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액형 1927년 도쿄 여대 교수 후루카와 다케지가 『혈액형에 따른 인성』이란 책을 출간한 이후 일본에선 혈액형 열풍이 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혈액형 열풍이 사라졌으나, 1971년 노미 마사히코의 『혈액형으로 알 수 있는 궁합』이란 책이 120만 권 이상 팔리는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다시 혈액형 열풍이 불었다. 그의 아들 노미 도시다카도 『혈액형이 당신의 모든 것을 결정한다』 등과 같은 혈액형 베스트셀러를 내면서 그 열풍을 뜨겁게 달구는 데에 큰 기여를 하였다. 일본 기업들은 그 열풍을 이용하여 모든 마케팅을 혈액형과 연계시켰다. 청량음료회사는 각각의 혈액형을 위한 음료를 따로 만들었고, 심지어 콘돔 제조사인 젝스는 각각의 혈액형을 위한 콘돔을 특별 제작해 대성공을 거두었다. 기업의 신입사원 채용에서부터 시민들의 일상적 대인 관계에 이르기까지 혈액형 열풍이 휩쓸었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일본의 혈액형 열풍은 93년부터 식기 시작했다. 그 대신 얼마 후 일본의 열풍을 이어받은 나라가 나타났으니 그게 바로 한국이다. 최근 한국 사회에도 ‘혈액형 열풍’이 뜨겁게 불고 있다. 케이블 채널 JEI재능방송은 2004년 6월부터 두 달 동안 일본 혈액형인간학연구소 소장인 노미 도시타카를 초청해 〈혈액형으로 아이 성적 100% 올리기〉라는 프로그램을 방영했다. A형은 느리고 더디며, AB형에게는 충분한 수면이 필요하며, B형은 학습을 위한 환경 조성이 필요하다는 식의 조언이었다. 혈액형은 노래, 영화, 책 등의 소재로까지 등장했다. 가수 김현정은 자신이 직접 가사를 쓴 〈B형 남자〉라는 노래까지 내놓았으며, 10월 1일 B형 남자와 A형 여자의 연애기를 다룬 영화 〈B형 남자친구〉가 제작에 들어가 2005년 2월 3일 개봉했다. 『B형 남자와 연애하기』라는 책도 출간되었는데, 이 책의 저자인 김낭은 “주변에 B형 남자에게 상처받은 여자들이 많아 책을 쓰게 됐다”면서 “B형 남자는 감당하기 힘들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대중문화 영역에서 불고 있는 ‘혈액형 열풍’의 가장 큰 피해자는 B형 남성이다. 『뉴스위크 한국판』 2004년 9월 8일자 기사에 따르면, “혈액형이 B형인 김성호 씨는 최근 소개팅을 거절당했다. B형은 바람둥이라고 알려져 있기 때문인데, 김씨가 이런 일을 경험한 건 벌써 세 번째다. 실업자가 넘쳐나는 시대에 멀쩡한 직장을 가진 데다 회사에서도 사교성이 좋다는 평판을 듣고 있는 그는 이런 일을 도무지 납득할 수 없다. ······ 서울대병원 혈액형 클리닉 홈페이지에는 김씨와 같은 일을 당한 사람들이 자주 등장한다. ‘B형이란 이유로 슬픈 게 너무 많다’는 하소연에서부터 ‘다른 피로 바꾸고 싶다’, ‘혈액형 때문에 차별받고 있다’는 토로에 이르기까지 혈액형에 얽힌 갖가지 사연들로 넘쳐 난다.” 2004년 9월엔 혈액형을 활용한 인재 활용법 안내서인 『혈액형 비즈니스 파워』라는 책도 출간되었다. 혈액형과 관련된 각종 인터넷 카페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가 하면, 돈을 받고 혈액형별 성격을 상담해 주는 ‘혈액형 비즈니스’가 성황을 누리고 있고, 급기야 ‘혈액형 마케팅’까지 등장했다. 한 의류회사는 “사랑하는 연인끼리 상대방의 혈액형이 새겨진 팬티를 선물로 주고받아 입으면 영원한 사랑을 나눌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혈액형 커플팬티를 내놓았다. 수혈의학전문가인 아산병원 교수 권석운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① A형은 규칙을 잘 따르고 주위 사람들을 배려하며 인정이 많은 편이나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것과 앞장서는 일은 좋아하지 않는다, ② B형은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것을 좋아하고 규칙이나 틀에 얽매이는 것을 싫어하며 인내심이 약한 편이다, ③ O형은 앞장서기를 좋아하며 혼자보다는 남과 잘 어울리고 화를 잘 참지 못한다, ④ AB형은 분석적인 경향이 있으며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는 일에 충실하다 등의 특성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울 강남구 논현동의 어린이집 담당 교사인 임진희는 『한겨레21』 12월 2일자 인터뷰에서 어린이들이 그린 그림에 대해 “A형은 자신이 경험한 것을 순서대로 전개하고, B형은 자기에게 인상 깊었던 것을 클로즈업해서 그립니다. O형은 화면이 꽉 차게 자기가 본 것들을 최대한 많이 집어넣고, AB형은 특이한 색깔과 모양으로 경험에서 비롯된 상상의 세계를 그리지요”라고 주장했다. 역대 대통령들 중 A형은 노태우·김대중, B형은 박정희, O형은 이승만·전두환·노무현, AB형은 김영삼이다. 경영정보지 『월간 CEO』는 지난해 매출액 기준 상위 100대 기업 대표이사들의 혈액형 분포를 조사했는데 B형 38.7%, A형 24.7%, O형 23.7%, AB형 12.9%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 조사를 분석한 노미 도시타카는 한국이든 일본이든 시대의 변혁기에는 B형이 무대 앞으로 나오며, 고도 성장기에는 시장개척에 적극적인 O형, 저성장기에는 안정적 성장과 위기방어를 위해 끈기를 발휘하는 A형 기업가들이 증가한다고 주장했다. 혈액형은 서양에선 1600년대부터 연구 대상이 되었는데, 현재의 ABO식 혈액형은 1901년 수혈 시 피가 엉기는 것을 막기 위해 오스트리아의 란트 슈타이너가 만든 것으로, 그는 이 공로로 30년 후 노벨상을 탔다. 국가별 혈액형 빈도를 A·O·B·AB의 순으로 보자면, 한국인은 34%·28%·27%·11%, 일본인은 38%·29%·22%·11%, 중국인은 26%·42%·26%·6%, 미국 백인은 42%·45%·10%·3%, 미국 흑인은 29%·49%·18%·4% 등이다. 영국인은 O형이 47%, 프랑스인은 A형이 47%로 가장 많다. 유럽인은 동양인보다 B형과 AB형이 매우 적은 편이다. 1983년 유명 과학지인 『네이처』에 1만 명의 영국 헌혈자를 대상으로 한 혈액형과 사회경제적 위치를 분석한 논문에 따르면, 상류층 사람들에게 가장 많은 혈액형은 A형, 가장 적은 혈액형은 O형이었다. 당시 상당한 논란을 불러일으킨 이 논문은 혈액형이 일종의 우생학으로도 활용될 수 있는 소지를 보여 준 것이었다. 그러나 혈액형은 600여 가지나 되며, ABO식 혈액형은 대체적인 분류의 방식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혈액형만으로는 친자를 확인할 수 없다. 각 혈액형이 확실하게 분류되는 것이 아니라 그쪽에 가깝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A형과 O형 사이에서 B형 자녀가 얼마든지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사람의 골수를 이식받으면 혈액형이 변할 수도 있다. 혈액형과 성격 사이에 의미 있는 관계는 발견되지 않는다는 게 학계의 정설이다. 그래서 일본의 ‘방송윤리, 프로그램 향상 기구’ 산하의 ‘방송과 청소년에 관한 위원회’는 2004년 12월 8일 방송사들에게 혈액형을 다루는 프로그램에서 신중한 태도를 취해 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4월부터 11월까지 방영된 혈액형 관련 프로그램은 모두 49개였는데, 위원회에 접수된 비판 의견은 150건이었다고 한다. 위원회는 “혈액형으로 사람을 분류, 가치를 매기려는 사고방식은 사회적 차별로 이어질 우려가 있다”면서, 각 방송사는 혈액형으로 성격이 결정된다는 식의 의견을 조장하지 말 것을 요청했다. 일부 반론도 있긴 하지만 혈액형은 질병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주장이 더 설득력을 얻고 있다. 예컨대, 콜레라의 경우 O형이 쉽게 걸리고 AB형은 저항력이 강한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O형은 말라리아나 여러 종류의 암에 다소 덜 걸리는 것으로 조사됐다. 서울아산병원에 따르면 한국인 중 가장 많은 A형은 위암과 관상동맥 질환에 걸릴 가능성이 다른 혈액형보다 다소 높고 O형은 십이지장궤양에 더 잘 걸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혈액형과 성격의 관계에 관한 일반인들의 ‘믿음’은 일종의 자기이행적 예언(self-fulfilling prophesy)일 수 있다. 그런 ‘믿음’이 그 ‘믿음’에 맞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방송 차트를 휩쓴 가수 김현정도 본래 B형 남자를 염두에 두고 노래를 지었던 게 아니라 섹시하고 영리해서 여자들이 쉽게 잊지 못하는 남자에 대해 노랫말을 썼다가 나중에 인터넷에 떠도는 B형 남자 이야기를 읽고 제목을 ‘B형 남자’로 지었다고 한다. 심리학자 최창호는 ‘혈액형 열풍’에 대해 “다양하고 복잡한 시대에 수많은 이와 소통하는 현대인들은 세상을 해석하는 쉬운 방법을 찾고 싶어 한다”면서 “누구나 네 가지 유형 중 한 가지에는 속해 있는 혈액형으로 자신과 타인의 관계를 검증하고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기 때문에 열광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나 보통사람들은 전문가들의 그런 분석에 아랑곳하지 않고 혈액형과 성격의 관계에 높은 신뢰를 보내고 있다. 국내의 한 조사에 따르면, 여전히 75.6%의 사람들이 혈액형과 성격과의 상관관계를 긍정하고 있다. 실제로 자기 자신과 들어맞는 게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반면 자신과 맞지 않는 건 무시하는 정보의 취사선택이 일어날 것이니,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는 일이긴 하다. 이는 일반화 욕구 또는 분류의 욕구로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욕구는 자기 정체성 형성과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즉, 어떤 분류 방식에 따를 경우 자기 자신을 이해하거나 정당화하는 게 쉬워진다는 뜻이다. 자신도 이해할 수 없거나 마땅치 않게 생각하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사후 설명이나 변명도 용이해질 것이다. 불확실성이나 애매함에 대한 저항 의지도 가세할 수 있다. 혈액형과 성격의 관계를 믿고자 하는 욕구나 의지는 ‘구별짓기’와도 통한다. 혈액형에 대한 관심이 일본에서 가장 높은 건 서양과는 달리 사람들을 구별할 만한 기준이 상대적으로 약하기 때문일 것이라는 견해도 그런 점에서 일리가 있다. 한국도 그런 점에선 일본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겠다.
참고문헌 「‘B형남자’ 김현정 전성시대···라디오 방송 1위」, 『새전북신문』, 2004년 11월 15일, 15면. 「일본 BPO, 혈액형 관련 프로그램 제작에 신중 요청」, 『방송동향과 분석』, 제208호(2004년 12월 20일), 74쪽. 김상연, 「혈액형 “성격과 무관 질병과 밀접”」, 『동아일보』, 2004년 11월 24일, A18면. 김재환, 「“B형 남자는 바람둥이라서 안 된다고?”」, 『뉴스위크 한국판』, 2004년 9월 8일, 52~57면. 김후남, 「혈액형 신드롬」, 『경향신문』, 2004년 11월 2일, M10면. 문화방송, 「심야스페셜: 혈액형」, 2005년 1월 11일 방영. 박진우, 「혈액형, 성격·질병과 무관」, 『세계일보』, 2004년 10월 27일, 33면. 이종석, 「‘혈액형 마케팅’ 바람」, 『문화일보』, 2004년 10월 28일, 9면. 이주현, 「혈액형, 냉정과 열정 사이」, 『한겨레21』, 2004년 12월 2일, 56~57면. 장관순, 「CEO 혈액형 B형 많다」, 『경향신문』, 2004년 10월 28일, 17면. 노미 마사히코, 정성호 옮김, 『혈액형 정치학』, 동서고금, 2002. 마크 실링, 김장호 옮김, 「혈액형」, 『일본 대중문화 여기까지 알면 된다: 오타쿠에서 스타 문화까지』, 초록배매직스, 1999, 40~43쪽. 연관목차세계문화사전 PC 학문 주체성 혈액형 호주 정체성 홀로코스트 출처 세계문화사전 : 지식의 세계화를 위하여, 강준만, 2005.8.20, 인물과사상사 표제어 전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