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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호 복음묵상
정성훈 신부 (직장사목부)
[10/5 첫째 주](연중 27주일, 마르 10, 2 - 16)
“둘이 한 몸”
흔히 부부사이를 가리킬 때 ‘내외간’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촌수 역시 ‘무촌’입니다. 묘하게도 이 표현들 역시 “둘이 한 몸”이라는 성서의 말씀과 맞아 떨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라는 것, 고정된 무엇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뜻하는 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여기에는 하나가 되기 위한 부단한 노력, 곧 과정이 필요합니다. 대화와 함께 하려는 노력 없이 하나이기를 바란다면 이는 상대를 억지로 자신의 틀에 끼워 맞추려는 우를 범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이혼’이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는 것도 여기에서 연유하는 바가 많을 것입니다. 하나이기 위해 얼마나 노력을 기울이는지 우리 자신의 모습을 한 번 돌아봅시다.
[10/12 둘째 주](연중 28주일, 마르 10, 17 - 30)
“무엇을 해야”
구원은 선한 행위에 대한 대가가 아니라 선물입니다. 따라서 소유하려고 해서 소유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복음 속의 젊은이처럼 구원을 보증할 수 있는 행위가 무엇인지를 궁금해 하고, 거래를 하려고 해서 문제가 됩니다. 구원이 하느님 안에서, 그분과 더불어 사는 삶이라고 할 때, 하느님을 벗어나서는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구원은 참여하는 것, 곧 하느님 삶의 방식에 참여하는 것이며, “가지고 있는 재산을 이웃들과 나누고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이러한 점을 잘 알려 주고 있습니다. 아직도 구원을 소유하려는 이런 우매한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10/19 셋째 주](전교주일, 마태 28, 16 - 20)
“너희는 가서”
마케팅 전략에서는 ‘홍보’라는 것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합니다. 아무리 좋은 물건이라도 알려지지 않으면 구매자가 생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널리 알린다는 이 홍보에는 전제되어 있는 원칙이 있습니다. 바로 어떤 방식으로든 ‘찾아 간다는 것’입니다. 이런 원칙은 우리 삶의 모습에서도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찾아 간다는 것은 적극적인 삶의 모습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소극적으로 오는 사람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찾아나서는 것, 굳이 신앙의 전파와 연관시키지 않더라도 자신과 관계하고 있는 주변 사람들과 돈독함을 유지하고 싶다면 잊지 말아야 할 부분입니다. 나는 ‘찾아가는 사람’인지 생각해보아야 하겠습니다.
[10/26 넷째 주] (연중 30주일, 마르 10, 46 - 52)
“나에게 바라는 것”
“하고 싶은 게 뭡니까?” 언제부터 밴 습성인지는 모르겠지만 음식을 함께 먹거나 무언가를 함께 할 선택의 시간에 으레 제 입에서 나오는 말입니다. 좋게 보면 상대에 대한 배려와 겸양의 차원에서 습득된 것인데, 때로는 그 때문에 상대의 답을 들을 때까지 한참을 고민하기도 해야 합니다. 이렇다 보니 생활과 삶에 있어서도 사제가 된 이후부터-정확히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제 자신이 실제로 무엇을 바라며, 어떤 비전을 갖고 살아가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은 경우에 따라 우유부단하게 비춰질 때가 많습니다. 참으로 삶에 있어서 무엇을 바라고, 무엇을 바라보며 살고 있는지 진지한 숙고가 필요하지 않은가 싶습니다.
11월호 복음묵상
정성훈 신부 (직장사목부)
[11/2 첫째 주](연중 31주일/위령의 날, 마태 11, 25 - 30)
“편히 쉬게”
‘위령의 날’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먼저 말 그대로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곧 연옥교리와 ‘모든 성인의 통공’(communio sanctorum, 하느님 안에서 세례 받은 모든 이-천상의 성인들, 연옥 영혼들, 지상의 그리스도인들-의 일치를 뜻한다)이라는 가르침에 따라 스스로는 더 이상 공덕(功德)을 쌓을 수 없는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는(공덕을 쌓는) 날이며, 다음으로 모든 전례가 그러하듯 천상교회를 바라보며 살아있는 우리 자신을 위한 날입니다. 오늘 하루 세상을 떠난 분들이 하느님 안에서 편히 쉬실 수 있도록, 또한 우리 역시 하느님 뜻에 맞갖은 삶을 살도록 기도하며 보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11/9 둘째 주](연중 32주일, 요한 2, 13 - 22)
“아버지의 집”
지난 여름휴가 때 친분이 깊은 한 신부님과 함께 ‘다이어트 휴가’라는 명목을 세우고 백두대간 종주의 한 구간인 두타․청옥산을 등반했습니다. 평소와 다르게 제대로 된 지도도 준비 못하고 물도 부족한데가 길에서 뱀까지 만나고, 하산 길을 찾으며 구름 사이를 오락가락하던 3시간 여 동안의 끔찍스러웠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렇게 고생스런 산행을 끝내고 마주친 민가는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로 정겨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성전을 ‘아버지의 집’으로 바라보는 예수님의 마음을 조금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한 곳을 우리는 어떤 장소로 보고 있는지, 의무감 때문에 마주쳐야 하는 장소로 보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11/16 셋째 주](연중 33주일/평신도 주일, 마르 13, 24 - 32)
“보고 배워라”
보고 배운다는 것은 곧 깨닫는다는 것을 일컫습니다. 그런데 우리네 삶을 보면 다른 부분은 안 그러면서 유독 신앙에 있어서 만큼은 떠 먹여 주기를 바라는 유아기적 모습을 답습하고 있는 경우를 많이 접하게 됩니다. 신앙은 자라나는 것인데도 별반 시간과 노력의 투자 없이 확정된 답을 원하고, 그 때문에 미신적인 부분에도 쉽게 빠지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신앙 역시 인간의 체험을 통해 표현되기에 보고 배우려는 노력이 수반되어야 할 것입니다.
[11/23 넷째 주](연중 34주일/그리스도왕 대축일, 요한 18, 33 - 37)
“네가 왕이냐?”
신앙생활을 하며 바라는 바를 얻지 못한 실망감으로 차 있는 교우들을 종종 보게 됩니다. 원의가 있어야 움직일 수 있으므로 이는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무릇 원의는 대의(大義)를 담을 수 있어야 하며, 그릇된 바람은 하느님을 자기방식으로 가두어 두려 하기 때문에, 자신이 바라고 있는 것에 대한 점검과 묵상은 꼭 필요합니다. 그렇지 못한 경우 실망으로 가득 차 “당신이 왕입니까? 그런데 …”라는 빌라도의 우매한 질문을 되풀이하게 될 것입니다.
[11/30 다섯째 주](대림 1주일 루가 21, 25 - 28. 34 - 36)
“몸을 일으켜 머리를 들어라”
꼭 무슨 성과를 바라고 일하는 것은 아니지만 직장사목을 하며 늘 느끼는 부담감은 ‘무엇을, 얼마나, 더 해야 하는가?’ 라는 부분입니다. 그러던 중 모처럼 후배 신부님과 이야기를 나누며 새롭게 희망을 퍼 올릴 기회가 있었습니다. 교우회를 꾸려 가며, 가정사와 업무에 쫓기며 점점 의미를 잃어가는 우리도 한 번은 묵상해볼 내용입니다. 구원은 하느님의 힘이며, 그분의 일이기에 인간의 역할은 몸을 일으켜 그에 동참하는 것임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12월호 복음묵상
정성훈 신부 (직장사목부)
[12/7 첫째 주](대림 제2주일/인권주일 루가 3, 1 - 6)
“주의 길을 닦고”
가끔씩 우리는 정작 열심히 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받게 되는 몰이해와 곡해 때문에 “나 혼자 이렇게 산다고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라고 체념 섞인 자문을 할 때가 있습니다. 이럴 경우 정말 힘이 듭니다. 이에 대해 복음 말씀은 다음의 내용을 기억하며 힘을 내고 이겨 나갈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는 주님의 길을 닦고 있는 중이라는 것, 길을 닦아 나가는 사람은 힘들 수밖에 없지만 마치 아브라함 이야기 속의 의인 10명(창세기 18장 참조)처럼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구원을 보게 하기 위한 작업을 하는 중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우리에 앞서 옛 예언자들과 사도들 역시 주님을 위해 같은 체험이 있었습니다.
[12/14 둘째 주](대림 제3주일/자선주일 루가 3, 10 - 18)
“우리는 어떻게”
얼마 전 진지하게 직장사목부에 대한 저의 모습을 생각해본 적이 있었습니다. 3년 여 동안 일을 해왔는데, 왜 별반 발전이나 변화가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지, 혹 제 자질이 부족한 것은 아닌지 말입니다. 결국 얻게 된 답은 ‘결과에 얽매이지 말고 노력하며 최선을 다하자.’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주님을 맞을 자세에 대해 알려주고 있습니다. 내용은 자신이 서 있는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선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삶의 모습에 대해 우리는 알게 모르게 누군가로부터 정답을 구하고 있지만 사실 대답은 같을 수밖에 없으며, 스스로의 처지는 자신이 가장 잘 알기에 결국 이에 대한 답도 앞으로의 준비도 스스로 해야 할 것입니다.
[12/21 셋째 주](대림 제4주일 루가 1, 39 - 45)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으니”
성모님의 태도는 하느님을 대하는 바람직한 우리의 태도, 곧 믿음에 대해 잘 알려 줍니다. 일은 하느님께서 하시기에 그분의 일에 동참하는 우리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꼭 이루어지리라’ 믿고 맡기는 태도입니다. 따라서 믿음은 우리 가운데 하느님의 자리를 만들어 드리는 행위임을 다시금 상기해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 대림시기를 보내며 우리 가운데 이런 자리가 마련되어 있는지 살펴 볼 수 있었으면 싶습니다. 삶에서 느껴지는 허전함은 하느님으로 채워져야 할 이 부분, 곧 하느님께 유보되어 있는 그 자리가 다른 것으로 차 있기에 그런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12/28 넷째 주](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루가 2, 41-52)
“왜, 나를 찾으셨습니까?”
“당신들은 왜, 나를 찾으셨습니까?”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에게 던져지는 하나의 근원적인 질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정말로 우리는 무엇 때문에 그분을 찾고 있는가? 이는 신앙에 있어 꼭 한 번은 대답하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질문입니다. 삶의 모습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다면 우리 역시 ‘아버지의 집’을 떠났던 작은 아들(루가 15장 ‘잃었던 아들’ 참조)처럼 떠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달력으로 한 해를 마감하는 마지막 주님의 날입니다. 나는 정작 무엇 때문에 그분을 찾고 있는지 답을 찾아 나가며 한 해의 삶을 정리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1월호 복음묵상
도현우 안토니오 신부 (직장사목부)
[1/4 첫째 주](주님공현대축일 마태 2, 1-12)
“그분의 별을 보고”
진리를 향한 삶의 표지가 되어줄 그러한 별이 우리에게 있는가. 나는 어떤 삶의 방향을 갖고 있는가. 우리는 올해 어떤 별을 바라보며 걸어갈 것인가. 어떤 별에 나의 운명을 걸 것인가. 우리가 과연 힘없는 갓난아기에게 머리를 숙여 무릎을 꿇고 경배할 수 있겠는가. 나는 진리를 얻고 만나기 위해서 동방박사들처럼 과감히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아니면 나만의 안위와 더 큰 부와 권력의 축적을 위해 다른 이들을 희생시키고 진리를 외면할 것인가. 이러한 질문들을 동방박사들과 헤로데를 비교해 가며 새해를 시작하는 자신에게 던져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1/11 둘째 주](주님세례축일 루가 3,15-16. 21-22)
“예수께서도 세례를 받으시고”
많은 시간을 누군가와 함께 보내면서도 여전히 두려움을 갖고 있다면 불행한 일입니다. 두려움이 없으면 자유롭습니다. 그 사람과 자유롭다는 것은, 버릇없이 마음대로 대한다는 것이 아니기에 존엄과 존경을 포함합니다. 나쁜 짓을 하는 것까지 그냥 못 본 채 내버려두는 것도 아니기에 정의를 지킵니다. 사회 현실 속에서 정의가 망각되고 인간이 존엄하게 여겨지지 않는 것도, 두려움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를 대하시든 경계심이나 두려움이 없으셨습니다. 그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더럽고 구질구질한 마구간의 탄생을 마다하지 않으시고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시면서 세리와 창녀들과 가까이 하셨을 뿐만 아니라 죄인들이 받아야할 세례까지도 받으셨습니다. 죄인인 인간을 위해서. 진정한 자유인 예수가 그리운 시대입니다. 그분을 보며 다시 생각합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1요한 4,18)
[1/18 셋째 주](연중 제2주일 요한 2, 1-11)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못 먹는 술을 강요받거나 혹은 물잔에다가 슬쩍 술을 붇고 다시 소주잔을 돌리며 거짓 웃음을 지어야 한다거나 아니면 너무 잦은 술자리로 건강을 해칠 정도라면 곤란하겠지만, 순기능을 생각하여 말한다면 “아줌마, 여기 소주 2병 더!”라는 외침은 흥겨운 자리의 표현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잔치건 간에 술이 빠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인륜지대사라고 하는 혼인 잔치에 그만 술이 떨어져 버렸습니다. 일찍이 가브리엘 천사의 전갈을 듣고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응답하셨던 마리아께서, 이런 곤혹스런 상황을 보시고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잔치의 흥겨움과 기쁨을 선사하시는 분이 누구신지를 보도록 이끄신 것입니다. 술 없는 잔치가 되지 않도록, 즉 우리의 삶이 기쁨 없는 생활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 지를 성모님이 가르치십니다.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1/25 넷째 주](연중 제3주일 루가 1, 1-4; 4,14-21)
“억눌린 사람들에게”
쌀쌀한 날씨 명동 들머리에서 서투른 한국말로 노동가요를 부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불법체류 신세가 되어버린 이들의 애처로운 외침입니다.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한국에 왔지만 가족 친지들을 부양하기 위해 꼭 받아야 할 임금을 받지도 못하고 갑작스레 쫓겨가야 할 그들의 막막함과 분노를 외면하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내가 배부르기 위해 남을 희생시키고, 내가 평화롭기 위해 남의 평화를 짓밟고, 내가 싫은 것을 남에게 떠넘기는 모습이 일상화되지 않도록, 그래서 이 땅이 고통의 땅이 아닌 희망의 땅이 될 수 있도록 우리의 이기적인 마음을 쓸어내기를 청합니다.
2월 복음묵상
도현우 안토니오 신부 (직장사목부)
[2/1 첫째 주](연중 제4주일 루가 4, 21-30)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작년에 군수 출신이 장관이 된 것을 가지고 어느 국회의원이 장관에게 이런 말을 했던 것을 TV에서 보았습니다. “당신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줄 아는가?” 물론 어떤 자리가 있다면 그 자리에 어울릴만한 자질과 역량을 갖춘 인물이 그 자리에 있어야 하고, 그에 걸맞지 않는다면 비판받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다른 검증보다 출신이나 학벌을 기준삼아 판단한다면 과연 오류가 없을까. 복음에 보면, 예수님의 의젓한 모습에 대한 고향 사람들의 반응이 나옵니다. “이제 보니 예수는 고작 우리가 알고 지냈던 목수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출신을 확인해 보고 칭찬했던 태도를 바꾸어 예수님을 무시하고 배척하게 됩니다. 그곳을 떠나셨던 예수님이 꿈꾸셨던 세상은 어떤 세상이었을까요?
[2/8 둘째 주](연중 제5주일 루가 5,1-11)
“두려워하지 마라”
“주님은 빛이시다.”라는 말을 씁니다. 당신 빛으로 어둠 속을 헤매고 있는 우리를 비추시어 우리가 어둠을 벗어나 광명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주님을 만난다면, 우리는 빛을 만나는 것이 됩니다. 그 빛이 나를 비추면서 내 모든 것이 드러납니다. 나의 어둠도 드러납니다. 평소 잘 보지도 의식하지도 못했던 죄의 얼룩과 어둠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주님의 뜻과는 너무나 멀리 살아왔던 자신이 죄인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자신의 추악한 모습을 확인하며 하느님 앞에 선다는 것이 불경스럽고 천벌 받을 일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자신을 발견한 자에게 주님은 다가가시며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2/15 셋째 주](연중 제6주일 루가 16, 17. 20-26)
“너희는 행복하다”
20년 동안 레지오 주회를 1000차 개근한 교우에 대한 기사를 보았습니다. 여행도 6일 이내 일정만을 잡고, 장인 장모도 주회가 있는 화요일을 피해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주님의 은총을 생각하면서 동시에 본인의 노력도 대단했었음을 알게 합니다. 여러 가지 병을 가지고 있었지만 건강이 회복됐고, 어려웠던 사업도 본궤도에 오르게 되었다는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작은 것을 드리면 큰 것을 주신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주님을 중심에 두고 살면 행복이 따라올 것이라는 신앙체험이기에, 예수님의 행복선언이 못미더웁다가도 다시 관심이 갑니다.
[2/22 넷째 주](연중 제7주일 루가 6, 27-38)
“남을 용서하여라”
어려운 경제 탓에 빌려준 돈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많아져 원수지는 일이 생깁니다. 교우들 사이에서도 이런 일이 벌어지자 어느 신부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웬만하면 금전거래를 하지 않으면 좋으나 어쩔 수 없이 꾸어주어야 할 경우 돌려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그 만큼만 꾸어주라고. 지나온 역사를 보면, 미움과 보복은 또 다른 폭력을 낳고 끝없는 비극의 악순환을 만들어냅니다. 따라서 용서의 행위는 불완전한 인간의 정의를 보완하여 보다 인간다운 세상을 향하게 합니다. 어렵지만 악을 악으로 갚지 않으려는 우리의 노력을 기도로 청해봅니다.
[2/29 다섯째 주](사순 제1주일 루가 4, 1-13)
“내 앞에 엎드려”
후배가 이런 농담을 건낸 적이 있었습니다. “고개는 숙이라고 있는 것이고, 무릎은 꿇으라고 있는 것이지요.” 농담이었지만 나름의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점점 에고(自我)가 강해지고 늘 남 앞에 당당해야한다고 강조하기 때문인지, 자신을 낮춘다는 것에 대한 의식이 줄어들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강조가 자체로 나쁜 것은 아니지만 자칫 그것을 이용한 사탄의 유혹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하느님 앞에서조차 목에 힘을 줄 지 모릅니다. 사순절을 시작하면서 십자가에 매달려 계신 주님을 바라보며 그 앞에 무릎을 꿇어보면 어떨까요. 그분 앞에 자신을 낮추는 것이 부끄러운 일은 아닙니다.
[3월 복음묵상]
도현우 안토니오 신부 (직장사목부)
[3/7 첫째 주](사순 제2주일 루가 9,28-36)
“얼마나 좋겠습니까”
삶이 긴장의 연속이거나 혹은 타성에 젖다보면 어떤 푸념 섞인 바람을 가져봅니다. 언제까지 이렇게 아등바등 살아야 하는가. 언제쯤이면 고민 없이 갈등 없이 살 수 있을까. 아침에 무거운 몸을 일으킬 필요 없이 좀 편하게 살 수 있을까. 이런 심정으로 답답한 생활에서 빨리 탈출하고 싶어서일까요? 사람들 중에는 지나치게 로또복권 당첨 같은 극적인 인생역전을 꿈꾸는 이들이 있습니다. 세상은 인간의 본능에 대고 쉽고 편하게 살도록 보챕니다. 그러나 복권 당첨으로 거액을 거머쥔 사람치고 제대로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 없다는 통계처럼 인생의 참기쁨은 현실을 받아들이고 순리에 어긋나지 않는 데서 찾아오겠지요.
[3/14 둘째 주](사순 제3주일 루가 13,1-9)
“회개하지 않으면”
고해성사를 소홀히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특별히 통회하며 고해할 거리를 찾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정말 깨끗하고 성실하게 살았기 때문인 사람도 있지만 아마도 많은 이들이 사실은 죄의식이 약해지고 무감각해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성찰의 기회를 갖기 위해 정기적으로 고해성사를 보는 것이 필요함을 제기합니다. 한 번은 고해성사를 본 후 보속으로 “희생이나 극기”를 받았습니다. 왠지 모르게 새롭게 들렸습니다. 그만큼 희생이나 극기와는 멀게 살았다는 얘기였습니다. 실천해 보니 역시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본능을 조절하고 악습을 멀리하는 데 도움을 주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회개가 그냥 관념 속의 다짐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역시 삶의 변화가 따라야 하는가 봅니다.
[3/21 셋째 주](사순 제4주일 루가 15,1-3.11-32)
“다시 찾았다”
우리는 많은 경우 매우 어리석습니다. 건강할 땐 건강의 소중함을 모르고,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있을 땐 그 사람의 소중함을 모르고,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하느님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것이 가장 큰 행복임을 깨닫지 못하며 삽니다. 톨스토이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하느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사랑이 많은 사람은 하느님을 믿기가 어렵지 않다.” 큰 아들의 생각은 공평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의 생각 이면에 이런 어리석음이 있습니다. 모든 것이 그의 것인데도 그의 것이 아닌 냥 종처럼 일해서 자기 것으로 얻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동생은 실패와 자포자기를 경험했지만 하느님을 알게 되었고, 형은 여전히 애정을 갈구하며 동생을 질투합니다. 큰 아들이 불행한 이유는, 하느님을 알지 못하고 하느님과 함께 하지 못하고 사랑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행복할 수 없었습니다.
[3/28 넷째 주](사순 제5주일 요한 8,1-11)
“그들은 다 어디 있느냐”
내노라하는 정치인들이 구속수감 되고 있습니다. 비판받아 마땅한 자들이 있기 때문에 욕하고 손가락질하는 것이 당연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왜 그런지, 욕하고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많은 부분 힘있어 보이지 않습니다. 사회정의를 외쳐대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과연 난 정의로운가를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위선이라면 아무리 비판을 가해도 반발이 있을 뿐 변화되지는 못합니다. 무책임한 폭로만 있다면 그에 따른 피해와 부담을 엉뚱한 사람이 떠안게 됩니다. 우리는 진정 정의를 알고 있습니까.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까. 잘 모르고 살지 못한다면 역시 우리는 하느님에게 눈을 돌려야 합니다. 그분이 가르치고 계십니다.
[4월 복음묵상]
안경수 사도요한 (편집부/외환은행)
[4/4 첫째 주](주님 수난 성지 주일/루가 22,14-23)
“별러 왔는지”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만찬 때에 “너희와 이 과월절 음식을 함께 나누려고 얼마나 별러 왔는지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본인이 당하실 일을 아시면서도 별러 왔다며 마지막 밤을 담담히, 그리고 계획하신대로 맞으시는 모습을 봅니다. 우리는 우리들의 십자가를 하느님의 계획으로 인정하고 담담히 맞아들이는지 생각해 봅니다. 내 십자가가 아니라고, 아닐 거라고, 피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어차피 져야만 하는 십자가 때문에 불필요한 갈등과 고통을 덤으로 어깨에 지고 가는 것이 아닌지요. 그냥 지고 가면 그 갈등과 고통만큼은 가벼워질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나의 십자가는 무엇일까요.
[4/11 둘째 주](예수 부활 대축일/요한 20,1-9)
“깨닫지 못하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빈 무덤에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다른 제자가 갔으나 흩어진 수의와 잘 개켜진 머리를 싼 수건을 보고도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반드시 살아나실 것이라는 성서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성서를 읽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늘 그 참 뜻을 바로바로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겸손해야 하지 않을까요. 흔히 신앙에 자신 없어 하는 모습도 많이 보지만 함부로 신앙을 이야기하는 사람도 주위에서 봅니다. 우리가 비슷한 성서내용을 미사시간에 반복해서 듣고 성서읽기를 꾸준히 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이런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성서 말씀을 자꾸 접하게 되면서 우리는 그때까지 깨닫지 못했던 참된 말씀의 뜻을 알아가게 되고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격려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4/18 셋째 주](하느님의 자비주일/요한 20,19-31)
“평화가 있기를”
안식일 다음 날 저녁 제자들이 모여 있는 집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하고 인사를 하셨습니다. 또한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입으로 평화를 이야기 하면서 행동으로 평화를 남에게 주지 않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남에게 평화를 주고, 남과 평화롭게 지내는 방법을 주님께서는 예전에 가르쳐 주셨습니다. 남들이 내게 해주기를 바라는 대로 내가 남에게 해주면 되는 것입니다. 직장생활 중에 이직을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는 직장동료와의 불편한 관계라고 합니다. 직장생활에 평화가 없다는 얘기일 것입니다. 직장인이 집에서보다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이 일터입니다. 일터에서 평화를 얻지 못하면 일생의 큰 부분을 평화롭게 지내지 못하는 것이 됩니다. 평화를 위해 직장으로 파견된 우리들의 모습을 생각해보고 직장내 평화를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4/25 넷째 주](부활 제3주일/요한 21,1-19)
“생선을 굽고 계셨다”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시키신 대로 배 오른편으로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아 육지로 돌아왔을 때 예수님께서는 숯불을 피워 놓으시고 그 위에 생선을 굽고 계셨고 빵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제자들을 위해서였습니다. 그 제자들은 예수님이 돌아가신 다음에 무서움에 떨며 예수님 곁을 떠났던 참으로 신앙이 부족했던 자들이었고, 특히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을 부정했고 좀 전에 예수님을 발견하고는 놀라 물 속에 뛰어든 베드로도 있었습니다. 그들을 위해 먹을 것을 준비해 놓고 그들이 육지로 올 것을 기다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제자들에게 가까이 오셔서 빵을 집어 주시고 또 생선도 집어 주셨습니다. 그분이 하신 말씀은 “왜 나를 버리고 떠났느냐?”가 아니고 “와서 아침을 들어라”였습니다. 아마도 꾸지람보다도 더 큰 채찍이 그들 가슴에 와 닿았을 것입니다. 진정 예수님은 용서와 사랑이십니다. 우리 어머님들의 모습이 함께 떠오릅니다.
[5월 복음 묵상]
안경수 사도요한 (편집부/외환은행)
[5/2 첫째 주](부활 제4주일/요한 10,27-30)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양들은 자기를 이끄는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습니다. 다른 목자의 양들만이 그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성직자들의 입을 통해, 세상의 현명한 자들을 통해 주님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주님의 목소리를 듣고도 그분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한다면 우리는 스스로 주님의 양들인가를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의 숨은 참뜻을 깨달을 때 진정한 주님의 양들이 될 것입니다. 주님의 목소리를 알아듣게 하소서.
[5/9 둘째 주](부활 제5주일/요한 13, 31-33, 34-35)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본인을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을 통해서 그들이 제자임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는 모습을 통해서 세상 사람들이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임을 알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말로만 신앙을 고백하면서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도 사랑하라고 주님께서는 가르쳐 주셨습니다. 제게서 나는 깊은 사랑의 향기가 타인에게 참 신앙인의 모습으로 나타나길 빕니다.
[5/16 셋째 주](부활 제6주일/요한 14, 23-29)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
세상이 주는 평화는 채워가는 것에 있지만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비워가는 것에 있습니다. 세상이 주는 평화는 채우는 것이기에 또다시 부족할 것을 염려하지만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부족할수록 더욱 깊은 평화를 얻기에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서로 자신을 비워 남의 부족한 것을 채워주는 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5/23 넷째 주](부활 제7주일/루가 24, 46-53)
“하늘로 올라가셨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로 올라가셨지만 다른 모습으로 우리와 늘 함께 계십니다. 진리라는 모습으로, 우리보다 못한 이웃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사랑을 베푸는 선인의 모습으로.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을 받고, 또 예수님이 되어 사랑을 베풉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사신다고 하셨나 봅니다. 내 자신을 거룩하게 해서 주님께서 함께 거룩해지시길 기도합니다.
[5/30 다섯째 주](청소년주일, 생명의 날/요한 20, 19-23)
“용서받지 못한 채 남아있을 것이다”
우리가 용서를 하지 않으면 그들은 용서를 받지 못한 채 남아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용서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용서는 남을 위한 것보다도 자신을 위한 것이 큽니다. 자신을 위해 그들을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는 하되 잊지는 말아야 될 일이 있겠죠. 용서를 합시다. 분명히 누군가는 나를 용서해 주었을 것입니다.
[6월 복음 묵상]
안경수 사도요한 (편집부/외환은행)
[6/6 첫째 주](연중 제10주일/요한 16,12-15)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께서는 하실 말씀이 많으셨지만 우리가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에 말씀을 적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깨달아 알고 있는 것들을 모두 사람의 말로 표현할 수가 없으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가 이해하기 쉽도록 비유를 통해서 가르쳐주셨나 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진리를 깨닫는 것은 성령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성경을 접하면서 조금씩 그 말씀을 알아나가다가 갑자기 많은 것을 깨닫는 때가 있는데 아마도 그 때 우리에게 성령께서 내려오시는 것 같습니다. 성령께서 머무시는 우리 자신이 계속 거룩해질 수 있기 위해 늘 기도하고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6/13 둘째 주](연중 제11주일/루가 9,11-17)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은 마술이 아니었습니다. 참된 기적은 모여 있는 군중들의 마음을 열어서 각자 가져온 음식을 내놓게 한 것이었습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오천 명이나 먹고도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찬 것은 각자 먹으려고 가져온 음식들을 남들의 위해 바구니에 내놓았던 군중들의 나눔이 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제자들이 군중을 헤쳐 먹을거리와 잠자리를 해결하자고 할 때 예수님께서는 사람들 속에 있는 나눔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고 제자들의 것부터 내놓게 하여 나누어 주셨던 것입니다. 나눔의 힘을 보여주신 정말 큰 기적이었습니다.
[6/20 셋째 주](연중 제12주일/루가 9,18-24)
“제 십자가를 지고”
교회를 찾는 가장 이유 중 가장 많은 것이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랍니다. 이 세상 모든 일이 자기 맘대로 된다면 얼마나 무미건조하고 재미가 없겠습니까. 아마도 세상이 재미있고 가치가 있는 것은 자기 맘대로 안 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피할 수 없는 것이 자기의 십자가라고 했습니다. 검은 머리카락과 누런 피부를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듯이 내 주위의 어려움들을 받아들이는 것 또한 마음의 평화를 얻는 좋은 방법일 것입니다. 노력을 통해 벗어날 수 있는 것들은 벗어나라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시간이라는 것도 주셨습니다.
[6/27 넷째 주](연중 제13주일/루가 9,51-62)
“쟁기를 잡고 뒤를 자꾸 돌아다보는 사람”
모든 일은 따져보면 우선순위가 정해져 있기 마련입니다. 가끔은 그 순서를 정하기가 어려울 때가 있지만 말입니다. 쟁기를 잡았을 때는 밭을 가는 데만 신경을 써야겠죠. 현실과 동떨어진 많은 유혹들이 우리 등 뒤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가장 중요한 일을 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우리가 지금 잡고 있는 쟁기는 무엇이고 뒤돌아서 보고 싶어 하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 봅니다. 가정이나 직장에서도 마찬가지로 쟁기로 갈아야 할 밭이 있을 것입니다. 그 밭을 제대로 가는 것이 바로 지금 우리의 역할인 것입니다. 한 밭을 다 갈면 다른 밭이 우리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그럼 그 밭에서 우리는 수확을 하게 됩니다.
[7월 복음 묵상]
김기종 요셉(알바트로스/직장인금요미사 봉사자)
[7/4 첫째 주](연중 제14주일/마태오 10, 17-22)
“끝까지 참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
사람의 능력을 측정하는 지표 중에 역경지수라는 것이 있습니다.
역경지수(AQ : Adversity Quotient)란 어려운 상황을 극복해나가는 능력을 말합니다. 역경지수는 리더쉽과도 일맥상통하며, 어려울 때 더 필요하고 빛을 발하는 덕목입니다. 우리 신앙인에게도 이런 신앙의 역경지수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어려움과 고통이 있을 때,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그 어려움과 고통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과 신앙을 더욱 성숙시키는 은총의 시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그 어려움과 고통의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지고 극복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당신의 성숙한 아들로 만드시려는 심오한 계획이 있기 때문 입니다.
“저의 세상살이가 고달프고 힘들 때마다 하느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를 치유하십니다.”
[7/11 둘째 주](연중 제15주일/루가 10, 25-37)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요즘 사람들을 만나면 IMF 때보다 더 힘든것 같다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신문을 보면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고통당하는 이웃들의 기사가 많습니다. 이럴때일수록 우리 모두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역할이 요청 되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분명히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라는 말씀을 통하여 모든 고통 받는 사람들을 자기 자신과 동일시함으로써, 위타적(爲他的)삶이 바로 예수님의 삶을 따르는 길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 주위의 고통받는 이웃들과 함께 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우리 모두 “맘짱(이웃을 배려하고 도울 줄 아는 따뜻한 마음을 지닌 사람 )” 이 되어 봅시다!!!
[7/18 셋째 주](연중 제16주일/루가 10, 38-42)
“참 좋은 몫을 택했다”
교회에서 봉사를 하다보면 마르타와 마리아가 우리의 모습으로 비추어집니다. 너무 많은 일에만 중점을 두거나 아니면 기도만을 치중하는, 균형잡힌 봉사보다는 한쪽으로 치우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기도와 영적 독서를 통해서 영적인 힘을 받고 그 영적인 힘으로, 많은 일에 봉사를 하는 자세가 필요 한 것 같습니다. 또한 삶의 현장에서도 우리의 신앙과 직업에 대한 전문성을 갖춘 균형잡힌 모습이 요구 됩니다.
“평신도들이 세상에 그리스도의 정신을 침투시켜야 할 뿐만 아니라 모든 일에 있어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불림 받았음을 천명한다.” (사목헌장 43항)
[7/25 넷째 주](연중 제17주일/루가 11, 1-13)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
기도는 우리 신앙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태어나서 죽을 때 까지 우리가 주님께 바치는 기도를 세워본다면 기억도 못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바치고 있는 기도 지향의 대부분이 나 중심적인 것에 있음을 반성하게 됩니다. 우리는 머리로 주님을 생각하는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께 바치는 기도는 주님의 뜻이 우리 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바램 안에 주님의 뜻을 이루려는 우리 머리위에 주님을 두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마치 “사람에게 기도하시는 하느님” 처럼 말입니다.
이제부터는 “해 주세요, 들어주세요” 라는 기도보다는 “당신의 뜻이 내 안에서 이루어지소서” 라는 기도로 바뀌어지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8월 복음 묵상]
김기종 요셉(알바트로스/직장인금요미사 봉사자)
[8/1 첫째 주](연중 제18주일/루가 12, 13-21)
“자기를 위해서는 재산을 모으면서도”
우리의 현실 속에 재산(물질)의 중요성은 강조하지 않더라도 모두 중요하게 느낄 것 입니다. 문제는 재산(물질)에 대해서 우리가 어떤 기준을 가지고 생활(사용)하고 있는지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혹시 나만을 위한, 나와 관계된 사람들만을 위해서 사용하고 있지는 않은 지 반성해 봅니다. 어려운 때 일수록 우리가 받은 것을 이웃과 함께 나눌 수 있는 열린 마음이 요청 되는 것 같습니다.
“신앙인들은 검소한 경제생활로 청빈의 덕목을 증거하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특히 토지나 주택의 보유와 거래를 재산 증식의 기회로 삼는 일은, 집 없는 가난한 이들을 더욱 고통스럽게 하는 대죄임을 명심합시다.” (서울대교구 사회사목부 신빈곤 담화문)
[8/8 둘째 주](연중 제19주일/루가 12, 32-48)
“항상 준비하고 있어라”
무엇인가를 준비하다보면 목표를 세우게 되고 거기에 우리의 관심과 노력들을 집중합니다. 그러나 신앙인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에게 제일 중요한 하느님 나라에 대한 실천에 대해서는 소홀한 면이 많은 것 같습니다. 매일 매일의 삶을 통해 그 안에서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 사랑의 기억들과 부르심에 응답하지 못한, 부족한 우리 모습들을 돌아보는 삶의 자세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8/15 셋째 주](성모승천대축일/루가 1, 39-56)
“마리아”
마리아의 삶에서 우리가 어떤 것을 배울 수 있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것은 자신의 온 마음으로 오직 하느님의 뜻만을 원하고 비록 자기 자신이 이해하지 못했을 지라도, 하느님께서 마리아를 사랑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으며 “예” 라는 응답으로 하느님의 뜻을 따른 “충실한 믿음의 삶” 에 있습니다. 그래서 성모님은 우리에게 예수님을 선물로 주신 것처럼, 우리들 자신도 하느님의 뜻을 따름으로서 세상에 예수님의 사랑을 보여줄 수 있는 것 입니다. 우리도 내가 있는 삶의 자리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뜻을 실천함으로써 또 하나의 성모님이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8/22 넷째 주](연중 제21주일/루가 13, 22-30)
“구원의 문”
우리가 바라고 있는 구원이란 무엇인가 생각해 봅니다. 죽음 이후의 내세(來世) 아니면 현실 안에서의 행복? 어디에 관심이 많은지요. 구원이란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그 분의 힘으로 새로운 힘을 얻어, 우리들이 기쁘게 살아가는 삶의 모습인 것 같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고통의 십자가를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하고 실천하는 선택과 결단이 요청됩니다.
[8/29 다섯째 주](연중 제22주일/루가 14, 1. 7-14)
“자기를 낮추는 사람”
우리 사회의 풍토는 일등만이 최고가 되는 분위기 입니다. 그래서인지 나만 잘되기 위해 주위 사람들을 무시하고 앞질러야만 되는 비복음적 상황을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질타하고 계십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는 서로 존경하고 양보할 줄 알며, 서로를 위해 사랑하고 희생할 줄 압니다. 그러나 내가 속한 삶의 현장을 공동체적인 분위기로 바꿀 수 있도록 보다 적극적으로 노력해야겠습니다.
[9월 복음 묵상]
김기종 요셉(알바트로스/직장인금요미사 봉사자)
[9/5 첫째 주](연중 제23주일/루가 14, 25-33)
“자기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는 각자가 살면서 지게 되는 고통과 어려움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이 십자가를 회피하고 싶어합니다. 각자에게 와 닿는 십자가의 무게는 다를지 몰라도 고통과 어려움은 같을 것 입니다. 행복하다는 뜻의 ‘행(幸)’자는 맵다는 뜻의 ‘신(辛)’자의 머리에 십자가가 얹힌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즉 행복(幸福)은 매운(辛)고통을 겪고, 십자가를 짐으로써 얻을 수 있다는 뜻 같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십자가를 통해 성숙한 신앙인으로 변화 되어가는 은총의 시간(계기)이 되었으면 합니다.
“내 힘들다 ”를 거꾸로 읽어보면 생각과 세상이 바뀌어집니다. -” 다들힘 내 !
[9/12 둘째 주](연중 제24주일/루가 15, 1-10)
“잃은 양 한 마리”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가치관은 잃어버린 양 한 마리 보다는 남아있는 아흔 아홉 마리에 두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모든 일을 할 때 대의(大義)를 위해서 는 소의(少義)를 무시합니다. 일의 과정보다는 결과만을 생각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일 잘하는 사람, 능력 있는 사람, 멋있는 사람, 마음에 드는 사람들 이 중심이 되고, 일 잘 못하고, 능력이 부족하고, 마음에 들지 않고, 힘없는 사람들은 소외가 됩니다. 교회 안에서도 이러한 모습은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우리들이 서 있는 삶의 자리에서 소외 받는 사람(잃은 양)이 없도록 배려하는 마음이 요청 되는 것 같습니다.
[9/19 셋째 주](연중 제25주일/루가 16, 1-13)
“빚진 사람”
한 동안 우리 귀에 많이 들렸던 성가가 생각납니다. “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 속에서 그 사랑 받고 있지요”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넘치도록 많은 사랑을 받은 사람들 입니다. 우리가 받은 사랑은 다른 사람을 위해 이 세상에 내어 놓아야 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자신에게만 갇혀서 다른 사람이나 이웃을 위해 내가 가진 것을 나누지 못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넘치도록 받은 사랑을 나누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은 무엇인가를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오직 사랑만이 인간을 인간 되게 합니다.” (성 아우구스티노 서한)
[9/26 넷째 주](연중 제26주일/루가 16, 19-31)
“부자”
몇 년 전에 한 CF광고에 나왔던 문구로 모든 사람들이 가장 좋아했던 “부-자 되세요!”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부자가 되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 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많은 당첨금이 걸린 로또 복권과 부자가 되는 법에 대한 책들이 많은 사람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들은 물질적인 것에만 모든 가치를 두고 매달리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 하신 부자와 우리가 바라는 부자는 어떠한 모습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돈을 벌어야 사람이 꽃으로 피어나는 시대를 나는 너무나 오래 살아왔다
내가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은 돈을 불태우는 일이다.
돈의 잿가루를 밭에 뿌려서 꽃이 돈으로 피어나는 시대에
다시 연꽃같은 맑은 꽃을 피우는 일이다.”
- 정호승 <꽃과돈>중에서 -
[10월 복음 묵상]
안경수 사도요한(외환은행/직장인금요미사 봉사자)
[10/3 첫째 주](연중 제27주일/루가 17, 5-10)
“그저 해야 할 일을”
참으로 욕심 많은 우리들입니다. 주님께서는 행동과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올바르게 행동하라고 일러주셨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가르침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자기보다 못한 이웃 또한 사랑하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대중매체를 통하거나 길을 걸으며 마주치는 우리보다 못한 이웃에게 우리는 힘이 되어야 합니다. 작은 것부터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찾아서 실천을 해야 합니다. 어떤 이는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은 남을 돕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돕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어려운 사람이 사람다운 삶을 유지하고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느낄 때 사회는 안정되고 안정된 사회에서 우리 삶도 안정되는 법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아마도 주님은 그런 세상을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10/10 둘째 주](연중 제28주일/루가 17, 11-19)
“아홉은 어디 갔느냐?”
우리가 그 아홉 중의 한 사람은 아닌지요. 우리는 가만히 생각해보면 풍요로움과 여유로움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현대인의 스트레스라는 것이 과연 먹고사는 문제에서 느꼈던 조상들의 스트레스와 비교가 될까 생각해 볼 때가 있습니다. 아마도 지금이 덜할 겁니다. 지금 우리의 삶은 예전 임금님도 누리지 못했던 풍요로움 속에 있습니다만 늘 허전하고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고마움을 모르기 때문이 아닐까요. 공기와 같은 주님의 변함없는 사랑도 마찬가지여서 늘 곁에 있기에 고마움을 모르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며 행복하게 살고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고 이러한 행복한 때를 주신 주님께 늘 감사하며 지내야 하겠습니다.
[10/17 셋째 주](연중 제29주일/루가 18, 1-8)
“너무도 성가시게 구니”
가끔은 누군가를 성가시게 굴어야 하는 때가 있습니다. 좋은 뜻을 가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꾸준함과 노력을 말씀하십니다. 노력하지 않고 무언가를 얻으려 하는 것은 참된 구함이 아니지만 가끔은 너무 힘들어서 노력에 비해 많은 것을 얻고자 구하기도 합니다. 사람의 일을 다 하고 하늘의 뜻을 기다려야함을 알면서도 내 일을 다 하지 않고 열매를 기다리는 경우도 많습니다. 주님께서는 선하셔서 가끔은 큰 열매를 주시지만 우리가 교만해질까봐 턱없이 작은 열매도 주십니다. 그러나 교만함이 다하면 주님은 다시 큰 열매를 주실 것을 알기에 오늘도 성가시게 주님께 구합니다. 주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 이루어지도록.
[10/24 넷째 주](연중 제30주일/루가 18, 9-14)
“낮추면 높아질 것이다”
세상은 약하고 양보하는 사람에게만 힘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힘 있고 늘 가지려는 사람이 더 힘들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세상에는 공짜라는 것이 없어서 힘이나 재물이 있으면 적이나 도둑이 그 곁에 늘 있게 마련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낮추고 양보를 하면 주위에 친구와 도움을 주려는 이들이 생기는 것도 알았습니다. 자꾸 세상에서 던지는 돌에 맞아 깨져서 뾰족한 모서리를 가지게 돼도 우리가 낮추면 그 뾰족함이 무뎌져서 남과 부대낄 때 상대에게 상처를 주지 않음을 우린 압니다. 이 놀라움이 주님께서 이 세상에 남겨주신 진리라고 다시 말씀을 통해서 알려주십니다. 낮춤은 비굴함이 아니라 내게 맞는 자리를 찾아가는 것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10/31 다섯째 주](연중 제31주일/루가 19, 1-10)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우리는 경쟁의 삶 속에서 상대의 단점을 많이 찾아냅니다. 단점을 찾아서 헐뜯는 것은 내가 노력하지 않고 남보다 앞설 수 있는 좋은 방법입니다. 그래서 같이 낮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상대의 장점을 찾아 칭찬해주고 상대가 잘되게 도와주면서 내 노력을 통해 그보다 앞설 수가 있다면 상대와 나는 같이 높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상대와 나는 친구도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은 쉽게 평가할 수 있는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그래서 자신을 이해해주는 사람이 곁에 있음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인 것입니다. 상대의 단점을 꼬집고 상대에게 내 단점을 꼬집히지 않기 위해 애쓰는 못난 모습보다는 서로 칭찬하는 모습을 주님은 바라고 계실 것입니다.
[11월 복음 묵상]
안경수 사도요한(외환은행/직장인금요미사 봉사자)
[11/7 첫째 주](연중 제32주일/루가 20, 27-38)
“살아 있는 자의 하느님”
예수님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우리 신자들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죽어서 하늘나라에 가기 위함이라고들 합니다. 그러나 하늘나라는 우리의 목적이 아니라 참 삶을 살고 난 후에 얻게 되는 결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에 갈 수 있는 방법, 참 삶을 알려주셨을 뿐이고 우리는 그 방법을 따라 행하고자 노력하는 것뿐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죽어서 하늘나라에 가기만을 위하는 죽은 자의 하느님이 아닌, 지금 살아 있는 자의 하느님이심을 말씀하십니다.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순간, 이 땅위에 하느님의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알려주시는 너무나 명료하고 보편타당한 말씀이 우리의 귓전을 늘 때립니다. 이 땅위에 하느님의 나라를 만드는데 이 몸을 도구로 써 주시기를 빕니다.
[11/14 둘째 주](연중 제33주일/루가 21, 5-19)
“너희가 나의 복음을 증언할 때이다”
우리에게는 참으로 버거운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가진 자들이 더 갖겠다고 없는 이들의 것을 빼앗고, 함께 위로하며 살아야 할 것 같은 가족들과 불화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영원히 우리 곁을 떠나기도 합니다. 우리에게는 늘 재난이 있게 마련입니다. 우리는 평화로운 시절에 주님의 겉모습을 많이 보게 됩니다. 주님의 영화로움, 전지전능하신 능력, 자비하심 등등. 그러나 우리가 진정 어려움에 빠졌을 때 비로소 주님의 내면을 보게 됩니다. 우리와 함께 슬퍼하시는 모습과 우리에게 위로를 주시려는 모습. 재난 속에서 만나는 주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눈을 뜨게 해줍니다. 이 때 우리는 그 재난을 재난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슬기롭게 극복해 나갑니다. 바로 우리가 복음을 듣고 깨달아 증언하게 되는 순간입니다.
[11/21 셋째 주](연중 제34주일/루가 23, 35-43)
“낙원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예수님 곁의 죄수 중 한 명은 마음을 올바르게 가져 주님과 함께 처음으로 낙원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많은 선인들의 희생으로 우리는 이미 낙원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마음 놓고 주님을 이야기하고 미사를 드릴 수 있으니까요. 역사를 통해 이런 날이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죽음이 있었는가를 배웠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낙원은 우리가 얻은 것이 아니라 그 많이 이들이 만들어서 우리에게 물려준 것입니다. 우리가 이 낙원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서 후손들에게 물려줘야하는 이유도 이런데 있는 것이고요. 오늘하루 나는 이 낙원을 감사하게 살았으며 깨끗하게 유지했는지 되돌아봅니다. 그렇지 못했다면 내 잘못을 주님께서 깨닫게 해주시기를 기도드립니다.
[11/28 넷째 주](대림 제1주일/마태 24, 37-44)
“깨어 있어라”
주님의 가르침을 늘 듣고 살지만 우리는 늘 깨어 있지는 못합니다. 가끔 화도 내고, 남에게 상처 주는 말도 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잊어버리기도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스스로를 나약한 인간이라며 주님께 자비를 구합니다. 그러면 주님은 우리에게 자비를 내리십니다. 부족한 우리를 늘 용서해주시는 주님은 참으로 우리의 보호자시라는 생각이 듭니다. 허물이 많고 늘 깨어 있지 못하는 우리가 이토록 기쁨 속에 살 수 있다니 말입니다. 사랑 중에 가장 큰 사랑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주님께서 주신 내 자신을 있는 그대로 온전히 사랑하는 것 말입니다. 자기 사랑이 넘쳐흘러 그 사랑이 남에게 전달될 때 우리는 진정 기쁨을 느끼고 주님의 제자가 됨을 느낍니다. 주님께서 주신 제 몸과 제 능력, 제 환경을 온전히 사랑하며 받아들입니다. 주님 영광 이루소서.
[12월 복음 묵상]
안경수 사도요한(외환은행/직장인금요미사 봉사자)
[12/5 첫째 주](대림 제2주일/마태 3, 1-12)
“하늘 나라가 다가왔다”
하늘나라는 늘 우리 앞에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의 삶을 회개하면 우리는 하늘나라로 들어가게 됩니다. 세례자 요한은 구원은 힘들게 얻는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깨고 누구나 회개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하면서 사람들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습니다. 우리는 참 삶을 사는 것이 너무 힘들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사실 참 삶은 누구나 실천할 수 있는 쉬운 것들입니다. 쉬운 일들을 욕심 때문에 못하는 것이 우리가 힘들다고 여기는 이유겠지요. 묵상과 기도로 우리의 욕심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예수님께서 일러주신 참 삶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보고 내가 할 수 있는 것 중 가장 작은 것을 실천하면 하늘나라의 문은 열린 것입니다.
[12/12 둘째 주](대림 제3주일/마태 11, 2-11)
“무엇을 보러 광야에 나갔더냐”
우리가 광야에 나갈 때는 무언가 큰 기대를 하며 나갈지도 모르고 어쩌면 호기심으로 나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광야에 나간 우리들 중 어떤 이는 세례자 요한의 누더기 옷만 보았을 것이고, 어떤 이는 세례자 요한에게서 구원의 메시지를 들었을 것이고, 어떤 이는 요한을 만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들 각자는 똑같이 광야에 나갔지만 가지고 돌아오는 것은 다 다릅니다. 가지고 오는 것은 우리들 자신에게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같은 성서를 보면서 너무도 달리 해석하는 많은 사람들을 봅니다. 그들의 마음이 그렇기에 성서의 말씀이 그들 각자에게는 그렇게 들릴 것입니다. 우리가 각기 달리 보는 성서라도 그 안에 있는 진리는 놓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으로 성서를 이해해야 합니다. 신에 대한 잘못된 사랑만으로 다른 인간을 고통스럽게 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12/19 셋째 주](대림 제4주일/마태 1, 18-24)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임마누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어리석은 세상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진리를 전하고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셨으며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우리와 함께 계시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과거와 같은, 그러나 새로운 말씀으로 우리에게 기쁨을 주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영광스럽고 찬란한 탄생은 아니었다고 해도 그분의 삶은 참으로 영광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이전에 천사의 말을 듣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은 요셉의 신앙과 순종에도 우리는 머리를 숙이게 됩니다. 우리는 일상을 통해 들려오는 천사의 말을 듣고 그대로 순종하고 있는지 생각해 봅니다. 우리의 십자가를 기꺼이 순종하며 지고 있는지 생각해 봅니다. 내 이웃의 빈틈을 나의 사랑과 순종으로 메우고 있는지 생각해 봅니다.
[12/26 넷째 주](성가정축일/마태 2, 13-15, 19-23)
“아기와 아기 어머니를 데리고”
우리는 요셉을 통하여 참된 아버지와 남편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가족이 함께 삶을 영위하며 자기의 욕심이 아닌 천사의 말씀대로 살았다는 것 말입니다. 우리도 가정의 한 구성원으로서 천사의 말씀대로 살아가며 기쁘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가족이 기쁘게 살아가는 방법 중 핵심은 서로 인정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남편의, 아내의, 자식의 살아가는 방식을 인정해주는 것이죠. 주님의 뜻에 거스르는 일이 아닌 다음에는 서로 인정하는 것이 기쁘게 살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이 서른 즈음에 공생활을 시작하셨던 예수님을 요셉과 마리아께서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님처럼 우리 가족이 누군가에게 자신만의 삶으로 구원을 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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