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기록으로 본 백제의 기원
백제(百濟)는 그 선대가 대체로 마한(馬韓)의 속국이었고, 부여(夫餘)의 별종이었다. 구태(仇台)란 사람이 있어, 처음으로 대방(帶方)에 나라를 세웠다. 그 땅의 경계는 동쪽으로 신라(新羅)에 닿고 북쪽으로 고구려(高句麗)와 접하며, 서쪽과 남쪽으로는 모두 큰 바다에 닿는다. 동서의 길이는 450리이고, 남북은 900여 리이다. 도읍은 고마성(固麻城)이다.
지방에는 다시 5방(方)이 있으니, 중방(中方)은 고사성(古沙城)·동방(東方)은 득안성(得安城)·남방(南方)은 구지하성(久知下城)·서방(西方)은 도선성(刀先城)·북방(北方)은 웅진성(熊津城)이다.
-『주서』 권49, 열전41, 이역 상, 백제
백제국은 그 선조가 부여로부터 나왔다.
그 나라는 북쪽으로 고구려와 천여 리가 떨어져 있고 작은 바다의 남쪽에 위치하였다.
그 백성들은 정착 생활을 하는데, 지대가 대부분 낮고 습하여 모두 산에서 산다. 오곡(五穀)이 생산되고, 의복과 음식은 고구려와 같다.
-『위서』 권100, 열전, 백제
해설
두 사료는 『주서(周書)』와 『위서(魏書)』에 기록된 백제의 기원과 관련된 자료이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주서』에 보이는 시조 구태(仇台)의 존재이다. 고구려와 신라와 달리 백제는 시조 전승이 복수로 전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記)에는 온조(溫祚)와 비류(沸流)가 시조로 기록되어 있는데, 그 계통에도 차이가 있다. 온조는 북부여(北扶餘)에서 도망하여 고구려를 세운 주몽(朱蒙)의 아들로, 비류는 북부여왕 해부루(解夫婁)의 서손(庶孫)인 우태(優台)의 아들이라 하였다. 이처럼 백제의 시조 전승이 다양한 것은 백제의 건국 과정에서 몇 개의 경쟁 세력이 나름의 건국 신화를 형성시켰다고 보거나, 백제가 여러 계통의 세력이 연합하여 이루어졌기 때문으로 이해할 수 있다.
중국 사서에는 『삼국사기』에 보이는 온조와 비류에 의한 백제 건국 기사가 확인되지 않는다. 이와 반대로 636년에 편찬된 『주서』에는 백제의 건국자로서 구태라는 인물이 등장하고 있다. 『주서』는 7세기 당(唐)나라 태종(太宗) 정관(貞觀) 연간에 찬술되었지만, 기사가 가리키는 실상은 백제의 위덕왕(威德王, 525~598, 재위 544~598) 대의 사정을 전한 것으로 이해된다. 『주서』 이래로 시조 구태의 존재는 북조(北朝) 계통의 사서에서만 나타난다. 『수서(隋書)』가 대표적인데, 『주서』와는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수서』에는 구태를 동명(東明)의 후손이라 하였고, 그 외에도 『주서』와는 다르거나 보완된 정보들이 등장하는데, 이는 『수서』가 『동번풍속기(東藩風俗記)』를 비롯한 새로운 자료를 토대로 서술하였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중국 사서에 보이는 구태의 존재는 백제의 기원과 관련하여 쟁점이 되었다. 이에 구태를 『삼국사기』에 보이는 온조와 비류 그리고 고이왕(古爾王)과 연결해 보려는 시도들이 이루어졌다. 그 근거로는 대체로 음운의 유사성을 들었다. 또한 비류 설화에 보이는 우태와 동일한 인물로 파악하기도 한다. 이 외에도 위의 사료에서 구태가 대방(帶方)에 나라를 세웠다는 사실에 주목하여 그 지역을 공략한 근초고왕(近肖古王, ?~375, 재위 346~375)으로 보는 시각도 제시되었다. 이처럼 구태를 『삼국사기』에 보이는 여러 인물에 투영하여 백제의 성립과 왕계의 변화를 설명하려는 노력이 이루어졌다. 그렇지만 중국 문헌에 나오는 구태와 『삼국사기』의 시조와 관련된 인물을 연결하는 것은 주의해야 한다는 의견 또한 적지 않다.
『주서』에 보이는 구태 전승에는 그가 대방에 나라를 세웠다는 사실이 기재되어 있다. 『수서』에는 이를 대방고지(帶方故地)로 표기하였다. 이를 통해 옛 대방군 일대에 기반을 두고 백제의 건국 세력이 존재했다고 보는 견해가 있었다. 그러나 위 사료에서 보이는 대방은 6세기 후반 북제(北齊)·북주(北周)의 북조로부터 수당(隋唐) 시기까지 백제를 지칭하는 표현으로 사용되었고, 백제 위덕왕이 ‘대방군공백제왕(帶方郡公百濟王)’으로 책봉된 사례에서 대방은 단순히 백제의 영역을 의미할 뿐이라고 보는 비판적인 입장도 있다.
구태 전승에서 또 하나 중요한 점은 부여(夫餘)와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는 백제의 부여 계승의식과도 연결되어 있다. 중국 문헌에서 백제가 부여계에서 나왔다는 인식이 최초로 확인되는 것은 위의 두 번째 기록에 보이는 『위서』이다. 『위서』에서 이러한 인식이 나타난 배경에는 백제의 개로왕(蓋鹵王, ?~475, 재위 455~475)이 472년 북위(北魏)로 보낸 표문에 근거한 것으로 이해된다. 개로왕이 보낸 표문에는 백제가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왔다고 기재되어 있는데, 이러한 인식이 『위서』에 반영된 것으로 파악된다.
백제의 부여 계승의식은 『삼국사기』에서도 확인된다. 대표적인 사례가 성왕(聖王)이 웅진에서 사비로 천도하면서 국호를 남부여(南扶餘)라 칭한 것이다. 『주서』에 보이는 부여에서 나온 구태가 백제의 시조라는 전승 역시 이러한 역사적 상황과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구태 전승과 더불어 백제의 부여 계승의 의식은 어떠한 맥락을 통해 나타나게 된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당시 백제와 고구려의 경쟁 상황에 주목하기도 한다. 백제와 고구려의 갈등은 4세기 초반 낙랑(樂浪)과 대방(帶方)군이 물러나면서 해당 지역의 주도권을 둔 전쟁으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후 475년 고구려 장수왕(長壽王, 394~491, 재위 413~490)의 공격으로 개로왕이 죽으면서, 백제는 웅진으로 천도하게 된다. 백제는 웅진으로 천도한 이후에도 고구려에 반격을 가하기 위해 움직였으며, 무령왕(武寧王, 462~523, 재위 501~523) 시기에는 그러한 모습이 본격적으로 확인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494년 고구려는 부여를 병합하였다. 이 사건은 자신들의 뿌리를 부여에 둔 백제의 정통성에 타격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에 백제는 부여에서 출자했다는 인식 대신 부여를 계승하였다는 방향으로 강조점을 전환함으로써 정통성을 강화하고자 하였고, 그 일환으로 구태 시조설이 성립되었다고 이해되기도 한다.
이처럼 위의 사료를 둘러싸고 복잡한 쟁점들이 다루어지고 있다. 구태 전승의 해석이 복잡한 쟁점을 동반하지만, 백제의 기원과 정통성 인식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