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전기 순창에서 활동한 유학자이자 문관. 본관은 울산(蔚山). 자는 후지(厚之), 호는 하서(河西)·담재(澹齋). 증조할아버지는 김의강(金義剛), 할아버지는 김환(金丸), 아버지는 김령(金齡)이다. 어머니는 조적(趙勣)의 딸 옥천 조씨이고, 처는 윤임형(尹任 衡)의 딸이다.
1510~1560]는 1510년(중종 5) 장성(長城)에서 출생하였다. 타고난 성품이 청수(淸粹)했으며, 5~6세 때에 문자(文字)를 이해하여 말을 하면 사람이 놀랄 정도였다. 1519년(중종 14) 김안국(金安國)에게서 도학과 문학을 배웠으며, 1531년(중종 26)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이황(李滉) 등을 만나 도학을 토론하는 등 교우가 매우 두터웠다.
1540년(중종 35)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권지승문원 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 字)에 등용되었고, 다음 해에 호당(湖堂)에 들어가 사가독서(賜暇讀書)하고, 홍문관 저작(弘文館著作)이 되었다. 1543년(중종 38)에 홍문관 박사 겸 세자시강원 설서(世子 侍講院說書), 홍문관 부수찬이 되어 세자 보도(輔導)의 책임을 맡아 세자를 가르쳤다. 김인후는 세자의 어질고 현명함을 알아보고 정성껏 가르쳤으며, 세자 또한 스승의 높은 학문과 도덕을 존경하며 잘 따랐다.
1544년(중종 39)에 중종이 세상을 떠나고 세자가 즉위하니 그가 바로 인종이다. 그러나 인종이 즉위 8개월 만인 1545년(인종 1)에 세상을 떠나고 곧이어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김인후는 병을 이유로 고향인 장성으로 돌아갔다. 이후 조정에서 여러 차례 불렀으나 다시는 벼슬에 나가지 않고 순창군 복흥면 상송리에 은거하였다. 또한 순창군 복흥면 서마리와 쌍치면 중안리에 걸쳐 있는 백방산(栢芳山) 아래 훈몽재(訓蒙齋)를 짓고, 이곳에서 학문과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다.
사제(私第)에 거처하면서부터는 성현(聖賢)의 학문에 전념하여 조금도 쉬지 않고 사색하고 강구하며 차례대로 힘써서 실천하니, 만년에는 조예(造詣)가 더욱 정밀하고 깊었다. 해서와 초서를 잘 썼고 필적은 기굴(奇崛)하였다. 1560년(명종 15)에 세상을 떠났다.
상기는 아들 묘소임
하기는 손자 묘소임(처는 고봉 기대승의 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