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책은행 최초 여성지점장·연수원 교수 등 활약
불우한 가문의 숙업 妙法 수행으로 모두 전환
신심을 근본으로 사회 속에 실증을 내고
있는 권징(오른쪽)씨가 남편과 행복한 건배를 하고
있다.
나는 10남매중 막내로 부모 형제의 귀여움을 받으며
유복하게 자랐지만
5·16 당시 은행지점장이었던 아버지가 정년단축으로
대학진학 꿈을 접은 채 19세 나이에 은행에 취직,
생활을 책임져야했다.
50여년을 절에 다니던 어머니는 자식들의 무병장수와 성공을 기원했지만
교감인 큰 오빠는 49세에 병사,
신동으로 불렸던 둘째 오빠는 6·25 때 북으로 납치되어 생사를 알 수 없고,
셋째, 넷째 오빠들은 하는 일마다 실패의 연속이었다.
은행생활 20년째 연로하신 부모님의 병환으로 병원출입이 잦았던 85년 봄,
병문안 온 간부의 하종으로 불법(佛法)을 만났다.
계속되는 오빠의 사업실패로 빚만 늘어가 속상한 마음을 담배로 달래던 아버지는
기관지천식이 극도로 악화되어 임종을 준비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중환자실 복도에 앉아
“어떠한 병법보다도 법화경의 병법을 쓰실지어다”(어서 1192쪽)
라는 어서를 마음에 새기며
“불쌍한 아버지를 살려주십시오. 아버지만 소생한다면
저희 7남매, 본존님께 입신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라고 눈물에 젖어 창제(=제목)를 했고,
그날 새벽 무렵 아버지는 소생하시어 그 후 7년을
건강하게 사는
갱사수명(更賜壽命): 목숨을 살려서 다시 수명을 연장하는 것)의 공덕을 받았다.
난 그해 8월 15일 입신카드를 작성하고
현재 지부부인부장인 넷째 언니를 시작으로 7남매중 5남매가 입신했다.
입신 당시 우리은행 최초 여자대리 7년차였다.
국책은행이고, 학력 차별과 여성에 대한 생각이 무척이나 보수적인 시절이었지만
88년 2월 22일 차장대우인 3급으로 승진했다.
그로부터 8일 뒤,
전국이 떠들썩하게 매스컴에 오르내렸던 은행현송금 피탈사고가 우리지점에서 발생했다.
당시 담당책임자였던 나는 수천만원이란 많은 돈을
변상해야된다는 막막함 보다도
은행근무 25년 ‘정직과 성실로 최선을 다한다’라는 신념으로
열심히 노력한 이력에 불명예스런 오점을 남기는 것이 너무도 억울하고 속상했다.
창제를 하면 좋은 일, 행복한 일만 생긴다는데 이런
엄청난 일이 내게 일어나다니,
입안이 마르고 가슴이 타는 초조한 시간이었다.
(업에는 정업(定業)과 부정업(不定業)이 있는데
정업은 당연히 나오구요?..그걸 바꾸는 것이지요^^)....
간부의 지도에 따라 하루 3시간씩 창제를 하면서 생각지도 못한
생면부지의 타은행 책임자의 제보를 단서로 범인 5명중 3명을 검거,
강탈된 돈의 일부를 회수했고, 종결되기까지 1년여의 시간이 더 걸렸지만
그후 그 사고 수습사례가 은행 직무교육에 모범사례로 해마다 교육되고 있다.
연에 분동되어 상사에 대한 서운함과 미운 마음을
잠시 가졌었기에
일이 중간에 꼬이고 징계도 받아 1년 동안 차장보직이 늦어지는 어려움도 있었지만,
95년 8월엔 출장소장에 임명됐고, 업무실적 전국 1위를 하여
97년 1월 국책은행 여성지점장 1호가 되는 영광을
안았다.
입신 후에도 직원들의 크고 작은 업무착오가 끊이지
않았지만
그때마다 ‘유능하고 인정받는 책임자가 되어 직장에서 광선유포하겠습니다’라는
결의와 함께 창제하여 100% 수습, 해결사라는 별명까지 붙었다.
97년 5월엔 어머니를 여읜 슬픔과 신심전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목부위가 안 좋았아 오른쪽 팔에 심한
통증과
앉지도 눕지도 못한 채 밤을 지새는 병고가 나왔다.
직원과 고객들 앞에서 나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했지만,
결국 휴가를 내고 종합병원을 찾아야 했다.
병명은 목디스크에서 오는 신경장애로 경추 5, 6번
뼈를 교체하는 수술밖에는 없으며
수술 후유증이 많다고 했다.
그때까지 일신의 명예를 최상의 목표로 생각했던 내게
노년의 모습과 삶의 목표를 다시 점검하는 계기가
됐다.
98년 10월 54세에 반담사명( 하나의 역직)을 받았다.
‘수술하지 않고 나아서 불법의 위대함을 증명해
보이고 수술비용은 광포기금으로 쓰겠습니다’라며
‘치료하는 의사도 명의가 되게 해주십시오’라고
기원하니 한의원 치료 석달만에 깨끗이 완치되는 공덕을 받았다.
소심함에서 벗어나 당당하게 불법을 알리며 반담사명도 열심히 했다.
지난해 4월, 중급시험 준비를 계기로 어서연찬에 정진하면서
환희 찬 생명감을 느끼며 학자가 되고 싶었던 못다
이룬 학업의 꿈을
어서와 함께 펼치고자 결의했다.
IMF이후 은행 구조조정의 여파로 2천5백명 동료들이 직장을 떠나야 했지만,
나는 현재 연수원 교수직으로 있으면서 이따금 후배들을 위한
고객만족강의를 하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고,
내년 2월 명예로운 정년퇴직을 기원하고 있다.
지난 3월, 셋째 오빠도 창제를 하게 하여 편안한 임종을 했지만
청소년시절의 방황에서 비롯된 오빠의 불우한 삶과
추선공양을 위하여 ‘화광신문’을 신청, 소년원 두곳에
불법의 바른 가르침으로 인도하고자 사명하고 있다.
앞으로 더욱 신심근본으로 회원 한분 한분을 소중히
하는 사명자가 되겠다.
권징 대전권 대성지부 지구부부인부장
(2002.2.28 481호)
거짓말같죠?...
사실인데 어떡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