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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일본 불교사
2. 나라[奈良: 710~794] 시대 불교
나라奈良 시대는 수도를 나라奈良 분지에 세워진 헤이조쿄[平城京]로 옮기면서부터 시작된다. 710년 헤이조쿄로 천도하여 794년 헤이안쿄[平安京, 현재의 교토]로 옮길 때까지의 80여 년간을 이르는데, 나라시대는 국가의 평안을 기원하는 국교國敎적 성격을 띤다.
견당사遣唐使로 파견된 많은 유학생과 유학승들은 선진 대륙문화를 배우고 들어와 주로 학승으로 경전과 교리를 연구하던 때로 대륙문화의 수입으로 중국의 영향이 두드러진 시기이기도 하다. 문화가 번창하게 되어 쇼무[聖武, 701~756] 천황의 재위기간인 덴표[天平, 729∼749] 연간을 덴표 시대라고도 부른다.
전래 초기 일본불교는 이른바 ‘씨족불교’의 성격을 가진다. 유력 씨족들 스스로가 사원(씨사)을 건립하고 자신들의 조상신을 모시며, 씨족 일원의 안녕을 기원하는 형태의 불교가 바로 ‘씨족불교’라고 하겠는데, 이 경우 불교 흥륭에 대한 주도권은 어디까지나 각각의 씨족들에게 있었다. 특히, 소가씨를 비롯한 도래계 씨족들이 그 주축이 되었다. 그런데, 유력 씨족들 주도로 전개되던 일본불교의 흐름은 일본이 고대 국가로서의 틀을 확립해 감에 따라 커다란 변화를 맞는다. 즉, ‘씨족불교’에서 ‘국가불교’로의 전환이 그것이다. (김춘호/동국대 강사, [연재] 김춘호의 <일본 불교문화 강좌>-6. 제5강 국가불교의 형성과 ‘승니령’(僧尼令)(출처 : 불교닷컴(http://www.bulkyo21.com.))
숭불파인 소가씨는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일본조정의 실권을 대부분 장악하게 된다. 그리고 쇼토쿠[聖德] 태자가 죽자 소가씨의 전횡은 더욱 더 심해져 이에 불만을 품은 호족들이 등장한다. 그 중 나카토미노 가마타리[中臣鎌足, 614~669, 후에 일본의 주요 귀족인 후지와라藤原鎌足 성씨를 부여받는다]라는 인물이 소가씨 최고의 실권자 소가노 이루카[蘇我入鹿, ?~645]를 암살하는 사건을 일으킨다.
이를 을사의 변[乙巳の変]이라고 하는데, 이로써 100여 년 간 번성했던 소가씨 가문은 사라지게 되었다. 그 결과 씨족들에 의해 운영되던 국가체제國家體制는 천황 중심의 율령국가체제로의 전환이 이루어지게 된다.
1) 승니령僧尼令과 국분사国分寺
천황 중심의 중앙집권 국가로 다시 태어나면서 불교 역시 국가에 의해 통제를 받게 된다. 그 중심에 ‘승니령僧尼令’이 있었는데, 승니령으로 출가제도를 국가가 장악함으로써, 사람들은 마음대로 중이 될 수가 없었다. 허가를 받아 승려가 된 후에도 관승官僧으로서 국가의 관리를 받아야 했다. 승려들은 국가의 율령에 의해 규정되고 관리되는, 오로지 국가와 황실을 위해 봉사하는 국가공무원과 같은 존재였다.
국가불교로의 흐름은 천황중심의 율령국가의 틀이 완성되어 감에 따라 더욱더 분명히 드러나는데, 685년에도 천황은 각 지방의 관청마다 사원을 건립하고 불상과 경전을 안치하게 하였고, 702년 당나라의 율령체제를 본떠 만든 대보령(大寶令)이 반포되었는데 그 안에 승려들의 활동을 국가적 차원에서 규제하는 <<승니령>(僧尼令)> 27개조가 포함되어 있었다.
27개조의 <승니령>은 승려들의 일상생활이나 자격취득, 보시물의 관리, 남녀관계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있는데, 그 중에서 우선 주목되는 부분은 승려들의 포교활동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제1조, 제2조, 제5조, 제23조 등이 이와 관련된 부분인데, 승려들의 사적 포교활동 자체가 혹세무민 행위로 규정되고 있다. (김춘호/동국대 강사, [연재] 김춘호의 <일본 불교문화 강좌>-6. 제5강 국가불교의 형성과 ‘승니령’(僧尼令)(출처 : 불교닷컴(http://www.bulkyo21.com.))
나라, 헤이안 시대 불교의 특색을 ‘진호국가鎭護國家’라는 말로 표현하는데, 고쿠분지[國分寺]라는 사찰을 두어 불교는 국가 위난 발생을 막는 ‘진호鎭護’ 국가의 역할만을 담당하게 하였다. 승려의 수나 자격 조건을 국가가 통제하게 되면서, 승려들의 개인적인 수행이나 민간포교활동은 엄격히 금지되었다.
일반대중과는 거의 접촉이 없었으며, 승려들의 적극적인 전법활동도 없었다. 국가의 번영을 불보살께 기원하는 소임만이 허용되었을 뿐 민중과는 동떨어진 불교였다. 이른바 ‘진호국가 도량鎭護國家道場’이라는 사천왕사, 법흥사, 법륭사, 동대사 같은 거대한 관사官寺에는 민중의 출입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국가에 의한 불교진흥 정책이 수립되면서, 전국 각 지방마다 재정을 투입하여 이른바 고쿠분쇼지[国分僧寺]와 고쿠분니지[国分尼寺]라는 사찰을 세운다. 이는 741년 4월 14일, 건강이 악화된 쇼무[聖武, 701~756]가 내린 ‘고쿠분지 건립의 조[国分寺建立の詔]’라는 조서詔書(천황의 명령)로부터 시작되는데, 그 내용을 보면 당시 국분사国分寺의 성격이나 운영실태, 규모 등을 확인할 수 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첫째, 각국(各國, 여기서 ‘국(國)’은 행정단위로서 현재의 ‘현(県)’과 비슷한 규모임)마다 7층탑을 건립하고 금광명최승왕경(金光明最勝王經)과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을 사경하여 봉안할 것.
→ 둘째, 천황스스로 금자(金字)로 금광명최승왕경을 사경하여 전국의 탑마다 안치할 것을 서원.
→ 셋째, 각 지역마다 국분승사(國分僧寺)와 국분니사(國分尼寺)를 각각 하나씩 건립하고, 승사의 이름은 금광명사천왕호국지사(金光明四天王護國之寺), 니사는 법화멸죄지사(法華滅罪之寺)로 하며, 사찰 운영의 재원으로서 승사에는 봉호(封戶) 50호와 수전 10정, 니사에는 수전 10정을 부여하고, 승사에는 비구 20인, 니사에는 비구니 10인을 각각 상주시킬 것. 승사와 니사는 거리를 두고 건립하고 승니는 교계(敎戒)를 받게 하며, 만약 승니의 결원이 있을 시에는 즉각 보충할 것.
→ 넷째, 매월 8일에는 반드시 금광명최승왕경을 독경하고, 매월 보름에는 계갈마(戒羯磨)를 암송하며, 매월 육재일(六齋日, 8·14·15·23·29·30일)에는 물고기를 잡거나 사냥을 하여 살생하는 것을 금지함. 국사(國司, 지방 수령)는 이를 항상 감독할 것. (김춘호/동국대 강사, [연재] 김춘호의 <일본 불교문화 강좌>-7. 제6강 국분사의 건립과 토다이지 (출처 : 불교닷컴(http://www.bulkyo21.com.))
나아가서 743년에는 화엄 세계의 장엄함을 지상에 구현한다는 대불 건립의 조詔를 내린다. 국가의 모든 동銅을 모아 거대한 비로자나 불상을 만들라는 대불조영大佛造營 사업을 공포公布한 것이다. 그는 교토에 시가라키노미야[紫香楽宮, 743~744]라는 이궁을 지어 천도하려는 계획이 있었으므로, 교토에 있는 고가지[甲賀寺]에 대불을 제작하도록 지시한다.
그러나 불상의 중심축인 기둥을 세우는 의식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큰 산불이 나고 또 지진이 발생하자, 계획을 변경해 나라의 국분사인 긴코쿠지[金光明寺](대불 조성 뒤에는 동쪽의 큰 절이란 의미인 동대사東大寺로 바뀐다)에 대불을 봉안하기로 한다.
불교국가를 완성하려는 쇼무 천황은『화엄경』에 열중했다. 일본에『화엄경』을 전한 것은 신라인 학승 심상(審祥) 스님이었다. 그는 나라 대안사(大安寺)에 있었는데 740년 훗날 동대사의 초대 주지로 추대된 료벤 스님의 초청을 받아 금종사에서『화엄경』을 강설했다. (이 신라의 심상 스님을 신라에 유학한 일본 승려라고 주장하는 학설도 있다.)
쇼무 천황은 화엄 강론에도 참석하면서『화엄경』에 심취하여『화엄경』의 주존 불인 비로자나불을 모실 대규모 사찰을 구상했다. 그는『화엄경』에서 말한 바와 같은 오묘하고도 빈틈없는 그물망을 국가에도 구현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유홍준 지음,『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일본편 2권 아스카-나라, 아스카 들판에 백제 꽃이 피었습니다.)
2) 백제계 도래인渡來人 교키[行基]
대불조영 발표 4일 후인 743년 10월 19일에는, 사찰의 건립建立을 위한 권진勸進(절의 건립 등을 위하여 신자信者에게 보시布施를 청함)으로, 민중 구제의 성자 교키[行基, 668~749]를 임명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교키는, 민간포교가 엄격히 금지되었던 당시에 민중들을 교화하고 수많은 도량을 창건한 혁명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20년간 산림 수행을 한 뒤 민중 속으로 파고들어 포교 활동을 했다. 제자들을 이끌고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교각, 제방, 도량 등을 세워주면서 민중의 큰 존경을 받았다. 야마토 정권은 행기 스님의 이러한 재야 종교 활동을 금지하고 탄압했다.
그러나 행기 스님은 이에 굴하지 않고 더 민중 속으로 들어갔다. 내가 앞서 환산적인 산사라고 칭송한 정유리사도 행기 스님이 창건한 절이다. 그러한 행기 스님의 대중성을 정부도 마침내는 인정하여 동대사 대불 조성에서는 권진이라는 막중한 임무를 맡겼다.
엄청난 기부를 요구하는 권진행각은 그동안 행기 스님이 퍼뜨린 민중불교에 힘입어 원만히 수행되었다. 그 공으로 일본 불교사상 처음으로 최고의 승직인 대승정에 올랐고 훗날엔 행기 보살로까지 높여 불리고 있다. 그런 행기 스님이 대불 조성을 보지 못하고 82세로 입적하셨다. (유홍준 지음,『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일본편 2권 아스카-나라, 아스카 들판에 백제 꽃이 피었습니다.)
교키의 활동이 사회시설 확충이나 자선사업을 위한 보시소[布施屋] 설치 등 민중구제 사업에 집중되었고, 활동지역이 주로 지방이라 정부의 탄압을 덜 받은 측면도 있었다. 그러나 임명될 당시 교키 집단은 이미 통제가 불가능할 정도로 성장해 있었고, 막대한 자금과 노동력을 끌어들일 수 있는 세력을 갖추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교키는 668년 가와치(河内)의 오오토리군(大鳥郡)에서 아버지 고시 사이치(高志才智)와 어머니 하치타 코니히메(蜂田古比売) 사이에서 태어났다. 고시(高志)씨는 가와치노 후미(西文, 혹은 후미(書)씨)의 분파로 백제계 도래인(渡來人)이었다.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 일본에 건너와 논어와 천자문을 전한 것으로도 유명한 왕인(王仁)의 후손이었던 것이다. 어머니 하치타 코니히메 역시 백제계 도래인 출신으로 선조들이 주로 조정의 의료방면에서 활약한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후에 교키활동에 있어서 도래계 출신이라는 그의 출생배경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데, 예를 들어 스승 도쇼(道昭)와도 같은 백제계 도래인이라는 배경이 있었으며, 교키활동의 지지자들 역시 도래계 출신이 많았다.
(중략)
중요한 곳마다 다리를 놓고 제방을 쌓았다.(중략) 쇼무천황(聖武天皇, 재위:724-749)이 그를 깊이 존경하여 대승정(大僧正)의 지위를 하사하고 더불어 400명을 출가시켰다. 화상의 (행적에는) 신비로운(靈異神驗) 일이 많았으며, 사람들은 그를 교키보살(行基菩薩)이라고 불렀다. 머물렀던 곳마다 도량(道場)을 세웠으며 그것이 기내(畿內)에만 49곳이다.” (김춘호/동국대 강사, [연재] 김춘호의 <일본 불교문화 강좌>-7. 제6강 국분사의 건립과 토다이지 (출처 : 불교닷컴(http://www.bulkyo21.com.))
교키는 도시와 도시 주변을 돌며 교화하였는데, 출가자나 속가자 모두 그를 존경하여 따르는 자가 수천이 넘었다고 한다. 어디를 가나 사람들이 다투어 찾아와 예배하였다고 하니, 대불조영에 필요한 기금을 모으기 위해서는 적격인 인물이었다. 그는 745년 국가불교에서 규정하는 승려의 최고지위인 대승정大僧正에 오른다. 훗날 교키보살[行基菩薩]로까지 높여 불렸으며, 동대사 건립 ‘4성四聖’ 중 하나로 동대사 내에 행기당行基堂이라는 법당이 있다.
3) 도래인의 작품 도다이지[東大寺]!
교키의 활약으로 국분사인 긴코쿠지[金光明寺]에 비로자나毘廬遮那 금동불상을 봉안하기로 하고 대불 주조에 들어갔다. 그러나 450톤에 달하는 청동대불을 주조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불 조성은 엄청난 하중을 지탱할 기단부를 튼튼히 다지는 지하 작업부터 시작했다. 지상에 대불이 올라앉을 돌 받침대는 직경 37미터, 높이 2.4미터나 되었다. 그리고 연꽃 모양으로 주조된 청동좌대는 직경 23미터, 높이 3미터였다. 여기까지는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745년 5월, 좌대안치식이라는 성대한 기념행사가 열렸다.
이 연화좌대는 모두 28개의 연잎으로 구성되어 12년 뒤인 757년에야 완성되었다. 각 연잎마다 섬세하고도 아름다운 문양을 새겼는데 지금도 반 이상이 옛 모습을 지니고 있다.
청동대불을 조성하자면 먼저 진흙으로 상을 먼저 만들어야 한다. 이 작업은 1년 반의 노력 끝에 746년 11월에 완성 되었다. (중략) 이제는 청동 주조를 위해 용광로를 설치해야 한다. 여기에도 또 1년이 걸렸다. 그리고 마침내 747년 9월 청동대불 주조를 시작했다. (유홍준 지음,『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일본편 2권 아스카-나라, 아스카 들판에 백제 꽃이 피었습니다.)
3년 간 여덟 번이나 실패를 거듭하였고, 749년 동대사 건립의 일등 공신인 교키가 죽자 대불 공사 또한 중단되게 된다. 이후 대불 주조사업은 백제 의자왕의 후손인 백제계 경복왕敬福王이 사금砂金을 발견하면서 재개되는데, 이때 동대사 불사를 맡은 이가 오우미국[近江國] 백제씨百濟氏 후손인 료벤[良辯, 689~773]이다. 그는 동대사 초대 주지[東大寺の開山]가 된다.
대불 주조의 연이은 실패와 행기 스님의 입적으로 모두들 실의에 빠져 있을 때 뜻밖의 기쁜 소식이 날아왔다. 육오국의 수령인 백제왕 경복(百濟王敬福)이 오다군(小田郡)에서 사금砂金을 발견하여 헤이조궁에 가져온 것이다. 육오국은 지금의 미야기현(宮城縣)으로 백제 멸망 후 그 왕손들에게 땅을 내주어 백제인들끼리 살게 하고 백제인으로 하여금 그곳 지방수령을 지내게 해준 일종의 도래인 자치구였다. (유홍준 지음,『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일본편 2권 아스카-나라, 아스카 들판에 백제 꽃이 피었습니다.)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조칙이 내려진 지 8년 만인 751년 드디어 청동대불이 완성된다. 그리고 또 대불에 도금하는데 무려 7년이 더 필요했다. 1년간의 작업으로 얼굴 부분만 도금된 상태에서 752년 5월 ‘대불개안공양회大佛開眼供養會’가 열린다. 신라, 발해, 당, 인도, 캄보디아에서 승려들이 초청되었고, 인도의 승려 보리선나菩提僊那가 거울로 빛을 반사하여 정확히 눈동자에 맞추는 점안點眼식이 있었다.
바야흐로 일본의 모든 국가적 역량이 사찰 조영造營에 투입되어 그때까지 없었던 쌍탑가람雙塔伽藍 동대사가 건립되었던 것이다. 높이가 약 70m에 달하던 목탑이 동서로 배치되었고, 그 중심에는 높이 15m, 무게 약 50여 톤에 달하는 거대 노사나대불盧舎那大仏이 조성造成되었던 것이다. 당시 수도 야마토노구니[大和国]의 국분사이면서 동시에 국분사의 총본산이었던 긴코쿠지[金光明寺]가 일본 최대의 목조건물과 세계 최대의 청동대불을 가진 도다이지[東大寺]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도다이지는 고쿠분지로서 건립되었으므로, 천하 태평·만민풍락을 기원하는 도장이었지만, 동시에 불교의 교리를 연구해 학승을 양성하는 역할도 있어, 화엄을 비롯해 나라 시대의 육종, 한층 더 헤이안 시대의 천대와 진언도 더한 각 연구소(종소)가 설치되어 야무네 겸학의 학문사가 되었다. (이후 동대사 대략의 역사는 東大寺の歴史, https://www.todaiji.or.jp/history/ 사이트를 참조하시라.)
동대사 건립의 4대 주역을 ‘도다이지[東大寺] 4성四聖’이라고 부른다. 동대사 조성의 발원을 한 쇼무[聖武] 천황, 권진勸進을 맡았던 교키[行基] 대승정, 개산 주지인 료벤[良辯] 승정, 그리고 대불의 개안開眼을 맡았던 인도 출신 도래승 보다이센나[菩提僊那, 704~760]가 그들이다. 그중 교키와 료벤이 한반도에서 건너온 도래인 출신의 후예인 것이다. 대불 및 사찰의 건축에도 신라나 백제가 멸망하면서 이주한 도래인이나 그 후손들의 공로가 컸다.
이월당으로 가는 길목에는 아주 고풍스러운 신사가 하나 있다. 이 가라쿠니(辛國) 신사는 우리와 인연이 깊다. 동대사 건립과 대불 주조를 발원하고 설계와 제작을 지휘한 료벤(良辯) 스님은 오우미(近江) 지방에 정착한 백제계 씨족의 후손이었는데, 그들 일족이 절터를 기꺼이 제공하자 일본 조정이 감사의 뜻으로 지은 신사이다. 그래서 이 신사는 절의 경내에 있게 되었고, 원래 이름은 한국(韓國)신사라고 쓰고 가라쿠니 신사라 불렸던 것이다.
이월당은 무엇보다 자리앉음새가 뛰어났다. 이월당에서는 동대사 대불전과 그 넓은 절터가 한눈에 들어온다. 여기서 동대사를 내려다 볼 때 그 옛날 동대사가 얼마나 어마어마하게 큰 절이었는가를 실감하게 된다. 통쾌할 정도로 호방한 기상이 있는 이 전망을 바라보기 위해서라도 이월당에 올라갈 만하다. (유홍준 지음,『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일본편 2권 아스카-나라, 아스카 들판에 백제 꽃이 피었습니다.)
유홍준 교수는 동대사가 건립된 나라 시대를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이 시기 동아시아는 한국, 중국, 일본 모두 이렇다 할 전쟁이 없이 모처럼 찾아온 평화의 시대였다. 이때 세 나라 모두 문화의 꽃을 피웠다.
당나라는 이태백과 두보가 활약하던 성당(盛唐)시대였고, 통일신라는 에밀레종 ․ 불국사 ․ 석굴암을 탄생시킨 경덕왕(景德王, 재위 742~765) 시절이 있었으며, 발해는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는 칭송을 받던 문왕(文王, 재위, 737~793) 때였다. 일본에서는 이 고대문화의 전성기를 덴표시대(729~749)라 부르며, 당시 문화의 성대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동대사이다.
4) 남도육종南都六宗
아스카 시대에는 주로 한국에서 불교를 받아들였지만, 나라 시대에 오면 주로 중국으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이게 된다. 승니령 하에서 승려들의 대외활동은 크게 위축되었지만, 국가의 지원에 따른 신분 및 경제적 안정을 바탕으로 경전연구에 힘쓰는 승려들이 늘어난다. 중국으로부터 각 시대에 걸쳐 번성했던 교학을 차례로 받아들여, 여섯 개 파의 교종을 세우므로 써, 일본 불교교학은 양적 질적 팽창을 가져와 보다 다채로워진다.
일본불교의 원류는 크게 보면 두 가지이다. 우리나라의 백제 등 삼국과 중국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우리나라란 백제의 성왕 때(537년)를 기점으로 하여 전해져 꽃피웠던 ‘아스카(飛鳥 : 약 592∼710년)·나라(奈良 : 710∼784년) 시대의 불교’를 중심으로 한 것이다. 그리고 중국이란 ‘헤이안(平安: 794∼1192년. 헤이안은 京都교또의 옛 이름) 시대의 불교’를 중심으로 한 것이다.
각종 일본어 사전 뒷부분의 부록에 실려 있는 ‘한자(漢字) 일본어 읽기’를 보면 일본어에서 한자(漢字)를 음(音)으로 읽을 때 두 가지 방법이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오음(吳音) 읽기’와 ‘한음(漢音: 唐音이라고도 한다.) 읽기’가 그것이다. 오음(吳音)이란 백제 등에서 전해진 발음법이며, 한음(漢音)이란 중국 본토에서 직접 건너간 발음법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우리나라에 불교가 처음 전래되었을 때, 불교는 당시의 최신 학문이었으며 중국의 선진문물과 함께 들어왔다.
(중략)
한국인들이 일본의 나라 지방을 여행하면서 느끼는 친근한 감정들은 단순히 자연풍광 탓만이 아니라 우리의 고대문화가 일본에 남아서 산출시킨 여운이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교토(京都) 지방 등을 방문했을 때 느끼는 이질감은 중국적인 분위기와 함께 일본화된 갖가지의 현상 때문일 것이다.
단적인 예를 들면 일본의 아스카 지방이나 나라 지방의 불상들은 한국 사찰의 부처님 상호와 매우 유사한 분위기를 보이는데 반해 교토 지역 등의 불상들은 무엇인가 엄청나게 말을 하고 싶은 표정이거나, 분노에 가득 차 있어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까이 하기에는 좀 거북하다.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 (박보경,「생활불교의 빛과 그림자」2008.. 일본 류우코구(龍谷)대학 불교학과 박사과정 수료. 논문으로 <중국 유식학에 있어 이파(異派) 논란에 대한 연구> 등이 있다.)
관승官僧이었던 이들은 국가로 부터 그 신분을 보장 받았고, 국가는 승려들의 질적 향상을 위해 학문을 장려하는 정책을 추진한 결과다. 이들은 나라의 거대사찰을 중심으로 이른바 ‘남도육종南都六宗’이라는 종파宗派를 형성하였다. 그러나 종파로서의 성격보다는 학파學派로서의 성격이 강한 학문 집단이었다. 승려들은 수행이나 대중 포교 활동과 같은 종교적 실천행이 용인되지 않는 상황에서 자연스레 교리연구에 치중하였고 학문불교로 나아갔다.
남도육종은 삼론종三論宗, 성실종成實宗, 법상종法相宗, 구사종具舍宗, 화엄종華嚴宗, 율종律宗 등을 가리키는데, 당시는 ‘일사일종一寺一宗’은 아니어서 하나의 사찰에 각 종파가 함께 공존하였다. 그러므로 종파로서의 결속력은 약했다고 볼 수 있는데, 후에는 하나의 종파가 하나의 사찰을 독점하게 된다. (천기용지川崎庸之·입원일남笠原一男 지음, 계환스님 옮김,『일본불교사』p. 29.).
그 외 천태종天台宗, 선종禪宗 등 종파와 함께 밀교密敎, 정토교淨土敎 등도 들어와 있었는데, 남도육종 가운데에는 법상종, 화엄종, 율종이 가장 영향력 있는 교단을 형성하였으며 현재까지도 남아 있다.
삼론종三論宗
삼론종三論宗은 중관파 용수龍樹의『중관론中觀論』과『십이문론十二門論』그리고 제바提婆의『백론百論』등 삼론을 근거로 삼는 종파다. 고구려승 혜관慧觀에 의해 아스카 시대인 625년 전해진다. 혜관은 간고지[元興寺]에 머물며 삼론三論을 가르쳤으며,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지만 일찍 쇠퇴하였다. 동대사 남원南院이 중심 사찰이었다.
"수택사(水澤寺)는 1300여 년 전인 서기 625년 아스카시대 스이코왕(推古天皇)의 칙령으로 고구려에서 건너온 고승 혜관(慧灌, 에칸)스님이 개산(開山, 산문을 연다는 뜻으로 창건을 뜻함)한 것으로 전해오고 있습니다. 혜관스님은 삼론종(三論宗)의 개조(開祖)이며 수택사 외에도 나라(奈良)의 반야사(般若寺, 한냐지)등도 건립했다고 전합니다." (이윤옥, 일본 절에서 만난 고구려 스님, 일본 미즈사와데라 혜관 스님 상, 오마이 뉴스, 고구려 혜관스님의 목상木像은 수택사 본당에 모셔져 있다. 한국 기자 방문은 처음이라고 한다.)
성실종成實宗
성실종成實宗은 백제승 도장道藏이 684년 일본에 와서 하리발마訶梨跋摩의『성실론成實論』을 강의함으로써 비롯한다. 도장은 법상法相과 구사학俱舍學 · 삼론학三論學 등에도 능했다.『성실론소成實論疏』 16권을 찬술하기도 하였다. 중심사원은 원흥사元興寺와 대안사大安寺였으나 나중에는 삼론종에 통합됐다.
그 밖에도 일본의 자료에 의하면 담혜(曇慧, 일본에 간 해는 554년) · 일라(日羅, 551년) · 풍국(豐國, 587년) · 혜미(慧彌, 609년) · 법명(法明, 655년) · 의각(義覺) · 도장(道藏, 684년) · 도령(道寧, 684년) · 다상(多常, 690년) · 원각(願覺, 690년) · 원세(願勢, 690년) 등이 일본으로 건너가서 일본인들의 생활 및 불교문화의 향상에 크게 기여하였음이 기록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법상(法相)과 구사학(俱舍學) · 삼론학(三論學) 등에 능했던 도장은 ≪성실론소 成實論疏≫ 16권을 찬술하였으며, 비구니 법명은 ≪유마경 維摩經≫을 독송하여 병자를 고쳤다고 한다. 백제의 승려들은 일본의 불교를 중흥하는 주춧돌 구실을 하였을 뿐 아니라, 일본문화의 원류(源流)를 우리나라에서 찾게 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엮은이),『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동방미디어, 2001.)
법상종法相宗
법상종法相宗은 법의 상相을 밝힌다고 하여 법상종이라 하는데, 삼론종에서 말하는 파사현정破邪顯正의 세계를 명백히 밝히는 종파이다. 이 사상은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를 남긴 삼장三藏법사 현장(玄藏, 602∼664)에 의해 번역되어 알려지게 되었고, 제자인 자은 규기(慈恩窺基, 632~682)에 의해 확립되었다. 현장은 법상종法相宗 · 구사종俱舍宗의 개조로 삼장三藏법사란 경장經藏 · 율장律藏 · 논장論藏에 능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법상종은 식識을 주체로 하기 때문에 유식종唯識宗이라고도 한다.
법상종은 당에 유학한 도래인 출신인 백제계 도쇼[道昭, 629~700]가 653년경에 중국으로 건너가, 유식종唯識宗의 창시자인 현장玄藏의 문하에서 8년 동안 수학하고 돌아와 전한 것이 최초이다. 이후 일본 유학승과 신라 승려가 4차례에 걸쳐 교의敎義를 전했다고 한다. 고후쿠지[興福寺]를 중심으로 호류지[法隆寺], 야쿠시지[藥師寺] 등에서 학풍을 떨쳤다.
구사종俱舍宗
이 종파의 이름은 4~5세기경에 활약한 인도 철학자, 세친(世親, Vasubandhu)이 쓴『아비달마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에서 유래한다. 9세기경에 이르면 구사종俱舍宗은 중국과 일본에서 모두 사라지는데, 법상종과 함께 도쇼[道昭]가 일본 구사종俱舍宗의 개조다. 법상종의 유식학唯識學과 쌍벽을 이루며 오랫동안 불교학의 중심을 이루었으나 결국 법상종에 흡수되었다. 중심사찰은 동대사와 법상종과 같이 고후쿠지[興福寺]였다. 710년에는 고후쿠지[興福寺]에 오층탑이 건립되었다.
화엄종華嚴宗
중국 화엄종華嚴宗의 시조는 두순(杜順, 557~690)이다. 화엄학華嚴學은 2조인 지엄(智儼, 602~668)을 거쳐 제3조인 법장(法藏, 643~712)에 의해 집대성되었다. 일본 화엄종은 의상대사(義湘大師, 625∼702)의 제자인 신라승 심상審祥, ?~742)이 료벤[良辯, 689~773]의 요청으로 동대사에서『화엄경華嚴經』을 강설함으로써 비롯되었다. 그러므로 그를 시조始祖라고 할 수 있지만, 도래인 출신이자 동대사 초대 주지이기도 한 그의 제자 료벤의 활약이 컸다고 하겠다. 755년에 세워진 도다이지[東大寺]는 높이 22m의 청동대불靑銅大佛로 유명하다.
법상종이 아뢰야식阿賴耶識을 근원으로 하는 반면, 화엄종은 진여眞如를 근원으로 하여 일체는 독립적이면서 통일되어 있다고 설한다. 화엄종의 ‘일즉다一卽多’ 사상과 쇼무 천황(聖武天皇, 701~756)의 이상이 맞아떨어져, 도다이지[東大寺] 중심 교학이 됨과 동시에 도다이지 대불 조성의 근거가 되었다. 이런 이유로 도다이지가 육종겸학六宗兼學의 관사로 되었으며, 이후 화엄종은 도다이지를 중심으로 발전해 오늘에 이른다.
율종律宗
율종律宗은 계율을 존중하는 학파로, 계율을 연구하고 널리 펴는 것을 종지宗旨로 하였다. 중국 당唐의 도선(道宣, 596~667) 율사律師가 창시한 종파로, 일본에는 당승唐僧 감진(鑑眞, 687~763)의 입국으로 성립되었다. 출가한 승려에게 필요한 계율을 모아 엮은『사분율四分律』에 의한 계단戒壇을 건립, 일본의 승려들은 수계의식에 의한 득도得度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중심사찰은 감진鑑眞이 세운 당풍唐風의 도쇼다이지[당초제사唐招提寺]다.
나라시대에 있어 국가권력과 불교와의 관계에 관해서는 여러 문제가 있지만, 대략 말하면 처음에는 승니령이 제정되면서 국가권력이 불교를 통제하였다가, 말기에는 차차 불교의 자주성이 고양되어 사이쵸에 의한 천태교단 독립이라는 형태로 결실을 맺었다. 그리고 당나라 승려 감진의 도래는 그 불교의 자주성 강화에 어느 정도의 도움이 되었다. (천기용지川崎庸之·입원일남笠原一男 지음, 계환스님 옮김,『일본불교사』p. 58.)
남도육종은 종파宗派들은 긴 세월동안 주요 정치세력으로부터 경계 받아왔다. 근대에 들어서는 신도와 불교를 분리하는 신불분리령神佛分離令 등으로 오체분시五體分屍되어, 오늘날에는 겨우 명맥만 유지하는 수준의 아주 작은 세력으로 남았다.
5) 헤이안[平安] 시대로
나라 시대 불교는 이렇게 국가차원의 지원을 받아 번성하였고, 득도하려는 승려의 수도 국가에서 통제해야할 만큼 넘쳐났다. 그러나 출세간적 종교가로서의 면모보다는 율령체제에 순응하는 종교관리자로서의 면모가 중요시되었고, 승려들의 관심 또한 수행보다는 세속적인 권세나 현세적 이익에 몰두할 수밖에 없었다. 나라 시대 후기가 되면 사도승私度僧들의 집단득도가 허락되는 등 출가제도 또한 흔들리기 시작한다.
《정창원문서(正倉院文書)》의 <우바새공진해(優婆塞貢進解)>라는 문헌에는 당시 출가와 관련된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 전해진다. 토다이지(東大寺) 대불조영의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경전이나 불교의식 등의 일정수련기간을 거치지 않은 일반인들에게도 득도를 허락하고 있는 것이다. 즉, 여기에서는 출가제도 자체가 엄격한 기준에 의해 시행되기보다는 노역에 대한 대가, 내지는 포상으로 활용되고 있는 모습이다.
한편, 율령체제하의 막중한 세금과 부역 등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승려가 되는 사람들도 늘어나 국가에서는 이를 단속하기 위한 여려 방안들이 모색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출가제도의 방만한 운영은 승려질의 저하로 이어졌고, 승니령이 지향하는 관승으로서의 정행자(淨行者)라는 승려상이 유명무실화되어 간다. (김춘호/동국대 강사, [연재] 김춘호의 <일본 불교문화 강좌>- 9. 국가불교의 변질 (출처 : 불교닷컴(http://www.bulkyo21.com.))
더구나 천황天皇들은 불교에 귀의하여 불교를 열렬히 숭상하였고, 사원과 승려들을 우대하게 됨에 따라 권력을 등에 업은 승려들의 정치적 간섭도 잦아진다. 요승妖僧 도쿄[道鏡, ?-772]는 여제 코겐[孝謙] 천황의 총애를 빌미로 정무에 관여하며 최고 관직에 오르는데, 765년에는 법왕法王에 올라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부패가 만연할 수밖에 없었고, 타락한 승려들이 불교계를 장악하며 물을 흐리고 있었다.
나라시대 후기의 불교는 남도육종과 같은 학문불교의 성장이라는 긍정적 측면과 더불어 불교의 지나친 세속화에 따른 부작용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캄무[桓武, 737~806, 재위 781~806] 천황은 이를 극복하고자 부패한 불교 도시 나라奈良를 버리고, 헤이안[平安, 794~1185, 현 교토]으로 수도를 옮기게 된다. 이로써 80여 년간 이어지던 나라 시대가 막을 내리고, 400여 년 동안 이어지는 헤이안 시대의 막이 올랐다.
한편 이 시기 불교의 영향으로 시체의 매장이 감소되고 화장이 늘어나기 시작한다. 또 불교의 자비사상의 영향으로 살생이 금지되어, 일본인들 사이에는 호전적이고 잔인한 성향이 줄어들기도 하였다. 생선 외에 육식을 반대하는 편견도 이때 생기게 되었다.
불교에 있는 자비사상이 나라시대에 사회적으로 실현되어, 방생이나 살생금지가 실행되었다. (중략) 천평17년(745) 9월에는 3년 동안 천하의 모든 짐승을 죽이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그러한 사상은 또 민중들에게 파급되어 죄인에 대한 사면도 실시되었다. (천기용지川崎庸之·입원일남笠原一男 지음, 계환스님 옮김,『일본불교사』pp. 44~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