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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6.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신명기 16장 16절에 '너의 가운데 모든 남자는 일 년에 세 번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를 뵈옵되 빈손으로 여호와를 뵈옵지 말고'라고 하였다. 일년에 세차례 예루살렘에 올라가 절기를 지켜야 했다. 구약시대의 성전은 모든 이스라엘의 삶의 중심이었다. 그리고 오직 한 곳만을 택하여 거기서 명절을 지켜야 했다. 어떻게 생각하면 상당히 비효율적이고 번거러운 일이었지만 구별된 거룩한 곳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를 통하여 장차 사람 가운데 임하실 하나님의 성령의 임재와 내주를 보여줄 좋은 장치가 된다 할 수 있다. 구약 시대에는 외형적으로 구별된 장소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이 머물러 계셨고, 이스라엘이 범죄할 때 그 영광이 또한 떠났지만(에스겔 10장)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승천으로 우리에게 오신 성령은 사람을 성전 삼고, 하나님의 생명을 주어 영원히 함께 하시고자 하시는 구원의 경륜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구약의 성전중심의 삶이 이스라엘에게 얼마나 절대적이었는지 자칫, 의식적으로 접근하게 되면 신약시대에도 장소를 우상시 할 수 있으나 결국, 구약의 모든 계시는 영원히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에서, 주인과 종의 관계에서 살수 밖에 없는 인간을 자신의 생명을 주어, 친 자녀 삼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한 후사로 삼고자 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의 결정체로 사람을 하나님의 성전 삼고자 하는 그 계시의 그림자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실상을 계시와 영적 지각을 통해 알지 못할 때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하여 성전의 휘장이 찢어지고, 수건이 걷혔지만 구약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 형식과 의식의 종교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기독 교회의 가는 길이 이러한 길이 아닌가. 이스라엘 종교의 막바지에 그들은 성전을 우상시 하였고, 성전에서 행했던 모든 의식들을 이용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데 사용하였다. 신명기 14장 24절로 26절에 보면 하나님의 택하신 곳이 너무 멀어 풍성히 주신 것을 가지고 갈 수 없을 때 돈을 가져 가서 그것에서 소나 양이나 원하는 것을 사서 제사하고, 즐거워 하게 하셨다. 그런데 이런 말씀을 악용하여 성전의 제사장들은 성전에서 드리는 모든 짐승들과 또한 성전에서 사용하는 돈을 바꿔 그 이득을 독점하고, 이익의 재료로 삼았던 것이다. 신앙의 본질을 알지 못할 때 교회는 타락의 길을 갈 수밖에 없다. 영적인 것에는 관심이 없고, 여전히 신앙안에서도 세상적인 명예와 영광과 이생의 자랑이 목표가 되어 거짓과 외식과 미움을 통한 살인자의 삶을 담대히 살면서도 구원받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교회의 현실이 아닌가. 성전을 통하여 구약에 누누히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거룩하고 구별된 장소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를 통하여 우리에게 똑바로 보여주시는 것은 하나님은 거룩하시다는 것이다. 구약에 성막과 성전에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로 임하셨던 것이 진정한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속에 거룩과 의의 생명을 주시어 그속에 영원히 함께 하시는 것이 바로 진정한 임마누엘의 성취인 것이다. 이것을 알지 못하고 신앙 생활 할때 종교가 될 수밖에 없는것이다. 이것이 구약과 신약의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시하시는 계시의 중심이기에 이 중심 가운데 있지 않으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을 우상시 하고, 성전에서 행하는 모든 거룩한 행위들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욕망을 채웠던 것처럼 우상숭배의 길을 벗어 날 수 없는 것이다.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예수님은 이러한 종교적인 사람들의 횡포로 더렵혀진 성전을 정화하셨다. 먼저 깨끗해 지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우리 안에 하나님이 거처 삼고 거하시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죄의 소욕으로 온통 더럽혀진 마음에 하나님이 거하실 수 없는 것이다. 먼저 모든 우상숭배와 탐심이 어느 정도 처리되어 진정 영적인 삶을 추구하며,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를 사모하는 마음이 되야 하는 것이다. 죄의 세력이 너무 강하면 영적인 삶을 추구하는데로 나갈 수 없다. 인정과 욕심에 끌려 자기 자신과 자신의 가족들을 위해 살기에도 바쁘다. 성령의 은혜를 늘 힘입어, 진리의 생수로 늘 씻어, 하나님의 사랑의 빛가운데로 다녀 이러한 죄의 세력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어야 영적인 삶을 살고자 하는 소욕도 생기고, 그 소욕에 따라 행동으로 옮기는 삶이 따를 수 있게 된다. 자신이 진정 신앙하고 따르는 것이 무엇인지 냉철하게 생각해야 한다. 신앙이라는 겉포장 속에 여전히 인정으로 충만하여 자신과 가족밖에 모르는 삶을 살면서도 입술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겠노라 하는 외식의 삶을 살고 있지는 않는지, 여전히 세상의 즐거움과 성공을 추구하며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될것이라 자위하며 살고 있지는 않는 것인지......자신을 속이고, 남을 속이는 위선적인 삶을 벗어나 진실하고 거룩하고 의로운 삶으로 나아가기 원한다.
17~18.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
책망 받을 때 성령께서 말씀을 생각나게 해서 우리의 허물을 조명하시기 원한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성전을 정화시키는 모습을 보며, 시편의 말씀을 떠올렸다.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양과 소를 성전에서 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고, 상을 엎으시는 모습이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인자하신 예수님의 모습과 괴리감이 느껴진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할 때 하나님의 사랑만을 떠올린다. 그러나 십자가는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과 함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인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죄에 대해서는 영원히 심판해도 다함이 없다 할 정도의 진노를 품으신다. 그것이 바로 지옥이 아닌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이 바로 지옥이다. 하나님의 뜻을 이 땅 가운데 성취하시고자 오신 예수님은 사랑에 대한 열심만큼이나 죄에 대해 처리하고자 하는 열심을 가지신 것이다.
계시록 3장에 라오디아 교회를 향하여 열심을 내고 회개하라 촉구하신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는 것은 하나님이 가증히 여기시는 것이다. 복음에 뜨거운 열심을 품고, 죄에 대해서는 냉정히 끊어 나가는 삶이 없다면 토해 내쳐지게 될 것이다. 먼저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라고 스스로 속는데서 나와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 하고, 눈 멀고, 벌거벗은 자가 자신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가난한 심령이 되어 말씀에 비추어 볼때 성령께서 조명해 주시오 이런 자신의 영적 실체에 대한 인식이 생기게 된다. 그다음에는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케 하고, 흰옷을 사서 입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고 권면하신다.(계 3:18) 베드로 1장 7절에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고 하였다. 불같은 시험을 통하여 칭의의 믿음에서 시작하여, 계시될 믿음으로 나아가고, 보배로운 믿음으로 계속 해서 나아가야 한다. 계시록 19장 8절에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토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라고 하였다. 의롭고 거룩한 생명이 되지 않았을지라도 율법을 지키며 의롭고 거룩한 삶을 사는 가운데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나가야 한다. 예베소서 1장 17절로 19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고 하였다. 지혜와 계시의 영인 성령께서 우리의 영안을 열어 주셔서 계시의 중심인 임마누엘 하나님을 깨닫게 하신다. 사람 가운데 오셔서 우리의 기업이 되셔, 영원한 후사를 삼으시는 것을 진정 깨닫고 볼때 그것이 엄청난 소망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소망이 우리에게 확고해 질때 우리의 모든 육체적이고, 혼적인 한계를 뛰어 넘는 열심으로 영에서 영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중심이 바르지 못한 이들에게 예수님의 행동은 자신들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예수님께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행하는지, 그 권위의 증거로 무슨 표적을 보일지 묻는다. 그들은 성전에서 행해지는 모든 종교적 행위를 통해 자신들의 권위를 세우고, 이익을 챙겼기 때문에 마음이 죄악으로 사로잡혀 진실을 알 수 없었다. 헛된 가르침을 선포하며, 사람들을 종교적 굴레로 억압하며, 거룩한 것들을 이익의 재료로 삼으면서 자신들의 배를 불리웠기에, 누구도 그들의 가르침에 도전할 수 없는 권위를 스스로 입고 굴림하였기에, 그러한 기득권에 도전받았을 때 그 사실에 분개하는 이상의 양심적인 깨달음을 가질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는 예수님께 그런 일을 행할만한 권세의 증거로 표적을 구하였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기 위해 표적을 구한 것이 아니고, 자신들의 권위에 도전하는 예수님을 그러한 종교적인 권위로 누르기 위해 표적을 구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6장 4절에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고 하셨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한다고 하였다. 진정 말씀이 그러한가,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관심에서 진지하게 궁구하며, 자신의 폐부를 가르고자 하는 것이 아닌 변명과 부인에 급급한 우리의 모습을 또한 발견할 수 있다. 진리가 드러나고, 빛이 오므로 죄와 악이 분명히 밝히 드러났지만 그 빛가운데 자신의 치부가 드러난 것이 수치스러울 뿐 그것을 고치려고 하지도 않고, 그것을 버리려고 하지도 않는것은 자신의 현재의 악보다 더한 악일 것이다. 예수님 시대의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악을 버릴 마음이 눈꼽만큼도 없었다. 죽은 나사로가 살아난 표적을 보이셨지만 그 표적을 통해 예수님을 믿으려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나사로까지 죽이려 모의를 행하는 악을 보였다. 이미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서, 말씀을 좇는 신앙에서 멀찍이 떠난 것이다. 음란함으로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과 짝하며 나가니, 도저히 자신이 누리고 있는 특권과 영광과 물질적 풍요로움을 내려 놓을 수 없었을 것이다.
19~2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히브리서 8장 7절로 13절에 '저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라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여 말씀하시되 주께서 이르시되 볼지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과 더불어 새 언약을 맺으리라 또 주께서 이르시기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그들과 맺은 언약과 같지 아니하도다 그들은 내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므로 내가 그들을 돌보지 아니하였노라 또 주께서 이르시되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것이니 내 법을 그들의 생각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게 백성이 되리라 또 각각 자기 나라 사람과 각각 자기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주를 알라 하지 아니할 것은 그들이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라 내가 그들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그들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니라'고 하였다. 첫 언약이 한계를 가지고 있었기에 그 제사로 사람들의 죄를 없이 할 수 없었고(히 10:11), 많은 제사장들과, 섬기는 예법과 세상에 속한 성소는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폐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히브리서 9장 8절로 10절에 '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은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는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따라 드리는 예물과 제사는 섬기는 자를 그 양심상 온전하게 할 수 없나니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일 뿐이며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라'라는 말씀과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않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더 크고 온전한 장막을 세우시고, 염소와 송아지의 피가 아닌 자신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단번에 이루실 때 옛언약의 효력이 끝나고, 새언약의 시대에 들어서게 된것이다. 새 언약의 시대에는 스데반의 설교에 나타난 바와 같이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않고(행 7:48), 에베소서 2장 20절로 22절에 이른바와 같이 모퉁잇돌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연결하여 성전이 되어 가고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것만 있을 뿐이다. 그랬기에, 구약 교회의 마지막에 활동하셨던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종교의 막바지길에서 우상시 했던 성전을 헐라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의 진정한 거처된 자신의 육체를 통하여 십자가의 예언을 드러내신 것이다.
어떻게 이 말씀이 진정 성취되는 것인가? 구약시대에 모세에게 두 돌판에 율법을 새겨 주셨지만 이제 우리의 마음과 생각에 하나님의 거룩하고 의로운 법을 기록하여 이루신다. 어떻게 우리의 마음과 생각에 율법의 말씀이 새겨지는가? 아버지와 아들과 구약의 성령을 통하여 우리 영혼 가운데 새인격을, 새사람을 창조하시어 그 생명안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거처삼고 거하심으로 되는 것이다. 먼저는 우리의 영과 결합된 아들의 영가운데 의의 형상을 새기시고, 죄의 몸이 죽은 이후에는 우리 영혼 전체에 의의 법을 이루시고, 거룩에서 거룩으로 나아가게 하셔서 하나님의 모든 아름다운 인격-긍휼, 자비, 겸손, 온유, 오래 참음(골 3:12)-을 닮아가게 하신다. 하나님의 법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에 있으므로 예수 그리스도만 거룩하고 의로운 생명이 아니라, 우리 또한 한알의 밀알 되신 예수님의 뒤를 따라 30배, 60배, 100배의 결실로 맺어진 많은 밀알들이 되어 그와 같은 거룩과 의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결국, 아버지 하나님의 거룩하고 의로운 성품을 주시고, 그의 무궁한 지혜와 지식과 능력을 영원히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의 최종 목표인 것이다. 이것을 위해 아담에게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주셨고,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사 율법을 주셨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가운데 보내셔서 십자가를 지게 하시고, 부활하고, 승천하게 하셨고, 성령을 부어 교회를 세우신 것이다. 이렇게 놀라운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지 못할 때 예수님이 오셨을 때에도 여전히 종교적 타락과 부패가운데서 자신의 권익만 챙겼던 유대인들처럼 오늘날도 동일한 모습으로 종교의 길을 걸을 수 있는 것이다.
22.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예수님께서 도마에게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더 복되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의 연약함을 아시기에 많은 표적들을 보여 주시며 또한 인류 역사 6천년에 걸쳐 점진적으로 계시의 말씀을 발전시켜 오셔서 우리로 하여금 이 진리를 깨닫고 뒤쫓게 하신 것도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일 것이다. 결국, 성경의 결론은 임마누엘 하나님인데 이 한마디로는 인간이 이성적, 영적 지혜의 한계상 도저히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6천년간의 인간 경작을 통하여 다양한 모습으로 보여주시고 깨닫게 하시어 이끄시는 하나님 아버지가 얼마나 자상하시고, 인격적인 분이신가 또 드러난다. 그러나 증거와 표적을 보기 이전에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 복음을 계속해서 확증해 나가고, 그 생명을 인식해 나가기 원한다.
23~25.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니라
표적을 보고 믿는 것은 표적을 봐도 강팍함으로 믿지 않는 것보다는 낫지만 계속해서 말씀에 대한 확증으로 나아 가야 한다. 벳세다 들에서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로 5천명을 먹이고도 남는 표적을 나타내셨을 때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시고, 거친 물결과 바람을 잠잠케 하시고, 죽은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살리셨을 때 많은 사람들이 환호하며 예수님을 따랐다. 드디어 자신들이 바라던 메시아가 나타났노라 하며, 모든 것이 다 된 것인양 기뻐하며 추종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오감을 만족시키는 것을 따라 가는 것은 죄성으로 얼룩진 오감이기에 그 진정성이 희미하다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렇게 환호하며 따르다가도,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지 않았을 때 얼마든지 등을 돌리며 떠날 수 있으며,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던 많은 무리들처럼 도리어 죽음으로 내 몰수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벳세다 들에서의 표적 뒤에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살을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다'고 하자 그 많던 무리들이 다 떠났다. 자신의 이성으로 이해되지 않는 가르침이 나타났을 때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나'하며 떠났던 무리들의 모습가운데 오늘날 우리 자신의 모습은 없는지 되돌아 본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이런 영적인 가르침을 '영생의 말씀'으로 받았다. 물론, 베드로도 그런 영적인 가르침을 충분히 잘 이해해서 이런 고백을 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그의 영적 직관하에 양심적인 고백을 하였던 것이다. 타락한 이스라엘 종교 가운데 길들여진 사람들은 영적인 빛이 비취어 자신들의 어둠이 드러나자 그것을 배척하였다. 그래서 허다한 무리는 교회가 될 수 없는 것 같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듣는다고 하였는데, 허다한 무리는 영적인 가르침을 받을 귀가 없었던 것이다. 결국, 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 외쳤던 성난 군중이 될 것을 예수님께서는 다 아셨을 것이다. 그들 속에 있는 것을 친히 아셨기에 그들을 의탁하지도 그들의 증언을 필요로 하지도 않으셨다.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증언해줄 대단한 권위있는 사람을 요구하였지만(요 8:13~19), 예수님은 아버지의 증언이 있었기에 그 누구의 증언도 필요치 않다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전도서 7장 21절에 '또한 사람들이 하는 모든 말에 네 마음을 두지 말라 그리하면 네 종이 너를 저주하는 것을 듣지 아니하리라'고 하였다. 세상 사람들이 축복을 하건, 저주를 하건, 그건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향하신 그 뜻이 축복인지, 심판인지가 중요할 뿐이다. 자신의 속에,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영적인 눈으로 볼 수 있을 때 그들의 평가의 속박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는 것 같다. 바울도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신은 판단받지 않는다고 하였다. 영적인 정상에 우뚝 서기까지 이런 저런 평가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런 것에 치심하므로 진정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생각하시는가를 놓치는 어리석음을 범치 않기 원한다.
첫댓글 사람을 의탁하지 않으셨다는 주님에 대해 생각해 보게됩니다
저는 오감을 아주 충실히 따라서 사람을 믿고 의지하고 기대를 했지요
이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알아가고 있지만 습관이 무서운지라
의식하지도 못하는 가운데 삶 가운데서 자연히 흘러 나오면 또 책망을 받습니다
이 과정이 변화되지 않은 사람의 실체를 제대로 알아가는 것이지요
알려주실 때 바로 인정을 하고 수용하려는 자세가 아니면 이미 굳어져
철옹성 같은 내생각이 방해를 함으로 관점이 바뀌어 질수가 없는것입니다
하나님의 시각이 되어야 모든것을 이룰수 있는데 시작도 안되는 것이지요
주님처럼 사람의 실체를 깨닫고 의탁하려는 마음을 아예 갖지 말아야겠습니다
이렇게 하나님만을 의지하려는 순수한 마음의 자세로
구별된 거룩한 사람이 되기에 힘쓰면 성령이 들어오시겠지요
죄의 세력은 눌러지고 성령의 소욕이 커질때 행함으로 나아가 나의 육체가
하나님의 진정한 거처되는 새언약의 성취가 이루어지기 원합니다
주님의 십자가에 하나님의 사랑과 죄에 대한 심판이 있듯이
이 길을 가는 나에게도 하나님의 사랑의 빛비춤이 있기에
뿌리 깊은 내 모든 죄에 대한 심판이 준엄하게 행해질것을 믿어야겠지요
하나님의 법을 마음과 생각에 새기면서
말씀에 대한 확증을 계속 해나가면 될것입니다
신앙의 본질에서 떠나면 타락하게 된다고 했는데
교회를 떠나지 않으면 아무런 문제될것이 없겠네요~
종교의 중심에서 신앙이라는 겉포장속에
자신과 가족을 위한 이기적인 삶을 살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스스로 속이며 외식하였고
영혼에 대한 관심보다는
세상의 즐거움과 성공을 바라며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것이라고
자위하며 위선적인 삶을 살았던 사람인데
교회를 통해 나오는 말씀의 빛 비춤가운데
이러한 자신을 알아가고 인정하고 돌이킨다 하지만
많은 부분 두리뭉실하고 대충 인정하고 넘어간 부분이
너무나 많아 제대로 된 자아성찰이 되지 않았음을 깨닫습니다.
자신의 한심하고 비참한 실체를 바로 알 때
진정 회개하고 돌이키며
그 더럽고 부끄러운 자리에서 벗어나기위해
온 힘을 기울일것 같네요.
하나님이 주신 권위가 아무것도 없는데
종교안에서 교만하여 스스로 높은자리에 앉아
스스로 만든 기득권에 도전받는다고 느껴질 때
그 사실에 분개하는 이상의 양심적 깨달음을 갖지 못했다는것이
아프게 다가옵니다. 바로 나의 모습이기 때문이겠지요...
교회를 통한 진리의 빛 비춤으로
나의 모든 치부가 드러나질 수 있다는것 자체가
은혜임을 깨달아 냉정하게 인정하고 적극적으로 고쳐나갈 수 있기 원합니다.
십자가가 하나님의 사랑일 뿐 아니라
죄에대한 엄중한 심판인것이 분명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오신 예수님이
사랑에 대한 열심만큼
죄를 처리하고자 하는 열심이 있으셨다는 것이
정말 그러하네요.
그렇기에
깨끗해진 사람의 영혼안에
성령을 부어 새로운 인격, 새로운 사람으로
하늘에서 난 사람으로 변화되어
하나님이 진정 사시는 성전되고,
임마누엘이 성취되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될 것을 소망하여
육체와 혼을 뛰어넘는 열심으로
구원을 이루어나가기 원합니다.
그 소망을 위해
진리를 새겨나가고
교회의 인도대로 죄를 처리해 나가
자신을 깨끗케 해나가기 원합니다.
성령께서 믿음과 힘을 주시기 원하며
주님을 찬양합니다.
구약에 이스라엘 백성이 보이는 성전 중심의 삶이 절대적이었듯이 현재 신약시대 살고 있는 믿는 지들에게는 거룩해진 사람의 영혼을 성전삼으신 주님의 몸인 교회중심의 삶이 절대적이어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주님의 몸된 교회가 얼마나 될까요 그런데 우리에게는 분명하고도 확실한 하나님께서 성전삼으신 교회가 있어서 얼마나 큰 축복인가를 더욱 깊이 깨달아 교회를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할수 있는데로 나아가야 할것 같습니다 교회가 믿는자들에게 있어서 획실한 축복의 통로라는것을 인정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교회만이 모든것 되시며 우리삶의 전부이십니다 이러한 교회를 사모하며 나또한 교회로 세워질 소망을
바라보며 매일매일 달려가길 윈합니다 할렐루 교회이신 그리스도!
아멘! 음란함으로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과 짝하는 삶에서 벗어나 오직 하나님을 믿고 말씀을 좇을 수 있기를 원합니다. 모든 것을 세상의 기준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영적인 삶을 살기 바랍니다. 죄를 처리하고자 하는 열심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열심을 가지고 교회의 다룸을 잘 받아가기를 소망합니다. 매일 빛 가운데 더러운 나의 수치와 부끄러운 모습을 깨닫고 감사함으로 돌이켜야겠습니다. 놀라운 그리스도 복음의 가치를 알아가기 원합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아버지의 증언!
그리스도인의 삶은 곧 하나님 아버지의 전폭적인 지원(증언)만 있으면 된다.
여러말로 달콤한 사람들의 위로가 없더라도
따갑고 날카로운 비판과 정죄가 있더라도
이러한 말들과 관점은 그리 중요하지 않는 것이다.
주님이 걸어가신 길은 분명 좁고 협착한 길이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나를 따르라
자기 십자가를 지고...나를 따르라!
자기부인속에, 자기가 처리해야 할 십자가 속에는 세상사람들의 애정과 인정과 부귀와 영광을 얻고자 하는 갈망과 욕심때문에 늘 사람들의 증언에 목말라 한다.
그러나 우리 주님의 걸어가신길은 사람에게 자신을 위탁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여러말로 하는 증언을 요하지 않으셨다.
주님과 나의 모습은 하늘과 땅 차이라는 것을 오늘 말씀을 통해서 보게 된다.
나는 얼마나 사람의 위로와 사람의 판단에 요동하는가!....
사람들(아내, 자식, 친구, 동료, 지인,등등...))을 기쁘게 하는 것은 곧
이기적인 나를 사랑하는 정욕에서 기인하는 것이라는 것을....
오늘 말씀을 통해서 내영혼의 악함을 보여주신다.
종교적인 유대인들의 모습은 곧 나의 모습이다.
내안에 종교성은 곧 나의 정욕에서 기인한 행위인 것이다.
자기부인과. 자기십자가를 통해서 처리해야 할 1순위는 바로 사람들의 증언에 목말라하는 타락한 종교성인 것이다.
내속에 이러한 종교성이 가득하여
좁은 문 좁은 길로 나아가지를 못하고 있는 것이다.
표적은 사람들의 평판에 잣대가 된다.
사람이 기대하는 표적은 정욕으로 얼룩진 눈이기에
결코 표적속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계시를 볼수 없는 것이다.
종교성은 눈을 어둡게 한다. 종교성을 벗겨버리지 않으면 결코 주님을 따를수 없다.
주님! 내마음속에 있는 종교성을 처리하게 도와주소서.
그래서 주님이 자신을 오직 하나님의 전폭적인 지원만을 바라봤던 것처럼,.. 저의 영혼에 비둘기눈을 주옵소서!
하나님의 증언만 있으면 족하게 하소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그 한마디에 주목하고 따르게 하소서! 주님이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면 충분합니다.
내가 너를
지명하였고 불렀나니 너는 내것이라!......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