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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성 옥
준경묘설(濬慶墓說)
광무 3년 가을, 1899년 9월 2일 하늘은 맑았다. 지난 봄 묘역을 다지고 새로 심은 잔디는 함초롬히 짙어져 수백 평 묘원을 청록으로 빛나게 하였다. 한층 높아 진 쪽빛 하늘 밑 지상에 쑥부쟁이, 구절초, 감국이 흐드러지게 피어 가을이 한창 영글고 있었다.
이중하(李重夏)는 눈을 들어 준경(濬慶) 묘역과 대들보가 올라가는 정자각을 바라보며 나직이 상량문을 읊었다.
아랑위! 들보를 동쪽으로 던지세. 바다의 아침 해 산위를 올라 불게 물들이고 청구의 문명 운세 비로소 열렸네. 긴 세월 말없이 왕업을 도왔음을 누가 알리오.
아랑위! 들보를 남쪽으로 던지세. 눈앞의 태백산 소백산 푸른 기운이 감돌고 하늘 끝은 저 멀리 완산가는 길 가리키니 상서로운 기운 감도네.
아랑위! 들보를 북쪽으로 던지세. 설악산과 금강산에 푸른빛 가득한데 목조는 어느 해 멀리 관북지방으로 가시어 빈강의 천호 벼슬, 왕국의 토대 되었네.
아랑위! 들보를 위쪽으로 던지세. 온 하늘 구름 걷히니 별들이 밝은데 빛나는 영령 상제(上帝) 곁에 머무니 영원토록 우리나라 복 받으리
숭정대부 신기선이 칙령을 받아 쓴 상량문은 명문이었다. 이중하가 채제공의 영월 자규루(子規樓) 상량문을 상고해 본 이래 최고의 상량 문장이었다. 긴 세월 말없이 왕업을 도운 사람은 바로 이 경복(慶福)의 뿌리, 이 준경묘(濬慶墓)의 주인이며, 관북지방 천호 벼슬 왕국의 토대를 일군 사람은 그의 아들이며 용비어천가의 해동6룡 중 제1룡 목조 이안사를 이름이다.
상량고사의 초헌 삼척군수 이구영이 하늘에 올린 술잔을 들어 정자각 네 귀퉁이에 나누어 부었다. 피리(觱篥)와 나발(喇叭) 소리가 봄날 보리밭에서 솟아오르는 종다리 떼처럼 일제히 하늘을 날아올랐다.
아관파천 1년, 심신이 피폐해진 고종의 심기는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임오년 군란도, 갑신년 정변도 이겨 냈지만 을미년 10월 건청궁이 불타고 왕후가 시해 당하자 넋을 놓은 고종은 러시아 공관으로 사실상 망명을 하였다. 친러 내각이 들어서고 친일 내각 영의정 총리 집정대신 김홍집은 길거리 내쳐져 성난 군중에 맞아 죽었다.
아관파천 1년 후 고종은 환궁하지만 피로 얼룩진 경복궁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석어당이 있는 경운궁을 정궁으로 삼았다. 순종이 즉위하고 경복궁으로 들어가면서 부왕의 장수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궁의 이름을 덕수(德壽) 라 지어 올린 곳, 바로 지금의 덕수궁이다.
경운궁으로 환궁한 고종은 조칙을 내린다.
“지난번에 아관으로 거처를 옮긴 후 덧없이 한 해가 지나갔다. 실로 부득이한 형세에서 나왔음을 신민들은 알 것이다. 그러나 이제부터 재신들은 맡은 바 일을 한결같은 몸과 마음으로 다하라. 비유하건대 배를 같이 타고 건너갈 때는 상앗대로 서로 노를 젓는 것처럼 각자 그 힘을 써야 무난히 건널 수 있다. 한 사람이라도 느슨해지면 곧 빠지게 되는 경우와 같다. 함께 건넌다는 마음으로 조금도 해이해 지지 말지어다.”
남의 나라 공사관에 몸을 의탁했다 돌아 온 고종은 심기일전 마음을 다잡았다.
“대군주 폐하께서 1년 동안을 아라사공관에서 아라사 국기 밑에 아라사 병정의 호위를 받으시고 지내신 것은 조칙에서 말씀하셨거니와 사세에 부득이하여 그렇게 된 일이라. 남의 나라 병정의 호위를 받으시게 된 것이 마음에 도 민망한 일이지만 한 가지 다행한 것이 대군주 폐하 성체에 위태로운 것 없는 것은 신민들이 믿고 아는 일이라. 지금은 대군주 폐하께서 다시 대궐로 환어하셔서 조선 국기 앞에 서게 되었으니 이는 신민들이 경축할 일이다.”
1897년 3월 1일 독립신문도 사설로 고종의 조칙에 이렇게 화답 하였다.
환어한 고종은 환구단를 지어 하늘에 제사 지내고 황제에 즉위하였다. 1897년 10월 13일 국호를 대한제국이라 하고 연호는 광무(光武)라 하여 이를 만천하에 알렸다. 대한(大韓)은 삼한(三韓)을 통합하였다는 뜻으로 황제국 선언에 합당한 국호였다. 조선 제26대 임금 고종은 이제 붉은 곤룡포 대신 황색 곤룡포를 입고 경운궁 숙정전에 들어섰다. 칭제건원(稱帝建元), 대한제국 13년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태조를 태조고황제로, 효명세자를 진종소황제로, 사도세자를 장조의황제로 황제국 예에 따라 추존하여 7대 추존을 마친 고종 황제는 의정부 찬정 이종건, 궁내부 대신 이재순의 상소에 따라 전주 건지산의 시조 사공공 묘소와 삼척 활기동의 목조 황고(皇考)의 묘소를 추봉하기로 하고 영건청(營建廳)을 세웠다. 사공공은 전주이씨 시조 이한(李翰)을 가리키는 것이고, 목조 황고(皇考)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직계 5대 조부 고려장군 이양무로 추존 왕 목조(穆祖)의 부친이다.
의정부 찬정 이종건의 상소는 예스럽고 곡진 하였다.
“삼가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옛날 주공은 예법을 제정하여 교외에서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내면서 후직(后稷)도 함께 제사를 지냈으니 이는 진실로 먼 조상을 추모하고 그 은덕에 보답한다는 의미였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밝으신 황상께서 전주와 삼척의 봉산(封山)에 경계를 새로이 세우시고 봉심(奉審)케 하소서. 봉심 후에도 묘호가 없다는 것은 열성조의 신중함을 따르는 것이 곧 아닐 것입니다. 마땅히 릉(陵)과 원(園)의 예를 따라야 공경해야 할 것입니다.”
광무 2년 1898년 12월 14일, 마침내 고종이 조칙을 내렸다.
“아아, 열성조께서 먼 조상을 추모한 정성이 지극함을 다했으나 아직 겨를이 미치지 못한 곳이 있음은 오늘 짐(朕) 소자(小子)가 그 뜻을 계승하는 오늘을 기다린 것 같다. 어찌 그 일을 이어받지 않겠는가. 전주 건지산에 단을 설치하고 그 단의 이름을 조경단(肇慶壇)이라 칭하고 수봉관을 별도로 두어라.
가선대부 이중하를 장례원 소경으로 봉하니 삼척 서쪽 노동과 동산의 묘소로 내려가 봉심한 후 경계를 정하고 수호 사항을 일체 품처하라. 짐(朕)이 황고(皇考)의 묘호를 올리니 노동의 묘호는 준경(濬慶)이라 하고, 동산의 묘호는 영경(永慶)이라 하되 묘역 경계를 정하고 비를 세우며 재사를 건립하는 일은 영건청으로 하여금 거행하도록 하라.”
그리하여 영건청의 당상관으로 장례원 경(卿) 이호익, 조정희, 소경(少卿) 심상황, 이중하, 이재곤, 전라북도 관찰사 이완용이 임명되었다. 삼척 준경묘 영건의 당하관 낭청(郎廳)으로 장례원 주사 이선태, 삼척군수 이구영, 준경묘 수봉관 이재관, 영경묘 수봉관 이보현 등이 지명되었다.
이중하가 길을 떠난 것은 1899년 3월 13일이었다.
봉심의 명을 받은 것이 지난 겨울이었지만, 삭풍과 설산이 길을 막아 봄 기운이 완연해진 음력 3월에 길을 떠나게 된 것이다.
이중하는 함녕전에서 고종을 배알하고 하직 인사를 올렸다. 전주로 봉심을 떠나는 이재곤이 함께 부복 하였다. 고종은 두 재신에게 인신(印信)와 양지척(量地尺) 1도를 황명의 신표로 직접 내렸다.
이중하가 단출한 짐을 꾸리고 길을 재촉하여 삼척에 도착한 것은 3월 24일이었다. 다음날 이중하는 삼척군수 이구영, 수봉관 이재관, 이보현을 대동하고 준경묘와 영경묘를 봉심하였다. 산맥이 뻗어 내린 곳마다 골짜기가 깊었고, 오십천 굽이굽이 마다 나무다리가 놓여 마을과 마을을 이어 주었다. 길섶 푸른 보리밭을 가로지르는 노고지리 떼가 봄 하늘을 힘껏 차고 올랐다.
묘소를 바라보는 이중하의 가슴은 뜨겁게 고동쳤다.
전주이씨 광평대군(세종대왕의 5남) 후손으로 태어났으나 명문세족은 아니었다. 부친 이인식이 늦깎이 현감으로 봉록을 받을 때까지 생활은 곤궁 하였다. 1882년(고종 19년) 비교적 늦은 나이인 36세에 증광문과(增廣文科) 복시(覆試) 병과로 등과하여 홍문관 수찬이 된 이중하는 고종의 총애를 받으며 빠른 승차를 거듭 하였다.
1887년(고종 24년) 안변부사로 북방 지역의 수령으로 외직에 있을 때 그는 토문 감계사(勘界使)에 임명된다.
백두산이 청조(淸朝) 발상의 영산(靈山)이라 하여 귀속을 주장하던 청은 1712년(숙종 38) 오라총관 목극등(穆克登)을 보내어 국경문제를 담판 지으려 하자 조선은 참판 권상유(權尙游)를 접반사로, 이의복, 조태상을 감사군관으로 파견하여 백두산정에 올라 백두산 경계비(白頭山 境界碑)를 세웠다. 당시 목극등은 조선 접반사의 의견을 무시하고 거의 일방적으로 비를 세웠는데, 그 내용은 “오라총관 목극등이 황제의 명을 받들어 변경을 답사하고 이곳을 살피니 서쪽은 압록이 되고 동쪽은 토문(土門)이 되므로 이를 돌에 새겨 기록한다. 강희51년5월15일.”로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국경을 정하고 서위압록 동위토문(西爲鴨綠 東爲土門)이라고 새겼으니 “서쪽으로는 압록, 동쪽으로는 토문”이 경계가 된다.
그러던 청이 느닷없이 강희제의 유훈을 잇는다며 차관(差官) 가원계(賈元桂)등을 보내어 국경회담을 제의해 왔다. 말이 국경회담이지 청은 유리한 국제정세를 이용하여 전에는 단지 봉금지역이라고 생각하였던 북간도, 동간도에 터를 박고 정주 생활을 하는 조선 백성들을 내쫒을 셈법을 가지고 회담을 몰아붙였다. 토문감계사가 된 이중하는 오위장 최오길, 첨지 이후섭 등과 함께 한 겨울 몇날 며칠 밤을 노숙하면서 백두산정에 올라 정계비를 확인하고 ‘동위토문’을 청의 관리 가원계, 덕옥, 진영들과 다시 확인 하였다. 청의 가원계는 토문(土門)이 두만강을 가리키는 것이니 두만강 위 지역, 즉 간도는 청의 영토임을 주장 하였다. 이중하는 토문(土門)은 송화강 지류인 토문강이고 이는 요동지에도 “토문강은 장백산 송산에서 시작하여 동북쪽 송화강으로 흘러든다.” 라고 명확히 나와 있다고 강력히 주장 하였다. 가원계는 이중하를 고압적으로 압박하였으나, 이중하는 “내 머리를 자를 수는 있을지라도, 조선 땅 한 치도 줄일 수는 없다.”며 결연히 맞섰다. 이중하가 산 중에서 배탈이 난 가원계에게 가지고 온 약을 먹이자 복통이 심해졌고, 가원계는 황제의 칙사를 죽이려 한 것이라며 이중하의 목을 베려고 했다. 그 약을 이중하는 가원계가 보는 앞에서 입에 털어 넣었고, 가원계의 복통도 금방 씻은 듯 나았다. 당시 이중하는 41세의 팔팔하고 기백이 넘치는 조선의 국경 관리요, 외교관이었다.
이로써 가원계의 직속상관 이홍장이 주도한 2차 조청(朝靑) 국경회담은 모두 결열 되었다. 만일 2차에 걸친 국경회담에 조선의 감계사가 대국 청(靑)의 눈치를 보고 끌려갔다면, 이후 조선 백성의 간도 정착사는 이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목조 부친 고려장군 이양무의 무덤으로 올라가는 길은 매우 가팔랐다. 팔부능선까지는 참나무 군락이 이어졌다. 굴참나무, 졸참나무, 상수리나무 군락은 이제 막 돋아난 잎들로 새 옷을 갈아입고 연둣빛 신록을 맞이하고 있었다. 몇 구비를 더 오르자 산 정상 능선부터는 완만한 황톳길이 쭉 이어졌다. 능선부터는 아름드리 금강송 솔숲이 길을 가렸다. 준경묘 수봉관 이재관 말에 의하면 이곳 종성인(宗姓人)들이 매해 제사를 올리며 스스로 나뭇가지 하나라도 삼가였기 때문이라고 했다.
비록 묘역은 무너졌으나 숭엄한 기운이 이중하의 모골을 뻣뻣하게 당겼다. 백두대간 산맥의 기운이 모두 이곳으로 모인 것처럼 산세의 정기가 이 야트막한 구릉에 가득 머물고 있었고, 낮은 봉분 위로 봄 햇살이 금가루처럼 쏟아졌다.
이중하는 12년 전 눈보라가 몰아치던 백두산 정상에서 느꼈던 벅차오르는 감정을 누르기 힘들었다. 무덤의 주인을 주상인 고종이 “나의 목조 황고”라고 불렀지만, 이중하에게도 저 무덤의 주인은 중시조 광평대군 할아버지의 직계 7대 조부가 되기 때문이었다.
이중하는 당시 백두산정에서 읊었던 시 한수를 나직이 되뇌어 보았다.
한 겨울에 왕명 받고 오르던 백두산 길
풍설이 흩날려서 지척조차 분간하기 어렵더니
잠깐 사이 탁 트여서 하늘이 맑아지자
뚜렷한 붉은 해가 산 위에 걸렸구나.
삼척부에 돌아온 이중하는 읍지와 야사를 모두 모아 살펴보았다. 그 중 부사 허목의 이묘기(二墓記), 감사 손순효의 양묘기(兩墓記), 감사 이명한의 장계(狀啓)가 상고해 볼만한 가치가 컸다.
인조 18년, 1640년 강원감사 이명한은 장계(狀啓)를 올려 양묘의 사체(事體)를 보고 하였다.
“신은 비록 풍수의 향방을 잘 알지 못하나 산형과 혈도가 웅장하고 장대한 것이 과연 평범하지 않았습니다. 묘역은 비록 무너져 가라앉았지만 두 능 모두 산 깊은 골짜기에 있고 층계와 묘 터로 보아 당초 공역이 거대하였음을 상상할 수 있었습니다. 또 평상시 봉심하던 곳으로부터 능 아래 이르는 길이 분명히 남아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좌향, 입대, 수파(水破) 또한 옛 재신 정철이 그려 남긴 것과 같았습니다.”
역시 사람들의 보는 눈은 다르지 않았다. 이중하도 어제 본 준경묘의 지세가 대단함이 한눈에 들어 왔다. 500년 조선 왕업이 세워진 태초의 기운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명한이 장계를 올리기 한 갑자 60년 전, 시문과 풍수에 두루 뛰어난 정철이 강원 감사로 이곳을 봉심하고 올린 보고서는 이렇게 기록 되어 있었다.
“목조 부친의 능은 신미태방(물줄기) 금산이 주산이 되고 좌향을향(辛坐乙
向)이며 삼록이 수파입니다. 외원은 미신방(未申方)에서 바다로 향해 갑방(甲方)으로 흘러들어갑니다. 좌청룡 우백호가 모두 온전하고 품(品)자 형의 세봉우리를 이고 있으며, 골맥(骨脈)은 연이어 뻗어 학의 무릎 형상으로 진룡(眞龍)에 해당하는 곳입니다. 우뚝 솟은 세 개의 봉우리는 만대의 군왕이 배출될 곳입니다. 형세는 복룡(伏龍)형에 생룡안(生龍案)이고, 지명은 노동(蘆洞)입니다.”
이에 이중하는 우선 고적을 살핀 것과 묘역을 봉심한 내용을 기록하여 장계로 고종에게 서주(書奏)하였다. 세밀한 산도(山圖)를 첨부하였음은 물론이다. 삼척 양묘지(兩墓志) 서(序)를 기초한 이중하는 다시 서둘러 한양 길에 올랐다.
1899년 4월 14일, 경운궁 함녕전에 삼척 묘소를 봉심한 이중하가 입시 하였다.
“먼 길 잘 다녀왔는가?”
고종이 수 천리 고생길을 다녀 온 이중하를 위로 하였다. 전주로 봉심을 다녀 온 이재곤이 함께 입시 하였지만 고종은 더 먼 길을 다녀 온 이중하에게 안부를 물었다.
“황령이 밝혀 주시어 무사히 다녀왔습니다. 신이 이번에 받든 명이 실로 막중하므로 현지에서 널리 고사를 수집하였습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두 묘소는 멀리 태조 때에는 분명치 않아 실전 되었다는 한탄이 있었으나 이는 왕조가 흥기한 곳이 먼 북방 지역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세종 조에 신하들을 보내어 마침내 두 묘소를 찾아내었고 선조 조에 감사 정철이 아뢰었습니다. 부사 허목이 바친 양묘지에도 동국여지승람에 목조 부친의 묘소는 삼척부 서쪽 40리인 노동에 있고, 모친의 묘는 부 서쪽 30리인 동산리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오십천 골짜기를 찾아 가 확인한 사실도 같습니다.”
이중하가 부복한 채로 보고하자 고종은 황포를 쓰다듬으면서 답하였다.
“경이 서면으로 아뢴 것과 고사를 간추려 뽑은 것을 보았다. 매우 자세하여 대체로 이해가 간다. 세종 정묘년에 처음으로 분묘를 쌓았고, 성종 경술년에 봉역을 수축하다가 공사를 중지하였는데, 비록 그 원인에 대해서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신중히 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선조 경진년에 감사 정철이 아뢴 것과 현종 임인년에 부사 허목(許穆)이 기록한 것은 어찌 상고한 것이 없이 그렇게 하였겠는가? 사리가 분명하고 의심할 바가 없다”
이어 고종은 전주(全州) 건지산의 묘소는 그 흔적이 분명치 않아 조경단을 세우지만 삼척의 묘소는 문헌에 실려 있어 의심할 바 없으므로 비를 세우는 것은 전주의 전례대로 하고, 묘역을 봉축 하는 것은 북방 능침의 의례에 따르라고 입시한 종정원 경 이재완, 장례원 경 조정희에게 명하였다.
그리고 고종은 수축할 재실과 정자각 등 제각에 쓸 목재와 비석의 돌에 대하여 걱정을 하였다. 비록 짧은 기간이나 삼척부내 사정을 속속들이 캐고 온 이중하가 막힘없이 대답하였다.
“묘역에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많이 있으니, 새 재목으로 수축하려면 어려움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봉금 지역이라 함부로 나무를 베어다 쓸 수 없다고 하면, 삼척부에 빈 관가(官家) 많이 있으니 당장 재목으로 실어다 쓸 수 있으며 비석으로 쓸 돌은 십리 안에 캐올 곳이 있다고 합니다.”
“삼척부 관사(官舍)에 모셔 놓은 서대(犀帶)는 어떠한가?”
고개를 끄덕이던 고종이 말의 방향을 바꿔 물었다.
서대(犀帶)는 태조 이성계가 삼척을 4대 조부 목조의 외향이라 부(府) 승격 시키고 붉은 서대를 하사 하였는데, 삼척부는 500년 동안 이 홍서대를 곱게 모셔 왔다. 정1품 관리의 조복에 차는 서대를 하사하여 정승급 당상이 지키는 고을이라는 상징성을 태조 이성계가 목조에게 고한 것이다.
“이제는 삼척부에서 삼척김씨 재실로 이관하여 재실 보본단 내 운한각(雲漢閣)에 봉안하고 공경히 받들어 지키며 보존하고 있었습니다. 두 겹으로 된 궤 안에 봉안하였는데, 궤 위에는 영조대왕의 서문 홍서대기가 있습니다. 세월이 오래되어 약간 좀먹었지만 모습은 고색창연 하였습니다. 신이 수리를 명하고 상경하였나이다.”
영조 30년, 노년의 영조대왕은 어사 이현중의 아룀에 따라 호장 김상구가 모시고 올라 온 서대를 친찰하고 홍서대기(紅犀帶記) 직접 써 내렸다. 홍서대기를 필사한 사본을 이중하가 고종에게 올리자 고종은 어안에 피어오르는 감개무량함을 감추지 못하였다. 고종은 그 친조부 남연군이 영조의 손자 은신군의 양자로 입적하어였기 때문에 선대 왕 철종 사후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강화도령 철종의 할아버지 은언군과 고종의 양증조부 은신군은 형제로 정조대왕과는 이복형제가 된다.
이어 고종이 일렀다.
“짐의 황고 목조대왕께서 사신 삼척 활기동(活耆洞)의 돌담이 있던 잠저 터 가 지금까지 보존된 것은 귀한 일이다. 마땅히 용주리(湧珠里)의 고사대로 비(碑)를 세우고 사적(史蹟)을 기록해야 한다. 돌담이 있던 자리의 형상은 어떠한가?"
용주리는 목조가 함길도에 정착한 곳이고, 돌담이 있는 곳은 전주에서 삼척으로 건너와 자리 잡은 잠저 터를 이름이었다.
“지금은 보리밭이 되었지만, 신이 오십천에서 들어 간 곳 중 제일 깊고 험한 골짜기 내에 상서로운 기운이 서려 있는 평평한 이곳을 예로부터 왕대(王垈)라고 하였답니다."
이중하가 공손히 답하였다.
“그 가운데 민가는 없는가?”
“목조대왕의 옛 집터라고 하여 부근에 사는 사람들이 감히 이곳에 집을 짓지 못했습니다. 그곳 사람들은 아직도 여기를 택기(宅基), 택전(宅田), 택정(宅井)이라고 부르고 있었습니다.”
“오호라”
고종이 감탄사를 토했다.
“옛 삼척부사 이헌경이 쓴 양묘기에 의하면, 이곳에 다른 양반은 없고 오로지 소달로화적댁(所達魯花赤宅)만 있으니 이곳부터 고무릉 너머까지를 소달면으로 일컫는다고 하였습니다. 달로화적댁은 목조대왕께서 함길도로 가서 받은 천호벼슬입니다. 소달면(所達面)은 미로면과 이웃한 지명입니다.”
이중하가 고종의 물음에 마저 답하였다. 목조 이안사는 삼척에서 함길도 의주로 옮겨 가 병마사를 지내다가 원나라 천호 벼슬을 받는데 이를 다루가치로 부르고 한자로 차음하면 달로화적(達魯花赤)이 된다.
“종성(宗姓) 사람들이 해마다 제사를 지낸다고 하는데, 축문(祝文)의 내용을 공이 보았는가?”
고종이 제례의식을 궁금해 하자 이중하가 아뢰어 답하였다.
“옛 문헌을 고찰해 보면 목조대왕께서 전주에서 이곳으로 올 때 170 가구가 따라 왔다고 하나 의주로 떠나실 때 동행한 무리수를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종성인들이 상당히 삼척 근방에 남아 살고 있으리라 추측 됩니다. 신이 그 축문을 가져다 보니 당일 제사에 참여하는 사람이 그 항렬에 따라서 ‘몇 대손 아무개가 몇 대조 장군공 묘소에 감히 고합니다.’라고 하며 선원보략에 따라 예식을 분명하게 거행하고 있었나이다.”
“갸륵한 일이다. 이제부터는 나라에서 해마다 제사를 지내야겠다.”
“오직 성상의 밝은 마음을 받들겠습니다.”
이중하가 고종을 우러러 보면서 답하였다.
“동국여지승람에서 전주의 사적(事蹟)을 상고할 수 있는가?”
고종이 입시한 전주 봉심관 이재곤을 바라보았으나, 이재곤은 얼굴을 붉히며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이중하는 경상북도 관찰사를 마치고 내직으로 들어 왔으므로 전주 경기전, 조경단 사적까지 상고할 겨를이 없었다.
“신이 아직 조사를 마치지 못하였습니다.”
젊은 당상관 이재곤의 낯빛이 파리해졌다. 이중하의 마음은 한 치도 흔들리지 않았다. 야심만만한 이재곤은 왕실 종친으로 22세에 홍문관 교리가 되었고, 만 30세에 당상관이 되어 같은 장례원 소경으로 53세의 이중하와 어깨를 겨루고 있었다.
고종이 다시 이중하에게 눈빛을 던지며 하문 하였다.
“갱장록(羹牆錄)에도 목조대왕의 삼척에 관한 일을 적은 것이 있는가?"
“신이 자세히는 기억하지 못하겠습니만, 정조 조 관동빈흥록(關東賓興錄) 어제(御製) 책문(策文) 제목에 ‘미로리(未老里)의 뽕나무와 삼(麻) 심은 옛 언덕이 고향의 물색과 다름없다.’고 한 것이 있습니다. 이로 볼 때 정조대왕의 생각에도 이곳을 한(漢)나라의 분유(枌楡)에 비유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미로리는 이곳 활기동의 면(面)입니다.”
“분유사(枌楡社)는 한나라 고조의 고향인가?”
이중하의 막힘없는 답에 고종은 무릎을 치며 현답으로 대꾸하였다.
갱장록은 역대 임금의 업적을 기록한 것이고, 관동빈흥록은 정조 때 규장각에서 강원도 유생들에게 실시한 과거의 전말, 왕의 어제 등을 엮어 편찬한 책이다. 흥선대원군으로부터 엄격한 제왕학을 익힌 고종도 막힘이 없었다.
“예, 그렀습니다. 그 대구(對句)는 ‘관음굴 승복 입은 스님의 영묘한 감응은 제비의 상서로움으로 이어지네’로 되어 있습니다.”
“익조대왕의 현몽을 말하는 것인가?”
“예, 옛 부사 허목의 척주(삼척의 옛 지명) 이묘기(二墓記)에 의하면 익조(翼祖)와 정숙후(貞淑后)께서 양양 낙산사 관음굴에서 대를 이를 자식을 낳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하였는데, 꿈에 스님이 나타나 귀한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점지하였다고 합니다. 그 후 도조(度祖)께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렇다면 익조대왕이 양양 관음굴에서 기도를 드린 후 반드시 멀지 않은 삼척에 와 선친 목조대왕의 구거유지를 살펴보고 할아버지의 묘소도 봉심하였을 것입니다.”
“과연 그렇구나, 600년의 왕업이 면면히 이어지는구나!”
익조는 태조 이성계의 증조부 이행리(行理)이고, 도조는 할아버지 이춘(椿)을 말하는 것이다. 태조 이성계는 이중하의 중시조 광평대군, 고종의 왕업 핏줄인 수양대군(세조)의 당 할아버지가 된다.
47세 장년에 이른 고종은 얼굴빛이 많이 펴있었다. 그간 겪었던 참담한 신세를 이제 떨쳐내자는 의지가 역력히 엿보였다. 석양에 걸린 조선의 왕업을 다시 일으키고 싶은 뜻을 먼 조상의 터를 높이 세움에서 먼저 찾고자 하였다. 그리고는 오히려 먼 길 다녀온 신하를 부드럽게 위무 하였다.
“부(府)에서 그곳에 이르기까지 여정은 어떠하였는가?”
“웅장한 깊은 산골짜기 내에 산기슭으로 둘러싸인 동리는 협소하지만 아늑한 곳입니다. 이곳은 삼척 오십천 물길 중 가장 깊숙한 곳입니다. 산봉우리를 휘감아 도는 길이 구불구불하여 물돌이 마다 다리를 놓은 것이 50개나 되기에 오십천이라 일컫습니다. 신도 활기동으로 들어가면서 열네 번 물을 건넜습니다.”
이중하는 물굽이 돌아가는 산협을 떠 올리며 고종에게 오십천의 형상을 아뢰었다.
고개를 끄덕이던 고종 그제야 전주(全州)를 봉심한 이재곤에게 물었다. 전주의 국역은 이미 많이 진척되었기 때문이다.
“묘(廟)와 전(殿)을 봉심하니 과연 안녕하시던가? 단(壇)의 공사를 끝마쳤다니, 매우 경사스럽고 다행스럽다. 이미 서주(書奏)한 내용을 자세히 보았는데, 아직 끝마치지 못한 역사(役事)가 아직 얼마나 되는가?”
“예, 단의 역사는 이미 끝마쳤습니다만, 비각은 한창 나무와 돌을 다듬고 있으며, 재실은 현재 토역(土役) 중입니다.”
묘는 조경묘, 전은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봉안한 사당인 경기전(慶基殿)을 말하는 것이다. 새로 비석을 세우는데 전주의 경우는 부(府) 내에 좋은 돌들이 많아 고종의 걱정을 덜게 하였다.
“경기전 앞에 비석으로 쓸 석재가 남아 있다는 것은 마치 오늘을 기다린 듯하다. 매우 가상한 일이다.”
“모두 황상의 갸륵하심이 하늘에 닿은 까닭입니다.”
부복한 젊은 재신 이재곤의 아첨은 꿀처럼 달았다. 이재곤은 훗날 이완용 친일 내각의 학부대신으로 입각하고, 한일합방 때 자작 작위와 은사금 5만원을 받는다. 우리 역사에서 이완용, 송병준 등과 함께 정미7적으로 기록된 인물이다.
“전주의 건지산과 삼척의 노동, 동산에 모두 고유(告由)하는 의절이 있었는데, 앞으로는 준경묘, 영경묘에 1년에 한 번씩 제사 지내는 예식을 행함이 옳을 것이다. 재신들의 뜻은 어떠한가?”
“삼가 성상의 하교대로 받들겠나이다.”
고종이 제례에 대한 의견을 묻자 입시한 재신들이 한목소리로 답하였다.
“해마다 한 번 제사를 지내는 예식으로 행한다면 어느 때 올리는 것이 마땅하겠는가? 경기전과 조경묘는 어느 때에 제사를 올리는가?”
“경기전은 각 절기마다 제사를 행하며 조경묘는 봄과 가을의 중삭(仲朔)에 올립니다.”
고종이 제사의 절기를 하문하자 제례에 밝은 종정원 경 이재완이 나직이 답하였다.
“그렇다면 한식일(寒食日)을 제일로 정하는 것이 어떤가?”
“의절에 따라 한식일로 정하는 성상의 하교가 지당합니다. 제관(祭官)이 상치될 것 같으니, 도내의 품계가 높은 수령으로 채워 차임(差任)하는 것이 좋을 것으로 아룁니다.”
“경기전, 조경묘의 제관은 관찰사 외에 누구를 차임 하겠는가?”
“매번 가까운 고을의 수령으로 채워서 차임하였습니다. 경기전의 한식제는 관찰사가 헌관(獻官)이 되니, 조경단의 헌관은 형편상 품계 높은 수령으로 채워서 차임해야 할 것으로 사료됩니다.”
“전주에서 가까운 고을 가운데 어느 고을 수령이 품계가 높은가?”
“전라북도에서는 남원(南原)이 제일 품계가 높은 고을입니다.”
고종과 종정원 경 이재완의 대화가 물 흐르듯 이어졌다.
“그렇다면 조경단의 헌관은 남원으로 정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삼척은 어떻게 정하면 좋겠는가?”
이번에는 고종이 이중하를 바라보며 물었다.
“신이 어찌 감히 정할 수 있겠나이까, 다만 강원 관찰부가 너무 멀리 있는 상황이니 앞으로 가까운 고을의 수령으로 채워 차임함이 옳을 것입니다. 거리가 가깝고 품계가 높은 곳은 오직 강릉이고 그 다음이 양양으로 두어 군(郡) 뿐입니다 삼척 아래로는 울진과 평해군이 있습니다.”
이중하는 준경, 영경 묘역에서 제례를 올릴 헌관을 거리와 군세에 비추어 가장 공평하게 아뢰었다.
다시 고종이 입시한 재신들에게 물었다.
“상지관(관상감 지관)에게 들으니 준경묘 묘소는 복호(伏虎) 형이라는데 아래쪽에 습지가 있어 정자각을 세우기 어렵다고 하는데 어쩌면 좋은가?”
현장을 알 리 없는 종정원 경과 장례원 경은 아무 답을 하지 못하였다.
“좌청룡 우백호가 껴안고 엎드린 형상은 그 안쪽이 명당입니다. 수전의 지질은 오히려 길격(吉格)이라고 하온데, 다만 습지에 정자각을 건립하기는 어려운 형편입니다.”
이중하는 준경묘 터 아래 습지에 피어 난 노오란 애기똥풀과 푸르게 고개를 내민 미나리꽝을 떠 올리며 고종의 하문에 답하였다.
“그러면 습지를 피하여 정자각은 일자제각(一字祭閣)으로 세우면 어떠한가?”
고종이 의례만 고집하지 않고 길을 내어 주자 입시한 재신들이 모두 머리를 숙이며 성상의 지침에 따르겠다고 하였다. 예부터 능침 앞에 세우는 정자각은 ‘丁’자 모양으로 건립하기에 정자각(丁字閣)이라고 부르는데, 준경묘역에 일자각을 세운다고 그것이 정자각이 아닌 것은 아니다.
조회는 몇 시간 째 이어졌다. 어느새 경운궁 함녕전 뜨락에 석양이 내려앉았다.
1899년 6월 4일 고종이 영건청 당상들을 다시 함녕전으로 불렀다.
의정(議政) 윤용선, 종정원 경(卿) 이재완, 장례원 경 조정희, 조경단 봉심 재신 이재곤, 영건당상 장례원 소경 이중하, 이호익, 심상황이 입시 하였다.
“오늘 경들을 부른 것은 전주와 삼척의 일을 다시 의논하려는 것이다. 자만동(滋滿洞)과 활기동은 모두 목조대왕의 옛 잠저(潛邸) 터이다. 오목대(梧木臺)는 태조대왕께서 남쪽을 정벌하고 개선하실 때 머문 곳이다. 조상을 선양하여 표장(表章)하는 것을 어찌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입시한 재신들은 모두 부복한 채로 성상을 말을 묵묵히 듣고 있었다.
“준경묘 비석 음기 비문은 시종원 경 이근명(李根命)이 초(抄)하고, 영경묘의 비문은 내부대신 민병석(閔丙奭)이 써 올리라. 활기동의 비문은 박기양(朴箕陽)이 초(抄)하고, 오목대의 비문은 김영목(金永穆)이 써 올리라. 그리고 완산(完山)의 비문은 전라북도 관찰사 이완용(李完用)이 초(抄)하라.”
고종은 비석 전면 대자는 어필로 친히 내리겠다고 하면서 각 묘, 각, 대의 비문 음기를 초할 대신을 모두 명하였다. 그리고 비석을 다듬는 일의 진행과정을 하문 하였다.
“비석은 한양에서 돌을 다듬고 글을 새겨 보낸 전례도 있으나 현지에서 돌을 뜨고 다듬으면 비문을 낭청이 가지고 내려가고 석공(石工)과 각수(刻手)를 서울에서 내려 보내 탑본을 뜬 족자 두 개를 봉해서 올리게 한 전례도 있습니다.”
장례원 경 조정희가 하문에 답하여 아뢰었다
“경기전 앞에 비석 재료로 쓸 돌이 남아 있다고 하니 마치 오늘을 기다린 것과도 같다. 삼척의 묘소도 가까운 곳에 쓸 만한 품질의 돌이 있다고 봉심한 이중하가 아뢰었으니 한양에서 내려 보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영건청 당상은 미리 해당 군수에게 훈령(訓令)을 보내 기일에 앞서 돌을 떠내어 다듬어 놓고 비문이 내려오기를 기다렸다가 잘 새기도록 하라. 비문은 낭청이 배진할 필요는 없다. 전주는 봉심한 재신이 이미 조처한 듯하니 도신(道臣)이 스스로 거행해야 한다.”
고종이 비석 세우는 진행 과정에 구체적이 내용을 이르자 입시한 재신들은 하교를 높게 받들겠다면서 일제히 머리를 조아렸다.
잠시 주위가 조용해지자 이중하가 간곡히 아뢰었다.
“삼척에 세울 비석은 3좌(坐)인데 돌 공사가 크고 깊은 산 중이라 석공을 먼저 내려 보내야 할 것입니다. 돌을 터내는 것은 더없이 중요한 일이니, 반드시 공역에 익숙한 공장(工匠)들을 골라서 보내야 하는데, 별감동(別監董) 송계창이 신병이 있어 신이 상의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공장을 아직까지 보내지 못하였고 물자도 아직 구획(區劃)하지 못한 채 날짜만 지연되니 황공하고 답답할 따름이옵니다."
이중하의 목소리에는 간절함이 묻어 있었다. 고종이 이중하의 말뜻을 헤아려 윤용선에게 지시 하였다.
“경은 물자에 대하여 탁지부 상의하여 즉시 지출 조처하라. 그리고 공장(工匠)은 솜씨 좋은 사람을 택하여 빨리 현장으로 내려 보내도록 하라.”
의정(議政) 윤용선은 성상의 하교를 높이 받든다고 답하였다.
“역사(役事)를 시작하기 전에 마땅히 고유제(告由祭)와 후토제(后土祭)를 지내야 하는데 삼척은 전주와 다릅니다. 전주는 비록 때에 임박해서 지휘하더라도 제기(祭器), 제상(祭床) 같은 물품들을 조경묘와 경기전에서 임시로 빌려다 쓸 수 있지만, 삼척은 때에 임박해서 변통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니 일찍이 날을 받아 도신(道臣)과 해당 군수(郡守)에 통교한 뒤에야 거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이중하가 삼척 묘 봉역, 재사 건립에 앞서 행하는 고유제, 후토제 절차에 대하여 성상의 뜻 여쭙는 질의를 공손히 올렸다.
고종이 난감한 표정으로 장례원 경 조정희를 바라다보았다.
“고유제와 후토제는 장례원에서 길일을 받아 거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제기는 영건청에서 새로 준비하되 재실(齋室)을 조성하기 전이라면 우선 봉상사(奉常司)에서 산천 제사에 사용하는 제기 가운데서 골라 추이(推移)하여 임시로 쓰는 것이 좋을 듯하옵니다. 탁지부와 봉상사가 상의해서 품처 하겠나이다.”
조정희가 답을 아뢰자 고종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조경단의 역사를 마친 뒤에 고안제(告安祭)를 미처 설행하지 못하였습니다. 비석을 세우는 공사가 끝나기를 기다려 장례원으로 하여금 택일하여 거행하도록 하는 것이 옳겠나이다. 그리고 조경단의 제품(祭品)은 장례원으로 하여금 마련하게 하고, 제기는 신칙으로 만들어 내려 보내어 고안제를 지낼 때에 맞춰 쓸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이재곤이 전주 조경단 고안제에 대한 의견을 올리자 고종은 모두 윤허하였다. 그리고 조경묘 제품(祭品)에 대하여 하문 하였다.
“준경묘 제품도 마땅히 조경묘의 규례대로 할 것인데, 조경묘 제품이 종묘의 제품과 어떤 차이가 있는가?”
“묘와 전에 올리는 제품 가짓수와 제기의 수효에 대하여 신이 아직 자세히 상고 하지는 못하였지만 마땅히 능(陵)과 원(園)의 규례를 따라야 할 것입니다.”
전주 봉심 재신 이재곤이 답을 올리자 입시한 종정원, 장례원 재신 모두 한목소리로 이재곤의 주청이 옳다고 아뢰었다.
“그렇다면 능침의 규례대로 하라. 제기는 영건청에서 조성하게 하되 장례원으로 하여금 전례(典禮)를 널리 알아보게 한 후 이를 정식으로 삼도록 하라.”
고종의 용안에 엷은 햇살이 돋자 입시한 종정원, 장례원, 영건청 당상들이 목소리를 합하여 황상의 어지신 효심을 높게 받들겠다고 아뢰었다. 이중하는 고종에게 고두배(叩頭拜)를 올리고 함녕전에서 물러나왔다.
이중하가 장마철을 피해 다시 삼척으로 내려 온 것은 1899년 8월 6일이었다.
이미 장례원에서 보낸 국역 공사비 1만원이 삼척군 관아 도착해 있었다. 그 돈으로 삼척군수 이구영이 촌각을 쪼개어 활기동 재실 터 앞에 영건소(營建所)를 닦고 재사 건립 준비에 한창이었다.
8월 9일, 먼저 준경묘 영건 공사에 앞서 고유제(告由祭)를 올리는데 시각은 자시(子時)였다. 헌관으로 삼척군수 이구영이 나섰고, 대축관으로는 울진군수 김용규가 이미 대기하고 있었다. 아직 봉상사의 제품(祭品)이 내려오지 않아 제물은 간소하였지만 참례하는 사람들의 눈빛은 결연 하였다. 얼음이 얼기 전에 모든 공사를 마쳐야 하기 때문이었다. 다음날 영경묘 고유제의 헌관은 강릉군수 유기준, 대축관으로는 평해군수 홍일섭이 제사를 주관 하였는데 마찬가지로 자시(子時)에 행하였다. 고유제 일시와 제관을 지정하여 보낸 궁내부와 장례원의 훈령은 이미 강원도 관찰부와 강릉군, 울진군, 평해군에 도착하였기에 중앙의 명으로 행하는 국역의 막중함을 참례자 모두가 알고 있었다. 이중하와 수봉관들은 묵묵히 고유제를 지켜보았다. 음력 8월이지만 활기리 골짜기의 밤은 쌀쌀하였다. 수행 군관들이 피어 놓은 화톳불이 밤하늘을 밝혔다.
계속되는 공역에 들어가는 비용은 궁내부에서 보낸 1만원으로는 턱없이 모자랐다. 영동의 각 군에서 획래할 수 밖에 없었는데, 군(郡)의 사정에 따라 거두었다. 삼척군이 1만2천냥, 양양군이 1만냥, 강릉군이 4만6천냥, 평해군이 5천9백냥, 울진군이 4천6백냥을 각 납부하였다. 멀리 경주군도 1만5천냥을 보탰다. 국고 비용까지 합하여 원(元)으로 환산하면 모두 29,700원이 소요되었다. 정선군은 공사비 훈령을 받지 않았으나 정자각과 비각에 사용할 질 좋은 주토(朱土) 다섯 말을 밤을 세워 운송하여 국역에 힘을 보탰다. 호송한 장교와 짐꾼에게 내어 준 삯도 공사비에 포함되었다. 중앙의 돈과 각 군에서 획래한 돈은 한 치의 틈도 없이 명세서에 의하여 쓰여 졌다. 이를 후에 [준경묘.영경묘 영건청 의궤] 내 공역. 재용 목록에 낱낱이 기록하여 못 하나, 간장 종지 하나 허투루 하지 않았음을 밝혀 후대의 본을 삼으려고 하였다.
준경묘, 영경묘 정자각 대들보를 올리던 9월 3일에 삼척군 부(府)에 도착한 장례원의 훈령에는 민정을 살피는 고종황제의 마음이 갸륵하게 담겨져 있었다.
“비석 3좌를 옮기는데 수레 1대 당 민정 50명의 노력이 필요하다. 수레를 끌고 운반할 때 무거운 것을 들어 올리는 백성들의 힘씀을 돌보지 않을 수가 없다. 이에 1인 당 백미 2승 씩 나누어 주어 이틀 간 양식으로 삼게 하고 장곽가(반찬값)로 10냥 씩 더 지급하라. 반드시 쌀로 지급하여 돈이 허투루 쓰이지 않게 하고 음식이 넉넉하여 공역에 차질이 없게 하라.”
1899년 9월 3일 준경묘, 영경묘 정자각을 모두 세우고 그 전말을 장례원과 함녕전에 품신하였으나 그동안 이중하가 영건소 임시 처소에서 노숙을 하다시피 하면서 겪은 고생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8월 14일부터 몰아닥친 비바람은 한여름 장마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8월 15일 간단한 제물로 고향 양평을 향하여 추석 차례를 올렸지만 임시 처소에 갇히다시피 한 이중하의 가슴은 까맣게 타들어갔다. 다만 장남 범세가 일찍이 출사하여 이미 일가를 이루고 있으므로 한양과 향리 양평의 걱정은 덜하였다. 삼척부에서 군수 이구영이 알자를 보내 부내(府內)로 모시겠다고 하였지만 이중하는 느닷없는 폭풍우에 고을 형편이나 잘 챙기라고 하면서 돌려보냈다.
5일이나 계속된 비바람 때문에 공역에 엄청난 차질을 보았으나 이중하는 헝클어진 일의 매듭을 수습하고 일정을 재촉 하였다. 양 묘 수봉관 이재관, 이보현이 이중하를 보좌하여 진두에 나서서 공역에 매달렸고, 장례원 낭청인 삼척군수 이구영도 부내 공무가 빌 때마다 수시로 활기동으로 들어 와 장례원 당상 이중하의 마음을 살폈다.
10월 21일 드디어 준경묘. 영경묘의 정자각, 비각, 목조 이안사 구거유지 택기(宅基)의 비각, 양묘의 재실(齋室)인 전사청, 수라간, 수복방이 모두 완공되어 봉안제를 설행하였다.
봉안제는 재실을 지은 활기동 목조 이안사 구거유지에서 올렸다. 헌관으로는 강원도 관찰사를 대신하여 품계가 높은 강릉군수 유기준이 나섰다.
재실(齋室) 봉안제 제품(祭品)과 제기(際器)는 장례원에서 정한 것으로 능(陵)과 원(園)의 규례를 따랐다. 제품 가짓수와 제기의 수효도 마찬가지였다.
찬품(饌品), 찬탁(饌卓)을 다섯줄로 진설 하였다. 첫째 줄의 약과는 백산자, 홍산자, 전다식, 백다식, 중박계로 차렸고, 둘째 줄은 건과실로 건시(곳감), 건조(대추), 황률(밤), 백자(잣), 진자(호두), 실비자를 올렸다. 셋째 줄에는 떡으로 절병, 유병, 당고병, 상화병, 두단병, 경단병, 자박병 등 시루 찐 것부터 기름에 지진 떡까지 온갖 격식 있는 증병(蒸餠)들이 찬탁에 올랐다. 넷째 줄에 나물 3기와 탕(湯) 3기가 올랐다. 육탕, 어탕, 소탕의 어육과 채소 모두 정갈하였고, 면(麪)은 올 가을 추수한 녹두면으로 밀면보다 말갛고 깔끔하였다. 적(炙)은 두부적으로 흑악사에서 만든 최고품 두부였다. 다섯째 줄에 술 3작이 진설되었다. 가을 하늘색 맑은 청주가 굽이 높은 유기 고제작(告祭爵)에 가득 담겨 올려졌다.
이중하는 8월 9일 고유제(告由祭)를 지내고 난 뒤 군수 이구영과 향탄산(香炭山)과 위토(位土) 지정에 골몰 하였다. 향탄산은 능과 원의 제사에 쓰일 향목과 목탄을 획래하는 국가 지정산이고, 위토는 제향 경비를 쓸 토지를 말하는 것이다. 탁지부에 수차 공문을 조회하여 향탄산은 장호, 갈산, 신남, 임원 4개 진이 지정되었고, 위토는 평릉역의 역토에서 준경묘 7결 29부, 영경묘 6결 75부를 획부하기로 하였다. 평릉역은 부(附) 중심 역(驛)이고, 북쪽의 큰 벌판이라 북평(北平)이라고 부르는 곳의 중심지이다.
수복군(守僕軍)은 준경묘에 15명, 영경묘에 15명을 배속 시켰는데, 모두 활기동, 동산에 사는 주민 중 장정들을 골라서 배치하였다.
이중하는 재사(齋舍) 짓고 난 후 지낼 봉안제 설행 전부터 봉안제 뿐만 아니라 매년 대대손손 이어질 한식제를 염두하고 조포사(造泡寺)를 물색 하였다.
조선의 제사에 쓰는 재물은 철에 맞는 곡식, 과일, 채소를 고루 쓰지만 두부만큼은 사철을 가리지 않고 소중히 쓰는 물목이다. 왕후장상의 제상에도, 장삼이사의 제상에도 기본으로 쓰이는 탕(湯), 전(煎), 적(炙)에 모두 두부를 쓴다. 그러나 상하기 쉬워 엄격한 관리가 필요하고 품질 좋은 물품을 공급받기 위하여 조선의 능, 원에 조포사(造泡寺) 능찰을 두었다. 화성 용주사는 장조의 융릉(隆陵)의 조포사이고, 연화사는 경종과 선의왕후의 능찰로 조포사 역할을 하였다. 봉은사, 신륵사도 능찰로 널리 알려진 조포사였다.
이중하가 조포사로 낙점한 흑악사는 준경묘, 영경묘에서 가까운 사찰로 월정사의 말사이지만 유구한 내력을 지닌 절이었다. 서기 758년(신라 경덕왕 17년)에 두타삼선(頭陀三仙)이 백련을 가지고 이곳으로 와 절을 창건한 뒤 백련대(白蓮臺)라고 하였고, 고려 충렬왕 때 이승휴(李承休)가 이곳에서 한민족 대서사시 제왕운기(帝王韻紀) 저술하면서 간장암(看藏庵)이라고 하였다. 300년 먼 세월 후, 서산대사가 이곳에 와서 다시 중건하면서 절의 서남쪽 검푸른 산봉우리를 보고 흑악사(黑岳寺)라고 고쳐 부르기 시작하였다.
이중하의 장계를 받은 장례원은 준경묘, 영경묘의 조포사찰을 흑악사로 정하고 다음과 같은 완문(完文)을 보내 공역을 면제하고 관용을 혁파하였다. 이중하는 완문을 수호절목에 넣어서 그 내용을 후대에 남기도록 하였다.
“준경묘. 영경묘를 수봉한 이후 이제 수호의 예절은 능과 원의 예에 따라 행하는 것으로 성상의 하교를 삼가 받았다. 제사에 쓸 두부를 흑악사에서 만드는 것으로 정하였으니 이후 본 군(郡)이 관용(官用)이라는 이름으로 잡역을 부과하거나 노끈 하나 미투리 한 켤레라도 절에 요구해서는 안 된다. 종전의 자질구레한 오류는 모두 혁파하여 사승(寺僧)들이 두 묘소에 대한 임무를 거행함에 전심전력할 수 있게 하라.”
이후 흑악사를 조선 건국 6룡의 제1룡 목조대왕의 원당이라는 의미로 천은사(天恩寺)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이후 천은사는 말사의 지위에서 월정사 본사만큼이나 우대를 받게 되었다.
광무 3년 겨울, 1899년 11월 25일 드디어 준경묘비가 세워졌다.
햇살이 좋은 미시(未時)였지만 양력으로는 12월 27일, 겨울의 절정으로 삭풍이 준경묘역 골짜기에 휘몰아쳤다.
봉역 후토제, 고유제, 재실 봉안제에서 한 번도 헌관으로 나서지 않은 이중하가 준경묘비 봉안제 초헌관으로 나섰다. 대한제국 궁내부 특진관(特進官) 겸 장례원 소경 가선대부 이중하는 운학(雲鶴) 흉배의 조복을 입고 금빛 양관(梁冠)을 쓴 채 준경묘 비석 앞에 엎드렸다.
대한준경묘(大韓濬慶墓)
비석에 새겨진 고종의 어필은 용이 승천하는 기상으로 날아오르듯 웅혼 하였다.
홀(笏)을 마주 쥐고 두 손을 모은 이중하가 자헌대부 이근명이 칙령으로 초(初)한 비석 음기(陰記)를 공손히 읊조렸다. 휘몰아치던 겨울 삭풍도 잠시 숨을 고르고 있어서 주변이 잔잔해졌다. 그리고 한낮의 맑은 햇살이 준경묘비를 가지런히 비추고 있었다.
“삼척 치소 서쪽 40리 노동이라는 곳이 있으니 산이 두타산으로부터 뻗어 내려 와 국세가 웅장하고 뛰어나 그 형상이 마치 호랑이가 엎드리고 있는 것 같은데, 신방(辛方)을 등지고 을방(乙方)을 바라보고 있는 묘소는 곧 나의 목조 황고께서 잠들어 계신 곳이다.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선공 고려장군께서는 호전(호남, 경기지방)에서 복을 쌓아 왕족의 단서를 열었으니, 이는 당나라 무소가 하서지방을 흥성하게 한 것과 같다. 이로써 나라의 근본이 되었다. 그런데 주나라 시조 후직기의 아들 부줄(不窋)이 오랑캐 땅 융적으로 잠시 옮겨 간 것처럼 전주에서 삼척으로 이어하신 것은 때를 기다리기 위한 근신의 시기였다.
이에 은하가 하늘을 밝게 비추며 산천이 빛을 더하여 새로워졌다. 이곳에서 동산의 맑은 가운을 바라볼 정도로 가깝고, 산천이 서로 화합하니 별들이 두 손을 마주잡고 모여드는 것 같다. 수목이 울창한 삼봉(三峰)의 봉우리는 하늘이 내려 준 것에 사람이 귀의하여 위대한 네 명의 왕을 배출한 터가 되었다. 천관(술을 하늘에 올리고 땅에 뿌리는 의식)과 흥부(興俯)의 제사 의식을 거행하는 곳이니 조래산의 소나무이고, 신보산의 잣나무이다.
아! 열성조로부터 먼 조상을 추모하고 받드는 일을 이어 온 것은 보본(補本)의 뜻인데 이는 금석과 같이 굳건한 일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지금에 이르러서야 매우 늦었다는 감을 이길 수 없다. 그 뜻을 비석에 세기고 맑은 술로 제사를 올리니 아! 큰 산과 바다, 모든 신령이 지켜 주시어 우리나라 국운이 별처럼 빛나며 영원토록 이어질 것이다.”
찬바람이 다시 일고, 쨍쨍한 한기가 이중하의 조복을 헤집고 파고들었으나 그의 상기된 두 뺨에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 내렸다. 1899년 음력 11월 25일 미시(未時)였다.
에필로그
대한제국의 역사는 그로부터 10년이 지나 종말을 고한다. 1910년 고종은 518년 성상(星霜)을 지켜 온 조선의 문이 닫히는 것을 무력하게 지켜보아야 했다. 이중하는 고향 양평으로 낙향하여 은거하다가 7년 후인 1917년 눈을 감는다.
나라 아닌 나라에서 내리는 퇴직 은사금 3,000원을 사양하였는데, 합방 기념 훈장과 후작 작위가 내려오자 눈을 감고 일갈하며 돌려보냈다. 후작 작위를 거부하는 뜻으로 계속 눈이 먼 흉내를 내자 일경이 내려 와 송충이를 집어넣으려 하였다. 이중하가 눈을 부릅뜨고 바라보자 일경이 혼비백산 돌아갔다.
이중하의 묘는 경기도 양평 창대리에 있다. 17년 전 준경묘. 영경묘를 봉축하고 거대한 비석을 세운 이중하는 양평의 비석도 없는 묘역에 쓸쓸히 잠들어 있다. 다만 상석을 묘비명 삼았는데, 이렇게 새겨져 있다.
“유한정헌대부장례완산이공중하지묘(有韓正憲大夫掌禮完山李公重夏之墓)
그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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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랑위(兒郞偉)
대들보를 들어 올릴 때 여러 사람이 힘 모아 지르는 ‘어영차’ 소리를 뜻하는 의 성어
* 참고 문헌 및 자료
국역 준경묘 영경묘 영건청의궤(2012년 삼척시립박물관 연구 총서 13. 배재홍 국역서)
조선왕조실록(고종, 준경묘. 이중하 검색 목록)
이중하 문집 중 감계전말(勘界顚末), 백두산 일기(白頭山 日記)
* 이중하는 외교부의 '우리 외교를 빛낸 인물' 선정사업에서 고려의 서희(徐熙), 조선 전기 충 숙공(李藝)에 이어 2011년 세 번째 인물로 선정되었다.
* 토지(土地)의 작가 박경리 선생은 "이미 나라의 지배 밖으로 떠난 유민들의 터 전을 지켜주기 위하여 목숨을 걸고 싸운 조선의 선비" 라면서, 이중하의 기상과 정신을 받들었다.
첫댓글 소설<준경묘설>을 흥미롭게 읽었다. 고대인들은 문자를 몰라도 바위에나 동물 껍데기에다 그들의 행적을 암각했다. 은허문자나 마고굴에 새겨진 그런 것들로 후세 사람들은 그들의 존재와 그들의 행적을 알게 됐다. 문자를 쓸 수 있어도 제 고향의 역사를, 더구나 옛 사적의 보고인 땅 이력마저 기록을 게을리한다면 후세의 찬사를 기약할 수 없다. 이런 논지에서 서성옥의 소설 <준경묘설>은 멍 숲에 빠져있는 우리에게 정맥에 놓아지는 주삿바늘이다. 정사의 발굴은 사학자 영역이고 옛글을 현대문으로 옮기는 일은 번역자 일이며 그것을 현재적 숨결과 가치를 대중에게 전하는 사람은 작가의 몫이다. (이 경우 왜곡투성이인 퓨젼만
아니라면). 이런 관점에서 이 작품은 삼척에서 반드시 써져야 할 소재의 작품라 허투루 읽고 던질 주제가 아님이 분명해 애쓰고 고생했다고 격려하고 싶다. 다만 더 긴 호흡으로 갈 수 있는데 단편으로 마무리 지어 아쉬움이 크게 남는다. 후일을 기다린다. 우선 제목부터 고풍스럽다. 그리고 전체 문장에서 소재의 특성 때문에 한문투 문장은 말 맛으로 차용이 어쩔 수 없다지만 조금 풀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픽션의 확장성이다. 작가의 몫은 정사 <준경묘설>이 아니라 픽션<준경묘설>이다. 또한, 소설 <준경묘설>에서 주인공 이중하는 이인식(李寅植)의 법적 아들이라지만, 소설가 서성옥이 생성해 놓은 양아들이어야 했다. 그만큼
산 자로서 이중하를 창조해야 성공할 작품이었다. 많이 아쉬웠다. 서성옥은 이번 작품에서 보인 문장의 특성은 전번 작품들보다 많이 개선되어 기뻤다. 그의 역사에 대한 진지한 안목과 취향, 성품의 차분함, 또는 문장의 고풍스러운 짜임새로 보아 좋은 역사 소설을 써낼 잠재적인 자질을 엿보인 작품이라 기대를 접지 않는다. 집필에 박수를 보낸다.
격려에 감사 드립니다. 더욱 정진하여 편달에 답하는 후학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2012년 준경.영경묘 의궤 국역서를 보면서 [의궤]에 국역에 든 못 하나 미투리 하나 모두 소중히 기록되어 오늘에 전해진다는 것이 대단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국역서조차도 쉽게 읽히는 것이 아니라서 소설의 형식으로 재 편집하고 싶었습니다. 이중하 선생의 극적인 삶도 소설을 쓰게 된 추동력이었습니다. 주인공이 일제 봉작을 받은 사람이라면 이 글은 불발되었을 것입니다. 삼척인의 긍지를 갖게 된 준경묘 [의궤]입니다.
오늘 잡지 <<시선>>에 실린 사랑하는 후배 서성옥 작가의 소설 <준경묘설>을 오후 시간을 투자하여 모두 읽었다오. 읽고 난후 느낌은 서 작가를 시가 아닌 소설로시키기를 잘 하였다는 생각, 전에도 말했듯이 열심히 쓰는 불길만 붙으며 좋은 작품을 쓸 수 있다는 생각, 이번처럼 자료를 찾아서 쓰는 역사소설이나 기록소설 같은 것을 쓰면 좋은 작품을 쓰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다만, 역사적 사실 나열을 좀 줄이고, 허구성 장이 숙제로 남네요. 좋은 소설가가 되리라 믿어요. 우리지역의 가치있는 소재를 발굴하고 조사하여 작품화 한다는 것은 받는 의식있는 작가라 할 수 있지요.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