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없이 맑은 날에도 우산을 준비하는’카타르 도하의 밤은 화려한 불빛으로 늘 밝게 빛난다. 사진 오른쪽에‘걸프만의 피라미드’로 더 잘 알려진 셰러턴(Sheraton) 호텔이 코니쉬(Corniche) 해변가를 붉게 물들이고 있다. 1972년 현대건설이 지은 이 호텔은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도하 북부의 유일한 고층 빌딩이었다.
인구 100만명이 채 안되는 나라 하지만 세계에서 두번째로 잘사는 나라 그래도 늘 절박한 나라 ‘맑은 날에도 우산을 준비’하는 나라
지난달 23일 오전 6시. 카타르 도하 공항을 빠져나오자, 수십명씩 인부를 태운 버스들이 여명의 도하 시내를 가로질렀다. 인부들을 실어 나르는 버스들은 도시 곳곳에 포진했다. 해가 떠 있는 동안 이 도시를 걸어 다니는 사람들은 인부들이다. 섭씨 40도를 오르내리는 열사(熱砂)의 땅은 이들로 분주했고, 국가 개조작업이 진행 중인 카타르는 전역이 거대한 공사장이었다.
세계 최대 규모의 교육도시, 연 인원 5000만명의 승객을 소화하는 신공항, 인공 섬을 만드는 펄(Pearl) 프로젝트, 중동 최초의 ‘에너지거래소’가 들어설 루세일(Lusail) 신도시….
인구 100만명이 채 안 되는 소국(小國) 카타르. 이 덩치로는 상상할 수 없는 메가프로젝트가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오는 2012년까지 국가 전체 GDP의 3배 규모인 1380억달러가 인프라 건설에 투입될 예정이다. 얼핏 보면, 작은 체구의 야구선수가 자기 몸의 3배쯤 되는 배트를 다부지게 잡고, 엄청난 오버스윙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벼랑 끝에서 모든 것을 걸고 승부를 거는 듯한 카타르의 절박함은 이 나라가 현재 갖고 있는 자산을 보면 더욱 이해하기 힘들다. 러시아, 이란에 이어 세계 3위의 가스 보유국. 하루 평균 80만 배럴 규모의 원유 생산량. 1인당 국민소득 4만 달러를 돌파한 세계 2위의 부국(富國). 가스와 원유가 완전히 끊겨도 2년 반 동안 지속적으로 경제가 성장할 수 있는 규모의 자금을 넣어둔 재무안정펀드(financial stability fund).이런 의문을 품고, “왜 이렇게 절박한가”라고 물으면, 카타르 정부·기업·사회의 주요 인사들은 “시간이 없다”고 말한다. 지금은 고(高)유가로 돈을 벌지만, 언제 다시 유가가 떨어질지 모른다는 것이다. 카타르호텔협회(QNH) 나와프 빈 자심 알타니 회장은 “지금은 원유 가격이 배럴당 50달러 수준이지만, 언제 다시 20달러 수준으로 떨어질지 알 수 없는 것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행동하라”는 하마드 국왕의 위기감을 카타르인들은 공유하고 있었다.더욱 놀라운 것은 그들이 미래에 대한 방법론까지 공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카타르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고 묻자, 카타르의 주요 인사들은 망설이지 않고 분명하게 같은 대답을 내놓았다. “실용주의(pragmatism), 글로벌 스탠더드(global stand ard), 완전한 개방(open to everybody).” 카타르의 교육·과학을 책임지는 카타르 파운데이션 이사회 멤버이자 헬베티카(Helvetica)그룹 회장인 찰스 매스필드 경은 “(외국인이 들어와서) 3일 만에 국가 전체가 향하고 있는 목적지를 명백하게 파악할 수 있는 곳은 아마 세계에서 카타르가 유일할 것”이라고 말했다.햇볕 좋은 날에 우산을 준비하는 하마드 국왕의 리더십에 따라 사막의 새로운 기적을 만들어내는 카타르에 대해 세계의 평가기관들은 찬사를 보내고 있다. S&P 신용등급 A+, 무디스 국가등급 A1으로 중동지역에서 가장 높다. 세계경제포럼(WEF)은 2005년 발표한 아랍세계 경쟁력 보고서에서 카타르를 “아랍지역에서 가장 경쟁력이 우수한 국가”라고 평가했다.
1. ‘개발’에서 ‘창조’로
언제까지 땅에 ‘삽질’만 할텐가…가스에 도전
카타르의 경제 기적은 하마드 국왕의 등장으로부터 시작됐다. 집권 초 하마드 국왕의 리더십은 ‘개발’이었다. 1995년 부패한 부왕(父王)을 몰아내고 집권한 하마드 국왕은 집권과 동시에 서구자본과 기술을 끌어들여 원유와 가스를 개발했다. 1995년 이전 카타르의 원유 생산량은 1일 3만 배럴에 불과했다. 관련 기술과 지식이 상대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이다. 하마드 국왕은 엑손 모빌, 로열 더치셸, 사솔(Sasol) 등 세계적인 기업들을 적극적으로 받아 들여 현재 하루 80만 배럴의 원유를 생산하고 있다. 하마드 국왕은 또 카타르 국부의 최대 원천인 북부가스전(North Field)의 가스자원을 개발했다. 매장량 900조 입방피트의 북부가스전은 단일 가스전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 원유로 환산하면 약 1620억 배럴에 해당하는 엄청난 양이지만, 하마드 국왕 집권 전 이 가스전은 바다 속에 묻혀 있을 뿐이었다. 하마드 국왕은 걸프 국가 중 최초로 LNG 분야에 외국인들의 직접 투자를 허용했다. 한국가스공사 등 한국 기업들도 이때 ‘KORRAS’라는 컨소시엄을 구성, 4%의 지분을 획득했다.90년대 중반까지도 바레인·UAE 등 걸프 6개국 가운데 가장 소득이 적었던 카타르는 이제 가장 잘 사는 국가로 발전했다. 하지만 모두 부러운 시선으로 카타르를 쳐다볼 때 하마드 국왕은 제2의 개혁을 시작했다. 첫 번째 개혁이 땅에 묻혀 있는 자원을 개발하는 것이라면, 두 번째 개혁은 카타르에 없는 것을 새로 만드는 ‘창조’ 작업이다. 없는 길을 새로 만드는 개혁 실험에 하마드 국왕은 그만의 독특한 방법인 ‘패러슈트(낙하산) 전법’을 구사했다.
2. 패러슈트 전법
낙하산이 나쁘다고? 낙하산이여 어서오시라
하마드 국왕은 세계 최고의 인재들을 사회 각 분야에 전략적으로 투하했다. “세계 최고가 아니면 쳐다보지도 말라”는 국왕의 지침에 따라 정부 기관들과 기업들은 각 분야에서 ‘무조건 최고’ 인력만을 스카우트하고 있다.금융 분야엔 뉴욕 월스트리트와 런던 시티를 누비던 일류 인력들로 가득하고, 컨설팅 분야엔 랜드연구소 등 세계 유수 연구소 출신 연구원들이 넘쳐 난다. 공공부문에도 외국인 비율이 57%에 이른다. 카타르금융센터(QFC)의 감독위원장은 뉴질랜드인(필립 도프), 카타르 상업은행의 CEO는 브라질인(아즈미 로우), 카타르 파운데이션의 이사는 영국인(찰스 매스필드), 카타르과학기술재단(QSTP) CEO는 호주인(율리안 로버츠)이다. 정부기관인 카타르금융센터에도 25개 국적의 사람들이 모여 일하고 있다. 현지 은행인 카타르 상업은행(Commercial Bank)은 아예 1000명의 직원 중 80%가 31개 나라에서 온 외국인들이다. 미국 조지타운대 카타르 분교엔 22개 국적의 학생들이 한 강의실에서 수업을 듣는다. 세계의 일류 인재들을 국적을 불문하고 끌어들이다 보니, 카타르는 거의 모든 조직이 ‘작은 UN’이다. 카타르 전체 고용 인구 중 73%가 외국인이다. 도하 중심가의 포시즌스(Four Seasons) 호텔. 아프리카 토속 의상을 입은 짐바브웨 손님이 들어서자, 가나 출신 직원이 나와 맞았다. 호텔 로비에 이집트 손님이 들어서면 이집트 직원이, 중국 손님에겐 중국 직원이, 페루 손님에겐 페루 직원이 다가선다. 이 호텔에만 42개국 출신의 사람들이 일하고 있다. 이 호텔 로비엔 항상 10가지가 넘는 언어들이 뒤섞인다.카타르의 채용 안테나는 그래서 세계를 향해 뻗어 있다. 카타르 파운데이션 공보관으로 일하고 있는 영국 출신 레이첼 테일러는 “작년 카타르 도하 아시안 게임에 왔다가 채용 공고를 보고 무작정 지원했는데 덜컥 붙었다”며 “근무 계약을 하자마자 2년짜리 비자가 나왔다”고 말했다. 사업 관계상 카타르를 자주 찾는 한 스위스 기업 관계자는 “처음 왔을 때는 일주일, 두 번째 왔을 때는 3주, 세 번째 방문인 이번엔 1년짜리 비자가 나왔다”며 “다음에 올 때는 영주권이 나오지 않을까 내심 기대하고 있다”며 웃었다. 다국적 인력이 넘치는 현실에 카타르인들은 불만을 품지 않을까? QEZ(카타르자유무역지대)의 책임자 사드 아트마 오타비는 “세계 최고의 사람들과 최고의 환경에서 근무하는 것 자체가 축복인데, 불만이 있을 수 없다”며 “최고들과 경쟁하다 보니 국제비즈니스 환경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은행직원 1000명중 외국인이 800명 강의실에는 22개 국적 학생들이 공부 ‘두려움 없는 개방’으로 성공 ‘중동의 스위스’ 목표로 ‘그들만의 외교’
3. 국가개조의 핵심은 교육
세계 최초로 5개 美명문대 E-시티에 모아
하마드 국왕이 이끄는 카타르 국가 개조의 핵심에는 교육이 있다. “번영으로 가득 찬 미래를 위한 최고의 투자는 총명한 내일의 리더들을 키우는 것”이 그의 신념이다. 이런 그의 비전은 도하에서 8㎞ 떨어진 곳에 창조되고 있는 ‘교육도시(E-시티)’에 농축돼 있다.
그는 세계 최초로 5개 미국 명문대학을 한 곳에 모았다. 코넬대 의과대학, 카네기멜론대 경영 및 컴퓨터공학대학, 조지타운대 국제관계대학, 텍사스A&M대 공과대학, 버지니아커먼웰스대 응용미술대학이 들어와 있다. 현재 700명의 학생이 이곳에서 공부한다. QEZ 책임자 사드 아트마 오타비는 “여기에도 카타르의 일관된 전략이 적용됐다”며 “한 대학의 분교를 그대로 옮겨 왔으면 훨씬 수월했겠지만, 카타르는 각 대학의 최고 학과들을 찾아내서 5개 대학의 분교를 유치했다”고 말했다.
당초 50만㎡ 부지에 2002년 건설되기 시작한 E-시티는 2003년 10월 공식 출범 이후 현재 1000만㎡ 부지에 총 30억 달러를 투자, 빠른 속도로 확장 공사를 하고 있다. 입학 시스템과 시험·교과 과정이 본교와 100% 똑같고, 졸업하면 미국 본교와 같은 학위를 받는다. 시험 결과 역시 본교 학생들과 통합돼 나온다. 미국 본교와 카타르 분교가 전혀 구분되지 않는 시스템이다. 그러다 보니 걸프·유럽·중국·인도·미국 등 전 세계에서 학생들이 몰리고 있다.
중동의 ‘의료 허브’로 거듭나기 위한 거대 프로젝트도 E-시티에서 진행되고 있다.
이곳엔 하마드 왕이 사재를 털어 기부한 80억 달러의 연간 투자 수익금으로 운영되는 ‘교육 전문 병원(specialty teaching hospital)’이 들어선다. 미국 코넬대 의대의 최고 의료진들이 연구와 환자 치료를 담당할 예정이다. 코넬대 건물과는 지하 통로로 연결 돼 의대생들이 병원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실제 수술 현장을 보면서 수업을 하도록 설계됐다.
취재팀은 지난달 25일 확장공사가 한창인 E-시티 한쪽의 조지타운대를 방문했다. 건물 입구에 들어서자 학생들의 국적을 상징하는 22개의 대형 국기들이 눈에 띄었다. 푹신한 양탄자와 두꺼운 커튼이 설치된 ‘금남(禁男) 구역’. 히잡을 두른 한 무더기의 여학생들이 편한 자세로 자리를 잡고 기말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최첨단 시설을 갖춘 강의실에선 새뮤얼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을 놓고 몇몇 학생들이 격한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모두 유창한 영어를 구사했다. 조지타운 국제관계대학 홍보관 찰스 나일렌(Nailen)은 “내년 20명의 3학년 학생들이 워싱턴 본교에 교환학생으로 갈 예정인데, 학생들이 본교 학생들에 비해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확신한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카타르 분교 학생들은 토론만 하면 전투적인 ‘쌈닭’으로 변한다. 미국 본교에 비해 공격적으로 자신의 논리를 전개해 나가는 토론 수업에 강한 것 같다”며 웃었다.
E-시티는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도 ‘초일류’만을 고집한다. 카타르의 유력기업인 만나이의 부사장 카레드 만나이는 “E-시티에서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졸업할 경우 최고의 엘리트 교육을 15년 이상 받은 것이 된다”며 “이곳을 거친 카타르 인재들은 세계의 엘리트들과 경쟁해도 결코 뒤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4. 왕비까지 나서서 코넬大 의대 끌고와
MS·GE 등 글로벌 기업 유치한 QSTP
E-시티에서 길 하나를 건너면 카타르과학기술재단(QSTP)이다. 시너지를 노린 정밀한 계산하에 설계된 것이다. 바로 옆에 들어선 세계 최고 수준의 대학들이 개발한 기술을 QSTP에서 상용화하고, QSTP에서 발전시킨 기술을 다시 대학에서 연구하자는 의도다. 세계의 브레인들이 E-시티 안에서 선진 기술 연구, 자녀 교육, 의료, 주거 등을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기도 하다. QSTP의 CEO 율리안 로버츠(Eulian Roberts)는 “인근에 세계 최고의 대학들과 초등·중등·고등학교 시설이 있어 연구원 자녀들이 최고의 환경에서 자랄 수 있고, 코넬대 의대 병원이 들어서면 세계 최고의 의료 시설도 누릴 수 있다”며 “한마디로 연구원들이 일하는 데 필요한 최상의 조건을 갖췄다”고 말했다.
여기에 카타르 정부는 연간 GDP 2.8%를 연구개발(R&D) 예산으로 지원하겠다고 약속, 뒤를 받치고 있다. QSTP가 완공되려면 아직 1년 넘게 남았지만, MS·로열더치셸·엑손 모빌·GE 등 12개에 이르는 세계 초일류 기업들의 R&D 센터가 이미 이 곳에 입주했다. 현재 225명의 연구원들이 임시 건물에서 일하고 있다. 카타르정부는 5년 안에 50개 글로벌 기업에서 모두 1200명의 연구원을 유치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QSTP에도 집중의 원칙이 적용된다. 의료·석유화학(petroc hemical)·물 자원 관리·항공·환경 등 5개 R&D 분야가 집중적으로 연구되고 있다. 카타르 파운데이션 찰스 매스필드 이사는 “이에 해당하지 않는 연구를 하는 기업들은 입주가 불가능하다”며 “단순히 건물과 연구시설을 지어 놓고 기업들을 유치해 소위 임대 사업만 하는 다른 연구 단지들과는 질적으로 다르다”고 말했다.
E-시티의 뼈대를 세운 게 하마드 국왕이라면, 살을 붙이고 숨을 불어 넣은 것은 모자(Sheikha Mozah bint Nasser Al-Misn ad) 왕비다. 모자 왕비는 하마드 국왕의 두 번째 부인으로, 국왕의 총애를 받으며 카타르 국정 운영에 있어 국왕 다음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녀가 이사장으로 재직 중인 카타르 파운데이션은 교육·과학기술 관련 사업에 관해 전권을 갖고 있다.
코넬대 의대를 유치할 당시 모자 왕비는 미국 본교를 수 차례 방문했다. 사재를 털어 7억5000만 달러를 기부하는 등 공을 들인 끝에 모자 왕비는 코넬대 의대를 카타르로 끌고 오는 데 성공했다.
카타르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에서 교육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 40대의 왕비는 하마드 국왕의 비전을 공유하는 동시에 총명함과 추진력도 갖춰 종종 ‘하마드 국왕의 운명적인 정치 파트너’로 불린다. 그녀는 미 CBS의 뉴스 시사 프로그램인 ‘60분(Sixty Minutes)’에 국왕인 남편과 함께 출연해 유창한 영어로 자신의 생각을 당당히 밝히기도 했다. 당시 모자 왕비는 “현재 우리의 목표는 우리 조상들이 그랬던 것처럼 다른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우리 자신을 잃지 않는 것”이라며 “교육이 바로 이 목표를 향해 우리를 인도할 것”이라고 말했다.
5. 독특한 포지셔닝 전략
모두의 친구이지만… 누구의 친구도 아니다
하마드 국왕 리더십의 또 다른 축은 동·서양, 기독교·이슬람간 공존 공간의 창출이다. 카타르의 외교 전략은 표면상으로는 ‘모두의 친구(everybody’s friend)’다. 하지만 현실정치에선 변형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카타르의 한 외교 관계자는 “사실 카타르의 외교 전략은 ‘누구의 친구도 아닌(nobody’s friend)’ 것”이라고 귀띔했다.
하마드 국왕은 측근들에게 종종 “카타르의 목표는 중동의 스위스”라며 “스위스와 같이 소국이지만 평화롭고 많은 외국인들이 찾는 나라로 만들겠다”는 생각을 밝히고 있다.
카타르의 외교는 모든 국가를 도발하는 동시에 모두에게 문을 열어 놓는 방식이다. 아랍 국가 중 유일하게 이스라엘 무역대표부가 들어와 있으면서, 동시에 팔레스타인 무장조직인 하마스를 지원한다. 이웃 아랍 국가들과 친분을 유지하면서도 미국 함대의 정박을 허용하는 식이다. 카타르는 이런 위상을 이용해 지난 2005년엔 아랍국가 중 유일한 UN 안보리이사국으로 헤즈볼라와 이스라엘 간 휴전 협상을 이끌어냈고, 팔레스타인 평화 문제를 중재했다.
카타르는 ‘카타르 브랜드’의 홍보를 위해 각종 포럼과 콘퍼런스를 공격적으로 유치하고 있다. 취재팀이 방문한 지난 4월 마지막 주. 10분 안에 웬만한 곳은 다 갈 수 있을 정도로 작은 도시, 도하에선 ‘민주주의와 자유무역에 대한 토론’, ‘장애아동 인권포럼’, ‘세계 교육포럼’ 등 3개 국제 콘퍼런스가 한꺼번에 열리고 있었다. 작년 한 해만 84개의 국제회의를 유치했다.
카타르는 2002년 WTO 각료회의·2006년 제5회 ACD 외교장관회의·제15회 도하 아시안게임 등 굵직한 대규모 국제행사들을 유치해 왔다. 직접 주최하는 대규모 국제회의 초청 리스트엔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 앨 고어 전 부통령 등 거물급 인사들이 포진해 있다. ‘제7회 민주주의와 자유무역에 대한 토론 콘퍼런스’에도 반기문 UN 사무총장, 타르야 할로넨 핀란드 대통령 등 80여 개국에서 600명이 넘는 VIP들을 초청했다.
카타르는 현재 중동에 평화와 민주주의를 전파하는 목소리의 발신지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하마드 국왕은 “중동의 평화를 위해선 반드시 민주주의 정착이 필요하며, 민주주의는 결코 경제 발전 없이는 이룰 수 없다”고 강조한다.
6. 두바이와의 경쟁관계
“두바이=신기루, 우리와 비교하지 말라”
외형만 보면 오늘의 카타르는 두바이 발전의 초기 모습이다. 하지만 카타르인들은 이런 식으로 카타르와 두바이를 비교하는 것에 대해 강한 거부 반응을 보인다. 그들은 하나같이 “두바이는 신기루(mirage)에 불과하다”, “두바이와 카타르는 전혀 다른 길을 가고 있기 때문에 비교조차 할 수 없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카타르 현지인들은 두바이와 카타르의 차이를 두바이의 ‘팜 아일랜드(Palm Island)’와 카타르의 ‘펄 아일랜드(Pearl Island)’로 설명한다. 카타르인들은 “팜 아일랜드는 ‘디즈니랜드’일 뿐”이라고 평가절하한다. 세계적인 팝 스타의 별장이 줄지어 있고, 돈 많은 관광객들이 몰리는 엔터테인먼트 공간일 뿐이라는 것이다. 반면 카타르의 펄 아일랜드는 좀 더 통합적인 공간이라는 주장이다. 부호들의 별장도 있고, 현지인들이 주거할 수 있는 아파트도 있으며, 이곳에 사는 사람들을 위한 세계 최고의 교육 시설 유치 계획도 갖췄다는 것이다.
펄 프로젝트 영업본부장 후삼 아메드(Ahmed)는 “오늘 카타르의 단면은 펄을 통해 들여다볼 수 있다”며 “종합적인 발전을 지향하면서 마치 오늘 생명이 다할 것처럼 뛰고 있다”고 말했다.
세계 2위의 경제부국 카타르에 극단의 국가개조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햇볕 좋은 날에 우산을 준비하는 하마 드 국왕의 위기감과 비전을 카타르인들은 공유하고 있 다. 카타르의 메가프로젝트 중 하나인‘펄 프로젝트(인 공 섬 건설 계획·사진=모형)’는 창조적이면서도 엔터테인먼트·주거·교육기능이 복합된 계획이라는 점에서 카타르가 추구하는 개혁의 단면을 잘 드러내고 있다. / 도하=주완중 기자 wjjoo@chosun.com
북쪽 해안에 광대한 가스전(田)을 품고 있는 세계 3위의 가스 보유국. 20만 명의 자국민은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무료이고, 의료보험도 시내전화도 공짜다. 사람보다 일자리가 많아 정확히 통계를 낼 수 있다면 실업률이 마이너스가 될 것이라는 국가. 이제 허리띠를 풀러도 좋을 것 같은 이 나라가 극단의 개혁 리더십으로 국가를 개조 중이다. 복지국가에서 글로벌시장경제로 급속히 이동하고 있고, 기독교와 이슬람이 충돌하는 중동에 독특한 공존의 공간을 만들어 비즈니스의 저변을 넓히고 있다. 역발상의 창의력으로 세계를 놀라게 하고 있는 두바이 바로 옆에서 또 다른 기적이 지금 진행 중이다.
하마드 국왕 (Sheikh Hamad bin Khalifa Al-Thani) /블룸버그
■ ‘패러슈트 전략’… “세계 최고 인력·제도를 심어라”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다.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행동하라.”
카타르 개혁의 지휘자 하마드 국왕은 다급하게 국민들을 ‘변화의 모랫바람’ 속으로 밀어 넣고 있다. 1995년부터 시작된 그의 12년 집권기간 중 카타르는 연평균 18.7% 성장했다. 그의 부친이 이끌던 카타르는 그전 12년간 평균 0.3% 성장에 머물렀을 뿐이다.
지난 성적을 돌아다보며 흐뭇하게 계산기를 두드릴 만도 한데, 그는 미래에 대한 비전으로 현실을 다그치고 있다. 계속 석유·가스에만 의존해선 살 수 없다는 미래에 대한 위기감과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 사이에 끼인 카타르의 지정학적 운명에 그는 눈을 뜨고 있는 것이다.
그의 성공 체험은 노하우로 숙성되고, 시스템으로 진화하고 있다. 걸프 국가 중 드물게 알루미늄·비료·가스 등 중공업 기반을 닦은 하마드 국왕은 이제 금융·교육·과학기술 등 고부가산업으로 차원이 다른 변신을 시도 중이다.
선진국이 지배하는 분야에 후발국이 뛰어들어 살아남을 수 있을까? 누적시간에 비례하는 아날로그적 질서에 하마드 국왕은 디지털적 기습공격을 감행하고 있다. ‘패러슈트(낙하산·parachute)전략’. 세계 최고의 인력과 제도를 이식시켜 경쟁시키는 것이다.
카타르 금융 구축의 총본산인 QFC(카타르금융센터). 이곳의 최고 수장은 뉴질랜드인(필립 도프 감독위원장)이다. 4명의 이사회 멤버는 각각 영국, 프랑스, 미국, 홍콩의 금융인 출신이다. 이자를 받는 것조차 꺼려하는 이슬람법이 금융에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되자, 아예 영미식 금융법을 제정하고, 이를 판결하는 별도의 법정까지 만들었다.
금융법정의 판사 7명은 전원 영국, 인도, 호주, 스코틀랜드 등 해외파 출신이다. 2년 전 설립된 QFC 직원 70명 가운에 60%가 외국 금융인들이다.
하마드 국왕은 “무조건 최고의 인력을 데려와 쓰라”고 지시했다. 뉴욕의 월스트리트, 런던의 시티와 경쟁하기 위해서는 런던, 뉴욕, 프랑크푸르트, 홍콩 등 일류 금융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최고 인재들의 경험을 사야 한다는 것이다. QFC 자체가 패러슈트가 되어 기존 질서에 내리 꽂히자 카타르의 경제 부처와 금융 관련 기관들은 이제 무대로 뛰어올라 개혁경쟁을 벌이고 있다. 필립 도프 QFC 감독위원장은 “하마드국왕 리더십의 특징은 모든 결정을 매우 신속하게 내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마드 국왕이 미래 카타르를 위해 총력을 기울이는 교육 분야에도 ‘패러슈트 전략’이 도입됐다. 코넬(의학)·카네기멜론(컴퓨터공학)·텍 사스A&M(공학) 등 각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미국 대학 5개를 1997년부터 한꺼번에 유치했다. 이곳의 인재들이 편안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일터에서 5~6분 거리에 최고의 주거시설을 제공하고, 자녀교육 환경도 갖췄다. QF(카타르 파운데이션)의 찰스 멘필드 이사는 “미국 대학을 유치한 후 변하지 않을 것 같던 보수적인 카타르 국립대학들도 살아 남기 위해 변신하고 있다”고 말했다.
■ 이슬람과 서구의 가치가 공존하는 공간
하마드 국왕 리더십의 또 다른 축은 독특한 공간의 창조다. 뒤지는 분야에선 세계 최고의 인재와 제도를 이식하지만, 동·서양과 기독교·이슬람간 문명이 부딪히고 충돌하는 지점에 세계 유일의 공존 공간을 열고 있다.
이슬람의 CNN인 알자지라방송이 도하에 베이스를 틀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알자지라방송은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부터 마무드 아흐메디자네드 이란 대통령까지 비판한다. “세계 어느 국가의 지도자라도 잘못이 있으면 즉각 도발적인(provocative) 보도를 한다”는 게 알자지라의 원칙이다. 나와프 빈자심 QNH(카타르호텔협회) 회장은 “자유언론 없이는 사회의 투명성을 보장할 수 없으며, 투명하지 않다면 결코 초일류 금융기관들이 북적대는 금융시장을 형성할 수 없다”고 말했다.
걸프 국가 가운데 유일하게 미국 함대가 정박하면서도 팔레스타인 무장조직인 하마스를 포용하고, 이스라엘 무역대표부가 들어와 있는 곳이 카타르다. 이런 카타르를 두고 “모든 사람의 친구이며, 누구의 친구도 아니다(everybody’s friend, nobody’s friend)”라고 세계는 부른다.
카타르의 독특한 위상 설정은 ‘국제 콘퍼런스’ 활동에서도 드러난다. 취재팀이 방문한 지난 4월 마지막 주 도하에선 ‘민주주의와 자유무역에 대한 토론’ ‘장애아동 인권포럼’ ‘세계 교육포럼’ 등 3개 국제 콘퍼런스가 한꺼번에 열렸다. 4월 한달 동안 12개, 1년에 평균 84개의 국제회의가 열리는 곳이 카타르다. 탁신 전(前) 태국 총리는 이중 ‘민주주의와 자유무역에 대한 토론’에 초대돼 민주와 자유의 중요성을 부르짖었다. 모든 껄끄러운 목소리가 함께 울리고 있는 도하식 ‘멜팅폿(melting pot)’의 현장이다.
역사는 1세기 중반 카타르의 조상들을 보고 “끊임없이 물을 찾아 헤매는 사람들”이라고 기록했다. 기름과 가스를 찾은 21세기 카타르인들은 이제 미래의 물을 찾아서 골몰하고 있다. 그 선두에서 하마드 국왕이 길을 만들고 있는 중이다.
‘실질 실업률 0%, 소득세 0%, 가정용 전기·가스·수도요금 제로(0).’ 꿈의 숫자로 국가의 경제통계표를 채워 넣는 나라가 있다. ‘세금 없는 복지국가’. 양립할 수 없는 이 경제 목표는 유토피아를 꿈꾸는 몽상가의 비전과 일시적으로 우중(愚衆)을 속이려는 포퓰리스트의 선동 속에서만 가능했다. 경제법칙을 거스르는 이 모순의 목표가 걸프만의 소국(小國), 카타르에 의해 실현되고 있다. 카타르의 1인당 GDP는 4만 3592달러 (2005년, 카타르정부 통계). 룩셈부르크에 이어 세계 2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