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 치는 골프가 좋다
얼마 전 로스앤젤스에서 20년 간 그로서리를 하던 고등학교 선배 한 분이 비즈니스를 정리하고 홀가분한 기분으로 밴쿠버에 왔다. 얼굴은 검게 타고 주름이 깊게 파여 육십대 초라기 보다는 훨씬 더 나이들어 보이는 모습이다.
하루도 노는 날이 없이 부인과 함께 굳세게 장사에만 전념하며 미국 올 때 어린 아이들 삼남매를 모두다 결혼시키고 훌륭하게 키워냈다. 틈틈이 골프를 하는 것 이외는 별다른 취미도 가질 수 없는 형편이었다. 학창시절부터 운동을 좋아해서 못하는 운동이 없다고 할 정도였으니 일단 골프를 시작한 이상 싱글에 도전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가게 뒤편에 연습망을 쳐놓고 하루에도 몇 번씩 틈만 나면 스윙연습을 했다. 마침내 오래 전부터 싱글을 치는 노련한 골퍼가 되었던 것이다.
이런 분이 밴쿠버에 오게 되었으니 골프를 못 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여간 부담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 좋아하는 골프를 재미있게 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야 하는 부담이었다. 그런데 오십이 넘어 캐나다에 와서 겨우 골프를 배우겠다고 연습장을 넘나들고 가까운 친구들이 가자고 강권을 해야 필드에 나가는 수준의 골프실력이니 자연 마음이 무거울 수밖에 없다.
거의 2년 동안 치지 않던 클럽들을 챙기고 아내와 함께 다시 연습장엘 나갔다. 무슨 대단한 실력이라고 2년 정도 지났으면 거의 다 잊었을 줄 알았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그럭저럭 방향을 잡아 날아갔다. 자신이 없으니 힘을 줄 수 없고, 그저 앞으로 똑바로만 나가주면 고맙겠다고 치는 공이니 그나마 어지간히 나갔던 것 같다.
선배는 나보고 못 쳐도 상관없으니 아무 부담 없이 치자고 했다. 요즘도 다서, 여섯 개를 치는 수준이고 나는 이제껏 최고기록이 98타이니 겨우 백타 넘긴 초보 중에 초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선배는 첫 홀의 티삿부터 이상하게 빗맞기 시작하더니 계속해서 난조를 면치 못했다. 워낙 못 친다는 소문대로 잘 처야 할 부담도 없고, 별안간 잘 칠 수도 없을 것이니 그저 옆에서 잘 치는 사람 구경이나 하면서 나는 나대로 즐길 수 있는 골프를 해야하겠다고 생각했다. 결국 선배는 평소에 비해서는 거의 10타 이상을 더 쳤고, 못 치는 나는 과거 기록보다도 몇 타 덜 치는 성과를 거두었다.
잘 치는 한 사람은 못 치는 사람에 비해서는 훨씬 잘 치면서도 내내 속이 상해서 '왜 이러지'를 연발하고, 잘 치는 사람보다 훨씬 못 치면서도 못 치는 다른 한 사람은 오래 간 만에 치는 골프가 그럭저럭 맞아주니 기분도 괜찮을 수밖에 없다. 이날의 라운드를 통해서 다시 골프를 해야하겠다는 충동을 느꼈고 예전의 초심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영원히 초보로 남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못 치는 골프가 여간 좋은 게 아니다. 필드에 나가 못 치면 내 실력이고, 어쩌다 잘 치면 기분이 좋다. 남에게 골프 좀 한다고 우쭐 댈 것도 없다. 그리고 나 같은 사람에게 이겨보아야 별거 아니다 싶으니까 자꾸 내기하자고 덤비지도 않으니, 내기해서 돈 잃을 염려도 없다. 도리어 잘 치는 사람들이 더러는 따는 것 같아도 수시로 내기에서 지는 바람에 속 상해 하는 것을 많이 봤다.
못 치는 사람에게는 골프장 좋고 나쁜 것이 그다지 문제가 안 된다. 비싼 클럽을 골라서 그때그때 사겠다고 할 것도 없다. 무슨 클럽으로 치든 별 차이가 안 난다.
필드에 한 번 갔다오면 오기가 나서 실력을 늘리려고 드라이브 레인지에 열을 내고 달려가는 사람들이 많은 데 못 치는 사람은 우선 그렇게 열이 안 나니까 편하다.
골프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변을 들어보면 게임시간이 너무 길어 하루를 거의 다 보내야한다는 것이고, 가까운 사람들과 경쟁심에 휘말려서 스트레스를 풀러 나갔다가 도리어 더 스트레스를 받고 온다는 것이다. 남보다 잘 해서 칭찬을 듣고 자부심을 느껴 보겠다는 욕심이 이런 화를 불러온다. 아예 못 치는 사람에게는 없는 문제점이다. 온통 여가 시간의 대부분을 골프 연습과 게임에 바치기에는 우리가 할 만한 일들이 사실 너무 많은 거 아닌가. 골프가 싱글이면 다른 취미는 없고 할 줄 아는 것은 골프 밖에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골프는 중독성이 있다고 할 만큼 재미가 있고 경쟁심을 일으키는 좋은 운동이다. 모든 일이 다 그렇듯이 한쪽으로만 기울면 안 좋다. 주말과 여유 시간을 골프로 어울리는 소수의 사람들과만 만나서는 함께 시간을 보내야 할 나머지 사람들의 원성을 면할 길이 없다.
나와 비슷한 실력의 못 치는 아내와 함께 앞으로도 계속 못 치면서, 잘 치는 사람들에게는 아낌없이 박수를 보내며 골프를 즐기도록 할 작정이다. 한 타라도 줄여서 잘 치는 사람이 되겠다고 노심초사하는 50대 이상의 골퍼에게는 지금의 실력에 만족하고 골프의 멋을 즐기라고 권하고 싶다. 그러다가 잘 치게 되는 것은 아무도 막을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