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과 인조 시절에 '죽산 안씨 장흥 선비'가 있었다. 호 남파(南坡), 자 수초(遂初), 안유신(安由愼,1580~1657). 그 부친은 동애 안중묵(1556~1607), 모친은 청풍김씨 김홍한의 딸. 그 재종형이 '우산 안방준(1573~1654)'이다. 안유신(安由愼)은 1613년 진사시에 서울 거주자로서 입격했는데, 광해군의 폐모론에 반대하였다는 이유로 1614년~1617년까지 황해도 옹진에 유배되었다.(당시 장흥지방 선비들은 대부분 폐모 반대론 쪽이었다) 동생 안유철도 진도에 유배되었으며, 형 안유경은 1610년도 생원이다. 안유신의 <남파유고>에는 형의 <가봉유고>, 동생의 <학천자유적>이 합편되었다.
안유신은 병마평사(1626), 제릉참봉(1629), 빙고감예관(1634) 등을 거쳐 상서원직장(1636)으로 남한산성에서 인조를 호가(扈駕)하였다. 양천현령(1638), 사헌부장령(1639)을 거쳐 60세에 은퇴하였으니, 높은 벼슬은 못했다. <장흥문집해제>에 소개된 <남파유고>의 詩文목록에는, “장흥城南간화(看花), 冠山서재(書齋)제우회전(諸友會餞), 冠山문앵감회(聞鶯感懷), 장택 와곡촌, 율포 백사정, 천관산 동일암, 천관사, 개흥사, 오봉산”등 장흥(冠山)과 보성(山陽)의 여러 모습이 나온다. ‘노명선(1587~1655), 정명열(1566~1627)’ 등 장흥선비들과 ‘이항복, 이원익, 이경여, 이식, 이경석, 이정구, 홍익한, 윤집’ 등 여러 서울선비 명망가들도 등장한다.
그는 시대의 관찰자였고, 향촌(鄕村)과 경성(京城)에 관한 기록자였다. 특히 詩 “유두(流頭)관농악(觀農樂)”에서 민속용어 ‘農樂’을 최초 사용하였다.(장흥출신 김희태 前 전남도 문화재전문위원이 발견하였다) ‘觀농악’뿐만 아니라, “觀호군(호軍), 觀漲, 觀雪, 觀수조(水操), 觀조음(潮吟), 觀아배(兒輩), 觀友讀詩, 유민탄(流民歎), 애춘가(愛春歌)” 등 그가 지켜본 주변 생활상을 기록으로 남겼다. 詩 “중유(重遊) 장흥가지사(伽智寺)”는 10년 만에 다시 본 장흥 보림사(伽智寺) 모습을 여실하게 기록하였다.
또한 옥봉 백광훈(1537~1582) 詩에 나온 “호호정(浩浩亭)”의 위치 논란도 <남파유고>에 나온, 詩 “登호호정古基, 過호호정下有感”으로 확인될 수 있을 것. 그는 은퇴 후 고향 장흥으로 돌아왔으며, 그 호(號) 남파(南坡)에 합당하게, 마침내 남쪽의 언덕 ‘용산 포곡’에 묻혔다. 고향땅과 억불산록 포곡明堂 기운 때문이었을까? 이미 서울로 이거(移居)하였던 여러 아들 중에서 ‘안지망, 안지성’이 생원시에 입격했고, 안유신 사후(死後)에 그 안지성의 두 아들 ‘안민유, 안준유’가 대과 급제를 하였다.
혹자는 안유신을 ‘보성 선비’로 칭하기도 하나, 그 부친 안중묵이 이미 장흥 ‘봉명대’에 거주했고, 그 모친이 장흥의 ‘청풍김씨 김홍한’의 딸인 사정, 그 안유신 자신이 장흥 땅에 관련하여 남긴 감회시문(感懷詩文)과 그 마지막 유택(幽宅) 장소를 보면, 남파 안유신을 ‘장흥 선비’로 보아야 할 것.(그는 ‘장흥보성 先塋’이란 말도 했다.) <장흥읍지 정묘지>와 <장흥향교지 사마재 제명록>에는 물론 ‘장흥府 부내방 인물’로 기록되어 있다. 동생 안유철 묘소도 ‘장흥府 長西坊’에 있었다. 그 무렵 죽산安氏 집안후손들의 서울 移居 때문에 그 여적이 장흥 땅에 남지 아니한 듯하다.
그 시절 장흥 사람과 장흥 땅의 여러 사정을 전해주는 <남파유고(南坡遺稿)>의 조속한 국역을 당부 드린다. 한편 존재 위백규(1727~1798)는 “여경화說,書죽산안씨門案後”라는 글에서 죽산安氏 집안의 ‘장흥, 보성, 강진 3형제 지파(支派)’ 내력을 언급하고 있다. 장흥 위씨의 ‘위덕화, 위정렬, 위정첨, 위천회’ 등이 죽산安氏의 사위되는 인연으로 존재 선생은 그 글을 썼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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