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종친회 책자발간 하양허씨소개 자료
종친회부회장 허극열
1. 하양허씨의 연원
문헌에 의하면 허씨의 연원은 가락국 김수로왕의 비인 허황옥이 인도의 아유타국의 공주로서 서기48년에 배를 타고 지금의 경남 창원시 웅동면 용양리에 도착했는데 수로왕이 의장을 갖추어 영접하고 왕비로 맞이 하였다.
그후 아들 10명을 낳았는데 하루는 허왕후가 수로왕에게 “첩은 동토의 객이 되었는데 사후에 나의 성을 전하지 못하여 한이 되옵니다.”하니 왕이 감동하여 장자는 왕통을 잇게하고 이자는 허씨로 사성하였으니 이 분이 허씨의 시조가 되었다.
허씨는 하양을 비롯하여 김해, 양천, 태인 등 분관이 있다. 하양 허씨의 시조는 허강안으로 김수로왕의 33세손으로 고려 현종때 하양지방의 대표적 호족으로 세력을 형성, 호장이 되었다가 조정으로부터 하양자사로 임명되어 그 지방을 통치하였다. 지방호족의 토성화 과정에서 무반이직의 출사로를 따라 상경하여 무반으로 종사하다가 시조공의 5대손 혁부, 6대손 득서 때부터 현달하여 7대손 유, 8대손 수가 당시의 명문대가 한양망족인 판태복시사 한균, 대학자이며 최고관인 문성공 안향의 사위가 됨으로서 혁세분별의 기초를 다졌다.
특히 9대손 윤창은 도관정랑으로 장인은 익산 이씨 대사성 이직으로 그의 사돈은 원나라 순제의 기황후 친정인 기자오로 고려의 대표적인 권문세가였다. 이직의 제는 감찰두정 애이며 그의 자 공수는 최고관으로 공민왕 묘정에 배향된 명문대가였다.
10대손 판도판서 및 개성윤인 귀룡의 장인은 흥양이씨 통례문부사 이길이며, 11대손 조의 장인은 대사헌 박경으로 그의 혼맥이 원나라 순제 기황후의 친정 기유걸가, 대학자이면 문신인 익제 이현보, 목은 이색, 권보등 당대의 명문과 혼사가 겹겹이 얼키어 있는 집안으로 명문 사돈이 됨에 따라 하양허씨도 개경 신흥 명문가로 자리 매김하였으며, 여말선초에는 삼한갑족이 되었다. 조선조 초기에는 경세제가인 좌의정 허조를 비롯하여, 전라 경기관찰사, 한성윤을 역임한 허주, 예조, 이조판서, 예문관대제학을 역임한 허성, 형조, 예조판서, 집현전 대제학, 좌참찬 벼슬을 한 허후, 집현전 수찬, 사가독서를 한 허조등이 배출되었으나 허후, 허조 부자가 단종복위 운동 핵심인물이 되어 세조로부터 3대가 참화를 입고 멸문지경에 이르러 유일한 혈족인 조의 손자 충이 어머니를 모시고 하양으로 환고하여 그 후손들이 오늘에 이르렀다.
2. 문경공 허조 사전
허조의 자는 중통이고 호는 경암이며 본관은 하양이다. 고려 공민왕 17년(1369)에 개성부윤, 귀룡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양촌 권근에게 학업을 닦아 고려 멸망2년 전인 공양왕 2년(1390)에 문과급제하여 출사하였다가 조선이 개국하자 태조에게 발탁되어 좌보궐 겸 지제교에 직임을 받았다.
태조6년 석전의식을 개정하여 간행 반포했으며 태종6년 사헌부 잡단 때 왕의 뜻을 거슬러 태종이 크게 노하였으나 두려워하는 기색도 없이 조리있게 답변함으로써 그의 기개를 가상히 여겨 전주판관으로 좌천시켰다. 그후 이조정랑의 자리가 비었을때 태종이 직접 관원명부를 보고“사람을 얻었다”하며 허조를 이조정랑에 제수했다.
이조정랑에 이어 참의, 참판, 판서를 순서대로 맡으면서 고려의 불교적인 예제를 탈피하고 유교를 국가이념으로 하는 조선의 성리학적 예제와 의례를 바꾸는데 온 힘을 쏟았다.
특히 예제연구기관인 의례상정소 제조를 25년간 겸임하면서 없어진 고례와 전적을 찾고 당송전고와 국조예악, 사서상제례까지 원용하고 참작하여 우리나라 예제에 맞게 개정하였다. 오례의를 찬정하고 가례인 관혼상제의 사례를 보완 정비하였으며 특히 공식적인 큰 행사인 종묘, 사직제례, 왕, 왕비등 궁중의 상장제례, 사대의례, 사전에 관한 일은 허조의 자문과 논의를 거쳐야만 시행되었다.
또한 이직, 이원, 황희, 맹사성 등 원로 중진들과 육전수찬색 제조를 맡아 기존법전을 정비하고 속육전을 편찬 간행하였다. 태조 6년에는 허조가 서울에 사부학당과 성균관에 태학 설치를 건의하여 실행하였으며, 세종 1년부터 20년간 계속하여 이조판서, 예조판서를 번갈아 맡으면서 예제사업, 정부제도 개선, 인사개혁과 공정한 인사관리에 힘을 썼다.
시행상의 많은 반대가 있었으나 부민고소 금지법과 수령육기법 구임법을 강력히 추진하여 시행하였다. 이 법령 시행으로 인하여 관료사회의 안정과 지방통치의 효과를 가져와서 조선왕조 500년을 지탱했던 근간으로 평가되었다.
그의 공직업무는 임금을 보필하고 민생을 윤택하게 하고 나라의 일을 자기 집일과 같이 하였으며, 사사로움과 태만도 없었으며 공명정대와 성실로 일관했다.
항시 언관들의 직언과 직필, 언로가 막히지 않토록 바람막이 역할을 하였으며 그는 7차례의 지공거를 수임하면서 기라성같은 인재를 발굴하여 적재적소에 배치함으로써 이들이 세종성대의 초석이 되었다.
몸이 쇠약하여 누차 사직을 청하였으나 불윤하였으며 다시 판중추원사로서 수문전대학을 겸임시켰다. 70세인 세종 20년 6월에 정일품인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우의정, 세자부에 승진되고 기영사에 들어갔다. 71세에 세종에게 국방을 튼튼히 할 것을 건의하고 삼포에 있는 왜인들 돌려 보내도록 간언하였다. 이어 6월에는 의정부 좌의정에 승진되어 임금으로부터 궤장을 하사 받았다.
병세가 위중하여 세종21년 12월 28일에 서거하니 세종은 크게 놀라 거애파조하고 3일간 시장을 철시하고 철선, 치부, 조문, 치제등 최대의 조문의식을 거행하였다.
곧 문경이란 시호가 내렸는데 학근호문이 문, 숙양경계가 경이었다. 이듬해 3월에 경기도 원평부 향양리에 안장하고 세종묘정에 배향하였다.
또한 고향인 하양에는 그를 모시는 금호서원이 세워졌으며 서원에 정조의 사액이 내리고 치제하였다. 사액서원인 금호서원은 경상북도 문화재 449호로 지정되었다.
3. 정산공 허후 사전
공은 하양허씨로 휘는 후이며 세종때 좌의정 허조의 장남으로 벼슬은 좌참찬 겸 판이조사로 시호는 정간이다.
세종 8년에 문과급제하여 병조좌랑, 사헌부지평, 장령, 사인, 좌우승지, 직제학등 청환직을 거쳐 문종이 즉위하자 형조판서, 예조판서, 집현전 대제학, 판이조사겸 좌참찬에 이르렀다.
예조판서겸 우참찬 때에는 김종서, 정인지 등과 고려사 산삭에 참여하고 세종실록을 찬수하였다.
병세가 깊어진 문종의 보필을 극진히 하고 고명을 받아 단종보좌에 진력하여 국정운영을 주도하는 중심 인물이었다.
수양대군(세조)이 불괘의 마음을 먹고 어전회의에서 명나라 고명 사은사로 가기를 주청하니 그 숨은 뜻을 간파하고 극력 반대했다.
수양대군이 임금이 되기 위하여 걸림돌이 되는 김종서, 황보인, 이양, 조극관등 중신을 살해하고 계유정난을 일으켰을 때 이를 불의로 보고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권력을 잡은 수양대군은 허후에게 좌찬성을 제수하였으나 거절하고 좌참찬으로 있었다. 수양대군은 죽인 중신들의 머리를 효수하여 저자거리에 걸고 그 가족들을 죽이려 함에 그 부당성을 간하며 적극 반대하였다.
그는 수양대군이 일으킨 정난의 하례를 중지 시키고자 하였으며 안평대군의 사사를 반대하다가 결국 거제도로 귀양을 가서 단종1년 11월에 교살되었다.
허후 사후 그의 아들 집현전 수찬 허조가 단종복위 운동 핵심 인물로 활동하다 김질의 밀고로 탄로되어 사육신과 함께 참혹한 형벌을 받았다.
영조 23년 3대가 역적에서 충신으로 신원 복관되고 정간이라 시호가 내려졌다. 청백자수함이 정이요, 정직무간함이 간이라 했다.
정조 15년에 단종의 장능에 충신단을 세우고 허후, 허조 부자를 배향하고 별단에는 손자인 허연령, 허구령을 배향했다.
또 충북 괴산 화암서원에는 허후, 허조 부자를 배향하였으며 정조 16년에는 정조가 고향인 하양에 허후, 허조의 충절을 현창하기 위한 정려 건립의 명이 내려 정충각이 건립되었다. 기문은 하양현감 이구성이 찬했다.
이 정충각은 경상북도 문화재 제450호로 지정되었다.
4. 수찬공 허조 사전
허조는 정간공 허후의 아들이며 문경공 허조의 손자이다. 휘는 조이며 호는 응천이다.
세종 29년(1447)에 문과급제하여 집현전 수찬으로 호당에 진선되어 사가독서하였다. 부 허후가 수양대군에게 거제도로 귀양가서 교살되자 벼슬을 버리고 단종복위 운동에 적극 가담하여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그는 박팽년, 성삼문, 그의 처남인 사육신 중의 한 사람인 이개, 그리고 사돈인 김문기와 함께 단종복위 운동을 적극 추진중 거사계획이 탄로되어 스스로 목숨을 끊자 세조는 그 아비에 그 자식이라 하면서 시신을 거열하고 효수하였다.
그의 아들 연령과 구령은 연좌자로 순절하고 가산은 적몰되었다.
세조가 단종복위 운동에 가담한 자를 처단하고 내린 교서에 주모자 27인중 4단계로 분류하였는데 허조는 1단계에 포함되어 이사건을 주동한 10명 문신중에 한사람 인 것으로 보아도 허조가 사육신 사건에 그 중심에서 거사를 추진한 것으로 알 수 있다. 본인과 부와 자 등 삼대가 참혹한 화를 당한 충의의 집안이다. 함께 화를 당한 처남 이개는 목은 이색의 증손이며 함길도 관찰사를 역임한 백촌 김문기는 사돈으로 연령의 장인이다.
세조는 왕위가 안정되면서 세조 3년 단종조외 충신들을 동학사 숙모전에 배향하였고 정조 14년에 허조를 복관 홍문관 부제학으로 증직하였으며 충북 괴산 화암서원에 배향되었다.
정조 15년에는 단종의 장능 충신단에 배향되었으며 아들 연령, 구령은 별단에 배향되었다. 정조 16년에는 종조의 명으로 고향인 하양에 부자의 충절을 기리는 정충각이 건립되었다. 기문은 하양 현감 이구성이 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