구하고 무상한 세월이 흐르면서 팔백여년동안은 계자의 諱(휘) 조차도 失名인채로, 행적은 거의 알려지지 않은 채로, 그냥 계자 또는 二子로, 해인사에서 梵空 또는 山僧山人(산승산인)이 되어 종신하신 것으로 전래되다가 1784년에 경순왕의 4자인 殷說公鑑(은열공감)의 묘지석이 개성 오룡산에서 발견되면서 비로써 계자의 휘가 湟으로 밝혀졌으며, 행적은 2007년 4월에 경순왕의 9자인 別子(별자)․德摯(덕지)를 貫祖(관조)로하는 울산 김문에서 계자와 별자가 동일인이라고 주장하는 책동과 망발을 하는 것을 인지하고 대응자료를 확보하기 위하여 삼국사기, 삼국유사, 동사강목, 중보문헌비고 등의 사서는 물론이고 신라김씨와 관련된 문헌, 자료를 발굴 조사하는 과정에서 지금까지 우리 후손들이 모르고 간과 했던 황 왕자의 출생연도, 왕자빈이 시중 하원호의 따님 옥
저 河(하) 씨라는 것, 운발․우발 두 아드님의 출생연도, 입산하신 사찰이 해인사가 아니고 법수사라는 것. 입산시 그려 모셨던 부왕의 어진이 경주 숭혜전에 봉안된 사실, 열반 하신 후 고려조정에서 계자의 장한 충절과 아름다운 덕행을 기려서 의영공이라는 시호를 내려주신 일 등 새로운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1778년 우리나라 역사를 정통성과 자주성을 정립하는 입장에서 동사강목을 저술한 안정복은 신라의 천년사직이 고려에 손양 될 때 “계자가 충절을 지켜 기처자하고 범공스님이 되어 종신하신 일은 중국의 촉한이 멸망할 때 북지왕 유심의 충절과 관련한 고사에 비견할 정도로 의지가 장렬하지만 그 이름이 전해지지 않아 참으로 애석하다고 역사상 누구와도 비교 할 수 없는 충절이 높은 분”으로 평가하였습니다. 이처럼 계자 범공은 천년사직에 대한 충절과 기개, 신라 마지막 왕자로서의 자존심을 끝내 지킨 의열, 부왕의 어진을 모봉하고 봉수한 효경심, 천명을 알고 비록 제수한 평장사는 사작불수하였으나 아드님들을 출사시킨 분별력과 자애로움, 출가스님으로서 안정과 화합을 위해 중생제도와 국태민안에 정진하신 무량한 자비심 등은 역사상 어떤 훌륭한 선각자도 따르지 못하는 장하고 아름다운 덕행이므로 열반하신 후 고려조정에서는 의영공이라는 시호를 내려 후세의 영원한 귀감으로 삼았습니다.
계자가 범공스님이 되신 가람인 법수사지를 방문하여 살펴보았지만 법수사지 삼층석탑안내판에 계자께서 입산하여 범공스님이 되셨다는 기록이 안 되어 안타까운 마음 금할 길 없어 관련문헌과 자료를 수합정리하고 후손들의 염원을 일심으로 모아 경상북도와 성주군에 신청하여 마침내 기록이 된 것은 계자가 입산하여 범공스님이 되신지 1075년 만의 일입니다.
이는 2천년 신라김씨 적통왕손인 우리나주김문의 더할 나위 없는 홍복이고 영예일 뿐 아니라 충절과 의열 등 전통가치관이 경시되어가는 요즘 이를 일깨우는 쾌심사임으로 이에 전국에 있는 후손들의 뜻과 정성을 몰아 소박한 헌다례(獻茶禮)를 올리오며 그 전말을 고하오니 어여삐 여기시고 그동안 비조님의 충절과 의행 등을 미쳐 살펴 모시지 못한 후손들의 불민함과 미흡함을 혜량하여 주시옵소서!
아울러 오늘의 이 뜻 깊은 헌다례를 계기로 후손 일동은 비조님의 높고 깊고 거룩하신 얼과 정신을 길이 기려 깊게 새기고 높이 선양하며 천년을 이어온 기품 있고 당당하고 떳떳한 모습으로 살기를 서원하오니 나이 어린 후손에게는 꿈을, 어른에게는 희망을, 노인에게는 건강을 주시어 세계화 국제화 시대에 삶의 보람과 기쁨 속에 문중의 기운이 융성하고 복락을 누리고 세세연연 번영할 수 있도록 보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2009년 7월11일
나주김씨 중앙종친회장 김근학 외 후손 일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