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는 길보다 내려오는 길이 어렵더라
[태종 이방원 212] 태종, 세상을 떠나다
이정근 (ensagas)
▲ 헌릉. 대모산 양지바른 곳에 태종이 잠들어 있다. 그의 삶의 궤적만큼이나 빛과 그늘이 있다 ⓒ 이정근
연화궁이 완공되었다. 세종이 풍양궁에 나아가 태종을 모셔왔다. 정부·육조와 창녕 부원군 성석린·평양 부원군 김승주가 신궁에 나아가 문안하였다. 태종이 병조와 대언사(代言司)에 명했다.
“경녕군이 주상전(殿)에 무시로 나아가서 뵙고 한원군은 집현전에서 글을 배우고 있다 하니 옳지 못한 일이다. 총애함이 여러 아우들과 다른 것은 옛날부터 경계하는 바이다.”
경녕군은 효빈 김씨 소생으로 임금 세종하고는 배다른 형제간이다. 민씨 가문의 핍박을 받으며 태어났고 집중 견제를 당한 것이 측은지심을 유발하여 왕실의 총애를 받았다. 총애는 편애를 낳고 편애는 질시를 자극하니 자제하라는 뜻이다.
창덕궁에서 세자 책봉식이 거행되었다. 훗날 문종으로 등극한 원자 이향(李珦)이다. 세종이 면복(冕服)을 입고 인정전에 나와 원자(元子) 이향을 세자로 책봉하는 교서를 반포했다.
“저부(儲副)를 세워서 나라의 근본을 정하는 것은 국가의 규례다. 옛 일을 상고하여 이에 떳떳이 장전(章典)을 거행한다. 너 향(珦)은 의표가 준수하고 총명하여 국가의 신기가 돌아가는 바이다. 적자(嫡子)의 높은 자리는 여러 백성들의 심정이 귀속되는 바이니 좋은 날을 택해 왕세자로 하노라”
세종이 책문(冊文)을 읽어내려 가는 사이 태종의 두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자신의 손자가 세자로 책봉되는 꿈같은 일이 현실화 한 것이다. 비바람 몰아치던 정상(頂上)에서 조심스럽게 내려와 평지에 내려온 느낌이었다. 하산 길을 택했을 때 얼마나 노심초사했던가? 이제 죽어도 눈을 감을 수 있을 것 같았다.
▲ 인정전. 창덕궁 정전이다. ⓒ 이정근
책봉식을 마친 세자가 종묘와 광효전을 알현했다. 차세대를 이어갈 왕세자임을 조상에게 고하는 의식이다. 공식절차를 마친 세종이 의정부에 유시했다.
“사람의 나이 8세가 되면 입학하는 것은 옛날의 제도이다. 지금 세자 나이 8세이니 마땅히 좋은 날을 가려서 입학해야 할 것이다.”
세자가 의위를 갖추고 요속을 거느리며 성균관에 행차했다. 유복을 입고 대성전에 들어가 문선왕과 네 분의 배향위에 제사를 지내고 십철(十哲)과 동무(東廡)·서무(西廡)에 술잔을 올렸다. 이어 박사에게 속수례(束脩禮)를 행하고 세자가 당(堂)에 올라 소학제사를 강(講)했다. 이제 비로소 세자가 학생이 된 것이다.
연화궁의 태종이 지신사 김익정을 불렀다.
“주상이 날마다 문안 오는 것은 좋은데 국사를 폐할까 염려된다. 그대가 주상에게 하루 걸러 오도록 아뢰어라.”
“주상께서는 매양 정사를 보시고 난 후에 문안드리며 또 일이 있으면 즉시 계달(啓達)하는 까닭으로 정사가 침체(沈滯)되지 아니 합니다. 주상께서는 항상 주나라 문왕이 날마다 세 번 문안하는 일을 본받지 못한 것을 송구스럽게 여기온데 어찌 하루걸러 문안하는 일로써 편안하게 여기겠습니까.”
“왕래할 때에 시위하는 군사가 괴로움이 없느냐?”
“시위하는 사람은 다만 입직(入直)한 군사뿐이오니 누가 감히 괴롭게 여기겠습니까.”
“과연 그대의 말과 같다면 나도 또한 안심한다.”
연화궁이 불편하다며 태종이 수강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때 도성과 지방에서 큰 역질(疫疾)이 창궐했다. 치사율이 높은 질환이었다. 창덕궁 나인들이 감염되어 죽어 나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깜짝 놀란 세종이 피방 차원에서 태종을 연화방으로 다시 모셨으나 불편하다며 천달방 신궁으로 옮길 것을 명했다. 천달방은 오늘날의 동숭동이다.
원경 왕후가 돌아간 뒤 의빈과 명빈이 있었으나 신녕궁주가 항상 궁안 일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사가의 안방마님 격이다. 궁주가 먼저 연화방에서 천달방 신궁으로 옮겨 갔다. 태종의 이어를 준비하기 위해서다. 비어있던 집을 수즙하여 준비가 완료되자 태종이 천달방 신궁으로 옮겼다.
세종이 천달방 신궁에 문안한 다음 부왕을 모시고 살곶이에 나가 매사냥하는 것을 구경했다. 낙천정에서 점심을 들고 태종은 천달방 신궁으로 돌아오고 세종은 창덕궁으로 환궁했다. 그런데 바로 그날 저녁, 태종이 고열에 시달리며 자리에 누웠다.
▲ 낙천정. 태종의 하계 별장 겸 이궁이다. ⓒ 이정근
세종이 급히 신궁으로 나아가 부왕을 간호하며 밤을 새웠다. 급보를 받은 종친·부마·문무 2품 이상 관원들이 천달방 신궁으로 달려왔다. 종친은 궁중에서 유숙하고 병조와 대언사도 모여서 숙직하였다.
병석에 누운 태종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지 못했다. 의정부에서 도전(道殿)과 불우(佛宇)와 명산에 기도드리기를 청하니 세종이 각처로 사람을 나누어 보내 기도하게 하는 한편 전국 각지의 수령들에게 왕지를 내렸다.
“부왕 전하께서 여러 날 편치 못하시니 이죄(二罪) 이하의 죄인은 판결된 것이나 아니한 것을 막론하고 모두 석방하라.”
전국 각처의 형옥에 투옥되어있던 죄수들을 풀어 준 세종은 양녕대군 이제를 유배처에서 불러와 부왕을 간호하게 했다. 성산부원군 이직을 종묘에 보내 기도드리고 좌의정 이원을 소격전(昭格殿)에 보내어 기도드리게 했다.
오르는 길보다 내려오는 길이 어렵더라
태종의 병환에 차도가 없자 문안하는 신하들의 출입을 금지시키고 군대로 하여금 신궁 주위를 엄하게 호위하게 했다. 세종이 어찌할 줄을 모르고 있는데 유정현과 이원이 다시 신당과 불전 중 영험이 있는 곳에 기도하고 한양과 지방의 형옥에 갇혀있는 일죄(一罪)이하의 죄수를 석방시키자고 주청했다.
“신당과 불전에 비는 것은 그만두라. 모반대역과 부모를 때리거나 죽인 자, 처나 첩으로 남편을 죽인 자, 노비로 상전을 죽인 자는 이미 발각된 것이나 발각되지 아니한 것을 불문하고 모두 사면하여 석방하라.”
세종은 여러 위(衛)에 영을 내려 태종이 있는 천달방 신궁의 동구를 나누어 지키게 하고 수직하는 갑사(甲士)의 수를 증원했다. 의정부와 제조(諸曹)의 현임과 전임 재추(宰樞)로서 문안 온 자는 궁 앞에 나오지 못하게 하고 각각 동구에 모여서 정부당상(政府堂上) 한 사람과 제조당상(諸曹堂上) 한 사람이 병조에 들어와 문안하고 물러가게 했다.
영험한 곳에 기도드리자는 유정현의 청을 물리친 것이 마음에 걸린 세종은 우의정 정탁을 흥천사, 곡산부원군 연사종을 승가사에 보내어 약사정근(藥師精勤)을 배설하고 판좌군도총제부사 이화영을 개경사에 보내어 관음정근(觀音精勤)을 베풀도록 했다.
▲ 갑사. 궁궐을 숙위하는 갑사 숙위군 ⓒ 이정근
호위하는 군사를 두개 번으로 나누어 번갈아 입직하게 하고 진무(鎭撫) 각 1명과 대졸(隊卒) 각각 6명을 더 보내어 동서남북 대문과 소문 등 도성문(都城門)을 나누어 지키게 하여 뜻하지 아니한 일에 대비하게 하였다.
태종의 병환이 조금 나았다. 세종이 부왕을 모시고 연화방 신궁으로 옮겼다. 병환이 위독하여 방위를 피하기 위해서다. 삼군의 장수가 군사를 거느리고 철통같이 연화방 신궁을 에워싸고 호위했다.
세종이 지켜보는 가운데 태종이 조용히 눈을 감았다. 태종 나이 56세였다.
아버지 태조 이성계로부터 나라를 이어받은 태종은 왕통을 확립하고 세세손손 이어가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렸다. 건국 30년. 고려의 유민들이 아직도 저항의 눈빛으로 바라보고 백성들도 고려 왕씨에 심정적인 연민의 정을 보내고 있는 현실에서 후사가 부실하면 만고의 역적으로 내몰린다는 두려움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고려를 멸하고 조선을 건국한 아버지와 그 아버지로부터 나라를 물려받는 과정이 매끄럽지 못한 자신이 역사에 오롯이 살아남으려면 자신의 후대가 똑바로 서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차세대가 똑바로 서기 위해서는 초석이 튼튼해야 하고 그 반석위에 똑바로 선 모습을 보고 죽는 것이 소원이었다.
태종이 눈을 감는 모습을 아들 세종이 지켜보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독자 여러분의 성원과 격려에 힘입어 ‘태종 이방원이’ 대미를 장식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역사적 인물을 사각의 모니터에 불러내놓고 독자여러분과 함께했던 1년 여. 행복했습니다. 댓글과 쪽지 그리고 메일로 격려를 아끼지 않으신 독자여러분께 머리 숙여 감사를 드립니다. 독자여러분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연재 되었던 ‘태종 이방원’은 도서출판 가람기획에서 책으로 펴낼 예정입니다. ‘삼국지’보다 더 많은 인물이 등장하는 ‘태종 이방원’에 나오는 등장인물을 정확히 적어 보내주시는 독자분께 책을 증정하겠습니다. 참여하실 분께서는 등장인물을 가나다 순으로 정리하여 메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많은 참여 바랍니다.(k30355k@naver.com)
2007.12.18 10:04 ⓒ 2007 OhmyNews
첫댓글 일찍도 올리셨네요. 개근상 드립니다.... 공부 많이 했구요....다음도 기대하겠습니다..
상당히 오랜 연재였습니다. 꾸준히 꼬박 꼬박 읽어주신 성하 가족 모두에게 감사드립니다. 창밖에는 비가 오고 있습니다.
시작이 2007년 9월 5일입니다. 긴 연재에 결석한번없이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행간에서 부기의 의욕이 엿보이는군. 기대함세, 수고..
대단히 수고가 많았어요
재미없는 얘기 열심히 읽어주신 형님, 감사합니다!!
감사드립니다 !!!
나 또한 감솨!!
대단히 고생 많으셨습니다. 대통령님이 갖고 있는 끈기와 성의에 경의를 표합니다.
Harrison! 고마워~~ Harrison의 그 유려한 필체와 유머가 그리워~~
오늘에서야 숙제를 다 했네. 그간 연재하느라 대통령 수고가 많으셨네. 역사가 많은 걸 가르켜주는구만. 감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